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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철 논설위원

[세풍] 지렛대가 많아야 일하기 쉽다

문재인 정부가 요즘 안팎으로 바쁘다. 4월27일 이후 한달남짓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 국면에서 문 대통령은 '당사자'로, 또 '중재자'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김정은과 두차례나 얼굴을 마주했고, 미국으로 날아가 트럼프와 나란히 앉았다. 그렇지만 몇 시간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엎치락뒤치락하는 '비핵화' 협상은 문 대통령에게도 어려운 시간표다. 그러나 문재인의 외교(外交)가 '한반도 평화'에 초점이 맞춰진 이상 반드시 풀어야할 과제다.트럼프의 전격적인 북미 회담 취소에서 보듯 무슨 일이든 변수가 있게 마련이다. 고산준령을 오르는데 늘 맑은 날씨만 바랄 수 없지 않나. 내달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입에 내뱉고 돌아서자마자 반전의 스프링이 작동한 것도 대사(大事)의 속성이다. 잠시 포트홀(Pothole)에 빠졌던 수레바퀴가 다시 구르기 시작한 것은 어떻든 다행한 일이다. 험담에 열을 올리던 미'북 외교 실무자들이 판문점으로, 싱가포르로 바삐 움직이며 회담 준비를 서두르는 것도 보기에 전혀 나쁘지 않은 장면이다.이쯤에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정책이 아무런 문제 없이 제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문 대통령은 '한반도 운전자론'을 강하게 내세웠다.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의 당사자라는 인식에서다. 하지만 핸들을 쥐었다고 내가 생각한 경로나 계획대로 차가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차가 매끄럽게 잘 굴러가도록 돕는 윤활유의 역할도 운전자의 존재나 위상 이상으로 중요하다. 낡고 녹이 낀 기계일수록 질 좋은 윤활유가 필요한 법이기 때문이다.문재인 정부는 이제까지 한반도 긴장 완화와 비핵화 문제가 매끄럽게 풀리도록 자리를 깔고 테이블을 놓는데 나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목표를 의식한 나머지 간혹 무리수를 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산 정상에 오를 때 줄곧 오르막만 오르면 된다는 착각과 마찬가지의 경우다. 더 높은 곳에 가기 위해서는 내려가거나 돌아가는 길도 숱하다.미국은 남북 평화 잔치에 빼놓을 수 없는 지렛대다. 중국도 한반도 문제에 있어 변수이기는 하나 지금은 먼지만 일으키는 고약한 참견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일본은 잔치를 망치려고 줄곧 비를 뿌려대는 존재감 약한 훼방꾼으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남북 평화라는 공감대가 아무리 넓고 두터워도 주변에서 얼마나 큰 박수를 쳐주는가도 중요하다. 지금은 중국과 일본이 눈밭에 뿌려진 굵은 모래와 같은 존재일지 모르나 앞으로 그들이 한반도 평화 정착에 보태야할 손이라는 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지렛대가 많아야 힘이 덜 들고 일하기도 쉬운 법이다.기술자의 가방에는 수많은 연장이 들어 있다. 어떤 돌발 변수에도 너끈히 일을 풀어가기 위해서다. 문 대통령의 가방에는 과연 쓸모 있는 연장이 얼마나 될까.국민이 문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한반도 평화라는 외교무대를 흥행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국민은 어설픈 프로모터가 아니라 냉정한 중재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반도 평화라는 소명의식과 역사적 책임감 못지 않게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내는 세련된 기술자 말이다. 복잡한 원리나 어려운 기술을 쓰고도 실제 결과는 간단하거나 쓸모가 별로 없는 '골드버그 머신'(Goldberg machine)이 아니라 단순한 원리나 구조로도 복잡한 기술을 구현해내는, 유능한 매치메이커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018-05-29 05:00:00

[세풍] 체제는 스스로 보장하는 것이다

미국은 김정은에게 비핵화의 대가로 '체제 보장'과 '경제 성장'을 제시한다. 김정은 체제를 물리적으로 무너뜨리지 않겠으며, 빈곤 탈출을 돕겠다는 것이다. 인민을 굶기는 체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전자가 '군사적 체제 보장'이라면 후자는 '경제적 체제 보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이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한 비핵화'를 수용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나 '체제 보장'은 떨치기 힘든 유혹임은 분명하다. "이밥(쌀밥)에 고깃국"과 "비단옷에 기와집"이라는 선대(先代)의 약속이 약속으로만 존재하는 현실에서 '경제적 체제 보장'은 특히 그럴 것이다. 그 방안으로 미국이 들고나온 것이 '북한판 마셜플랜'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유럽 재건을 위해 1948∼1951년 서유럽 16개국에 130억달러(현재 가치로 5천800억달러)를 쏟아부었던 '유럽부흥계획'과 같은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 재정이 투입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그 의도는 같다. 문제는 '북한판 마셜플랜'이 제대로 작동할 것이냐이다. 물론 '완전한 비핵화'의 실현을 전제로 한 질문이다. 그 답을 알려면 '마셜플랜'이 왜 성공했는지 봐야 한다. 마셜플랜의 성과는 눈부시다. 1947∼1951년 서유럽의 통합 국민총생산(GNP)은 30% 이상 증가했다. 산업 생산은 전쟁 전인 1938년보다 41% 증가해 목표치 30%를 초과했다. 서유럽의 경제는 전쟁 전 수준 이상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서독은 발군(拔群)이었다. 1940∼1959년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등 서유럽 주요 8개국 중 서독의 1인당 GNP 평균 성장률은 6.3%로 가장 높았다. 놀라운 것은 서독이 받은 지원금이 영국과 프랑스의 절반 정도였는데도 이런 성과를 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미국의 달러가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마셜플랜이 시작된 1948년 서독의 불변가격 기준 자본스톡 즉 생산 능력은 전시 파괴에도 전쟁 전인 1936년보다 10% 높은 수준이었다. 양질의 노동력도 풍부했다. 나치 지배하에서 일부가 해외로 빠져나갔지만, 과학기술 인력 대부분은 독일에 남아 있었다. 여기에 동독에서 탈출한 고급 인력도 가세했다. 원조보다 독일 본래의 잠재력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얘기다.('경제사 산책', 양동휴) 더 근본적으로는 확고한 시장경제 체제였다는 사실이다. 서독의 첫 경제장관 에르하르트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정부의 개입과 감독을 허용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제의 자율성을 지향하는 체제였다. 이 중 어느 것도 북한에는 없다. 무엇보다 시장경제가 아니다. '북한판 마셜플랜'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은 비핵화의 대가로 김정은이 내밀 청구서가 2천1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은 자국민의 세금은 쓰지 않겠다고 했으니, 얼마가 됐든 남한 국민이 그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할 것이다. 남한 납세자가 지갑을 열려 할지도 의문이지만 더 근본적 문제는 그렇게 해서라도 '북한판 마셜플랜'이 성공할 것이냐이다. 북한의 체제 변화가 없이는 어려울 것이다. 선진국의 원조가 한국 등 극히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저개발국을 빈곤에서 구해내지 못한 실패가 보여주듯이 경제는 돈만 쏟아붓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결국 '경제적 체제 보장'은 누가 해준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보장하는 것이다. '북한판 마셜플랜'이 장밋빛 허구로 보이는 이유다.

2018-05-22 00:05:01

[세풍] 남북 두 집이 갈 길

우리는 이 땅의 역사에서 여럿 망한 나라를 봤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의 패망이 그렇다. 동전 두 쪽처럼 망국과 함께 통일(統一)신라의 등장과 고려, 조선의 건국과 아울러 조선이 이민족에게 35년간 빼앗기는 뼈아픈 국치도 겪었다. 이어 되찾은 나라, 남북 강산의 허리가 잘리는 아픔의 분단(分斷)도 당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되풀이되는 나라 흥망에 대한 까닭도 살폈다. 특히 국치와 분단은 이민족이 끼어드는 바람에 빚어진 불행인지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더욱 그 원인을 따져야만 했다. 우리끼리 주고받던 이 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그리고 미국·옛 소련 탓에 국치와 분단의 국운을 맞았으니 불면의 날들을 보내면서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밝혀진 바는 많고 넘친다. 분명한 답은 먼저 백제와 고구려의 망조(亡兆)에서, 또 '세 땅을 한 집으로 합친'(合三土爲一家) 통일신라가 고려에 자리를 물려준 데서, 그런 고려가 다시 조선으로 바뀐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분열과 사회 결속력 및 지도력 실종, 부패 등이었다. 정치적 분열과 백성의 결속력 붕괴는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나당(羅唐) 연합군과 운명을 건 싸움 앞에서 벌어진 의자왕 조정의 분열, 충신의 투옥과 유배, 갈 곳 잃은 신하와 백성의 백제가 그랬다. 연개소문 세 아들의 권력 다툼과 적진 투항 그리고 적 앞잡이 행세로 자중지란에 빠진 최강의 고구려도 같았다. 신라 역시 잦은 왕권 쟁탈전 끝에 나라를 고려에 바쳤다. 고려, 조선의 운명도 앞선 왕조와 비슷했다. 일제 패망 뒤 광복 때 이민족의 남북 진출은 줄곧 지킨 이 땅의 '한 집'을 남북 '두 집'으로 기어코 가르고 말았다. 그렇게 70년이 흘렀다. 그리 갈라진 두 집이 다시 한 집으로 합치기 위한 부단한 노력 끝에 '전환의 2018년'을 맞았고, 이 땅을 둘러싼 변화의 정세가 나라 안팎으로 촌각을 다투며 긴박하다. 마냥 두 집이냐, 아니면 한 집을 향한 새길로 가느냐의 즈음이니 더욱 관심이다. 먼저 나라 밖이다. 6월 12일, 이 땅의 역사 물줄기를 바꿀지도 모를 싱가포르의 '세기적 만남'이 이뤄진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북핵 담판을 위해서다. 이달 22일엔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있다. 9일에는 한일중 정상회의, 7~8일 북중 정상회담, 4월 27일에는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역사적인 만남도 있었다. 지금까지 분위기는 긍정적이라 세계 이목이 집중된다. 문제는 나라 안이다. 특히 정치가 문제다. 6·13 지방선거 탓이겠지만 진흙탕 싸움이다. 공격의 입도 거칠다. 4월 닫은 국회 문은 5월에도 열릴 기미조차 없다. 걸림돌은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의 특검이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정치력 부재 탓이 크다. 대통령 측근인 김경수 국회의원이 연루된 만큼 그를 구하려 국회를 놀리고 국민을 무시하며 오만을 부리고 있다. 높은 대통령 지지도와 야당 덕에 반사로 얻은 상당한 정당 지지도가 무기임이 틀림없다. 서로의 엇갈린 이해로 남북이 옛날처럼 한 집으로 되는 것을 결코 반기지 않을 나라 밖 '맹수'의 주변 강국 틈바구니 속에서 남북문제 해결에 동력이 될 국민적 지지와 합의로 나라 밖을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무한 책임인 여당이 이러니 그저 국민이 딱할 뿐이다. 늦기 전에 여당은 국회를 열고 특검 수용과 함께 김경수 의원과의 질긴 끈을 끊고 모처럼 맞은 남북 모두에 도움될 기회를 살릴 지혜와 힘을 모을 때다. 이 땅 밖 이민족의 강국은 결코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역사가 그랬다.

