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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준의 엔터인사이트] 박찬욱 감독의 첫번째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2017년 8월에 박찬욱 감독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아가씨'의 제작 과정이 담긴 백서 '아가씨 아카입'의 출판을 앞두고 인터뷰를 할 기회가 주어진 덕분이었다. 당시에는 봉준호 감독이 넷플릭스와 손을 잡고 '옥자'를 발표한지 두 달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데이비드 핀처 같은 감독이 넷플릭스에서 제작하는 시즌제 드라마 연출을 맡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박찬욱 감독이 시즌제 드라마의 연출이나 넷플릭스와의 협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궁금했다. 박찬욱 감독은 "시즌제 드라마에도 흥미를 갖고 있다"고 답했다. 다만 에피소드 일부만 연출하는 데이비드 핀처와 달리 자신은 전체 에피소드를 연출하길 원할 거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달 후 박찬욱 감독이 TV드라마를 연출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거장 감독의 첫 TV드라마"TV드라마를 하고 싶어서 '리틀 드러머 걸'을 한 것은 아니고, '리틀 드러머 걸'을 하고 싶어서 TV라는 형식을 따라가게 된 거죠." 지난 3월 20일 오후 3시경에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리틀 드러머 걸' 언론시사회에서 1, 2화 상영이 끝나고 이어진 기자간담회에서 박찬욱 감독이 한 말이다.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 감독이 처음으로 연출한 TV시리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원티드 맨'의 원작자이기도 한 존 르 카레가 발표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연출한 작품이기도 하다.1950년대에 영국 정보국에서 실제로 첩보원으로 활동한 바 있는 존 르 카레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단히 사실적인 스파이물을 지칭하는 에스피오나지 소설을 발표해왔고 거장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존 르 카레가 1983년에 발표한 '리틀 드러머 걸'은 그의 작품 중에서 보기 드물게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첩보소설이다.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 시오니스트들과 팔레스타인 독립을 주장하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팔레스타인 영토의 주권을 두고 서로의 진영에 극렬한 공격을 주고 받던 1970년대 후반을 배경에 둔 첩보전을 그리는 작품이다.런던에 거주하는 무명배우 찰리(플로렌스 퓨)는 비밀스러운 오디션을 통해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공작원으로 캐스팅되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핵심부로 접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훈련시키는 모사드의 요원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에게 점차 연모의 감정을 품게 되면서 점차 혼란을 느끼게 된다. 스파이의 세계에 휘말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위태로운 사랑 속에서 사랑을 느끼게 된 감정적 혼란 속에서도 배우로서의 호기심을 놓지 않고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흥미로운 건 '리틀 드러머 걸'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시오니스트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사이에서 첩보전의 주역이 되는 주인공이 영국인 여성이라는 점이다. 이는 최근작인 '아가씨'를 비롯해 '스토커', '박쥐', '친절한 금자씨' 등 인상적인 여성주인공을 앞세운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해온 박찬욱 감독의 경력을 염두에 뒀을 때 흥미로운 흐름이기도 하다. 동시에 남성적인 세계관으로 인식되는 스파이 장르의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무게중심 역할을 해내는 여성 스파이를 그려낸다는 점에서도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양식을 제시할 기회라는 측면에서 적절한 만남처럼 보인다. 게다가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이라는 대가의 입장에서도 호감이 가는 주제로 다가왔을 것이다.주목받지 못한 무명배우였던 찰리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간의 영토 갈등에서 빚어진 피의 역사로 지어 올린 첩보전의 무대에서 스파이를 연기하며 첫 주연을 맡게 된다. 허구적인 캐릭터의 탈을 쓰고 극단적인 대립의 역사를 이어오던 양진영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깊숙하게 대면하게 되는 현실과 마주한다. 딜레마로 점철된 현실 속에서도 완벽하게 자신의 허구적인 소명을 완수해내는 아이러니에 빠져든다. 