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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열 논설위원

[야고부] 이러면 지는 건데…

'그들이 나의 건강을 좀먹었나 봅니다. 이러면 지는 건데….'저항시인 이육사. 1904년 안동에서 태어나 17세 때 대구에 와 17년을 살았고, 1927년 10월 18일 터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으로 첫 옥살이를 했다. 이후 열 여섯 번이나 더 붙잡히고 옥에 갇혔다. 1944년 1월 16일 중국 북경 감옥에서 40년 삶을 마칠 때까지 17차례나 체포 투옥 고문으로 온몸은 만신창이였다.그의 이런 독백은 최근 발간된 고은주의 소설 '그남자 264'에 나온다. 시와 글을 통한 항일로는 모자라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원이 되어 무장투쟁으로 독립의 소원을 이루려 했던 그였다. 그러나 고문에 망가진 몸을 어찌할 수 없어 경주 한 사찰에서 요양할 때, 위로 방문한 서울의 한 서점 여사장에게 한 말이다.그의 신음처럼 일제는 그랬다. 한국을 삼키고 먼저 한국인의 건강한 신체를 망치고 좀먹는데 나섰다. 매일 새 법령을 냈고 어긴 한국인을 처벌했다.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는 새 법(조선태형령)으로 다스렸다. 볼기를 때려 불구로 만들기 일쑤였다. 항일 뜻을 꺾고, 감옥도 덜 늘려 돈을 아낄 수 있었으니 딱이었다.고문은 더했다. 혹독하고 악명 높았던 고문에 대한 공포는 착한(?) 한국인이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게 만들고, 배신과 변절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마련이었다. 중국에서 의열단에 가입,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한 뒤 이육사가 또다시 붙잡힌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가까운 처남의 자수 때문이었으니 말이다.'그남자 264' 속 이육사가 고문과 악형으로 끝내 목숨을 잃는 과정은 최근 벌어지는 일본의 경제 보복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날, 한국인 몸을 망쳐 재기할 수 없도록 만신창이로 만들 듯, 이제 일본은 한국 경제의 가장 아픈 곳을 찾아 상처를 덧나게 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자 하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다.지금, 분명 옛날과 다르다. 한국의 겉은 건강하다. 속조차 그럴까. 경제, 소비도 그렇다. 올해 상반기 일본 차 3만 대 수입에 한국 차 수출은 32대였다. 차뿐이랴. 일본에 기대 우리 산업 체질과 맷집을 키우는 데 소홀하고 경제 독립의 뜻을 느슨히 한 결과이리라. 일본인 200만 명이 한국에 올 때, 일본을 찾는 700만 명 넘는 한국인에게 묻고 싶다. '일본 NO'라고 외치기만 하면 될까.

2019-07-31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야고부] '하찮은 벌레'

"처음에 상대는 권총을 뽑아들고 1파운드를 요구했습니다. 그걸 주니까 또다시 총을 꺼내 들고 2파운드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독재자는 1파운드 17실링 6펜스를 받고서 나머지는 미래에 대한 호의의 약속이라고 둘러댔습니다."히틀러의 요구대로 독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합병키로 한 1938년 9월 29일 뮌헨협정 6일 후인 10월 5일 처칠은 영국 하원에서 체임벌린 총리와 히틀러 간의 정상회담을 이렇게 평가했다. 뮌헨 협정과 그에 앞선 9월 15, 16일의 베르히테스가덴 회담, 같은 달 22, 23일 고데스베르크 회담 등 3차례의 정상회담 모두 외교 협상이 아니라 노상강도를 당한 것이라는 소리였다.그도 그럴 것이 회담에서 체임벌린 총리는 말 그대로 히틀러에 질질 끌려다녔다. 무조건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협상으로 히틀러를 달랠 수 있다는 소망적 사고, 히틀러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며 목적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오판이 결합한 결과였다.베르히테스가덴 회담에서 체임벌린은 주데텐 독일인들에 대한 자율권 보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자율권 보장에서 주데텐란트의 할양(割讓)으로 문제의 '차원'을 바꿔버렸다. 체임벌린은 회담 시작 2시간 만에 이를 받아들였다.이후 회담도 같은 양상으로 흘러갔다. 고데스베르크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주데텐란트 철수 시한이 10월 1일로 확정됐다. 3차인 뮌헨회담은 할양 지역이 조금 줄어드는 등 약간의 세부 조정이 있었지만, 본질은 2차 회담과 다르지 않았다.지난 25일 북한의 탄도미사일 도발과 관련해 청와대가 "9·19 남북 군사합의에는 탄도미사일 금지 규정이 없다"고 했다. 도발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소리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사일 도발과 그에 이은 김정은의 '겁박'에 함구한 채 "지금까지 남북, 북미 관계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26일 불교계 인사 초청 청와대 오찬)고 했다. 이런 모습이 김정은에게 어떻게 비칠까?히틀러는 1939년 8월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장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적수들은 하찮은 벌레에 지나지 않아. 난 그들을 뮌헨에서 보았어."

