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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선 논설위원

[세풍] 대구 대통령, 부산 대통령

요즘 정권 차원에서 대구경북을 배제하는 소위 'TK 패싱' 논란이 화제다. 일부에서는 'TK 패싱'이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다고 했고, 일부에서는 근거 없는 피해 의식 내지 히스테리라고 반박했다. 역대 정권과 대구와의 관계를 추적하면 'TK 패싱'의 실체가 어느 정도 드러나지 않겠는가.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한 1993년쯤으로 기억한다. 대대적인 검찰 인사가 이뤄졌는데, 된서리를 맞은 것은 경북고 출신이었다. 당시 대구지검 형사부를 비롯해 공안·특수부 부장검사 자리는 인사에서 물먹은 경북고 출신으로 채워졌다. 전임 노태우 정부 때 그렇게 잘나가던 TK 검사들은 YS 재임 동안 지방을 전전하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관·군·경제계에서도 TK 출신을 대상으로 '피의 숙청'이 단행됐고, 빈자리는 부산경남 출신이 대거 차지했다. 박정희 정권 이래로 20년 이상 TK 출신들이 승승장구했기에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정작 불똥은 애꿎은 곳에 튀었다.대구시와 경북도는 국책사업·예산 등에서 배제되다시피 했고, 대구경북 몫이라고 여긴 것조차 부산경남에 빼앗겼다. YS는 삼성자동차 부지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바꾸고, 대신 지금은 없어진 삼성상용차를 대구에 줬다. 위천국가공단을 가로막은 것도 그때다.부산에는 5조5천억원의 신항만, 삼성자동차, 거가대교, 해양수산부 개청, 부산아시안게임 유치 등 큼직한 선물을 안겨줬으니 YS로 인한 낙수효과가 엄청났다. 얼핏 계산해 노태우·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3명의 대통령이 고향인 대구경북에 내려준 국책사업을 합해도 YS의 절반에 채 미치지 못했다. 정치 보복 때문인지, 고향 사랑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TK 패싱'의 원조는 YS였다.부산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도 대구경북은 찬밥 신세였다.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에 큰 선물을 안겨주지 못했지만,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정상회의 유치, 북항재개발 및 하얄리아 부대 이전 등의 규모 있는 국책사업을 내려줬다. 지난 10년간 대구경북과 부산이 첨예하게 대립한 동남권 신공항을 국책사업으로 확정한 것도 2006년 노 전 대통령 집권 4년 차 때였다.2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에도 부산 출신이라는 점을 찜찜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역대 부산 출신 대통령이 해온 것처럼 'TK 홀대, PK 우대' 정책을 고수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문 대통령은 한동안 참고 있는 듯하더니만 고향 여론에 시달려서인지 몰라도 서서히 과거 전철을 밟아가는 듯한 모습이다. 문 대통령의 가덕도 신공항 신설 시사 발언, 원전해체연구소 부산·울산 입지 결정 움직임, 예타 면제 사업 비용 부산경남 편중 등은 'TK 패싱'에 가속도를 내는 촉매제가 아닐까 싶어 걱정스럽다.문재인 정권도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부산에 큼직한 선물을 던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 대통령이 임기 후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그 방법뿐이다. 신공항이 될지,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으나 그 희생자는 오롯이 대구가 될 것이다. 과거처럼 국책사업을 두고 대구와 부산을 경쟁시킨 뒤 부산에 줘버리면 그만이다. 대구는 제 밥그릇 못 챙기는 것은 고사하고, 밥그릇까지 깨먹을지 모른다. 정신 바짝 차리고 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또다시 호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경계경보를 발령할 때다.

2019-02-26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세풍] 오기에는 디테일이 못 산다

요즘 손흥민이 상종가다. 이름대로 '흥'하다. 아시안컵 좌절로 프리미어리그에 조기 복귀한 뒤 고작 사흘 쉬고 매 경기 풀타임 선발로 나서 4경기 연속 골망을 흔들었다.리그 3위 성적인 토트넘은 손흥민의 부재에다 핵심 전력의 부상으로 패전을 거듭하며 파장 분위기였다. 그런데 손흥민이 합류하면서 기사회생했다. 영국 언론과 전문가 입에서 "슈퍼소닉"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다. 챔피언스리그 16강전 홈경기는 손흥민의 가치를 입증한 중요한 경기였다. 도르트문트를 맞아 전반전 내내 수세에 몰렸지만 후반전 초반 손흥민이 선제골을 넣고 결국 낙승했다. 매체마다 손흥민을 '게임 체인저'로 치켜세우며 높은 평점을 줬다. 게임의 흐름을 바꾸고 승부를 결정지었다는 뜻이다.'게임 체인저'는 결과나 판도를 통째로 바꿔 놓을 만한 결정적 역할을 하는 사건이나 인물, 물건, 서비스 등을 일컫는 용어다.정치·경제·외교 등 각 분야에도 게임 체인저의 사례는 많다. 고정된 상황이나 판을 뒤흔들어 새 흐름을 만들어내고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욕심이 작용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도 그렇다. '무역적자=불공정무역'이라는 패러다임을 덧씌워 상대를 압박하고 주도권을 쥐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게임 체인저다.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무역확장법 232조를 적용해 일본과 중국, EU, 캐나다 등에서 들여오는 철강 제품에 25%의 고율 관세를 매겼다. 또 그제 독일·일본산 자동차를 겨냥해 '자동차 수입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이 조항을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미국과 거래하는 무역 상대국에는 거의 카운터펀치다. 사문화되다시피 한 규정까지 끄집어내 게임 판도를 뒤바꾸면 미국 기업의 사정은 확 달라진다. 당장 철강 관세 효과로 미국 철강업체 순이익이 2, 3배 급증한 점을 볼 때 트럼프 행정부의 노림수가 맞아떨어졌다.우리의 게임 체인저는 무엇일까.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소득주도성장과 적폐 청산을 게임 체인저로 봤다. 과거 권력의 부정·불의를 징벌하고, 사회 양극화를 개선한다는 논리다. 그런 국가적 변화가 필요하고 또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성급하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정부 정책 방향이 게임 체인저로 발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또 정부의 논리도 조금 변했다. 최저임금 인상의 여파로 성장률이 둔화하고 실업률이 치솟자 '혁신성장'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각종 규제에 발목을 잡힌 기업 활동이 계속 가라앉고 재도약의 가능성이 점점 옅어지고 있어서다.우리에게는 독일의 '인더스터리 4.0'이나 중국 '제조 2025'와 같은 중장기 전략도 없다. 이런 국가 전략의 부재는 한국 경제가 내외적 변수에 휩쓸려 표류하거나 좌초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위험신호다. 최근 정부가 띄우는 '수소 경제'도 경제성과 기술적 한계 등 논란만 무성하다.무엇보다 우리의 게임 체인저 전략에는 척박한 혁신 환경과 크게 뒤떨어진 정책 디테일이라는 약점이 있다. 여기에서 혁신이 싹트고 정책 효과를 내기란 애초 무리다. 이제는 오기로 버틸 때가 아니다. 거시적인 관점과 긴 호흡으로 국가 전체를 봐야 한다. 게임 체인저로서 새 가치를 만들어내려면 구호가 아니라 디테일에 충실해야 한다. 설익은 정책은 과적(過積)과 마찬가지다. 이내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2019-02-19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세풍] 민주(民主) 라는 기치(旗幟) 의 아킬레스건

