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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습니다] 김서진 씨 부친 故 김국석 씨

[그립습니다] 김서진 씨 부친 故 김국석 씨

아버지는 2014년 음력 2월 돌아가셨다. 경북 봉화가 고향인 우리 아버지는 대구농고에서 규율부장을 하시고 해병대 1기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평생을 살아오신 멋진 분이다. 농협에서 장기간 근무하신 아버지는 항상 완벽주의자였다.어느 어린이날 아침 아버지 생각이 문득 났다. 아버지는 어느 것 하나 삐뚤어지지 않고 반듯하고 정갈하게 사는 그런 분이셨다. 보통의 잣대보다 엄격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늘 당신 스스로가 버거운 삶을 살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세월이 지나 헤아려졌다. 아버지는 한겨울 맹추위에도 아침에 눈 뜨면 가장 먼저 창문을 여셨다. 우리 5남매 형제자매들이 한참 꿈나라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온 집안 방문과 창문을 활짝 여셨다.추위에 이불 속에서 옹송그리면 이불을 가차 없이 확 거둬버리셨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옷을 입어야 했다. 이윽고 아버지는 방마다 있는 이불을 탁탁 털고서 4각이 정확히 맞물리게 접어 개켜서 장롱 안에 넣으셨다. 유년기부터 뵌 모습이니 아침 이부자리는 남자가 하는 일로 알았다.나는 아직도 침대를 쓰지 않는다. 우리 남매도 침대 없이 키웠다. 잠자리가 공개되는 게 싫었고 아침마다 창문 활짝 열고 이불을 탈탈 털어 반듯하게 개켜서 장롱에 차곡차곡 넣는 것을 가르쳤다. 내 아버지의 가르침이 그대로 문화가 된 셈이다. 아... 문득, 그리운 우리 아버지.아버지는 "밤새 안녕하십니까~ 하고 잠자다 눈감아야 하는데. . 그게 내 소원이다"라며 말씀하셨다. 병석에 누워 자식들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며 늘 노래하셨다. 평소 건강하고 정갈하시며 식사도 잘하셨다.하루는 아침밥 맛나게 드셨는데 속이 불편하다며 세 끼 식사를 거르시고 힘없어하셔서 영양제 링거를 맞고 기운 차리시라고 다음날 오후 대학병원 응급실로 모셨다. 응급실에서 왜 속이 불편하신지? 검사 중에 담낭의 담관이 막혀 레이저 시술로 담관을 막은 돌을 깨트려야 한다며 일주일 동안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입원 절차를 밟으며 면도기 챙겨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집으로 모시고, 그날 저녁 8시 담석 제거 시술을 받으셨다.담석이 제법 커서 레이저로 깨트려 시술했으나, 부분은 깨트리고 부분은 남았고 일단 담즙이 막히지 않게 처치를 했다고 했다. 시술 후 응급실로 내려와 병실 입실 처리 중 큰 여동생과 농담도 하고 기분이 좋으셨다는데 갑자기 의식을 잃고 손발을 떨어트리셨다. 10여 명 의료진이 모여 전기충격과 심폐소생을 실시하고 있다는 동생의 흐느끼는 전화에 시아버님 제사상을 차리던 중 서둘러 아버지에게 달려갔다.그렇게 심장 박동은 되돌아 왔지만, 의식을 잃은 채 산소호흡기, 승압제, 알부민 투여 등 갖은 시도를 했다. 결국 아버지는 깨어나지 못하셨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떠난 뒤 치아 때문에 불편해하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치아와 잇몸 때문인지... 다른 문제가 있는지... 참으로 이상하다. 아프다. 많이 아프다. 월·수·금요일 밖으로 나가는 날 말고는 이렇게 끙끙 앓기가 여러 날 되었다.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시골의 한옥집도 한동안 방치됐었다. 아버지의 삶을 느끼기위해 거미줄을 걷어내고 창호지를 바르고 방바닥도 보수하고 주인 잃은 찻상과 찻잔도 돌보니 집안 곳곳이 기지개를 켠다. 아버지 살아계실 땐 손님처럼 찾아들어 군불지펴 놓은 따끈한 한옥집에서 편안하게 숙면을 할 수 있었다. 딸내미 온다 하면 며칠 전부터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어 따끈따끈 챙겨주셨다.정작 지난 겨울 딸아이 내외가 왔을 때 방을 데우지 못했으니 안채에서 자래도 군불 때보고 싶다며 온돌방에 묵더니 바닥이 타고 요이불까지 태웠다. 처음에는 따뜻하더니 새벽에 점점 더 뜨거워지더란다. 아파트 삶이니.. 참나무 장작의 위력과 온돌방 생리를 모를 수밖에. 사실 나도 모른다. 단 하루도 아궁이를 지펴본 적 없고 그저 아버지 손길로 따스한 방에서 잠을 잤을 뿐이다.아버지가 때때로 그립다. 눈물이 나기도 한다.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남동생 태현이는 오늘 부산에서 여기로 온다고 하니. 제가 겨우내 다독인 이곳 소나무밭 일, 함께 할께요. 엄마 건강하시고 동생들 넷 모두 무탈하니 늘 지켜 봐주시어요. 특히 넷째를 위한 기도! 많이 해주시어요. 시골 방산미 집 곳곳에서 아버지 향기를 느낍니다. 사랑해요. 참 고맙습니다.

2020-11-26 13:44:06

[그립습니다] 김형일 씨 부모 故 김중현·한영옥 씨

[그립습니다] 김형일 씨 부모 故 김중현·한영옥 씨

나는 짠돌이로 살았지만, 짠돌이로 살고 싶어서 산 것이 아니다. 쓸 돈이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짠돌이로 살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가 짠순이였기에 그렇게 배운 것이다.​ 나의 오른쪽 손가락은 한 마디가 없다. 손가락이 절단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의 일로 부모의 일을 도와주던 중 작두에 사고를 당했다. 안타깝게도 치료비가 없어 수술을 못 했다.지금도 잘린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불현듯 어머니가 떠오른다. 수십 년 동안 아들의 손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무너졌을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어머니는 그렇게 평생을 자신의 무능을 원망하며 살았을지 모른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필자는 더욱 열심히 돈을 벌고자 노력해왔고, 부동산 투자를 시작한 후에는 아예 출장 의료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을 만큼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비록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손가락이 잘렸지만, 역설적이게도 잘린 손가락 덕분에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손이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필자에게 수십 억 원의 돈을 벌게 해준 근거이자 이유인 사라진 오른손 검지가 더없이 고마울 따름이다.나는 5년 전부터 나의 전 재산을 1억 걸고 서울로 돌아다녔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오는 차비도 아까워하는 나였다. 그러나 그 처절한 희망의 끈을 가지고 용기를 낸 것이다. 서울과 인천 등을 돌아 다닐때 기차비가 아까워 버스를 타고 숙식비가 아까워 1주일 내내 찜질방을 전전하며 돌아다녔다.당시에는 3천만 원이 넘어가는 투자처는 생각치도 못 했다. 지나고 나면 5천만 원이 넘는 투자처가 너무나 좋았던 곳들이 많은데 당시는 5천만 원이면 나의 전 재산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엄두도 못 냈다. 1주일을 돌아다니고 나면 입술에 물집이 생기고 불어 터졌다. 나의 전 재산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로 잠을 못 잔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내가 이렇게 처절하게 일한 이유는 아이들에게 그 가난을 물려주기 싫었기 때문이다.오래전 어버이날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시를 아버지에게 바치고 싶다.'어버이날'아버지가 숨겨놓던 깡소주푸짐한 안주를 보면 눈물돌아가시기 몇일전 아버지영양제 한 번 맞아야 하는데그 말이 귓가에 맴돈다.어머니가 숨겨놓은 홍시잘 익은 홍시를 보면 눈물돌아가시기 전 며칠 전 어머니병원에서 있지 말고 집에 가그 말이 귓가에 맴돈다.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좀 재산이 많았으면 이렇게 허망하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 병환으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급성폐렴으로 돌아 가셨고, 어머니도 큰 수술을 하셨으면 오래 사셨을 거 같은데 라는 아쉬움이 항상 남는다. 아버지는 우리 부부가 결혼한다고 좋아하며 청첩장을 손수 우편 발송한다고 적어 놓으시고 결혼식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집을 뒤적이다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 봉투엔 아버지의 글씨가 고스란히 남겨 있어 더욱 보고 싶어진다.가끔 카네이션을 보면 부모님이 생각나 울기도 한다. 퇴근길 회사 앞을 나서는데 카네이션을 하나하나 만들어 팔려고 늘어놓은 카네이션 바구니를 바라보다 눈물이 났다. 오래전 동생과 서로 누가 사오냐하며 미루던 때, 조금이라도 이쁘고 푸짐한 카네이션을 고르려던 때, 용돈을 얼마나 드릴까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 나이가 들다보니 어버이날 아침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어오면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난다.2010년 식목일에는 나무 10그루를 묘소에 심기도 했다. 모친은 보라색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보라색만 보면 어머니를 만나는 기분이다. 어머니를 모신다는 마음으로 보라색 잔디를 한 번 묘소 주위에 심어보리라 다짐하기도 했다.오늘따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더욱 그립습니다.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부모님을 사랑하는 아들(김형일) 올림.

