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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열 논설위원

[세풍] 남북, 다른 길 닮은꼴

문재인 정부 출범 1년을 넘겼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남북 분야가 그렇다. 강산이 갈라진지 73년 세월 속에, 그것도 단일 정부에서 일어나는 남북 변화로는 가장 역동적인 듯하다. 그야말로 북한 말처럼 '씨엉씨엉'(성큼성큼)이다.자연히 북한 자료를 살필 기회가 늘었고 놓친 남북 모습 비교도 잦다. 12명 대통령을 수반으로 선거한 남한과 세습한 김씨 3명이 영도한 북한의 지난 세월은 분명 '다른 길'인데도 어두운 '같은 꼴'이 숱해 흥미다. 남북이 외세로 38선 허리 잘렸음에도 이러하니 역시 한 뿌리, 두 체제의 한 민족임을 공감(?)한다.먼저 수도인 두 도시와 나머지 지방과의 심각한 격차의 고착이다. 지금 광역행정구역은 한국 17개 시'도, 북한 12개 시'도이지만 사실상 서울과 평양에 모든 자원이 쏠린다. '특별시' 서울 빼면 모두 시골로 '지방 식민지'이듯, '직할시' 평양을 벗어나면 지옥 즉 '나락'(태영호,'3층 서기실의 암호')인 점이 같다. 과거에는 남북 모두 수도 밖 삶도 살 만했지만 이젠 아니다. 다만 서울은 맘대로 살 수 있지만 평양은 함부로 그럴 수 없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젊은이의 경제적 빈곤도 마찬가지다. 남(南)은 재벌, 대기업, 귀족노조 기업, 공기업 같은 알짜 일자리의 대물림으로 금수저가 유지·재생산되나 '88만원 세대'와 흙수저는 절망의 늪이다. 천민 자본주의가 낳은 결과다. 북한은 꽃제비, '장마당 세대' 젊은이의 짊어진 경제적 짐이 무겁다. 지상낙원을 외친 세습 독재 사회주의 허구가 자초한, 수백만 주민이 굶어죽고 국가 보호망이 붕괴된 '고난의 행군'의 산물이다. 희망의 탈출구가 좁기는 양쪽 모두다.계층 이동의 '사다리' 실종도 현실이다. 빈 손에 교육으로 빈곤도 벗고 위로 올라 '개천에서 용이 나던' 세월이 '아, 옛날이여!'가 된 남처럼 북녘도 역시다. 남의 빈익빈 부익부와 계층의 고착화처럼, 북한도 세습 김씨 왕조의 백두혈통에 당 간부 자녀 등 평양 특권층의 세상이다. 다만 친일(親日) 후손이 힘 쓰고 항일독립운동가 후손이 푸대접받는 남과 달리 북은 항일(抗日)투사 후손의 사람 대접은 대를 잇거나 각별하다.두 강산에 분명한 편가르기도 있다. 여러 연(緣)을 앞세운 탓에 능력과 사람은 뒷전이다. 이념, 사상, 진영 논리에 매몰된 '내 편'과 '네 편'에 치우친 인사 정책은 남북 모두 질긴 적폐이다. 이를 위한 수단이 청산이냐, 숙청이냐는 깃발만 다를 따름이다. 명분은 같지 않아도 '내 편 챙기기'의 속셈은 하나다.국방의 근간인 군부 부패도 그렇다. 60만 병력의 남한은 방산비리 등으로 이미 알려진 터다. 120만 병력의 북쪽 역시 "장비는 낡고 노후했고 기름은 다 빼돌려 먹어 장부와 어긋났고, 병사들은 굶주리고 있었"(태영호, 앞의 책)을 정도니 남북 모두 부패의 깊이와 넓이를 알 만하다.여기에 남북을 휘감은 우려스러운 최근 경제 흐름도 닮고 있다. 자본주의 외길이나 3대 세습의 외곬 사회주의 두 길 모두 지금 경제로 죽을 쑤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의 새로운 경제 틀을 제시한 출범 2년의 문 정부나, 개혁개방을 노리는 출범 10년의 김 정권 모두 위태롭다. 물론 북쪽이 더욱 심각하지만 노동신문의 22일 보도처럼 "경제위기가 심화되어 각계의 우려가 커가고 있"는 문 정부도 걱정은 다르지 않다.남북 자료를 훑으며 만난 이런 닮은 꼴이 씁쓸하다. 하지만 어둠 뒤엔 빛이 기다리듯 남북을 아는 만큼 나아갈 길은 더욱 넓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북한 소식을 뒤진다.

2018-07-24 05:00:00

이대현 논설위원

[세풍] 대한민국 어디로 갈지 아찔하다

남북한이 평화를 구가한다는 이 시기에 태영호 공사란 존재는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에 의미하는 바가 더욱 크다. 김정은과 북한 정권 바로 보기를 넘어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태 공사는 베스트셀러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이렇게 적었다. "대한민국은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와 번영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격이 있는 나라다. 노예 상태에 빠져 있는 북한 주민을 해방시키고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주도해야 할 책임이 한국에 있다. 하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국인이 많은 것 같다."그의 지적처럼 대한민국은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와 번영에서 북한에 월등하게 앞서왔다. 태 공사를 비롯해 수많은 북한 인사들이 우리나라에 귀순했을 때 첫 일성이 "자유! 대한민국"이었다. 번영으로 일컬어진 경제 발전도 남한을 북한보다 우위에 서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다.자유와 번영이란 두 가지 기준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위기'란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인간 본성을 토대로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정립된 자유, 이것이 지닌 의미와 가치는 숭고하다. '자유론'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나무에 비유해 자유를 명쾌하게 정의했다. "인간은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다." 그렇기에 우리 헌법은 수많은 조항에서 자유를 표방하고 있다. 민주주의도 자유를 실현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북한 체제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개념이 자유이기도 하다. 자유를 보수 우파 전유물로 판단해 빼고 지우려는 것은 아닌지 저의를 의심하게 만든다. 자유를 잃어버린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이 될지 걱정이다.남한과 북한이 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운동 경기를 하는 등 겉으로는 평화스럽지만 안보에서는 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북미 정상이 만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북한 비핵화에선 뚜렷한 진척이 없다. 한반도 평화의 전제조건인 북한 비핵화 합의에서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비핵화 대신 종전선언이 엉뚱하게 이슈로 떠오르고, 한미 군사훈련이 취소되는 등 대북 유화책만 쏟아진다. 어느새 북한 비핵화는 정치 이슈로 변질했고, 칼자루는 김정은이 쥐고 있다. 북한 비핵화가 안 된 상태에서 남북·북미 화해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먹고사는 문제, 경제에서도 경고등이 켜진 지 한참 됐다. 고용지표가 외환 위기 수준으로 추락하는 등 여러 수치가 경제 위기를 방증하는데도 정부와 여당은 계절적 요인 혹은 전(前)·전전 정권 탓으로 돌리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의 한계가 드러났지만 정책 수정은커녕 귀담아들으려는 자세조차 보이지 않는다. 경제 현장 목소리를 듣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정부 리스크(risk)'가 경제 위기를 부르고 있지만 정부와 여당은 마이 웨이만 고집하고 있다.위기를 극복하는 첫걸음은 위기를 직시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부여당은 총선, 대선, 지방선거 3연승에 언제까지 취해 있을 것인가. 대북·경제 정책에서 불거진 문제점을 조목조목 살피고 따져 유연하게 대처해야 할 때다. 이 정부가 임기를 마쳤을 때 대한민국이란 배가 어디에 있을지를 생각하면 아찔하다는 목소리를 경청하길 바란다. 대한민국은 어느 한쪽만이 아닌 국민 모두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2018-07-17 05:00:00

박병선 논설위원

[세풍] 권영진 시장의 4년

문희갑 전 대구시장의 별명은 '문핏대'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다혈질에 불도저 같은 추진력 때문에 얻은 별명이다. 1997년 경상감영공원이 만들어질 당시, 공무원들은 '문핏대'가 공사 현장에 나타나면 벌벌 떨었다. 문 전 시장은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지시하고 잔소리하고, 눈에 거슬리는 것이 보이면 곧바로 핏대를 올렸다. 그가 공사 현장을 찾은 횟수만 해도 수십 번 넘었으니 공무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만했다.경상감영공원은 문 전 시장의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228기념공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같은 도심공원도 그의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무 심기도 빼놓을 수 없다. 스스로 '나무 시장'이라고 불리길 원할 정도로 재임 7년 동안 645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대구를 밝고 푸르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대구 경제를 살리라고 시장으로 뽑아줬더니 환경에만 신경 쓴다는 비아냥이 있긴 했지만, 그가 뿌린 과실은 오롯이 대구 시민의 차지가 됐다.조해녕 전 시장은 취임 1년도 안 돼 지하철 참사가 일어나는 바람에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실의에 빠져 시장실에서 '칩거 아닌 칩거'를 하는 와중에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유치를 기획할 정도로 아이디어가 남달랐다. 전임 김범일 시장은 그리 대중적인 인기가 없었지만, 업적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국가산업단지, 테크노폴리스, 첨단의료복합단지, 한국뇌연구원 등등…. 치밀함과 기획력을 갖춘 보기 드문 시장이었다.3명의 민선 시장 모두 재임 중에는 이런저런 비판에 시달렸어도,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들의 업적이 상당했음을 알게 된다. 뚜렷한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시민들에게 큰 이득을 안겨줬으니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이제, 재선에 성공한 권영진 시장 얘기를 해보겠다. 권 시장이 재임한 4년간 업적을 꼽으라면 금방 떠오르는 것이 없다. 굳이 있다면 몇몇 기업을 유치하고 '치맥 페스티벌' '컬러풀 페스티벌' 같은 행사를 연 정도다. 권 시장이 지난달 지방선거에서 여당 후보에게 고전한 이유 중 하나다.권 시장이 4년 전 취임할 때만 해도 최초의 정치인 출신이라 기대감이 컸다. 정치인답게 중앙정부와의 소통은 물론이고 시청 직원들의 신명을 북돋울 것이라고 믿었다. 아쉽게도, 그렇게 되지 못했다. 국책사업 유치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시청 내부에서조차 '측근 정치'니 '밀실 인사'니 하며 구설이 많았다. 시청 주변에서는 '일해도 알아주는 분위기가 아니다'는 목소리마저 나온다.권 시장 본인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별로 한 것이 없다는 세간의 평가를 모를리 없고, 권 시장 스스로도 "10, 20년 뒤 길게 보고 있다"는 말로 현재의 어려움을 해명하고 있다. 권 시장은 재선 임기를 시작하면서 "대구 취수원 이전, 통합신공항 건설, 대구시 청사 이전 등 민생현안 해결에 시장직을 걸겠다"고 했다. '시장직을 걸겠다'는 것은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지만, 그 정도로 압박감과 초조함에 쫓기고 있음을 보여준다.권 시장에게는 4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앞으로의 4년은 지나간 4년과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 과거와는 다른 생각과 행동,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뿐이다. 차별적인 권 시장만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구관이 명관'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