'칼레파 타 칼라'(Kalepa Ta Kala)는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그리스의 속담이다. '좋은 일은 이뤄지기 어렵다'는 뜻으로, 작가 이문열의 문학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 '칼레파 타 칼라'는 고대 그리스 가상의 도시국가에서 벌어진 정치의 흥망성쇠를 통해 민주주의의 실현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화 형식으로 그렸다. 권력과 명예, 선동과 시위, 혁명과 역설에 이은 공동체의 멸망을 바라보는 장탄식이 다름 아닌 '칼레파 타 칼라'이다.고대 그리스는 실제 역사도 그랬다. 민주정 사회였던 아테네의 집정관 테미스토클레스는 소피스트와 포퓰리즘의 횡행을 극복하고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낸 영웅이었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의 보도(寶刀)인 오스트라시즘(도편 추방)으로 쫓겨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 후 스파르타와의 쟁패전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의 또 다른 장군들 역시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부서진 배에서 수백 명의 장병들이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방관했다는 악의적 여론이 격앙되면서 일종의 인민재판에 내몰려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정적들의 선동에 휘둘린 민심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구국(救國)의 리더십을 잇따라 제거해버리자 아테네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른바 중우정치(衆愚政治)의 위험을 실증하는 역사적 교훈이다.직접민주주의는 이렇게 포퓰리즘과 중우정치라는 아킬레스건을 지니고 있었다. 현대사회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직접민주주의의 꽃이라는 국민투표가 더러는 역사를 혼란과 광기의 늪으로 몰아가기도 한다.나치 독일의 히틀러도 국민투표를 통해 총통으로 등극했다. 권위주의 체제하의 국민투표는 거수기로 전락하기 십상이지만, 소위 민주국가의 국민투표 또한 대중영합주의에 부화뇌동하는 취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성 정당에 대한 불신이 포퓰리즘을 양산하며 시민사회의 근간인 의회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극단주의 포퓰리스트들이 어떻게 선출되어서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두 사람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란 저서에서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헌법 같은 제도가 아니라, 상호 관용이나 제도적 자제와 같은 규범"이라고 역설한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집단과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 의지와 주어진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국민의 태도에서 민주주의 수호의 보루(堡壘)를 찾는다.'한국, 한국인'이란 책을 펴낸 마이클 브린 전 주한 외신기자 클럽 회장은 "한국에서는 어떤 쟁점에 대한 대중의 정서가 특정한 임계질량에 이르면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야수'로 변모하는데, 한국인들은 이를 '민심'이라 부른다"고 꼬집었다. 민심(民心)이란 게 늘 실증적이고 이성적이며 공정할까? 더구나 선동에 의한 조작된 민심이라면….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한강의 기적'으로 세계인의 부러움을 샀던 대한민국 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민주주의의 근간인 의회정치와 사법부의 독립성마저 무력화시키려는 이 난장판에서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라는 헌법적 가치가 온전할 수 있을까. 민주(民主)라는 기치(旗幟)의 이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어떻게 하나. 칼레파 타 칼라….

2019-02-12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세풍] '음모론'과 '가짜 뉴스'로 버무린 '자신감'

"누군가가 자기 심장을 걸고 어떤 사실을 믿는다 치자. 나아가 이 사람이 자기 믿음에 집착한다고 치자. 또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행동을 한다고 치자. 그런데 마지막에 이 사람 앞에 그 믿음이 틀렸다는 명백한 증거가 제시된다고 치자. 이때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 사람은 의연하게 일어설 것이다. 흔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전보다 한층 더 자신이 믿는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할 것이다."미국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의 말이다. 요약하자면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틀린 것으로 판명됐을 때 이를 인정하기보다 현실을 편리한 대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왜? 자기 믿음을 배신하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니 견딜 수 없다. 그렇다고 현실을 믿음에 맞춰 바꿀 수도 없다. 그래서 현실을 왜곡해 자신의 믿음을 합리화한다. 이른바 '인지 부조화'다.문재인 정권도 여기에 빠져 있다. 경제가 죽을 쑤고 있는데도 경제 위기가 아니라고 한다. 경제 위기는 없다는 무조건적 믿음이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은 현실 왜곡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런 믿음이 틀렸다는 증거들로 넘쳐난다. 그래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더 확고히 왜곡해야 한다. 그 수단이 '수구 세력의 경제 위기설'이다. 수구 세력이 '경제 위기설'을 조작해 퍼뜨린다는 '음모론'이다.이는 제도권과 비제도권을 망라한 '범(汎)문재인 진영'의 공통된 믿음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5일 "수구 보수 세력은 최저임금을 고리로 경제 위기론을 퍼뜨리고 자영업의 어려움을 빌미로 경제 무능론을 유포하고 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말 "우리 사회에 경제 실패 프레임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어 성과가 있는 데도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를 받아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올 초 "경제 위기설은 한국 보수 기득권층의 이념동맹·이해동맹·이익동맹"이라고 했다.문제는 이런 '음모론'이 국민에게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 위기가 '설'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경제 위기설 음모론'만으로는 부족하다. 경제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증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동원하는 것이 '가짜 뉴스'다. "최저임금 인상 효과의 긍정적 효과가 90%"라거나 "세계가 우리 경제성장에 찬탄을 보낸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이 그런 것이다.언론의 '팩트 체크'로 이런 발언이 '가짜 뉴스'로 드러났음에도 문 대통령은 가짜 뉴스 생산을 멈추지 않는다. 올해 신년 기자회견도 그랬다. 문 대통령은 가계소득, 상용직, 청년 고용률 등을 언급하며 "개선됐다" "늘어났다" "높아졌다"고 했다. 대부분 '의도적 오독(誤讀)'이거나 유리한 부분만 '뻥튀기'한 '선택적 오독'이었다.한 가지 예만 들어보면 문 대통령은 "전반적으로 가계소득이 높아졌다"고 했다. 사실이 아니다. 작년 3분기 월평균 가계소득을 보면 고소득층은 늘어났고 저소득층은 최하위 계층이 7%, 차하위 계층이 0.5% 줄었다. 최저임금 인상 정책으로 보호하려는 저소득층의 소득은 오히려 감소한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현 경제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겠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지금 경제 현장에서는 '죽겠다'는 비명이 진동한다. 하지만 '경제 위기설 음모론'과 '대통령발(發) 가짜 뉴스'를 보면 아직은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국민 모두 올해는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 같다.

2019-01-29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세풍] 신단수(神檀樹) 100년 강산, 테디<1905년> 에서 트럼프<2019년> 까지

"한국의 도와달라는 외침에 대한 윌슨의 반응은 전임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다르지 않았다…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한국을 처음으로 점령했을 때…루스벨트 대통령은…'일본인과 협력하라'는 충고로 한국인을 모욕했다…이제 10년이 지나 윌슨 대통령 역시 한국인의 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파리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대의를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피터 현, 『만세!』, 2015년)망한 나라를 되찾는데 젊음을 바친 독립운동가 아버지 현순의 피눈물 나는 삶을 지켜본 아들 현준섭(피터 현)은 직접 지켜본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일제 감시 속에 서울을 떠나 가족과 함께 중국 상해에서 아버지와 합류, 머물다 다시 미국으로 터전을 옮겼고, 돌아가는 냉혹한 국제 정세를 파악한 바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고국을 배신한 미국의 두 얼굴을 알았으니 그럴 만했다.우리에게 '테디 베어'로 친근할지는 모를망정 루스벨트는 미국 국익 앞에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힘없는 한국을 삼킬 속셈을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1882년 맺은 미국과의 조약을 믿고 도움을 청한 고종 임금이나 백성만 불쌍할 뿐이었다. 게다가 테디는 앞서 이미 1905년 7월 한국 지배 꿈을 밝힌 일본과 밀약을 맺었고, 그해 9월에는 1904년 전쟁을 치른 러·일 두 나라를 미국에서 중재까지 했다.이런 악몽은 1919년 1월, 1차대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 때도 어김없었다. 민족자결이란 윌슨 대통령의 주창(主唱)에 희망을 건 일본의 한국 유학생들과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가 그리고 온 백성의 목숨을 건 평화적 만세운동과 국내 유림의 독립청원(파리장서운동)과 애절한 호소를 그는 외면했다. 메아리 없는 외침에 일제 탄압만 되돌아왔을 뿐이었다. 근대화 즈음, 우리가 몸소 겪고 배운 미국은 그랬다.그리고 1945년 9월 8일, 대통령 해리(트루먼)는 이 강산의 남쪽에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서라며 군대를 보냈다. 그는 또 1950년 6·25전쟁에 참전, 1894년 청·일 전쟁 빌미로 일본군 강점 이후 또다시 나라 밖 군대의 점령이자, 친일 청산 기회마저 앗아가는 군정의 바탕을 깔았다. 마침내 오늘날까지 전국 13개 시·도, 66개 시·군·구, 338개 읍·면·동에 걸친 질긴 애증의 미군 영향의 터를 닦은 셈이다.10년 강산이 열 번도 더 바뀌었을 그런 날들이었음에도 남북 강산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나라 밖 힘에 끌려다니는 꼴이다. '이니' 문재인 대통령과 맞상대하는 바다 건너 트럼프 대통령의 남북 강산을 사이에 둔 속셈이 심상찮다. 이미 끝난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입맛대로 다시 하더니 이젠 주한 미군 경비 문제로 딴지다. 이에 질세라 압록강 건너 중국 지도자 시진핑도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통해 무슨 꿍꿍이를 셈하는 모양새다. 마치 남북이 쉬운 먹잇감이나 되는 듯이 말이다.이 땅에 첫 삶터로 삼았을 신단수(神檀樹)의 뿌리와 가지가 남북 강산의 땅 밑과 위를 자유롭게 오가며 하나로 얽고 뒤덮어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도 남을 터인데 현실은 이렇게 나라 밖의 힘에 휘둘리니 무슨 까닭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정신을 차려야지. 돌아가는 꼴이나 잘 지켜보는 수밖에. 문제는 정치인과 지도층 인사들이다. 모두 자신들 이익에 유독 밝은 처세인이어서 더욱 그렇다.

