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관련 기사 목록입니다.
서종철 논설위원

[세풍] 상식은 힘이 세다

상식은 물이나 공기와 같다. 평소에는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비상시에는 본원 가치를 유감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공기나 물처럼 상식도 하루아침에 완성된 작용 원리나 가치는 아니다. 상식이 오류의 함정을 전부 비껴갈 수는 없으나 상식은 인식과 판단의 밑거름이자 현상과 구조에 대응하는 인간 행동에 유의미한 기제다.국제 비상사태로 급부상한 신종코로나바이러스(2019-nCoV) 위기에도 상식의 기제는 유용하다. '우한 폐렴'으로 불리는 이 사태로 인해 10일 기준 29개 나라·지역에서 4만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왔고, 900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현재까지의 양상만 놓고 봐도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태보다 전파력과 피해 규모가 훨씬 크다. 당시 전 세계에서 8천273명이 감염됐고 775명이 죽었다.무엇보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피해가 계속 확산 중이어서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국제 보건에 큰 위협이자 중국·한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아웃브레이크'(집단 발병) 사태임은 분명하다.대구경북 지역도 이 위기에서 결코 예외는 아니다. 지난달 24일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귀국한 17번 확진자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대구에 이틀간 머물렀다는 뉴스에 지역사회는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집 안에서도 철저히 마스크를 쓴 덕에 가족 등 접촉자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 한 사람의 상식과 소양이 피해 확산을 막은 것이다.반면 상식이 외면받는 사회 구조도 엄연히 존재한다. 허락없이 질병을 발설한 죄로 중국 당국에 체포됐다가 풀려난 뒤 결국 감염돼 목숨을 잃은 리원량(李文亮) 사건이 그렇다. 그는 코로나바이러스를 '악마'로 규정해 비판의 화살 머리를 세균에 돌려버린 권력자의 시각에서는 반동 분자다. 의사로서의 진실과 상식 차원의 문제 제기가 되레 독배가 된 것이다.비상식의 정점은 '크루즈 감옥' '크루즈 국가'라는 조롱 섞인 별칭이 붙은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유람선 케이스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리포트에서 이 유람선 탑승객 확진자들을 '기타(other) 지역'으로 분류했다. 영국 국적의 이 대형 유람선에는 3천700여 명이 탑승 중인데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 격리된 채 대책없이 2주간의 잠복기와 검역 종료일만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지난 5일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10일 현재 130여 명이 감염됐는데도 일본 정부는 거의 방관 중이다. 이 배에는 한국인 승객 등 14명이 격리돼 있는데 일본 정부는 "일본 상륙 전에 발생했다"는 이유를 대며 일본 확진자 명단에서도 제외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사고 있다.우리에게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아픔이 있다. 2009년 76만여 명이 발병해 270명이 숨진 신종플루와 2015년 186명이 감염돼 38명이 희생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다. 당시 정부와 의료기관의 초기 대응 실패로 의료시설을 통한 2차, 3차 감염이 확산됐고 보건 당국이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면서 혼란을 자초했다.이번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서 보듯 위기는 늘 우리 곁에 있다. 계속된 학습의 결과로 인식 수준도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으나 결국 우리가 기댈 것은 과학과 상식의 힘이다. 가치 있는 경험과 이성적 판단으로 차분히 위기에 대처할 때 어떤 힘이 발휘되는지 이번 사태가 증명한다. 기억할 것은 '공포 마케팅' 등 고약한 상혼이 판을 치는 혼란 중에도 모든 가치는 본원 가치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이다.

2020-02-10 19:15:08

조향래 논설위원

[세풍] 당쟁의 추억

70년 남짓한 대한민국 정당 이름의 역사는 휘황찬란하다. '자유' '민주' '공화' '통일' '정의' '한국' '국민' '평화' '민중'이란 용어를 앞뒤로 뒤섞어 쓰다가 한계에 이르자 '나라' '누리' '우리' '미래'까지 등장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신' '새'라는 접두어를 붙이더니 '열린' '더불어' '대안' '새로운'이라는 수식어까지 나왔다. 지리멸렬한 정당사의 변화무쌍한 자취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감이다.4월 총선을 앞두고 또 천태만상의 이름을 내세운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것이다. 범여권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고차원 방정식 같은 선거법이 이를 더 부추기고 있다. 이제는 신세대를 고려한 '헐' '짱' '개'라는 접두어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그리고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 당명은 100~2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가방 새로 바꾼다고 공부 더 잘하나….한국 정당의 변천사는 대부분 분열과 야합, 탈당과 합당의 무분별하고 몰가치한 이합집산의 귀결이다. 당쟁이 격화되었던 조선시대에도 지금처럼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당파를 오락가락하며 당명을 밥 먹듯이 바꾸지는 않았다. 동서남북 사색당파가 '노론·소론' '시파·벽파' '청남·탁남' '대북·소북' 등으로 분화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양당 체제의 틀을 유지했다.명칭뿐인가, 정치 행태는 또 어떤가. 조선시대의 당쟁도 저열한 권력투쟁이란 측면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의명분을 내세워 이론적으로 싸웠다. 예론(禮論)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쟁에도 도덕적인 의리와 유교적인 명분이 있었다. 철학적인 무장을 하지 않으면 논쟁에 끼어들지도 못했다. 오늘의 정치판처럼 도나캐나 달려들어 천지 분간도 없이 물고 헐뜯는 천박한 패거리싸움은 아니었다.적어도 당파 싸움 때문에 망했다고 역사와 조상을 탓할 염치는 없어졌다. 더구나 조선은 당쟁이 격심했던 숙종~영조에 이르는 50년 동안 오히려 민생이 안정되어 백성들이 살기 좋았던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망국의 길을 재촉한 것은 노론벽파 일당 독재에 이은 세도정치 탓이었다. 조선의 당쟁을 두둔할 생각은 결코 없다. 부끄러운 역사요 청산의 대상이었음이 분명하다.당쟁은 국론을 분열시켰다. 왜란과 호란의 와중에도 지도층의 의견 대립이 있었고, 해방 정국의 좌우 대립도 있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온 국민을 분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당쟁의 쓰라린 추억을 오히려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이름으로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라져 대립하며 서로를 척결의 대상으로 여기는 국론 분열의 종착역은 어디인가.정당정치가 핵심인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의견 대립은 당연지사이다. 그런데 요즈음처럼 국론 분열이 심각한 위기의식으로 다가온 적이 있었을까. 그래도 반성하고 거듭날 줄 모르는 보수의 이기(利己)와 탐욕이 한심하다. 더 기가 막힐 일은 진보를 자처해온 세력들의 몰염치한 민낯이다. 도덕과 상식마저 내팽개친 그들의 무례와 오만은 '유체이탈' '내로남불' '후안무치' 그 이상이다.그들은 스스로 신주처럼 떠받들던 민주적 가치를 제발로 걷어차고 이른바 '좌파 독재'로 질주하고 있다. 그 결말은 조선의 망국과 남미 좌파 정권의 실패에서 유추할 수 있다. 보수의 분열과 노욕 또한 그 역주행을 돕고 있다. 식민사관의 궤변처럼 우리는 결국 '이것밖에 안 되는 민족인가'. 유사 이래 처음 이루어 놓은 경제 강국의 위업과 한류가 지구촌을 강타하는 문화민족의 자존도 이렇게 사위어가는가.

2020-02-03 21:06:45

국내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인 '우한 폐렴' 네번째 확진환자가 발생한 가운데 지난 27일 오후 서울 경복궁을 찾은 관람객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연합뉴스

[세풍] 역병(疫病)의 추억

본능적으로 인간은 아픈 기억을 잊고 싶어 한다. 1918~19년 전 세계에 창궐한 스페인독감이 그랬다. 스페인독감은 6억 명에 이르는 감염자와 최소 2천500만 명, 최대 1억 명으로 추산되는 사망자를 발생시킨 전대미문의 대역병(大疫病)이었다. 스페인독감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목불인견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폐가 피에 잠겨 고통 속에 죽었다. 대혼돈 속에 망자(亡者)들은 최소한의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버려졌다. 그 장면을 봐야 하는 산 자가 죽은 자를 오히려 부러워했다고 전해진다.하지만 불과 100년 전에 일어난 일인 데도 스페인독감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14세기 유럽을 덮친 흑사병(페스트) 등과 견주어 봐서도 매우 이례적이다. 인류는 너무나 끔찍했던 스페인독감의 참상을 기억에서 애써 숨겨 놓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잊고 싶다고 해서 쉬 잊히는 것이 인간사인가. 끔찍한 대재앙의 기억은 인류 의식 깊은 곳에 강한 트라우마를 남겨 놓았다.이후 1세기가 지나는 동안 에이즈(AIDS)와 에볼라 바이러스(Ebola virus), 사스(SARS), 메르스(MERS) 등 여러 종류의 신종 바이러스가 등장했고 인류는 그때마다 스페인독감의 공포를 떠올렸다. 신종 바이러스들 대부분은 가축이나 야생동물들을 매개체로 삼아 잠복해 있다가 변이를 일으켜 사람 몸에 침투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신종 바이러스는 그에 대한 면역체계를 갖추지 못한 인류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여러 신종 바이러스가 출몰했지만 다행히도 스페인독감과 같은 대재앙급 사태는 재발되지 않았다. 국제화가 1세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활성화됐기에 자칫 통제가 안 됐다면 스페인독감 때와 같은 대재앙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의료기술이 발달했고 개인위생 환경이 개선됐으며 보건당국이 기민하게 대응한 덕분이다.그런 가운데 인류를 위협하는 신종 바이러스가 하나 더 출현했다. '우한 폐렴'이라 불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다. 정확한 발생 경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의 수산시장에서 식용으로 취급하는 야생 박쥐로부터 사람에게 옮겨졌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우한에 있는 생화학세균연구시설에서 누출됐다는 설 등 추정만 분분하다. 향후 추가 변이를 일으킬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현재로서는 전파율과 치사율 면에서 사스와 메르스 중간 정도인 바이러스로 알려져 있다.27일 현재 중국에서 80명의 사망자가 났고 우리나라에서도 네 번째 확진자가 나오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사스와 메르스도 극복해냈듯 우한 폐렴 역시 수습 가능한 전염병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걱정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다. 우한 폐렴의 경우 증세가 발현되지 않은 잠복기의 감염자가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에 확인돼서 그렇다. 역대 여느 코로나바이러스에서 없던 특징이다.항간에서는 중국인의 우리나라 입국 자체를 막자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있고 의사협회조차 같은 주장을 펴고 있는데 바람직하지 않다. 국제법으로도 문제가 있고 세계보건기구(WHO)도 효과가 없다며 권장하지 않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해야 할 조치이다. 무엇보다도 정부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응하는 것이 옳다. 개인은 예방수칙을 철저히 지키되 과도한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지금 인류는 우한 폐렴이 조기에 진압되느냐, 세계로 확산하느냐 기로에 서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2020-01-27 18:34:13