2018-07-10 05:00:00

[세풍] 국민이 불안한 이유

1980년대 중반, 일본 반도체 산업은 황금기를 보냈다. 인텔이 D램을 발명한 1971년 이후 시장을 독식해온 미국을 밀어내고 일본이 세계 점유율 80%로 메모리 시장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쌍두마차인 도시바와 히타치가 일본 반도체를 이끌었다. 그런데 1999년 12월 엘피다만 빼고 일본 기업이 D램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를 두고 일본 업계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꽃이 졌다'고 표현한다.벚꽃처럼 화려하게 꽃을 피우다 와르르 무너진 이유가 궁금하다.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일본병(病)'이다. 일본 반도체 산업 실패 보고서이자 반성문인 '일본 반도체 패전'을 쓴 유노가미 다카시는 이리 진단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에는 심각한 병이 있다. 과잉 기술로 과잉 품질, 과잉 성능의 제품을 만드는 병이다. 반도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휴대전화· TV 등 디지털 가전 분야도 증세가 똑같다. 이 병을 치유하기 어려운 이유는 '비용 의식의 부재' 때문이다." 원가를 무시하고 최고만 지향하다 일본 반도체가 꼬꾸라진 것이다.일본 반도체는 시장이 원하지도 않는 고기술과 고품질, 고성능의 고가 제품에 매달리다 시장을 정확히 꿰뚫어 본 한국 등 경쟁 메이커에 밀려 퇴출됐다. 달리 표현하면 제조문화의 과잉, 자기만족의 종말이다.이후 20년 가까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절대 강자 삼성과 SK하이닉스, 마이크론사의 각축전 양상이다. 그런데도 일본 반도체 기업과 기술자들은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기술력은 뒤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경영과 전략에서 밀리고 가격 경쟁력이 없는데도 기술 타령만 해대는 것이다. 저비용에 시장이 원하는 제품, 즉 제조의 기본을 무시하면 실패는 부르지 않아도 다가온다. 일본 반도체의 실패는 한마디로 병을 병으로 보지 않는 데 있다.비슷한 사례가 요즘 위기감이 높아진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이다. 각종 지표의 하락과 민생 악화가 문재인표 정책의 쌍두마차인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소득을 늘려 민생과 경제에 피가 돌게 하겠다는 탈양극화 정책이 위기에 몰린 이유는 뭘까. 현실과 겉도는데도 최상의 해법이라며 우기고, 궤도 수정을 외면하는 고집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탐욕이 보수를 망치고, 아집이 진보를 그르친다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경제 교조주의가 오히려 민생을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일본병과 증상이 비슷하다.경제 패러다임을 바꾸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의욕과 구호만으로는 바꾸기가 어렵다. 철학이 아무리 깊어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면 변화와 변신은 그림의 떡이다. 시장 주체들이 함께 공감하고 힘을 모을 때 비로소 환경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는 법이다.소득이 거꾸로 줄어드는 소득주도성장, 개혁 없는 혁신성장은 극심한 일자리난을 부른 '일자리 정부'만큼이나 모순이다.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의 비명이 결코 자장가가 아님을 문재인 정부는 알아야 한다. 지금 한국경제라는 시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일자리 감소나 투자, 소비, 수출 감소는 결코 엄살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내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 해법의 출발은 경직된 도그마를 버리고 정책 유연성을 찾는 일이다. 일본 반도체가 무용한 기술에 볼모가 됐고, 문재인 정부는 철학에 발목을 잡혔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 상태로는 한국경제 반등은 없다.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2018-07-03 05:00:00

[세풍]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미신

의도가 반드시 의도한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그렇다. 독일 국민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 것이 목적이었던 2차 대전 때의 독일 대도시에 대한 연합군의 전략폭격은 좋은 예다. 독일 국민 30만5천 명이 사망하고 70개 독일 대도시가 파괴됐지만,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전후 영국 폭격조사기관은 "독일 도시에 대한 공격이 민간인의 사기 저하를 겨냥한 것이었다면 이는 명백히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미국 전략폭격연구소의 의견도 이와 같았다.전략폭격의 효과는 전혀 엉뚱한 데서 나왔다. 독일 공군을 소모전으로 끌어들여 독일 공군력을 소멸시킨 것이다. 미국이 P-51, 선더볼트 등 압도적 성능의 장거리 호위 전투기를 개발하면서 연합군 폭격기를 요격하는 독일 전투기는 독일 상공에서 사라졌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 미군은 8천722대의 항공기를 동원했으나 독일은 고작 전투기 250대만 띄울 수 있었다.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장병들에게 "제군들이 머리 위에서 전투기를 보게 된다면 그것은 아군기일 것이다"라고 '보증'했던 이유다.그러나 이는 본래 목적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어쨌든 연합국의 승리라는 최종 목표에 기여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그나마 다행인 경우다. 그 반대로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프랑스 대혁명 때 모든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이겠다며 '반값 우유'를 명령한 로베스 피에르의 고귀한 뜻이 농민의 젖소 사육 포기와 우윳값 폭등을 불러와 결국 부자만 우유를 먹을 수 있게 된 역설을 낳은 것이 대표적이다.문재인 정부도 똑같은 '선의(善意)의 함정'에 갇혀 있다. '소득 주도 성장'은 그 의도만 놓고 봤을 때 참으로 인간적이고 따뜻한 정책이다. 그러나 결과는 의도의 선함을 배반하고 있다. 최저임금을 올렸지만 1분기 중 소득 격차는 사상 최대로 벌어졌고 고용 사정은 '참담하다'는 것 말고는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렵게 악화됐다. 최저임금 인상이 영세 사업자의 인건비 부담을 가중시켜 고용을 줄일 수밖에 없도록 한 때문이다.다른 정책도 마찬가지다. 탈원전에 따른 신재생 에너지 지원 정책은 산림 파괴와 환경 훼손을 낳고 있으며, 모든 근로자의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한 주 52시간 근무제는 근로소득 감소와 기업이 인력이 부족해도 충원하지 않으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런 부작용이 '미지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견됐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 정부는 귀를 닫았다. 예상대로 부작용이 나타나자 통계까지 조작해 '선한 의도의 악한 결과'를 가리려 한다.세상은 복잡하다. 그 메커니즘을 인간이 완벽히 알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을 단순하게 보려 한다. 특정 시점의 특정 현상은 인간의 의지 밖에 있는 복수의 유동적 요인의 상호작용이 빚은 결과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야 세상을 통제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합리적 근거도 없다. 그래서 이런 사고방식은 일종의 미신(迷信)이다.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섬너는 "미신의 전체 양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신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와 결합하고 있다"고 했다. '선한 의도'의 아집에 빠진 문 정부를 보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적이다. 이런 현대의 미신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과를 보고 생각을 고치는 것뿐이다. "나는 사실이 바뀌면 생각을 바꿉니다. 그쪽은 어떻게 하나요?" 소득 주도 성장 개념의 단초를 제공한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2018-06-26 05:00:00