2020-11-22 14:52:33

[그립습니다] 최원대 씨 母 김두남 씨

[그립습니다] 최원대 씨 母 김두남 씨

어젯밤 꿈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다. 유년 시절 제 기억에는 어머니는 여장부이셨다. 결혼 후 서울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해 4남매를 낳으시고 키우셨다. 과묵하셨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무척 사교적이셨고 성격 또한 호탕하면서 리더쉽도 있으셨다. 4남매 중 둘째로 외아들이었던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잘나가는 서울깍쟁이 자모들 속에서 당당히 자모회장으로 선출돼 치맛바람을 주도하셨다.덕분에 키가 작았던 나였지만 초등학교 3학년까지 반장도 해보고 선생님들의 총애도 한 몸에 받았다. 당시 어머니는 음식 솜씨는 물론 패션 감각까지 남달라 아래 위 새하얀 모시 한복을 입고 올빽 머리에 진한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교무실에 나타날 때면 선생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셨다. 봄가을 학교에서 소풍이라도 가는 날이면 평소 요리학원에서 배운 솜씨로 선생님들의 도시락도 함께 준비해 모두의 입을 즐겁게 하곤 하셨다.제가 중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잇따라 실패하자, 어렵게 중학교를 마친 나는 결국 부모님을 따라 낙향하는 처지가 되었다. 대구로 내려온 식구들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이때도 어머니는 사교성과 음식솜씨를 발휘해 근처 공장에 다니는 타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숙집을 시작해 어려운 집안 살림을 이끌어 나가셨다.중학교 졸업 후 1년 넘게 고등학교 진학을 못 하고 하숙생이 다니는 공장에서 일을 배우고 있던 나에게, 어머니는 남자가 최하 고등학교는 나와야 깨끗한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서, 외갓집에 부탁해 나를 지역에 있는 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편입시키셨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이제부터 학비는 스스로 벌어서 학교를 졸업하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나는 어머니의 당부대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 가면서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그 당시 온실 속에서만 컸던 나는 미성년임에도 힘든 사회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딸 셋에 아들 하나로 당시만 해도 남자가 귀한 집안이였지만 나의 어머니는 아들 편애는 고사하고 오히려 누이와 싸울 때면 이유를 불문하고 언제나 나에게 먼저 회초리를 대셨다. "하나 아들 효자 없다 카더라" 라는 말씀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 기억이 난다.이러한 유년기를 보낸 나였기에 일찍이 닥친 시련이었음에도 능히 극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학비는 못 주니 이제부터는 알아서 하라고 하셨던 어머니의 그때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아프셨을까, 이제 와 다시 생각해도 나의 강한 자립심은 부유했던 유년기의 편애 없는 사랑과, 큰 시련이 왔던 청소년기에 어머니가 내게 보여주셨던 강인함 때문이다.그 후 세월이 흘러 고생했던 아들이 남부럽지 않은 직장인이 되고 결혼해 손자들까지 생기자, 아들이 자랑스러웠던 어머니는 친척이나 지인들을 만나기만 하면 아들 자랑하는 것이 일상이 되다시피 하셨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민망한 마음에 어머니에게 다시는 남들 앞에서 아들 자랑 그만하시라고 화를 내었다. 그랬던 어머니께서 연로해지시면서 돌아가시기 2년 전쯤에 치매와 파킨슨병이 동시에 찾아왔다.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아내가 줄곧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어머니가 병이 드신 후에도 며느리의 말은 잘 들으셨다. 하지만 병이 깊어지고 증세가 심해지면서 말없이 외출하시는 횟수가 많아졌고, 길을 잃으시고 넘어져서 다치는 일이 반복되자 결국 아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내가 우겨서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병원에 입원하던 날, 집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 어머니를 달래고 억지로 떼어놓고 돌아서 나오는데 가슴이 먹먹해지고 호흡마저 가빠졌다. 누구나 그렇듯이 돌아가신 뒤에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들이 어쩔 수 없이 지금도 한 번씩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곤 한다.남들 앞에서 아들자랑 좀 하면 어때서, 살을 좀 붙여서 자랑 좀 하면 어때서, 그걸 못 참고 어머니에게 화를 냈었던 일, 병원에 찾아가면 어쩌다 정신이 돌아와 집에 가고 싶다고 병실 침대에서 나를 올려다보셨던 일,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가 보지 못했던 일, 앞으로 욕창이 생길 수 있으니 욕창 예방 매트리스를 준비해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던 일, 위독하시다는 병원 전화에 급히 달려갔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아가셔서 임종도 지키지 못했던 일까지 가슴에 사무친다. 올해로 돌아가신 지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머니, 오늘따라 당신이 그립습니다.

2020-11-19 13:16:09

[그립습니다] 장남희 씨 모친 故 김미선 씨

[그립습니다] 장남희 씨 모친 故 김미선 씨

어머니가 보고픈 날. 어머니 냄새가 그리워 지는 날. 서늘한 가을이 되면 사무치게 어머니가 보고 싶어집니다. 덩그라니 자식을 기다리시던 그 모습은 집터 뒷밭 호박구덩이에 참하게 영근 누런 호박처럼 이파리 바삭거려 부서질 듯한 모습으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내어보고 계시던 어머니. 가을은 그리움 만으로도 가슴저리게 되는 계절입니다.평생을 남을 먼저 배려하시는 삶을 실천 하셨지요. 그 삶을 손해 보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딸의 식견에서는 언제나 답답하고 화가 났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길 가던 걸인조차 그냥 보내지 않으시고 어려운 시절 끼니를 거른 가난한 이들을 물어서도 대문을 두드려 도움을 전하셨다고...주변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물론, 서릿발 시어른의 나무람도 많이 들으셨다고 하시더군요.모두 넉넉지 않던 살림살이에 퍼주는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기도 하셨겠지요. 베푸는 어진 심성은 종내 서방의 작은 각시에게까지도 그러하셨습니다. '저렇게 난리를 쳐도 세상천지 불쌍한 사람이다. 살아가기 각박해서 저러는 것이니 너희들은 원망하는 마음과 모질고 악한 마음을 가지지 말거라. 저하고 내가 모진 인연으로 만난 것 뿐이니 너희들이 관여할 것은 아니다'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에 어디 베풀 데가 없어서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그 여인이 우리 모녀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데 그로 인해 얼마나 서럽게 아팠는데, 어머니는 알고 그러시는지 원망의 마음도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내어 주기만 하시느냐고 무슨 이유로 바보처럼 사시느냐고 참 많이도 대들어 묻고 속상해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든 것이 모두 다 우리를 위해서라고 하셨지요.모질고 엉킨 인연은 자식들에게 이어지지 말고 힘든 모든 것은 어머니께서 이승에서 풀어가실 거라 그러셨습니다. 오로지 자식만을 위한 지극한 마음, 미움도 원망도 초월한 자신을 내려놓은 下心(하심·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 그 어려운 것을 어머니께서는 실천 하신 건데 메마르고 부족한 저는 항상 힘들어 했습니다.오히려 어머니의 삶을 바보 같다고 푸념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넉넉하시고 편안하셨습니다. 모진 병마가 닥칠 때 까지는 말입니다. 어머니는 제게 그리움이고 아픔입니다. 병환으로 고생하시고 시간이 흘러 영원한 이별이 다가왔을 때, 장례절차가 진행되면 남겨진 것 없이 너무나 빨리 떠나시게 된다는 걸 알아채고 몰래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잘라 두었습니다.그때 남겨진 머리카락은 오늘처럼 사무치게 그리울때 코를 묻고 냄새도 맡아보고 혹 부서질세라 고이 만져 보기도 합니다. 돌아가신 분의 흔적은 남기지 않는다고 저의 이러한 행동을 크나큰 불효라고 하지만 저는 아직도 고집하며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리움이 다하는 날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이러할 듯 합니다.김미선 여사님!!!저는 어머니께서 제 어머니라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지금껏 인간 구실하고 살아왔으니 제발 다음 생에는 저의 딸로 나셔서 은혜를 보답하는 윤회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 합니다. 평생 잿빛 먹빛의 옷차림이셨던 어머니께 고운 옷 지어 입혀드리고 눈물 많았던 세상에 단단한 바람막이 되어 어머니를 지켜 드리고 싶습니다.지적하지 않으시고도 모두를 부드럽게 바른길로 가르치시는 성정과 고우신 모습. 어머니는 그러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늘 기억하겠습니다.오늘같이 그리움이 속삭이며 다가오는 날은 저도 모르게 어느새 먹먹함으로 속절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얼마나 더 그리워해야 되나요. 이런 마음은 얼마나 지나야 사그라 드는 것입니까. 죽음은 진정한 죽음은 잊혀 지는 것이라 하더군요. 어머니께서는 저의 기억으로 살아계십니다. 맺히는 눈물은 어머니를 기리는 효심으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사랑합니다.눈가에 흐르는 그리운 눈물 꽃을 어머니의 영전에 존경과 사랑과 함께 올립니다.엄마 김미선 여사를 그리며 딸(장남희) 올림.