2019-01-22 06:30:00

이대현 논설위원

[세풍] 집권 세력의 고질병 세 가지

집권 3년 차에 접어든 문재인 대통령의 마음이 무겁지 싶다. 국정에서 국민이 느낄 수 있는 구체적 성과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데드크로스까지 발생한 지지율을 반등시키지 못하면 조기 레임덕이 불가피하다. 자칫하다간 그렇게 목매던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가 수포가 되는 상황마저 닥쳐올 수 있다. 새해 벽두 청와대 참모진 개편도 문 대통령의 절박감이 반영된 것이다.문 대통령을 비롯해 청와대 정부 여당 등 집권 세력이 성과를 보여주려 발버둥 치겠지만 그리 녹록지 않다. 대내외적 여건도 난관이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지금껏 집권 세력이 보여준 행태들이 되풀이된다면 성과를 거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고질병(痼疾病)을 고치지 않는 한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집권 세력의 첫째 고질병은 내 편, 네 편에 따라 확연하게 다른 이중적 태도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하고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차갑게 대하라고 했건만 집권 세력은 정반대다. 오죽하면 신임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이 말을 꺼냈을까. 적으로 간주하는 진영의 허물엔 가을 서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냉혹하다. 이 탓에 안타까운 죽음들이 속출했다. 같은 편의 잘못엔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다. 청와대 특감반 사태, 육군참모총장을 휴일에 카페로 불러낸 청와대 행정관 등 사례를 들자면 숨이 찰 정도다. 집권 세력은 내로남불이란 말을 정권이 끝나는 날까지 들으려는 모양새다.둘째는 불통이다. 박근혜 정부를 불통정권이라 그렇게도 비판하던 집권 세력이 어느새 스스로가 불통정권이 됐다. 한술 더 뜬다는 소리마저 나온다. 탈원전, 최저임금 인상 등 사안마다 독선과 아집이 도를 넘었다.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터지면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전전·전 정권, 야당, 언론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래서는 국민의 마음을 얻기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셋째는 공감과 행동 결여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성탄절 "나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이 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박노해 시인의 '그 겨울의 시' 일부를 인용했다.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혼자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이 시에 나오는 할머니와 주인공이 집권 세력의 모습이다. 장터에 가서 거지들은 차가운 밤을 어떻게 보내는지 살펴보고 그들을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지는 않고 이불 속에서 말로만 걱정하고 잠을 잘 뿐이다. 시장 공장 편의점 식당 등을 찾아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대책을 찾으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문 대통령은 공감과 소통이 정치의 기본이라고 했다. 공감과 소통은 상대의 아픔을 헤아리고 같이하는 데서 출발한다. 집권 세력은 공감과 소통에서 낙제점 수준이다. 그토록 싫어하는 어느 전직 대통령의 "내가 해봐서 잘 아는데"와 뭣이 다른가.집권 세력이 고질병을 고쳐 성과를 보여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데 온몸에 뿌리내린 고질병이 쉽게 고쳐질 리 만무하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쓴소리를 했다. 문재인 정부는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2019-01-15 06:30:00

박병선 논설위원

[세풍] 촛불혁명은 실패했나?

2년 전 이맘때 신문을 펼쳤다. 주요 뉴스는 촛불집회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정유라 체포 등이었고 탄핵 정국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월 7일에는 세월호 1천 일을 기념한 11차 촛불집회, 14일에는 체감온도 영하 13도임에도 12차 촛불집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불과 2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데도,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금세 잊어버리는 한국인 특유의 냄비 기질 때문인지, 그간 경천동지할 사건이 줄줄이 터졌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 기억만큼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당시 몇몇 친구들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사회에서 제법 자리를 잡고 있는 이들임에도, 그런 꿈을 꾸고 있었으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이들은 1987년 6·10항쟁을 대학 시절에 경험했기에 변화의 욕구가 강렬했다. 이제 편법과 부정이 없고 노력하면 잘사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으니 철이 없다고 해야 할까. 박 전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정권 탄생 등 촛불혁명의 결과물을 두고 친구들은 환호했지만 필자는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그 전리품을 챙긴 정치권의 권력욕과 무능이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의 열망을 훼손시키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새 정부가 기득권층의 끝없는 탐욕을 제어하고 올바른 사회로 이끌 수 있을지 기대 반, 의심 반이었다.새해가 밝았지만, 우리 사회의 표정은 어떠한가. 새로운 희망과 소망을 노래하기보다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우울한 분위기다. 문재인 정권은 한마디로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스스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이라고 자랑하고는, 남북관계만 일부 진전시켰을 뿐, 무엇하나 고치고 개혁한 것이 없다.재벌 개혁을 한다고 떠들더니 감정풀이 비슷하게 변죽만 울리고 있다. 공교육이 사라진 학교교육은 물론이고, 학생을 지옥에 빠트리는 입시 개혁도 손조차 대지 못했다. 검찰 개혁한다고 해놓고 '적폐 청산'의 첨병처럼 부리고 있으니 기가 찰 일이다. 이미 기득권 세력이 된 노조·시민단체 등을 우군이라는 이유로 옹호하기에 바쁘다. 일자리수석, 일자리 상황판까지 만들고는, 취업자 수가 더 감소한 것은 희대의 코미디다. 처음부터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책과 자원을 총동원해야 함에도, 다른 곳에 이리저리 분배하고 같은 편 챙겨주다보니 마이너스 수치로 바뀌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현 정권은 촛불혁명의 과실만 따먹고는, 정신은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그 정신을 살릴 생각조차 없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촛불 정신을 계승했다는 이들이 이렇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까. 그저 보수 세력 쫓아내고 '자리 옮기기' '이권 챙기기'에만 관심 있을 뿐,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 능력도, 의욕도 없는 것 같다. 결국,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고도 노태우 정권을 탄생시켰듯,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고 있으니 한국의 불행이다.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잘하고 있으며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항변한다. 2년 전보다 팍팍하고 힘든 사회가 돼 있음을 누구나 체감하고 있는데, 헛웃음만 나온다. 집권 3년 차를 맞는 문 대통령에게는 올해가 마지막 기회다. '죽 쑤어 개 줬다'는 소리를 들어선 안 된다. 추위에 떨며 촛불을 든 시민들의 열망을 떠올리길 바란다.

2019-01-08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세풍] 맞으면서 어딜 간다는 건지