2018-05-15 00:05:00

[세풍] 아! 판문점

우리 조상들은 태생적으로 착했다. 백성을 매몰차게 버린 군주조차 민초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한양을 버리고 파천길에 오른 선조에게도 백성들은 충(忠)을 다했다. 파주를 지난 선조의 어가(御駕)를 임진강이 가로 막아섰다. 임금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자기 집 대문을 뜯어내 널빤지 다리를 놓았다. 이후 이 마을은 '널문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널빤지 문으로 다리를 만든 마을'이라는 뜻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전란(戰亂)으로 임금의 피란 기억을 간직한 곳 널문리는 그로부터 359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1951년 6'25전쟁 휴전을 준비하던 UN군은 개성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을 회담 장소로 정했는데 그곳이 바로 널문리이다. 널문리에 있던 작은 가게 앞 콩밭에 천막을 쳤는데 장소 이름을 영어와 중국어로 옮기기가 마땅찮아 쓴 표기가 '판문점'(板門店'널문리 가게)이다. 판문점은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의 아픔과 대치 상황을 침묵과 긴장감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지금의 판문점은 널문리 가게로부터 남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자리해 있다. 비무장지대(DMZ) 접경 지역에 동서 800m, 남북 600m에 걸친 장방형 땅인데 판문점의 공식 명칭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다. 세계의 첫 이목을 끈지 67년이 흐른 지금 판문점은 다시금 세계 역사의 큰 분수령 위에서 주목받고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남북 정상회담이 이곳 판문점에서 열렸다. 북한 핵무기 개발로 인한 군사적 충돌 위험이 백척간두에 처한 가운데 남북 정상회담 장소로서 판문점이 전해주는 의미는 너무나 각별했다. 남북 정상회담은 들어가는 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북미 정상회담이다.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싱가포르와 판문점 두 곳이 유력하다는데, 역사성으로 보나 정치적 효과로 보나 판문점이 우월해 보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판문점을 선호한다는데, 백악관 보좌진들과 미국 국무부'국방부 관료들이 이를 뜯어말리고 있다고 한다. 북미 정상회담 장소와 날짜가 결정됐다고 해놓고도 미국이 발표를 늦추고 있는 것은 이와 관련한 갈등이 미봉합 상태이며 최종 결정에 변수가 아직 남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유추를 하게 한다. 회담 결과만 좋다면야 싱가포르이든, 판문점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혹여나 북미 정상회담 추진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미국 주류 세력들의 심사가 '판문점 비토'로 나타나고 있다면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를 뺀 대다수 미국 정치권 및 군산복합체와 한반도 주변 열강들이 남북 평화체제 구축을 마뜩잖아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더구나 북한 내부에도 평화체제 구축에 반대하는 군부 세력들이 있을 텐데 김정은이 이들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북핵 폐기와 남북 평화 도래는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어차피 북핵의 완전한 폐기가 성사되지 않는다면 한반도는 전쟁의 격랑 속에 휘말릴 공산이 크고 그 완충지대도 날로 줄어들고 있다. 평화 체제 구축이 선택지가 아니라 반드시 가야 할 목적지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왕지사 트럼프와 김정은이 회담한다면 판문점에서 만나는 그림을 그려본다. 현실적으로 난관이 첩첩산중인 북핵 폐기 이슈에서 북미 판문점 회담은 하나의 푸른 신호등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2018-05-08 00:05:04

[세풍] 한국당 '폭망론'

얼마 전 지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왜 그렇게 자유한국당을 미워하느냐?"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한국당을 줄곧 비판해온 필자의 칼럼을 꼬집어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요즘 한국당은 완전히 내려앉았는데 불쌍하지도 않느냐. 이제는 그만 욕해도 되지 않느냐…." 필자도 마음 약한 언론인인지라 한국당의 궁색함을 어찌 모를까마는,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연민의 정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다소 냉정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당은 폭삭 망해야 합니다. 집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한국당이 요즘처럼 어정쩡하게 살아 있으면 예전과 다름없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분에게 한국당이 과거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6월 지방선거 '공천 파문'이라 말씀드렸다. 이를 보면 한국당이 왜 폭삭 망해야 하는지, 현재의 한국당 국회의원들이 어떤 마음으로 지역민을 대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했다. 대구경북은 한국당에게 마지막 남은 보루라고들 한다. 대구경북이 없으면 한국당은 뿌리 없는 '부유(浮遊)정당'에 불과하다. 하나뿐인 귀한 자식이라면 어르고 달래고 잘 돌봐야 마땅하지만, 한국당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겉으로는 잘 돌볼 것처럼 말을 앞세우면서도, 뒤로는 천진난만한 아이를 볼모 삼아 자신의 배 속을 채우길 서슴지 않는다. 대구시장'경북지사 광역단체장 후보는 마지못해 경선을 치렀지만, 기초단체장'지방의원 후보는 전략공천이라는 이름하에 해당 국회의원 맘대로 공천을 했으니 엉망진창이 됐다. 대구'경북 곳곳에서 '공천 파문'이 빚어졌지만, 한국당은 반성조차 없고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몇몇 곳은 기초단체장 후보로 적합한 인물이 공천됐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곳에서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 공천됐다. 나이 많고, 공직 경험이 없고, 과거가 깨끗하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문제지만, 단체장으로서 제대로 행세할지 미덥지 않은 후보가 여럿이다. 공천자보다 경력, 학력이 앞서고 일도 더 잘할 것 같은 이들은 탈락했으니 공천 심사라는 것이 왜 필요한가. 공천장을 거머쥔 시장'군수'구청장 후보의 면면을 보면 해당 국회의원과 친분이 상당한 듯했다. 해당 국회의원으로서는 공천자가 '꼬봉'처럼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하고, 재산까지 많으니 금상첨화일 것이다. 국회의원과 공천자, 양자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 향기로운 관계는 아닐 것이다. 주민을 위한 지방자치가 아니라, 국회의원의 탐욕과 잇속을 채우기 위한 지방자치인지 헷갈리는 상황이다. 한국당이 지금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였다면 과거와는 달라져야 하는데도,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어떻게 이런 짓거리를 하면서 대구경북에서 지지를 호소할 수 있는지 양심불량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홍준표 대표가 전략공천 카드를 들먹일 때부터 이런 작태를 예상하고 의도한 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대구경북 국회의원들에게 공천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대신, 자신의 당내 지지를 확보하려는 꼼수가 아니라면 요즘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인가. 지역민은 바보가 아니다. 한국당의 부패와 탐욕은 머지않아 심판받을 것이다. 얼마 전 한국당이 회의실에 '그래서 우리는 망했다'는 문구를 내걸었지만, 이제는 좀 바꿔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대구경북에서도 망했다."

