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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남북경협, 대구경북도 준비를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회담 이후 병무청에 걸려왔다는 전화. "제가 곧 입대해야 하는데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군대 안 가거나 복무 기간이 줄어드나요? 혹시 그렇다면 최대한 입대 시기를 늦춰보려고요." 병무청 담당 직원의 답. "최대한 빨리 가세요. 지금은 기껏해야 강원도지만, 조금 더 있으면 개마고원이나 압록강으로 배치될 수 있습니다. 입대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설마 병무청 직원이 이렇게 얘기했을까 싶지만, 지금 한반도는 바야흐로 봄 분위기가 완연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 고조됐던 한반도 전쟁 위기가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진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김정은과 막장 설전을 벌였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남북화해 무드 조성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주자는 덕담(?)까지 나오니 말 다했다. 이번 4·27 판문점 선언에 대한 기대가 높은 것은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의미 외에 '남북경협'이라는 현실적인 내용을 담았다는 점이다. 남북경협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으로 본격화한 후 2005년 개성공단 조성, 금강산관광 등으로 정점에 달했으나 이후 급격히 줄었고, 2016년 2월 개성공단 폐쇄 이후로 아예 단절됐다. 이번 판문점 선언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이유는 경협의 내용이 예상보다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원론적인 수준일 것으로 예상했던 경협 관련 내용에 도로·철도 연결 등 내용이 구체적으로 포함된 점이 그 예다. 두 정상은 이번 선언에서 "남과 북은 민족경제 균형 발전과 공동 번영을 위해 10·4 선언에서 합의한 사업을 적극 추진한다"며 "일차적으로 동해선·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해 활용하기 위한 실천적 대책을 취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10·4 선언에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개성공단 2단계 등을 담았다. 통일연구원은 2007년 10·4 선언 당시 남북경협에 따른 생산유발 효과와 부가가치유발 효과를 더하면 최대 55조원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2014년 국회예산정책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도로와 철도에 투자 가능한 비용만도 41조원에 이른다고 봤다. 김 위원장은 판문점에서 문 대통령에게 "평창을 방문한 사람들이 남한의 고속열차가 좋다고 하더라. 북한은 교통이 안 좋아 참으로 민망할 수 있겠다"고 했다. 남북경협 첫 단계는 북한 내 사회간접자본(SOC)에 대한 대대적인 개발과 투자가 될 것으로 쉽게 예상된다. 그뿐이랴. 향후 북미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한국은 물론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 자본들이 북한으로 몰려들 것이다. 물론 밥 뜸도 안 들었는데 숟가락부터 챙길 순 없다. 주한미군 주둔 여부 등 각론에선 첨예한 갈등이 예상된다. 하지만 남북경협은 새 성장 기반을 닦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비단 중앙정부 차원의 일만은 아니다. 남북경협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을 때를 대비해 대구경북은 지금부터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강원도나 경기도 등 접경지역에 비해 멀리 떨어진 대구경북은 불리한 점이 많다. 지역의 대북 전문가 풀도 매우 취약하다. 이제라도 지역 각 분야에 있는 대북 전문가들을 찾아 모으는 일이 시급하다. 앞으로 중앙정부 차원의 각종 대북 프로젝트와 예산이 풀릴 것에 대비해서다. 대구경북연구원 같은 싱크탱크 기관은 물론 한국감정원이나 한국산업단지공단, 한국도로공사 등 지역 공공기관 전문가, 대학 및 연구기관 연구진들과 머리를 맞대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2018-05-03 00:05:00

[데스크 칼럼] 농촌 탈출

고교시절. 농업 담당 선생님의 제자 사랑은 유난스러웠다. 농번기 때마다 농사일에 시달리는 제자들이 안쓰러웠던지 틈만 나면 "제군들, 우야든동 열심히 공부해서 농촌을 탈출하라"고 강조하셨다. 농사의 수고로움을 잘 아는 터라 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지는 동안 학우들의 얼굴에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당시 기자에게도 농사는 공부보다 하기 싫은 고역이었다. 이맘 때쯤 시작되는 모내기도 그렇지만 오뉴월 뙤약볕 아래에서 하는 보리타작은 지금 생각해도 온몸이 까슬할 정도다. 주말에도 '보리타작 한다'는 소리에 아침밥도 먹지 않고 학교로 줄행랑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행히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 중에서 상당수가 농촌 탈출(?)에 성공했다. 농업 기술도 발전하고 농기계 같은 장비도 좋아진 요즘, 주말농장에서 취미삼아 농사를 짓는 상품까지 나와 있다고 하니 참 세월이 좋아지긴 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바람이 너무 간절했던 탓일까. 너도나도 농촌을 떠나는 바람에 요즘 농촌 마을이 텅 비고 있다는 소식이다. 거기다 저출산'고령화까지 겹쳐 마을이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단다. 고통은 고스란히 남은 자들의 몫이 될 수밖에…. 마을 주민들은 인구가 줄어들면서 생활편의 시설 부족, 폐교, 일손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경북도가 밝힌 결과는 충격적이다. 경북 23개 시'군 중 17곳이 30년 이내 없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12월 기준 20~39세 여성 인구와 65세 이상 고령 인구 대비를 통한 지방소멸 위험도를 분석한 결과, 23개 시'군 중 17개 시'군이 소멸우려 지역으로 나타난 것이다. 고령 인구(65세 이상) 대비 20~39세 여성 인구(가임 여성의 90%가 분포하는 연령층)의 비중이 소멸위험지수다. 이 수치가 1.0 이하면 인구쇠퇴주의단계, 0.5 이하면 인구소멸위험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소멸위험(소멸위험진입, 소멸고위험(0.2 미만))에 진입했을 경우 30년 내에 마을이 사라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군위'의성'청송'영양'봉화군 등 경북을 갈고리처럼 받치고 있는 'J'벨트 지역은 소멸고위험군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속도 역시 너무 빠르다. 지난해 3월 소멸위험지역에 이름을 올린 봉화군이 소멸고위험군에 새로 진입했고 '정상지역'이었던 칠곡군도 9개월도 안 돼 소멸주의단계로 진입하는 등 농촌 소멸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런 속도라면 30년이 아니라 10년도 안 돼 경북의 농촌사회가 붕괴될 수밖에 없다. 위기에 처한 경북도와 농어촌 지방자치단체도 인구 늘리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고 귀농 귀촌을 장려하고 나섰지만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청년유출'저출산'고령화라는 삼중고를 지자체 혼자 해결하기에는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보다 일찍 이 문제에 맞닥뜨렸던 일본은 해답을 하나씩 찾아가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출산율 증가와 인구 유입을 위해 다양한 시책을 본격 추진했다. 지방으로 이주하는 도시민에게 1인당 약 4천만원의 경비를 3년간 지원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도시민들이 지방에 정착하는 성과를 내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정치권이 손잡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6'13 지방선거가 달아오르고 있다. 많은 예비후보들이 청년일자리 창출'신성장산업육성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표심을 자극하고 있다. 경북지역 농촌 대부분이 사라지는 가운데 치러지는 지방선거는 의미가 깊다. 마을소멸은 곧 지방의 붕괴로 이어지고 지방의 붕괴는 국가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 마을 살리기' 해법이 이번 선거를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지기를 기대한다.

2018-04-26 00:05:00

[데스크 칼럼] K교사 눈물은 누가 닦아주나

지난주 대구 전체 교사들이 사용하는 교육청 통합 메신저망을 통해 한 편의 글이 올라왔다. 평소 학교 업무와 관련한 내용, 공지사항을 주고받거나 교직원들끼리 소통하는 공간에서 교사가 무력감을 호소하는 내용이라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힘이 진실이 되고, 권력이 또 다른 권력을 지켜주는 세상에서 9개월의 외롭고 아픈 기록이라고 했다. 귀동냥한 사연은 이렇다. 한 공립고등학교 K교사는 2017년 6월 교육전문직 임용후보자 시험에 응시하고 불합격했다. 장학사, 교육연구사를 뽑는 시험이다. 서류심사와 다면평가 1차 전형을 거쳐 서술, 실기, 면접 등 2차 전형을 치른다. 교육과정'법규'정책'전공 등 서술시험이 90점, 수업장학 능력'기획안 작성'정보활용 능력을 보는 실기가 150점, 면접은 60점 배점인데 이를 1차 전형 점수와 합쳐 합격자를 결정한다. 지난해 대구는 중등 10개 과목에서 1명씩 선발했다. 앞서 두 번의 장학사 시험에서 낙방한 K교사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임했다고 한다. 1차 전형 5배수 통과를 기대하지 않았다가 행운을 얻었다. 그가 응시한 과목은 사람이 많이 몰리는데 작년엔 3명만 지원했다는 것. 교육 경력 15년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직은 6년 이상 근무하면 교감, 교장으로 옮겨갈 수 있다. 학교에만 근무하는 교사보다 승진이 유리해 경쟁이 치열하다. K교사가 주장하는 시험의 불공정은 워드프로세스로 기획안을 작성하는 실기시험이다. 4시간에 걸쳐 5쪽 분량의 기획안과 요약본 1쪽 제출이 과제다. 시험 종료 후 K교사는 이날 몇몇 응시자들이 제출한 USB 답안지 최종 저장 시간이 시험 종료 시각 이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응시한 고사실 18명 중 12명이 종료시각을 초과했다. 최장 9분을 넘긴 응시자도 있었다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청과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그는 시험과 채점, 합격자 선정까지 의혹에 대해서 조사를 요구했고, 교육청은 확인한 결과 K교사가 떨어진 게 맞다고 답변했다. 이후 K교사는 교육부, 감사원에 감사를 요청했지만 허사였고, 전문직 합격자 발표 무효 확인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중앙행정심판위는 시험 관리자의 재량권을 인정하며 교육청의 손을 들어주었다. 교육청은 기획안 출력을 기다리면서 저장 여부를 최종 확인하도록 허용하고 응시자들에게 알렸다고 했고, K교사는 들은 바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둘 중 한쪽은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다른 고사장에선 17명이 응시했는데 시간 초과자는 1명이었다. 사실 전문직 시험을 둘러싼 의혹은 실제 비리로 확인되기도 했다, 2010년 서울시교육청 장학사 선발에서 돈이 오간 사실이 드러난 '하이힐 폭행 사건'이나 2013년 충남교육청의 시험지 유출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충남교육청에선 출제한 장학사가 자살하고 1인당 수천만씩 주고 문제를 받은 교사 등 40여 명이 징계를 당해 쑥대밭이 됐다. 해당 교육감도 모두 사법처리 됐다. 이후 각 교육청에선 교육전문직 인사제도 개선안을 앞다퉈 내놓았다. 문제 출제를 타 시도에 맡기고, 면접 위원들을 외부인으로 채우고 있다. 하지만 선발구조는 여전히 폐쇄적이다. 서술, 기획안 주관식 채점이 여전히 내부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채점 기준도 모르고 누가 어떻게 점수를 매기는지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의심과 불신을 유발한다. 대구는 올해부터 필기시험이 아닌 업무역량적성평가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전문직 선발에 '학종시대'를 열겠다는 것이다. 학종이 학부모로부터 불신을 사는 것은 '금수저'깜깜이 전형' 때문 아닌가? 해법은 간단하다. 시험 결과물을 공개하면 끝이다. 공정하게 선발했다면 이의 제기자에게 보여주고 승복을 받으면 된다. 우동기 교육감은 한 아이도 놓치지 않겠다는 교육을 견지해 왔다. 그렇다면 불편한 문제를 제기한 교사는 심판기관에 맡기고 모른 체하는가. 차기 대구교육의 수장이 될 교육감 후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해진다.