마라톤은 인간이 만든 스포츠 중 가장 이상한 게임이다. 40㎞가 넘는 거리를 줄곧 달려 체력의 바닥까지 확인하는 고약한 종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구경꾼이 아니라 달리기를 선택한다. 자신과 싸우고 극한의 거리와 다툰다는 매력에 이끌려서다.끈기와 오기는 마라톤의 핵심 가치다. 이런 가치를 가슴에 달고 결승점에 닿으려면 컨디션 조절과 경기 운영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제 역량을 넘어서는 오버 페이스는 치명적이다. 빼어난 건각도 페이스를 잃으면 다리가 꺾인다. 요즘 마라톤 경기에서 체력 안배를 돕는 '페이스 메이커'를 두는 것도 이런 이유다.국가를 경영하는 지도자도 풀코스 마라톤 선수와 다르지 않다. 가치와 목표라는 상대와 끊임없이 다투기 때문이다. 가치는 철학에 기반하고 목표는 공동선과 공익에 수렴한다. 말하자면 정치 행위는 선의의 시체들로 어지러운 지옥 가는 길을 피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목표가 수단을 언제나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마키아벨리도 말하지 않았나. 가치나 선의, 목표가 절대적이라면 특정한 상황에 적합한 방법이 다른 조건하에서는 재앙일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내년은 올해보다 경제 사정이 더 어려울 것이라는 여론이 우세하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얼마 전 간담회에서 "반도체 호황이 경제를 이끌어왔으나 3~4년 뒤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기업은 불확실성에 몸을 움츠리고 국민은 다급하다. 삼성전자 등 대기업들이 비상경영 체제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목을 빼고 기다려도 정부에게서 솔루션을 기대하기 힘든 탓이다. 기업 형편도 그렇지만 팍팍한 민생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근심은 천근만근이다.정치에서 부패와 독선, 무능은 이음동어다. 이는 경제적인 결과를 낳는 정치 문제로 퇴보의 지름길이다. 기회가 사라지고, 혁신은 무산되며 기업가 정신과 투자는 꽃을 피우지 못한다. 가치와 포용, 선의의 방패가 아무리 두꺼워도 현실의 날카로운 창을 막아내기가 어려운 게 이치다.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도 20개월을 넘어서고 있다. 60개월의 꼭 3분의 1이다. 국가 경영을 책임진 리더로서 증명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지금은 촛불의 염원으로 세운 국가 지도자의 이상과 민생의 현장이 서로 간극을 드러낸 난국이다. 가치 지향의 오버 페이스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억누를 건 누르고 미룰 건 미뤄야 하는데 대통령이 가치의 절대성만 좇은 탓이다. 개혁의 명분에 집착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노란 조끼' 시위로 궁지에 몰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맞으면서 가겠다"는 집단 오기로 충만하다. 현 정부 DNA에 돌연변이는 없다는 지독한 고집이다.지도자의 평가에서 도덕성과 대중으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인품은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지혜로움이다. 아무리 호감 가는 지도자라 하더라도 분별력이 떨어지면 큰 흠이다. 잘못된 길이라는 판단이 서면 냉정한 결단은 지도자의 몫이다. 그렇지 않고 결정을 미루거나 반전의 시늉만 한다면 목표점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성장한다면서 역성장하고, 혁신의 구호 뒤에 규제의 벽은 더 두터워지는데 과연 포용국가가 제자리를 잡을 지는 누가 더 잘 알겠나.

2018-12-25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세풍] 페르소나의 착각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썼던 '가면'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중에 라틴어와 섞이며 사람(Person)이나 인격(personality)의 어원이 되었다. 페르소나의 현대적인 의미는 '가면을 쓴 인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며 밖으로 내놓는 공적 얼굴인 것이다.삶을 무대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사회적 역할에 따라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의 남편과 아내 또는 부모 형제로, 직장의 상사나 부하로, 그리고 의료인, 법조인,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교육자, 공직자 등 직업인으로 저마다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진정한 자아(自我)와는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까.분석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은 페르소나를 자아와 본성을 감춘 채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일종의 연기로 규정하기도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페르소나를 자신의 본성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여기에다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며 집단화하는 것이다.관념으로 무장한 페르소나는 세상을 선과 악의 이원론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자신들과 다른 것들을 죄악시하며 단죄와 거세의 대상으로 여긴다. 절대선(善)이라는 종교와 이념의 페르소나를 쓰고 저질렀던 인간성에 대한 폭압의 사례는 역사가 입증한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과 독일의 나치즘, 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그랬다. 조선시대 주자학의 폐해도 그 예외가 아닐 것이다.사람들은 페르소나를 자신의 본성과 동일시하려 한다. 좋은 배역일수록 가면을 벗은 민낯은 초라하기 때문이다. 본성을 망각하거나 본모습에서 일탈한 페르소나는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한다. 도그마의 제복을 걸친 페르소나는 도덕적 우월감과 폭력적 정의감을 드러내며 사회와 국가를 질곡으로 몰아가기도 한다.그래서 명나라의 반유교적 혁신사상가 이탁오(李卓吾)는 "정작 나라를 망치는 것은 소인(小人)이 아니라 군자(君子)이다"라는 폐부를 찌르는 역설을 남겼다. 그것은 '탐관(貪官)의 피해보다 청관(淸官)의 해악이 더 크다'는 지적과도 상통한다. 그렇다. 탐관과 소인은 스스로의 잘못을 알 뿐만 아니라 그 피해의 범위 또한 국지적이다.하지만 청관과 군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선(善)으로 여기는 것은 물론 사회 공동체의 규범을 재단하면서 상당한 지지 세력을 거느린다. 세인들은 탐관의 적폐에는 익숙하지만 청관이 더 가증스럽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단화된 청관의 방향성이 틀어지는 순간 사회와 국가에는 돌이키기 어려운 재앙이 엄습한다. 그 폐해 또한 후대의 온 나라에 미칠 수밖에 없다.스스로 정의로운 정치 세력의 일방통행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또한 그 누구도 정의를 독점할 수는 없다. 인간이 만든 정의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정의의 독점이란 곧 독선의 반증일 뿐이다. '죄인(罪人)의 악보다 선인(善人)의 악이 더 클 수 있다'는 촌철살인도 그래서 나왔다.도로상에서 운전자 자신이 역주행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과의 차이는 엄청나다. 사회와 국가라는 무대 위에서 영원한 주역은 없다. 독선과 오만의 페르소나를 자아와 본성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무대 안팎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돌이킬 수 없는 파멸과 마주할 뿐이다.

2018-12-18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세풍] 김정은이 서울에 온들

"라인란트로 진격해 들어간 뒤 48시간 동안은 내 인생에서 그야말로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그때 프랑스군이 라인란트로 진격해왔다면 우리는 꼬리를 내리고 철수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의 군사적 자원은 적절히 저항하는데도 아주 부족한 수준이었다."라인란트 재점령 후 히틀러가 한 말이다. 라인란트는 산업지대다. 독일의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지역이다. 이를 점령했다는 것은 전쟁을 하겠다는 분명한 신호였다. 프랑스는 이를 보고만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프랑스 정부의 머리에는 '협상'만 있었지 협상 실패에 대비한 'B플랜'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이었다.하지만 프랑스는 '전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1차 대전에서 17~28세 남성의 4분의 1이 사망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끔찍한 경험 때문에 프랑스 정부와 국민은 협상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본위적 소망에 집착했다. 급기야 이런 소망은 "반드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발전(?)했다.유럽 정세가 전쟁으로 향하고 있는데도 관련 정보를 숨기려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프랑스 정보원들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부터 독일이 은밀히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음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들과 언론은 이런 정보를 국민에게 전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한 법원은 프랑스에 대한 노골적 적대감을 쏟아낸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통째로 번역하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다.프랑스의 이런 헛발질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문재인 정부의 북핵 문제 해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북관계 개선'일 뿐 그것이 실패했을 경우의 대비책은 없다. '협상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다'가 '전쟁을 막아야 한다'로 바뀐 프랑스의 맹목을 빼다 박았다. 북한 비핵화는 그 문턱에도 못 갔다.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은 알맹이 없는 '이벤트'였다.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지만, 현실은 그것이 '립 서비스'였음을 확인해주고 있다.앞으로 달라질까? 북한이 황해북도 삭간몰 등 북한 전역에서 최소 13개 이상의 비밀 단거리 미사일 기지를 운용 중이라거나 양강도 김형직군 영저리 기지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인근 시설을 계속 가동 중이며 이들 기지는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배치할 수 있는 유력 후보지라는 사실은 고개를 가로 젓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이런 미사일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용·증강해왔기 때문이다.문 정부는 삭간몰 기지에 대해서는 북한의 '통상적인 활동'이라 했고, 영저리 기지에서 대해서는 "군이 추적 감시하고 있는 대상 중의 한 곳"이라고 했다. 이런 해명의 의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니 문제 될 것이 없다"였겠지만 문 정부는 자기도 모르게 북한이 변하지 않았음을 토설한 꼴이다. 통상적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북한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문 정부는 김정은의 서울 답방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 김의 답방이 성사된다면 북한 비핵화에 돌파구가 열릴까? 지금까지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협상 결과를 되돌아보면 '김정은이 서울에 온들'이라는 비관적 예측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됐을 때 국민은 물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문 정부가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2018-12-11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세풍] 누가 이들을 불러내랴