2019-07-30 06:30:00

박병선 논설위원

[야고부] 쪽바리 근성

한국은 욕이 발달한 나라다. 온갖 육두문자가 난무하지만, 그중에 잘 쓰이진 않지만 치명적인 욕설이 하나 있다. '쪽바리 근성을 가진 놈'이 그것이다. '쪽바리'는 일본 사람을 비하하는 속어이지만, 그런 근성을 가진 사람으로 공인되면 인간관계를 포기해야 할 판이다. '쪽바리 근성'은 얍삽하고 이중적인 인간성을 가졌다는 뜻이다.실제 일본인은 어떠할까? 과거 일본의 전쟁 방식을 보면 이중적이고 비겁한 모습을 유감없이 연출했다. '진주만 공습'이 대표적이다. 일본은 1941년 12월 9일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는데, 선전포고 없는 기습이었다. 청일·러일전쟁도 그러했듯, 기습 공격은 일본의 전매특허였다.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사전 통고 없는 '비열한 전쟁'(sneaky war)으로 인식하며 2001년 '9·11테러'와 비슷하게 간주한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은 '진주만 공습'과 9·11테러가 같이 취급받는 데 분개한다는 점이다. '진주만 공습'은 정상적인 군사행동이며 선전포고는 사정 때문에 제대로 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당시 일본은 공습 30분 전에 주미대사관을 통해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려 했지만, 암호 해독과 타이핑이 늦어져 공습 1시간 뒤 통고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사정을 내세운다. 선전포고문이 전달된 시각은 일본 육군이 2시간 30분 전에 영국령 말레이 반도에 상륙한 뒤였다. 일본인은 눈앞의 이익을 취하면서도 명분을 쌓고 변명을 하는 데 익숙한 민족이다.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전쟁에 대한 태도를 보면 일본인론(論)이 가능하다. 전쟁이라는 것은 아주 전형적인 정치 행위로서 그 인간, 그 민족을 알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장이므로 설명하기 쉽다"고 했다. 섬나라 특성 때문에 타 민족을 무시·배척하고 국제 규범을 지키지 않는 근시안적 시각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루스 베네딕트는 명저 '국화와 칼'에서 '아름다운 국화를 키우면서 무시무시한 칼을 휘두르는' 일본 문화의 이중성을 진단했다.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은 아베 정부가 우방국에게 자행하는 '등에 칼 꽂기' '뒤통수 때리기'의 전형이다. 힘을 기르지 않으면 일본의 이중성과 거짓 핑계에 번번이 놀아날 수밖에 없다.

2019-07-29 06:30:00

이대현 논설위원

[야고부] '동네북 한국'

해방 직후 "소련놈에 속지 말고 미국놈 믿지 말라. 되놈은 되나오고 일본놈은 일어난다. 조선사람 조심하라"는 동요가 유행했다. 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민족의 고달픈 처지를 한탄한 노래다. 70여 년이 흘렀지만 한국은 이들 강대국에 치이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를 위협하는 북한을 머리맡에 이고 사는 것을 고려하면 상황이 더 나빠졌다.강대국에 핍박당하면서도 호기(豪氣)는 있었던 모양이다. 강대국 사람을 지칭하면서 비하하는 말을 많이 썼다. 러시아인은 로스케라 불렀다. 러·일 전쟁 때 일본 군인들이 러시아인을 지칭하는 '루스키'를 음역해 '로스케'(露助)라 부르며 러시아 군인들을 조롱했다. 이 말이 한반도에 전파돼 러시아인 비하 표현으로 쓰였다. 중국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되놈, 일본 사람을 비하하는 쪽발이도 마찬가지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인이 북군 병사에 대한 모멸적 칭호로 썼던 양키를 미국 사람을 지칭하며 흔하게 썼다.구한말, 해방 직후처럼 한반도가 강대국이 맞서는 격랑으로 들어갔다. 러시아는 자국 군용기가 한국 영공을 침범한 사실을 부인하고 한국 조종사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중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있다. 일본은 경제 보복에 이어 독도 영유권을 다시 꺼내 들었다. 한·일 갈등에 미국은 동맹인 한국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 어정쩡한 자세를 보이며 파병과 한·미 방위비 분담금 인상 청구서를 내밀었다.이 와중에 북한은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한국을 향한 무력시위라며 대남 경고장을 날렸다. 문재인 대통령으로 풀이되는 '남조선 당국자'를 거론하며 "남조선 당국자는 평양발 경고를 무시해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을 향한 문 대통령 노력이 남한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로 돌아왔다.한국이 네 강대국과 북한의 '동네북'이 된 원인은 한·미 동맹과 한·미·일 공조가 흔들린 탓이다. 한국이 계속 외톨이로 남으면 두고두고 동네북 신세가 되는 것은 물론 나라 안위마저 위태롭다. '조선사람 조심하라'는 동요는 아직 이 땅에서 유효하다.

2019-07-27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야고부] 마음과 말의 척화비

대구에는 한 천주교 신자의 독백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했지만 나오는 발걸음은 그렇게 가볍지는 않은' 곳이 있다. 조선조 죄수를 처형했던, 도심 반월당에 있는 관덕당(관덕정)이란 바로 그 역사 현장에 1991년 천주교대구대교구가 개관한 관덕정순교기념관이 그렇다.1860년 나라의 첫 토종 종교로 평가받는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1864년 죽음으로 순도(殉道)했고, 천주교 신자 24명이 을해(1815)·정해(1827)·기해(1839년) 박해로 순교(殉敎)한 곳이니 피의 성지(聖地)와 같다. 일본에 맞선 의병들도 순국(殉國)한 곳이니 기릴 만하다.동학 창시자와 서학(西學)의 천주교 신자, 맨손의 의병까지 목숨을 잃은 슬픈 사연의 관덕정이 순교기념관이 된 까닭을 알 수 있다. 종교인이 사형된 프랑스 파리 시내 몽마르트르(Montmartre·프랑스 말로 '순교자의 언덕'이란 의미)가 사람들 발길을 끄는 것처럼 말이다.기념관 안에는 또 다른 아픈 역사가 있다. 대원군이 1871년 전국에 세운 척화비(斥和碑)이다. 겉에는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의 주장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 새겼다. 다시 옆에 '우리 만대 자손에 경계한다'는 말도 덧붙였다.그러나 대원군 뜻과 달리 조선은 외세를 막지 못했다. 되레 나라와 백성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신음만 했다. 이후 척화비는 없어지거나 땅에 파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척화비가 다시 기념관 한쪽을 지키며 악몽의 옛일을 되새겨주니 발걸음이 어찌 가볍겠는가.7월, 일본의 경제 보복 도발로 나라 안팎이 심상찮다. 안에서는 대통령을 에워싼 진영 세력의 말잔치가 그렇다. 갈수록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 각료, 여당 인사가 대열을 갖춰 일본 공격의 강도를 높인다. 이런 흐름에 맞서거나 토를 달면 '친일'로 몰거나 마치 적처럼 본다.나라 밖에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가 뭉쳐 한국을 괴롭히고 있다. 우리 하늘을 제 나라 공간처럼 멋대로 휘젓고 다닌다. 미국은 일본과 싸우는 한국이 마뜩잖은 모양이다. 이런 즈음, 국민을 '친일'과 '애국'의 잣대로 편을 가르는 모양새가 마땅할까. '마음의 척화비'를 세우면 될 일을 '말의 척화비'를 세우려다 되레 역풍을 맞지 않을까 걱정이다.