2018-04-19 00:05:04

[데스크 칼럼] 천하제일 내로남불대회

지난해 구글에서 한국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찾아본 키워드는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뒤바뀐 도쿄 소년 타키, 시골 소녀 미츠하에게 찾아온 기적과 사랑을 그린 영화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독특한 영상미에 힘입어 국내 개봉 역대 일본 애니 중 가장 많은 367만 명이 관람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사는 타키와 미츠하는 현실에서 절대 만날 수 없는 인연이다. 타키의 시간에서 보면 미츠하는 3년 전 혜성이 마을에 떨어지는 바람에 수많은 주민과 함께 숨진 상태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기막힌 영화 속 설정을 통해 먼 훗날 우연히 서로를 알아보지만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타키 군처럼 누군가에게 '너의 이름은'이라고 묻고 싶어진다. 다만 그 대상이 꿈에서조차 그리워하며, 잊어선 안 된다고 되뇌던 이가 아니라서 안타깝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게, 좀비처럼 되살아나는 위선자(僞善者)들이라 화가 날 지경이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는 흘러간 옛 추억 속의 이름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두 전직 대통령과 지연으로 얽힌 대구경북(TK) 출신들도 제법 됐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공교롭게도(?) 헌정 사상 형사 법정에 서게 된 전직 대통령 네 명 모두 TK 출신인 탓에 'TK=적폐'란 인식이 세간에 더욱 깊이 뿌리내린 점이다. 마침 MB 정부에서 청와대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몸담았던 한 인사가 몇 년 만에 전화가 왔길래 근황을 물었더니 "새옹지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썩 유쾌하지 않은 일로 '순장조'가 되지 못한 채 정권 말기에 물러났지만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이번 수사에 피의자로 불려가 실형을 살지도 모를 일이라는 얘기였다. 대충 그가 맡았던 '임무'가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가 씁쓸했다. 집권여당 표현대로 '적폐세력'이야 그렇다 치자. 촛불혁명 덕분에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 역시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데에는 뒤지지 않는다. 여권의 유력 차기 대권주자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 6'13 지방선거에 '안희정의 친구'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 서울시장을 꿈꿨던 정봉주 전 의원…. 성추문이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특히 시민단체 출신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19대 국회에서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입법을 적극 주도했다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영향력을 빌미로 한 공짜 외유에다 수상한 후원금 수수'사용, 인턴의 초고속 승진 등 조배숙 민주평화당 대표의 입을 빌리면 "수법의 다양함과 뻔뻔함이 전 정권의 적폐와 오십보백보"다. 그를 지켜내려는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의 처절한 노력은 어쩌면 레임덕의 서막은 아닐까? 이름 석 자만 다를 뿐 이들의 행태는 대동소이하다. '갑질'과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끝판왕들이다. 변명도 한결같다. 이 전 대통령은 구속되면서 "오늘날 국민 눈높이에 비춰보면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고 했고, 김 금감원장은 "국민 눈높이에서 볼 때 지적받을 수 있는 소지가 있다는 점에 대해 죄송하다"고 했다. 이쯤 되면 도대체 그 국민 눈높이에 맞는 지도자가 있기는 한 건지 자못 궁금하다. 대한민국 지도층의 추악한 민낯은 남의 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권력에 취하면 뇌가 변하고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도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됐다는 개념으로 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도 떠오른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관행'명령에 순응한다면 누구나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거울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조심스레 물어본다. "너의 이름은?"

2018-04-12 00:05:00

[데스크 칼럼] 입시 유감

수시모집 수능 최저등급 폐지와 정시모집 인원 확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불합리한 입시 제도를 손보자는 데는 동의하지만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대학마다 발표 내용도 다르다. 어느 대학은 최저등급 기준을 폐지한다고 밝히고, 이튿날 다른 대학은 유지한다고 발표한다. 원칙도 없고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면서 입시 전형의 단순화와 수능 절대평가 확대를 내걸었다. 수능 절대평가를 전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이 '2015 개정 교육과정' 방향과도 부합되기 때문이다. 대학 입장에서 이를 보면 수능시험이 자격고사처럼 바뀌고 결국 변별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정시 선발을 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육부가 현 정부의 기조와는 다르게 정시 확대를 대학에 요청했다. 스스로의 모순을 보여주는 셈이다. 학부모들이 현 입시제도에 대해 가장 큰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정시모집이 적어서라기보다 수시모집에서 학생부종합전형의 비중 확대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이다. 수시전형은 고교 내신성적을 주로 보는 '학생부교과전형'과 내신 성적뿐 아니라 동아리·봉사활동 등 다양한 비(非)교과 영역을 함께 보는 '학생부종합전형', 논술, 실기(특기자 포함)전형 등으로 나뉜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후보는 논술이나 실기(특기)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아 사교육에 의존하는 만큼 이들 분야의 수시전형을 없애서 대학 입시를 단순화하고, 사교육비를 획기적으로 낮추자고 제안했다. 불합리한 입시제도의 근본 해결책은 될 수 없더라도 조금씩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도무지 알아먹기도 힘든 용어도 없애고, 입시조차 '빈익빈 부익부'가 지속되는 불평등 구조를 타파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1997년 대학 입시부터 적용된 수시전형은 매우 좋은 의미에서 출발했다. 초·중·고 12년간 애쓴 결과가 단 한 차례 수능시험으로 좌우되는 것을 보완하자는 취지였다. 수능을 조금 못 봐도 내신이 좋거나 다양한 학교생활로 재능을 살린 학생들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길이 열린 것이다. 대입에서 수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커졌다. 2017학년도 대입에서 수시전형 모집 비중은 전체의 70.5%였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자료에 따르면, 이 중 학생부전형(교과·종합)이 85.8%를 차지했다.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2019학년도엔 수시모집 비중이 역대 최고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수시전형을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아 왔다. 특히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의 공정성 문제다. 애초 이를 도입한 취지는 학생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도록 하자는 것이지만 실제론 고액을 받고 고교 1학년 때부터 학종 관리 및 서류 작성을 전문으로 컨설팅하는 업체가 성행하게 됐다. 상위권 학생만 배려하는 학교의 '꼼수'도 논란이다. 학내 경시대회의 중요 정보를 일부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미리 제공하거나, 학내 수상을 몰아주는 것 등은 공공연한 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 일부 특목고 및 명문고의 수시 독점도 계속 논란이 일고 있다. 물론 대학들은 고교 서열화에 대해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펄쩍 뛴다. 하지만 입시 전문가들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냐'며 코웃음을 친다. 수시전형용 서류도 복잡하기 그지없다. 내신 성적, 특기 및 자기 능력 소개, 동아리활동, 봉사활동, 진로활동, 자율활동, 교내 수상 내역, 교사추천서뿐 아니라 관심 분야에 대한 소논문까지 요구하기도 한다. 이처럼 수시모집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고 수시모집을 축소하거나 폐지해 정시를 늘리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다. 최대 다수가 공감하는 문제점을 찾아내야 한다. 입시제도 개정이 학생 선발권을 둘러싼 힘겨루기로 번져서는 안 된다. 정부 정책이 힘을 얻으려면 교육계 이해 당사자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여기저기 눈치 보거나 특정 집단의 득실을 신경 쓰면 다시 누더기 입시정책만 나오게 된다. 대학 입학을 위해 적잖은 돈을 내고 따로 입시 제도까지 공부해야 하는 세상,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교육 수요자가 박수치는 입시 정책을 기대해 본다.