정경훈 논설위원

[세풍] 뭘 잊어달라는 건가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많은 말을 했다. 그중 "대통령 끝나면 잊혀진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가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다. 세간의 반응은 한결같다. "잊어달라고? 왜 그래야 하는데?" 그렇다. 쓰레기통에서 피워낸 우리 민주주의를 다시 쓰레기통으로 처박고, 법치를 파괴했으며, 국민 경제를 거덜냈고, 국민을 내 편 네 편으로 갈가리 찢어놓았으며, 북한에 굴종하며 국가안보를 김정은에게 저당잡힌 그 반(反)민주적, 반(反)양심적, 반(反)공동체적, 반(反)역사적 행적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문 대통령의 모든 행적을 잊을 수 없지만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동일한 문제라도 어떤 입장이냐에 따라 말과 행동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바꾸는 기만성이다. '윤석열 검찰 대학살'은 이를 여과 없이 보여줬다. 문 대통령은 2012년 12월 대선 때 "MB(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대통령 및 청와대가 검찰 수사와 인사에 관여했던 악습을 완전히 뜯어고치겠다"고 했다. 2017년 대선 때도 "권력 눈치 안 보는 성역 없는 수사기관을 만들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그러나 '우리 총장님 윤석열'이 "살아있는 권력에도 똑같이 하라"는 당부를 실천에 옮기자 '윤석열 사단'을 해체해버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검찰의 수사권이 존중되어야 하듯이 장관과 대통령의 인사권도 존중돼야 한다"이다. 그러나 전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조롱당하고 있다. 인사권 행사로 발탁된 친문 검찰 간부는 "조국을 무혐의 처리하자"고 했다가 후배 검사에게 "네가 검사냐" "조국 변호인이냐"는 반말을 들었다.또 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7년 2월 박영수 특검의 압수수색을 청와대가 거부하자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문 대통령은 "정당한 법적 절차를 방해하고 그것을 통해 탄핵을 모면하고 사법 처리를 모면하려는 행태" "정말 개탄스러운 일" "국민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문재인 청와대'는 검찰이 법원의 허락을 받은 합법적 압수수색을 "적법 절차에 따르지 않은 위법한 수사"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거부하고 있다.이런 이중성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체질화돼 있는 듯하다. 2004년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기각하자 "헌재의 결론이 일반 국민의 상식과 똑같다"고 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기각 결정에 대해서는 180도 달랐다.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과 국회에 헌재가 어떻게 맞서느냐는 거다. 이런 논리는 마침내 헌재는 선출된 권력은 탄핵할 수 없다는 반(反)헌법적 결론에 이른다."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는 다행히 기각됐다. 하지만 인용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실제로 헌법재판관 2명은 인용 의견이었다. 같은 의견을 가진 재판관이 다수였다면 대통령은 탄핵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한을 줬을까?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의 정당성이 어디 있을까? 국민이 그들을 헌법재판관으로 선출한 것도 아니다."('문재인의 운명')이 논리대로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결정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 탄핵 결정을 "국민의 힘으로 가능했다"며 쌍수로 환영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하지 않고 세습이라도 했나? 국민이 지금 문 대통령에게서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기만성의 확대재생산이다. 지긋지긋하지만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영화 제목이 생각난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2020-01-20 19:10:34

정인열 논설위원

[세풍] 뒷날이 두렵다

1907년 3월 2일 만세보에는 '여론이 들끓다'는 제목으로 이런 글이 실렸다."요사이 국채를 보상하려고 서울과 시골에서 백성들 가운데 남녀노소 막론하고 의연금을 떠들썩하게 모집하여 지금 모집한 금액만 해도 적지 않은데, 정부 각 대신은 그 차관을 갚기를 강구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그 빌린 자금 가운데에서 교접비(交接費)라 명목을 정하여 매월 200환씩 태연하게 받아가니…여론이 시끄럽다더라."뭇 백성이 나서 일제에 진 빚 1천300만원을 갚자며 어린아이의 코 묻은 세뱃돈까지 모으던 시절이다. 그런 엄중한 때에 나라 관리, 그것도 대신들이 빚더미에서 떡고물이나 뒷주머니 사례금(리베이트)처럼 '마음에 불안하지도 않은지' 달마다 꼬박 챙기는 꼴을 폭로한 글이다. 대신이 이러니 나라 꼴은 뒷날 우리가 아는 역사 그대로다.이런 자료는 110년 지나 2017년 10월 31일, 세계기록유산(세계의 기억)으로 선택돼 세계인도 우리 옛 치부를 알게 됐다. 이는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의 세계기록물유산등재추진위원회에 의한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로 이뤄졌다. 지난 1997년, 훈민정음(해례본)과 조선왕조실록이 나라의 첫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고 20년 만이니 경사스러운 일이다.물론 이런 부끄러운 모습만 등재된 것은 아니다. 모두 2천475건인 기록물 속에 포함된 하나일 뿐이다. 그 속에는 최소한 120건이 넘는 감동적이고 가슴 아린 사연도 있다. 즉 6세 어린이부터 해외 유학생에 이르기까지, 남의 집 밥상(床)이나 나르던 종(奴)노릇의 소년과 바느질 품삯을 내놓은 소녀 등 아이와 청소년 기부 자료가 그렇다.이 밖에 우리의 세계기록유산에는 14가지가 더 있다.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 팔만대장경판·제경판, 동의보감, 일성록, 5·18민주화운동기록물, 난중일기, 새마을운동기록물, 한국의 유교책판, KBS이산가족찾기기록물, 조선왕조어보·어책, 조선통신사기록물이다.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이 '기억'할 만한 가치를 가진 까닭에 세계기록유산이 됐다.이런 '세계의 기억'인 기록 유산의 나라지만 정치만은 탈(脫)기억이다. 지난날의 기록과 기억을 통한 반성과 새로운 길을 내는 창조적 활용은 뒷걸음질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의 최고 지도자 행적을 보면 더욱 그렇다. 과연 그런 가치를 실현하려는 국정 철학을 갖고 있는지조차도 의심스럽다. 지금까지 물러난 11명 대통령 가운데 여럿이 남긴 오욕(汚辱)으로 점철된 부끄러운 역사는 좋은 증거다.이들 오욕의 기억과 기록을 남긴 대통령들과 달리, '가보지 않은 길'을 장담하고 그럴듯한 행보였던 문재인 정부가 요즘 걱정스럽다. 분명 공정과 통합, 국민 모두를 위한 지도자가 되겠노라 외쳤던 그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출범 당시 장밋빛 약속 이행은커녕이다. 앞선 여러 오욕의 지도자들이 권력에 취해 엇길로 빠졌다가 추락한 과거를 기억조차 못하고 되레 그런 길로 접어드는 듯하니 말이다.특히 조국 사태 이후 청와대와 대통령 친위 세력의 모양새가 고약하다. 청와대 관련 의혹을 캐려는 검찰과의 싸움이 그렇다. '다르겠지' 했던 진보에 대한 기대를 접게 할 만하다. 청와대를 향한 검찰 칼날에, 총장을 차마 바꿀 수 없으니 장관을 앞세워 손발을 자르고 청와대는 법원 발부 영장 집행조차 거부하며 검찰을 뭉갰다. 사관(史官)이 없으니 대통령과 청와대가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면 불안하다. 자칫 잘못되면 뒷사람이 또 하나의 '세계의 기억'으로 한국 역대 대통령 기록물을 등재하려 달려들까 두렵다.