2019-07-26 06:30:00

이대현 논설위원

[야고부] 어쩌다 '개집 신세'로

1951년 영국 '더 타임스'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을 찾는 것과 같다"는 기사를 실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밑바닥인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경제 발전이 민주주의 토대가 됐던 역사를 고려하면 한국의 경제 발전은 요원하고 그에 따라 한국에서 민주주의 발전은 불가능하다는 예측이기도 했다.하지만 짧은 기간에 한국은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더불어 쟁취했다. 중도에 고꾸라졌던 수많은 나라와 달리 한국은 경제·민주주의 모두에서 선진국 반열에 등극하는 역사를 썼다. 특히 경제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비약적 발전을 성취했던 한국 경제는 지금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지난해 출간된 '기적의 한국경제 70년사'는 네 가지 문제를 꼽았다. 대내적 갈등과 정책 실패에 따른 경제성장률의 하락,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의 구조적 변화로 인한 경제·정치·사회에 대한 미증유의 충격, 북한 핵 위협 속에 남북 대치 및 엄청난 통일 비용, 이념·지역·소득계층·세대 간 갈등 심화 등이다. 역사에서 배우고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것 외에 별다른 해법이 없다는 견해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미국 블룸버그 아시아경제 담당 전문가 슐리 렌이 칼럼에서 "한때 '아시아의 호랑이'였던 한국이 이제는 개집(doghouse)에 갇힌 신세가 됐다"는 충격적인 비유로 한국 경제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한국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유로 외부 요인보다 국내 문제에 있고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이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문 대통령의 사회주의적 실험으로 인해 한때 활기가 넘쳤던 한국 경제의 야성을 앗아갔다고 안타까워했다.한국 경제가 어쩌다가 개집에 갇힌 신세란 얘기를 듣는 지경이 됐는지 참담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슐리 렌의 진단이 틀렸다고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 경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정책을 재고(re-thinking)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슐리 렌은 조언했지만 문 대통령과 정부는 고집을 전혀 꺾지 않아 개집에서마저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2019-07-25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야고부] 사회적 건강

SNS에 떠도는 '없다' 시리즈는 우리나라 사람이 각 연령대별로 처한 보편적 상황을 설득력 있게 짚어낸 우스갯소리다. 풀어보면 30대는 집이 없고, 40대는 돈이 없고, 50대는 일이 없다. 또 60대는 낙(樂)이 없고, 70대는 이(齒)가 없다는 식이다.이를 뒤집어보면 저마다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이상적인 기대치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금전적 여유나 일거리, 건강, 취미, 원만한 사회적 관계나 심리적 안정 여부 등이 모두 포함된다. 특히 노년으로 갈수록 건강과 사회적 관계에 비중이 더 높아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이런 관점은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의 기대수명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2년이 더 긴 82.7년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가 'OECD 보건통계 2019'를 인용해 발표한 것에 따르면 우리나라 남자 기대수명이 79.7년, 여자는 85.7년으로 기대수명이 가장 긴 일본(84.2년)과 비교해 1.5년 차이가 났다.그런데 본인이 건강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비율은 29.5%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았다. 이는 실제 몸이 아픈 사람이 많거나 아니면 '건강염려증'이 상대적으로 더 심하다는 얘기다. 2017년 기준 우리 국민 1명이 의사에게 외래 진료를 받은 횟수는 연간 16.6회였다. 이는 OECD 최다이자 평균 7.1회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또 입원 환자 1인당 평균 18.5일을 병원에 머물러 OECD 평균 8.2일을 크게 웃돌았다.이런 수치가 국민의 건강 상태를 정확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높은 기대수명과 달리 건강지수나 만족도가 높지 않다는 것은 눈여겨볼 문제다. 기대수명은 '사람마다 몇 살까지 사는 게 적정한지 기대하는 수명'이라는 점에서 통계와 심리적 기대치 간의 차이도 이해해야 한다. 서울대병원 조사에 따르면 사회적 건강이 좋은 사람의 기대수명이 훨씬 높았다. 사회적 건강이란 개인이 사회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의 일을 적절히 수행하는 상태를 말한다.태풍이 지나가고 절기상 대서(大暑)를 맞아 연일 폭염경보가 핸드폰을 울린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는 건강이 주요 관심사다. 계절과 기후에 맞춰 규칙적인 걷기 운동 등으로 꾸준히 몸을 움직이면 건강지수는 비례해 따라온다.