2018-04-05 00:05:00

[데스크 칼럼] 삭봉회

"삭봉회? 그게 뭔데요?" 알쏭달쏭한 그 이름을 처음 듣고는 뭔가 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어감이 약간 촌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럽다. 설명을 듣고서야 아~ 그거? 했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불쌍(?)하기까지 했다. 지인이 일하는 회사에서는 몇 년 전부터 일찌감치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있단다. 올 연초에도 해당하는 직원들을 한자리에 모아 제도에 대해 알려주는 설명회를 간단하게 열었다. 한 일터에서 일하지만 평소 만날 일이 별로 없던 '노장'들이 서로 인사를 하고 '졸업을 앞둔'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었나. 그날 참석한 분 중 한 분을 지인이 만났는데 "P형 올해 설명회에 참석한 사람들끼리 모임을 하나 만들기로 했소. P형도 참여하소"하더란다. "무슨 모임?"했더니 "무슨 모임은 무슨 모임이야, 올해부터 월급이 깎이기 시작하는 사람들 모임이지"하며 설명을 해주더란다. "모임 이름은 '삭봉회'인데 삭감한다 할 때 '삭'이요, 봉급이라 할 때 '봉', 그래서 삭봉이요, 껄껄껄~." 회원들끼리 SNS 모임을 만들어 안부를 묻기도 하고, 회사 안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면 우스개처럼 "삭봉!" 하며 거수경례를 한다나. 얘기를 들으며 웃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지만, 가슴 한쪽에 그늘처럼 쓸쓸함이 드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도 머지않아 걷게 될 길이 아닌가. 삭봉회라…. 모임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명이다. 하지만 이름 속에 페이소스가 상당히 강하다. 쓸데없는 걱정이 생겼다. 회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너무 우울하게 생각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애환을 드러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겠지만 '우아함'은 부족하다. '삭봉'을 대신할 만한 품격 있는 이름이 없을까. 문득 옛 이야기 한 자락이 떠올랐다. 늙은 쥐가 있었다. 젊을 때는 비상한 재주로 음식을 곧잘 훔쳐 먹었지만 나이가 드니 눈이 침침해지고 몸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일하기가 쉽지 않았다. 늙은 쥐는 젊은 쥐들에게 자신만의 노하우를 전수해 준 뒤 젊은이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하지만 지식을 다 배우고 나자 젊은 쥐들은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음식도 나눠 주지 않았다. 늙은 쥐는 굶기가 다반사였다. 어느 날, 아낙이 솥에다 음식을 넣고 뚜껑을 덮은 뒤 무거운 돌까지 얹어 두고 외출을 했다. 젊은 쥐들은 안달이 나 온갖 궁리를 해봤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늙은 쥐를 찾아갔다. 늙은 쥐는 괘씸했지만 방법을 알려 주었다. "솥에는 발이 세 개 달려 있으니, 그 솥발 세 개 중 하나의 아래를 열심히 파보라. 그러면 자연히 솥이 기울어지고 솥뚜껑이 벗겨질 것이다." 늙은 쥐가 시키는 대로 해보았더니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옛 책에 실려 있는 '노서(老鼠'늙은 쥐)'라는 이야기이다. 기업이나 회사도 마찬가지다. 나이 든 직원들도 있고, 젊은 사람들도 있다. 나이 든 직원들에게도 초년 시절이 있었고, 선배들에게 배우며 일을 익혔다. 나이가 들며 후배들이 생기고, 또 그들을 가르쳤다. 그게 조직이 돌아가며 유지되는 원리이다. 삭봉회의 '노장'들이 이야기 속의 '늙은 쥐'와 닮지 않았는가. 그들을 밥만 축내는 늙은이로만 생각할 것인가. 젊은이들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늙은 쥐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그런데도 고임금을 받고 있다고 배 아파해야 하나. 지인에게 권해 드려야겠다. 삭봉회 말고 '노서회'로 하소. 훨씬 운치도 있고 자존감도 있는 것 같지 않소. 충분히 그럴 만하오. 젊은이들도 취업이 안 되어 살기 힘들다고 한숨이 넘치는 세상이다. 하지만 청춘을 바쳐 열심히 일해 왔고, 후배를 키워준 선배들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늦가을 젖은 낙엽 대접을 받는 노서들의 눅눅한 쥐구멍에도 따뜻한 봄볕이 들도록.

2018-03-29 00:05:00

[데스크 칼럼] 남북 공동 응원단

평창동계올림픽도, 평창동계패럴림픽도 모두 끝났다. 이번 대회는 시작 전부터 '평창올림픽'이 아니라 '평양올림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북한 참가가 핫이슈였다. 전격적인 올림픽 참가 발표에 이은 선수단, 응원단, 공연단 등의 방남은 올림픽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최고의 효자 노릇을 했다. 실제 북한 선수 참가에 따른 효과는 컸다. 올림픽 개회식 때 한반도기를 앞세운 남북 동시 입장은 물론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피겨 페어의 렴대옥'김주식 등은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러나 기대만큼 꽃을 피우지 못한 방문단도 있다. 응원단이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때의 활약과 인기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관심과 주목을 끌긴 했지만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새롭지도 않았고, 주목을 끌 만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당시 2000년대 초반 잇따라 방남한 북한 응원단의 인기와 국민의 관심은 엄청났다. 필자는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당시 북한 응원단 전담 마크맨으로 북한 응원단을 밀착 취재한 덕에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엔 북한 응원단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사였다. 그해 8월 20일 응원단이 김해공항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치열한 취재 경쟁이 시작됐다. 대구로 올라오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잠시 들렀을 때 통제망을 뚫고 고속버스에 접근,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수첩에 질문을 적어 보여주면 입 모양으로 '반갑습니다' 등의 몇 마디 듣는 것조차 특종으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경기장에서도 경기보다 응원단이 더 인기였다. 경찰 인력으로 둘러싸인 응원단 주변엔 늘 관중과 취재진이 진을 쳤다. 관중석에 있던 여중생이 안전통제요원 몰래 던진 메모를 북한 응원단이 주워 읽는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하고 기사화한 것조차도 관심을 끌었다. 숙소와 경기장을 오갈 때 버스 속에서 북한 응원단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에 대한 보도 등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북한 응원단에 대한 기사에 관심을 가지기는 북한 응원단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응원단은 숙소로 사용하던 대구은행 연수원에 신문을 수십 부 더 넣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북한 취재진도 덩달아 인기였다. 한국 기자들이 북한 기자들에게 다가가거나 말을 걸면 통제요원이 즉각 다가와 막아서는 반면 북한 기자들의 한국 기자 접촉은 자유롭다 보니 북한 기자와 몇 마디 나눠 기사화하는 것도 특종 중 하나였다. 그 와중에 북한의 중앙TV 등 언론사 몇 곳에서 필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해 경기장에서 북한 기자가 필자를 인터뷰하고 이를 남한 기자들이 빽빽이 둘러싸 취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한 기자의 취재에 응하는 대신 북한 기자를 상대로 취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조건이 받아들여져 한국 언론사 중 처음으로 북한 기자를 공식적으로 단독 인터뷰해 보도하는 호사도 누릴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번 평창올림픽에선 응원단도 기자단도 그전과 같은 신비감과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새로움이나 변화도 없었고, 북한 응원단이라는 이름과 존재만으로 큰 관심을 받고 주목을 끌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또 스포츠 빅 이벤트가 열린다면 북한 응원단이 다시 올까 하는 생각에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존재감 부재로 아예 북한에서 응원단 파견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요즘 '비핵화'를 놓고 한국-북한, 미국-북한 정상들 간의 회담이 추진되는 등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만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회식 남북 공동 입장,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에 이은 남북 공동 응원단 구성이다. 2030년 아시안게임 유치에 성공한 대구경북의 경기장 곳곳에서, 고립된 관중석 한쪽에서 응원하고 있는 북한 응원단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닌, 남북 공동 응원단이 손발과 목소리를 맞춰가며 함께 신나게 응원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2018-03-22 00:05:00