정인열 논설위원

[세풍] 남북, 경쟁 잘만 하면

남북 강산이 두 쪽으로 갈라진 지도 벌써 70년이 넘었다. 그러는 사이 서로 가는 길이 닮은꼴이기도 했고 전혀 그렇지 않기도 했다. 이는 남북 강산의 하늘과 땅, 사람의 기운이 서로 작용하는 바가 달라서일 것이다. 서로 경쟁하며 견제하기도 했고 상대를 거울삼아 다른 길로 나선 일들도 숱했다. 남북 강산의 다른 두 체제는 그렇게 지금까지 지냈다. 되돌아보면 배울 바가 없지 않은 그런 역사임이 틀림없다.먼저 경쟁이 성공적인 결과로 끝난 일, 토지개혁이다. 이는 1945년 8월 광복 이후 북쪽에서 먼저 시작돼 1946년 3월 마쳤다. 그 거센 바람은 남쪽으로도 불어닥쳤고 남쪽 해방 정국의 뜨거운 감자였다. 그러나 친일 지주 등 반대 세력에 부딪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1950년 3월, 한국전쟁 직전에야 공포될 수 있었다. 이는 식민 지배 독립국 가운데는 성공 사례가 드물 만큼의 성과였다. 비록 두 쪽의 개혁 방식은 달랐지만 빼앗긴 땅을 백성에게 돌려주는 목표는 같았다. 두 체제의 성공작이었다. 남쪽은 이로 인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 까닭이다.다음은 불행한 경우다. 1960, 70년대, 남한 독재와 북한 세습의 씨앗을 뿌린 일이다. 남에서는 196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연임을 위한 개헌이 이뤄지고, 북에서는 1967년 김일성의 유일 독재 체제가 구축되고 김일성은 수령에 올랐다. 이를 바탕으로 남에서는 장기 집권을 위한 1972년의 10월 유신과 11월 유신헌법이, 북에서는 세습을 위한 1974년 유일 체제 10대 원칙 제정과 김정일 후계자 결정이 이뤄졌다. 가지 말아야 할 닮은꼴이다. 결국 박 대통령은 총탄 서거라는 오점을, 북은 유례없는 독재 세습 국가의 오명을 얻었다.1980, 90년대의 모습도 새길 만하다. 남쪽은 1987년 민주화로, 반면 북한은 1980년 김정일의 세습 공식화로 한 획을 그었다. 또 남쪽은 1988년 하계 올림픽으로, 북쪽은 맞불로 1989년 제13회 세계청소년축전을 열어 세 과시 경쟁의 길을 걸었다. 게다가 1990년대 남북은 각각 최대 규모 고통의 동병상련을 겪었다. 남쪽이 1997년 '단군 이래 최대 위기'의 IMF 경제난을 만났고, 북쪽은 1995~2000년 '한국전쟁 이후 처음'인 '고난의 행군'으로 무려 33만~300만 명이나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대재앙에 시달렸다.2000년대의 남북은 두드러졌다. 두 차례(2000년2007년)의 남북 정상회담, 북한의 두 차례(2006년2009년) 핵실험, 서해 무력 충돌(2002년 2009년)로 남북이 맞은 기회와 시련의 시기였다. 특히 2010년대는 더욱 그랬다. 먼저 권력 이동이다. 남쪽에서는 촛불 시위 끝에 2017년 진보 정권이 들어섰다. 북에서도 2011년 김정일 사후 김정은의 3대 세습 정권이 출범했고 그는 도발의 날을 보냈다. 2013~2017년 네 차례 핵실험, 2018년에는 한 달 만에 두 번의 남북 정상회담,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의 직통 전화도 갖게 됐다.이런 역사를 되짚어 보면 앞으로 남북 강산에 다가올 일에 더욱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강산을 휘감는 바람의 세기도 예사가 아니어서다. 무엇보다 북쪽의 '위로부터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 김정은 출범 10년이 가져올 변화의 바람은 지금까지 70년 세월의 바람과는 분명 다르다. 바람의 방향도 지금까지는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혹 남북 토지개혁에 버금갈 일의 징조 바람일까. 문재인 대통령의 평창올림픽 구상 이후 불어오는 남북 강산의 바람이 어느 때보다 촉감이 좋다.

2018-06-19 05:00:00

김해용 논설위원

[세풍] 대구시장의 세배

대구에는 3명의 전임 민선 시장이 산다. 문희갑, 조해녕, 김범일 전 시장이다. 전임 민선 시장 모두가 생존해 고향에 머무르는 사례는 국내에 흔치 않다. 이런 전임 시장을 현직 시장이 잘 모시지 않을 수 없다. 권영진 현 대구시장은 전임 시장들을 극진히 모시는 편이다. 대구시장에 당선된 이후 골프를 끊고 당구를 즐겼지만, 수년 전 골프를 재개한 이후부터는 전임 시장을 모시고 라운딩을 하곤 한다.전·현 시장들이 골프장에서 한나절을 함께 보내면서 "굿샷!"만 외칠 리 없다. 모두가 대구시장 유경험자이다 보니 시정과 관련된 말을 많이 나누게 된다. 현직 시장의 고충 토로와 전임 시장의 훈수·조언이 대화의 단골 메뉴다. 선배 시장의 조언은 훈수, 간섭일 수 있지만 '돈으로도 못 구할 교훈'일 수도 있다.해가 바뀔 때마다 권영진 시장은 전임 시장에 대한 세배를 잊지 않는다. 그런데 전임 시장 세 명의 손님맞이가 조금씩 다르다. 문희갑 전 시장은 여든을 넘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열렬하게 후배 시장을 맞이한다. 막걸리 술상을 차려놓고 격정적 어조로 시정 관련 충고를 하는데 듣다 보면 3시간은 기본이라고 한다.조해녕 전 시장의 손님맞이는 담백하다. 차와 강정을 내놓고는 시정에 관한 이런저런 의견과 주역 등 고담준론을 나눈다. 손님을 오래 잡아두지 않는 성향이어서 20분쯤 지나면 권 시장 일행을 '강제로' 내보낸다고 한다. 김범일 전 시장은 셋 중에 가장 조용한 퇴임 생활을 즐기고 있다. 올해의 경우 권 시장의 세배를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어쩌다 만남의 자리가 생기면 후배 시장이 새겨들을 만한 조언을 해준다고 한다.현직 대구시장이 전임 시장을 잘 모시는 것은 같은 뿌리 정당 소속이라는 유대감이 있어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1995년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한 이래 대구에서는 현 자유한국당 소속 후보만 시장에 당선됐다. 더불어민주당이나 무소속 시장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이번 6·13 지방선거에서도 한국당 소속 후보의 당선은 따 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권영진 김재수 이재만 이진훈 등 4명의 예비후보가 각축을 벌인 한국당 예선이 사실상의 본선으로 간주됐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출마하지 않는 한 대구시장 선거는 하나 마나 한 게임이 되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그런 대구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당 권영진 후보와 민주당 임대윤 후보가 오차 범위 내에서 경합을 벌이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잇따라 발표됐다. 한국당 후보가 매번 무혈입성해오던 보수의 텃밭이 이번 지방선거 최대 격전지로 떠오른 것 자체가 이변이다. 가히 상전벽해급 변화다.보수 후보의 일방적 승리가 수십 년간 이어져온 대구가 여야 경합지로 떠오른 것은 지역 발전에 나쁜 시나리오가 아니다. 누가 당선되든 간에 간발의 차이로 승부가 갈린다면 대구는 여야의 '집중 구애(求愛)' 대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선거의 박빙 승부는 유권자로서 무조건 '남는 장사'다. 이번 선거의 여야 각축전은 대구에서 깃대만 꽂으면 당선되는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신호일 수 있다. 보수와 진보가 경합하고 정치인이 인물로 승부하는 진정한 실리 선거의 시작이다.권 시장이 이번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면 내년에도 전임 시장들 집에 세배를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하면 세배를 받아야 하나 고민해야 할 입장이 될 것이다. '세배를 가느냐, 세배를 받느냐.'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2018-06-12 05:00:00

박병선 논설위원

[세풍] 선거가 기다려진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선거는 생물이다'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지만, 적어도 대구경북에서는 그 말이 통용되지 않았다. 요즘 유행어로는 선거가 무슨 '불가역적(不可逆的) 대상'이 아닌데도, 특정 정당의 깃발만 꽂으면 당선됐으니 남사스럽기 짝이 없었다.이런 현상이 30년간 계속되면서 특정 정당 구성원들은 썩어 문드러졌고, 유권자마저 우습게 여겼다. 국회의원이 되고, 그 자리를 유지하려면 중앙당 실력자에게 손을 비비고 줄만 서면 될 터인데, 귀찮고 힘들게 지역민에게 봉사할 필요가 없었다. 일부는 고향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지역민을 팔아 출세 가도를 달렸으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전부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무책임' '무소신' '무능'의 대명사들이 설치고 행세한 곳이 대구경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렇게 황량한 배신의 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모양이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구경북의 판세가 요동치고 있으니 반가운 일이다. 이번만큼 박진감 있고 흥미진진한 선거가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대도시뿐만 아니라 시골 군(郡)까지 한국당과 민주당 혹은 무소속 후보가 접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에 세상이 한순간에 바뀌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보름 전만 해도 '대구경북마저 이럴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기자 생활 헛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대구시장·경북지사 선거에서 한국당 후보와 민주당 후보가 오차범위 내지 10%포인트 이내의 지지율 차이를 보인다는 소식부터 경천동지할 일이다. 1995년 문희갑 전 대구시장이 무소속으로 당선된 이후 선거다운 선거가 이뤄지는 것은 처음이다. 지역 민주당 인사들 숫자가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상황에서도 이럴진대, 좀 더 경쟁력 있는 인물이 나왔더라면 뒤집어졌을 것이 확실하다.선거판에서는 이런 현상을 두고 '바람' 혹은 '민심의 흐름'이라고들 한다. 전국적으로 민주당이 휩쓸고 있는 판세를 두고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대구경북의 변화는 좀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할 것이다. 수십 년간 쌓이고 쌓인 모순과 적폐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이 아닐까. 지역에서 한국당에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민심의 반영이 아닐까.한국당의 구태의연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 공천 과정을 보면 민심이 이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회의원들이 공천권을 휘두르면서 능력과 경력이 의심스러운 인사, 자신과 가까운 인사를 대거 공천했다. 후보가 주민에게 봉사할 수 있을지 여부는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이들 국회의원은 탐욕과 오만에 젖어 희한한 방식의 '사천'(私薦)을 자행한 걸 보면 시대가 달라진 줄 모르는 듯했다. 역설적으로 이들이야말로 대구경북에 '한국당 독주시대'를 종식시킨 주역 중의 주역이다.이번 선거 후에는 대구경북은 특정 정당이 독식하는 곳이 아니라 '공존'과 '균형'이 가능한 지역으로 바뀔 것이다. 특정 정당이 군림하면서 온갖 악취를 풍겼으니 맑고 깨끗한 공기가 유입돼야 한다. 이제는 유권자를 받들어 모시지 않으면 어떤 정당이든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정치인에게 경쟁을 시키고 성과를 가져오는 정당에게 표를 주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다고 필자를 정부·여당 편이라고 오해는 하지 마시라. 지역을 발전시키려면 정당 간 경쟁이 필요하다고 믿는, 소심한 기자일 뿐이다.