2020-01-13 21:13:56

이대현 논설위원

[세풍] 위대한 국민을 타락시키는 文정권의 사악함

2020년 새해가 밝았지만 기대·희망보다 걱정·절망이 앞선다. 이 나라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암담하고, 미증유(未曾有)의 이 위기를 헤쳐나갈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몰려온다.지난 100년 대한민국은 기적의 역사를 창출(創出)했다. 1953년 1인당 국민소득이 67달러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에서 477배가 늘어난 3만2천달러의 부유한 나라가 됐다. 일제 강점, 전쟁, 가난에 고통받던 나라가 세계 12위 경제 대국에 자유민주국가로 탈바꿈했다. 유례가 없는 기적을 만들어낸 이 나라에 전 세계가 찬사를 보냈다.기적의 역사를 일궈낸 원동력 두 가지는 탁월한 국가지도자와 위대한 국민이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慧眼)을 가진 국가지도자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고, 모든 국민이 똘똘 뭉쳐 성과를 내려고 매진((邁進)했다. 국가지도자와 국민, 이 둘이 절묘하게 조합(組合)을 이뤄 피와 땀을 흘린 덕분에 오늘의 이 나라를 만들었다.'세계가 부러워했던' 이 나라가 더 웅비(雄飛)하지 못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한민국을 흥(興)하게 만들었던 원동력이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국가의 리더인 대통령은 탁월함을 갖추지 못했고, 국민은 위대함을 잃어가고 있다.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국민에 약속했다. 그러나 2년 반이 넘도록 미래가 아닌 과거로 역주행(逆走行)하며 재앙에 가까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국민에게 안겨줬을 뿐이다. 문 대통령에게서 어떤 탁월함을 찾을 수 있나. 탁월한 국가지도자를 갖지 못한 나라는 번영할 수 없다.지난 2년 반 동안 문 정권이 저지른 가장 나쁜 행위는 위대한 국민을 저열(低劣)한 존재로 타락시킨 것이다. 온갖 명목의 선심성 현금 뿌리기로 국민을 '바보' '등신'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국민 세금으로 현금을 쥐여주는 국민이 1천200만 명이나 된다. 올해만 해도 769만 명에게 17조원의 기초연금, 세금 알바에 26조원 등 끝이 없다. 현금 복지 종류만 2천 종에 육박하다 보니 헤아리기조차 어렵다.좌파 정권 연장을 위한 정권의 매표(買票)로 말미암아 국민은 갈수록 위대함을 잃어가고 있다. 근면 대신 나태, 자조(自助) 대신 국가 의존, 협동(協同) 대신 반목과 분열이 국민 사이에 똬리를 틀고 말았다.나라에서 현금을 쥐여주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이 돈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낸 세금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돈이라는 것이다. 달콤하다고 설탕물을 마구 들이켜서는 몸이 망가지는 것처럼 도를 넘은 현금 뿌리기는 나라를 망칠 수밖에 없다.더욱이 이런 사실을 정권이 잘 알면서도 선거 승리를 위해 현금을 뿌리고, 그 결과 국가 발전 원동력인 국민을 타락시킨다면 국가 기반을 무너뜨리는 죄(罪)를 짓는 것이다. 남미 여러 나라처럼 국가에 의존하는 국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권 연장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는 것은 사악(邪惡) 그 자체다.우리 국민은 역사의 격랑마다 지렛대 역할을 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4월 총선은 돈으로 국민을 구워삶아 선거 승리를 노리는 정권과 위대함을 지키려는 국민의 한판 대결이다. 국민이 정권의 포퓰리즘 유혹에 넘어가 망국의 길로 향할 것이냐, 국민이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 이 나라가 다시 흥할 기회를 잡느냐. 위대한 국민이 현명한 선택을 할 것으로 믿는다.

2020-01-06 19:04:40

서종철 논설위원

[세풍] 작은 연못 붕어 두 마리

세밑이다. 달력의 숫자가 바뀔 무렵이면 사람들은 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두드러질 게 없는 하루하루의 복제였든 오래 기억될 시간의 연속이었든 그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날이 그날이어도 삶에서 한 단락을 지으며 앞날에 희망을 걸고 기대를 얹어보는 순간만큼은 특별해서다.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이 1년을 보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어려운 경제 상황 탓에 평온한 일상보다는 삶에 쫓기고 상대적 박탈감에 짓눌려 무거운 마음으로 1년을 버텨온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개인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도 마찬가지다. 2019년을 돌이켜 볼 때 긍정보다는 부정의 이미지가 더 부각된다. 혼란한 정치와 외교안보, 활기를 잃은 경제, 분열된 사회로 인한 두려움과 불편함이 더 크다.무엇보다 끝 모를 정쟁에다 집권 세력의 독주는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한국 정치 문화에서 화합과 조화, 균형과 견제의 미덕은 사라진 지 오래이지만 지난 1년 우리 정치가 걸어온 길은 실망을 넘어 절망의 문턱도 넘어선 느낌이다. 한국 정치는 그동안 상대의 어깨와 손을 맞잡고 리듬에 맞춰 경쾌하게 돌아가는 왈츠 무대를 연출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마치 불길에라도 덴 듯 질겁하며 상대의 손을 뿌리치고 거친 언어로 상대 속을 후벼 파는 '동물 정치'의 유전자만 발현했다.집권당과 죽이 맞은 군소정당들이 '4+1 협의체'라는 기형의 코끼리를 만들어내 입법 기능을 장악하고 제1야당에 물을 먹인 것은 2019년 한국 정치의 지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 분쇄기에 선거법이 가루가 됐고 공수처법까지 말려 들어간 형국이다. 나라와 국민이야 어떻게 되든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보가 아니라면 도저히 해석하기 어려운 사건의 연속이다. 게다가 조국 사태를 비롯해 갖가지 권력형 비리 의혹과 뭉개기는 민주주의 가치와 질서마저 온통 헝클어 놓았다.이런 사이 정책이 뒤틀리고 제도는 방향을 잃었으며 심지어 입법의 현실까지 왜곡되는 '정치 독주판'이 펼쳐졌다. 그런데 브레이크 없는 독주와 독단은 그 끝을 보게 마련이다. 독주의 끝에 펼쳐지는 충돌의 잔해는 예상을 뛰어넘고 그로 인한 공포감은 인내심의 경계를 이탈할 수밖에 없다.문재인 대통령은 지난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 때 시진핑 주석에게 "잠시 섭섭해도 멀어질 수 없는 관계"라며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에 담긴 진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불편한 관계보다는 서로 협조해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이익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그렇다면 우리 안에서는 그런 말이 왜 한마디도 나오지 않고 또한 씨알도 먹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여야는 이웃이 아니라 불구대천의 원수인가. 권력과 정치적 영향력의 많고 적음이나 정적 관계를 떠나 여야는 똑같이 대한민국과 5천만 국민의 정당이자 국민의 기관이다. 여든 야든 상대를 청산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오산이자 착각이다.경자년(庚子年) 새해에는 대립과 반목의 어두운 시간을 끝내고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이기를 희망한다. 김민기의 '작은 연못' 노랫말처럼 서로 싸우다 한 마리가 물 위에 떠오르고,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연못 속에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는 상황은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쪽이 밉다고 썩었다고 숨통을 조이면 나는 온전할 수 있을까. 함께 사는 것이 연못을 살리고 나도 사는 길이다. 독주와 독단은 이제 끝내야 한다.

2019-12-30 20:20:18

조향래 논설위원

[세풍] 아리랑 고개는 아무나 넘어가나

어린아이와 부녀자까지 함께한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향하는 망명길은 혹독한 여정이었다. 난생 처음 접하는 북방의 겨울바람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모진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며 황량한 만주벌판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린 것은 나라 잃은 서러움이었다. 우리 민족 사상 유례없는 험난한 아리랑 고개였다. 기약 없는 아리랑 고개였다.110년 전 경술국치를 당하자 안동 명문가의 주손인 백하 김대락과 석주 이상룡은 66세와 53세의 노구를 이끌고 만주로 집단망명을 결행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정월이었다. 전대미문의 아리랑 고개. 멀고도 험난한 형극의 길이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기울어 가던 구한말, 경북의 올곧은 선비들은 그렇게 아리랑 고개를 넘었다.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집안의 명운과 가족의 생사까지 내던지며 모진 아리랑 고개를 넘었다. 가진 것들을 누리며 편안한 여생을 보내도 될 나이였지만, 국권과 자존을 되찾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사즉생(死卽生)의 길이었다. 당시 지배계급인 양반으로서 솔선수범해야 할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학문을 한 선비로서 마땅히 가야 할 실천적 삶이라 여겼다.반세기에 걸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경북인의 항일투쟁은 특별했다. 의병항쟁과 만세운동 그리고 구국계몽과 사회주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친 항쟁이 시종일관 지속된 곳은 경북이 유일했다. 의병을 가장 먼저 일으켰으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순절자가 나왔다.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이 가장 많은 것만으로도 대구경북이 독립운동사에서 가지는 위상을 웅변하고도 남는다.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횃불을 댕긴 곳이요, 광복회를 탄생시켜 의병과 계몽운동의 통합을 이루며 독립군 자금을 확보하고 의열투쟁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것이 3·1운동에서 민주공화정의 요구로 표출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유림단 사건의 본고장으로 만주 독립군기지 건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의열투쟁과 6·10만세운동의 핵심을 이룬 인물들도 대구경북인이었다.항일 민족문화의 찬란한 꽃을 피워 올린 이상화와 이육사의 이름 또한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일제에 대한 대구경북인의 저항은 이렇게 격정적이었고 지속적이었으며 그만큼 희생 또한 컸다. 그렇게 견위치명(見危致命)하며 숱한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경북의 정신과 실천적 삶이 광복을 이루고 전쟁을 이겨내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오늘날 한류의 시대를 연 것이다.파란만장한 겨레의 역사는 숱한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고난의 행로였다. 20세기에 들어서만도 망국과 분단과 전쟁과 파산(破産)까지 겪었다. 좌절과 시련의 고개였지만 다시 희망을 안고 넘어야 했던 숙명의 고개이기도 했다. 이제 또 하나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야 한다. 흥망의 분수령이다. 국가의 정체성이 왜곡되고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경제의 성장 엔진이 식어가고 있다.사회의 도덕성이 무너지고 위선과 망발이 난무하고 있다. 지리멸렬한 외교와 안보는 북한의 핵 위협과 욕설만 자초했다. 전례 없는 분열과 갈등을 안고 망국(亡國)열차가 질주하고 있다. 제동을 걸어야 하는데 멸사봉공하는 정치인 하나 없다. 사즉생의 결기를 보이는 강단 있는 지도자 하나 없다. 대구경북의 혼은 어디로 갔는가. 2020년 아리랑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말로만 보수를 외치면서 해묵은 탐욕의 보따리만 덕지덕지 껴안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갈 수 있을까.