2019-07-24 06:30:00

박병선 논설위원

[야고부] 괴벨스의 부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대인 생존자들이 가장 증오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얼핏 총통 아돌프 히틀러나 게슈타포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일 것 같지만, 의외의 이름이 등장한다. 바로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1897~1945)다."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선전의 가장 큰 적은 '지성주의'다." 괴벨스는 치밀한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의 분노와 증오를 폭발시켜 유대인을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 지식, 상식 따위를 앞세워 국가정책에 반대하는 자는 '국가의 적'으로 취급했다.'선전을 일종의 예술'로 여긴 괴벨스는 지식인이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아 나치당 초창기에는 거의 유일한 박사였다. 그는 유능한 참모들을 동원해 대중의 심리와 선전 기술을 연구했다. '괴벨스는 자신의 주위로 야심만만하고 능력 있는 참모들을 대거 모았다. 그들의 절반 이상이 대학을 다녔고, 많은 수가 박사학위를 갖고 있었다.…괴벨스와 참모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와 국가를 도박판에 내몰았다.'〈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저,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괴벨스를 언급한 이유는 요즘 한국 사회에 대중선동을 일삼는 분위기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연일 일본의 경제 보복과 관련해 '친일파로 불러야' '애국이냐 이적이냐' '전쟁은 전쟁이다' 따위의 글을 쏟아내고 있다. 야당과 일부 언론이 주타깃이다. '언론은 정부의 피아노가 돼야 한다'는 괴벨스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진보 지식인 김규항 씨는 "이견은 모조리 이적이며 매국이다.…자유주의의 기본조차 팽개치는 자기 모독의 개소리일 뿐이다"고 썼다. 김 씨의 표현대로 '개소리'를 하는 분은 서울대 법대 교수 출신이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거기다 언행을 조심해야 할 고위 공직자 신분이다. 청와대까지 "법리적인 문제는 법조인으로서 민정수석이 충분히 발언할 수 있다"고 거들었다.애국의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정부 정책에 따르면 애국이고, 따르지 않으면 매국이라니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다. 다원화 시대에 케케묵은 애국 논리를 선동하는 분들이 민주화 세력이라니 가슴 답답하다.

2019-07-23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야고부] 일본인과 대구 사람

1893년 9월, 지금 대구와 자매결연을 맺은 히로시마시 옆 오카야마현 출신 2명이 대구에 왔다. 물론 불법이다. 당시 한국 정부가 허용한 일본인 거주지에 대구는 없었다. 그렇지만 대구읍성 남문 밖 한국인 집을 빌려 의약과 잡화 가게를 열었다.불법체류자였지만 대구 이주 첫 일본인으로 둥지를 틀게 된 것은 대구 사람의 인심 덕분이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싸움 지휘를 위한 자신의 막사를 대구에 지으라는 지시로부터 시작된 악연에도 대구 사람은 두 불법 일본인을 같은 '사람'으로 봤기에 받아들였으리라.약령시로 유명한 대구에서 의약 가게를 냈으니 주변 한약상과의 나쁜 사이는 그럴 만하다. '저녁을 먹을 때 돌이 날아오는 일은 거의 매일 밤같이 이어졌'으니 말이다. 비록 그랬지만 당시 관찰사 이용직은 오히려 '동정하고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큰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이후 일본인이 대구에 물밀 듯 몰렸고 힘과 군대를 앞세워 나라와 대구를 삼키려는 침탈로 두 나라 사람은 원수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일제는 대구 여성 1명 등 한국 남녀 4명을 1903년과 1907년 일본 박람회에 동물처럼 '전시'하고 돈을 받고 관람시키는 만행도 자행했다.이런 아픈 대구 역사에는 임란 때 조국에 반기를 들고 투항, 왜군에 맞서고 뒷날 청나라와 싸움에서 충성을 바친 귀화 일본인 김충선도 있다. 이런 잊을 수 없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지난날을 살피면 뒷사람이 깨달을 가르침은 너무나 분명하다.같은 흑역사(黑歷史)를 되풀이하지 않는 일이다. 일제 침탈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음만큼은 경계해야 한다. 지금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로 나라가 뒤숭숭하다. 이런 즈음, 대구에서 한국인 남편과 단란한 삶을 잇는 일본인 부인과 자녀의 속앓이도 덩달아 깊어가는 모양이다.민간 차원의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한국 내의 일본인에까지 나쁜 영향을 주어서다. 하지만 민간에서 한국과 대구에서 헌신하는 일본인 활동은 숱하다. 팔순의 일본 여성인 오카다 세쓰코 할머니가 공직을 떠나 10년 넘게 대구에서 힘든 이웃에 봉사하는 사례도 그렇다. 대구를 아끼고 대구가 삶터인 선량한 일본인과 그들 자녀가 이번 일로 상처받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이들을 배려하는 사람들, 대구여서 가능하리라.

2019-07-22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야고부] 아베의 뿌리

반골 저널리스트인 아오키 오사무(靑木理)가 쓴 '아베 삼대'(安倍 三代)는 일본 정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아베 가문 3대의 가족사를 통해 침략과 패전 그리고 전후 부흥의 일본 현대사를 압축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그저 좋은 집안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일본 '세습 정치'의 산물로 정계에 들어와 최장기 집권 총리로 '평화헌법' 개정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는 우익의 괴물이 되어 버렸다.신조의 할아버지 간(寛)은 양조업을 하는 지주의 후손으로 동경제국대를 나와 반전·평화주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지금도 고향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신조의 아버지 신타로(晋太郎)도 동경제국대 출신으로 가미카제 특공대에 지원했지만 출격 직전 전쟁이 끝났다.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을 몸소 겪었다. 마이니치신문 기자로 활동하던 중 후일 총리가 되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딸과 결혼했다.기시의 후광으로 승승장구하며 자민당 간사장과 관방장관·외무상 등을 지낸 보수주의자이면서도 평화헌법 옹호론자였다. 처가인 기시 가문의 대열에 합류했지만, 아버지 간을 존경했다. 신타로의 차남으로 태어난 신조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바쁜 아버지와 소원했던 반면 외할아버지인 기시를 무척 따랐다. 동경대를 못 가서 아버지의 질책도 받았다. 직장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외무상이 된 아버지의 강요로 비서관이 되어 정치에 입문했다.그러나 신조는 정치적으로 친가를 외면하고 외가의 계보를 택했다. 한국의 불행이다. 외조부 기시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했던 군국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신조는 "나는 신타로의 아들이지만 기시의 DNA를 이어받았다"고 공언한다. 신조는 정치 명문가인 외가와 외교관 아버지를 자양분으로 잔뼈가 굵었다. 능수능란한 현실주의자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일 경제 전쟁으로 누란의 시국이다. 우리에게도 국익을 위해서라면 적과의 동침도 불사하는 프로 정신이 절실하다. 상대는 얼치기 전문가들의 우왕좌왕과 감상적 민족주의로는 대적할 수 없는 제국의 첨병이다.