'김연수·박만규·박수의·이춘수·정칠성·현계옥….' '강두안·박제민·박찬웅·서진구·이상호·이원현·이준윤·장세파·조형길·최수원….'이들의 공통점은? 대구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인물이다. 혹 낯익은 이라도 있는가? 이미 널리 알려진 이름도 있겠지만, 아마도 처음 듣거나 낯설 듯하다. 앞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이름을 새긴 대구의 여성들이다. 뒤는 1940년대 항일로 감옥에서 또는 풀려난 뒤 고문 후유증 등이 겹쳐 광복 전후 순국, 하늘의 별이 된 대구의 젊은이들이다.더 있다. 김진만-영우-일식의 3대(代)와 김태련-용해, 이현수-정호·동호의 부자(父子)들에다 김진만·진우, 백남채·남규, 이경희·강희, 이상정·상화, 서상규·상락·상일·상한, 정운일·운기, 현정건·진건 등 형제들이다. 권기옥·이상정 같은 부부에다 숙질(아재와 조카)의 이시영과 이인, 사돈인 윤상태·정운기와 이경희·정운일도 있다.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부자인 아버지(서우순)를 덮친 거사에 나섰다 효(孝)의 도리에 갈등하다 자살한 서상준 같은 삶도 있다. 독립유공자도 숱해 대도시에서 서울(401명) 다음(155명)이 대구다.또 대구를 먹칠한 박중양, 아버지(서상돈) 이름을 망친 서병조, 총명한 시인(이장희)을 요절로 내몬 비정한 아버지(이병학), 항일의 아들(윤우열)과 엇길이었던 아버지(윤필오), 자신의 제자조차 고문한 일제 경찰 최석현과 악명의 고등계 형사 서영출처럼 매국과 친일 행적으로 얼룩진 오명(汚名)도 적잖다.이들은 광복회 대구지부에서 최근 펴낸 '대구독립운동사'에 그대로 살아 있다. 책에는 더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아무런 울타리도, 뒷 보장도 없이 배움의 학생에서 차별에 울었던 기녀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항일의 한 역할을 맡거나, 반대편에서 일제 앞잡이의 변절자와 밀고자까지 뭇 군상이 지난날을 증언한다.대구는 바로 이들 항일 인물 덕분에 용광로였다. 독립과 항일에 보탬이면 뭐든 관용해서다. 어떤 장애도 없었다. 일찍 신라의 개방적 문화가 흘렀던 만큼 숱한 사조가 수용됐고, 다른 데로 퍼뜨렸다. 이런 흐름은 광복 이후까지 이어져 2·28 학생의거와 같은 역사가 이뤄졌다. 이를 뒷받침하는 학계 자료도 그렇다.소위 '진보지표'를 잣대로 한 연구자료(손호철)는 좋은 사례다. 일제, 해방정국, 1952·1956·1963년 대선, 1960년 총선을 따졌더니 경북 특히 대구의 진보 수치는 뚜렷했다. 대구가 낀 경북의 진보지표는 다른 도(道)보다 월등했다. 주요 도시별 비교에서도 대구는 역시였다. 대구와 경북은 항일 시대 이후 줄곧 열렸지 결코 갇히고 닫히지 않았다.이런 대구가 어느 순간, 오해받으니 안타깝다. 지난달 대구사랑운동시민회의의 토론회에서는 대구가 마치 영화 속 범죄 도시를 빗대 '대구는 고담 도시'라는 편견이 떠돈다고 걱정했다. 대구를 빛낸 앞선 인물만 봐도 그런 오해는 절로 풀릴 만하다. 그래서 이들을 책에만 묻어둘 수 없다. 세상 밖으로 불러내 목소리를 내게 하자. 맨몸으로 독립의 밀알이 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광복을 일궈낸 용기를 배워 대구를 바꾸자.이들을 알고 기릴 곳은 대구요, 바로 대구 사람이 아니던가. 우리가 아니면 누가, 어디서 이들의 목소리를 듣겠는가. 이제 우리가 이들을 부르고,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2018-12-04 06:30:00

이대현 논설위원

[세풍] 미래 향해 '혀 빠지게' 뛰어도 모자랄 판에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부터 대한민국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박근혜·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도록 하겠습니다. 적폐청산 관련 수사와 재판은 이른 시일 안에 끝낼 것입니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 우리나라를 하나로 뭉치는 데 국정 최우선을 두겠습니다. 반목과 갈등 대신 포용과 화합의 나라를 만드는 데 저부터 앞장서겠습니다. 우리는 결코 뒤돌아 가지 않을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이 대열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실현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일말의 바람을 담아 써본 문재인 대통령 연설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의 국정은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적폐청산과 포용. 불행하게도 여기엔 단서가 있다. '자기편'인가, 아닌가에 따라 그 대상이 갈라진 것이다. 적폐(積弊)청산은 자기편이 아닌 반대편에 집중된 적폐(敵弊)청산으로 전락했다. 포용 역시 자기편만 끌어안는 데 그쳤다. 앞선 두 정부의 과거 캐기에 주력한 사이 경제는 망가지고 국민 삶은 더 피폐해졌다.지금 이 나라엔 미래는 없고 과거만 존재한다. 정치·사법·경제·문화 모든 분야에서 과거를 파헤치는 데 나라의 힘을 허투루 쓰고 있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이 동시에 감방에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있나. 공천에 불법 관여한 혐의로 박 전 대통령에게 항소심에서도 징역 2년이 선고됐다. 선고된 사건 3개의 형량을 합치면 징역 33년이다. 98세가 돼야 만기 출소한다. 두 전직 대통령의 잘못은 모든 국민이 잘 안다. 정치적으로 숨이 끊긴 두 사람에게 사법 잣대를 계속 들이대는 것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일 뿐이다.전 정부에서 벌어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그로 말미암은 판사 탄핵 촉구 등으로 사법부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재판 당사자들이 판사의 성향을 미리 따질 정도로 재판과 사법부에 대한 믿음이 허물어졌다. 탈원전도 과거 정부 흔적 지우기의 하나다. 탈원전이 아무리 맞는 방향이라 하더라도 그 대체 수단인 태양광이나 풍력이 책임지는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등 경제도 과거에 잡혀 있다. 어느 누군가가 우리는 뛰는데 선진국은 날고 있다고 했지만 틀린 얘기다. 뛰기는커녕 뒷걸음치는 게 우리 자화상이다.국민 대다수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 경제 상황이 앞으로 더 나빠질 것이란 전망이 좋아질 것이란 예측보다 훨씬 많다. 경제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미래가 잿빛이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도취해 있다.집권 중반으로 접어든 이 시점에 문 대통령은 국정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과거의 잘못된 것을 청산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면 이제는 미래를 향한 국가 개혁에 힘을 모아야 할 때다. 과거만 캐서는 미래를 개척할 수 없다.하지만 문 대통령은 권력적폐와 사법적폐 청산에 이은 생활적폐 청산 드라이브로 국정운영 동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에 맞춰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년이 아니라 더 오랜 기간 집권해서 가야 한다고 했다. 민심을 읽지 못한 패착이고 국민을 얕잡아본 오만이다. 미래가 아닌 과거만 좇는 정파에 이 나라의 운명을 계속 맡길 어리석은 국민은 단 한 명도 없다.

2018-11-27 06:30:00

박병선 논설위원

[세풍] 文대통령, 소심과 우유부단함의 정치

2016년 말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의 일이다. 당시 문재인 후보는 인터넷에서 '고구마'로 불렸다. 이재명 후보는 자신을 '사이다'라고 치켜세웠다. 소위 '고구마'와 '사이다' 논쟁이다. 고구마는 답답하고 융통성 없음을, 사이다는 시원하고 청량함을 준다는 의미다. 문 후보는 "고구마를 먹으면 배가 든든하다"는 말로 공세를 피해갔는데, 자신의 재치인지 측근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다.요즘 두 분에 대한 평가를 새로 하면 이재명 경기지사는 아무래도 '사이다'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문재인 대통령은 '고구마'라는 별명이 딱 맞는 것 같다. 정국 상황을 보고 있으면 체한 듯 답답하고 거북한 느낌이 든다. 적폐 청산은 정치 보복에 가까운 듯하고, 경제 살리고 일자리 만드는 것은 거꾸로 가고 있고, 남북관계는 허둥지둥하며 허점만 노출한다. 구호는 드높지만, 무엇 하나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이 없다.문 대통령을 아는 지인들은 '점잖다' '과묵하다' '마음이 모질지 못하다'고 평가한다. 대통령이라고 꾸며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하다. 문 대통령 비판자들은 이를 뒤집어 '소심하다' '논리에 투철하지 않다' '우유부단하다'고 평한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는 문 대통령 비판자들의 평가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국정에 문 대통령의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이 그대로 투영돼 있는 것 같아 더 답답하다.대통령의 성품이 정부의 정책 방향을 좌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는 참모와 관료들이 대통령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소심과 우유부단함이 현 정권의 드러나지 않은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문 대통령의 소심과 우유부단함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문 대통령은 이제까지 자신의 지지층에 대해 거북한 행동이나 쓴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민노총이 과격 행동을 일삼아도, 측근이 아무리 경제를 망쳐도, 문빠가 '18원' 문자폭탄을 날려도, 모두 눈감아 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뒤로 딴짓을 해도 별말 없이 감싸안고 만다.마음이 넓어서가 아닌 것 같다. 혹시라도 적극 지지층에게 욕먹지 않을까, 따돌리지 않을까 하는 소심함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1년간 논의 끝에 마련한 국민연금 개편안을 재검토하는 것도 우유부단함의 다른 표현이다.문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층 외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1970, 80년대식 진영 논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평생 그렇게 살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지층보다는 '실리'를 택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문 대통령은 아직 그런 대범함을 보여주지 못했다.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최저임금 인상을 강행해야 하고, 기업을 압박하고 삼성현대 때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국가 이익'보다는 지지층이 요구하는 바를 그대로 행할 뿐이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성격과 정책기조를 바꾸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지층만을 위한 정치, 정책을 펴나가다 보면 진영 간, 계층 간, 지역 간 분란이 확대재생산될 것이 뻔하다. '고구마'보다는 '사이다'가 필요한 때이지만, 타고난 성격이 바뀔 지 의문이다. 우리는 선량하긴 하지만, 역사상 스케일이 가장 작은 대통령과 함께하는지 모른다.