그 과정에서 '이 쇼의 제작자이자 작가이자 감독'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모사드의 요원 커츠(마이클 섀넌)는 야비한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든 상황을 기획하고 조율하는 역할이란 점에서 감독 입장에서는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밖에 없는 대상처럼 보인다.실제로 커츠 역을 맡은 마이클 섀넌은 한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 입장에서는 커츠와 자신을 동일시할 만하다"고 말한 바 있다. 박찬욱 감독 역시 인터뷰를 통해 커츠가 특별하게 다가왔다고 피력한 바 있다. "커츠는 허구의 세계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디테일을 추구하고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몰두하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다. 지금껏 내가 다뤄보지 않았던 유형의 인물 같다고 생각한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과 커츠의 공통점이 디테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원작과 달리 '디테일, 모든 건 거기서 시작되는 거야'라는 커츠의 대사가 추가된 것도 감독으로서 자신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국내에는 월 정액 스트리밍 서비스로 제공무엇보다도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빨강, 파랑, 노랑 등 비비드한 톤의 색감이 다채롭고 조화롭게 입혀진 공간과 의상은 '리틀 드러머 걸'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찬욱 감독이 품고 있었던 '리틀 드러머 걸'의 미장센에 대한 비전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미술감독이었던 마리아 듀코빅의 참여를 통해 구체화됐다. 마리아 듀코빅의 참여는 박찬욱 감독의 요구가 관철된 결과인데 이는 '리틀 드러머 걸'의 판권을 갖고 있었던 제작자이자 존 르 카레의 아들이기도 한 사이먼 콘웰의 협조 덕분이기도 했다.201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아가씨'로 칸을 찾은 박찬욱 감독은 현지에서 만난 사이먼 콘웰에게 '리틀 드러머 걸' 연출에 관심이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이먼 콘웰은 '리틀 드러머 걸'을 TV시리즈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에게 대본을 보냈지만 그가 큰 관심을 갖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영화에 비견할 만한 안목을 버리지 않는 선에서 연출을 원한다는 조건을 제시했고 제작자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동시에 주연배우로 '레이디 맥베스'에서 호연을 펼친 플로렌스 퓨를 추천했다. 박찬욱 감독은 인지도가 낮은 배우라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반대였다. 플로렌스 퓨는 사이먼 콘웰과 제작사가 캐스팅 1순위로 생각하는 배우였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이 그녀의 이름을 말했을 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고 밝힌 바 있다.물론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에피소드마다 1시간 남짓한 6회 분량의 드라마를 81회차만에 촬영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144분의 러닝타임을 가진 '아가씨'만해도 68회차로 촬영된 것이었다. 기존에 영화를 찍던 관성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 쫓기면서도 다양한 로케이션을 소화해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후반작업을 위해 허락된 시간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국내에서 공개되는 '리틀 드러머 걸'에 '감독판'이라는 부제가 더해진 건 그런 아쉬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공개된 '리틀 드러머 걸'은 해외에서 공개된 버전과 편집이 다르다. 박찬욱 감독의 말에 따르면 제작사와의 견해차이로 삭제된 장면들이 다수 포함됐고, 컷의 편집 순서나 음악이 바뀐 부분도 적지 않다고 한다.흥미로운 건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이 지난 3월 29일 '왓챠플레이'를 통해 공개됐다는 사실이다. 왓챠플레이는 넷플릭스처럼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한 동영상 서비스를 스트리밍 방식으로 공급하는 플랫폼이다. 월정액 방식으로 해당 플랫폼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스마트TV를 비롯해 인터넷이 수신되는 영상 디바이스로 연결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박찬욱 감독이 처음으로 연출한 TV시리즈가 국내에서는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을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박찬욱 감독 입장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편집본을 관객에서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왓챠플레이 입장에서는 박찬욱이라는 대가의 작품을 독점으로 제공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윈윈'하는 결과가 된 것 같다.