2018-05-01 00:05:00

[세풍] 부(富 )도 권력이라는 착각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이 그제 딸 조현민 전무의 '갑질' 논란과 관련해 사과문을 냈다. 축약하면 '조현아·현민을 그룹 내 모든 직책에서 즉시 물러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조 회장이 "모든 게 제 불찰이자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하지만 여론은 못내 차갑다. 대주주 일가의 고질화된 폭언과 갑질 등 안하무인식 패악질을 바닥까지 조사해 단단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한 번은 속아도 두 번을 속을까'라는 국민적 분노다. 지난 수십 년간 거침없던 부(富)의 위상이 위태해졌다. 상당수 한국의 부자들이 제멋대로 휘둘러온 부정한 권력과 횡포에 시민사회가 더는 참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고 있어서다. 부를 대물림한 이들의 까닭없는 욕설과 발길질에 맞서 분노의 돌팔매질을 선택한 것이다. 서슬 퍼런 정치권력도 뒤엎는 마당에 그깟 돈으로 쌓아올린 성채가 대수냐는 판단이 99% 보통의 사람들 심리를 관통한다. 그런 점에서 연일 터져 나오는 조씨 일가의 추태는 재벌을 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변곡점이다. 단순히 부자들 횡포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재벌 정서 차원이 아니다. 남보다 많이 가졌다는 이유로 주변의 보통 사람들을 '욕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마구 대하는 시대착오적 졸부 근성에 대한 저항이자 '을·병의 반격'이다. 상식과 동떨어진 부의 개념이 권력으로 변질되고, 기업을 사유화한 것도 모자라 공법(公法) 위에 군림하면서 마침내 역풍을 맞게 된 것이다. 참다못한 대한항공 전·현직 직원들이 '갑질 제보 채팅방'을 만든 이유다. 개설 일주일 만에 1천 명에 가까운 사람이 몰렸다. '대한항공 사명 교체'와 '국적기 지위 박탈' 등 청와대 청원에 10만 명 이상 참여한 것도 심상찮은 조짐이다. 이는 부자들의 비뚤어진 선민의식, 특권의식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반발이다. 일상이 되다시피한 일부 재벌 일가의 횡포에 역겨움을 느끼는 국민이 그만큼 많다는 소리다. 지난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사례는 도화선이다. 시민사회가 본격적으로 분노의 심지에 불을 댕긴 출발점이다. 부의 힘이 선출된 정치권력을 능가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니 오죽했을까. 쫓겨난 전직 대통령과 달리 이 부회장은 고작 353일 만에 수의를 벗었다. 이런 결과만 놓고 보면 합리적인 사고와 상식에 기초한 민중의 호흡이 더욱 가빠지고 있음을 감지할 필요가 있다. 권력은 부의 보상물이 아니다. 권력은 대중이 인정한 권위의 소산이자 좋은 리더십을 뒷받침한다. 만약 이에 의탁하지 않고 제 손으로 만든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인성도 능력도 안 되면서 부를 대물림한 이들이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벌이는 제멋대로의 행동은 힘도 권위도 아닌 반사회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오너 리스크'가 재벌만이 아니라 중소기업에까지 만연했다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무분별한 권력은 스스로를 망치는 흉기임에도 우리나라 부자들은 이에 매우 둔감하다. 분명한 사실은 절대왕정 시대에도 잘못된 권력은 꼭 치리(治理)했다는 점이다. 시민사회가 권력의 주체인 현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민란(民亂)은 결단코 우연히 일어나는 사변이 아니다. 벌어지는 일과 현상에 대한 소문만 듣고도 누구나 궐기의 이유와 정당성을 갖다댈 만큼 간단하고 명확하다. 지금 기운을 키우고 있는 을의 반격이 당연한 이유다. 무서운 것은 민란은 반드시 단호한 결과와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는 동서양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민중이 일으킨 물결은 무소불위의 권력이라 하더라도 가차없이 휩쓸고 지나갔다. 국민의 눈 밖에 난 몇몇 재벌이 이제서야 이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면 늦어도 한참 늦다. 평소 하던 버릇대로 물컵을 던지고 욕하고 악쓰던 버릇이 열길 높이의 해일로 되돌아올 줄 어찌 알았을까. '사악한 부'에 대한 을의 되갚음이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2018-04-24 00:05:01

[세풍] 이런 꼴 보려고 촛불 들었나

'김기식 사태'는 몇 가지 중요한 판단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국회의원의 잘못된 행동이 '관행'을 따른 것이라면 문제 삼지 않아도 되는지, 그 잘못된 행동이 주요 직위를 맡아서는 안 될 정도의 하자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도구로서 '국민의 눈높이'와 '평균적 도덕성'의 기준은 어떤 것이고 그것은 누가 정하는지, 그 행동이 위법이라는 '객관적 판정'을 내리는 주체는 누구인지 등이다. 청와대의 대답은 명쾌하다. 피감기관의 돈으로 외유성 출장을 다녀온 김기식의 행동은 당시 국회의원들의 관행이었으며, 국민의 눈높이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해임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으며, 김기식의 도덕성이 일반적 국회의원의 평균적 도덕감각을 밑돌지는 않으며,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오만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해석'과 '판정'의 독점이다. 청와대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엿보게 한다. 하나씩 따져보자. 국민의 눈높이에 부합하지 않지만, 관행이었으면 과연 문제가 없는 것인가? 청와대는 이런 '해석'을 합리화하기 위해 19'20대 국회에서 김기식과 같은 경우가 167차례나 됐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모두 그랬는데 왜 김기식만 문제 삼느냐는 소리다. 그러나 지금은 관행이란 이유만으로 관행이 용서되는 시대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부터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다. 대통령부터 새로워지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놓고 김기식에 대해서는 "당시 국회의 관행이었다면 야당의 비판과 해임 요구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한다. 이는 심각한 자기 부정이다. 과거 정부보다 더 도덕적이라는 문재인 정부의 자부(自負)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문 정부 식으로 말하면 김기식의 과거 행적은 적폐다. 그런 적폐를 관행이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문제 삼지 말라는 것은 '도덕적'인 문 정부가 할 소리는 아니다. '적폐 진영'과 한통속이라는 자인(自認)이기 때문이다. 이런 소리 들으려고 '촛불'들이 촛불을 들진 않았을 것이다. 잘못된 행동이라도 용인될 수 있는 국민의 눈높이와 평균적 도덕성 기준에 이르면 더 할 말을 잃는다. 국민의 눈높이와 국회의원의 평균적 도덕성에 비춰 김기식의 행동은 문제가 없다는 청와대의 언급은 청와대가 문제가 없다고 하면 정말로 문제가 없는 것이란 소리다. 국민의 눈높이도 국회의원의 평균적 도덕성도 청와대가 정한다는 오만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누가 그런 자격을 줬나? 이렇게 하라고 '촛불'들이 촛불을 들었을까? 국민의 눈높이는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추상적 실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구체적 측정은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편에게는 낮추고 상대편에게는 높이는 이중 잣대로 이용되기 십상이다. 여론조사는 이런 위험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다. 물론 여론도 시시각각 변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론조사는 국민이 생각하는 국민의 눈높이를 구체적 수치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는 분명히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김기식의 사퇴 찬성은 50%를 넘었다. 청와대의 '국민의 눈높이'와 국민의 '국민의 눈높이'는 이렇게 다르다. 오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기식이 법을 위반했는지도 청와대가 판단했다. 조국 민정수석은 김기식의 외유성 출장이 '공적인 목적의 적법 행위'라고 했다. 조 수석이 판사라도 되나? 실소가 나오는 것은 이렇게 적법 판결을 내려놓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적법 여부의 유권해석을 의뢰했다는 점이다. 조 수석의 판결이 실수라는 것인가 아니면 김기식 카드를 접기 위한 출구작전인가? 어쨌든 이런 비상식을 보려고 '촛불'들이 촛불을 든 것은 아닐 것이다. 청와대 각 비서관실에는 문 대통령이 지난 2월 5일 선물한 '춘풍추상'(春風秋霜) 액자가 걸려 있다고 한다. 춘풍추상은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줄인 말로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야 하고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가 빙긋이 웃는 듯하다.

2018-04-17 00:05:00

[세풍] 평창 체육, 남북 음악, 다음?

'거칠게 날뛰며, 젖을 빨려 하는/ 어린 새끼를 걷어차고 만다/…/ 젖을 먹지 못해 안타깝게 사그라드는/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마두금 연주가 시작된다/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애잔하게 흐르는 음악/ 어미가 차츰 조용해지며 두 눈이/ 잔잔해지더니 큰 눈망울 가득 눈물이 고인다/ 가만히 젖을 내어주는 어미/ 실컷 젖을 먹고 난 새끼/ 서로의 눈빛이 따뜻하다.'(김안려, '마두금 연주에 눈물 흘리는 어미 소') 몽골 전통악기로, 말머리 모양의 마두금(馬頭琴)은 두 줄 현악기이다. 우리 해금과 같은 계통이다. 소리는 애절하다. 맑은 영혼이 깃든 듯하다. 시인의 노래처럼 새끼를 거부했던 어미 소조차 눈물 흘리게 만들지 않는가. 게다가 새끼 낳을 때 겪은 지독한 산고(産苦) 탓인지 아예 젖을 물리지 않았던 어미 소가 기꺼이 젖을 내주지 않는가. 비슷한 시도 있다. 김창근 시인의 '마두금 소리'이다. 다만 소 대신 낙타가 등장하고 어미 낙타의 마음을 바꾼 것이 마두금 소리와 낙타 새끼의 울음소리일 뿐이다. '몽골의 전통악기 마두금은 품고 있지/ 초원을 휩쓰는 바람 소리, 말발굽 소리/…/ 지독한 산고 끝에 새끼를 낳은 탓에/ 젖마저 물리지 않는 비정한 어미 낙타도/ 끝내는 눈물 흘리게 하는 새끼 낙타의 울음소리/ 아 저, 소리의 여음이나 닮을 수 있으려나/….' 음악은 이런 모양이다. 말 못 하는 소, 낙타조차 울리고 잃어버린 모성(母性)의 감정도 되찾게 하니. 하물며 사람이야. 특히 우리 민족은 예부터 음악을 좋아했으니 오죽할까. 음악으로 이 땅의 옛 사람이 하나 된 기록은 널렸다. 이제 세계가 알 정도다. 지구촌에 퍼진 음악 한류(韓流)는 바로 우리가 음악을 아끼고 즐기고 음악으로 하나 되는 민족임을 밖으로 드러낸 한 사례이다. 나라 안으로 따져도 같다. 옛 왕조를 꿰뚫어 음악 정책이 중시됐던 역사가 그렇다. 특히 조선 세종 왕이 유명하다. 음악을 아낀 선조로 그를 넘을 이는 없을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음악을 좋아했고, 퍼뜨렸고, 함께 즐겼다. (음악) 연회로 신하'백성과 소통하기 등 뭇 음악 정책을 보면 '지음'(知音) 군주라 할 만하다. 심지어 '온천 행사의 머무는 곳마다 악공들이 음악을 울리고, 목욕 때는 담장 밖에서 연주했고, 인근 백성들이 거리에 넘쳤다'고 했으니 말이다. 음악으로 위 아래 하나 되기처럼, 음악을 통해 남북이 하나 되려는 일이 남북 강산에서 펼쳐졌다. 4월 1, 3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2018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 공연 봄이 온다'이다. 이들 공연은 평창동계올림픽 때 펼쳐진 북한 공연단의 2월 8일(강릉)과 11일(서울) 공연의 답례다. 이 공연은 지난 5일 녹화방송으로 중계돼 관심을 끌었다. 특히 이선희가 열창한 신중현의 노래 '아름다운 강산'은 오늘날 남북의 대치 상황을 살필 때 가사 내용도 그렇지만 노래에 얽힌 사연으로 더욱 화제였다. '아름다운 강산'은 1970, 80년대 군사정권 아래 이뤄진 금지 목록 속의 노래였다. 음악을 잘 쓴 세종과 달리, 이 땅의 통치자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서도 뭇 구실로 여러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1975~1987년의 금지 조치 때 신중현은 이 노래를 비롯해 3차례 52곡을 금지당했다. 게다가 이 곡의 금지는 그를 좋아했다는 박정희 정권 때 이뤄졌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북핵을 둘러싼 남북 군사 긴장 상황을 풀려는 정책이 체육, 음악을 넘어 여러 분야로 퍼지고 있다.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징역 24년 선고 같은 논란이 많은 대형 정치적 현안 속 진행되는 일이라 부정적 평가도 있다. 정치적으로 마땅히 그럴 수 있다. 그렇더라도 남북 민족의 피 속에 흐르는 음악 교감 등 공통 유산의 인자를 찾아 남북이 하나 되는 일조차 그만둘 수는 없다. 특히 남북을 요리(?)하려는 주변 강국의 눈초리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럴수록 살 길은 민족 유전인자에서 찾는 지혜가 간절하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과 항일 그리고 제3의 길 찾기의 어리석음처럼 강국에의 순치(馴致)보다 차라리 영원한 야생마로 남을 일이다.