2018-11-20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세풍] '닥터 둠'과 캐러밴

'위기가 지나가고 한참 뒤에야 비로소 위기임을 알아챈다'는 말이 있다. 대다수 사람이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넘겨버릴 만큼 둔감하다는 뜻이다. 한편 국가나 사회, 집단, 개인에게 전달되는 위기의 강도, 시차 등 스펙트럼이 그만큼 다양해 평균율을 구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기의식이 결핍됐다거나 위기의 실체를 몰라서가 아니라 직면한 현실이 두려워 위기를 부정하는 심리가 작용해 인간 행동 양식을 왜곡시킨다는 해석도 있다. 위기를 역이용해 이익을 챙기는 '위기 조장설' 등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다.최근 눈여겨본 애덤 맥케이 감독의 영화 '더 빅 쇼트'(The Big Short)는 개인적으로 우리 주변의 위기 상황에 대해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됐다. 마이클 루이스의 실화 소설을 토대로 한 이 작품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가 소재다. 미국 경제 위기의 진상을 드러내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 거리를 안겨준다. '빅 쇼트'는 주식 등 가치 하락을 전제한 매도(Short) 포지션을 뜻한다.이 소설은 부실 주택저당채권 사태를 미리 내다본 월가의 헤지펀드 매니저 스티브 아이스만, 로버트 벌리 등 실존 인물 4명을 추적해 금융 위기의 배경과 실체를 재조명했다. '닥터 둠'으로 불릴만한 극소수의 비관론자들이 미국 금융 시스템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위기의 스위치를 켜지만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일반 시민은 말할 것도 없고 금융인들마저 폭탄을 옆에 두고도 위기 경고를 무시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복잡한 금융공학으로 변질한 투자 기법 등 시스템에 대한 무지와 맹신은 위기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당시 예민한 후각을 가진 '닥터 둠'은 금융자본의 탐욕이 위기의 본질이자 진원지임을 간파한다. 정부가 월가의 붕괴를 결코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결국 위기의 시그널을 덮어버린다. 부실이 만연한 미국 주택시장의 현실을 확인한 그들은 시스템 붕괴가 멀지 않았음을 예측하고 분노한다. 부실투성이의 금융 시스템을 외면한 채 수익에 열을 올리는 투자은행·신용평가사의 탐욕, 미국 정부의 안이함과 무능이 싱크홀을 만든 것이다. 이달 말 개봉할 최국희 감독의 '국가부도의 날'도 위기론의 관점뿐만 아니라 1997년 IMF 외환 위기 사태를 처음 다뤘다는 점에서 또 다른 관심을 끄는 이유다.'경제 위기는 우리 시대의 문화다'라는 명제가 나올 만큼 이제 위기는 일상 그 자체다. 그러나 위기를 맞기 전까지 아무도 위기의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게 함정이다.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자 남미 최대 부국인데도 2014년 이후 최악의 경제난에 시달리는 베네수엘라, 가난과 내정 불안 때문에 미국행 엑소더스를 시작한 온두라스의 '캐러밴'은 위기 여파가 부른 비극이다.문재인 정부의 제2기 경제 실험이 막 시작됐다. 얼굴은 달라졌지만 정책 기조는 그대로다. 새 경제팀이 위기 국면에 빠져드는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울 구원투수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빅 쇼트'에서처럼 600만 명이 직장을 잃고, 500만 명이 집을 잃는 상황으로 간다면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다. '탄탄한 펀더멘털' 하나만 믿는 우리에게 이런 위기는 그저 강 건너 불일까. '곤경에 빠지는 건 무엇을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계속 곱씹게 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2018-11-13 05:00:00

조향래 논설위원

[세풍] 동구<東區>의 항변<抗辯>

'능금꽃 향기로운 내 고향 땅은….'가수 패티김이 부른 '능금꽃 피는 고향'은 가슴속에 스며 있던 대구의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대중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대구를 알리는데도 커다란 기여를 한 노래이다. 대구 사람들은 아예 '대구찬가'라는 별칭을 붙여 야구장에서 응원가로 열창하기도 했다. '능금꽃 피는 고향' 노랫말에는 대구 사과와 함께 팔공산과 금호강이 등장한다. 모두가 대구 동구를 떠올리는 이미지들이다. 노래비를 아양철교 인근 금호강변에는 세운 이유이다.동구는 그렇게 대구의 상징이었다. 동구는 국제공항과 고속도로 나들목(IC) 그리고 복합환승센터가 있는 대구의 관문이다. 대구경북을 아우르는 영산인 팔공산이 드넓은 자락을 펼치고, 망우당공원과 동촌유원지를 보듬은 금호강이 낙동강을 향해 유장한 흐름을 이어가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다. 구(區) 단위로서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대구 동구는 지금도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곳으로, 산자락마다 강줄기마다 숱한 옛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봉무동의 이시아폴리스와 신서동의 혁신도시는 동구는 물론 대구의 경제를 견인할 명실상부한 자족도시로 성장할 것이라고 한껏 기대를 모았다. 연탄 가루 날리던 안심연료단지에 들어설 안심뉴타운 또한 주택과 상업시설이 새로운 면모를 갖추면서 혁신도시와 함께 동구의 새로운 부도심으로 도약할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그러나 막상 금호강을 건너 안심지역으로 들어서면 주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혁신도시에 실망한 민심은 안심뉴타운에도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모습들이다. "혁신도시가 수성구 집값만 더 올려줬지 뭐!" "안심뉴타운에도 초등학교가 없으면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겠어?" "여기 50평 아파트를 팔아도 수성구에서는 30평대도 못 사…."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오랜 자괴감이 배어 있는 말들이다.동구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은 열악한 교육 환경이다. 이시아폴리스 쪽에는 중학교가 부족하고 혁신도시 주변에는 이름 있는 고등학교가 없다. 그래서 자녀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든지 위장전입을 해 통학을 시키려고 한다.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주한 공공기관 임직원들도 아예 수성구 시지에 집을 마련한다. 그러니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차량과 통학 차량이 뒤엉켜 짜증만 더한다.혁신도시는 속빈 강정이다. 정주 여건이 낙제점 수준이다. 거주자들은 대부분 나홀로족이다. 월요일 오전에 내려와 숙소 주변을 맴돌다가 금요일 오후면 수도권으로 올라가기 바쁘다. 그러니 밤이면 유령도시처럼 썰렁하고 낮에도 적막감이 감돈다. 혁신도시는 대중교통의 외딴섬이다. 오죽하면 주민들이 협동조합을 꾸려 마을버스 운영에 직접 나섰을까.특히 안심지역은 '찾아오는 동구'가 아닌 '떠나가는 동구'가 되고 있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사실 명문고의 유무가 아파트 가격을 결정하고 지역 발전을 좌우하는 시대이다. 주민들은 교육 환경의 격차가 낳은 불균형 발전의 피해를 언제까지 감수해야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낸다. "그동안 동구청은 무엇을 했고, 대구시와 교육청은 한 게 무엇이냐"는 항변이다.