2020-11-05 14:30:00

[그립습니다] 정재진 씨 모친 故 정복연 씨

[그립습니다] 정재진 씨 모친 故 정복연 씨

거참. 밤이 점점 깊어간다. 오랜만에 붓을 들고 글 두어 장 써 놓고 정신 나간 듯 리클라이너에 누워 음악을 듣다가 불현듯 생각나는 엄마 생각에 나는 책상머리에 앉았다.따스한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가을날 오후. 아버지와 나는 논에서 나락을 벤다. 이곳은 늘 물이 빠지지 않는 고래 논으로 크기는 두말반마지기(약 500평)정도였다. 반듯한 들판의 번답은 꿈도 못 꾸는 우리 집은 이나마 고래 논도 감지덕지다. 만일 이 논마저 없었더라면 식구들의 밥은 어찌 감당하겠는가. 좁다란 논은 세워 두면 하늘을 찌른다는 말처럼 길쭉하게 생긴 데다 물이 잘 빠지지 않았다. 물을 빼보려 해도 언제나 그대로인 그런 곳이었다.사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 논의 물을 빼려고 일하실 때마다 화를 내셨다. 아마도 당신의 힘에 부치신 것 같다. 물이 그득한 볏짚을 옮겨 널어놓는 것도 참 힘들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힘겨운 일을 하다 허리춤을 펼 때면 어느새 자그마한 체구에 어울리지도 않는 커다란 백철 대야를 머리에 이고 좁은 논두렁 길을 걸어오시는 어머니가 보이면, 힘들어하던 우리 부자의 눈에는 반가움이 넘쳐난다.그랬다. 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존재 그 자체로 기쁨이었고 행복이었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어머니. 동그란 얼굴에 한평생 한복을 입으셨던 우리 어머니는 녹전 댁 이다. 그분의 성함은 정복연씨다. 가장골 평천댁 열한 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이다.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외할아버지 또한 키가 작으셨다. 아마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닮으신 모양이다.​멀찍이 어머니가 보일 때부터 나는 벌써 논두렁길을 달려간다. 그리고 키 작은 어머니의 머리에 얹혀 있던 가을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백철 대야를 받아 안고 위태로운 논두렁 길을 달려, 우리 세 식구는 둑에 앉아 맛있는 새참을 먹는다. 사실 새참이라야 별것은 없다. 술 한 주전자. 하지만 술을 잡숫지 못하시는 아버지에게는 소용없는 음식이다.아버지 몫은 삶은 감자 정도. 그때 먹었던 밀가루로 빚은 막걸리의 맛은 천국의 맛이었음을 다 늦은 지금에야 나는 깨닫는다. 그날의 어머니는 그저 아들이 먹는 것을 황홀한 듯 쳐다보셨음을 나는 기억한다. 제법 자란 아들이 아버지와 일을 하는 것을 흐뭇해 하시면서도 간혹 '우리 재진이가 이래(이렇게)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되는데'하시면 걱정스러운 눈길을 주시던 것도 기억난다.지난 7월 어머니 제삿날쯤에는 연일 비가 내렸다. 어머니는 나의 품속에서 세 시간 만에 저 먼 곳으로 떠나가셨다. 그날도 참 비가 많이 내려 더욱 생각난다. 언제나 그렇지만 어머니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자식에게 있어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의 존재란 평생을 두고 그리워하며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다.또 나의 존재를 알아주고 격려해 주신 분이다. 다들 그렇겠지만, 유난히 어머니를 따랐던 나에겐 그의 존재는 천하 그 자체였다. 어머니가 기뻐하면 천하가 기뻐 웃었고, 어머니가 슬퍼하면 천하가 울었으니 말이다. 그 어른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못할 것은 없었다. 나의 보잘것 없는 나무지게를 맞이하시면서 '우리 아들이 온 산을 짊어지고 오네'라고 하시며 얼굴 가득 인자한 웃음을 가득 지으시던 그리운 어머니. 그 어머니가 계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위대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메마른 눈에서는 이슬이 맺히고, 사무치는 그리움에 가슴이 멘다.어머니는 지난밤처럼 보름달이 떠오르면 맑디맑은 정한 수 한 그릇을 소반 위에 놓으시고 우리 형제의 안위와 집안의 화평을 기원하셨다.​ 그랬다. 세상에 다시 없는 우리 어머니였었다. 자식을 위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마다치 않으신 그 깊고 넓은 애정을 어디에다 비견할 수 있을까.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보름달이 떠 오르는 날이 보름이다. 오늘 아침 보름나물로 나온 피마자 나물을 보면서 문득 어머니를 떠올렸다.이런 어머니가 ​한 없이 그립다. 그리고 사무치게 보고 싶다. 하지만 죽음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아무리 그리워도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만든다.어머니(정복연)를 그리워 하는 아들(정재진) 올림.

2020-11-01 14:27:55

[그립습니다] 이준범(JB농막 대표) 씨 부친 이윤호 씨

[그립습니다] 이준범(JB농막 대표) 씨 부친 이윤호 씨

2018년 아버지가 떠난 그 한 해는 유난히 길게 느껴지고 가슴 시린 아픔이 많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건 이별인 것 같다. 연인과 헤어짐도 가슴이 아프겠지만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을 겪어보니 이보다 더 아픈 이별은 없는 것 같다.2018년 1월 초 아버지는 감기 증상이 보이셔서 병원 진료를 받던 중 폐렴 진단을 받으셨다. 아버지는 종합병원에 입원하셔서 치료를 받으시다 소생의 희망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셨다.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공포감과 슬픔이 밀려오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슬픈 이별을 준비하며 가족들을 부르고 임종을 준비했다. 한 번의 고비를 넘기셨지만 끝내 이별했다.안타깝게도 우리 아버지는 행복하고 즐거움보다는 병고를 많이 겪으셨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오직 자식 잘되기만을 기대하며 정신력 하나로 살아오신 분이다. 다섯 자식은 그 은혜에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고 이렇게 허망하게 보냈으니 이제는 가슴만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상에 많은 슬픔이 있겠지만 가족을 잃는 슬픔에 비길 수가 있을까? 아버지와의 이별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분향소가 꾸며지고 가족과 지인들의 문상으로 애도할수록 아버지께 잘 해드리지 못한 일들만 떠오르고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고 한없이 부끄러웠다.오래오래 사실 것 같았고 늘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어요. 보고 싶어요. 아버지. 한순간에 허망하게 가시고 나니 나의 어리석음에 탄식합니다.아버지께서 가장 행복해하시던 때가 우리 형제들 결혼시키고 새 식구들이 늘어 날 때인 것 같고 막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인 것 같다.막내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서울에 있는 의과대학에 합격했고, 시골 전체가 기뻐하며 축하가 이어졌었죠. 현수막까지 걸렸었다.막내는 형제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늦둥이에 집안 형편이 썩 좋지가 않다보니, 아버지는 공부 말고는 물려줄 재산이 없다고 하셨다. 막내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시킨 후 대구에서 재수를 시켰다. 막내는 공부하는 게 제일 재미가 있다며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당시 우리 집 형편으로는 고등학교 시키기도 어려웠다.하지만 막내의 꿈은 자꾸 커져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다. 형제들은 반대했죠. 아버지 힘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한 학기를 다니더니 또다시 재수생의 길로 들어섰다. 몇 달간의 고시원 생활을 거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린 할 말을 잃었다. 막내는 그간의 맘고생과 경제적인 어려움에 몸이 쇠약해져 병이 날 정도였다. 만약에 원하는 대학에 못 가고 낙방을 했다면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것 같다.흔히 나이가 나보다 어리다고 그래서 생각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는 어린 동생을 무시해 버리곤 했다. 좋은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꿈마저 우리가 결정하는 오류를 범할 뿐 했으니까.형으로서 아주 부끄러웠다.우리 아버지는 젊은 시절 불의의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오신 분이다. 특히 우리 자식들을 지지해주셨다. 그렇기에 막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던 아버지가 더는 계시지 않다는 생각에 그리움이 커진다. 이제는 한 분 남은 어머니를 잘 모시며 아버지의 그리움을 달래본다.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을 겪고 있는 어리석은 아들이 아버지가 하늘에서 평안을 누리시길 소원합니다.아버지(이윤호)를 사랑하는 아들 이준범(JB농막 대표) 올림