2019-07-20 06:30:00

이대현 논설위원

[야고부] 반도체와 '역사타령'

한국이 세계 최고의 '반도체 국가'로 올라선 세 가지 요인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 여고 출신 생산직 사원, 경북대 전자공학과라는 분석은 탁견(卓見)이다. 이 창업주의 선견지명과 결단, 60㎞ 행군까지 하면서 우수한 제품 만들기에 매진한 생산직 사원들의 땀과 눈물, 연구실에서 나온 결과를 생산 현장에서 성공적으로 실현한 경북대 전자공학과 졸업생들이 한국을 30년 이상 먹여 살린 반도체 신화를 만들었다.이 창업주가 1983년 '우리가 왜 반도체 산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도쿄 선언'을 발표하자 삼성 안팎은 물론 정부마저 한국 경제가 망한다며 반대했다.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 보고서까지 내놓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이 창업주는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어렵더라도 전력투구할 때가 왔다"며 적자를 보면서도 반도체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좌우명인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올곧게 실천했다. 그는 "일본은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냐"며 임원들을 독려했다. 이 창업주의 '도쿄 선언'은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결정으로 꼽히고 있다.반도체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지난해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이 26%에 달했고 국내총생산(GDP)의 7.8%를 반도체가 차지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반도체 산업을 정밀타격하고 나선 것은 반도체를 공격하면 한국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다. 반도체 위기는 한국 산업, 나아가 경제 위기를 촉발하는 확실한 트리거(방아쇠)가 될 가능성이 크다.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반도체 위기를 돌파하려고 혈혈단신 일본 출장을 다녀오는 등 동분서주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공들여 쌓은 '반도체 제국'이 무너질지도 모를 위기 앞에 이 부회장의 심경은 절박할 수밖에 없다.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기업인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반면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 더불어민주당은 해법 찾기보다 '일본 때리기'에 치중하는 모양새다. 30년 넘게 한국 경제를 이끈 반도체 산업이 망가질 위기에 처했는데도 '12척의 배'와 같은 '역사타령'만 늘어놓고 있다. 세계 일류로 꼽히는 한국 경제를 삼류·사류 정치가 망가뜨리는 우매한 짓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2019-07-19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야고부] 군인의 명예

6·25전쟁 발발 후 7월 초까지 남한에 급파된 미 육군은 패배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장교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그 수는 최근 재번역 소개된 T. R. 페렌바크의 '이런 전쟁'에 따르면 남북전쟁 이후 그 어떤 전쟁보다 많았다. 2차 대전 종전 후 군대를 '민주화'한 결과 형편없이 저하된 병사들의 전투력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전투 기술도 미숙했을 뿐만 아니라 싸울 의지도 없었다. 6·25전쟁에 최초로 투입돼 오산에서 북한군에게 뜨거운 맛을 본 '스미스 부대'에는 소총을 조립할 줄 모르는 병사도 있었다.그래서 장교들은 '나를 따르라'며 최일선에 섰다. 1950년 7월 8일 천안에서 인민군을 막으려 고군분투했던 미 보병 34연대장 로버트 마틴 대령이 그랬다. 마틴 대령은 연대 작전 부사관과 함께 2.62인치 바주카포로 인민군 탱크를 공격했다. 이에 대한 페렌바크의 묘사는 이렇다. "연대장이 할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누군가는 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인민군 전차는 끄떡도 않았고 마틴 대령은 인민군 탱크의 포격에 두 동강 나버렸다.이런 지휘관 중에는 장군도 있었다. 대전에서 포로가 된 제24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이다. 그는 인민군에 밀려 예하 부대들이 후퇴하고 있었는데도 대전에 남아 있었다. 통신이 끊겨 상황 파악이 안 됐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민군의 전투 능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딘 소장은 인민군을 관찰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투에 나서 후퇴하지 않은 부하들을 이끌고 인민군 탱크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주카 포탄이 단 한 발뿐이었던 데다 이마저 빗나갔고 인민군 탱크는 유유히 지나갔다. 그러자 딘 소장은 자신의 45구경 권총으로 탄창이 빌 때까지 탱크를 쏴댔다. 이렇게 딘 소장의 지휘로 24사단이 버텨주는 바람에 월튼 워커 8군 사령관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정경두 국방부 장관의 거취가 도마 위에 올랐다. 야당의 해임 요구에 여당은 버티지만 여론은 이미 사퇴로 기울었다. 정 장관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사실 북한 목선 남하 사건 처리에서 자신은 빠진 채 부하들에게만 책임을 떠넘겼을 때 이미 국방부 장관으로서 권위는 사라져버렸다. 딘 소장과 마틴 대령 같은 군인이 그립다.