2018-06-05 05:00:00

서종철 논설위원

[세풍] 지렛대가 많아야 일하기 쉽다

문재인 정부가 요즘 안팎으로 바쁘다. 4월27일 이후 한달남짓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 국면에서 문 대통령은 '당사자'로, 또 '중재자'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김정은과 두차례나 얼굴을 마주했고, 미국으로 날아가 트럼프와 나란히 앉았다. 그렇지만 몇 시간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엎치락뒤치락하는 '비핵화' 협상은 문 대통령에게도 어려운 시간표다. 그러나 문재인의 외교(外交)가 '한반도 평화'에 초점이 맞춰진 이상 반드시 풀어야할 과제다.트럼프의 전격적인 북미 회담 취소에서 보듯 무슨 일이든 변수가 있게 마련이다. 고산준령을 오르는데 늘 맑은 날씨만 바랄 수 없지 않나. 내달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입에 내뱉고 돌아서자마자 반전의 스프링이 작동한 것도 대사(大事)의 속성이다. 잠시 포트홀(Pothole)에 빠졌던 수레바퀴가 다시 구르기 시작한 것은 어떻든 다행한 일이다. 험담에 열을 올리던 미'북 외교 실무자들이 판문점으로, 싱가포르로 바삐 움직이며 회담 준비를 서두르는 것도 보기에 전혀 나쁘지 않은 장면이다.이쯤에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정책이 아무런 문제 없이 제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문 대통령은 '한반도 운전자론'을 강하게 내세웠다.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의 당사자라는 인식에서다. 하지만 핸들을 쥐었다고 내가 생각한 경로나 계획대로 차가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차가 매끄럽게 잘 굴러가도록 돕는 윤활유의 역할도 운전자의 존재나 위상 이상으로 중요하다. 낡고 녹이 낀 기계일수록 질 좋은 윤활유가 필요한 법이기 때문이다.문재인 정부는 이제까지 한반도 긴장 완화와 비핵화 문제가 매끄럽게 풀리도록 자리를 깔고 테이블을 놓는데 나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목표를 의식한 나머지 간혹 무리수를 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산 정상에 오를 때 줄곧 오르막만 오르면 된다는 착각과 마찬가지의 경우다. 더 높은 곳에 가기 위해서는 내려가거나 돌아가는 길도 숱하다.미국은 남북 평화 잔치에 빼놓을 수 없는 지렛대다. 중국도 한반도 문제에 있어 변수이기는 하나 지금은 먼지만 일으키는 고약한 참견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일본은 잔치를 망치려고 줄곧 비를 뿌려대는 존재감 약한 훼방꾼으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남북 평화라는 공감대가 아무리 넓고 두터워도 주변에서 얼마나 큰 박수를 쳐주는가도 중요하다. 지금은 중국과 일본이 눈밭에 뿌려진 굵은 모래와 같은 존재일지 모르나 앞으로 그들이 한반도 평화 정착에 보태야할 손이라는 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지렛대가 많아야 힘이 덜 들고 일하기도 쉬운 법이다.기술자의 가방에는 수많은 연장이 들어 있다. 어떤 돌발 변수에도 너끈히 일을 풀어가기 위해서다. 문 대통령의 가방에는 과연 쓸모 있는 연장이 얼마나 될까.국민이 문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한반도 평화라는 외교무대를 흥행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국민은 어설픈 프로모터가 아니라 냉정한 중재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반도 평화라는 소명의식과 역사적 책임감 못지 않게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내는 세련된 기술자 말이다. 복잡한 원리나 어려운 기술을 쓰고도 실제 결과는 간단하거나 쓸모가 별로 없는 '골드버그 머신'(Goldberg machine)이 아니라 단순한 원리나 구조로도 복잡한 기술을 구현해내는, 유능한 매치메이커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018-05-29 05:00:00

[세풍] 체제는 스스로 보장하는 것이다

미국은 김정은에게 비핵화의 대가로 '체제 보장'과 '경제 성장'을 제시한다. 김정은 체제를 물리적으로 무너뜨리지 않겠으며, 빈곤 탈출을 돕겠다는 것이다. 인민을 굶기는 체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전자가 '군사적 체제 보장'이라면 후자는 '경제적 체제 보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이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한 비핵화'를 수용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나 '체제 보장'은 떨치기 힘든 유혹임은 분명하다. "이밥(쌀밥)에 고깃국"과 "비단옷에 기와집"이라는 선대(先代)의 약속이 약속으로만 존재하는 현실에서 '경제적 체제 보장'은 특히 그럴 것이다. 그 방안으로 미국이 들고나온 것이 '북한판 마셜플랜'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유럽 재건을 위해 1948∼1951년 서유럽 16개국에 130억달러(현재 가치로 5천800억달러)를 쏟아부었던 '유럽부흥계획'과 같은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 재정이 투입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그 의도는 같다. 문제는 '북한판 마셜플랜'이 제대로 작동할 것이냐이다. 물론 '완전한 비핵화'의 실현을 전제로 한 질문이다. 그 답을 알려면 '마셜플랜'이 왜 성공했는지 봐야 한다. 마셜플랜의 성과는 눈부시다. 1947∼1951년 서유럽의 통합 국민총생산(GNP)은 30% 이상 증가했다. 산업 생산은 전쟁 전인 1938년보다 41% 증가해 목표치 30%를 초과했다. 서유럽의 경제는 전쟁 전 수준 이상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서독은 발군(拔群)이었다. 1940∼1959년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등 서유럽 주요 8개국 중 서독의 1인당 GNP 평균 성장률은 6.3%로 가장 높았다. 놀라운 것은 서독이 받은 지원금이 영국과 프랑스의 절반 정도였는데도 이런 성과를 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미국의 달러가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마셜플랜이 시작된 1948년 서독의 불변가격 기준 자본스톡 즉 생산 능력은 전시 파괴에도 전쟁 전인 1936년보다 10% 높은 수준이었다. 양질의 노동력도 풍부했다. 나치 지배하에서 일부가 해외로 빠져나갔지만, 과학기술 인력 대부분은 독일에 남아 있었다. 여기에 동독에서 탈출한 고급 인력도 가세했다. 원조보다 독일 본래의 잠재력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얘기다.('경제사 산책', 양동휴) 더 근본적으로는 확고한 시장경제 체제였다는 사실이다. 서독의 첫 경제장관 에르하르트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정부의 개입과 감독을 허용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제의 자율성을 지향하는 체제였다. 이 중 어느 것도 북한에는 없다. 무엇보다 시장경제가 아니다. '북한판 마셜플랜'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은 비핵화의 대가로 김정은이 내밀 청구서가 2천1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은 자국민의 세금은 쓰지 않겠다고 했으니, 얼마가 됐든 남한 국민이 그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할 것이다. 남한 납세자가 지갑을 열려 할지도 의문이지만 더 근본적 문제는 그렇게 해서라도 '북한판 마셜플랜'이 성공할 것이냐이다. 북한의 체제 변화가 없이는 어려울 것이다. 선진국의 원조가 한국 등 극히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저개발국을 빈곤에서 구해내지 못한 실패가 보여주듯이 경제는 돈만 쏟아붓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결국 '경제적 체제 보장'은 누가 해준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보장하는 것이다. '북한판 마셜플랜'이 장밋빛 허구로 보이는 이유다.