2018-04-10 00:05:00

[세풍] 무주공산(無主空山) 대구은행?

1992년 3월 대구은행 정기주주총회장. 당시 강경헌 대구은행 전무는 편안한 기색으로 주총에 참석했다.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 이상경 은행장으로부터 별다른 언질을 받지 않은 터였다. 그 경우 대개 연임이 보장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은행장 입에서 나온 발표는 뜻밖에도 전무 퇴임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강 전무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자리에는 경황 중에 챙기지 못한 그의 안경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실무형인 이 은행장과 외향형인 강 전무 사이는 원만치 않았다. 하지만 은행 안팎에서는 강 전무가 연임에 성공하고 1~2년 뒤 은행장직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대세였다. 은행장이 전무를 전격적으로 내치면서 대구은행은 후폭풍에 휘말렸다. 노동조합은 은행장의 독선 인사 규탄 서명 운동을 벌였다. 대구은행 내 경북고(이상경)와 대구상고(강경헌) 세력 간의 갈등이 터졌다는 언론보도도 잇따랐다. 주총 직후 대통령(노태우)의 대구 방문이 임박한 상황에서 은행감독원과 지역사회는 갈등 확산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이 은행장이 전격 사퇴하고 외환은행 출신인 홍희흠 씨를 제6대 은행장으로 영입하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했다. 서열 1'2위 간 권력 다툼의 결말은 양패구상(兩敗俱傷'쌍방이 다 함께 패하고 상처를 입음)이었다. 지금 DGB금융지주'대구은행(이하 DGB)에서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일들을 보면서 1992년 일을 떠올린다. 여러 비리 의혹이 터져 나오면서 박인규 회장 겸 은행장이 물러났는데 이미 그전부터 내부 권력 암투설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은행권 안팎에서는 DGB의 차기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노리고 박근혜 정부 당시 권력 실세에 줄을 댄 인사가 있다는 설마저 나돌았다. 실제로 박 전 DGB 회장은 사정기관의 수사가 은행 내부 투서에서 비롯됐다는 의심 아래 임원들에게 휴대폰 통화 내역 제출을 요구하는 등 제보자 색출에 나섰다. 올 초 인사 때 임원들을 대거 퇴진시키는 강수도 뒀다. 박 전 회장은 이를 통해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 했지만 결과는 1992년과 닮은꼴이 됐다. 경쟁자를 내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스스로도 여론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DGB 임원 인사에 정치권 입김이 작용한다는 루머는 진위를 판별하기 어렵고 허황한 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팔성 전 우리금융그룹 회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 일가에 연임 보장을 대가로 20억여원을 건넨 혐의로 수사를 받는 것을 보면 DGB 임원 인사에 정치권 입김이 전혀 없었으리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박 전 회장 역시 고향이 경산이라는 이유로 친박 실세 정치인과의 친분설이 나돌았고, 그전의 몇몇 은행장에게도 의심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DGB에서는 낙하산 외부 인사가 날아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은행장이 임기 중 용퇴하는 관례가 많았는데, 미담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권력 암투 때문에 밀려나는 경우도 있었다는 후문이 있다. 이런 루머들은 사실 여부를 떠나 DGB를 독버섯처럼 갉아먹는다. 실력이 아니라 외부 도움을 받아 승승장구했다고 의심받는 임원들이 진정한 리더십을 인정받기란 어렵다. 이 틈을 타 일부 조직원들이 정권 교체기에 권력 실세에게 줄을 대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구은행은 창립 51년 동안 꿋꿋이 성장했다. 1967년 개업식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 명의로 대구은행 1호 예금통장을 개설해주면서까지 힘을 실어주었다. 자본금 1억5천만원으로 소박하게 시작한 DGB는 현재 자본금 8천500억원에 이르는 금융그룹으로 컸다. 구성원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지역민들의 성원이 절대적이었다. 지배주주가 없다고 해서 DGB에 주인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DGB의 주인은 지역민이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는 착각에 빠져 정치권에 줄 대는 인사가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후임 CEO 선임 절차가 예정돼 있다.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실력과 명망을 갖춘 인사의 선임을 주문한다.

2018-04-03 00:05:04

[세풍] 이번 지방선거에는 바뀌려나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도 대구경북은 자유한국당의 놀이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정당이나 무소속은 나가봤자, 헛심만 쓰고 들러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TK(대구경북)지역은 한국당에게 좋은 말로 하면 '영지'(領地)이고, 심하게 말하면 '유흥장' 내지 '욕망 배출구'나 다름없는 곳이다. 혹자는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당을 과도하게 비난하는 것이 아니냐고 발끈하겠지만, 이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정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전국적인 선거 판세를 보면 한국당의 희망은 대구경북뿐이다. 한국당이 서울시장 후보도 결정하지 못한 것에서 보듯, 다른 지역 선거는 어렵지만, TK만큼은 안전하다 못해 철옹성이다. 여의도 주변에선 '한국당의 광역단체장은 대구경북만 남을 것'이고 'TK 자민련' 같은 지역당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지방선거 후 한국당이 대구경북을 마지막 보루로 삼아 명맥을 유지할 확률이 십중팔구다. 그렇다면, 한국당이 이런 상태에서 지역에서 얼마나 버틸 것이며, '낙동강 전선'을 교두보 삼아 반격에 나설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구성원의 행실과 처신을 보면 그 정당의 미래와 전망을 금세 알 수 있다. TK의 한국당 구성원들은 철저하게 타락해 자신들이 타락한 줄도 모르기에 감히 미래를 입에 올릴 수 없다. 내면을 조금만 파면 뿌리까지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이다. TK에서 진행 중인 지방선거 후보 공천 과정을 보면 머지않아 추하고 역겨운 면모가 드러날 것이다. 한국당은 대구시장, 경북도지사, 일부 기초단체장을 경선하고, 나머지는 전략공천하기로 정했다. 공천권은 해당 국회의원이나 당협위원장이 쥐고 있으니 그들 맘대로 한다고 보면 된다. 대중의 눈에 띄는 광역'기초단체장 공천은 장난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점잖은 편에 속한다. 광역'기초의원으로 내려가면 최근까지의 사례를 볼 때 거의 요지경 수준이다. 요즘 세상에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상식적이고 황당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겉으로는 유능 참신한 인물을 공천하는 것처럼 점잔 빼지만, 실제로는 '자기 사람' 심기에 혈안이 돼 있다. 바르게 행동하는 국회의원도 일부 있지만, 꽤 많은 수의 국회의원이 뒤에 숨어 추악한 행위를 즐긴다. 상당수 국회의원이 생각하는 '자기 사람'의 조건은 한 가지뿐이다. 첫째도 충성도, 둘째, 셋째도 충성도다. 충성도란 자신의 말에 따라 돈과 몸을 아끼지 않을 출마 희망자를 뜻한다. 자신이 지역구에 내려오면 '비서'나 '개인운전사'처럼 수행'운전하고 '하인'처럼 심부름하는 일은 기본이다. 부인의 수행 및 운전까지 맡는 경우도 허다하다. 저녁에 밥'술은 물론이고, 여자까지 붙여달라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몇몇 국회의원은 공천헌금을 받는다는 소문까지 있는데,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미투 운동'이 너무나 절실한 곳이다. 국회의원에게 지방의원은 좋게 말하면 '호구'이고, 심하게 말하면 '노비'와 비슷하다.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지역에서 유독 심하다. 아무리 지역민이 능력 있는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을 원하더라도, 함량이 미달되는 분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충성도가 뛰어나다고 보면 정확하다. 희한하게도, 충성도와 개인 능력은 반비례하는 경향을 갖고 있어 손해 보는 것은 지역민뿐이다. 상당수 국회의원들은 한국당이 참패하든, 공중분해가 되든 상관없이 자기 것만 챙기겠다는 심보를 가졌다. 전통처럼 전해 내려오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무장한 채 지방선거에서 또다시 한몫 챙기려는 국회의원들이 활개를 친다. 당에서 보장하는 권리를 내 맘대로 행사하겠다고 하는데, 누가 막겠는가. 흥미로운 점은 홍준표 대표가 야심만만하게 '국회의원 책임 공천'을 강조하며 전략공천을 확대했다는 점이다. 홍 대표가 TK에서 벌어지는 이런 작태를 꿰뚫고 있으면서 이런 황당한 정책을 밀어붙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럴 리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범인의 수준으로는 세상 일을 알 수 없지 않은가.