[데스크 칼럼] 경찰관은 아픕니다

"한 집안을 책임진 가장으로서,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을 곁에서 지켜 줄 수 없는 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라옵건대 고인의 국가를 위한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간청 드립니다." 포항 남부경찰서 장기파출소 근무 중 숨을 거둔 고현보(당시 55세) 경감의 유족들은 지난해 12월 보훈처에 낸 국가유공자 등록신청서 말미에 애타는 호소의 글을 실었다. 고 경감은 지난해 9월 음주 폭력 용의자 체포 과정서 심한 가슴 통증을 호소하다 인근 보건진료소 앞에서 갑자기 쓰러져 숨졌다. 고 경감은 지난해 공무원연금공단으로부터 순직 승인을 받은 후 현재 보훈처에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한 상태이다. 비슷한 시기 포항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상록(당시 57세) 경감도 순직 처리가 된 후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준비 중이며 최준영(당시 30세) 경장은 국민청원, 재심 등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최종적으로 순직 처리가 되었다. 경찰관이 공무 중 순직할 경우 순직 경찰관의 유족에게는 공무원연금법에 의거 유족 연금과 유족 보상금이 지급된다. 국가유공자로 지정되면 보훈처에서 지급하는 보훈 연금을 수령하게 된다. 국가유공자 지정도 예산 등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보상에도 불구하고 순직 경찰관들의 유족들은 대부분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한국의 치안 수준은 세계 1위로 집계될 만큼 한국 경찰은 대중의 인식보다 더 유능하고 성실하다. 하지만 경관들은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파출소나 교통안전 업무 등을 하는 경찰은 보통 4조 2교대로 일한다. 첫째 날은 주간 근무, 둘째 날 야간, 셋째 넷째 날은 비번 순서로 근무가 돌아간다. 빡빡한 근무 일정과 야간 근무 때 쌓이는 피로는 건강을 위협한다. 실제로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40세 이상 야간 근무 경찰관 1만9천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특수건강진단에서 전체의 50%를 넘는 1만1천여 명이 질병을 앓거나, 질병이 의심되는 판정을 받았다. 경관들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힘들다. 참혹한 사건사고를 자주 목격하고 사건 전 과정에 장기간 관여하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등 정신적 손상 위험도 높다. 보건복지부도 경찰을 '스트레스 고위험군'으로 지정하고 있을 만큼 경찰의 직무 자체가 트라우마와 분리될 수 없다. 지난해 포항에서 있었던 순직 경관들의 이야기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오늘도 경관들은 추운 겨울날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음주 단속을 하고 여름에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매연을 마시며 몇 시간씩 서 있기 일쑤이다. 저녁마다 취객들이 난동을 부리는 현장에 출동해서 늘 잦은 부상과 상처에 시달리곤 한다. 대부분의 경찰관은 크고 작은 부상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다. 상처 부위에 연고 살짝 바르고 밴드 하나 붙이면 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제대로 된 보호 장비 하나 없이 패싸움 현장에 출동해 조직폭력배와 맞서 싸우다 식물인간이 된 경찰관이 있는가 하면 한밤에 음주단속 중 도주 차량을 검거하기 위해 수백m 거리를 차에 매달려 끌려가다가 길거리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경찰관도 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위험한 현장에 뛰어든 이유는 오직 경찰관이라는 소명감 때문이다. 경찰관이 건강해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담보된다. 경찰이 제대로 일할 수 있으려면 점진적 인력 증원도 필요하지만 직무환경 진단 등을 통해 우선적으로 근무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부족한 현장 정원을 보충하고 주'야간의 불규칙한 근무에 따른 과로와 피로 누적을 감경시킬 수 있는 근무 형태 도입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와 함께 지난 연말 처리가 무산된 공무원재해보상법을 조속히 국회에서 통과시켜 공무수행상 입은 재해에 대해서는 현실성 있는 수준으로 보상하는 제도가 빨리 시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전국의 경찰관들이 현재보다 조금 덜 아프기를 바라며 또한 지난해 포항에서 순직한 경관 세 분이 국가유공자로 선정되기를 바란다.

2018-03-15 00:05:00

[데스크 칼럼] 성 격차 118위…출산율 1.05명

늦장가 간 생질의 첫 아이가 태어났다. 집안 축복이다. 아빠, 엄마가 된 생질 부부의 기쁨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가 닥쳤다. '애는 누가 키우나?' 생질 부부는 고향을 떠나 맞벌이를 한다. 그것도 서울과 전북 익산에서 떨어져 사는 주말부부다. 육아휴직은 언감생심. 젖먹이를 남의 손에 맡기려니, 미덥지 않다. 비용도 많이 든다. 답은 정해져 있다. 황혼 육아! 환갑이 훌쩍 넘은 누나 부부가 아기를 맡게 됐다. 누나 부부 역시 집에서 노는 사람들이 아니다. 구미에서 하우스 농사로 바쁘다. 집안 길흉사에도 눈도장만 찍고 일터로 돌아갈 정도다. 누나의 처지가 딱하고, 생질 부부의 형편이 안쓰럽다. 아기는 축복인데, 육아 현실은 냉혹하다. 이 때문에 젊은 부부들은 출산을 주저한다. 지난주 이런 현실을 충격적인 숫자로 접했다. 통계청은 2017년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나타내는 지표)은 1.05명이라고 밝혔다. 역대 최저치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평균(1.68명'2015년 기준)을 크게 밑돈다. 또 기존 인구 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합계출산율 2.1명)의 절반에 불과하다. 비혼(非婚)을 선언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통계청 조사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혼인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미혼자는 2008년 10명 중 5.6명이었다. 그러나 2016년엔 3.8명으로 줄었다. 혼인 건수는 ▷2015년 30만2천800건 ▷2016년 28만1천600건 ▷2017년 26만4천500건으로 감소세다. 정부는 2006년부터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했다. 10년 넘게 120조원을 투입했다. 출산율은 더 떨어졌다. 보육비를 지원하고, 출산장려금 더 줄 테니 아이를 낳으라고? 젊은이들은 고개를 젓는다. 취업난, 경기 불황, 엄청난 양육비(자녀 1인당 대학 졸업 때까지 양육 비용 3억9천700만원이라는 추계도 있음), 경력 단절, 독박 육아, 치솟는 집값…. 이런 현실이 바뀌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출산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일과 양육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회로는 인구절벽을 피할 수 없다. 직장과 가정에서 양성평등이 이뤄져야 한다. 출산과 육아에 따른 불이익은 최소화돼야 한다. 성 평등 사회로 진입해 여성고용률이 높아지면 출산율이 반등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유럽 국가 중에는 그런 사례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OECD 회원국 중 출산율 꼴찌인 한국의 남녀 격차는? 세계 144개국 중 118위다. 아프리카의 튀니지와 감비아 사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17년 세계 성 격차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0.650점.(성 격차 지수가 1이면 완전 평등이다) 특히 경제 참여'기회 부문은 121위다. 남녀 간 임금 격차도 여전히 크다. 유사 업무 임금평등 항목에서 121위, 추정근로소득 수준을 보면 여성(2만2천90달러)은 남성(4만9천386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출생 시 남녀 성비 불균형은 132위로 최하위권이다. 양성평등에 가장 근접한 나라는 아이슬란드(0.878), 노르웨이(0.830), 핀란드(0.823) 등이다. 이들은 출산율을 반등시킨 대표적인 국가다. 다행히 정부는 저출산 대책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출산과 양육에 큰 부담이 되는 주거'교육 등 분야에 대해 생애주기 관점에서 지원안을 마련할 계획이란다. 지난해 말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국가 주도로 출산을 장려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 가족의 삶을 존중하는 사람 중심의 정책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시간이 걸려도 미래를 보장하는 정책을 내놓기를 희망한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여성이 행복해야 출산율이 높아진다. 110년 전 '여성에게 빵(생존권)과 장미(존엄권)'를 외쳤던 그날의 외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2018-03-08 00:05:01

[데스크 칼럼] '미투 운동'에 거는 기대

그녀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오래전의 일이다. 정확한 시기는 생각나지 않지만 30대 여성이 과거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것을 뒤늦게 털어놓는 자리였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도 그녀가 인터뷰 내내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다. 마치 속죄하는 것처럼 그녀는 죄책감에 억눌려 있었다. 피해자인데도 그런 모습에 무척 가슴이 아렸던 기억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은 불편한 범죄다. 뿌리깊은 가부장적 시선에 피해자라고 밝히는 순간 '주홍글씨'가 뒤따를 수 있어서다. 보이지 않는 보복이나 불이익도 감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사회 전반의 '성폭력 프레임'은 여전히 굳건하다. 피해자들은 그 속에 갇혀 가슴속에 충격과 분노를 켜켜이 쌓아둔 채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에서 촉발된 '미투(Me Too) 운동'(성폭력 고발 운동)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포털사이트에는 피해자라 주장하는 인물과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온다. 미투 운동은 대형 이슈인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에도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하며 그 열기를 실감케 했다. 이번에 불거진 미투 운동의 진원지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가해자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조직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법조계나 문화예술계, 연예계 등. 자칫 피해 사실을 공개했다가는 시쳇말로 '그 세계에 발붙일 수 없기에' 섣불리 잘못이라고 항변하지 못하는 곳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 중 대표적인 이가 이윤택 전 극단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다. 이 씨는 한국 연극계에서는 '전설'로 통한다. 그가 이끄는 연희단거리패는 연극계는 물론, 영화계를 주름잡는 배우들을 줄기차게 배출하는 사관학교로 불린다. 그의 한마디는 곧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졌다. 한때 연희단거리패에 있었던 한 배우의 소회는 이를 짐작게 하고도 남는다. 그는 "이윤택 대표는 대한민국 연극계에서 가장 높은 분이고 내가 어느 극단에서 연극을 해도 '저놈은 잘라'하면 잘리는 정도의 파워를 가진 분"이라고 했다. 절대적인 그에게 피해 여성들이 최근 '미투'를 외쳤고 결국 그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사과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성폭행 의혹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있어 논란은 진행 중이다. 미투 운동은 사회 곳곳으로 전파되고 있다. 종교계는 물론, 대학사회로도 확산되고 일반인들도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대구의 모 커뮤니티에는 한 회원이 어렸을 때 당한 성추행 이야기를 꺼내자 자신도 성폭력을 당했다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일반 관객들의 '위드유' (with you'당신과 함께하겠다) 집회도 힘을 보태고 있다. 미투 운동이 풀뿌리 운동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이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배경에는 우리 사회를 견고하게 지배하는 '갑을 문화'가 있다. 모두가 알지만 쉽사리 바꾸려고 용기 내지 못하는 적폐가 숨어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부당하고 강압적인 갑을 문화를 얼마나 많이 겪는가. 미투 운동은 적폐를 고발하는 것이자, 권력을 앞세워 아랫사람을 짓밟는 풍조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운동은 '을'들의 적극적인 공감을 사는 것이다. 혹자는 미투 운동을 혁명이라고도 일컫는다. SNS를 비롯한 온라인 상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른 현대적 개념의 혁명으로 해석한다. 아무쪼록 미투 운동이 일회성으로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가해자들이 '이 또한 지나간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꾸준히 이어졌으면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무서워 응어리를 가슴속에 묻고 사는 많은 여성이 당당해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아가 미투 운동이 불쏘시개가 돼 온갖 부당하고 강압적인 '갑을 문화'를 정화하는 시민운동으로 번지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미투 운동을 기대하는 이유다.