2018-05-22 00:05:01

[세풍] 남북 두 집이 갈 길

우리는 이 땅의 역사에서 여럿 망한 나라를 봤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의 패망이 그렇다. 동전 두 쪽처럼 망국과 함께 통일(統一)신라의 등장과 고려, 조선의 건국과 아울러 조선이 이민족에게 35년간 빼앗기는 뼈아픈 국치도 겪었다. 이어 되찾은 나라, 남북 강산의 허리가 잘리는 아픔의 분단(分斷)도 당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되풀이되는 나라 흥망에 대한 까닭도 살폈다. 특히 국치와 분단은 이민족이 끼어드는 바람에 빚어진 불행인지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더욱 그 원인을 따져야만 했다. 우리끼리 주고받던 이 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그리고 미국·옛 소련 탓에 국치와 분단의 국운을 맞았으니 불면의 날들을 보내면서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밝혀진 바는 많고 넘친다. 분명한 답은 먼저 백제와 고구려의 망조(亡兆)에서, 또 '세 땅을 한 집으로 합친'(合三土爲一家) 통일신라가 고려에 자리를 물려준 데서, 그런 고려가 다시 조선으로 바뀐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분열과 사회 결속력 및 지도력 실종, 부패 등이었다. 정치적 분열과 백성의 결속력 붕괴는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나당(羅唐) 연합군과 운명을 건 싸움 앞에서 벌어진 의자왕 조정의 분열, 충신의 투옥과 유배, 갈 곳 잃은 신하와 백성의 백제가 그랬다. 연개소문 세 아들의 권력 다툼과 적진 투항 그리고 적 앞잡이 행세로 자중지란에 빠진 최강의 고구려도 같았다. 신라 역시 잦은 왕권 쟁탈전 끝에 나라를 고려에 바쳤다. 고려, 조선의 운명도 앞선 왕조와 비슷했다. 일제 패망 뒤 광복 때 이민족의 남북 진출은 줄곧 지킨 이 땅의 '한 집'을 남북 '두 집'으로 기어코 가르고 말았다. 그렇게 70년이 흘렀다. 그리 갈라진 두 집이 다시 한 집으로 합치기 위한 부단한 노력 끝에 '전환의 2018년'을 맞았고, 이 땅을 둘러싼 변화의 정세가 나라 안팎으로 촌각을 다투며 긴박하다. 마냥 두 집이냐, 아니면 한 집을 향한 새길로 가느냐의 즈음이니 더욱 관심이다. 먼저 나라 밖이다. 6월 12일, 이 땅의 역사 물줄기를 바꿀지도 모를 싱가포르의 '세기적 만남'이 이뤄진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북핵 담판을 위해서다. 이달 22일엔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있다. 9일에는 한일중 정상회의, 7~8일 북중 정상회담, 4월 27일에는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역사적인 만남도 있었다. 지금까지 분위기는 긍정적이라 세계 이목이 집중된다. 문제는 나라 안이다. 특히 정치가 문제다. 6·13 지방선거 탓이겠지만 진흙탕 싸움이다. 공격의 입도 거칠다. 4월 닫은 국회 문은 5월에도 열릴 기미조차 없다. 걸림돌은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의 특검이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정치력 부재 탓이 크다. 대통령 측근인 김경수 국회의원이 연루된 만큼 그를 구하려 국회를 놀리고 국민을 무시하며 오만을 부리고 있다. 높은 대통령 지지도와 야당 덕에 반사로 얻은 상당한 정당 지지도가 무기임이 틀림없다. 서로의 엇갈린 이해로 남북이 옛날처럼 한 집으로 되는 것을 결코 반기지 않을 나라 밖 '맹수'의 주변 강국 틈바구니 속에서 남북문제 해결에 동력이 될 국민적 지지와 합의로 나라 밖을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무한 책임인 여당이 이러니 그저 국민이 딱할 뿐이다. 늦기 전에 여당은 국회를 열고 특검 수용과 함께 김경수 의원과의 질긴 끈을 끊고 모처럼 맞은 남북 모두에 도움될 기회를 살릴 지혜와 힘을 모을 때다. 이 땅 밖 이민족의 강국은 결코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역사가 그랬다.

2018-05-15 00:05:00

[세풍] 아! 판문점

우리 조상들은 태생적으로 착했다. 백성을 매몰차게 버린 군주조차 민초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한양을 버리고 파천길에 오른 선조에게도 백성들은 충(忠)을 다했다. 파주를 지난 선조의 어가(御駕)를 임진강이 가로 막아섰다. 임금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자기 집 대문을 뜯어내 널빤지 다리를 놓았다. 이후 이 마을은 '널문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널빤지 문으로 다리를 만든 마을'이라는 뜻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전란(戰亂)으로 임금의 피란 기억을 간직한 곳 널문리는 그로부터 359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1951년 6'25전쟁 휴전을 준비하던 UN군은 개성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을 회담 장소로 정했는데 그곳이 바로 널문리이다. 널문리에 있던 작은 가게 앞 콩밭에 천막을 쳤는데 장소 이름을 영어와 중국어로 옮기기가 마땅찮아 쓴 표기가 '판문점'(板門店'널문리 가게)이다. 판문점은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의 아픔과 대치 상황을 침묵과 긴장감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지금의 판문점은 널문리 가게로부터 남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자리해 있다. 비무장지대(DMZ) 접경 지역에 동서 800m, 남북 600m에 걸친 장방형 땅인데 판문점의 공식 명칭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다. 세계의 첫 이목을 끈지 67년이 흐른 지금 판문점은 다시금 세계 역사의 큰 분수령 위에서 주목받고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남북 정상회담이 이곳 판문점에서 열렸다. 북한 핵무기 개발로 인한 군사적 충돌 위험이 백척간두에 처한 가운데 남북 정상회담 장소로서 판문점이 전해주는 의미는 너무나 각별했다. 남북 정상회담은 들어가는 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북미 정상회담이다.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싱가포르와 판문점 두 곳이 유력하다는데, 역사성으로 보나 정치적 효과로 보나 판문점이 우월해 보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판문점을 선호한다는데, 백악관 보좌진들과 미국 국무부'국방부 관료들이 이를 뜯어말리고 있다고 한다. 북미 정상회담 장소와 날짜가 결정됐다고 해놓고도 미국이 발표를 늦추고 있는 것은 이와 관련한 갈등이 미봉합 상태이며 최종 결정에 변수가 아직 남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유추를 하게 한다. 회담 결과만 좋다면야 싱가포르이든, 판문점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혹여나 북미 정상회담 추진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미국 주류 세력들의 심사가 '판문점 비토'로 나타나고 있다면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를 뺀 대다수 미국 정치권 및 군산복합체와 한반도 주변 열강들이 남북 평화체제 구축을 마뜩잖아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더구나 북한 내부에도 평화체제 구축에 반대하는 군부 세력들이 있을 텐데 김정은이 이들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북핵 폐기와 남북 평화 도래는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어차피 북핵의 완전한 폐기가 성사되지 않는다면 한반도는 전쟁의 격랑 속에 휘말릴 공산이 크고 그 완충지대도 날로 줄어들고 있다. 평화 체제 구축이 선택지가 아니라 반드시 가야 할 목적지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왕지사 트럼프와 김정은이 회담한다면 판문점에서 만나는 그림을 그려본다. 현실적으로 난관이 첩첩산중인 북핵 폐기 이슈에서 북미 판문점 회담은 하나의 푸른 신호등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2018-05-08 00:05:04

[세풍] 한국당 '폭망론'

얼마 전 지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왜 그렇게 자유한국당을 미워하느냐?"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한국당을 줄곧 비판해온 필자의 칼럼을 꼬집어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요즘 한국당은 완전히 내려앉았는데 불쌍하지도 않느냐. 이제는 그만 욕해도 되지 않느냐…." 필자도 마음 약한 언론인인지라 한국당의 궁색함을 어찌 모를까마는,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연민의 정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다소 냉정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당은 폭삭 망해야 합니다. 집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한국당이 요즘처럼 어정쩡하게 살아 있으면 예전과 다름없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분에게 한국당이 과거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6월 지방선거 '공천 파문'이라 말씀드렸다. 이를 보면 한국당이 왜 폭삭 망해야 하는지, 현재의 한국당 국회의원들이 어떤 마음으로 지역민을 대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했다. 대구경북은 한국당에게 마지막 남은 보루라고들 한다. 대구경북이 없으면 한국당은 뿌리 없는 '부유(浮遊)정당'에 불과하다. 하나뿐인 귀한 자식이라면 어르고 달래고 잘 돌봐야 마땅하지만, 한국당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겉으로는 잘 돌볼 것처럼 말을 앞세우면서도, 뒤로는 천진난만한 아이를 볼모 삼아 자신의 배 속을 채우길 서슴지 않는다. 대구시장'경북지사 광역단체장 후보는 마지못해 경선을 치렀지만, 기초단체장'지방의원 후보는 전략공천이라는 이름하에 해당 국회의원 맘대로 공천을 했으니 엉망진창이 됐다. 대구'경북 곳곳에서 '공천 파문'이 빚어졌지만, 한국당은 반성조차 없고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몇몇 곳은 기초단체장 후보로 적합한 인물이 공천됐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곳에서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 공천됐다. 나이 많고, 공직 경험이 없고, 과거가 깨끗하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문제지만, 단체장으로서 제대로 행세할지 미덥지 않은 후보가 여럿이다. 공천자보다 경력, 학력이 앞서고 일도 더 잘할 것 같은 이들은 탈락했으니 공천 심사라는 것이 왜 필요한가. 공천장을 거머쥔 시장'군수'구청장 후보의 면면을 보면 해당 국회의원과 친분이 상당한 듯했다. 해당 국회의원으로서는 공천자가 '꼬봉'처럼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하고, 재산까지 많으니 금상첨화일 것이다. 국회의원과 공천자, 양자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 향기로운 관계는 아닐 것이다. 주민을 위한 지방자치가 아니라, 국회의원의 탐욕과 잇속을 채우기 위한 지방자치인지 헷갈리는 상황이다. 한국당이 지금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였다면 과거와는 달라져야 하는데도,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어떻게 이런 짓거리를 하면서 대구경북에서 지지를 호소할 수 있는지 양심불량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홍준표 대표가 전략공천 카드를 들먹일 때부터 이런 작태를 예상하고 의도한 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대구경북 국회의원들에게 공천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대신, 자신의 당내 지지를 확보하려는 꼼수가 아니라면 요즘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인가. 지역민은 바보가 아니다. 한국당의 부패와 탐욕은 머지않아 심판받을 것이다. 얼마 전 한국당이 회의실에 '그래서 우리는 망했다'는 문구를 내걸었지만, 이제는 좀 바꿔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대구경북에서도 망했다."