2018-03-27 00:05:00

[세풍] 호황과 불황의 차이

일본이 '디플레이션' 탈출을 선언했다. 버블 경기가 꺼지면서 촉발한 '잃어버린 20년'이 마침내 끝났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8분기 연속 성장세를 기록한데다 경기지수가 1985년 이후 33년 만에 최고점에 도달한 점 등 불황의 끝을 알리는 단서는 많다. 질을 떠나 3% 이하의 실업률은 거의 완전고용 수준이다. '일본병'을 떨쳐냈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그동안 일본 경제를 옭아맨 디플레이션은 말 그대로 기나긴 가위눌림이었다. '주식회사' 일본 전체가 부실과 경쟁력 상실로 휘청대면서 소득이 급감하고 소비는 바닥을 기었다. 짧게는 10년, 길게 보면 20년간 불황의 터널에 갇혀 정부도 기업도 국민도 신음했다. IT 붐으로 2000년대 초반 반짝 회복기(이자나미 경기)가 있었지만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또다시 주저앉고 만다. 주목할 것은 '백약이 무효'라는 말까지 나온 일본 경제가 다시 상승 곡선을 긋게 된 힘이다. 2012년 12월 두 번째 집권한 아베 총리는 황당한 '아름다운 일본' 표어 대신 작심하고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돈을 풀겠다"고 선언했다. '추한 일본' 선언이자 '아베노믹스'의 출발이다. 일본은 이전에도 마구잡이로 돈을 푼 전력이 있다. 1985년 미국 압력에 엔화 가치가 급상승하고 경기가 급격히 위축하자 나카소네 내각은 돈을 풀기 시작했다. 불경기가 닥치면 구조개혁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게 순서다. 하지만 일본은 경기를 되돌려 놓겠다는 일념에 대출 규제를 완화하고 금리부터 낮췄다. 버블의 서막이다. 풀린 돈이 갈 곳이라곤 거의 정해져 있다. 부동산'주식에 쏠린 돈은 결국 자산시장의 거품을 키웠다. 1988년 주식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에 일본 기업이 30개가 넘을 정도였다. 반면 아베 정부는 비슷하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먼저 무제한 돈 풀기를 통해 대놓고 엔화 가치를 떨어뜨렸다. '통화 전쟁'을 벌여서라도 수출 경쟁력을 되살린다는 의도다. 내수를 살리기 위해 재정 지출을 늘리고, 산업구조 개편과 성장동력을 정조준했다. 아베노믹스의 핵심 지렛대인 '3개의 화살'이다. 무작정 돈을 푼 게 아니라 경쟁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일본의 경기 회복은 배수진을 친 아베의 노림수에다 일본 기업의 각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2월 현재 닛케이 평균주가가 24,000선을 회복한 것은 1991년 이후 무려 27년 만이다. 일본 주요 기업 매출과 순이익은 2년 연속 사상 최대다. 제조업 일자리도 7년 만에 1천만 개를 넘어섰다. 해외로 나갔던 공장들이 유턴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외환 위기와 세계 금융 위기의 '더블 펀치'를 맞은 한국의 불황은 현재진행형이다. '경제 대통령' 외치던 MB 정부는 5년 내내 죽을 쒔다. 박근혜 정부는 '초이노믹스' 흉내 내며 돈을 풀었다가 부동산 광풍만 불렀다. '소득 주도 성장'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도 1년 넘게 세금으로 일자리 늘리기에만 매달리면서 정책 구심점이 실종된 상태다. 우려할 대목은 정부의 정책 행보가 일본이 실패한 길 위에 있다는 점이다. 청와대가 독주하면서 장관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다. 일선 부처는 청와대가 벌여놓은 일들을 선전하는데 시간을 죽이고 있다. 기업은 아예 뒷전이다. 기업만한 지렛대가 없는데도 방치하다 못해 쳐낼 돌로 여긴다. 컬링에 비유하자면 기업은 '테이크 아웃' 표적이다. 잘 걷히는 세수 때문에 세금은 이제 만능열쇠가 됐다.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청년들에게 연간 1천만원씩 지원할 정도로 통도 크다. 공무원 증원은 기본 사양이고, 공공기관 일자리도 돈으로 막겠다니 이리 후한 정부가 없다. "기업이 일자리를 만든다는 건 고정관념"이라는 말이 대통령 입에서 나올 정도다. 문제는 세금 장작을 땐 '특단의 대책'이 정부의 기대를 배신할 때다. 지금 급한 것은 정치철학의 구현이 아니다. 온갖 비판이 쏟아졌지만 아베노믹스는 그런 점에서 오만하지 않고 솔직하다. 하나에 매달리다 둘'셋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멍석은 깔아야 멍석이다.

2018-03-20 00:05:00

[세풍] 한미동맹은 거래 대상이 아니다

태평양전쟁 개전에 앞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피하기 위해 1941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두 수뇌가 태평양 연안 어딘가에서 만나 꼬일 대로 꼬인 양국 간 현안을 논의해 해결책을 찾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양자 간 견해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미국의 요구는 일본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확보한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것이었고, 일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설사 회담이 열렸다 해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고노에의 협상안에는 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지금의 베트남) 북부에서 일본군의 철수, 독일'이탈리아'일본 간의 삼국동맹에서 탈퇴, 동남아시아로의 남진(南進) 등 미국이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 현안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회담에서 고노에는 구체적 시점을 제시하지 않은 채 막연히 루스벨트에게 중일전쟁이 해결되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겠다고 말하려 했을 뿐이다. 게다가 고노에는 장제스(蔣介石)에게 항일전쟁의 중지를 권유해달라고 루스벨트에게 요구하려고도 했다. 한마디로 침략 전쟁이 낳은 '현상 변경'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런 회담을 미국은 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들춰보는 이유는 북핵 문제 해결이 25년 동안이나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북미 정상회담 테이블에 올려지기 직전까지 온 과정과 너무나 닮아서다. 일본이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이유도 실무자 간 교섭에서 전혀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핵 협상도 마찬가지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시작으로 2005년 9'19 공동성명, 2007년 2'13 합의와 10'3 합의라는 성과가 있었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모두 핵 동결까지는 갔지만 핵 폐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북한은 막대한 반대급부만 챙기고 핵 폐기를 위한 검증은 시간만 질질 끌다 끝내 거부했다. 이번에는 다를까? 이것이 5월 북미 정상회담의 첫 번째 관전 포인트다. 김정은이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도 논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대북특사단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했다고 한다.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해체'(CVID)이다. 그 내용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핵과 관련된 모든 것, 핵무기'핵시설'핵물질'핵프로그램의 폐기이다. 북한에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이를 수용할까? 예단은 금물이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관전 포인트는 북미 회담에서 김정은이 미국의 말을 듣는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 것이냐이다. 북한의 핵 폐기 여부보다 우리가 더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봐야 할 문제다. 그 답은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김정은의 말에 있다.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는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폐기'라는 뜻이고, '체제 안전 보장'은 '미북 수교와 평화협정 체결'이다. 우리는 이를 수용할 수 있을까? 대답은 '절대 안 된다'이다.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폐기는 얘기만 나와도 남한은 둘로 쪼개질 것이다. 북한의 의도대로 가는 것이다. 평화협정의 '평화'란 단어에 환상을 가져서도 안 된다. 6자 회담 차석대표로 있으면서 북핵 협상의 실패를 지켜본 이용준 전 이탈리아 대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평화협정은 무력 대결 종식의 결과로 형성된 실재하는 평화를 문서로 작성한 것일 뿐, 평화협정이 무력 대치 상태를 종식시키거나 평화를 창조할 수는 없다. 평화협정이 없어서 한반도에 군사적 대치 상황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게임의 종말, 북핵 협상 20년의 허상과 진실 그리고 그 이후) 정확하고 냉철한 지적이다. 북미 정상회담은 우리에게 양날의 칼이다. 잘못하면 우리가 베일 수 있다. 이를 막으려면 한미동맹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국민적 결의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 문재인 정부 내 '자주파'는 물론 트럼프도 '딴생각'을 못한다.

2018-03-13 00:05:00

[세풍] 문 대통령의 평창 구상 너머는

문재인 대통령, 지금까지는 성공이다. 촛불 민심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재수 끝에 당선, 바라던 자리에 올랐다. 또 이명박 전 대통령 비리 수사도 이제 끝이 보인다. 이 전 대통령 역시 머잖아 박 전 대통령의 운명을 비켜나지는 못할 것 같다. 지난 10년의 보수 정권에 대한 적폐 청산은 이로써 절정을 이룰 것 같다. 체육 교류를 통한 남북 관계 복원도 그렇다. 출발은 지난해 6월 24일 무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다. 문 대통령은 "남북단일팀을 구성해 최고 성적을 거뒀던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대회의 영광을 다시 보고 싶다"며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 선수단이 참여한다면 인류 화합과 세계평화 증진이라는 올림픽 가치 실현에 크게 기여하리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남북선수단 동시입장으로 박수갈채를 받았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감동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북한 응원단도 참가해 남북 화해의 전기를 마련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이후 문 대통령은 틈나는 대로 남북 단일팀과 공동입장에 대한 '평창 구상'을 거듭 밝혔고 북한의 올림픽 참여를 바랐다. 마침내 북한의 응답이 시작됐고 하나씩 결실을 맺었다. 북한 고위급 대표단과 선수단, 예술단, 태권도 시범단, 응원단 등이 파견됐다. 개회식에는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폐회식에는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했다. 평창 구상은 다른 성과도 낳았다. 이는 김여정이 시작했다. 김여정은 지난달 10일 특사 자격으로 문 대통령을 만나 김정은 위원장 친서를 전달하고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 등 대통령 대북 특사를 1박 2일 북한에 보냈다. 문 대통령의 평창 구상이 체육 교류에서 정치 분야로 넘어가고 있는 셈이다. 문 대통령의 평창 구상 이후 일은 의미를 둘 만하다. 전설 같은 1970년대 '탁구 외교', 소위 '핑퐁 외교'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냉전(冷戰)으로 으르렁거리던 미국과 중국이 2g쯤의 탁구공 하나로 외교 관계 정상화의 신화를 이뤘으니 말이다. 시작은 1971년 3~4월 일본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참가 미국 선수 글렌 코완이 중국 선수단 버스를 우연히 탔고 '중국에 가 보고 싶다'고 한 말이 씨가 됐다. 이후 1971년 4월 미국 대표 선수단 15명의 첫 중국 방문,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모택동 주석과의 만남, 1973년 양국 연락사무소 개설, 1979년 등소평의 미국 답방과 수교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걱정이다. 나라 안팎 사정은 험난하다. 먼저 주변 나라이다. 남북 관계는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탁구 외교 신화의 주역 미국과 중국처럼 스스로 뜻을 펼칠 만큼 강국이 아니다. 주변국 입김이 산 넘어 산이다. 북핵 문제는 더하다. 게다가 주변국은 남북 관계를 자국 이익 극대화의 기회로 삼을 것이 분명하다. 중국과 손잡고 대만을 헌신짝 취급한 미국의 요즘 대한(對韓) 군사'통상 압박은 그 분명한 사례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성주 배치를 공격한 중국, 문 대통령의 3'1절 위안부 문제 발언 등을 빌미로 갈등인 일본도 마찬가지다. 국내 사정도 역시다. 무엇보다 야당이 평창 구상과 이후 펼쳐진 일에 호의적이지 않다. 공격과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6월 지방선거를 겨냥한 정치 공세일 수도 있지만 국민 지지가 만만찮은 대통령 힘을 빼는데 북한 문제는 더없는 호재일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 후유증과 청년 일자리 문제 등 풀리지 않는 경제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힘들지만 대통령은 여기서 멈출 수 없다. 평창 구상의 결실은 탁구 외교 신화까지는 아니지만 남북 문제를 풀 디딤돌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우선 나라 안부터 힘을 모으자. 가장 모퉁이 약소국 신라가 이룬 미완(未完)의 민족 첫 통일 위업은 민심, 외교, 더 물러날 곳 없다는 절박한 불퇴전(不退戰)의 각오가 바탕이었음을 안다면 말이다.