2020-10-25 15:12:32

[그립습니다] 이광영 씨 부친 故 이말술 씨

[그립습니다] 이광영 씨 부친 故 이말술 씨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가 이제 몇 해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 기일에 참석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살아생전 아버지 모습을 떠올려본다.눈 내리던 날 아버지가 계신 경산요양병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찾아 갔을 때 침대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와 함께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돌아올 때 힘없이 손을 흔들어 주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요양병원 몇 곳을 다니시다가 6월 어느 날 새벽에 눈을 감으셨다.아버지께서는 2년을 넘게 대구의 요양병원에 계셨다. 나는 우리 집 인근 요양병원에 아버지를 모셔 놓고 퇴근길에 아버지를 자주 찾아뵜다. 2년을 병원에 계시면서 아내는 아버지를 틈만 나면 찾아 뵙곤했다. 그 당시 요양병원 간호인으로 계신 분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연히 다른 병원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때 병원을 자주 찾던 우리 가족을 기억해 주었다.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장남도 아닌 제가 아버지를 가까이 모실 수밖에 없었다. 형제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게 미안해하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나의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 농부로서 힘겨운 삶을 살아오셨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우리 일곱 남매 자식들을 제대로 공부도 시키지 못하고 자식들과 더불어 고된 삶을 사셨다. 그래도 고교 시절 두루마기를 두르신 아버지는 존경스럽고 멋진 분이셨다. 어머니는 순수한 한복에 머리를 틀어 비녀를 찌른 현란하지 않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의 수면처럼 넓고 고요하고 푸근한 사랑의 결정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소죽을 끓이시고 세숫물을 데워 내게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아버지는 하루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시며 자식 생각에 산딸기를 호박잎에 싸서 일곱 남매들에게 한 줌씩 나눠 주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생각난다.그 가난한 살림을 사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니는 오죽했을까.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좋은 세상에서 우리 형제들이 살아가는 정겨운 모습 지켜보면서 행복해 하셨을 텐데.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눈을 감으셨을 텐데. 지금은 형제들이 밥을 먹고 살 만큼 가정을 이루고 잘살고 있다. 아버지 기일에는 함께 모여 서울 큰 형님댁에서 제사를 모신다.아버지는 대구의 요양병원에서 숨을 거두셨다. 나는 깊은 밤에 병원의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병원으로 갔으나 아버지는 이미 하얀천으로 덥혀 있었다. 영구차에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 김천으로 내려갔다. 김천으로 가는 한 시간 동안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무 기억이 없다.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해마다 여름이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죄스러움에 고개를 숙인다.아버지는 평생 땀 흘리시며 일하시던 고향 마을 앞산에 계신다. 고향 집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아버지는 고구마, 감자, 콩을 심으시며 때로는 참외 농사를 짓기도 하셨다. 산소를 찾아올 때면 잔디 상태가 좋지 않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해마다 돌아설 때면 마음이 무겁다. 예전에 성묘를 하러 갔는데 산소 옆에 핀 야생화를 보며 그래도 이쁜 꽃도 보시고 외롭진 않으시겠다고 생각했다.수년 전에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기도 했다. 고생 많이 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기도 했었다. 도란도란 사시던 부모님 생각이 더 난다.오늘은 더 부모님이 그리운 그런 날이다. 그립습니다.아버지(이말술)의 넷째아들(이광영) 올림

2020-10-22 14:30:00

[그립습니다] 윤선경 씨 모친 故 최동옥 씨

[그립습니다] 윤선경 씨 모친 故 최동옥 씨

엄마, 고마워. 사랑해. 보고 싶어.엄마가 위독하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나는 갓 결혼한 지인의 신혼 집에서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나는 신혼부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집에 돌아가 동생과 전화를 하고 싶었다. 며칠 정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동생의 말을 들으며 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쳐다봤다. 다음날부터 연휴가 사흘간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다음 주 중반 정도에 큰 일을 치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엄마의 상태를 알리는 가족 단톡방의 문자는 형제들의 질문과 동생의 대답으로 줄줄이 이어져 차츰 장례에 대한 의논으로 바뀌었다. 다섯 형제여서 형편도 생각도 제각기 달랐다.장례식장을 어디로 할 것인가. 식장은 큰 걸로 할 것인가, 작은 걸로 할 것인가. 선산에 모실것인가, 국립묘지에 모실 것인가. 고별식을 할 것인가, 장례 미사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서 잠을 잘 것인가. 그러다 "엄마 아직 살아계신다"라는 동생의 말에 다들 문자를 멈췄다. 우리는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알리자는 댓글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저마다 분주한 일상으로 돌아갔다.해 넘어가는 시각이 되자, 맑은 날씨임에도 어딘지 비 오기 전 같은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불안해서 방과 거실을 서성이다 황급히 집을 나섰다. 그간 코로나 때문에 몸조심하느라 두 달간 성당을 가지 않았다. 저녁 7시 30분, 나는 엄마의 선종을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고통을 덜어주시기를, 엄마가 잠자듯 돌아가시기를 기도했다. 스산하고 음울한 이상한 밤이었다. 지나고 보니 엄마는 그 시간 죽음과 사투를 벌였다. 뒤척이다 2시쯤 잠을 이뤘는데, 아침에 문자를 보니, 엄마는 새벽 2시 30분에 운명하셨다.장례식장은 제일 큰 걸로 잡았다. 올 사람 없으니 작은 걸로 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이 힘든 시기에 한 두 분만 오셔도 널찍한 공간에서 마음 편히 머물다 가셨으면 싶었다. 슬픔 중에도 조문 온 친구를 만나면 반가워서 웃었고, 이따금 엄마가 생각나면 울컥 목이 메었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회환. 한 사람의 생애를 무엇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입관 예절을 할 때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다. 그 순간 깨달았다. 엄마가 나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평생 남동생만 사랑하고 딸인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의 시신을 보는데 전혀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랑받지 않으면 절대 그럴 수 없었다.마스크를 쓴 상태로 뺨에 뽀뽀하고 나오려다 다시 되돌아가 마스크를 내렸다. 입술에 닿는 엄마의 피부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몇 번이나 뽀뽀하고 엄마 귀에 속삭였다."엄마, 고마워. 사랑해."엄마는 요양병원에서 가족 없이 임종을 맞았다. 면회 금지여서 동생도 엄마를 만날 수 없었다. 돌아가신 후였지만, 나는 엄마를 실컷 안아 드려야 했다.크게 속 썩인 적 없다고, 엄마는 우리 부부를 좋아했다. 나는 엄마에게 해준 게 없었다. 동생이 엄마의 궂은 수발을 다 들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찾아가 안아주면 엄마는 "야가 왜 이라노." 하면서 밀어냈지만 싫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나와 화장장으로 갔다. 직원이 화장 후 나온 분골을 하얀 종이에 담아 각지게 접었다. 90년 삶이 책 한 권 부피밖에 되지 않았다.집에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이니 생각이 멍하니 사방을 떠돌다 한 곳으로 귀착됐다. 시간이 흐르면 차츰 나아질까? 언젠가는 덤덤하게 엄마를 떠올리게 되겠지.카톡방에 드문드문 사진과 글이 올라왔다. 사망확인서.... 엄마 옷을 모두 버릴 테니 이의 없냐고 묻는 말.... 뒤늦게 들어온 부의금 알림 등등....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어제와 오늘이 달랐다. 이젠 엄마가 없다. 엄마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다. '무슨 차이가 있어. 떨어져 지낸 지 오래잖아. 이전에도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그냥 대구에 살아계신다 여기면 되지.'라고 애써 생각해본다.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세수할 때면 자꾸 눈물이 났다.엄마, 꿈에 한번 나와 주세요. 보고 싶어요.사랑하는 엄마(최동옥) 딸(윤선경) 올림.

2020-10-18 15:30:00

[그립습니다] 우종록 씨 부인 故 정현진 씨

[그립습니다] 우종록 씨 부인 故 정현진 씨

살아도 예수로 살고 죽어도 예수로 살아준 당신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당신을 떠나보내고 많이 보고 싶지만, 그보다는 끝까지 예수님을 붙잡고 천국 소망을 이루어 준 당신한테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지옥 아닌 천국에서 시간이 흘러 다시 함께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다려집니다. 나와 우리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천국에서 꼭 다시 만납시다.사실 당신이 하나님을 알고 교회에서 봉사도 많이 하고 지금까지 성실히 교회를 다녔지만, 그것으로 당연히 천국 간다고 믿은 건 아니기에 예수님 못 붙잡고 천국 못 가면 어떡하나 걱정이 많았습니다.하지만 끝까지 복음을 믿고 예수님만 의지해 천국 소망을 이루어 낸 당신. 지금은 천국에서 예수님과 행복하게 영원한 삶을 살고 있을 당신.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나와 아이들은 암으로 힘들어하는 당신보다 천국에서 편안하게 보내고 있는 당신을 생각하며 이젠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예수님만 주목하며 마지막 시간까지 함께 지내온 5개월의 시간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과 같았습니다.당신과 나는 5개월이라는 호스피스 병동의 삶에서 그 어떤 세상의 달콤한 말에 흔들리지 않고 당신을 구원하실 예수님만 주목했습니다. 또 그 곁을 지키며, 나 자신도 세상의 어떤 위로보다 생명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함께 보냈습니다.힘든 5개월이었습니다.사람들은 "꼭 좋아질 것이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마라", "교회에서 봉사 열심히 했으니 당연히 천국 갈 것이다", "좋은 일 많이 해서 빨리 천국 가는 것이다" 등 많은 말들을 했지만, 그 말이 예수님을 주목하는 이 시간에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했습니다.당신과 함께 보낸 호스피스 생활 5개월은 우리 가족에게 어떤 마음으로 천국을 준비하고 세상 살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다시 한번 점검하고 마음속에 새기는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5개월의 시간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나와 우리 딸은 앞으로 남은 삶은 호스피스 생활을 생각하며 신앙 행위보다 더 큰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에 무게를 두고 살아갈 것입니다.당신은 우리 가족에게 제물과 권력 그리고 인맥과 자신의 신앙업적 등을 남기지 않고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비밀을 알려주고 천국에 갔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이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이라는 당연한 말을 5개월 동안 묵묵히 마음을 지키며 보여줬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에 생명이 있다. " 잠언 4:23이제는 나와 우리 딸은 살아가면서 지킬 그 어떤 것보다 더욱 예수를 주목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세상 끝나는 날까지 지키겠습니다. 진짜 살아가는 방법을 삶에서 보여준 당신과 꼭 다시 천국에서 만나기 위해서...천국에서 다시 만날 그때까지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켜보고 있을 당신 천국에서 꼭 다시 만납시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당신(정현진)을 사랑하는 남편(우종록)이...