2019-12-23 19:27:05

13일 오후 3시 개의하려던 제372회 임시국회 제1차 본회의가 지연되고 있다. 연합뉴스

[세풍] 개, 돼지 취급 받지 않으려면

문재인 정권은 '10년 집권'을 꿈꾼다. 그러나 내년 총선부터 쉽지 않아 보인다. 현실이 그렇다. 경제는 꼬꾸라졌고 대북정책은 파탄났다. 선거 공작과 인사 개입, 태양광 사업 등 각종 이권 개입 의혹이 자아내는 악취는 참으로 고약하다. 여론 조사는 이런 비정(秕政)과 동떨어진 결과를 내놓지만 그게 실상이 아님은 알 만한 사람은 안다.이런 상황에서 정권을 지키려면 무슨 수든 써야 한다. 바로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법이다. 목적이 이렇게 불순하니 내용이 불순한 것은 당연하다. 선거법 개정안은 표심(票心)을 인위적으로 왜곡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공수처법은 정권의 비리를 꼭꼭 숨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개정안의 명분은 소수 정당의 사표(死票) 방지이지만 실제 목적은 '10년 집권'을 위한 범(汎)여권 연합전선의 구축이다. '개정안'은 전문가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내 표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려 하지 말고 그냥 표만 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대한 알기 쉽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비례대표를 뽑는 정당투표의 득표율을 기준으로 정당별 의석수를 미리 배분하고, 거기에서 지역구 당선자를 뺀 의석수의 절반(이른바 50% 연동)을 비례대표 의석으로 우선 배분하며, 나머지 절반은 현행대로 정당득표율에 따라 배분한다.'이는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 정당득표율로 배정된 의석수보다 지역구 당선자를 더 많이 낸 정당은 '연동'으로 받는 비례대표 의석이 '0', 즉 이 정당의 정당 득표가 대거 사표가 된다는 것이다. 지역구 선거에서 얻은 지지율보다 비례대표를 뽑는 정당 투표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이런 운명을 맞을 수 있다.사표를 막는다면서 더 많은 사표를 구조화하는 모순의 극치다. 비례대표를 뽑는 정당 투표를 지역구 당선자에게까지 확대하려다 보니 이런 웃지 못할 코미디가 생기는 것이다. 지성우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비판 그대로다. "전 세계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전무후무하게 희한하고, 두고두고 선거법 개악 사례로 소개되어 대한민국이 웃음거리가 될 선거법 개정안이다."개정안대로면 민주당은 의석수가 줄어든다. 이런 '자해'를 하는 이유는 의석수 증가라는 미끼로 군소정당을 꼬드겨 장기집권을 위한 '2중대'로 세운다는 계산에서다. 그런데 민주당이 뒤늦게 '본전 생각'이 났는지 "비례대표 의석수 전체를 줄이자" "연동을 적용하는 비례대표 의석수도 줄이자"고 나섰다. 그렇게 하면 군소정당 의석수는 기대치보다 적어진다.군소정당이 이에 반발하면서 '4+1 협의'로 선거법 등 패스트트랙 법안을 처리하려던 민주당의 계획은 차질을 빚고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군소정당에 떡고물을 줘 선거법 처리에 나설 것이다. '10년 집권'을 위한 또 하나의 기둥인 공수처법 통과를 위해서는 이들과 '야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군소정당을 어떻게 달래든 선거 민주주의의 제도적 파괴이다. 이를 그냥 보고만 있으면 국민은 정말로 개, 돼지가 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 1919년 독일군부의 실세로 왕정주의자인 루덴도르프와 정치학자 막스 베버의 대담은 그 대답이 될 듯하다."인민은 그들이 신뢰하는 지도자를 선출한다. 그다음 그 지도자는 말한다, '지금 당신들은 아무 소리 말고 복종하라. 인민과 정당들이 지도자와 상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베버) "그런 민주주의는 상당히 매력적이다."(루덴도르프) "그런 다음에 인민은 심판할 수 있다. 만약 지도자가 잘못한다면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베버)

2019-12-17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세풍] 대구에 돌고 도는 '착한 돈'

돈은 돌고 돈다. 몸의 피처럼. 피가 돌아야 하듯이 돈도 금고 속에 갇혀 있지 않고 돌아야 제 역할을 하리라. 그렇게 돌고 도는 돈 가운데 보수 도시라는 소문의 대구의 돈, 특히 이웃을 돕고 나눔을 위한 대구의 '착한 돈'은 더욱 빛이 난다면 믿을까. 그러나 사실이다. 지난날을 살피면 수긍하리라.먼저 1907년 대구에서 불붙은 국채보상운동이다. 우리가 나랏빚이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 깨달았을 때다. 나라 관리와 권력자가 집안 장롱에 부정한 엽전을 재고 있을 당시, 대구 사람은 담배를 끊고 아낀 푼돈을, 부녀자는 비녀와 반지 등 패물에 이르기까지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내놓았고, 이는 전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사상 처음, 당시 1천700만 추정 인구의 1.8%인 31만7천여 명(추정)이 동참한 자발적 거국 모금운동은 이렇게 이뤄졌다. 1907년 1~7월까지 나랏빚(1천300만원)의 1.5%인 20만원(학계)이 모였다. 대구경북은 3만1천520명이 1만7천445원을 모았으니 대구경북인 165만7천여 명(1911년 기준)의 2%가 참여해 모금액의 8.7%(목표 1천300만원의 0.1%)를 채웠다.이런 흐름은 1997년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운동으로 재연됐다. 4천700만 국민의 7.5%인 351만 명이 나랏빚 1천200억달러의 1.8%인 22억달러 상당의 금 227.5t을 모아 제2국채보상운동으로도 조명됐다. 특히 국채보상운동 전파지 대구에서는 '대구사랑운동시민회의'라는 민·관 기구를 통한 자발적 범시민적 나눔운동도 일어났다.무엇보다 이런 나눔운동은 이웃돕기 기부로 번졌다. 매일신문에서 2002년 11월 19일부터 매주 1회, 올 10월 8일까지 16년11개월 853회 연재한 '이웃사랑' 모금이 한국기록원의 신기록 인증을 받은 사례가 그렇다. 성금은 111억5천373만5천384원으로, 매주 130여 명 총 11만4천400명이 기부했으니 대구시민 244만 명의 5%에 가깝다.더 있다. 1998년 발족한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성금 모금이다. 26년째 전국 꼴찌 수준의 대구 경제지표(1인당 국내총생산)와 달리 해마다 연말에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모금회 이웃사랑 성금 접수는 목표 100℃를 초과하기 일쑤였고, 1억원 넘는 기부자도 현재 144호로 서울(277호), 경기(216호), 부산(177호) 다음에 이를 만큼 많다.아울러 대구에는 다른 곳과 달리 얼굴 없는 '키다리 아저씨'와 '키다리 아줌마'도 기부 행렬을 채우고 있다. 2012년 1월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8차례 걸쳐 매번 1억2천만원을 전한 아저씨와 2013년 1월부터 매월 10만~44만원까지 한 차례도 빠짐 없이 성금을 모금회에 보낸 청소 아주머니가 자랑스러운 주인공이지만 지금까지도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다.이렇게 돌고 도는 대구 돈은 대구의 공동체를 구르게 하는 대구만의 소중한 동력이 될 만하다. 이런 기부 문화에 새로운 사례도 생겼다. 7일 달성 서씨 대종회가 35억원에 이르는 600년 역사의 대구 중구 동산동 한옥마을 내 옛 구암서원 터를 대구시민에 내놓은 일이다. 세종 때 현 달성공원을 국가에 바치고 대구 사람의 세금 감면을 바란 옛 조상 서침(徐沈)의 뜻을 이은 후손다운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다.혼란스럽고 힘든 경제 사정 속에 다시 맞은 12월, 세밑이다. 거리 여기저기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했고, 공동모금 활동도 이미 시작됐다. 날씨만큼 움츠린 마음이겠지만 늘 그랬듯, 대구의 '선(善)한 돈'은 돌고 돌아 대구의 올겨울도 지낼 만한 따뜻한 곳으로 이끄는 마력을 보이리라 믿는다. 부정적인 평가의 보수 도시 대구에서 돌고 도는 착한 돈은 죄가 없으리라.