2018-03-06 00:05:04

[세풍] '마음은 콩밭에' 공직자의 출마

지방선거 실시 바로 전 해 12월이 되면 광역자치단체장은 골머리를 썩는다. 간부직 정기인사를 해야 하는데 지방선거 출마를 저울질하는 일부 간부 공무원들의 모호한 처신 때문이다. 대구시의 경우 권영진 시장이 지난해 12월 15일까지 출마 의사를 분명히 표명하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연말 정기인사 이후 두 달도 안 돼 부구청장 2명이 지방선거에 출마하겠다며 사표를 던지면서 결원이 생겼다. 부구청장 인사란 것이 그리 녹록지 않다. 부구청장 인사를 하려면 해당 지자체장과 협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권 시장은 시의 모 국장을 보내려 했지만 구청장의 반대를 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골라 보냈더니 이번에는 공무원 노조가 들고 일어났다. 부구청장을 내려 보냈으니 인사교류 협약에 따라 시가 구청 공무원을 받아줘야 한다며 시청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일련의 과정에서 권 시장의 마음이 많이 상했던 것 같다. 급기야 지난 20일 그는 전공노 간부를 향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노조가 출마를 위해 공직을 버리고 떠난 부단체장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고 밥그릇 싸움에만 골몰하는 게 옳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앞으로 선거에 출마하려는 공직자를 부단체장으로 절대 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말도 했다. 지방선거를 앞둔 선출직 시장이 노조와 설전을 벌이는 것 자체가 매우 부담스러웠을 텐데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발언이었다. 사실, 공직자의 지방선거 출마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많다. 행정 공백 부작용 때문이다. 수성구의 경우 구청장이 일찌감치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한 상황에서 부구청장마저 구청장 선거에 나서겠다며 중도 퇴임했다. 구청장이 3선 연임 제한에 걸려 있는 남구도 부구청장이 출마를 위해 중도 퇴임했다. 단체장이 중도 사퇴하거나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진 상황이라면 부단체장이 권한대행을 맡아 조직을 추슬러야 마땅하다. 그런데 구청장과 부구청장 모두 사표를 던지면 공직기강은 누가 잡고 우스갯소리로 소는 누가 키우나? 경북에서도 지난해 하반기 이후 공직자 사퇴가 줄을 이었다. 김관용 도지사가 3선 연임 제한에 걸린 상황에서 두 명의 부지사 모두 출마하겠다며 사퇴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당사자들이야 주어진 업무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수행하고 있다고 항변하겠지만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가 있을 터이다. 공직자 출마의 또 다른 부작용은 과도한 고향 챙기기다. 휴일마다 '위수지역'을 벗어나 고향에서 표를 관리하는 것은 애교로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공직자가 평소에 선심성 예산과 사업을 고향에 대거 배정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뒷말이 많다. 막대한 선거 비용이 드는 후진적 정치 풍토도 공무원 출마에 우호적이지 않다. 최소 10억원 이상의 '실탄'이 필요하다고 알려진 기초단체장 선거판에 고민 없이 뛰어들 공직자가 과연 있을까. 결국 선거자금 마련 때문에 '검은돈'의 유혹에 빠지고, 당선 후 본전을 찾겠다며 이권에 개입하거나 부하직원으로부터 돈을 받아챙기다 뒤탈이 나는 사례가 어디 한둘인가. 물론, 공무원 출마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공무원은 오랜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고향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지방선거를 통해 토호가 단체장이 된 뒤 이권개입 등 물의를 일으킨 사례를 보면 공무원 출신이 상대적으로 낫다는 평가도 많다. 제7회 지방선거가 10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역일꾼을 뽑는 아주 중요한 선거다. 하지만 일신영달이 아니라 고향 발전을 위해 선거에 뛰어드는 공직자라면 현직 프리미엄에 기대지 않을 것이다. 관용차를 타고 지역구 표밭 관리를 하는 모습이 유권자 눈에 좋게 비칠 리 없다. 현행 선거법에 따르면 오는 6'13 지방선거 입후보 공직자는 3월 15일까지 사퇴해야 한다. 하지만 그날까지 미적댈 일은 아니다. 출마 결심을 굳혔다면 빨리 사퇴하는 게 옳다. 그게 지금 몸담고 있는 조직과 출마할 지역 모두에 이롭다.

2018-02-27 00:05:00

[세풍] 거짓말 공장

얼마 전 대학교수 출신 어르신과 나눈 대화다. 그분은 필자에게 "풍계리를 아느냐"고 물었다. 북한 핵실험장이 있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는 시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아는 장소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그곳을 타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처음 듣는 황당한 뉴스에 필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더니, 그분은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풍계리를 폭파시켰는데, 바로 다음 날 김정은이 평창올림픽을 들먹이며 한국에 대화를 제안했다고 하네." 전형적인 가짜뉴스였지만, 그분의 말씀은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헨리 키신저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언을 하고 있는데 조만간 미군은 철수하고 미국은 북한을 타격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쫓겨날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궁금증이 일어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정보를 들었느냐고 캐물었다. 며칠 전 업무차 서울에서 만난 70대 장군 출신에게 직접 들었다고 한다. 연세가 좀 많다고는 하지만,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 출신과 국방부 주요 보직을 거친 장군 출신이 '이스라엘 특공대'를 믿고 언급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가짜뉴스 신봉자는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아무리 황당한 소설 같은 얘기라도 자신의 생각과 비슷하면 '옳거니' 하고 믿어버리니 어떻게 설득할 방법이 없다. 40, 50대만 해도 가짜뉴스를 그리 많이 믿지 않지만, 60대 이상 연령대에는 신봉자가 수두룩하다. 어르신들과 가짜뉴스를 놓고 논쟁을 벌이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해 모른 체하는 것이 편하다. 모두 '이념의 포로'가 되어 있으니 토론과 논쟁은 더는 소용없는 세상이 된 듯하다. 21세기라면 인간의 이성과 상식이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한 것 같은데, 거꾸로 퇴보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전 세계적으로 가짜뉴스가 사회문제화돼 시끄럽지만, 한국만큼 그 정도가 심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진보·보수로 갈려 이념대립이 심각한데다 한국인 특유의 거짓말과 허세, 디지털 기술까지 더해져 갈수록 그 위세가 대단하다. 지난해 말 한 방송사가 '시청자들이 뽑은 2017년 올 한 해 최악의 가짜뉴스 10'을 방송했을 정도이니 그 폐해와 파급력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가짜뉴스를 마구 찍어내는 곳은 극우세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예전에는 진보세력도 비슷했다. 2008년 광우병 사태는 한국에서 가짜뉴스가 처음으로 위력을 발휘한 때였다. 인터넷에는 연일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어떻게 되고, 광우병에 걸리면 어떻게 되느니 하는 글이 올라왔다. 이명박 정권을 미워하고 미국을 싫어한 진보세력이 광우병 문제를 왜곡·과장했고, 대규모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당시 주장·목소리 가운데 맞는 것이 거의 없는 걸 보면 가짜뉴스의 전형이다. 가짜뉴스는 소수파 정치세력이 정권 탈취나 세력 확장을 위해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거짓말로 정권과 집권층을 욕하고 비방해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는 일종의 사기행위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부터 '가짜뉴스 신고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일주일 만에 2천 건이 넘는 신고가 들어왔다니 가짜뉴스의 전파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가짜뉴스를 마구 찍어내는 공장은 곳곳에 널려 있다. 익명의 가면을 쓴 채 숨어서 가짜뉴스를 만드는 행위는 범죄다. 교묘한 거짓말로 집단과 세대·계층을 반목하게 하고, 특정인을 증오하게 만들고, 이웃을 공포에 떨게 하는 이들은 '열린 사회의 적'이다. 가짜뉴스에 동조하는 행위는 자신도 모르게 범죄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정치적 측면에서 소통과 직접민주주의 확대를 가져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거짓말과 잘못된 정보를 확산시키는 걱정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정권과 힘센 자,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과 견제는 꼭 필요하지만, 거짓과 속임수로는 안 된다. 정직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2018-02-20 00:05:00

[세풍] '천천히 오세요'