2018-05-01 00:05:00

[세풍] 부(富 )도 권력이라는 착각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이 그제 딸 조현민 전무의 '갑질' 논란과 관련해 사과문을 냈다. 축약하면 '조현아·현민을 그룹 내 모든 직책에서 즉시 물러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조 회장이 "모든 게 제 불찰이자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하지만 여론은 못내 차갑다. 대주주 일가의 고질화된 폭언과 갑질 등 안하무인식 패악질을 바닥까지 조사해 단단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한 번은 속아도 두 번을 속을까'라는 국민적 분노다. 지난 수십 년간 거침없던 부(富)의 위상이 위태해졌다. 상당수 한국의 부자들이 제멋대로 휘둘러온 부정한 권력과 횡포에 시민사회가 더는 참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고 있어서다. 부를 대물림한 이들의 까닭없는 욕설과 발길질에 맞서 분노의 돌팔매질을 선택한 것이다. 서슬 퍼런 정치권력도 뒤엎는 마당에 그깟 돈으로 쌓아올린 성채가 대수냐는 판단이 99% 보통의 사람들 심리를 관통한다. 그런 점에서 연일 터져 나오는 조씨 일가의 추태는 재벌을 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변곡점이다. 단순히 부자들 횡포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재벌 정서 차원이 아니다. 남보다 많이 가졌다는 이유로 주변의 보통 사람들을 '욕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마구 대하는 시대착오적 졸부 근성에 대한 저항이자 '을·병의 반격'이다. 상식과 동떨어진 부의 개념이 권력으로 변질되고, 기업을 사유화한 것도 모자라 공법(公法) 위에 군림하면서 마침내 역풍을 맞게 된 것이다. 참다못한 대한항공 전·현직 직원들이 '갑질 제보 채팅방'을 만든 이유다. 개설 일주일 만에 1천 명에 가까운 사람이 몰렸다. '대한항공 사명 교체'와 '국적기 지위 박탈' 등 청와대 청원에 10만 명 이상 참여한 것도 심상찮은 조짐이다. 이는 부자들의 비뚤어진 선민의식, 특권의식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반발이다. 일상이 되다시피한 일부 재벌 일가의 횡포에 역겨움을 느끼는 국민이 그만큼 많다는 소리다. 지난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사례는 도화선이다. 시민사회가 본격적으로 분노의 심지에 불을 댕긴 출발점이다. 부의 힘이 선출된 정치권력을 능가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니 오죽했을까. 쫓겨난 전직 대통령과 달리 이 부회장은 고작 353일 만에 수의를 벗었다. 이런 결과만 놓고 보면 합리적인 사고와 상식에 기초한 민중의 호흡이 더욱 가빠지고 있음을 감지할 필요가 있다. 권력은 부의 보상물이 아니다. 권력은 대중이 인정한 권위의 소산이자 좋은 리더십을 뒷받침한다. 만약 이에 의탁하지 않고 제 손으로 만든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인성도 능력도 안 되면서 부를 대물림한 이들이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벌이는 제멋대로의 행동은 힘도 권위도 아닌 반사회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오너 리스크'가 재벌만이 아니라 중소기업에까지 만연했다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무분별한 권력은 스스로를 망치는 흉기임에도 우리나라 부자들은 이에 매우 둔감하다. 분명한 사실은 절대왕정 시대에도 잘못된 권력은 꼭 치리(治理)했다는 점이다. 시민사회가 권력의 주체인 현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민란(民亂)은 결단코 우연히 일어나는 사변이 아니다. 벌어지는 일과 현상에 대한 소문만 듣고도 누구나 궐기의 이유와 정당성을 갖다댈 만큼 간단하고 명확하다. 지금 기운을 키우고 있는 을의 반격이 당연한 이유다. 무서운 것은 민란은 반드시 단호한 결과와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는 동서양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민중이 일으킨 물결은 무소불위의 권력이라 하더라도 가차없이 휩쓸고 지나갔다. 국민의 눈 밖에 난 몇몇 재벌이 이제서야 이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면 늦어도 한참 늦다. 평소 하던 버릇대로 물컵을 던지고 욕하고 악쓰던 버릇이 열길 높이의 해일로 되돌아올 줄 어찌 알았을까. '사악한 부'에 대한 을의 되갚음이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2018-04-24 00:05:01

[세풍] 이런 꼴 보려고 촛불 들었나

'김기식 사태'는 몇 가지 중요한 판단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국회의원의 잘못된 행동이 '관행'을 따른 것이라면 문제 삼지 않아도 되는지, 그 잘못된 행동이 주요 직위를 맡아서는 안 될 정도의 하자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도구로서 '국민의 눈높이'와 '평균적 도덕성'의 기준은 어떤 것이고 그것은 누가 정하는지, 그 행동이 위법이라는 '객관적 판정'을 내리는 주체는 누구인지 등이다. 청와대의 대답은 명쾌하다. 피감기관의 돈으로 외유성 출장을 다녀온 김기식의 행동은 당시 국회의원들의 관행이었으며, 국민의 눈높이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해임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으며, 김기식의 도덕성이 일반적 국회의원의 평균적 도덕감각을 밑돌지는 않으며,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오만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해석'과 '판정'의 독점이다. 청와대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엿보게 한다. 하나씩 따져보자. 국민의 눈높이에 부합하지 않지만, 관행이었으면 과연 문제가 없는 것인가? 청와대는 이런 '해석'을 합리화하기 위해 19'20대 국회에서 김기식과 같은 경우가 167차례나 됐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모두 그랬는데 왜 김기식만 문제 삼느냐는 소리다. 그러나 지금은 관행이란 이유만으로 관행이 용서되는 시대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부터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다. 대통령부터 새로워지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놓고 김기식에 대해서는 "당시 국회의 관행이었다면 야당의 비판과 해임 요구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한다. 이는 심각한 자기 부정이다. 과거 정부보다 더 도덕적이라는 문재인 정부의 자부(自負)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문 정부 식으로 말하면 김기식의 과거 행적은 적폐다. 그런 적폐를 관행이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문제 삼지 말라는 것은 '도덕적'인 문 정부가 할 소리는 아니다. '적폐 진영'과 한통속이라는 자인(自認)이기 때문이다. 이런 소리 들으려고 '촛불'들이 촛불을 들진 않았을 것이다. 잘못된 행동이라도 용인될 수 있는 국민의 눈높이와 평균적 도덕성 기준에 이르면 더 할 말을 잃는다. 국민의 눈높이와 국회의원의 평균적 도덕성에 비춰 김기식의 행동은 문제가 없다는 청와대의 언급은 청와대가 문제가 없다고 하면 정말로 문제가 없는 것이란 소리다. 국민의 눈높이도 국회의원의 평균적 도덕성도 청와대가 정한다는 오만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누가 그런 자격을 줬나? 이렇게 하라고 '촛불'들이 촛불을 들었을까? 국민의 눈높이는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추상적 실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구체적 측정은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편에게는 낮추고 상대편에게는 높이는 이중 잣대로 이용되기 십상이다. 여론조사는 이런 위험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다. 물론 여론도 시시각각 변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론조사는 국민이 생각하는 국민의 눈높이를 구체적 수치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는 분명히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김기식의 사퇴 찬성은 50%를 넘었다. 청와대의 '국민의 눈높이'와 국민의 '국민의 눈높이'는 이렇게 다르다. 오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기식이 법을 위반했는지도 청와대가 판단했다. 조국 민정수석은 김기식의 외유성 출장이 '공적인 목적의 적법 행위'라고 했다. 조 수석이 판사라도 되나? 실소가 나오는 것은 이렇게 적법 판결을 내려놓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적법 여부의 유권해석을 의뢰했다는 점이다. 조 수석의 판결이 실수라는 것인가 아니면 김기식 카드를 접기 위한 출구작전인가? 어쨌든 이런 비상식을 보려고 '촛불'들이 촛불을 든 것은 아닐 것이다. 청와대 각 비서관실에는 문 대통령이 지난 2월 5일 선물한 '춘풍추상'(春風秋霜) 액자가 걸려 있다고 한다. 춘풍추상은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줄인 말로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야 하고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가 빙긋이 웃는 듯하다.

2018-04-17 00:05:00

[세풍] 평창 체육, 남북 음악, 다음?