2019-12-09 19:11:31

이대현 논설위원

[세풍] 문재인·박근혜 누구 잘못이 더 큰가

지난 대선 당시 민주화 운동 대부 장기표 씨가 "박근혜에겐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이 한 명이지만 문재인에게는 최서원이 10명이 될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을 돈 지금 그의 예언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다. '국정농단' '국기문란' '권력의 사유화'를 증명하는 게이트들이 쏟아지고 최서원 뺨치는 '문재인 정권의 최서원들'이 속출하고 있다.김기현 전 울산시장 청와대 하명(下命) 수사 의혹과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청와대 감찰 중단은 국가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다. 문 대통령과 집권 세력이 야당이라면 촛불을 드는 것을 넘어 대통령 탄핵에 나서고도 남았을 것이다.주권자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의사를 행사하고 표시하는 선거가 국가 공권력에 의해 파괴됐다. 비리 혐의가 명백한 공직자는 청와대 감찰을 무력화시킨 것을 넘어 승승장구했다. 문 대통령과 집권 세력이 주야장천 부르짖은 공정·정의가 조국 사태에 이어 또다시 시궁창으로 굴러 떨어졌다.검찰 수사가 밝혀야 할 핵심은 두 사건에 등장하는 '뒷배'가 누구냐는 것이다. 김 전 시장에 대한 경찰의 '아니면 말고 식' 수사로 울산시장 선거 판세가 뒤집혔다. 당선된 송철호 울산시장은 문 대통령의 오랜 정치적 동지이자 사석에서 호형호제하는 절친이다. 자기 담당 업무가 아닌 데도 김 전 시장 관련 첩보를 가져와 경찰에 전달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행동대장' 백원우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이었다. 송 시장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첩보의 생성·가공, 전달 그리고 경찰 수사 등에 누가 개입했는가를 규명해야 한다.사의를 표명한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은 유 전 부시장 감찰 중단 사건과 관련 "조국 민정수석이 주변에서 전화가 너무 많이 온다면서 지시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조 씨는 유 씨와 일면식이 없었고 처음엔 강하게 감찰하라고 지시했다. '청와대 2인자'로 꼽히던 민정수석이 거부할 수 없는 누군가의 요구를 받고 감찰 중단을 지시한 것으로 봐야 한다. 유 씨는 비리가 적발됐는데도 국회 수석전문위원, 부산시 부시장으로 영전한 것은 물론 감찰 이후에도 계속 금품을 받았다. 유 씨는 문 대통령을 '재인이 형'이라 부를 만큼 가까운 관계라고 한다. 그의 뒤를 봐준 뒷배가 누구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국민은 궁금하다.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문 정권의 농단과 적폐, 위선과 불의가 더 심하다는 비판이 무성하다. 입만 열면 공정과 정의를 외쳤던 정권이기에 국민의 실망이 더 크다. 적폐 청산을 앞세워 전·전전 정권 인사들을 줄줄이 처벌하면서 뒤로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중심으로 선거 공작으로 의심받는 짓을 저지르고 자기편이라는 이유로 비리를 덮었다니 놀라울 뿐이다.'맹자'에 연목구어(緣木求魚) 후필재앙(後必災殃)이란 말이 있다. 나무에 올라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은 무모한 일을 하면 후에 반드시 재앙을 받는다는 뜻이다. 울산시장 하명 수사 의혹과 청와대 감찰 중단에서 연목구어를 방불케 하는 턱도 없는 일들이 벌어졌고, 이제 정권을 뒤흔드는 재앙이 됐다.'윤석열 검찰'이 칼을 뽑은 데다 정권이 레임덕 조짐을 보임에 따라 정권을 둘러싼 게이트들이 계속 터져 나올 개연성이 크다. 지금까지 나온 것은 빙산의 일각이란 말을 흘려들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국정 실패에다 조국 사태에 이은 게이트들에 "이건 나라냐" "2년 반 동안 잘한 게 하나도 없다"는 개탄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독서삼매경이다. 정말로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라다.

2019-12-03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세풍] 공모의 역설, 누가 키우나

요즘 대구 문화예술계의 관심은 문화예술 기관장 공모에 온통 쏠려 있다. 지난달 대구오페라하우스 제4기 대표 선임 절차가 이런저런 루머 속에 마무리된 데 이어 대구콘서트하우스 관장 공모가 현재 진행 중이어서다.대구시는 지난 5년간 자리를 지킨 이형근 대구콘서트하우스 관장 후임자를 뽑는 재공모 절차를 밟고 있다. 지난 10월 12명이 지원한 공모 심사에서 '적격자 없음'으로 결론을 낸 이후 한 달 만에 재공모 절차에 들어가자 지역 예술인들 사이에 볼멘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왜 개방형 직위 공모 때마다 재공모나 3차 공모가 공식처럼 되풀이되느냐는 불만이다.과거에도 비슷한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역 문화예술계가 최근 들어 불만의 강도를 크게 높이는 까닭은 10여 년 동안 '적격자 없음→재공모→외지 인사 선임'이라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어서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인데 출신지를 떠나 역량 있는 인물을 뽑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지역 문화계 입장에서는 마치 고정 메뉴처럼 굳어진 이런 공모 과정이 지역 문화예술인과의 지나친 거리두기로 비칠 수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쉽게 해소될 수 없을 만큼 깊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올해 초 마무리된 대구미술관장 공모도 이런 '고정 패턴'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대구시는 지난해 7월 최승훈 관장 퇴임에 앞서 후임자 공모에 나섰다. 하지만 선발시험위원회 심사에서 '적격자가 없다'고 결정한 데 이어 8월 재공모에서도 똑같은 결정이 나면서 6개월 넘게 자리를 비워두었다. 해가 바뀌고 올 2월 3차 공모에 들어갔는데 당시 지원자가 무려 24명에 이를 정도로 치열한 자리다툼이 벌어졌다. 1차 공모 때 7명, 2차 때 15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핵분열 현상이다.결국 최은주 경기도미술관장이 제4대 대구미술관장에 선임됐다. 2010년 초대 관장을 맡은 김용대에 이어 2대 김선희, 3대 최승훈 관장 등 내리 4대째 외지에서 활동해온 인사들이 선임되자 지역 미술계 불만이 치솟았다. 1, 2차 공모 때 22명의 지원자 중 과연 대구미술관을 이끌어나갈 마땅한 지역 인사가 없었는지 아니면 대구시가 명분쌓기용 공모 절차를 진행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미술계 내부에서 치열한 자리 경쟁이 벌어지다보니 잡음을 피하기 위해 번거롭게도 재공모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추측도 나온다.지난달 박인건 전 KBS교향악단 사장이 대구오페라하우스 대표에 선임되자 예술행정 전문가라는 평가와 상관없이 일각에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 것도 사실이다. 만약 대구콘서트하우스 공모도 같은 수순이라면 문화계 내부의 불만이 더 고조될 수밖에 없다.상황이 이렇게 전개된 데는 무엇보다 지역 문화인들의 잘못이 크다. 자리만 나면 불문곡직 나서고 '내가 아니면 될 사람 있나' 식의 태도도 여전하다. 자신이 불리하다 싶으면 누가 내정됐다느니 등 군불때기가 난무한다. 자연히 잡음과 구설을 피하려는 반대 작용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상황이 이런데도 문화예술계 일각에서는 10년 넘게 이를 반복해왔다. 서로 치고받다가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본 것이다. 대구시도 이제는 너무 원칙만 내세울 게 아니다. 지역 인사를 과감하게 영입하는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일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성과나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2019-11-25 19:24:16

조향래 논설위원

[세풍] 막춤 유감

베트남 다낭 여행을 다녀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벤트 코스가 있다. 다낭에서 30㎞ 떨어진 호이안 투본강에서 경험한 이른바 '바구니배 타기'이다. 마른 야자나무 잎으로 만들었다는 둥근 모양의 바구니배가 2인승 관광 유람선으로 변한 것부터가 신기하다. 고즈넉하던 어촌 마을에 한국 관광객들이 밀려들면서 생긴 신풍속도라고 한다.바구니배에 오르기 위해 선착장에 들어서면 벌써 귀에 익은 노래가 진동하는 가운데 여기저기 한국 사람들로 득시글하다. 수상 투어는 야자나무들이 줄지어 선 좁은 물길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배가 넓은 강 한가운데에 이르면 실로 진풍경이 벌어진다. 고성능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빠른 템포의 대중가요 리듬을 따라 베트남 뱃사공들이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곳곳에서 관광객이 합세한 춤판이 벌어지고 1달러짜리 팁이 난무한다. 수상 노래방이 따로 없다. 처음에는 그 분위기가 못마땅했다. '뽕짝' 음악에 '막춤'이라는 품격 없는 광경과 팁을 강요하는 분위기도 그랬지만, 서양인들의 눈에는 이 광경이 어떻게 비칠지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호이안의 대다수 뱃사공들이 라이따이한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어쩐지 노래 실력은 물론이고 막춤 솜씨마저 그리 낯설지 않다 싶었다. 호이안은 베트남전쟁 당시 우리 청룡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적군의 아들딸로 태어난 숱한 서러움과 모진 박대를 견뎌내고 라이따이한은 그렇게 아버지 나라 관광객의 발길을 모아 온 마을을 명물 관광코스로 바꿔 놓은 것이다. 베트남 고유의 풍광을 한국인 특유의 이벤트로 승화시켰다고 할까. 물론 베트남 정부의 배려와 우리 관광업계의 상술도 작용했을 것이다.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우리 한국 문화의 미래는 막걸리, 막사발, 막춤 등 토박이 문화에 달렸다는 파격적인 담론을 제시한 적이 있다. 우리 문화의 동력과 지정학적 여건에 관한 분석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대륙 문화의 영향권에 속해 있던 한반도는 100년 전부터 해양 문화를 통해 근대화를 추구하고 글로벌화에 성공하면서 오늘의 한류(韓流)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그래서 앞으로의 100년은 대륙 문화도 해양 문화도 아닌 우리의 '막 문화'가 견인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창조성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 해답이 바로 '막 문화'에 있다는 것이다. 대륙과 해양 세력의 상반된 요구를 다 거절할 수 없는 모순적 현실을 토박이 문화로 융합해서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이 전 장관은 이것을 한자로 쓰면 잡(雜)이 되지만 우리말로 부르면 '막'이라고 했다. 하긴 조선의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가 되었고, 한국의 막춤이 오늘날 지구촌을 뒤흔들고 있지 않은가. 싸이의 말춤과 BTS의 몸짓은 노래방과 관광버스에서 벌어지던 그 막춤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근사하게 평가하면 중국의 대륙 문화에서도 서양의 해양 문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우리만의 독창성인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한국의 막장 정치이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의 우리 정치판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 막춤에도 일정한 규칙과 가락이 있는 법인데, 이런 막장 놀음은 처음이다. 안면몰수의 천둥벌거숭이 짓을 거듭하면서도 부끄러움조차 없다.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고 대중을 가르치려 한다.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일상적 피로와 시름을 달래주는 막걸리 한 사발과 같은 순박한 정치가 그립다.