2018-03-01 00:05:00

[데스크 칼럼] 저성장 시대와 소확행(小確幸)

직장인 친구는 한 달에 두어 번 예전에 살던 동네로 '밤 마실'을 간다. 버스를 갈아타고, 걷고 하며 30분쯤 걸려 도착하는 곳은 작은 대폿집이다. 1만원 남짓한 돈을 내고는 혼자서 석쇠구이 한 접시와 소주를 마신다. 그리고는 소주 한 병에 기분 좋게 취해 돌아온다. 또 다른 직장인 친구는 틈만 나면 해외여행을 간다. 마카오, 홍콩, 오사카 등이 가까운 목적지다. 초저가 항공권이 뜨면 행선지를 가리지 않고 미리 사둔다. 그래서 가족동반보다는 홀로 갈 때가 더 많다. SNS에 자랑해놓은 친구의 여행지 셀카를 보면 부럽다. 하지만 나로선 쉽지 않은 일탈이다. 인생 뭐 있어? 싶지만 때로는 인생 참 힘들다. 그래서일까. 올 들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소확행'(小確幸)이 새로운 트렌드로 주목받고 있다. 소확행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6년에 낸 수필집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는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을 때, 새로 산 하얀 셔츠를 입을 때처럼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소확행의 예로 들었다. 버블 붕괴 이후 태어나서 한 번도 호황을 경험하지 못한 일본 청년세대의 경험이 소확행을 낳았다고 한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작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행복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손 닿는 곳에서 필사적으로 행복을 찾는 것이리라. 소확행이 '위로형 소비'를 도구로 하지만 40대 소확행과 20대 소확행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돈은 있는데 소박한 40대와 달리 경제적으로 어려운 20대 청년들에게는 혼술, 혼행(혼자 여행)도 사치다. 한국 청년들은 고달프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청년층 경제활동 제약의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보자. 지난해 15~29세 청년 체감실업률은 22.7%로 청년층 공식 실업률(9.9%), 전체 연령층 체감실업률(11.1%)을 훌쩍 넘었다. 일자리가 있더라도 불안정한 경우가 많았다. 15~29세 신규 채용 청년 중 비정규직은 2007년 54.1%에서 2015년 64.0%로 상승했다. 일자리가 변변치 않다 보니 빚은 늘고 소득은 줄고 있다. 전체 가구 평균 부채가 2012~2016년 28.8% 늘어날 때 30세 미만 가구주 부채는 85.9%나 늘어났다. 30세 미만 가구 가처분소득은 2015년 2천823만원에서 2016년 2천814만원으로 되레 줄었다. 고용, 소득 부진을 겪는 청년들은 부모와 함께 사는 '캥거루족'이 됐다. 지역 사정은 더 참담하다. 동북지방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대구의 경제지표 상당 부분이 전국 평균에 미달했다. 지난해 대구 실업자 수는 5만1천 명으로 전년보다 10.5% 증가했다. 지난해 대구에서 유출된 인구는 1만2천 명에 육박했다. 고용 여건 악화가 주요한 이유다. 한국은 이미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2020년대 2% 초반, 2030년대 1%대로 전망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지난 10년간 범정부 청년실업 대책을 21차례나 내놓고, 최근 5년간 청년 일자리에 10조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청년 고용 상황은 제자리걸음이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저성장, 고령화에 더해 청년 고용 불안은 더 심화할 게 분명해 보인다. 해법은 없을까. 관 주도의 단기적인 일자리 공급은 실효성이 없다는 게 이미 판명났다. 벤처 창업을 통한 일자리 확충 역시 한계가 있다. 그나마 효과적인 대안은 일자리 미스매칭 해소인데, 구직 청년에게 덮어놓고 눈높이를 낮춰라고 할 문제는 아니다. 기업 주도 인재를 키운다는 마음으로 고용 환경 개선에 힘을 쏟아야 한다. 작고 소소한 행복도 좋지만, 넓은 세상에 도전하고 성취하는 행복을 느끼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2018-02-22 00:05:01

[데스크 칼럼] 코피 터트리기

군 복무를 끝마쳐갈 무렵인 1994년 이맘 때쯤 한반도는 폭풍 전야였다. 전년도에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하면서 촉발된 제1차 북폭 위기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당시 최전방 미군기지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던 기자는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다닌다'는 말년 병장이었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 난 뒤 비상이 걸렸다. 평소 한밤중이나 새벽에 걸리던 비상이 대낮에 걸린 것이다. 완전군장을 하고 대기하면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동료 병사들 사이에서는 북한과의 전쟁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나왔다. "제대가 코앞인데…이러면 곤란한데…." 불안에 떨면서 미군 장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주시했다. 전시 작전 계획을 설명하는 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고, 걸프전을 비롯해 세계에서 무수한 전쟁을 치른 베테랑답게 차분하고 사무적이었다. 그들에게서 적어도 겉으로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싸움꾼' 미군의 모습은 다르구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전쟁을 무서워하게 된 것은 신병 때 '깜놀'했던 경험 때문이다. 흔히 남자들이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처음 총을 쏘아 보았을 때를 꼽는 경우가 많다. 내게는 AT4라는 대전차포였다. 대전차포 실사격 훈련이 있던 날. 기자의 손에 쥐어진 무기는 무게가 8㎏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장난감이 전차를 파괴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그러나 목표물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타깃용 전차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장난감 같은 무기가 뿜어내는 엄청난 화력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저 탱크 안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엄청난 압력에 사람의 겉모습은 물론 장기들까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망가졌을 것이다. 그날의 경험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어떤 경우에도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소신이 되었다. 하물며 핵전쟁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한반도에 위기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동안 숱한 위기설이 나돌았지만 이번은 1차 북핵 위기만큼 심각하다. 미국이 작심하고 북한의 코피를 내겠다고 벼르고 있는 것 같아서다. 먼저 주먹을 날려 코피를 터뜨리면 이기는 아이들 싸움처럼 작전 이름도 '코피'(bloody nose)다. 북한에게 과연 이 전략이 통할지 의구심이 들지만 미국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는 모양이다. 이미 지난해 11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함과 동시에 북한의 핵도발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미국 고위급 관리들의 잇따른 발언 등으로 공격 준비작업을 착착 진행 중임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이 한반도에 전개해 놓은 전략자산들을 볼 때 과연 코피만 내고 말지도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다. 북한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평창올림픽 개회를 하루 앞두고 미국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등장시키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런저런 대내외 상황 속에서 드디어 지난 9일 평창동계올림픽이 시작됐다. 한반도에도 평화의 기운이 한껏 감돌고 있다. 남북 분단 이후 '백두혈통'으로는 처음으로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이 남한을 방문하고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한반도 평화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는 것 같다. 김정은의 친서에서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를 밝히고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을 초청하면서 남북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 높아지는 등 지난 10년간 사실상 북한과의 단절 이후 대화를 통한 협상의 길이 열린 셈이다. 그러나 곧 잔치는 끝난다. "평창올림픽 성공을 빕니다. 그러나 그 후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 했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치른 평화적 잔치 뒤에 찾아올 어떠한 상황도 평화적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지금부터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18-02-15 13:29:41

[데스크 칼럼] 코피 터트리기

군 복무를 끝마쳐갈 무렵인 1994년 이맘 때쯤 한반도는 폭풍 전야였다. 전년도에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하면서 촉발된 제1차 북폭 위기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당시 최전방 미군기지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던 기자는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다닌다'는 말년 병장이었다.하루는 점심을 먹고 난 뒤 비상이 걸렸다. 평소 한밤중이나 새벽에 걸리던 비상이 대낮에 걸린 것이다. 완전군장을 하고 대기하면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동료 병사들 사이에서는 북한과의 전쟁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나왔다. "제대가 코앞인데…이러면 곤란한데…." 불안에 떨면서 미군 장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주시했다. 전시 작전 계획을 설명하는 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고, 걸프전을 비롯해 세계에서 무수한 전쟁을 치른 베테랑답게 차분하고 사무적이었다. 그들에게서 적어도 겉으로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싸움꾼' 미군의 모습은 다르구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전쟁을 무서워하게 된 것은 신병 때 '깜놀'했던 경험 때문이다. 흔히 남자들이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처음 총을 쏘아 보았을 때를 꼽는 경우가 많다. 내게는 AT4라는 대전차포였다. 대전차포 실사격 훈련이 있던 날. 기자의 손에 쥐어진 무기는 무게가 5㎏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장난감이 전차를 파괴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그러나 목표물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타깃용 전차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장난감 같은 무기가 뿜어내는 엄청난 화력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저 탱크 안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엄청난 압력에 사람의 겉모습은 물론 장기들까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망가졌을 것이다. 그날의 경험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어떤 경우에도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소신이 되었다. 하물며 핵전쟁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20여 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한반도에 위기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동안 숱한 위기설이 나돌았지만 이번은 1차 북핵 위기만큼 심각하다. 미국이 작심하고 북한의 코피를 내겠다고 벼르고 있는 것 같아서다. 먼저 주먹을 날려 코피를 터뜨리면 이기는 아이들 싸움처럼 작전 이름도 '코피'(bloody nose)다.북한에게 과연 이 전략이 통할지 의구심이 들지만 미국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는 모양이다. 이미 지난해 11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함과 동시에 북한의 핵도발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미국 고위급 관리들의 잇따른 발언 등으로 공격 준비작업을 착착 진행 중임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이 한반도에 전개해 놓은 전략자산들을 볼 때 과연 코피만 내고 말지도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다. 북한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평창올림픽 개회를 하루 앞두고 미국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등장시키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이런저런 대내외 상황 속에서 드디어 지난 9일 평창동계올림픽이 시작됐다. 한반도에도 평화의 기운이 한껏 감돌고 있다. 남북 분단 이후 '백두혈통'으로는 처음으로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이 남한을 방문하고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한반도 평화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는 것 같다. 김정은의 친서에서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를 밝히고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을 초청하면서 남북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 높아지는 등 지난 10년간 사실상 북한과의 단절 이후 대화를 통한 협상의 길이 열린 셈이다.그러나 곧 잔치는 끝난다. "평창올림픽 성공을 빕니다. 그러나 그 후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 했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치른 평화적 잔치 뒤에 찾아올 어떠한 상황도 평화적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지금부터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18-02-15 08:16:13