2020-10-15 14:23:12

[그립습니다]  박호용 씨 스승님 故 육종수 교수

[그립습니다] 박호용 씨 스승님 故 육종수 교수

육종수 교수님은 내가 대구대 법과대학 3학년이던 2004년에 '헌법과 통치구조론' 수업을 가르치셨다. 당시 교수님은 명예교수로 학교에 계셨다.강의 첫날 교수님은 "나는 중간 기말고사 때 '헌법전문'만 적어도 기본점수는 주는 교수다. 그래서 학생 중 일부가 그것을 악용한다. 하지만 헌법전문이 기본인 것은 사실"이라고 말씀하셨다. 16년이 지난 아직도 이 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육 교수님의 수업을 들은 학생이라면 '헌법전문' 하면 육종수 교수님, 육종수 교수님 하면 '헌법전문'이 생각날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들의 가슴에 헌법전문의 중요성을 각인 시켜 주신 교수님이다.그런 교수님을 10여 년이 지난 2018년 가을쯤부터 천주성삼병원에서 여러 차례 마주쳤다. 교수님께서도 연세가 드셔서 진료를 받으시러 가시는 중이었다. 가벼운 인사만 나누었다. 병환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여쭙지 못하였다. 교수님께서 우리 동네 근처에 있는 욱수성당에 다니신다는 것을 알았다. 욱수성당 다음카페에 들어갔다가 교수님께서 노인의 날 행사에 참여하시려고 버스에 타신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회색 모자를 쓰시고 약간 짙은 안경을 쓰신 상태였지만 교수님의 이목구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참고로 욱수성당 근처에 매호성당 신자로 가끔 욱수성당 다음카페에 들어가 본다. 그 후에도 몇 번 천주성삼병원에 가다가 교수님을 마주쳤고 간단한 인사만 나누었다.올해 지난 6월 말에서 7월 초쯤 천주성삼병원 쪽에서 걸어 오시는 교수님을 뵜었다. 당시 함께 계시던 사모님께 처음으로 인사를 드린 뒤 나는 진료를 받으러 갔다. 그때가 교수님과 마지막 만남이었다. 올해 추석 연휴를 앞둔 주말에 욱수성당 다음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욱수성당 카페는 욱수성당 위령회 카페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위령회 카페에 '육프란치스코 형제님 장례미사'라는 제목의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클릭을 해보니 교수님의 장례미사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교수님의 장례미사에도 참석하지 못해 죄송스러웠다.나는 곧 신문사의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어느 곳에도 부음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 코로나 19 재확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해서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총동창회' 밴드에 들어가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교수님의 부고는 내가 올렸다.나는 욱수성당에 전화를 걸어 내 번호를 남겼다. 정오를 지난 시점에 사모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그제야 나는 사모님께 위로를 드리고 교수님께서 3년 동안 지병으로 투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갑자기 병세가 나빠져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모님께서는 같은 성당 사람들과 지인 몇 분에게만 부고를 알리셨다고 하셨다.8월 23일 홀연히 떠나신 육종수 프란치스코 교수님 당신께서는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아 2002년 "대구법학" 제5호에 "통일헌법 이념의 정립방안"을 발표하셨습니다. 교수님 저 세상에서도 기도해 주세요. 당신의 염원인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사모님께서 빨리 이별의 슬픔에서 벗어나시기를, 그리고 어서 빨리 이 코로나 19 시국이 끝나 제자들의 늦은 효도를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해 주세요마지막으로 교수님이 중시하시는 헌법전문을 영전에 올립니다.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당신의 제자인 매호성당 박호용(GS홈쇼핑 매장마케팅팀 재택근무 매니저) 토마스 드림

2020-10-11 15:30:00

[그립습니다] 하중호 씨 모친 故 최동분 씨

[그립습니다] 하중호 씨 모친 故 최동분 씨

어머님을 보냅니다.어머님은 이제 영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십니다.얼마 전 어머님 돌아가시고 집 뒤꼍을 정리하다가 땅속의 수선화 뿌리를 발견했습니다. 우물 있던 자리 옆 화단에 싱싱한 잎줄기 끝 노오란 꽃이 활짝 피곤 했습니다. 어머님이 조석으로 우물물을 길으며 쳐다보고 설거지하며 바라보던 꽃이었습니다. 밝은 노란빛 꽃이라 뒤꼍을 화사하게 하고 마음까지 밝게 만드는 꽃이라 좋아하시던 꽃이었습니다.어떤 꽃보다도 먼저 봄을 알리는 수선화처럼 부지런하시던 어머님의 살아온 일생을 되돌아보니 회한이 앞섭니다.봄이 되면 문 토골 비탈진 밭에 약초 씨앗을 뿌리는 것을 시작으로, 여름엔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흰 수건 질끈 매고 가랑골 콩밭 매시던 모습, 가을 추수철 탈곡기 밟아가며 나락 타작 하시던 우리 어머니, 겨울이면 밤늦도록 도라지 껍질을 까 영천 한약방에 내다 파시고 작은방에서 "달그락 척, 달그락 척" 소리를 내며 베틀에 앉아 삼베 짜던 당신의 모습이 선합니다.꼭두새벽에 밭에 나가 별 보고 집에 들어와 저녁상을 뚝딱 차려 내시는 게 그때는 당연한 일상인 줄 알았습니다.19살, 꽃다운 나이에 화정골 빈촌에 맏며느리로 시집와 홀시아버지 모시고 밑으로 두 시동생에 시누이 시집·장가까지 보내며 7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웠습니다.시집오니 산비탈 자갈밭 몇 뙈기가 전부였지만 묵묵히 일만 하시는 아버지와 억척스럽게 농사를 지어 들판에 어엿한 문전옥답을 소유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이 있었는지 우리 자식들이 뼛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밭이랑을 일구고 맸으면 두 무릎뼈가 다 닳아 노후에 인공관절까지 시술하였겠습니까.인공관절 시술에도 불구하고 노후에 두 다리가 불편해 너른 고향 집을 두고 요양원에 모실 수밖에 없는 불효자식들을 용서해 주십시오.요양병원 생활이 하루하루가 감옥 같았겠지만, 자식들 힘들게 하지 않으려 체념하고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견뎌냈습니다.3년 전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하고 고향을 다녀가실 때 다시는 고향에 돌아올 수 없다는 걸 당신을 아셨을 겁니다. 한세월 같이 일하던 동네 할머니들 한 분 한 분 손잡아주고 한평생 정들었던 고향 동구 밖 굽이길 돌아설 때 차 안 뒷좌석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 삭이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아직도 아련합니다.팔공산 험한 산길을 걸어 갓바위 부처님에게 자식들 건강하고 집안 복되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하시던 어머님 덕택에 우리 7남매 남부럽지 않게 잘살아 가고 있습니다.어머님이 평소에 늘 말씀하셨습니다.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라고, 그리고 어머님은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두 분 삼촌과 고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대신해 알뜰히 보살펴준 우리 어머님을 친어머니처럼 존경하고 따르시어 인근 동네에서 형제간에 우애 있기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우리 7남매 많은 형제자매 간이지만 평소 어머님이 말씀하시고 실천한 것을 본보기로 하여 서로 돕고 위하는 사이 좋은 화목한 형제자매로 살겠습니다.부디 남은 자식들 걱정일랑은 모두 내려놓으시고 훨훨 나비 되어 어머님 생전에 좋아하시던 수선화꽃 어우러진 먼 꽃길 따라 미지의 세계 긴 여행의 여로를 향해 날아가도록 하십시오.힘들고 고생스러웠던 일은 잊으시고 4남 3녀의 자식들을 멋지게 키운 것과 16명의 손자 손녀들의 이쁜 모습만을 가져가십시오.내색하지 않고 어머님을 위해주고 함께 평생을 고생하시며 사셨던 먼저 가신 아버지와의 즐거웠던 추억만 간직하고 가시옵소서.어머님을 그리는 마음을 애잔하게 시로 쓰신 등단 시인인 셋째 형님의 '흰고무신'이라는 시 중에 일부분을 어머님 영전에 올립니다.흰고무신 걸리적 거리어 밭둑에 벗어두고는호박도 심어야 하고 오이에다 도라지도 심어야 하는데울 엄마 일하고 싶어 어디 갔노?또 다시 돌아보아도 뒤에는 엄마의 그림자도 없네주르륵 구슬 눈물 밭고랑을 적신다꽃이 진 나무에 노랑새 한 마리만 내려다보고 있다당신의 가시는 길에 넷째가 올립니다.어머니(최동분)를 사랑하는 아들(하중호) 올림