한편 박찬욱 감독은 차기작을 연출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해외로 나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박찬욱감독은 미국의 아마존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서부극 연출 제안을 수락한 상황이라고 한다. '인터스텔라'의 주연배우 매튜 맥커너히가 주연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박찬욱 감독은 국내 연출작으로 기획 중인 작품의 제작 여건을 살피는 중이라고 한다. 지난 2017년 인터뷰 당시 박찬욱 감독은 기대만큼 투자금이 모이지 않아 제작을 보류했던 영화 '도끼'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한 바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거장 감독이 해외로 나가 작품을 연출할 기회를 얻는 건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자국에서 영화를 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비좁아지는 탓에 연출의 기회를 잡기 위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거장의 현실을 보고 있는 것 같다면, 그저 기우일까? 그런 의미에서 '리틀 드러머 걸'은 거장의 자존심과 고민이 함께 투영된 현실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영화를 가능한한 빨리 보고 싶다.민용준(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19-04-03 12:59:15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민용준의 엔터인사이트] 김혜자라는 존재감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지난 3월 19일에 방영이 종료된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10화가 끝날 무렵 들려진 이 내레이션의 주인공은 바로 김혜자였다. 아마 '눈이 부시게' 10화를 본 시청자라면 김혜자의 음성으로 전해진 이 언어들이 뜨겁게 데운 마음의 온도를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치매 노인의 시선으로 본 세상그전까지 '눈이 부시게'는 종종 마음을 잠기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도 대체로 경쾌하게 와 닿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10화는 그 결말로 종착하기 전까진 이전의 모든 화 중에서 가장 명랑하게 느껴지는 편이었다. 물론 그 결말로 닿기 전까진 지나치게 과장된 판타지처럼 보여서 당황스럽기도 했다.노인을 상대로 보험 사기를 치려는 일당에게 반하다 지하에 감금된 이준하(남주혁)를 구하기 위해 김혜자(김혜자)는 다른 노인들을 규합해 구출 작전을 펼친다. 그리고 늙고 쇠약한 노인들이 건장한 건달들을 피해 지하로 잠입하고 이준하를 구해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노인들은 마치 주성치의 영화를 연상시키듯 허무맹랑한 능력을 발휘한다.이를 테면 시각장애인 노인은 지팡이로 땅을 내리쳐 잠수정의 초음파 레이더처럼 벽 너머의 존재를 감지하는 식이랄까. 그만큼 귀엽고 명랑한 구석도 있지만 9화까지의 흐름에 비해 지나치게 산만하고 과장된 활극을 보는 인상이라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0화에서 벌어진 그 모든 사건들이 사실상 치매에 걸린 노인의 망상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시청자들이 봐온 김혜자의 일상이 모두 다 질환에서 비롯된 착시임을 알게 된 순간, 모두의 마음에 파도가 치고 결국 여운으로 넘쳤을 것이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비애와 공허로 출렁이는 슬픔과 허무의 바다를 각자의 마음으로 느꼈을 것이다.'눈이 부시게'는 9화까지만 해도 타임슬립 즉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통해 미묘한 긴장을 일으키는 동시에 유머를 구사하는 드라마였다. 참신했다.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노인문제라는 작금의 시대상과 연결하며 탁월하게 동시대 현실을 관통했다. 10화 말미에 밝혀진 반전이 시청자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던 것도 9화까지의 서사가 노인들의 삶에 대한 공감대를 생생하게 쌓아 올려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눈이 부시게'에서 눈이 부시게 극적이었던 바로 그 순간, 배우 김혜자가 있었다.◆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배우, 김혜자1941년생 그러니까 올해로 79세. 배우 김혜자는 오랫동안 국민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1980년에 시작해 2002년에 끝난 무려 22년간 방영된 '전원일기'에서 김혜자는 이은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지만 시청자들에게는 남편인 김 회장의 아내 혹은 아들인 용식이 어머니로 통했다. 