'거칠게 날뛰며, 젖을 빨려 하는/ 어린 새끼를 걷어차고 만다/…/ 젖을 먹지 못해 안타깝게 사그라드는/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마두금 연주가 시작된다/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애잔하게 흐르는 음악/ 어미가 차츰 조용해지며 두 눈이/ 잔잔해지더니 큰 눈망울 가득 눈물이 고인다/ 가만히 젖을 내어주는 어미/ 실컷 젖을 먹고 난 새끼/ 서로의 눈빛이 따뜻하다.'(김안려, '마두금 연주에 눈물 흘리는 어미 소') 몽골 전통악기로, 말머리 모양의 마두금(馬頭琴)은 두 줄 현악기이다. 우리 해금과 같은 계통이다. 소리는 애절하다. 맑은 영혼이 깃든 듯하다. 시인의 노래처럼 새끼를 거부했던 어미 소조차 눈물 흘리게 만들지 않는가. 게다가 새끼 낳을 때 겪은 지독한 산고(産苦) 탓인지 아예 젖을 물리지 않았던 어미 소가 기꺼이 젖을 내주지 않는가. 비슷한 시도 있다. 김창근 시인의 '마두금 소리'이다. 다만 소 대신 낙타가 등장하고 어미 낙타의 마음을 바꾼 것이 마두금 소리와 낙타 새끼의 울음소리일 뿐이다. '몽골의 전통악기 마두금은 품고 있지/ 초원을 휩쓰는 바람 소리, 말발굽 소리/…/ 지독한 산고 끝에 새끼를 낳은 탓에/ 젖마저 물리지 않는 비정한 어미 낙타도/ 끝내는 눈물 흘리게 하는 새끼 낙타의 울음소리/ 아 저, 소리의 여음이나 닮을 수 있으려나/….' 음악은 이런 모양이다. 말 못 하는 소, 낙타조차 울리고 잃어버린 모성(母性)의 감정도 되찾게 하니. 하물며 사람이야. 특히 우리 민족은 예부터 음악을 좋아했으니 오죽할까. 음악으로 이 땅의 옛 사람이 하나 된 기록은 널렸다. 이제 세계가 알 정도다. 지구촌에 퍼진 음악 한류(韓流)는 바로 우리가 음악을 아끼고 즐기고 음악으로 하나 되는 민족임을 밖으로 드러낸 한 사례이다. 나라 안으로 따져도 같다. 옛 왕조를 꿰뚫어 음악 정책이 중시됐던 역사가 그렇다. 특히 조선 세종 왕이 유명하다. 음악을 아낀 선조로 그를 넘을 이는 없을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음악을 좋아했고, 퍼뜨렸고, 함께 즐겼다. (음악) 연회로 신하'백성과 소통하기 등 뭇 음악 정책을 보면 '지음'(知音) 군주라 할 만하다. 심지어 '온천 행사의 머무는 곳마다 악공들이 음악을 울리고, 목욕 때는 담장 밖에서 연주했고, 인근 백성들이 거리에 넘쳤다'고 했으니 말이다. 음악으로 위 아래 하나 되기처럼, 음악을 통해 남북이 하나 되려는 일이 남북 강산에서 펼쳐졌다. 4월 1, 3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2018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 공연 봄이 온다'이다. 이들 공연은 평창동계올림픽 때 펼쳐진 북한 공연단의 2월 8일(강릉)과 11일(서울) 공연의 답례다. 이 공연은 지난 5일 녹화방송으로 중계돼 관심을 끌었다. 특히 이선희가 열창한 신중현의 노래 '아름다운 강산'은 오늘날 남북의 대치 상황을 살필 때 가사 내용도 그렇지만 노래에 얽힌 사연으로 더욱 화제였다. '아름다운 강산'은 1970, 80년대 군사정권 아래 이뤄진 금지 목록 속의 노래였다. 음악을 잘 쓴 세종과 달리, 이 땅의 통치자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서도 뭇 구실로 여러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1975~1987년의 금지 조치 때 신중현은 이 노래를 비롯해 3차례 52곡을 금지당했다. 게다가 이 곡의 금지는 그를 좋아했다는 박정희 정권 때 이뤄졌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북핵을 둘러싼 남북 군사 긴장 상황을 풀려는 정책이 체육, 음악을 넘어 여러 분야로 퍼지고 있다.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징역 24년 선고 같은 논란이 많은 대형 정치적 현안 속 진행되는 일이라 부정적 평가도 있다. 정치적으로 마땅히 그럴 수 있다. 그렇더라도 남북 민족의 피 속에 흐르는 음악 교감 등 공통 유산의 인자를 찾아 남북이 하나 되는 일조차 그만둘 수는 없다. 특히 남북을 요리(?)하려는 주변 강국의 눈초리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럴수록 살 길은 민족 유전인자에서 찾는 지혜가 간절하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과 항일 그리고 제3의 길 찾기의 어리석음처럼 강국에의 순치(馴致)보다 차라리 영원한 야생마로 남을 일이다.

2018-04-10 00:05:00

[세풍] 무주공산(無主空山) 대구은행?

1992년 3월 대구은행 정기주주총회장. 당시 강경헌 대구은행 전무는 편안한 기색으로 주총에 참석했다.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 이상경 은행장으로부터 별다른 언질을 받지 않은 터였다. 그 경우 대개 연임이 보장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은행장 입에서 나온 발표는 뜻밖에도 전무 퇴임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강 전무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자리에는 경황 중에 챙기지 못한 그의 안경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실무형인 이 은행장과 외향형인 강 전무 사이는 원만치 않았다. 하지만 은행 안팎에서는 강 전무가 연임에 성공하고 1~2년 뒤 은행장직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대세였다. 은행장이 전무를 전격적으로 내치면서 대구은행은 후폭풍에 휘말렸다. 노동조합은 은행장의 독선 인사 규탄 서명 운동을 벌였다. 대구은행 내 경북고(이상경)와 대구상고(강경헌) 세력 간의 갈등이 터졌다는 언론보도도 잇따랐다. 주총 직후 대통령(노태우)의 대구 방문이 임박한 상황에서 은행감독원과 지역사회는 갈등 확산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이 은행장이 전격 사퇴하고 외환은행 출신인 홍희흠 씨를 제6대 은행장으로 영입하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했다. 서열 1'2위 간 권력 다툼의 결말은 양패구상(兩敗俱傷'쌍방이 다 함께 패하고 상처를 입음)이었다. 지금 DGB금융지주'대구은행(이하 DGB)에서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일들을 보면서 1992년 일을 떠올린다. 여러 비리 의혹이 터져 나오면서 박인규 회장 겸 은행장이 물러났는데 이미 그전부터 내부 권력 암투설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은행권 안팎에서는 DGB의 차기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노리고 박근혜 정부 당시 권력 실세에 줄을 댄 인사가 있다는 설마저 나돌았다. 실제로 박 전 DGB 회장은 사정기관의 수사가 은행 내부 투서에서 비롯됐다는 의심 아래 임원들에게 휴대폰 통화 내역 제출을 요구하는 등 제보자 색출에 나섰다. 올 초 인사 때 임원들을 대거 퇴진시키는 강수도 뒀다. 박 전 회장은 이를 통해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 했지만 결과는 1992년과 닮은꼴이 됐다. 경쟁자를 내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스스로도 여론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DGB 임원 인사에 정치권 입김이 작용한다는 루머는 진위를 판별하기 어렵고 허황한 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팔성 전 우리금융그룹 회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 일가에 연임 보장을 대가로 20억여원을 건넨 혐의로 수사를 받는 것을 보면 DGB 임원 인사에 정치권 입김이 전혀 없었으리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박 전 회장 역시 고향이 경산이라는 이유로 친박 실세 정치인과의 친분설이 나돌았고, 그전의 몇몇 은행장에게도 의심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DGB에서는 낙하산 외부 인사가 날아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은행장이 임기 중 용퇴하는 관례가 많았는데, 미담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권력 암투 때문에 밀려나는 경우도 있었다는 후문이 있다. 이런 루머들은 사실 여부를 떠나 DGB를 독버섯처럼 갉아먹는다. 실력이 아니라 외부 도움을 받아 승승장구했다고 의심받는 임원들이 진정한 리더십을 인정받기란 어렵다. 이 틈을 타 일부 조직원들이 정권 교체기에 권력 실세에게 줄을 대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구은행은 창립 51년 동안 꿋꿋이 성장했다. 1967년 개업식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 명의로 대구은행 1호 예금통장을 개설해주면서까지 힘을 실어주었다. 자본금 1억5천만원으로 소박하게 시작한 DGB는 현재 자본금 8천500억원에 이르는 금융그룹으로 컸다. 구성원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지역민들의 성원이 절대적이었다. 지배주주가 없다고 해서 DGB에 주인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DGB의 주인은 지역민이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는 착각에 빠져 정치권에 줄 대는 인사가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후임 CEO 선임 절차가 예정돼 있다.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실력과 명망을 갖춘 인사의 선임을 주문한다.

2018-04-03 00:05:04

[세풍] 이번 지방선거에는 바뀌려나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도 대구경북은 자유한국당의 놀이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정당이나 무소속은 나가봤자, 헛심만 쓰고 들러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TK(대구경북)지역은 한국당에게 좋은 말로 하면 '영지'(領地)이고, 심하게 말하면 '유흥장' 내지 '욕망 배출구'나 다름없는 곳이다. 혹자는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당을 과도하게 비난하는 것이 아니냐고 발끈하겠지만, 이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정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전국적인 선거 판세를 보면 한국당의 희망은 대구경북뿐이다. 한국당이 서울시장 후보도 결정하지 못한 것에서 보듯, 다른 지역 선거는 어렵지만, TK만큼은 안전하다 못해 철옹성이다. 여의도 주변에선 '한국당의 광역단체장은 대구경북만 남을 것'이고 'TK 자민련' 같은 지역당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지방선거 후 한국당이 대구경북을 마지막 보루로 삼아 명맥을 유지할 확률이 십중팔구다. 그렇다면, 한국당이 이런 상태에서 지역에서 얼마나 버틸 것이며, '낙동강 전선'을 교두보 삼아 반격에 나설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구성원의 행실과 처신을 보면 그 정당의 미래와 전망을 금세 알 수 있다. TK의 한국당 구성원들은 철저하게 타락해 자신들이 타락한 줄도 모르기에 감히 미래를 입에 올릴 수 없다. 내면을 조금만 파면 뿌리까지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이다. TK에서 진행 중인 지방선거 후보 공천 과정을 보면 머지않아 추하고 역겨운 면모가 드러날 것이다. 한국당은 대구시장, 경북도지사, 일부 기초단체장을 경선하고, 나머지는 전략공천하기로 정했다. 공천권은 해당 국회의원이나 당협위원장이 쥐고 있으니 그들 맘대로 한다고 보면 된다. 대중의 눈에 띄는 광역'기초단체장 공천은 장난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점잖은 편에 속한다. 광역'기초의원으로 내려가면 최근까지의 사례를 볼 때 거의 요지경 수준이다. 요즘 세상에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상식적이고 황당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겉으로는 유능 참신한 인물을 공천하는 것처럼 점잔 빼지만, 실제로는 '자기 사람' 심기에 혈안이 돼 있다. 바르게 행동하는 국회의원도 일부 있지만, 꽤 많은 수의 국회의원이 뒤에 숨어 추악한 행위를 즐긴다. 상당수 국회의원이 생각하는 '자기 사람'의 조건은 한 가지뿐이다. 첫째도 충성도, 둘째, 셋째도 충성도다. 충성도란 자신의 말에 따라 돈과 몸을 아끼지 않을 출마 희망자를 뜻한다. 자신이 지역구에 내려오면 '비서'나 '개인운전사'처럼 수행'운전하고 '하인'처럼 심부름하는 일은 기본이다. 부인의 수행 및 운전까지 맡는 경우도 허다하다. 저녁에 밥'술은 물론이고, 여자까지 붙여달라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몇몇 국회의원은 공천헌금을 받는다는 소문까지 있는데,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미투 운동'이 너무나 절실한 곳이다. 국회의원에게 지방의원은 좋게 말하면 '호구'이고, 심하게 말하면 '노비'와 비슷하다.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지역에서 유독 심하다. 아무리 지역민이 능력 있는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을 원하더라도, 함량이 미달되는 분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충성도가 뛰어나다고 보면 정확하다. 희한하게도, 충성도와 개인 능력은 반비례하는 경향을 갖고 있어 손해 보는 것은 지역민뿐이다. 상당수 국회의원들은 한국당이 참패하든, 공중분해가 되든 상관없이 자기 것만 챙기겠다는 심보를 가졌다. 전통처럼 전해 내려오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무장한 채 지방선거에서 또다시 한몫 챙기려는 국회의원들이 활개를 친다. 당에서 보장하는 권리를 내 맘대로 행사하겠다고 하는데, 누가 막겠는가. 흥미로운 점은 홍준표 대표가 야심만만하게 '국회의원 책임 공천'을 강조하며 전략공천을 확대했다는 점이다. 홍 대표가 TK에서 벌어지는 이런 작태를 꿰뚫고 있으면서 이런 황당한 정책을 밀어붙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럴 리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범인의 수준으로는 세상 일을 알 수 없지 않은가.