2019-11-18 19:41:14

정경훈 논설위원

[세풍] 대통령이 앞장서 사슴을 말이라고 하니

참으로 못 볼 꼬라지이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이동식 발사대(TEL)로 쏠 수 있는가를 두고 문재인 정권 안보라인이 보여준 '봉숭아 학당' 수준의 입씨름 말이다. 문 정권이 연출하는 못 볼 꼬라지가 한둘이랴만 이는 특히 심했다.1일 청와대 국정감사에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북한은 그런 능력이 없다고 했다. 곧바로 서훈 국정원장은 그 반대로 말했다. 정경두 국방장관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뱅뱅 돌았다. 북한이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분간이 안되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입이라도 맞추지 이게 무슨 민망한 '시추에이션'인가.더 못 볼 꼬라지는 청와대의 '종합'이다. 정 실장의 말과 서 원장의 말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대척(對蹠)이다. 둘 중 한 사람은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다. 변증법 용어를 빌리면 정 실장의 말은 정(正), 서 원장의 말은 반(反), 아니면 반대로 서 원장의 말은 정, 정 실장의 말은 반이다. 청와대는 이를 '해석상의 차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리고 "청와대, 국방부, 국정원은 같은 분석을 하고 같은 입장을 갖고 있다"는 합(合)을 만들어냈다.뱉어낸다고 다 말이 아니다. 북한이 ICBM을 TEL로 발사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해석'이 아니라 '팩트'의 문제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다. '해석상의 차이'라는 '해석의 요술'을 아무리 부린들 있는 게 없는 게 되고 없는 게 있는 게 되지 않는다.그 '같은 입장'이란 것도 같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북한은 TEL로 ICBM을 쏠 수 없다'로, 정 실장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한솥밥을 먹는 청와대 식구라서 그랬나? 서 원장만 딱하게 됐다.그 논리 전개는 이렇다. 'ICBM을 운반하고 세우고 발사까지 해야 이동식 발사인데 북한은 2017년 ICBM인 화성-14, 15형을 TEL로 운반만 하고 바로 세워 쏘지 않았으니 TEL 발사가 아니다. 증명 끝.' '형식논리'의 극치다. TEL로 옮겨 내려서 쏘든 TEL에서 바로 쏘든 모두 이동식 발사다. 미사일을 신속하게 이동해 언제 어디서든 기습발사할 능력을 지녔느냐가 본질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청와대의 '합'이 나오자 국방부 국방정보본부장이란 인사가 희대의 코미디-이를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면-를 연출했다. 그는 8월 합동참모본부 국정감사에서 "북한 ICBM은 현재 TEL로 발사 가능한 수준까지 고도화된 상태"라고 했으나 6일 정보본부 국감에서는 반대로 말했다. 북한의 '능력'이 몇 달 만에 연기처럼 사라진 건가, 아니면 8월에는 심각한 오판을 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똥별'의 생존 본능 발동인가.이런 못 볼 꼬라지의 연원은 알고 보니 문재인 대통령이다. 지난해 9월 폭스 뉴스 인터뷰에서 "북한의 약속대로 동창리 미사일 실험장이 폐기되면 북한은 미사일 도발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문재인판 지록위마(指鹿爲馬)이다. 동창리 실험장은 말 그대로 실험장이지 발사대가 아니다. 북한이 ICBM을 동창리 실험장에서 쏜 적은 없다. 그러나 정 실장, 청와대, 국방정보본부장은 문의 '어록'을 그대로 따랐다. 진실과 양심과 상식에 대한 모독이다. 미 군사 전문가들은 정 실장의 발언을 "입이 떡 벌어지는 거짓말" "완벽한 헛소리"라고 한다.문 대통령의 지록위마는 전방위적이다.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대북 정책, 검찰 개혁 등이 모두 그렇다. 아닌 것을 맞다고 하고 맞는 것을 아니라고 한다. 이에 그 수하(手下)들은 '지당하십니다'라고 '떼창'을 한다. 그 풍경이 참으로 그로테스크하다. 망해가던 진(秦)의 꼬라지가 이랬다.

2019-11-12 06:30:00

정인열 위원

[세풍] 금주령에도 술 마신 까닭은

조선시대 대구 사람인 서거정은 1486년 67세 삶의 완숙기에 조정 안팎 이야기 등을 모아 엮은 수필집 같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나라의 금주령에 얽힌 흥미로운 글을 남겼다. 지금의 감찰 업무와 언론 역할을 했던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 즉 대관(臺官)이 이를 어기고 예사로 술을 마셔도 아무런 처벌 없이 넘어간 사례로, 오늘날에도 회자된다."정절공(정갑손·1396~1451)이 대사헌이 되자…조정 기강을 크게 떨쳤다…금주령이 있을 적에는 대관들은 법을 철저히 지켜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간원(諫院)에서는 술 마시기를 예사로 하였다. 하루는 간관(諫官)이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 가지고 장난으로 장막 틈으로 대장(臺長·사헌부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도 장난삼아 소매로 뿌리쳤는데 술잔이 장막 틈으로 떨어져 대사헌 정절공 책상 앞에 굴러갔다. 여러 대장들은 두려워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대리(臺吏)들도 서로 바라만 볼 뿐 감히 그 술잔을 치우지 못하여 이 술잔이 종일 대사헌 앞에 있었다…정절공이 이르기를 '굴러 나온 틈으로 던져주라'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 그 아량에 탄복하였다…."이 일화는 아래 위 눈치 보지 않고 맡은 바 할 일과 할 말을 하는 언론(대간)의 역할을 강조할 때 흔히 인용되곤 한다. 조선은 금주령 위반자에게 최고 사형도 내리며 엄히 다스렸다. 이런 엄한 금주령도 대간에게만 너그러웠다. 이는 늘 목숨을 사선(死線)에 내놓고 왕과 고관에게 서슴없이 제 할 일과 할 말을 하는 이들을 배려했음을 드러낸 사례가 됨직하다. 조선은 그랬다.사정이 이러니 이들 존재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연산군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왕의 견제를 위해 만든 사간원을 폐지해 언관(言官)의 입을 없앴다. 자신의 잘못을 직언하고 달려드는 신하가 거슬렸을 터이다. 언관의 입을 막고 멋대로 정치를 한 독재로 그는 결국 왕의 자리를 잃었고 죽어서도 왕(王)이 되지 못하고 군(君)에 그친 재앙을 자초한 셈이다.지금 문재인 정부에서 언로(言路)를 막으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9일로 문 정부 출범 절반을 넘어서지만 언론 정책은 뒷걸음질이다. 법무부가 지난달 30일 발표한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보면 그렇다. 이는 기소(공소) 전 형사사건의 혐의 사실과 수사 상황을 공개하지 못하게 했다. 공소 제기 뒤에도 제한적으로 공개할 수 있다. 오보 기자의 법무부 출입도 제한케 했다. 한마디로 국민의 알 권리를 제한하고 정부 입맛대로 할 모양이다.12월부터 시행될 법무부 조치는 반정(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곧바로 사간원이 복구된 사례처럼 아마도 성공보다 실패한, 민주주의 자유 언론의 흐름을 거스르는 문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언로를 막는다고 될 일도 있겠지만, 알지 못하게 국민의 눈을 가린다고 해도 저절로 알게 되는 수도 또한 있게 마련이다. 진실은 그런 것이고, 하물며 지금은 조선의 왕조와도 다른 때임에랴.무엇보다도 정부가 법의 잣대로 숨기려는 진실을 파헤쳐 언로를 트는 일에 정열과 시간과 땀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금주령을 어기고 술은 마셨지만 할 일과 할 말을 했던 옛 그들처럼 말이다. 게다가 우리 언론은 자유당 시절 대낮 괴한들의 신문사 윤전기 파괴 사건과 1970, 80년대 군사정권 아래의 프레스카드제·기자실 통폐합, 언론사 통폐합 같은 언론 통제의 암흑도 헤쳐 나오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진실을 갈구하는 언론에게 이번 법무부 조치는 자칫 옛 금주령처럼 되지 않을까 싶다.