2020-10-08 20:14:45

[그립습니다] 이승훈(세익 대표) 씨 부친 故 이병진 씨

[그립습니다] 이승훈(세익 대표) 씨 부친 故 이병진 씨

늘 그립고 그리운 우리 아버지..우리 아버지는 고교시절 최연소 검도 국가대표로 하와이에서 열린 주니어세계대회에 참가해 2위를 차지 하신 분이다. 대구대 선수시절에는 전국체전에 출전해 6연패라는 화려한 역사를 세우셨다. 이후에는 주장 겸코치로 생활, 실업팀 선수생활과 직장도 병행하시며 우리에게 헌신하신 분이다. 아버지는 대구대학교 체육연구학 이학박사도 취득하신 열정이 넘치는 분이다.형을 낳은 후 대구에 정착한 아버지는 대구대 검도부 코치를 맡아 지도자의 길을 시작했다. 늘 꿈 꿔오시던 사업에 대한 꿈과 검도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 하기 위해 검도관을 운영하셨다. 특히 어머니가 운영하는 장애아동치료실을 접목해 장애 아동 검도 강습 등 장애 체육에도 이바지 하셨다. 특히 일부 학생은 일반인 전국생활체육 검도대회에 나가 준우승을 거머쥐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다.그렇게 본인의 위치에서 열심히 하시다가 그 후로는 경운대학교 경호학부가 창설되던 해에 러브콜을 받아 경운대학교 경호학부 교수 겸 검도부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또한 대구검도협회 전무이사, 여러 체육협회 임원을 맡으며 검도 협회 최우수지도자상, 대구최고체육지도자상 등의 각종 지도자상과 공로상을 받으셨다. 선수로서 또한 지도자로서도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이런 멋진 아버지에게 자랐기에 그 그늘은 더 크게 느껴진다.아버지...여름이 지나가고 날씨가 쌀쌀해짐을 느낄 땐 가을이 오구나 하면서 어느 때보다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는 시기입니다.이젠 보고파 불러도 눈으로 볼 수도 피부로 느낄 수도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그게 익숙해져버리는 것 같아 더욱 슬픕니다.이 맘 때면 9년전의 오늘이 자꾸 생각나고 그 동안 아버지의 흔적들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유난히 더 아른거려 이제는 실감이 나지만 아직은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늘 아버지를 의지하며 살아온 저에게 지난 9년이란 시간은 너무나 힘들었고, 또 어쩌면 저를 성장시켜준 아버지의 숙제가 아니였나 생각이 들었습니다.처음에는 아버지를 잃은 자식의 슬픔으로 시작되어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지켜보는 안타까움에 늘 괴로웠고 어린나이에 그만큼 부담감이 컸습니다.어린 아들은 아버지를 잃은 절망감으로 인해 제 인생을 좌절하며 내려놓지 않고 오히려 이를 계기로 삼고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더 열심히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힘든 시기마다 난관에 부딪혔을 땐 홀로 아버지를 찾아 뵙고 또 아버지를 생각하며 거기에 힘입어 어떻게든 혼자 극복하고 한 계단 한 계단 씩 건너왔습니다.또 아버지 덕에 구세주 같은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나 한층 더 성장 할 수 있는 계기들이 주어졌습니다. 특히 큰 기로에 섰을 시기에 스스로 경험차 방문한 필리핀이라는 먼 타국에서 아버지의 뜻이였는지 아버지께 검도를 배운 제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방향도 잡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제가 여행 및 교육서비스업 대표이사직을 맡게 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지금보다 어렸을적에, 제가 크면 아버지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이젠 제가 아버지 모시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늘 못해서 아쉬웠던 좋아하는 술도 자주 마시면서 제가 그 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구구절절 설명해드리고 또 조언도 받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라 늘 마음이 아픕니다.그 동안 하고 싶었던 말들도 참 많고 그립고 보고픈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글로도 말로도 그것을 다 담을 수가 없어서 앞으로 제가 또 살아가야 할 날들 속에서 조금씩 꺼내어 전하겠습니다."승훈아 니가 나의 자존심이다." 라고 늘 말씀하셨던 아버지의 그 자존심, 제가 잘 지켜나가도록 하루하루 헛되지 않게 노력하는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 되겠습니다.오늘 꿈에서 뵐게요..보고싶습니다..사랑합니다 아버지!이병진의 아들 이승훈(세익 대표) 올림.

2020-09-24 14:30:00

[그립습니다]김재용 금부모터스 대표 할머니 허소순 씨

[그립습니다]김재용 금부모터스 대표 할머니 허소순 씨

성주군 수륜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의 품을 떠나, 어린 시절부터 대구에서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고향 성주를 떠나 대구에서의 유학 생활을 거친 뒤 군대에도 다녀오고 아직 이곳에서 살고 있으니 여기가 나에겐 제2의 고향이다. 이곳 대구에는 나의 소중한 어릴 적 추억이 남아 있다.무엇보다 중요한 추억은 25년 전 하늘나라로 떠나신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있다 보니 학교생활을 하며 많은 방황을 했었다. 그때 그 시절 할머니는 나를 바른길로 인도해주기 위해 애를 쓰셨다. 한 번도 내 편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 우리 할머니는 "우리 용이는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면 모두 잘 될 거야"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그 흔한 혼도 한 번 내지 않으시고 나를 감싸 주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버팀목 같은 분이었다. 할머니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어린 시절 할머니는 나에게 부모 같은 분이셨다. 밥을 먹더라도 할머니는 좋아하는 생선도 아까워 몸통은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대가리만 드셨다. 생선 대가리가 정말 맛있어서 드시는 지 알았다. 그땐 왜 몰랐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보니 조금이나마 할머니의 그 큰 마음을 알 것 같다. 아껴서 나에게 좋은 것만 주시려고 생선 대가리를 드셨다는 것을...우리 할머니는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항상 기듯이 집안일을 하셨다. 아파도 병원비가 아까워 아끼신다고 참으셨다. 지나고 생각하면 너무 죄송스럽다. 그런 감사한 할머니 밑에 자란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나는 군대 전역 후 취직을 한 뒤 첫 월급을 받아 할머니를 호강 시켜 드리겠다며 월급을 드렸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한 달 뒤 뇌출혈로 쓰러졌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마지막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할머니와 이별을 했다. 지금도 조금만 더 잘 해드렸어야 했는데, 말을 잘 들었어야 했는데 라는 후회가 든다. 할머니만 생각하면 잘못한 일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할머니가 떠나신 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에 남아 살다 보니 할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할머니가 방에서 다니시던 모습부터 밥을 지으시던 모습까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아련하다. 새벽이면 연탄재를 버리러 나가시던 할머니의 뒷모습도 생생하다. 우리 할머니는 몸빼바지에 꽃무늬 마 셔츠를 참 즐겨 입기도 하셨다. 어려운 형편에 우리를 기르시느라 할머니는 명테 껍질과 오뎅, 감자로 반찬을 많이 해주셨다.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에게 사랑을 주셨다. 아끼시던 금과 비녀를 나에게 남기셨는데, 할머니를 항상 생각하기 위해 그 금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항상 몸에 지니고 있다.할머니 어릴 때 말도 안 듣고 말썽을 많이 피웠지만, 항상 믿어주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꼭 전하고 싶다. 하늘나라에서라도 무릎 아프지 말고 편히 계셨으면 좋겠다.할머니(허소순)를 사랑하는 손자(김재용 금부모터스 대표) 올림

2020-09-20 16:30:00

[그립습니다] 김대영 씨 어머니 故 박봉선 씨

[그립습니다] 김대영 씨 어머니 故 박봉선 씨

1929년 11월 12일(음력)에 태어나신 어머니. 18살에 동갑인 아버지와 혼인하여 2남 2녀를 낳아 키우시고, 4남매 모두 대학 이상 졸업을 시켰다. 어머니 평생 소원은 자식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이었다.어머니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한 집안에 시집오셨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농사를 지으시고 물건을 아껴 써서 절약하는 길 밖에 없었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호롱불 밑에서 아버지와 우리 형제자매의 헤어진 옷과 구멍 난 양말 등을 기우시고, 내의를 뒤져 이와 서캐를 잡는 모습이 기억난다. 화장품도 아껴서 바르고, 작은 플라스틱 통에 든 약을 바를 때도 얇게 펴서 발랐다.어머니는 식사 시간에 항상 아버지와 자식들이 먼저 먹고 남은 밥을 드셨다. 닭백숙을 했을 때는 닭껍질이 제일 맛있다면서 살코기는 드시지 않으셨다. 어머니께 닭껍질을 드시지 말라고 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부모님은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고, 아끼고 절약한 돈으로 농토를 마련하고 과수원을 장만하셨다. 벼농사를 지을 때는 논마다 옮겨 다니면서 소독을 해야 했고, 홍옥과 국광이 주된 품종인 과수원에서는 일 년에 12번 이상 소독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길이가 긴 논의 논두렁에서 호스를 당길 때는 너무 힘이 들어 창자가 나올 정도로 힘들다고 하셨다.그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공부만 하라고 하셨다. 공부하는데 드는 돈은 끝까지 주신다고 하셨다. 실제로 동생이 치과대학을 다니고 치의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내가 교대 졸업 후 사립대학교에 편입해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학기마다 빠짐없이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전학 가서 작은아버지 집에서 지냈다.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장남으로 자라다가 갑자기 환경이 바뀌자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밤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이불 속에서 혼자 울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보고 싶어 시골집까지 걸어간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공부하지 않고 왔다고 집에도 들이지 않았다. 이발소에서 내 머리를 깎여서 다시 대구로 보냈다.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공부가 하기 싫어 가출했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내가 1년 6개월 후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고졸학력검정고시를 치를 때는 갓바위에 가서 하루종일 기도했다. 그 후 중요한 시험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갓바위에 가서 기도했다. 내가 지금까지 공부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건강하게 무사히 지내 온 것은 모두 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나는 1982년에 결혼했다. 결혼 1년 후에 첫 딸이 태어났다. 부부교사여서 아내의 출산 휴가가 끝난 후에는 딸애를 맡길 곳이 없었다. 농사일에 바쁜 어머니에게 딸을 맡겨서 유치원에 입학할 때까지 돌봐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출생 후 3개월 된 손녀를 맡아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돌보면서 농사일을 다 하셨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손녀를 키운 4년 동안 어머니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이 늘었다.연세가 들어 농사일이 버거워졌을 때는 평생에 걸쳐 장만한 과수원과 전답을 팔아 자식들의 생활을 뒷바라지했다. 그러고는 갓바위 입구에 앉아 하루종일 농산물을 팔았다. 자식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어머니는 2007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의사가 어떠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고 대답하셨다. 평생 아껴 쓰느라 병원에 잘 가지 않으셨는데, 그 날도 병원비가 걱정되어 그렇게 대답하셨을 것이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후 퇴원하셨는데 뇌경색 후유증으로 언어가 분명하지 않았고, 늘 춥다고 하시면서 여름에도 두꺼운 옷을 입으셨다. 몇 년 후 허리를 다친 후에는 자리에 누워서 지내시게 되었다. 치매가 찾아오고, 말을 잃었다. 재작년부터 밥을 드시지 못하고 죽만 드셨다.나는 2019년 7월 8일 저녁부터 금강경을 읽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난 7월 8일 새벽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태어난 후 어머니와 함께 한 처음 기억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연못에 핀 연꽃을 본 것이었다. 하늘은 맑고 날씨는 따뜻하고 연꽃은 아름다웠다. 평생을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사신 어머니는 지금 부처님과 함께 연화세계에 계실까.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받기만 하였다. 꿈 속에서라도 어머니를 만난다면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하지 못한 말을 꼭 하고 싶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어머니(박봉선)를 사랑하는 아들(김대영) 올림