2018-03-27 00:05:00

[세풍] 호황과 불황의 차이

일본이 '디플레이션' 탈출을 선언했다. 버블 경기가 꺼지면서 촉발한 '잃어버린 20년'이 마침내 끝났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8분기 연속 성장세를 기록한데다 경기지수가 1985년 이후 33년 만에 최고점에 도달한 점 등 불황의 끝을 알리는 단서는 많다. 질을 떠나 3% 이하의 실업률은 거의 완전고용 수준이다. '일본병'을 떨쳐냈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그동안 일본 경제를 옭아맨 디플레이션은 말 그대로 기나긴 가위눌림이었다. '주식회사' 일본 전체가 부실과 경쟁력 상실로 휘청대면서 소득이 급감하고 소비는 바닥을 기었다. 짧게는 10년, 길게 보면 20년간 불황의 터널에 갇혀 정부도 기업도 국민도 신음했다. IT 붐으로 2000년대 초반 반짝 회복기(이자나미 경기)가 있었지만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또다시 주저앉고 만다. 주목할 것은 '백약이 무효'라는 말까지 나온 일본 경제가 다시 상승 곡선을 긋게 된 힘이다. 2012년 12월 두 번째 집권한 아베 총리는 황당한 '아름다운 일본' 표어 대신 작심하고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돈을 풀겠다"고 선언했다. '추한 일본' 선언이자 '아베노믹스'의 출발이다. 일본은 이전에도 마구잡이로 돈을 푼 전력이 있다. 1985년 미국 압력에 엔화 가치가 급상승하고 경기가 급격히 위축하자 나카소네 내각은 돈을 풀기 시작했다. 불경기가 닥치면 구조개혁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게 순서다. 하지만 일본은 경기를 되돌려 놓겠다는 일념에 대출 규제를 완화하고 금리부터 낮췄다. 버블의 서막이다. 풀린 돈이 갈 곳이라곤 거의 정해져 있다. 부동산'주식에 쏠린 돈은 결국 자산시장의 거품을 키웠다. 1988년 주식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에 일본 기업이 30개가 넘을 정도였다. 반면 아베 정부는 비슷하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먼저 무제한 돈 풀기를 통해 대놓고 엔화 가치를 떨어뜨렸다. '통화 전쟁'을 벌여서라도 수출 경쟁력을 되살린다는 의도다. 내수를 살리기 위해 재정 지출을 늘리고, 산업구조 개편과 성장동력을 정조준했다. 아베노믹스의 핵심 지렛대인 '3개의 화살'이다. 무작정 돈을 푼 게 아니라 경쟁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일본의 경기 회복은 배수진을 친 아베의 노림수에다 일본 기업의 각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2월 현재 닛케이 평균주가가 24,000선을 회복한 것은 1991년 이후 무려 27년 만이다. 일본 주요 기업 매출과 순이익은 2년 연속 사상 최대다. 제조업 일자리도 7년 만에 1천만 개를 넘어섰다. 해외로 나갔던 공장들이 유턴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외환 위기와 세계 금융 위기의 '더블 펀치'를 맞은 한국의 불황은 현재진행형이다. '경제 대통령' 외치던 MB 정부는 5년 내내 죽을 쒔다. 박근혜 정부는 '초이노믹스' 흉내 내며 돈을 풀었다가 부동산 광풍만 불렀다. '소득 주도 성장'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도 1년 넘게 세금으로 일자리 늘리기에만 매달리면서 정책 구심점이 실종된 상태다. 우려할 대목은 정부의 정책 행보가 일본이 실패한 길 위에 있다는 점이다. 청와대가 독주하면서 장관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다. 일선 부처는 청와대가 벌여놓은 일들을 선전하는데 시간을 죽이고 있다. 기업은 아예 뒷전이다. 기업만한 지렛대가 없는데도 방치하다 못해 쳐낼 돌로 여긴다. 컬링에 비유하자면 기업은 '테이크 아웃' 표적이다. 잘 걷히는 세수 때문에 세금은 이제 만능열쇠가 됐다.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청년들에게 연간 1천만원씩 지원할 정도로 통도 크다. 공무원 증원은 기본 사양이고, 공공기관 일자리도 돈으로 막겠다니 이리 후한 정부가 없다. "기업이 일자리를 만든다는 건 고정관념"이라는 말이 대통령 입에서 나올 정도다. 문제는 세금 장작을 땐 '특단의 대책'이 정부의 기대를 배신할 때다. 지금 급한 것은 정치철학의 구현이 아니다. 온갖 비판이 쏟아졌지만 아베노믹스는 그런 점에서 오만하지 않고 솔직하다. 하나에 매달리다 둘'셋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멍석은 깔아야 멍석이다.

2018-03-20 00:05:00

[세풍] 한미동맹은 거래 대상이 아니다

태평양전쟁 개전에 앞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피하기 위해 1941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두 수뇌가 태평양 연안 어딘가에서 만나 꼬일 대로 꼬인 양국 간 현안을 논의해 해결책을 찾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양자 간 견해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미국의 요구는 일본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확보한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것이었고, 일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설사 회담이 열렸다 해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고노에의 협상안에는 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지금의 베트남) 북부에서 일본군의 철수, 독일'이탈리아'일본 간의 삼국동맹에서 탈퇴, 동남아시아로의 남진(南進) 등 미국이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 현안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회담에서 고노에는 구체적 시점을 제시하지 않은 채 막연히 루스벨트에게 중일전쟁이 해결되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겠다고 말하려 했을 뿐이다. 게다가 고노에는 장제스(蔣介石)에게 항일전쟁의 중지를 권유해달라고 루스벨트에게 요구하려고도 했다. 한마디로 침략 전쟁이 낳은 '현상 변경'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런 회담을 미국은 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들춰보는 이유는 북핵 문제 해결이 25년 동안이나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북미 정상회담 테이블에 올려지기 직전까지 온 과정과 너무나 닮아서다. 일본이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이유도 실무자 간 교섭에서 전혀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핵 협상도 마찬가지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시작으로 2005년 9'19 공동성명, 2007년 2'13 합의와 10'3 합의라는 성과가 있었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모두 핵 동결까지는 갔지만 핵 폐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북한은 막대한 반대급부만 챙기고 핵 폐기를 위한 검증은 시간만 질질 끌다 끝내 거부했다. 이번에는 다를까? 이것이 5월 북미 정상회담의 첫 번째 관전 포인트다. 김정은이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도 논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대북특사단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했다고 한다.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해체'(CVID)이다. 그 내용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핵과 관련된 모든 것, 핵무기'핵시설'핵물질'핵프로그램의 폐기이다. 북한에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이를 수용할까? 예단은 금물이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관전 포인트는 북미 회담에서 김정은이 미국의 말을 듣는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 것이냐이다. 북한의 핵 폐기 여부보다 우리가 더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봐야 할 문제다. 그 답은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김정은의 말에 있다.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는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폐기'라는 뜻이고, '체제 안전 보장'은 '미북 수교와 평화협정 체결'이다. 우리는 이를 수용할 수 있을까? 대답은 '절대 안 된다'이다.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폐기는 얘기만 나와도 남한은 둘로 쪼개질 것이다. 북한의 의도대로 가는 것이다. 평화협정의 '평화'란 단어에 환상을 가져서도 안 된다. 6자 회담 차석대표로 있으면서 북핵 협상의 실패를 지켜본 이용준 전 이탈리아 대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평화협정은 무력 대결 종식의 결과로 형성된 실재하는 평화를 문서로 작성한 것일 뿐, 평화협정이 무력 대치 상태를 종식시키거나 평화를 창조할 수는 없다. 평화협정이 없어서 한반도에 군사적 대치 상황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게임의 종말, 북핵 협상 20년의 허상과 진실 그리고 그 이후) 정확하고 냉철한 지적이다. 북미 정상회담은 우리에게 양날의 칼이다. 잘못하면 우리가 베일 수 있다. 이를 막으려면 한미동맹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국민적 결의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 문재인 정부 내 '자주파'는 물론 트럼프도 '딴생각'을 못한다.

2018-03-13 0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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