2018-11-06 05:00:00

정경훈 논설위원

[세풍] 문 정부의 애완견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순위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한다. 그런 루스벨트도 민주주의를 퇴보시키려 했다. 이른바 '대법원 재구성 계획'으로 연방 대법원을 장악하려 했다. 당시 대법관 수는 9명으로 이 중 6명이 70세 이상이었다. 루스벨트는 이들 수만큼 대법관을 추가로 임명해 대법관 수를 15명으로 늘리려 했다.그 목적은 대법원을 자신의 정책을 밀어주는 '헌법적 거수기'로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뉴딜정책 관련 법률을 번번이 위헌으로 판결했다. 루스벨트는 자기 입맛에 맞는 대법관을 추가로 임명하는 방법으로 이런 난관을 넘고자 한 것이다.루스벨트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헌법상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에는 대법관 수에 대한 구체적 규정이 없다. 미국 건국 이후 100년 동안 대법관 수가 수시로 바뀌었던 이유다. 루스벨트의 '계획'은 헌법의 이런 허점을 파고든 것이었다.이런 사실(史實)은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말해준다. 어떤 헌법도 완벽할 수가 없다. 헌법도 인간의 설계물이고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법은 악용의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노골적인 헌법 '살해'가 아니어도 헌법의 빈틈을 이용해 헌법을 어기지 않고도 민주주의 원칙을 무력화할 수 있다.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의 '공정한'(!) 재판을 위해 특별재판부를 설치하려는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의 계획도 이와 같다. 사법권 독립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우회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재판부'라는 명칭부터 그런 의도를 잘 보여준다. 우리 헌법은 '특별법원으로 군사법원을 둘 수 있다'(제110조 1항)고 규정하고 있다. '특별법원'이 아니라 '특별재판부'로 헌법을 우회하는 것이다.더 근본적인 문제는 특별재판부 설치 의도이다. 여야 4당은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라고 한다. 사법농단 사건의 압수수색 영장 기각률이 90%나 되고 이 사건을 담당할 가능성이 있는 판사 다수가 의혹 당사자여서 일반 법원의 재판은 보나마나라는 것이다. 일견 그럴듯하지만 이런 주장은 사법농단 사건은 무조건 유죄라는 단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야 4당의 '공정한'은 '유죄 판결'의 동의어라고 할 수밖에 없다.이런 의도로 설치된 특별재판부가 그런 의도와 상관없이 글자 그대로 '공정한' 판결을 할 수 있을까. 일반 법원의 판결은 공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당과 야 3당이 낙인찍어 놓은 이상 쉽지 않을 것이다. 특별재판부 설치 계획에 결론을 내려놓고 재판을 한 스탈린식(式) 전시(展示)재판이 오버랩되는 이유다. 이런 식으로 '특별'이 설치면 사법권 독립이라는 대원칙은 무너지고 본래 의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사멸된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이다.루스벨트의 '계획'은 무산됐다. 야당인 공화당은 물론 여당인 민주당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민주주의는 더욱 강건해졌다. 행정부 견제라는 의회의 기본 책무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최근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이런 입법부는 '감시견', 그렇지 않고 권력에 순종적인 입법부는 '애완견'이라고 했다. 특별재판부를 설치하려는 여야 4당은 '감시견'일까 '애완견'일까?

2018-10-30 05:00:00

정인열 논설위원

[세풍] 옛 땅에서 통곡하고 싶다

'요동(遼東)과 간도(間島).'우리에게 남다른 지역이다. 역사에서 옛 조상들이 누빈 곳이자 삶터였다.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역사를 살펴도 그렇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흔적을 훑어봐도 다르지 않다. 두 지역은 우리나라 유입 외래 종교와도 인연이 깊다. 100년 넘는 세월을 가진 한국 천주교이다.특히 요동은 우리에게 '소리 내 울 수 있는 곳'(好哭場) 즉 통곡할 수 있는 좋은 장소로 잘 알려졌다. 조선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글 덕분이다. 1780년 7월, 연암은 청나라 사절단 일행에 끼어 1737년 태어나 자라고 줄곧 지냈던 비좁은 조선을 떠나 생애 첫 중국 나들이에 나섰고 압록강을 건너 들과 강의 산악지역을 지나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눈앞에 끝없이 드넓게 펼쳐진 벌판 즉 요동벌을 만나서다. '1천200리가 사방에 산 한 점이 전혀 없어 하늘가와 땅끝을 아교로 붙이고 바느질로 박은 듯'하고 '구름만 아득'했으니 그럴 만도 했을 터이다. 나라를 바꿀 만한 포부를 가졌으나 산들이 촘촘한 갑갑한 땅, 조선의 산하와 썩어빠진 나라를 생각하면 할 말을 잃고 통곡하고 싶었을 것이다.요동들은 이미 숱한 조선의 관리들이 거쳤다. 그들도 연암처럼 고구려인이 수(隋)와 당(唐)의 군대와 격돌하며 지킨 '우리 땅' 요동에 얽힌 역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게다가 연암은 왜란(倭亂)과 호란(胡亂)까지 겪은 뒷사람이었으니 오죽했으랴. 선조 발자취가 서린 요동벌을 '호곡장'이라 읊으며 통곡하고자 한 심사를 그저 짐작할 뿐이다.간도 역시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진 중첩된 역사를 갖는 유서 깊은 땅이다. 비록 일제의 대륙 침탈 야욕의 결과인 1909년 간도협약으로 또다시 잃어버린 아픈 역사를 가졌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안마당처럼 누볐던 고토(古土)였다. 숱한 우리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 땅을 일구고 가꾼 옥토(沃土)였다.천주교는 이런 요동과 간도를 깊이 살폈다. 한국을 발판으로 요동과 간도는 물론, 바다 건너 일본, 류큐, 대만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계획에서다. 천주교 불모지로 미개척지나 다름없었던 동아시아에 천주교 '복음의 빛'을 전하는 일이 당시 천주교의 당면 현안으로 떠올랐고, 한국과 요동·간도를 잇는 연결망은 더없이 필요한 작업이었다.결국 천주교 내부 사정으로 요동은 빠지고 간도만 1920년 서울에서 분리 설치된 원산대목구라는 교구에 포함됐지만 함경남북도를 포함한 그 면적(20만5천㎢)이 남북 강산(22만㎢)에 버금가는 관할지역을 가졌다. 당시 제작된 이런 천주교 지도는 세월이 흘러도 간도가 한국 백성들의 옛 삶터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하는, 우리로서는 남다른 의미다.이런 옛 천주교 역사 탓인지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이 "북한으로부터 공식 방북 초청장이 오면 무조건 응답을 줄 것이고, 나는 갈 수 있다"고 한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게다가 지난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교황의 평양 방문을 제안했지만 이뤄지지 못한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프란치스코 교황의 북한 방문은 현재 진행되는, 남북한을 둘러싼 평화 정착 노력의 흐름에 영향을 줄 것이 틀림없다. 종교적인 새 길도 나겠지만 다른 길 역시 만들어질 터이고, 개인적으로는 그 새로운 길을 따라 옛 땅 요동이나 간도에서라도 통곡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2018-10-23 05:00:00