2019-07-18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야고부] 혁산의 교훈

나라를 지키는 군대나 인물을 이를 때 흔히 '간성'(干城)이라고 한다.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는 방패와 성이라는 뜻이다. 특히 군대는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최후의 보루다. 군이 외침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하거나 내부 기강이 무너져 제 구실을 못하면 나라가 위기에 처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어서다.19세기 중엽, 청나라와 영국 간의 아편전쟁은 간성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좋은 역사적 사례다. 1차 아편전쟁이 벌어진 1841년 여름, 청의 도광제는 위내(衛內)대신 혁산(奕山)을 정역장군에 임명해 영국군을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그에게 무려 7개 성의 대군을 주었고 지급한 군비만도 200만 냥에 달했다.하지만 기록대로 청군은 전패의 수모를 당했다. 싸움에서 지자 혁산은 영국과 몰래 협상해 광주성 요새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600만 냥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약속만 받아내고 사태를 무마한 것이다. 그런데 청 조정에서는 혁산을 위시해 554명을 공신으로 포상했다. 패장에게 포상이라니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혁산이 영국 기선을 공격해 침몰시키고는 함대를 불태웠다며 거짓 보고문을 조정에 보냈고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도광제와 청 조정이 그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큰 고통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아편전쟁의 한 단편이다.최근 우리 군이 연일 구설에 오르면서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최근 북한 목선에 경계망이 뚫린 삼척·고성 사건에다 해군 2함대사령부 초병의 기강 해이와 지휘관의 사건 조작이 겹치면서 군에 대한 실망감이 크다. 문제가 커지자 야당은 그제 정경두 국방부 장관의 해임 건의안을 냈다. 정 장관의 해임 건의는 올 들어 벌써 두 번째다.정경두 장관은 지난해 9월 제46대 국방부 장관에 취임했다. 그런데 갖가지 불미스러운 일과 말실수로 그동안 열 번을 사과했다. 장관이 한 달에 한 번꼴로 사과했다면 그는 간성이 아니라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인물이다. 여당이 해임건의안 표결을 막기 위해 국회 본회의 단축 등 꼼수를 부리고 있으나 그렇다고 떨어진 신뢰가 거꾸로 솟지는 않는다. 이쯤 되면 나라를 위해 스스로 거취를 정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서종철 논설위원 kyo425@imaeil.com

2019-07-17 06:30:00

이대현 논설위원

[야고부] '일본 때리기' 왜?

장면1. 2017년 9월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일 정상 업무 오찬에서 "미국은 우리의 동맹이지만 일본은 동맹이 아니다"고 했다. 일본이 요구하는 한·미·일 군사동맹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지만 면전에서 이 말을 들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어떤 마음을 먹었을지 짐작이 간다.장면2. 지난해 5월 일본 도쿄 총리공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오찬에서 문 대통령은 아베 총리로부터 한글로 '문재인 대통령 취임 1주년 축하드립니다'라고 적힌 케이크를 받았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이가 안 좋아 단것을 잘 못 먹는다"고 사양했고 한국 측 참모들이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문 대통령이 케이크를 먹지 않자 아베 총리와 참모들이 당황했다는 후문이다.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도화선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 배상 판결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노골화한 '일본 때리기'가 지금의 사태를 가져온 근본 원인이란 분석도 나온다. 왜 집권 세력은 일본 때리기에 혈안이 됐을까.포털사이트 댓글조작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드루킹'의 항소심 최후 진술에서 답을 유추할 수 있다. 드루킹은 "문 대통령 측근에게 일본과 대화를 재개해야 한다고 수차례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들은 일본이라는 말만 나오면 질색했다"며 "선악 이분법으로 일본과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또 "관제 민족주의로 온 정권이 똘똘 뭉쳐 반일 외치다 나라가 망국으로 가는 게 아닌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는 말도 했다. 선악 이분법에서 일본에 대한 집권 세력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관제 민족주의에서는 정권 실정에 대한 국민 비판 희석은 물론 내년 총선에 활용하려는 집권 세력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한·일 간 수출 규제 갈등이 확산하는 가운데 우리 정부 요청에도 미국이 중재에 나서지 않고 있다. 오랜 기간 경제 보복을 준비한 아베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사전에 의논했을 가능성이 크다. "형님! 한국을 손 좀 볼 테니 모른 척하고 계세요"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의 경제 보복은 한국이 고립무원(孤立無援) 신세임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북한처럼 '우리 민족끼리'로 가려는 집권 세력의 행태 탓에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

2019-07-16 06:30:00

박병선 논설위원

[야고부]  군(軍)에 대한 단상

한국 남자들은 대부분 군대 경험이 있다. 군 복무는 전체 인생에서 보면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지만, 그때 습득한 습관·버릇은 평생을 따라다닌다.필자는 밥을 빨리 먹는 습관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채 절반도 먹지 않았는데, 벌써 숟가락을 식탁에 놓는 경우가 많다. 훈련소 시절 빠른 시간 내에 식사를 하지 않으면 더는 못 먹게 했기에 그때의 습관이 몸에 배어버렸다.또 다른 습관은 집사람이 깨울 때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벌떡 일어나면서 눈을 뜬다. 보초 교대 때나 기상 시간에 맞춰 후다닥 일어나는 습관이 무의식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인지, 생활 속 긴장감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고칠 수 없는 습관이 됐다.군대에서 얻은 지울수 없는 흔적이 몸에도 남아 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바로 무좀이다. 당시에는 소대원 중 막내가 양말을 공동 관리했다. 피곤하고 잠 부족한 막내가 양말을 제대로 빨 리 없으니 불결하고 비위생적이었다. 큰 대야에 양말 수십 켤레를 넣고 세제를 풀어 대충 흔들고 털어 끝내는 식이었다. 소대원 전체가 무좀을 달고 살았고, 제대 후에도 한참을 고생했다.당시 군대는 전체적으로 폭력적·강압적·비이성적이었지만, 현재 군대와 차별적인 것은 상급자의 자세였다. '고참 중에 고문관(꼴통 병사)이 없다'는 말이 있듯, 하급자를 부리고 갈구려면 상급자가 모범을 보여야 했다. 평소에는 으스대고 탐욕스러운 상급자였지만, 문제가 생기면 앞장서 해결하고 책임지는 분위기였다. 군대 특유의 계급 문화, 체면 문화는 상급자의 솔선수범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았다.30년이 지난 옛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요즘 군 지휘부의 책임 회피가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북한 목선 사건에는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이 사건 은폐에 책임이 있으면서 예하 부대만 처벌했고 해군 2함대는 책임 추궁이 두려워 사병을 허위 자수시켰다. 지휘자가 책임지지 않는 군대는 오합지졸이다. '나는 양 한 마리가 지휘하는 사자 백 마리의 군대보다 사자 한 마리가 지휘하는 양 백 마리의 군대를 더 두려워 한다.'(탈레랑 페리고르) 현재 군 지휘부에 국가 안보를 맡겨두고 안심할 수 있는 국민이 있을까.