내일 오후면 몸보다 마음이 더 바빠진다. 떨어져 살던 가족이 다시 얼굴을 맞대는, 재회의 시간을 앞두어서다. 귀성길이 막혀 고생해도 가슴은 설레고, 운전대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한국인에게 무조건 반사의 영역인 까닭이다. 365일이 명절을 앞둔 심정과 같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과 일상은 그렇지 않다. 저마다 삶의 조건과 처지가 다르지만 늘 시간과 성과에 쫓기는 건 같다. 매일 서로 부대끼며 갈등하고 싸운다. 살아남기 위해 남을 밀쳐내는 일도 다반사다. 미세먼지처럼 반칙과 편법은 이미 우리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직장과 학교, 가정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상승 곡선만이 지상과제다. 이런 강박감의 틈바구니에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터무니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급기야 최고'최선으로 둔갑하고 세상을 지배한다. 조급함과 각박한 세태가 만든 결과다. 성취하려는 노력과 의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이 옳은 것인지 따져보면 답이 궁해진다. 어느 배달 서비스 회사가 택배 배송기사들에게 물었다. 고객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나 행동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57.3%가 답했다. '천천히 오세요'라고.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 조심해서 오라는 말이다. 이 한마디가 택배기사들 마음을 움직인다. '고맙다'는 인사치레보다, 음료수를 챙겨주는 적극적인 친절보다 '천천히'라는 말의 울림이 더 크다. 지극히 평범한 말에 이런 힘이 있다니 놀랍다.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감정의 골을 메우고 서로를 연결한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천천히 와도 괜찮다'는 말이 그만큼 듣기 힘들다는 뜻이다. 1960년, 2천500만의 한국인이 저마다 손에 쥔 돈은 고작 158달러였다. 지금은 3만달러에 가깝다. 돈의 부피가 달라지는 동안 거꾸로 인정은 줄어들고, 돈과 권력의 얼굴은 더 두꺼워졌다. 정치가 분열하는 동안 세태는 물 먹은 가죽처럼 딱딱해지고 모질어졌다. 더 슬픈 일은 생계가 달린 아파트 경비 자리가 사라져도, 좌절한 청년들이 암호화폐에 매달려도 뾰족한 대안도 문제를 풀 능력도 없다는 점이다. 간간이 '함께 살자'는 선의의 외침도 '내가 먼저'라는 고함 앞에서는 그저 위태롭다. 미국 유명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파리드 자카리아가 평창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워싱턴포스트(WP)에 칼럼을 실었다. '한국에 금메달을 주라'(Give South Korea a gold medal)는 제목의 칼럼이다. 그는 한국이 역경을 딛고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이뤄낸 결정적인 동력을 분석하면서 '한국의 성공은 매우 인상적'이라고 썼다. 이 칼럼에서 눈에 띄는 점은 '한국이 현재 서 있는 위치가 아니라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따져본다면 한국은 가장 성공한 국가'라는 대목이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매우 가난했고, 자원도 빈약했으며 더욱이 북한의 위협은 일상적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은 올바르게 정책 결정을 했고, 교육과 인프라 투자, 자유로운 시장과 교역을 옹호했다. 이것이 한국의 성공 요인'이라는 것이다. 물론 장점만 있는 국가나 사회는 없다. 그러나 이 칼럼의 요점은 '한국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중단없이 앞으로 나아갔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정치, 경제, 사회 등 각종 도전과 위기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맞서면서도 조금씩 함께 풀어나간다면 별로 어렵지 않다. 소통과 합의를 통한 문제 해결 방식이라면 근심할 것도 없다. 그러나 상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관용과 배려가 없는 사회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치와 경제가 불화의 씨앗만 뿌리고, 돈과 탐욕의 그릇만 넓혀간다면 미래는 어둡다. 이제 정치는 국민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국민도 정치를 향해 주문해야 한다. '천천히 오라'고. 적폐든 양극화든 남북대화든 문제 해결 의지보다 독선과 탐욕이 앞선다면 답은 뻔하다. 그런 한국이 금메달 받을 자격이 있다고?

2018-02-13 00:05:00

[세풍] 소망으로 쌓아올린 허구의 탑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미국의 국민총생산(GNP)은 일본의 열두 배에 가까웠다. 군수산업의 기초가 되는 철강이 그랬고, 자동차 보유 대수는 160배, 석유는 무려 776배나 됐다. 일본의 필패는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 군부의 도상연습(圖上演習)에서도 확인된 바였다. 당시 일본 해군대학은 미국과의 도상 전쟁을 몇십 회나 해봤지만, 일본이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결행했다. 그 무모함의 뿌리는 바라는 대로 될 것이라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진주만 기습 두 달 전인 1941년 10월 18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총리가 되면서 천황에게 전쟁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육해군 참모들에게 지시해 만든 '대미영란장(對美英蘭蔣) 전쟁 종말 촉진에 관한 복안'이란 문서다. '미영란장'이란 미국, 영국, 네덜란드, 장제스(蔣介石)의 충칭(重慶)정부-일본은 왕자오밍(汪兆銘)의 친일 난징(南京)정부를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하고 있었다-를 가리킨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전쟁 중인 독일과 소련을 중재해 화평을 이끌어내고, 독일의 전력을 영국과 싸움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영국이 굴복할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전쟁 의지도 약해질 것이다. 그때 미국과 협상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가토 요코) 현실은 전혀 달랐다. 독일의 전쟁계획에 소련과 화평은 없었다. 무엇보다 전쟁 종결 구상의 핵심인 영국의 굴복 가능성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 문서가 작성되기 1년 전인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이 패배하면서 히틀러는 영국 침공 계획을 포기했다. 전쟁 종결 구상의 전제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착각에 대해 일본 역사소설가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는 "추상적인 관념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이성적인 방법론을 전혀 검토하려 들지 않았다. 먼저 자신에게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능숙한 작문으로 공중누각을 쌓는 것이 일본인의 특기인 것 같다. 모든 일들이 자신이 희망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한다.('쇼와사 1') 일본의 전쟁 계획은 소망으로 겹겹이 쌓아올린 허구의 탑이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올림픽' 구상은 이를 그대로 재연하는 듯하다.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제의로 재개된 남북대화를 모멘텀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문 대통령의 구상이다. "평창올림픽을 통해 북한이 예전과 달라질 수 있다.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받고 싶으면 정상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올림픽 기간에 깨닫지 않겠느냐"는 문정인 대통령 안보특보의 '해설'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한마디로 북한이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것이란 얘기다. 소망이 현실을 대체하고 객관적 분석이 있어야 할 자리를 주관적 작문이 꿰차는 소망적 사고의 전형이다. 이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자기기만(自己欺瞞)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문 대통령의 생각을 이렇게 바꿔 표현할 수도 있다. '북한이 변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다. 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올림픽을 통해 정상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문 대통령이 생각하는 대로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이 달라질 것이라는 현실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 북한은 핵 보유가 유일 체제 보장에 득이 아니라 해가 된다고 판단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평창올림픽이 그 계기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상식에 더 부합한다. 오히려 올림픽 참가가 핵무장 완성을 위한 시간벌기라는 의심이 더 현실적이다. 그런 점에서 평창올림픽은 문 정부에게 잠시나마 소망의 실현이란 꿈에 부풀게 한 단막극일지 모른다. 연극이 끝나고 불이 켜진 뒤 문 정부는 어떤 현실과 마주할까. 그것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환멸의 현실일 가능성이 높다. 올림픽 개막 하루 전의 평양 열병식은 그 예고편일 것이다.

2018-02-06 00:05:00

[세풍] 다물(多勿) 한배(同舟)

'우리는 인민에 진정 충실한 공복이 되어야 한다…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내 시신은 화장해 달라…재는 언덕에 뿌려 달라…재가 뿌려진 곳 위에는…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언덕에 짙푸른 나무 숲을 꾸미도록 하라…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고 그러면 경치가 더 좋아지고 농업에도 이로울 것이다…우리 인민 모두에게…젊은이와 어린이들에게 끝없는 애정을 보낸다….'베트남의 독립운동과 통일에 평생을 바친, '호 아저씨'로 통하는 지도자 호찌민은 통일(1976년)을 보지 못하고 1969년 9월 2일 숨졌다. 1945년 외세 침략과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지 24주년 기념일 때다. 그는 죽기 4년 전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 자유, 행복, 75회 생일에 부쳐'라는 제목의 유언을 남겼다. 비록 그의 몸은 재가 되지도, 산하에 뿌려지지도 않았지만 뒷 지도자들은 '인민의 충실한 공복'으로서 마침내 남북통일을 일궈냈다.지난해 11월, 베트남에서 열린 '호찌민-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7' 행사 때의 한국인 사업 관계자와 현지 한국인 증언은 잊을 수 없다. "베트남은 지금 경제가 처지고 부패가 심하지만 미국, 중국, 일본 등 누구에게도 쫄지 않는, 자존심 센 나라다. 호찌민의 지도력이 낳은 통일 베트남의 힘이다. 베트남에서 호찌민을 빼고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야말로 '국부'(國父)이다."물론 그의 다른 모습도 있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빚어진 물리적 충돌이다. 특히 자신의 고향 응에 안 성(省)의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토지개혁 폭동으로 사망자만도 수만~10만 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최소 5천~5만 명의 관리가 처형됐다는 연구도 있다. 그의 부정적 행적이다. 그럼에도 친근한 '호 아저씨', '호 할아버지'로 불리며 국부 대접인 까닭은 무엇일까.아마 독립과 통일 조국의 앞날을 위한 사심없는 지도력과 나라 사랑일 것이다. 그는 75~169개 이름 중 끝엔 '응우옌 탓 호찌민'(阮必勝)에서 '꼭 이긴다'는 호찌민을 썼다. 사회주의에 기댔지만 독립과 통합을 위해 민족주의도 수용했다. 그의 첫 번째는 독립과 통합, 사상 이념은 다음이었다. 옛 소련과 중국, 식민과 침략 지배자인 프랑스와 일본, 미국 사이의 등거리 외교와 실리적 거래도 그래서였다. 삶조차 청빈했으니 뒷사람의 거울이었다. 결과는 통일 베트남, 오늘날 베트남 힘의 원천이다.우리도 백범 김구 등 훌륭한 지도자가 넘쳤다. 오직 독립을 위해 일제 식민 지배세력과 목숨을 건 항쟁을 한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는 숱했다. 저마다 베트남처럼 민족주의, 사회주의로 나눠 제 역할을 다했다. 다만 외세에다 호찌민을 괴롭히던 '일본 적군에게 아첨하며 해롱거리는 소수의 주구(走狗)' 같은 무리 탓에 우리는 두 진영을 통합할 지도자를 너무 일찍 잃었다. 좌우 통합은 좌절되고 강산은 허리가 잘렸다.호찌민 같은 걸출한 뭇 지도자를 가졌음에도 우리의 남북은 되레 멀어지고 있다. 왜. 정치 지도자가 고만고만해서다. 저마다 잘난 질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와 북핵은 물론,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우리 강산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국제 정세는 숨이 막힌다. 여러 나라 세력의 무리 틈에서 살길을 어디에 찾을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요즘이다. 그런데 여야는 서로 딴 배다. 동주(同舟)는 없다. 더욱 답답한 노릇은 최근의 여야 정치다. 너나없이 극복에 나서야 할 충북 제천과 경남 밀양 화재와 같은 재난조차 정쟁(政爭) 삼아 힘과 시간을 헛쓰니 그저 놀랄 뿐이다.지금 여야에게 주문하고 싶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관련 한 기사를 읽는 일이다. '사대주의자'로 공격받는 김부식조차 우리 옛 땅을 잊지 말라며 '고구려 말로 고토(古土) 회복을 뜻하는 다물(多勿)'이란 말을 굳이 기록에 남긴 부분이다. 싸울 미력이라도 남았으면 옛 강토와 통일을 그리며 앞선 지도자처럼은 될 수 없을지언정 나라의 앞날을 위해 여야, 보수 진보 넘어 '다물 동주'로 통합에 나설 것을 바란다면 꿈일까.