2019-11-04 20:47:35

이대현 논설위원

[세풍] 모래로 밥을 짓는 문재인 정권

'밥이 하늘이다'는 명제는 시대를 초월한 진리다. 먹고사는 문제, 민생(民生)에 실패한 정권은 결국 백성에게 버림을 받았다. 오죽하면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王者以民人爲天 民人以食爲天)"고 했겠는가.이런 까닭에 역대 대통령을 밥솥에 비유한 유머는 촌철살인이다. 이승만은 미국서 돈 빌려 가마솥을 장만했으나 쌀이 없었다. 박정희는 해외에서 돈을 빌려 가마솥에 쌀밥을 해놓았는데 자기는 먹지도 못했다. 전두환은 친척을 불러 모아 밥을 다 먹어버렸다. 노태우는 솥에 남은 밥을 긁어먹었다. 김영삼은 누룽지로 숭늉을 끓이려 불을 지피다가 솥을 통째 태워버렸다. 김대중은 국민 금 판 돈을 모아 새 전기밥솥을 하나 마련했는데 노무현이 코드를 잘못 끼워 전기밥솥이 타버렸다. 이명박은 밥 짓는 기술자라고 소문났으나 가스불에 전기밥솥을 올렸다가 낭패를 봤다. 박근혜는 식모(최순실)에게 밥솥을 맡겼다가 벼락을 맞았다.이 유머가 다시 회자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동참(?)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버전'은 "촛불로 밥을 지으며 기다리라 한다. 밥솥째 김정은에게 넘겨줄까 걱정이다"라는 것이다. 밥 얘기가 나왔으니 임기 반환점을 앞둔 문 대통령에게 들려주고 싶은 원효 스님의 경구(警句)가 있다. "지혜로운 이가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자가 하는 일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문 대통령과 집권 세력은 지난 2년 반 동안 쌀로 밥을 짓기는커녕 모래로 밥을 짓는데 국력을 탕진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 탈원전 등 현실을 도외시한 경제정책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 더불어민주당은 금방 쌀밥이 나올 것이라며 호도했지만 모래로 밥을 짓는데 쌀밥이 나올 리가 없었다. 국민만 배를 곯게 됐고 대통령·민주당 지지율이 급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삶은 소대가리가 웃을 지경'이 된 남북 관계, 구멍 뚫린 안보, 외톨이 신세 외교 역시 모래로 밥을 지으려다 실패한 사례들이다.조국 사태는 모래로 밥을 짓는 문재인 정권의 실상이 드러난 결정타였다. 본인과 가족 관련 의혹이 쏟아진 조국 씨는 법무부 장관이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 모래인 조 씨를 쌀이라고 우기며 검찰 개혁이라는 밥을 짓겠다고 달려들었으니 쌀밥이 나오기는 처음부터 글러 먹었다. '조국 지키기'에 올인하느라 정의와 상식, 윤리는 물론 최소한의 금도(襟度)마저 팽개친 문 대통령과 좌파 인사들의 언행에 국민은 참담했다. 국민 대다수가 모래 밥을 입에 넣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문 대통령과 집권 세력이 목을 매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역시 모래로 밥을 짓는 연장선에 있다. 공수처는 '민변 검찰'로 변질할 우려가 큰 것은 물론 독일 나치의 게슈타포 같은 정치 수사기관을 만들어 좌파 독재를 노리는 것이란 비판까지 있다. 아무리 포장하더라도 공수처는 쌀 아닌 모래일 뿐이어서 쌀밥이 나오기 어렵다.트럼프·아베와 같은 '수준 이하' 인사를 국가 지도자로 선택한 미국·일본을 향해 혀를 찼던 적이 있다. 그러나 정권 출범 이후 조국 사태에 이르기까지 미증유의 국정 혼란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이 미국·일본보다 낫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자괴감마저 들었다. 조국 사태는 국민에게 "대통령과 집권 세력에 이 나라를 계속 맡겨도 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정권이 계속 모래로 밥을 짓는 한 이 물음에 고개를 젓는 국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2019-10-28 19:17:28

서종철 논설위원

[세풍] 금수저 팔불출

팔불출(八不出)은 함부로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말라는 경계의 말이다. 입 밖에 꺼냈다가는 덜 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으니 조심하라는 쓴소리다. 특히 자식 자랑에 침이 마르는 부모를 칠칠치 못하다고 낮춰 보는 대목에 이르면 속이 뜨끔할 정도다.그런데 요즘 팔불출은 그냥 자랑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예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지위나 사회적 관계를 이용해 자식을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별종' 부모가 판을 친다는 소리다. 팔불용(八不用)이나 팔불취(八不取)의 말뜻 그대로 조금 모자란다는 소리만 듣는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현대판 팔불출은 더는 웃고 넘길 얼뜨기 짓이 아니다. 입 밖에 내지 않고 교묘하게 일을 벌인다는 점에서 음흉하기까지 하다. 자신이 누려온 것을 대물림하려는 그릇된 욕심이 겉으로 드러나고 사회적 공분을 부른 예가 바로 '조국 사태'다.현대판 팔불출은 '마당발'이 특징이다. 안 건드린 데가 없을 정도로 '스펙'을 과식(過食)한다. 부모가 차려 놓은 의학논문에 이름을 올리고 여러 군데 봉사활동 다니며 인턴 하느라 곤죽이 될 정도다. 보통 집안의 아이라면 지레 지쳐 손사래를 치지 싶다. 그런데도 조국 교수의 자식은 멀쩡했다. 누가 '돈 많은 부모도 능력'이라며 억장 무너지는 소리를 했듯 스펙 쌓기에도 다 요령이 있다. 부모의 스펙 만들기 능력이 땀 한 방울 안 묻은 마른 수건을 자식에게 쥐여 줄 수 있는 법이다.경북대 일부 교수들도 미성년 자녀를 논문 공저자로 끼워 넣거나 제1저자로 이름을 올렸다가 국정감사에서 지적됐다. 심지어 가족 관계를 숨긴 채 딸을 자신의 전공 대학원에 입학시켜 성적과 논문, 출석 등에 각종 혜택을 준 교수가 적발되기도 했다. 성균관대의 한 교수는 학술대회 보고서에 중학생 아들을 저자로 등재했다가 다른 비위까지 드러나 해임됐다. 교육부가 전국 85개 대학을 조사해보니 2007년 이후 중고교생이 공저자로 등재된 논문만도 모두 794건이다.내 자식만 생각하는 이들의 비뚤어진 사고와 저급한 윤리의식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소위 '엄빠 찬스'(부모의 지위를 이용한 특혜)는 제 자식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는 공정한 경쟁과 기회 균등의 원칙을 좀먹는 독(毒)이다. 과거 일부 엘리트층의 부도덕과 탐욕이 국가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고 치명상이 되었는지는 국민이 더 잘 안다.일이 터지고 나서야 대통령이 입시 제도 개선을 지시하고 여당은 특별법을 만들어 '국회의원 자녀 입시비리 전수조사'를 하겠단다. 여기에 야당은 "고위 공직자 자녀도 포함시키자"며 대립각이다. 설령 여야가 타협점을 찾아 제도가 바뀐다고 해도 기득권층의 의식과 풍토까지 바뀔지는 의문이다. 보통 사람은 꿈도 못 꾸는 기회를 독점하기 위해 약삭빠르게 머리를 들이밀어온 버릇대로 더 은밀히 위조·변질된 비리가 눈앞에서 벌어질지 누가 또 알겠나. 인성과 교양은 아예 엿 바꿔 먹은 소수 엘리트층이 존재하는 한 달라질 게 많지 않다.독재는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고 윤리와 양심을 내팽개친 채 혼자 벌이는 춤판이다. 소수의 기득권층이 부정한 수법으로 남의 몫까지 가로채는 반칙의 처세가 바로 독재다. 국민이 함께 땀 흘려 일궈 놓은 단물을 일부 계층이 독식하는 것은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 점에서 법과 원칙을 짓밟는 한국의 기득권층은 역사와 사회의 파괴자일 뿐이다.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누려야 만족하려는지.