[데스크 칼럼] 입시 반칙에 눈감는 대학들

교육부가 2월부터 전국 4년제 대학 전임교원 7만6천 명을 대상으로 '교수들의 미성년 자녀 논문저자 끼워넣기' 실태를 추가 조사키로 한 결정은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대학의 자체 조사와 교수들의 자진 신고에 의존했던 첫 조사에서 드러난 82건이 전부가 아니라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애초에 논문저자 끼워넣기는 대학이나 교수들로부터 자진 신고를 받아 마무리할 사안이 아니었다. 신고를 누락한 경우가 여럿 확인됐으며 대학마다 조사 방법의 차이, 방학으로 인한 조사 대상자 부재, 착오 등으로 추가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연구부정 논문이 대입에서 활용된 경우 해당 대학에 입학 취소 등 조치를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실 교육부가 추가로 전수조사를 해도 허점이 많이 남아 있다. 동료 교수의 자녀나 지인, 혹은 유력자의 자녀를 끼워 넣는 행태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꼼수는 조사에서 빠져 당사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셈이다. 파헤쳐보면 현재의 적발 사례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교육부는 추가 조사 이후 논문에 포함된 전체 미성년 공저자 규모를 파악해서 교수와의 관계 또한 확인해야 한다. 논문저자 학생들은 자기소개서 등에 '수준 높은' R&E(과제연구) 활동 내용을 기록하게 되고 대입에서 유리한 위치에 놓인다. 교수의 직계 자녀로만 조사를 한정해서는 일반 학생과 학부모들의 상실감을 메워주기 어렵다. '입시 반칙'은 일부 고교의 학생부 기록에서도 교묘하게 숨어 있다. 최근 국공립 대학이 공동으로 주최한 권역별 핵심교사 콘퍼런스에 참가한 교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대학들이 실제 학생부를 보여주고 교사들이 평가하는 연수 시간에 생각지도 못한 기록이 나타났다고 했다. 재학생 학생부에 3학년 2학기 과목의 세부능력 특기사항(세특)이 등장하고, 담임이 예체능 과목 세특란에 상관없는 국어, 수학 등의 내용을 추가로 기재했다. 심지어 교내 대회 이외의 수상 기록을 엄격하게 통제함에도 불구하고 진로 활동에 올림피아드 수상 내용이 버젓이 있었다고 했다. 이쯤 되면 교육 당국이 수도 없이 강조해 온 학생부 기재요령 교육이 무용지물인 상황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대학들이 사례로 제시한 학생부가 모두 해당 대학 합격자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재의 수시모집 대입 구조로는 대학이 학생 선발의 절대적 권한을 가진다. 교과 내신과 같은 정량평가 외에 정성적 평가가 중시되는 학생부종합전형에서는 더욱 그렇다. 학교교육 중심의 대입전형이 자리 잡고 교실수업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온 학종이 분명히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학부모들은 '깜깜이 전형' '금수저 전형'이라고 부른다. 수험생 선호도가 높은 수도권 주요 대학일수록 이런 느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어떻게 합격했는지, 왜 떨어졌는지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 개입될 수 있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정성평가는 수험생과 대학(평가자) 사이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데 학생부 편법, 논문 끼워넣기 같은 꼼수가 횡행하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대학이 규정된 기재요령에서 벗어난 학생부를 모두 탈락시키지 않는 한 고교에서 꼼수와 편법이 확산될 것이다. 기재할 수 없는 외부대회 실적 등을 기록한 학생부를 우선 대교협에 송부하고, 이후 감사에 대비해서 내용을 지운다고 한다. 이러한 '신기술'이 대학에서 통한다는 사실이 대입 불신을 부채질한다. 대학은 학생부 기재가 고교의 책임이기 때문에 학생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다고 한다. 순진하게 규정을 지킨 학교(학생)만 바보가 된다. 공정한 경쟁의 출발이 무너진다. 오는 8월에 확정되는 2022학년도 대입제도와 관련해서 논의가 한창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새 입시제도 개편 방향을 '단순'과 '공정'이라고 제시했다. 제도로서의 공정뿐만 아니라 적용에서도 반칙에 눈감지 않아야 한다. 교육부 또한 반칙을 대입에 활용하고 이를 모른 척하는 대학을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

2018-02-08 00:05:04

[데스크 칼럼] '리중딱' '한야딱'

1892년 창단한 리버풀 FC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에서 '명가'로 꼽힌다. 1부 리그에서 18차례나 우승을 차지했고,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다섯 차례 정상에 올랐다. 이웃 도시이자 1부 리그 우승 횟수에서 통산 1위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20차례)와의 '노스웨스트 더비'는 EPL 최고의 눈요깃거리 가운데 하나다. 리버풀은 국내에서도 인기 구단에 속한다. 하지만 리버풀 서포터스들인 '콥'(Kop)은 종종 놀림감이 된다. 최근 팀이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한 탓이다. 리버풀은 지난달 15일 EPL 선두 맨체스터시티를 격파하며 기염을 토했지만 다음 경기에서 최하위권인 스완지시티, 웨스트브롬에게 내리 졌다. 예상대로 국내 축구팬 사이에서는 '리중딱'(리버풀은 중위권이 딱이야)이란 조롱이 쏟아졌다. 요즘 자유한국당 행태를 보면 '한야딱'(한국당은 야당이 딱이야)이라 불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동 없는 비판, 책임감과는 거리 먼 의정, 개인 보신에 급급한 처신 등등 도대체 수권정당다운 떡잎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이 아마추어로 규정한 문재인 정부가 잇따라 헛발질을 해도 도무지 반등의 기회를 잡지 못한다. 홍준표 당 대표를 위시한 지도부는 정부'여당 약점을 파고들겠다는 일념 아래 연일 무시무시한 말로 대중의 이목을 끌려 한다. 마치 언어유희의 끝이 어디인지 보여주겠다는 기세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림이 없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나 궁금하기도 하지만 내일이 기대되진 않는다. 미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믿음을 주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김성태 원내대표는 최근 청와대의 여야 원내대표 회동 제안에 "청와대가 애들 장난치는 데냐"라며 일축했다. 그의 말대로 여권의 국면 전환용 꼼수라 하더라도 제대로 맞붙어야 건질 게 있다. 한국당은 국정농단 사태 이후 여러 차례 보수 혁신을 약속했지만 오히려 퇴보한 듯한 느낌만 든다. 소속 국회의원'단체장들은 여전히 꽃길만 걸으려 하고, 대놓고 면박을 주는 당 대표에게 한마디 항변조차 못한다. '숭배 대상'만 이명박'박근혜에서 교체된 모양새다. 새로운 인물을 영입해 당의 면모도 일신하지 못했다. 홍 대표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지방선거 인물난에 대해 "후보가 될만한 분들에 대한 내사가 이뤄지고 있다. 야당이다 보니 들어오실 분들이 보복이 두려워서 못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 오히려 야당의 힘은 유권자의 지지에서 나온다는 걸 아는 예비후보들이 외면해서가 아닐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당은 어느새 만만한 동네북이 됐다. 지방선거에서 최소 6곳의 광역단체장 선거를 승리하지 못하면 물러나겠다는 홍 대표의 공언은 현실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여당과 다른 야당들은 "무기력에 빠져 사실상 좀비 수준에 가깝다"(유승민 바른정당 대표), "현 여권이 적어도 네 번에서 다섯 번은 계속 집권해야 한다"(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의원)며 비웃는다. 누구나 아는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원제는 '황제의 새 옷'이다. 여기에서 새 옷은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거나 심각하게 바보인 사람에게 안 보이는 옷'으로 설명된다. 황제 또한 처음에는 사기꾼 재봉사들의 말에 "내가 그런 옷을 입는다면, 누가 자신의 지위에 부족한지도 알아낼 수 있고, 현명한 사람과 멍청한 사람도 구분할 수 있겠구나. 당장 옷을 만들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위풍당당하게 나선 거리에서 한 아이에 의해 진실이 밝혀진 뒤에도 황제는 행진을 멈추지 못한다. 허세 때문이었을까? 자괴감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자신을 속인 사기꾼들의 재능에 감탄한 나머지 넋이 나가서였을까? 넉 달 앞으로 다가온 6·13 지방선거 뒤에 한국당이 무슨 소리를 늘어놓을지 자못 궁금하다.