2020-09-13 15:00:00

[그립습니다] 이두아 변호사 모친 고 김해순 씨

[그립습니다] 이두아 변호사 모친 고 김해순 씨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종교든 당사자의 기도보다 간절하고 유효한 기도가 어머니의 기도라고 합니다.어느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제게 묻는다면 "저를 키운 것은 8할이 어머니의 기도였다"고 답하고 싶습니다.외할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기도 덕분에 형제들이 무탈하게 성장하고 다복하게 사신다고 믿으셨습니다.외숙부 두 분 모두 공직 생활을 하셨고, 특히 작은 외숙부는 사법시험이 '고시'라고 불리던 시절에 시험에 합격해 고등검찰청 검사장까지 지내셨기 때문에 더욱 더 어머니는 자식의 인생에서 어머니라는 존재의 기도의 힘을 굳게 믿으셨습니다.저도 인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어머니의 기도와 함께 했습니다.제가 대학 시험을 볼 때도, 사법 시험을 볼 때도,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될 때도, 지역구 국회의원 출마 결심을 할 때도, 어머니는 그 시간 내내 멀지 않은 곳에서 기도를 하시면서 저를 응원해주셨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때도, 나쁜 결과가 있을 때도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하면 어깨를 펴고 결과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저는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사진(1994년도 서초동 사법연수원 입소식 때 촬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일주일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제가 가장 큰 상실감을 느끼는 순간은 아침에 눈을 뜰 때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마다 어머니의 기도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제는 제가 아침에 눈을 떠도 더 이상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적막한 가운데 눈을 뜨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절로 납니다.어머니의 기도는 제게 마법의 주문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어머니의 기도로 눈을 뜨면서 '오늘도 힘을 내야지'라고 마음 먹을 수 있었고, 저녁마다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하루를 마감하면서 '내일도 평안한 하루가 될 거야'라고 믿었습니다. 밖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하며 기운을 차렸습니다.이제 매일 아침마다 어머니의 기도 소리는 없지만, 어머니의 기도는 제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에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겠습니다. 살아서는 어머니가 그냥 어머니더니,그 이상은 아니더니,돌아가시고 나니 그녀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는 생각이 든다.노희경의 중에서

2020-09-10 19:10:45

[그립습니다] 박영자 씨의 시아버지 故 정규선

[그립습니다] 박영자 씨의 시아버지 故 정규선

"태어남(生)이란 어디에서 죽음(死)이란 어디에로오감과 있고 없음 모두가 자취없네그다지도 잊지 못할 집 생각 어이하고 청산에 홀로 누워 무슨 생각 그러는가애정에 한을 느껴 미련에 잠겼는가 빈산중 끌새 울음 어이 그리 구슬프냐전생에 주린 정한 이 울음에 잠겼는가 한생을 같이살다 홀로 감이 슬퍼워라 "유품을 정리하다 나온 돌아가신 시아버지 글이다.찢어진 노트에 메모해 놓은 쪽지글을 읽는 순간 감동의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돌아가신 '시어머니 연가'이기 때문이다.어머니는 늘 외로웠고 별로 살갑지 않던 아버님이었기에 말이다.내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슴골을 파고 내려가는 이 뜨거움은 무엇인지?내가 왜 이러지! 생각을 수십년 거슬러 내 철없던 며느리 적으로 돌아간다.아버님은 고향에서 자전거 하나 훔쳐나와 만주와 서울을 오가며 자수성가 하셨다.성리학과 다산학을 연구하시며 유림에서도 인정받고 사업에도 성공한 분이셨다.그런 멋진 시아버님 아래 사랑을 많이 받았다.신혼초에는 한복에 올림머리를 하고 우아한 새댁생활을 했다.어머님과 나는 공장 안채에서 안방 마님으로서의 전통과예절 교육을 철저히 받았고 외출도 거의 하지않고 살았다.밥상머리에서 다리가 저리도록 앉아서 들어야하는 교육? 잔소리?등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때는 고된 시집살이로 느껴져 많이 울었다.'하늘에 부끄럼없는 사람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개,돼지같은 인륜을 저버리는 금수가 되면 안 된다고...별명이 중국대사일 정도로 근검절약도 심해서 밥풀 하나 버리지 않고 이면지 사용은 기본으로 몸소 실천하신다. 심지어 당신 옷이 헤지면 남편이 받아 입는다.자손 욕심 많은 아버님은 남매를 둔 나에게 철마다 보약과 한약을 먹이면서 은근히 기대를 했다. 내 나이 50이 다 되도록 며느리 건강을 챙기셨다. 포기를 했는지 "애미 너는 60살 넘으면 내 얘기 할 거다. 다른 사람들보다 건강하게 살 거다' 라고 하셨다.요즘 70중반이 넘은 나는 아버님께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산다. 사회활동을 왕성히 하고 있고 아직은 별 이상없이 기자, 스마트폰 강사, 동영상 유투버, 사진작가로서 부끄럼없이 노후를 살고 있는 것은 모두 아버님 덕분이다. 외출도 못하고 집안에만 있던 며느리가 이렇게 바깥에서 사는 것 보면 이해를 해주실지 송구스럽긴 하다.윤달이 있어서 흩어진 산소 모두 모았는데 이어진 장마와 태풍에 혹시 상하지 않았는지 걱정이다. 추석 전에 아버님 산소가 잘 있는지 꼭 찾아봬야겠다.아버님!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하는 것 보고 나도 그렇게 하겠다던 손자도 50턱밑에 와 있고 저 역시 3년만 더 살면 아버님 돌아가신 나이가 됩니다.제 남편 윤이가 마지막까지 부르던 그 이름 아부지~! 어메~!아버님 깊은 사랑 생각할수록 고맙습니다. 아버님의 큰 그늘이 그립습니다.아버님!! 많이 많이 보고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맏며느리 드림