2019-07-15 06:30:00

박병선 논설위원

[야고부] 일본 맥주의 퇴장

20여 년 전만 해도 주당들은 한국 맥주를 마시면서 '말 오줌 같다'고 투덜댔다. 물을 많이 섞은 듯 싱겁고 밍밍한 맛이 난다는 불평이었다. '말 오줌'은 영어 'horse piss'에서 나왔는데, 맛없는 싸구려 맥주를 뜻하는 속어다. 어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제 말 오줌 맛이 이럴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주당들은 한국 맥주를 '폭탄주 전용'이라고들 한다. 미국 유학생들이 폭탄주를 마시면 멀리 있는 한국 상점을 찾아 비싼 한국 맥주를 산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미국 맥주로 폭탄주를 만들면 강한 맥주 맛 때문에 폭탄주 본래의 맛이 구현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아마 외국 생활을 하면서 '익숙하고 정겨운 맛'을 찾으려는 욕구 때문에 나온 얘기일 것이다. 어쨌든 주당들은 지금도 폭탄주를 제조할 때는 한국 맥주를 쓰지, 수입 맥주는 절대 사절이다.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2013년 "한국 요리는 맛있지만, 한국 맥주는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고 했고, 일부 언론은 2015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국 맥주는 정말 맛없다. 맥주는 확실히 우리 것이 더 맛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했다. 한국 맥주는 이래저래 혹평을 받고 있지만,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TV·신문 등에서 진행하는 테스트에는 한국 맥주는 외국 맥주에 비해 맛과 향, 색, 목 넘김에서 그리 손색이 없다. 한국 맥주 회사들은 맛 못지않게 브랜드 이미지를 중시하는 소비 패턴 때문에 한국 맥주가 저평가돼 있다고 해명한다.이런 소비 패턴 때문인지 편의점·슈퍼마켓에서는 지난해부터 수입 맥주 판매가 한국 맥주를 앞질렀다. 수입 맥주 중 아사히 맥주가 부동의 1위를, 기린, 삿포로는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일본 맥주가 강세다. 일본 맥주의 인기는 한국 맥주와 맛은 비슷하지만, 좀 더 농도가 강한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아베 정부의 수입 규제에 맞서 편의점·슈퍼마켓 등에서 일본 맥주를 팔지 않는 곳이 늘고 있다. 매출도 소폭 줄었다. 맥주 불매로 '반일'이 될까 의심스럽긴 하지만, 대세가 그렇다면 안 마실 수밖에.

2019-07-13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야고부] 대구부산, 본디 이랬지

대구(경북)와 부산(경남)은 본디 경상도의 한 울타리였다. 1392년 조선이 들어서고 경계가 정해지고 그렇게 482년(1413~1895)을 같은 공간에서 부대꼈다. 그래선지 민족이 가장 힘들던 약 35년간의 일제강점기 즈음 역사에 길이 빛날 의기투합의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482년의 세월보다 35년의 짧은 시기 벌인 경상도 사람의 값진 활동이 지금껏 조명되는 까닭이다.먼저, 부산이 구상하고 대구가 전국으로 불을 댕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다. 특히 일제에 맞서는 만큼 보안이 생명인 비밀결사 내 경상도 사람의 활동은 더욱 돋보인다. 1909년 대동청년단(서울), 1913년 대한광복단(경북 풍기),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대구), 1919년 의열단(중국)에 이르기까지 경상도 사람은 지휘자로서, 대원으로서 활약이 뚜렷했다.경상도 사람은 나라 찾는 일이라면 사상과 이념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개방성을 보였다. 이는 경상도의 진보성(손호철 서강대 교수)으로 나타났고, 광복 이후 해방 정국에서도 이런 높은 진보 지표는 이어졌다. 이 같은 유산은 뒷날 독재 정권에 맞서는 2·28 대구 학생민주화운동과 부산경남의 민주화 활동과도 맥이 닿는다. 한 울타리 경상도 사람의 의로운 발자취이다.1895년 이후 한 울타리를 벗고 경북(대구)과 경남(부산)으로 나뉜 경상도는 이제 대구경북과 부산·울산·경남(부울경)의 5개 시·도로 갈렸다. 분가에다 지방자치제로 경상도는 지금 어느 때보다 힘든 날들이다. 부산의 지도자가 앞서고 이웃 울산과 경남이 가세, 5개 시·도지사의 합의를 무시하고 국가 정책을 뒤집고, 반대하는 국토교통부까지 압박해 항복을 받아내는 부산 가덕도 신공항의 막무가내 재추진 탓이다.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전국 시·도당 위원장들이 지난 9일 모였을 때 대구경북 시·도당 위원장들이 어려운 지역 사정을 꺼내며 부울경의 행동 자제를 호소하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제라도 부울경은 자신들 이익만 앞세우지 말고 큰 틀에서 경상도는 물론, 나라 남부지역을 고루 배려하는 마음을 보여야 한다. 본디 울타리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때' 그랬던 흔적만이라도 되새기면 해법은 그리 멀리 있지만은 않을 듯하다.