2018-02-01 00:05:00

김수용 사회부장

[데스크 칼럼] 영웅이 필요한 시대

지난해 12월 21일 발생한 제천 '노블 휘트니스 앤 스파' 화재 사고로 29명이 숨지고 40명이 다쳤다. 경찰은 건물주와 건물관리인 등을 구속하고 출동한 소방관 6명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 조사했다. 충북소방본부와 제천소방서 상황실 등을 압수 수색했고, 제천소방서장 등 현장 지휘관들을 불러 참사 책임을 물을지 조사할 예정이다.이런 가운데 소방공무원 처벌 문제를 놓고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누리꾼들은 경찰 수사와 관련해 소방관들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초기 대응 부실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공방을 벌이고 있다.유가족대책위원회는 지휘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대책위 측은 "소방합동조사단 조사와 경찰 수사 결과에 따라 책임이 밝혀진 자들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합동조사단 조사 결과에 은폐나 고의 누락의 정황이 있다면 조사단장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국민 안전 지키려면 제천소방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청원 글이 올라왔다. 청원자는 "화재 당시 건물 2층에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소방 당국은 유리창을 깨지 않고 골든 타임을 놓쳤다. 철저하게 진상을 파악하고 관련자는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2일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부실한 초기 대응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천 소방관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 글 13건이 잇따라 올라왔다.이와는 반대로 소방관 처벌을 반대하는 내용의 청원 글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17일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제천 화재 관련 소방공무원 사법처리 반대' 글이 올라왔다. 23일까지 3만4천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사고 직후 소방관 잘못을 질타하는 유가족의 주장을 담은 기사에 오히려 소방관들을 응원하는 댓글이 잇따라 달리기도 했다.앞서 수많은 재난과 사고 이후에도 책임자 처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고, 진상 조사가 부실했을 때 국민들은 분노했으며, 이후 비록 납득하지 못할 수준이었다고 해도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있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무원에 대한 처벌 반대를 외치는 일은 지금까지 거의 없던 현상이다. 앞서 사법처리 반대 글을 올린 청원자는 "완벽하지 않은 현장 대응의 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선례는 소방공무원들에게 재직 기간에 한 번이라도 대응에 실패하면 사법처리될 수 있다는 작두 날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이런 현상의 이유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겠지만 필자는 '우리 시대의 작은 영웅'을 말하고 싶다.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된 소방관 이미지는 '온갖 악조건 속에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위험에 뛰어드는 고마운 이들'이다. 화마를 뚫고 누군가를 업고 안고 뛰쳐나오는 모습을 떠올린다. 재투성이 얼굴을 씻지도 못한 채 길바닥에 쓰러져 쪽잠을 자는 모습을 보며 가슴 뭉클하기도 했다. 철밥통, 복지부동이라고 공무원들을 싸잡아 비난하면서도 소방공무원은 예외였다.그렇다고 해도 이처럼 인명 피해가 큰 사고에서 소방공무원들의 초기 대응을 둘러싼 문제들이 하나둘 제기되는 와중에 이들을 지키자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는 영웅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국정 농단 사태를 보며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라 한숨만 쉬던 국민들에게 제 목숨마저 던져가며 생면부지의 누군가를 구하는 소방관들의 모습은 진정 마지막까지 지키고픈 고귀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거창하게 영웅이랄 것도 없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도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남아주기를 바란 것이다. 물론 잘못이 있다면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책임 추궁과 처벌은 구조적 문제 해결을 전제로 이뤄져야 한다. 우리 시대 소방관들이 일그러진 영웅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아이들에게 희생이 보답받고, 작은 영웅들이 탄생하는 시대를 보여주고 싶다.

2018-01-25 00:05:00

[데스크 칼럼] 아베의 '혼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다. 며느리 야단치는 제 어미를 말리는 척, 올케 위해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 같은데, 그 '깐족임'에 울화통이 더 터진다는 거다. 요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꼭 그 같다는 생각이 든다. 툭하면 태평양을 향해 탄도미사일을 쏘아대고 땅 밑에서 핵실험을 해대는 북한이 고울 수 없다. 좀 가만히 있으면 대화도 하고 교류도 넓히며 화해 무드를 만들어 보겠건만, 한 핏줄이라지만 남보다 못하달 정도로 밉다. 그럴 때마다 미국이 엄포도 놓고 으름장도 놓는데, 옆에서 맞장구치며 역성을 드는 게 일본의 아베 총리이다. 요즘은 미국보다 더 목청이 커진 것 같다. '나쁜 북한'을 외치며 더 압박을 가해 핵 도발, 미사일 도발을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옳은 말'을 한다. 그런데 그게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고 자신의 검은 뱃속만 더 보이는 것 같아 미운 시누이 같다는 거다. 그 시누이가 요즘 또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미운 짓을 하고 있다. 지난주부터 유럽 6개국 순방에 나서더니, 거기까지 가서도 "북한 핵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대북 제재를 더욱 강화하고 북한을 압박해야 한다"고 되풀이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하필 지금인가. 남북한이 모처럼 얼굴을 맞대고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시점이 아닌가. 막말 잘하기로 소문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남북 간의 대화 무드에 지켜보자며 말을 아끼고 있지 않은가. 한미연합훈련도 올림픽 기간 동안 중지하기로 한 터다. 모두가 조심조심 살얼음판을 딛고 있는 판국인데, 아베 총리는 그 살얼음판 위에서 발을 쾅쾅 구르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아베 총리의 이런 말은 기실 '다테마에'(建前)일 뿐이다. 일본인들의 속성을 이르는 말 중에 '겉으로 드러내는 마음'이 다테마에이다. 이 다테마에 뒤에 숨겨진 혼네(本音'진짜 속마음)는 따로 있다. 그의 혼네는 바로 "나는 군국주의의 관 뚜껑을 다시 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이라는 야심을 이루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한반도의 위기를 부각하려 노력한다. 일본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여, 군비 확장에 '딴소리'를 못하도록 입을 막아버린다. 남북한의 대화 국면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에도 '한반도의 유사시 한국 거주 일본인들을 쓰시마로 대피시키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하는 등 불안감 증폭에 힘을 쏟는 모습이다. 잊을 만하면 각종 도발을 계속해주는 북한이 아베는 고마울 것이다. 국민들의 불안지수가 높아질수록,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의 개헌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한 발 쏠 때마다 일본은 요격 미사일 등 군비 강화 대책들을 쏟아낸다. 이런 두 나라의 관계를 '적대적 동반자'라 하던가. 북한의 도발을 지렛대 삼아 아베는 '군국주의 일본'을 향해 가는 개헌 행보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그는 이미 올 신년 기자회견에서 자위대 재무장을 위한 개헌 의지를 재천명했다. "올해야말로 헌법이 존재해야 할 모습을 국민에게 확실히 제시, 개정을 위한 논의를 한층 심화하는 1년으로 하고 싶다." 다음 날 열린 집권 자민당의 신년 모임에서도 그는 "현재의 평화헌법은 '점령시대에 만들어진 헌법'"이라며 "시대에 걸맞은 국가의 모습, 이상적인 형태를 확실히 생각하고 의논해 가는 것이 우리들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밝혔다. 자위대를 헌법 9조에 명시해 궁극적으로는 일본을 '전쟁가능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일본 국민 대다수는 아베의 이런 개헌 행보에 반대 입장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올해 개헌을 밀어붙일 태세이다. 지난해 총선 승리와 지지율을 등에 업고 개헌 드라이브를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로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문제로도 골치를 앓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2018-01-18 00:05:00

[데스크 칼럼] 평창과 대구

평창동계올림픽을 생각하면 부러울 때가 많다. 어쩌면 배가 아팠다는 말이 더 솔직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대회가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 스포츠 이벤트인 올림픽이라서가 아니다.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 속에 치러지는 스포츠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두 번이나 탈락의 아픔을 겪은 평창은 '삼수' 도전을 선언했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얻어 결국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정부는 유치를 위해 고속철도 건설까지 약속하는 등 총력을 기울였다. 유치 후에도 대회 성공을 위해 경강선 고속철도(KTX)에 몸을 싣고 현지를 방문해 힘을 실어주는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고위급 인사들을 볼 때면 부럽기 그지없었다. 2011년에도 한국에서 빅 스포츠 이벤트가 열렸다. '지구 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 광풍이 불었던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그해 대구에서 열렸다. 물론 육상선수권대회가 최대 규모의 올림픽, 단일 스포츠 최대 이벤트인 월드컵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과 함께 세계 빅 3 스포츠 이벤트로 꼽히는 대회다. 그러나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유치 과정은 평창과 많이 달랐다. 정부, 국가 차원의 관심이 평창과 비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정부의 지지 동영상 하나 만드는 데도 애를 먹었다. 당시 경쟁 상대도 러시아 모스크바, 호주 브리즈번,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 쟁쟁한 국가에 세계적인 도시들이었다. 주정부가 적극 지원하고 대통령까지 유치에 나선 이들 도시를 제치고 대구가 대회를 유치한 건 기적과도 같았다. 지난 일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자는 것도, 평창올림픽에 대한 시기, 질투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평창올림픽 성공 개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때문이다. 평창올림픽을 둘러싼 국내외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데 따른 우려다. 러시아 도핑 파문으로 동계올림픽 최강국 중 하나인 러시아가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고, 동계 최고 인기 종목의 하나인 아이스하키도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의 불참 선언으로 김이 새게 됐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평창으로 향하는 선수 등 외국인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고, 일본은 위안부 등의 문제를 이유로 신경전을 벌이며 아베 총리의 개회식 불참까지 거론하고 있다. 국내 역시 국민들의 관심도가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고, 열기도 좀체 달아오르지 않고 있다. 입장권 판매율이 이달 초 현재 동계올림픽은 64%, 평창패럴림픽은 50%로 절반을 넘겼지만 기대에는 못 미친다.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회 종목이 국내에선 인기가 없는 육상인데다 지방에서 개최되다 보니 입장권을 많이 판매했지만 경기장을 찾는 관중이 적어 넓은 대구스타디움(6만여 석)이 텅 비거나 썰렁해 보일까 봐 노심초사했다. 촌동네에서 대회를 제대로 치를까 하는 우려와 불신의 시선도 적잖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자 뒤늦게 입장권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난리가 났다. 대구스타디움은 연일 만원 관중으로 가득 찼고, 그 열기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다. '입장권을 구하고 못 구하고'가 효자의 척도가 될 정도였다. 역대 최고 대회였다는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의 극찬도 대회 내내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 종목의 한계를 딛고 성공적으로 개최한 세계육상선수권대회처럼 평창도 대성공을 거두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최근엔 대회 흥행 차원에서는 최고라 할 수 있는 북한 참가라는 선물까지 받았다. 한국을 찾을 선수'임원'관광객 등의 심리적인 안전 문제도 상당히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북한이 고위급회담에서 평창올림픽에 선수단, 응원단, 예술단, 참관단, 태권도 시범단, 기자단까지 사상 최대 규모의 방문단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몽상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번 평창올림픽이 대회 성공 개최를 넘어 남북 관계 회복의 물꼬를 트고 나아가 북핵 문제 해결, 통일로 이어지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2018-01-11 00:05:00