2019-10-21 19:08:15

조향래 논설위원

[세풍]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세계적인 동화작가 루이스 캐럴이 지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꿈속에서 토끼굴에 떨어진 한 소녀가 이상한 나라로 여행하면서 겪는 신기한 일들을 실감나게 그렸다. 담배 피우는 애벌레, 가발 쓴 두꺼비, 신출귀몰하는 고양이 등 허무맹랑한 동물들을 만나는 것은 물론이다.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눈물의 연못에 빠지기도 한다. 가는 곳마다 기상천외한 갖가지 사건들과 마주친다.터무니없는 오해에다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한다. 일상 사회와는 전혀 상반되는 일들이 한없이 뒤죽박죽 얽히며 이상한 재판에도 참석한다. 상식적으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기발한 상상력과 환상적인 모험의 세계가 어린이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들까지 매료시켰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꿈속의 이야기이고 동화일 뿐이다.문재인 대통령이 지금도 꿈꾸고 있다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에서 '이상한 나라'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그러나 현실과는 영 동떨어진 몽상가적 발상과 발언 그리고 황당무계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보면 그 유사성을 부인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나라 안팎의 모든 영역에서 불협화음이 갈수록 높아지며, 벌이는 일마다 뒤틀려 국민들이 탄식하고 있다. 그런데도 만사형통을 외치고 있지 않은가.이른바 한반도 프로세스로 돌아온 것은 북한의 핵 무장과 노골적인 욕설뿐이다. 외교와 안보는 어떤가. 동맹인 미국과의 불협화음 속에 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국의 집단 린치만 당하고 있는 꼴이다. 소득주도성장을 밀어붙이며 기업과 가계에 망조를 일으켜 국가경제가 시들어가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자력 기술을 내팽개치고 신재생에너지를 한다며 산업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다.정치도 경제도 안보도 외교도 멀쩡한 것이 없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그래도 대통령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가슴이 뜨겁다'고 딴 세상 사람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얼마나 더 망가져야 그런 나라가 되는지, 이 모든 것이 그냥 한바탕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국민이 많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의 압권은 단연코 조국 사태였다.악마는 스스로의 악행을 알까 모를까? 독일의 문호 괴테는 희곡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통해 이 오래된 질문에 호응한다. 학문적인 경지에 이르렀지만 영원한 진리에 목말라했던 파우스트를 악으로 유혹하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의 악행을 인식하고 있다. 비록 악마이지만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대해 솔직해서 차라리 시원하다. 작금의 우리 사회를 혼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온, 일반인의 상식과 상상조차 뛰어넘은 한 인간의 그 거짓과 위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해대던 그 뻔뻔함에, 숯덩이가 껌정을 지우겠다고 날뛰던 적반하장의 망동에 국민들은 현기증과 더불어 구역질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 판국이면 차라리 메피스토펠레스가 그리울 지경이었다.그런데 그 궤변과 요설을 한사코 옹호하던 세력들은 또 뭔가. '우리가 조국' '정경심 사랑'을 외치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평범한 일상에 충실한 국민들로서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정신세계이다. 상식과 통념마저 흔들리는 정신적 혼란과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도 너무도 당당하던 그들의 모습에, 멀쩡한 국민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가 이상한가?'라고 반문하곤 했다. 참 이상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2019-10-14 19:21:08

정인열 논설위원

[세풍] 검찰 개혁 촛불, 타올라라

독점은 폐해를 낳는다. 역사 속 그런 사례는 널렸다. 권력이든, 어디든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견제되지 않아서다. 특히 독점 권력은 독재로 흐르기 마련이고,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까운 역사에서 목격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권력 독점의 비참하고 초라한 종말에서.지금도 그런 독점의 한 권력이 있다. 검찰이다. 법으로 보장한 기소 독점이 그렇다.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만만찮다. 수사하고 기소하든, 그렇지 않든 오로지 검찰 권한이고 편의대로다. 속된 말로 엿장수 가위나 다름없다. 힘 있고, 가진 이에게는 너무 좋은 잣대다. 반대의 맞은편 사람에게는 가혹하고 편파적인 법의 그물이다.지금 유례없는 검찰 개혁을 외치는 촛불이 켜졌다. 지난달 28일 서울에서 벌어진 촛불 시위 참가자가 10만 명, 200만 명 논란이지만 이는 본질이 아니다. 이날 외친 구호는 검찰 개혁과 조국 법무부 장관 지지이다. 조 장관 문제는 숱한 의혹이 제기된 만큼, 검찰이 두려워하지 말고 본연의 수사로 진실을 국민 앞에 밝히면 절로 풀린다.그러나 검찰 개혁 목소리만큼은 반드시 짚을 일이다. 검찰 개혁 촛불 시위자가 이런 대규모인 사실만으로도 검찰 스스로, 오랜 세월 쌓인 검찰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했을 터이니 말이다. 검찰이 독점 권력만 믿고 자행한 비리와 횡포는 '스폰서 검사' 같은 널린 악행을 굳이 들지 않아도 될 만큼 여럿이다.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검찰에 대놓고 "엄정하면서도 인권을 존중하는 절제된 검찰권 행사"를 주문한 일은 조 장관 수사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드러낸, 분명한 잘못이나 발언 내용 자체는 새길 만하다. 검찰 수사에서 '절제되지 않은 검찰권 행사'로 하나뿐인 목숨조차 끊는 비극도 봤던 국민으로서 대통령 지적에 공감하며 검찰권 행사를 불신할 수밖에 없다.검찰 불신은 지난해와 올해의 '국가사회기관 신뢰도' 결과와도 통한다.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 조사에서 검찰 신뢰도는 지난해 꼴찌 국회(1.8%)보다 한 단계 위의 11위로 2%였다. 올해 역시 꼴찌 경찰(2.2%)과 국회(2.4%)에 좀 앞섰지만 3.5%로 10위였다. 두 해 연속 5.9%였던 법원 신뢰도에 많이 뒤지니 같은 법을 다루는 기관이면서 국민 신뢰는 딴판이다.그래서인지 국민권익위원회의 검찰 청렴도 조사 결과도 별로다. 국민이 평가한 외부청렴도는 지난 2017년 4등급, 지난해 5등급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검찰 직원 평가인 내부청렴도는 2017년 3등급, 지난해 2등급으로 올랐다. 이상하지 않은가. 국민은 청렴하지 않은 검찰로 보는데 스스로 청렴하다고 생각하니 믿지 못할 검찰의 자체 판단이고 의아스럽다.사실 검찰 개혁과 관련, 이런 자료는 아무리 많아도 쓸데없다.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대더라도 검찰은 법에 의해 독점 권력을 누리며 견제되지도, 절제되지 않아도 될 만한 배경을 갖고 있어서다. 지금껏 통치 권력과 검찰은 서로 잘 적응하며 지냈으니 굳이 개혁할 필요도 없었다. 검찰 개혁은 그저 말장난에 그쳤던 지난 역사는 그랬다.그래서 이번 촛불은 조 장관 구하기와 지키기에 쓰이면 안 된다. 이날의 촛불은 절제되지 않은 검찰 권력 독점의 전횡을 막을 개혁이 이뤄지는 날까지 타야 한다. 검찰 개혁의 촛불이 조 장관 지지에 독점되고 변질되는 일은 곤란하다. 지금을 검찰 개혁의 적기로 삼으려면 더욱 그렇다. 검찰 개혁을 위해서 이번 촛불이 제대로 타면 성공이고, 또 다른 역사의 촛불로 기억될 것이다.

2019-10-01 06:30:00

이대현

[세풍] 문재인 대통령의 '죄과(罪過)들'

노무현·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죄과(罪過·죄가 될 만한 허물)를 저질렀다. 누구에게 뭘 받았느냐 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좌파 정권이 들어서게 한 주범(主犯)이란 죄과가 훨씬 더 중하다.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이 없었다면, 박근혜가 빌미를 주지 않았다면 문 정권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 세력이 이 나라를 미증유의 혼돈으로 몰아넣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지경으로 끌고 간 탓에 두 전직 대통령의 죄과는 더 무거워졌다.체크 리스트(check list)를 갖고 문 대통령의 집권 2년 5개월을 평가하면 잘한 것보다는 잘못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단순한 잘못이나 허물 수준을 넘어 죄과가 갈수록 쌓이고 있다.급기야 검찰이 조국 법무부 장관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현직 법무부 장관이 자택 압수수색을 당한 것은 초유의 일이다. '조국 사태'의 일차적 책임은 조 장관에게 있지만 근본 책임은 문 대통령에게 있다. 문 대통령은 조 장관과 '무슨 공동체'이기에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사람을 이렇게나 비호하는지 국민은 매우 궁금하다.지난 한 달여 동안 조 장관과 가족, 문 대통령 탓에 국민의 마음은 너덜너덜해졌다.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것은 조 장관이 아니라 국민이다. 검찰 수사 대상자가 검찰 개혁에 나선 기가 막힌 상황에 국민은 "나라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란 자괴감마저 느끼고 있다. 조 장관 자신은 후안무치(厚顔無恥)한데 왜 국민이 부끄러워해야 하고 고통받아야 하나. 문 대통령과 정권이 내세운 평등, 공정, 정의는 시궁창으로 굴러떨어졌다. 국민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준 죄과를 문 대통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문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이 약속을 제대로 지켰나.조국 사태 하나만 보더라도 문 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자신을 지지하는 진영만을 염두에 두고, 이를 바탕으로 내년 총선 승리와 정권 재창출을 도모하려 조 장관을 감싸고돌고 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기를 포기했다. 이렇게 국민이 갈래갈래 찢어지고 격렬히 싸운 적이 있었던가. 국민 통합을 이끌어내 국가 발전에 앞장서야 하는 대통령(大統領) 책무를 문 대통령은 방기(放棄)했다. 이 또한 죄과다.세계가 부러워하던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나라'로 만든 것도 문 대통령의 죄과 중 하나다.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현실을 도외시한 정책으로 경제가 망가지고 국민 삶은 피폐해졌다. 세금 펑펑 쓰는 것밖에 모르는 정권 탓에 국가채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미래세대에 큰 짐이 됐다. 탈원전으로 국부(國富)를 축적할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찼다. 북한 비핵화는 물 건너갔고 미사일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일본 등 우방과의 관계가 틀어져 국제 무대에서 외톨이 신세가 됐다. '국민 불안(不安)지수'를 매긴다면 어느 때보다 높을 것이다.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위대하고 번영하는 나라 대신 국민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대통령'을 갖고 말았다. 죄과로 얼룩진 대통령 말이다. 임기가 반(半) 남은 문 대통령이 죄과를 줄이고 성과를 내려면 이제라도 결단해야 한다. 첫 결단은 '조국과의 결별'이다. 나라가 나라 꼴이 되려면, 국민 상처를 조금이라도 보듬으려면 조 장관을 하루빨리 경질하는 게 맞다.

2019-09-24 06:30:00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

기획 & 시리즈 기사

[매일TV] 협찬해주신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