2020-09-06 17:00:00

[그립습니다] 배윤주 작가 남편 故 정창웅 씨

[그립습니다] 배윤주 작가 남편 故 정창웅 씨

태풍이 잦은 걸 보니 곧 가을이 오려나 봅니다.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당신을 서둘러 떠나보낸 지 벌써 두 해가 다 되어 가네요. 37년을 같이 살았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대가족으로 살다 보니 우린 애정표현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덤덤하게 살았었죠.가끔 술 취해서 돌아와서는 침대에 쓰러지며 내게 "사랑한데이"라고한 것이 전부였던 무뚝뚝한 경상도 남편 당신!그런 당신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함께했던 마지막 6년을 "세 살배기 남편 그래도 사랑해!"라는 치매 간병기를 책으로 내었는데 그 책을 받고는 얼마나 서럽던지 엉엉 소리 내 울었습니다. 언제나 나만 보면 천사처럼 웃어주던 사랑했던 나의 세 살배기 남편, 이제 당신은 떠나고 대신 내 옆에 책 한 권만 덩그러니 남아있다니....어느 날은 너무도 당신이 보고 싶어서 당신과 함께보며 즐거워했던 낡은 앨범을 들추어 보았습니다. 20년 전 당신의 사업 부도로 정말 힘든 세월을 보내며 당신을 원망도 많이 했었는데, 사진 속의 지난날들은 정말 불행했던 날보다 행복한 날들이 더 많았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해주었습니다.연애시절 내가 대학원 입학해서 얼싸안고 기뻐했던 일,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았던 일, 아들들을 키우며 행복했던 순간들, 두 아들이 대학시험에 합격했던 일, 두 아들이 동시에 취업했던 일, 가족 18명이 어머님 팔순기념 현수막 들고 하이난 여행 갔던 일, 그리고 당신이 치매라는 높은 벽을 만나 힘들었지만, 그때부터 내가 당신의 보호자가 되어 가족과 당신의 친구들과 함께하며 소소하게 행복했던 날들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사진 속에 담겨 있었어요.그리고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요양원 주말부부였을 때의 일인데 당신 기억나요? 당신을 집으로 모셔와 온 가족과 추석을 보내고 내가 운전해서 당신과 요양원 가는 도중에 내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당신을 집으로 모시고 와서 나랑 같이 살 거니까 잘 지내요" 그랬더니 갑자기 당신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데 정말 나는 기적을 보는 것 같았고 내 귀를 의심했답니다.그때 이미 당신은 말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어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는 상태였는데 그렇게도 똑똑하고 분명하게 인사를 하다니, 나는 울컥하며 감동을 받았었지요. 고맙다는 그 한마디 말에는 얼마나 많은 위로와 감사와 격려의 메시지가 담겨있었을지 나는 감히 짐작도 못 합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이 내게 마지막으로 한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그런데 요즈음 당신은 왜 제 꿈속으로 자주 찾아와서 힘들게 하나요? 이제 이곳은 잊으시고 그곳 별나라에서 어두운 밤길 저와 아이들을 위해 훤히 밝혀주세요.저는 요즘 두 웅이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임영웅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노래를 들으며 위로받고 당신, 창웅 씨를 생각합니다. 노부부는 아니었지만 꼭 60대의 우리이야기 같아서요. 작은아들은 이러는 나를 자꾸 핀잔을 줍니다. 매일 같은 거만 보고 듣는다고요. 그래도 새로운 웅이를 만나 행복하고 가슴 설렙니다.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요.이제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치매로 힘들어하는 치매 환자 가족들과 일반인들에게도 우리의 치매 러브스토리를 들려주며 치매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편지 받으면 또 두 줄로 답해주실 거죠?"일편단심 민들레야, 너를 제일 사랑한데이"라고지금 내 곁에 없지만 그래도 당신을 사랑해!'세 살배기 남편 그래도 사랑해!'의 배 윤 주(작가)

2020-09-03 17:00:00

[그립습니다] 큰 보살핌 주신 아버지 故 김용준 전 교장

[그립습니다] 큰 보살핌 주신 아버지 故 김용준 전 교장

아버지는 대구공립농림학교 4년을 졸업하시고, 43년 7개월이나 후세 양성을 위해 교육에 봉직하며 용암초등학교 모교에서 정년을 맞이하셨다. 퇴임 전에 제자들의 아낌없는 사랑과 모금으로 '송덕비(頌德碑)'를 모교 운동장 옆 화단에 제막하셨지요. '평생을 교육에 몸 바쳐 제자를 위해 헌신하신 모암 김용준 선생님의 드높은 뜻과 공덕은 이 동산 이 고장에 장송처럼 푸르리라'고 송덕비에 새겨져 있습니다.자식들에게 근엄하시면서 언제나 자상하셨던 아버지! 교육공무원으로서 조금의 여유는 있었던 것 같았지만,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시고 근면 성실하게 살아오셨던 그 모습들, 남루한 옷차림도 마다하지 않고 오직 청빈하고 정직한 마음을 강조하셨던 분이셨습니다.5남매(차식, 태란, 옥란, 영길, 영호)의 장남이라 저에게 힘을 주시고 기대감도 컸었지요. 중학교까지는 시골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고등학교부터는 아버지와 떨어져 대구에서 학업을 하게 되었지요. 경북대학교 합격 여부 소식을 시골집에서 기다리다가 동네 어귀에서 합격 소식에 그렇게 좋아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가슴에 찡합니다. ROTC 15기로 임관, 화천(27사단)에 군 복무할 때 수확한 쌀까지 보내 주시는 자상하고 인자함도 보여 주셨지요. 늦게 지원한 박사과정 합격 소식을 듣고 첫 등록금도 주셨고요.인사이동으로 청송, 울릉도 등 부임지에서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시던 모습, 그 애틋한 모습들이 간간이 뇌를 스쳐 갑니다. 울릉도에 교장으로 2년간 홀로 계시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자식들이 부담을 느낄까 한 번도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으셨지요. 타지 근무로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에 호까지 모암(慕巖)으로 하셨지요.아버지, 저도 이제 공자의 말로 이순(耳順)이 왔나 했는데, 어느덧 종심(從心: 일흔 살을 달리 이르는 말)을 향하고 있어요. 아버지는 가을을 유독 싫어하셨지요? 만물의 초록이 단풍이 들어 떨어지는 모습을 가장 쓸쓸하게 느꼈었던 마음,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저도 답습하고 있어요.아버님이 평소에 강조하셨던 '형제간의 충효, 우애, 화목'을 가훈으로 삼고 실천에 옮기며 가족들에게 계승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퇴임 후에는 마을 경로당 운영에도 열과 성을 다하셨지요. 어머님이 질병으로 시골에서 통원하실 때 혼자 병원에 보내시는 것이 염려되어 꼭 동행해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로부터 금술 좋은 노부부로 병원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83세 노환으로 이별을 하게 되던 날, 유난히도 그해 그날은 찜통 무더위였습니다. 아버님을 마지막 보내드리는 날, 그 모두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은덕이 있으셨던 것 같았어요. 슬픔을 머금은 것도 벌써 16년이 지났어요. 우리의 삶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 사실을 보여 주셨지요. 어찌 더 큰마음의 파동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아버지란 단어만 들어도 애틋하고 아직도 그 잔재가 그립습니다. 대학 시절 때만 해도 차랑차랑한 목소리,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았는데, 이제 그 모습은 사진과 녹음된 소리로만 들을 수 있는 게 현실이지요. 아버지! 2018년 1월 17일 어머님도 저하고 이별을 했어요. 아버지 때와는 달리 유난히도 매서운 눈보라의 찬바람 속에서 보내 드렸습니다.언젠가는 저 차례가 된다고 생각하면 남은 인생 3막의 삶을 아름답게 정리하며 살아갈까 합니다. 아버님께서 키워 주신 덕분에 저도 중등·대학에 39년간 봉직하고 아직도 사회활동에 보람을 갖고 생활하고 있어요. 살아가는 동안 내 육체는 가보지 못한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안개 같은 인생에 사랑만이 소중한 보물임을 깨닫겠습니다."아! 봄풀은 다시 소생하는데, '아! 나의 아버지' 그리운 이름은 부를 수 없네!아버지(故 김용준 전 교장)를 사랑하는 자식(김차식) 올림.

2020-08-30 15:14:43

[그립습니다] 故 김순금 씨 며느리 소경자 씨

[그립습니다] 故 김순금 씨 며느리 소경자 씨

보고 싶은 시어머니께!방학하면 며느리 힘들다고 항상 곰국 끓였다며 가져가라고 전화하시던 목소리 그립습니다.항상 며느리 바쁘다고 조금이라도 도움 될까 싶어서 밑반찬이랑 채소를 준비해 주시던 그 모습 그립습니다.어머니는 남달리 요리 솜씨가 좋으셔서, 이웃들 돌잔치 결혼식 음식도 다 해주셨던 그 손맛이 그립습니다.어머니가 담가 놓았던 매실 엑기스를 먹을 때마다 그립습니다.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이불홑청을 볼 때도 어머니가 그립습니다.틀바느질 잘하시던 어머니 솜씨 배워보고 싶었는데, 결국은 배우지 못하고 덩그러니 남아있는 재봉틀을 볼 때도 어머니가 그립습니다.살림 솜씨 없는 며느리 대신해서 항상 도시락 밑반찬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점심 먹을 때마다 전 어머니 음식솜씨 자랑을 많이 했었는데, 이제 그 솜씨 제가 따라 갈 수 없어서 아쉽고 그립기만 합니다.얼마 전 아들이 결혼해서 내가 시어머니가 되고 보니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셨는지 넘치게 감사드립니다. 손자 손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돌봐주시고 아이들 운동회 때나 소풍 때도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항상 따라가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직장생활을 중도에 그만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게 어머니 덕분입니다.살아계실 때 맛있는 것 많이 사드리고 함께 놀러 다니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합니다.내가 명예퇴직하고 나서는 요양병원에도 자주 갈 수 있었는데, 퇴직하고 한 달도 안 되어서 돌아가셨으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더 자주 가지 못한 게 죄송하고 또 죄송할 따름입니다.평소에는 워낙 기억력도 좋으시고 일도 열심히 하셔서, 이렇게 치매가 빨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마 중환자실에서 오래 계시지 않고 고생을 덜 하시고 가신 게 위안이 됩니다.어머니 가시던 날은 봄날인데도 흰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자식들이 이날을 오래오래 기억하라고, 하늘이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시아버지 돌아가시고 7개월도 되지 않아서, 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남편도 저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영천호국원에 가서 뵙고 옛날 추억을 되새기곤 합니다.어머니 가신 지 3년이 지났지만, 생활 곳곳에 깃들어 우리 가족을 지켜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어머니 부디 그곳에서 모든 것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세요.어머님!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더운 여름날 어머님 김순금 씨를 생각하면서 며느리 소경자 올림

2020-08-28 11: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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