[데스크 칼럼] '참 나쁜(?) 사람들'의 새해

지난해 6월, 당시 경북대학교 석좌교수였던 김윤상 교수의 퇴임을 맞아 행정학부에서는 야심찬(?)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김 교수의 마지막 강의에 오랜 제자였던 몇 사람을 깜짝 초청해 '서프라이즈 행사'를 여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모든 사람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는 '지공주의'(地公主義)의 주창자로 1989년 헨리 조지가 쓴 '진보와 빈곤'의 축약본을 번역해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한 석학이다. 참석자 명단에는 노태강, 최승호 두 사람의 이름이 포함되었다. 당시 이들은 '윗선'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야인 신세였지만 스승의 퇴임 행사에 기꺼이 참석하기로 용단을 내렸다. 함께 참석하기로 한 필자 역시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행사 며칠을 앞두고 뜻밖의 실수로 거사(?)는 무산되었다. 거창한 행사를 싫어하는 김 교수가 퇴임을 순수한 강의로 마무리하고 싶다는 뜻을 주변에 전하면서 결국 행사는 막판에 취소되고 말았다. 몇 달 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MBC 사장이 될 두 사람이 한 프레임에 잡힐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예매한 대구행 차표를 취소하며 깊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노태강(79학번), 최승호(80학번)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경북대 행정학과 동문일 뿐만 아니라 부당한 권력에 맞선 경험도 많이 닮았다. 대통령들이 찍어 내린 권력에 맞서다 전도유망했던 공무원과 언론인은 옷을 벗게 되었다. '윗선'의 부당한 지시에 맞서 싸우다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사회 정의를 위하는 그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숱한 고초 끝에 한겨울 차디찬 거리에서 일어난 '촛불'의 힘으로 지난해 현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점도 비슷하다. 노태강 문화부 제2차관은 '나쁜 남자'로 유명세를 치른 인물이다. 노 차관은 문화부 체육국장으로 재직 중이던 지난 2013년 대한승마협회 비리 감사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나쁜 사람'으로 지목된 후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대한승마협회 비리 감사는 사실상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예고편이었다. 대통령에게 찍힌 그에게는 좌천된 자리도 보장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아직도 있느냐"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법으로 신분이 보장되는 2급 공무원이자 가장이던 그는 결국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에서 모난 돌이 정 맞는 선례를 무수히 봐온 공무원 사회에서 '강직한 보고'를 올렸다. 나라와 국민에 대한 충성, 공직자로서의 소신과 용기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지난달 MBC 사장으로 돌아온 최승호 PD도 '윗선'의 부당한 지시로 쫓겨난 언론인이었다. 이명박 정부 국가정보원에 찍혀 좌천되고 결국 해고당했다. 지난 2010년 '검사와 스폰서', '4대강, 수심 6m의 비밀' 편 등을 통해 정부를 비판하면서 이명박 정부와 당시 MBC 경영진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해고된 뒤에도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 변신, '자백'을 통해서는 국정원의 간첩 조작 사건을, '공범자들'을 통해서는 권력의 언론 장악을 규탄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왔다. 해고자의 신분으로 공정보도를 위해 뛰어온 세월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돌아왔다. 노 차관은 코앞에 다가온 평창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적임자로 평가받으면서 현재 조직위원회에 상주하면서 대회의 성공을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다. 최 사장의 등장은 MBC가 '방송 장악'의 시대를 지나 '공영방송'의 새로운 항로를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MBC를 '만나기 싫은 친구'에서 '만나면 좋은 친구'로 바꿔놓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들의 무술년 새해 과업이 원활하게 진행돼 지난해 무산된 스승의 퇴임식에 같이 참석하기를 기대해본다. 학과 후배인 필자도 이들과 함께 교정을 찾는 날을 꿈꿔본다.

2018-01-04 00:05:00

[데스크 칼럼] 도둑질은 이제 그만

2005년 12월 24일 오전 5시 30분쯤 대구시의회. 불 꺼진 본회의장에 손전등을 든 이들이 도둑고양이처럼 하나 둘 나타났다. 20분 만에 20여 명이 집결했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누구도 회의장 벽 조명 스위치를 켜지 않았다. 컴컴한 회의장 안에 촘촘히 모였지만, 속삭이는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시민들이 잠든 새벽 남의 집 담을 넘어 장롱 서랍을 더듬는 밤손님과 다름없었다. 정족수가 채워지자 누군가가 본회의장 출입문을 잠갔다. 통 통 통!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의사봉 소리는 나지막했다. 그리고 시의회와 연결된 대구시청 쪽으로 잽싸게 빠져나갔다. 소식을 듣고 뒤늦게 본회의장에 도착한 기자는 소수 정당 당원들의 허탈한 표정만 마주할 수 있었다.대구시의회는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의원 27명 가운데 한나라당 소속 23명에게만 전날 본회의 일정을 알렸다. 열린우리당과 무소속 시의원 4명에게는 이날 오전 5시 31분 선거구 획정안 처리 일정을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민의를 도둑질한 역사적 순간이었다.전날 경북도의회도 본회의장이 아닌 농정위원회 회의실에서 선거구 획정안을 기습 처리했다.같은 달 28일 경남도의회는 4인 선거구를 2인 선거구로 쪼개는 안을 의회 주차장에 있던 버스 안에서 통과시키는 전무후무한 묘책을 성공시켰다.대구시의회는 이어 2010년 4인 선거구 11곳을 모두 2인 선거구로 쪼갰고, 2014년에도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정한 4인 선거구 12곳을 모두 쪼개 2인 선거구로 날치기 통과시켰다.대구경북 광역의원들은 묘안을 발휘해 선거구 획정안을 깔끔(?)하게 처리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자당 국회의원들의 꼭두각시놀음을 한 것이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술'밥과 운전대를 책임져줄 시종을 원했고, 시종을 자처한 지방의원들은 윗분의 명령에 철저하고 치밀하게 순응한 셈이었다.내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구시와 경북도는 최근 교수, 변호사, 기자, 시민'여성단체 회원,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 등 각계로 기초의원 선거구획정위원회를 꾸렸다. 유권자들이 투표로서 선거에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선거 규칙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유권자를 대변하는 선거구 획정 위원들은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고, 유권자의 표 가치를 최대한 동등하게 만들어야 할 책무를 갖는다.영남과 호남에서 그동안 축적돼온 지역주의는 양 지역에서 특정 정당의 지역 독점을 부추겼다. 1980년대 이후 민주주의 성숙에 따라 이제 지역주의를 완화하고 부숴버려야 할 시점에 다다랐다.다양한 정치 세력의 지방의회 진출은 지역주의 타파는 물론 민주적 지방자치의 근원이기도 하다. 거대 정당의 일당 독점은 지역 발전을 가로막는 결정적 폐해가 된다는 점은 지난 40여 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입증됐다.우리나라는 현행 규정상 광역의원은 선거구마다 1인씩 뽑는 소선거구제이고, 기초의원은 선거구마다 최소 2인에서 최대 4인까지 뽑는 중선거구제다.2014년 지방선거에서 대다수 4인 선거구를 2인 선거구로 쪼개기 한 결과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기초의원이 전체 의석의 98%를 차지하는 기형적 정치지형을 만들었다.선거구 획정 위원들도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적 다양성 확보의 단초를 제공해야 할 책임을 일정부분 지고 있다.후보 난립, 전문성 결여 등을 핑계로 소선거구제를 고집하는 거대 정당의 논리는 '어둠' '버스 안' '몰래' '날치기' 등 2인 선거구를 도둑질하듯 급조해온 행태 자체로 궁색하기 그지없다는 점을 방증했다.조례 제'개정권을 가진 지방의회는 시민들을 대변하는 선거구 획정 위원들이 여론을 폭넓게 수렴하고 심사숙고해 정한 선거구 획정안을 손바닥 뒤집듯 뒤바꾸는 오만한 도둑 날치기를 이제 그만두기를 간곡히 당부 드린다. 공천권을 쥔 윗분의 눈치보다 유권자들의 준엄한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진정한 지방자치가 열리기 때문이다.

2017-12-07 0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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