2019-07-12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야고부] 착한 고무신

1960년대, 대구와 같은 대도시에도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간 아이들 시선은 온통 운동화에 쏠렸지만 막상 아이의 발을 차지한 것은 열에 예닐곱이 검정 고무신이거나 조금 더 깔끔해 보이는 흰 고무신이었다. 여름철, 고무신을 벗어 들고 학교 복도에 발을 내디디면서 햇볕에 그을린 발등과 묘한 대조를 이루던 발가락을 물끄러미 지켜본 기억이 생생하다.이런 결핍의 기억은 이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유년기의 맨발이 맞닥뜨렸던 따가운 햇볕과 땀으로 미끌거리던 발의 감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값싸고 질기며 간편했고, 때로는 반으로 접어 끼운 모래판의 장난감이 되기도 했던 고무신은 1960, 70년대라는 시대를 되짚어보는 기억의 연결고리라는 점에서 삶의 소중한 한 대목이다.요즘은 우리 주변에서 고무신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공장에서는 고무신을 만들어내고 수요가 있기는 하지만 도시에서 고무신을 구경하기는 힘들다. 이따금 여행 중 찾는 사찰의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흰 고무신 정도가 전부다.이런 고무신이 맨발의 아이들을 찾아 해외로 나간다는 보도다. 대구의 한 사회복지법인이 최근 고무신 1천여 켤레와 교육용품을 동티모르에 실어 보냈다는 뉴스다. 고무신만 덜렁 보낸 게 아니라 초중고 학생들이 직접 손으로 울긋불긋하게 장식한 고무신을 멀리 동남아 섬나라의 산골마을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착한 고무신'이다.이는 맨발로 2~4시간 험한 산길을 걸어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돕자는 캠페인의 결과다. 비록 한 켤레의 고무신에 불과하지만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과 정성이 담겼다는 점에서 소중한 우호의 선물인 동시에 대구와 동티모르를 연결하고 정서적 교감을 가능하게 하는 접점 중 하나다.고무신을 계기로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현지에 초등학교를 짓고 교육개발사업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맨발로 커피콩을 줍는 아이들에게 고무신은 내일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이라는 점에서 간단하면서도 결코 간단하지 않다. '내일을 위한 신발'이라는 뜻을 가진 블레이크 마이코스키의 탐스(TOMS) 스토리와 착한 고무신은 좋은 짝이다.

2019-07-11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야고부] 표류

조선 성종 때 깜짝 놀랄만한 표류 사건이 일어났다. 도망간 노비를 찾아 체포하는 추쇄경차관으로 제주도에 부임했던 최부(崔溥)라는 관원이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자 배를 타고 급히 육지로 향하다 풍랑을 만나면서 중국 저장성(浙江省) 연안까지 표류한 것이다. 수십 명의 일행과 함께 14일간이나 해류에 몸을 맡긴 채 천신만고 끝에 상륙한 곳이 중국 닝보(寧波) 해안이었다.해적을 만나고 왜구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관직을 가진 조선의 선비임을 당당히 밝힌 그는 기어이 명나라 관원의 호송을 받게 되었다. 사오싱(紹興), 항저우(杭州), 양저우(揚州) 등 연안과 내륙의 주요 도시를 지나 베이징(北京)에 도착해 황제까지 만났다. 조선인이 중국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를 두루 여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산해관과 요동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6개월 만에 한양으로 돌아왔는데, 그 기나긴 여정의 기록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이다.1987년 정초를 떠들썩하게 했던 북한 김만철 씨 일가의 탈북 사건도 목숨을 건 표류를 통해 이루어졌다. 북한의 청진의과대학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그가 처가 식구까지 포함한 일가 11명을 50t급 청진호에 태우고 북한을 탈출해 일본과 대만을 거쳐 25일 만에 남한으로 귀순한 사건이다. 청진항을 출발한 다음 날 엔진 고장으로 표류하다가 닷새 만에 도착한 곳이 일본 후쿠이(福井) 외항이었다.김만철 일가는 불법 입국 경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따뜻한 남쪽 나라'를 귀착지로 밝혀 은연중 한국행 의사를 표명했으나, 문제가 복잡해졌다. 우리 정부가 공식 인도 요청을 했지만, 일본 조총련의 협박과 북한의 송환 요구에 입장이 곤란해진 일본 정부가 공해상 추방 방침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제3국인 대만을 경유해 남한에 도착하게 되었다.북한 목선 삼척항 입항 사건을 두고 정부가 합동 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왼고개를 치는 국민이 숱하다. 애초에 북한 목선이 '표류'한 것처럼 브리핑한 것부터가 의문이다. 그리고 '삼척항 인근'이라고 한 표현과 '깨끗한 오징어 배'의 모습, '칼주름 인민복' 등 납득할 수 없는 의문점이 적잖다. 정부의 오락가락 대응에 이제는 민심이 표류할 판이다.

2019-07-10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야고부] 싸구려 민족주의

2차 대전 종전 후 나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약 10만 명으로 추산됐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는 '자신이 홀로코스트 생존자'라고 밝힌 이가 100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독일 정부가 책정한 600억달러의 배상금을 겨냥해 '뻥튀기'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아들인 노르만 핀켈슈타인이 저서 '홀로코스트 산업'에서 제기한 주장이다.유대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독일에 추가 배상을 압박했다. 대표적인 것이 '50년간 빈곤한 홀로코스트 희생자'라는 카드다. 나치 치하에서 강제 노동을 한 유대인 생존자들이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논리다. 유대인 단체는 그런 생존자가 25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신빙성이 의심스러웠지만 독일 정부는 요구를 들어줬다. 하지만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1904년부터 4년간 7만5천 명을 학살한 범죄에 대해서는 전혀 달랐다. 100년 넘게 침묵하다 2016년에야 사과를 했고, 1990년부터 나미비아에 상당한 공적 원조를 해왔다는 점을 들어 경제적 배상도 거부하고 있다.그 이유는 간단하다. 유대인은 여론을 움직일 힘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서구 특히 미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유대인은 미국 인구의 2%에 불과하지만, 대학교수의 20%, 주요 로펌 변호사의 50%, 영화산업 관계자의 50%를 차지하며 주요 미디어도 상당수가 유대인 소유다. 할리우드에서 '쉰들러 리스트'처럼 유대인 학살을 조명한 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지지만, 나치의 유럽 집시 학살을 다룬 영화는 없는 이유다. 독일이 유대인들의 뻥튀기 배상 요구에 굴복한 것은 바로 이런 힘 때문이었다. 나미비아인은 이런 힘이 없다. 슬프지만 우리도 마찬가지다.일본의 수출 규제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국내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일본 연예인을 퇴출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는가 하면 급기야 여당 의원 입에서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싸구려 민족주의'일 뿐이다. 이런다고 움찔할 일본이 아니다. 이젠 이런 싸구려 민족주의는 버리고 일본을 움직일 힘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

2019-07-09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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