이대현 논설위원

[세풍] 문재인 대통령 국정 성패 경제에 달렸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 일병을 구한 것은 존 밀러 대위였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을 끌어올려 문 대통령을 구한 것은 김정은 위원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달엔 남북 정상회담 효과에 힘입어 6주 연속 하락하던 문 대통령 지지율이 10%가량 급반등했다. 하지만 이 '약발'도 한계에 이르렀다. 남북 정상이 앞으로 보여줄 만한 빅 이벤트가 별로 없는 데다 식상해하는 국민도 점차 늘어나서다.문 대통령 지지율을 끌어내린 가장 큰 요인은 경제 문제다. 최저임금 인상 후폭풍, 소득주도성장 부작용, 최악의 고용 상황, 서울 집값 급등, 오락가락하는 부동산 대책과 세금 폭탄 논란 등이 지지율 하락을 가져왔다. 지지부진한 북한 비핵화, 거센 파도에 직면한 경제.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푸느냐에 문 대통령 지지율은 물론 국정 성패가 달렸다.그 사람의 미래를 알려면 과거를 보라고 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경제 문제에 대처해온 문재인 정부의 인식과 자세, 실력을 보면 앞으로 경제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리라 기대하기 힘들다.문 정부 출범 후 지난 1년 5개월 동안 경제 정책은 난맥상 그 자체였다. 최저임금 인상 문제 등을 놓고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줄곧 불협화음을 빚었다. '경제 투톱'이 손발을 맞춰 위기를 돌파하기는커녕 딴소리만 하다 보니 정책의 일관성은 물론 신뢰마저 깨졌다. 연말에 두 사람을 동시 교체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 이를 방증하고도 남는다.세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세금 만능주의도 문제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생긴 구멍을 세금으로 메우고 있다. 나랏돈을 투입해 임시 일자리를 만들어 고용지표를 끌어올리려는 꼼수를 쓰고 있다. 그동안은 이전 정권에서 쌓아둔 세수에 집값 급등, 반도체 호황으로 국세 수입이 늘어 버텨왔다. 그러나 반도체 경기마저 얼어붙고 세수도 한계에 달할 우려가 커 계속 세금을 쏟아붓는 것은 불가능하다.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정부가 경제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다. 경제 정책에 대한 야당의 쓴소리를 경청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고 죽을 지경이라며 아우성치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기업인의 절규와 한숨마저 외면하고 있다.고용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경기선행지수가 추락하는 등 경제 엔진이 식어가고 있다. 대외 변수마저 악재투성이다. 나 홀로 호황을 구가하던 미국 경제에 대해서도 부정적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발 금융위기설도 있다. 두 나라 경제가 휘청거리면 우리 경제는 핵폭탄급 충격을 받는다. 주식시장과 환율에서 전조(前兆) 증세가 나타났다.문 대통령을 비롯해 경제를 책임진 인사들이 경제에 대한 관점을 더욱더 실용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것이 위기를 헤쳐나가는 첫걸음이다. 경제 현장에서 나오는 의견을 토대로 해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지금 기준으로 보면 외환위기를 가져온 김영삼 전 대통령은 탄핵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외환위기 고통은 국민이 고스란히 감내했다.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만약 외환위기에 맞먹는 경제 위기가 와 민생이 파탄 나면 국민은 대통령과 정부에 책임을 물을 게 분명하다. 촛불이 다시 타오를 수 있다. 처음 가는 길은 어렵지만 두 번째 가는 길은 쉬운 법이다.

2018-10-16 05:00:00

박병선 논설위원

[세풍] 남북관계 말고는 없나?

요즘 가장 아리송한 것은 현 정권이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헷갈린다는 점이다. 방송·인터넷·젊은 층에서는 호의적인 평가 일색이지만, 정작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 좀 혼란스럽다.개인적으로 비핵화·남북관계에 진력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다른 현안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라고 본다. 현안 해결 능력만 볼 때, 실망 정도가 아니라 거의 낙제점이다. 여당 주변에서도 "너무 실력이 없다"는 자평이 나오니 심각한 국면임이 분명하다.남북관계에 매달리는 정부의 정책 방향은 대체적으로 옳다. 우리 사회에 북한을 감정적으로 여기는 시각이 여전히 많지만, 북한을 고립시키고 압박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흉기를 쥔 10대'를 방에 가둬두고 두들겨 패서 교화시키려고 해봤자, 더 비뚤어지기 십상이다. 밖에 데리고 나가 밝은 세상을 보여주고 '흉기'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비록, 구차하고 아니꼽지만 '흉악한' 철부지를 교도하려면 달래고 어르는 방법이 최선이다.그런데, 문제는 정부가 '남북관계 지상주의'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남북관계를 빼면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으니 그럴 만하지만, 말만 앞세우고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 매사 '미적미적' '흐지부지'하는 것이 정권의 특징처럼 굳어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최저임금, 집값, 일자리, 입시, 환경 등 중요 현안마다 구멍이 숭숭 나 있고, 지역민이 관심 갖는 지방분권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연방제 수준'의 분권을 하겠다고 공언하더니만, 지금까지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 2차 공공기관 이전에 대해서도 정부는 올 초 추가 이전은 없다고 발표했다. 2004년 지역 균형 발전을 앞세워 153개 공공기관 이전을 단행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거꾸로였다. 그 와중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국회 대표연설에서 수도권 122개 공공기관을 이전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 대표가 문 대통령의 지지부진한 정책 추진에 답답함을 느끼고 일침을 가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정권 실세들은 스스로 서민 출신이라고 내세울지 몰라도, 아무리 봐도 '책상물림'의 전형이다. 진보성과 신념으로 무장해 남북·노동 문제는 해박할지 몰라도 서민 살림살이의 이해도는 무지에 가깝다. 서민 모두 불황이라고 아우성인데, 정부는 무작정 기다리라고 한다. 국민 모두가 교수·정치인·운동권 출신처럼 생계에 걱정없는 이들이 아니다. 하루가 힘들고 다급한 사람들이다.정권은 남북관계의 성공에 취해 있지만, 언제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외줄타기 상황이라는 점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비핵화는 우리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11월 중간선거 후 태도를 바꾸면 방법이 없다. 극우 세력이 내심 바라는 시나리오지만, 잘못하면 남북 모두에게 재앙적인 결과가 될 수 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플랜B'를 만들어야 하지만, 그런 대비책조차 없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정권 출범 1년 6개월이 됐다. 한창 개혁하고 바꿀 시기인데, 적폐 청산에만 열을 올릴 뿐, 결실이 없다. 어물거리다간 빈손으로 나가는 정권이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가장 치명적인 병은 머릿속에 생기는 병'이란 말이 있듯, 자신들 앞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면 그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2018-10-09 05:00:00

서종철 논설위원

[세풍] 깔아도 모자랄 멍석 덮어쓰라면

3분기를 접자마자 각종 경제동향 조사와 실적 통계, 새 분기 전망이 쏟아진다. 예상한 대로 밝은 소식은 찾기 어렵다. IMF 등 국제기구나 국내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올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3.0%에서 2.8%, 2.6%로 잇따라 낮춰 잡았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서 한국의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미국·중국·일본에 모두 뒤진 것으로 나타나 우려감이 커지고 있다.당장 눈앞에 닥친 장애물도 만만찮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 최고 25%의 고율 관세 적용을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다. 관세 폭탄이 현실화되면 대미 자동차 수출이 22.7%, 이로 인한 손실 규모가 수조원에 이르고 최악의 경우 13만 개의 국내 일자리가 위협받는다. 당장 일자리 상황에 눈을 돌려보면 최저임금 인상에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로 넘친다. 올해 실업급여 지급 규모가 사상 최대치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모든 수치를 요약해보면 성장과 고용, 투자 등 모든 지표의 포물선이 아래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 경제의 내상(內傷)이 계속 깊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 와중에도 부동산만은 꿋꿋하다. '미친 집값'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자고 나면 집값이 뜀박질하는 것은 더 이상 부동산시장 구조나 요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암시한다.한국 경제가 부진한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경기 회복세를 탄 미국과 일본, 유럽 등 선진국 상황은 우리보다 훨씬 낫다. 경제 규모나 구조, 정책 방향 등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유독 우리만 죽을 쑤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어제 일본 닛케이지수는 1991년 11월 거품경제 붕괴 이후 근 27년 만에 최고 수준에 올라서면서 한일 경제 상황은 희비가 크게 엇갈렸다.경제 환경도 환경이지만 정책의 문제점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시장을 모르거나 과소평가하면서 나타난 현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시장은 정부를 이길 수 없다'고 발언했다. 혼란한 부동산 시장을 염두에 둔 이 말에서 정책 브레인들의 사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정부가 시장을 움켜쥘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힘을 마구잡이로 휘두르지 않는 이상 시장의 은밀한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데서 기대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1년 반 만에 10번의 부동산 대책을 내놓아도 혼란이 여전한 까닭이다.그런데도 정부는 여전히 이 길로만 가면 돌덩이가 금덩이 된다는 식으로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라는 구호만 외쳐댄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런 구호로는 높은 세계경제 파고와 교활하고 집요한 시장을 이겨낼 수 없다. 맥도 짚지 못하면서 진단하고 처방하는 꼴이다.이제라도 지리멸렬한 고용 정책과 부동산 대책의 허점을 돌아봐야 한다. 시장과 기업의 '플랫폼'이 되는 게 바로 정부 역할인데도 시장과 기업에 우월감에 젖어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결국 정부는 멍석을 깔고 기업과 시장이 놀도록 만드는 게 바른 처방이다. 지금은 정부 만능주의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의 말대로 '20년 집권 플랜'이 가능하려면 정책 효용성을 따지고 시장을 속속들이 분석해 길을 찾아야 한다. 콧대 세우고 멀리만 보다가 발아래 벼랑을 놓치면 20년은커녕 3년 후도 힘들다.

2018-10-02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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