2018-01-30 00:05:00

[세풍] 대구시장의 대권 도전기

미국에서는 유력 지방자치단체장이 대통령직으로 가는 유력 코스가 될 수 있다. 주지사를 지낸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이 단적인 예다. 지자체를 잘 경영한 경험을 토대로 둘은 대통령직도 잘 수행했다. 퇴임 후 매겨진 평가도 역대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상당히 높다.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자체장의 대권 도전이 녹록지 않다. 국회의원들이 정치판 헤게모니를 틀어쥐고 있는 탓에 지자체장이 파고들 틈새가 거의 없다. 단, 서울시장은 예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을 거쳤듯이 수도 프리미엄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대중적 인지도가 전국적으로 높지 않은 지자체장이 대권 도전에 나섰다가는 '투명인간' 취급받기 십상이다. 지난해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든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 TV토론 시작 전 스튜디오에 일찌감치 도착한 김 지사를 곁에 두고도 방송작가는 경북도지사를 찾았다. 김 지사는 자신의 얼굴이 신분증이나 다름없는 대구경북과 사뭇 딴판인 서울의 분위기를 그때 실감했다고 한다."중앙지들이 경기도지사 기사는 잘 안 실어줘요. 어쩌다 기사가 나오면 꼭 그게 사회면이더라고요." 몇 년 전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대개가 비판 논조인 사회면 기사가 정치인에게 달가울 리 없다. 명색이 수도권 광역단체장이자 국회에서도 나름대로의 입지를 쌓아온 그마저 이런 소외감을 느끼는 마당이니 여타 지자체장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우리 대구경북의 경우 대권주자는커녕 거물 정치인 기근 현상에 시달린 지 꽤 오래다. 지난 대선 당시 박원순, 안희정, 이재명, 홍준표 등 다른 지역 지자체장들이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것을 보면서 대구경북민들은 부러움 반, 자조감 반을 느꼈다. 지역민들의 이런 상실감을 헤아렸는지 지난 대선 때 김관용 지사가 대권 도전에 나선 데 이어, 권영진 대구시장이 대구시장 재선에 성공하면 대권에도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최근 밝혔다.그런데 권 시장은 이 발언으로 큰 홍역을 치를 줄 몰랐던 것 같다. 발언 이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자체장들이 중앙정치에 기웃거리지 말라"고 강도 높게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대구시장 일이나 잘하라"는 사실상의 타박이었다. 대구에서 정치적 기반을 다진 뒤 차기 대선에서의 재수를 노리고 있는 홍 대표 입장에서 대구시장의 대권 도전은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과 마찬가지였으리라.홍 대표의 발언에는 지자체를 정당의 아래로 보는 우월 의식이 느껴진다. "공천 안 주면 재선조차 불투명한 대구시장이 감히 대권 도전을 운운해?"라는 오만함 말이다. 홍 대표의 발언은 평소 거침없는 어투를 감안하더라도 매우 유감스럽다. 대권 도전 선언 공방이야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권 시장을 공격한 사유 중 하나가 지방분권개헌 국민투표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6월 지방선거 때 지방분권개헌을 동시에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는 대구시민 뜻을 받들어야 하는 대구시장으로서 당연히 내야 할 목소리다. 그런데 이를 놓고 홍 대표는 "용서치 않겠다"는 극언마저 쏟아냈다. 공천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는 겁박과 무엇이 다른가.홍 대표는 대구에 정치적 둥지를 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대구 북구을 당협위원장까지 맡았다. 하지만 지역민들의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거물 정치인이 지역에 오겠다는 것이 반갑다는 의견도 있지만, 명색이 당 대표라는 사람이 험지를 외면하고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했다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홍 대표의 대구행이 대구 정치판에 어떤 손익을 가져다줄지 현재로서는 예단키 어렵다. 하지만 그가 대구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대구 사람들의 마음부터 헤아리겠다는 자세다. 지방분권개헌 요구 같은 지역민의 대표적인 열망을 외면하는 한 그는 대구경북 사람들에게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2018-01-23 00:05:00

[세풍] 문제는 홍 대표의 '입'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대구로 오는 이유는?' 몹시 아리송하다. 홍 대표가 그렇게 욕을 먹어가면서 꿋꿋하게 대구행을 고집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만큼이나 그 심중을 헤아리기 어렵다. 대구시민들이 분명하게 싫다는 의사를 표현했는데도, 굳이 강행하려는 의도에 대해 속어로 표현하면 정말 '아리까리'하다.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당협위원장만 맡겠다고 선언한 대목에 이르면 황당함의 극치다. 정치인이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뭐하러 당협위원장을 맡는다는 말인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간판만 걸어놓고 놀러다닐 것도 아닐 텐데 도무지 속내를 모르겠다.두 달 전 홍 대표가 대구행을 밝히면서부터 대구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제 와 대구에서 뭐 하려고?' 하는 반응이었다. 제1야당 대표가 험지에 나서도 모자랄 판에 텃밭에 내려와 안락한 생활을 즐기려는 것처럼 보이니 누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마련이다. 지난해 말 한 언론사가 대구시민들에게 홍 대표 거취를 물어보니, 민심이 얼마나 냉소적인지 알 수 있다. 응답자의 13%만 '대구에서 당협위원장을 맡아야 한다'고 했고, 나머지 73.8%는 당 대표 역할에 전념하거나 서울지역 재보궐선거에 출마해야 한다고 답했다. 시민들이 홍 대표에 대해 아예 대놓고 '문전축객'(門前逐客)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주위에서 떠들고 욕해도 끄떡도 않던 홍 대표가 이 대목에서는 부담을 느꼈던지, 며칠 전 대구'경북 신년교례회, 기자간담회 등에서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 갖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대구에서 마지막으로 정치를 하고 싶다' '과거 대구에서 3번이나 출마할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다' 등등….그게 효과가 있었던지, 대구의 비판 여론이 다소 누그러진 것 같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다, 그렇게 대구행에 목매달며 애원하는 상황에서 더는 막을 수 없지 않나 하는 분위기다. 여기에서 대구사람 특유의 순수성과 천진난만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에 약하고 실리에 밝지 못하니 매사를 냉철하게 살피지 못한다.그래서, 홍 대표가 왜 대구행을 고집하는지 주변 인사들에게 물었다. 홍 대표는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는 정치인이긴 하지만, 교묘하게 의도한 어법을 구사할 때도 많다. 대구행에 관한 그의 어법은 지극히 계산적이다. 그 속내는 이런 것 같다. '대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는 안 나간다. 그러나 차기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한다.' 홍 대표의 수차례 설명에도, 이 뒷말은 빠져 있다.홍 대표가 지난해 19대 대선에서는 탄핵정국에 별다른 준비 없이 나섰다가 실패했지만, 이제부터 대구에서 차분하게 준비하겠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특정 지역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권을 잡은 만큼 대구경북을 교두보로 다시 한 번 도전하겠다는 뜻이다. 대권을 염두에 둔 마당에 국회의원 자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홍 대표가 그렇게 무리해가며 당협위원장을 맡으려는 이유가 자연스레 설명된다.홍 대표가 대권을 목표로 계획하고 움직이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홍 대표와 그 비서실장인 강효상 의원이 대구사람을 만만하게 다룰 수 있는 이용 대상쯤으로 여기고 내려온다고 치자. 선례에 비춰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정치력이나 이데올로기도 큰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홍 대표의 가벼운 입과 처신은 대구사람을 창피하게 만들지 않을까 정말 걱정스럽다.유들유들하게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인 농담을 예사로 툭툭 던지는 그 '입'이 문제다. 발언록을 보면 '돼지 발정제'부터 '젠더폭력이 뭐냐?' '거울 보고 분칠이나 하는 후보는 안 된다' '일하기 싫으면 집에 가서 애나 봐라'까지 유치찬란하다. 그가 혹시라도 대구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고, 타지에서 대구의 전형적인 '꼰대'로 보지 않을지, 그것이 두렵다. 대권도 좋지만, 그 경망한 입과 처신을 고치기 전에는 대구에 오지 말 것을 권한다.

2018-01-16 0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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