그리고 김혜자를 어머니의 대명사로 연상하도록 만든 건 아무래도 '그래, 이 맛이야'라는 유명한 대사로 잘 알려진 조미료 광고였다. 그렇게 김혜자는 한국의 어머니상을 대변하는 배우로 여겨졌다.지난 2009년 김혜자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에게 어머니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자식들에게는 폐가 되는 엄마일 거예요. 항상 한심한 말이나 하고, 오히려 자식들한테 밥 좀 먹으라는 얘기를 몇 번씩 들으면서 밥도 얻어먹고. 그러니까 제가 대표적인 엄마상이라는 건 어폐가 있는 일이죠. 그냥 제가 그동안 배우로서 어머니 역할을 잘 해왔으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엄마로서 내 생활은 엉터리였어도."김혜자는 전형적인 어머니상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나는 김혜자가 실제로 모성애가 넘치는 어머니가 아니었다는 사실보다도 그렇게 자신이 살아왔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김혜자의 답변이 흥미로웠다. 그만큼 김혜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배우였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실제로 그 직전 김혜자는 국민 어머니라는 수식어를 배반하는, 남다른 어머니를 연기했던 터였다. 2008년에 방영됐던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말이다.제목처럼 '엄마가 뿔났다'는 결혼 후 30여 년간 성실한 아내이자 엄마이자 며느리로 살아온 여자의 각성과 일탈을 그린 드라마다. 김혜자가 연기한 한자는 시댁살이를 하며 시누이 뒷바라지에 세 아이까지 키우며 환갑을 넘긴 나이에 가족을 향해 그 모든 의무감에서 벗어나 안식년을 갖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심지어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에게 방을 하나 내줄 것을 요구한다. 당황한 가족들 중 일부는 타이르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 고집을 꺾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지난 세월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한자는 상당히 선구자적인 면이 있는 엄마죠. 그리고 이젠 그런 시대가 올 거예요. 가족만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는 점점 없어질 거라 생각해요." 김혜자의 말처럼 그는 '전원일기'보다는 '엄마가 뿔났다'에 가까운 엄마이고 그 이전에 여성이었다. 시대가 그를 국민 어머니라 칭송하게 만든다 해도 그는 김혜자로서의 삶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철학과 일치하는 존재를 연기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배우가 됐고, 인정받았다. 그 누구보다도 배우로서의 삶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저는 직업이 배우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냥 삶이었지. 제가 연기를 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을 때가 오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살아있다 해도 제가 연기하고 있지 않다면 그냥 반쪽의 저만 있는 거니까요. 물론 그 반쪽의 삶은 살고 있겠지만 배우로서의 저는 죽은 거죠." 김혜자는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를 넘어 연기하기 위해 살아가는 배우였고, 배우다. 그럼으로써 여전히 배우로서 형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대중의 이목을 끄는, 실로 다시 보기 힘들 마지막 배우일지도 모른다. '눈이 부시게'에서 김혜자는 바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기한다. 김혜자를 김혜자가 연기한다. 그래서 '그래, 이 맛이야'라는 패러디는 보다 짜릿한 감칠맛을 내는 유머가 되고, 김혜자의 언어와 행동은 우리가 보고 싶었던 배우의 말과 삶으로 전해지는 것만 같다. 나는 2009년 당시 인터뷰에서 김혜자가 죽음에 대해 말할 때 굉장히 인상적이라 생각했다. 김혜자는 종종 김중만 작가의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영정 사진을 준비한다는 건 언제나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처럼 들렸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말했어요. 예쁜 사진만 보면 '이거 영정사진으로 써야지'라고. 습관처럼 입에 달고 다녀서 우리 애들이 질색할 정도죠. 그런데 저는 항상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요. 그리고 언제가 돼도 상관없어요. 저는. 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죽음이 그렇게 두렵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오래 사는 게 이상하다니까요. 물론 이런 말 해도 저희 애들은 질색하죠." 여전히 선하다. 은은한 미소가 번진 표정으로 자신의 죽음과 생의 끝을 덤덤하게 말하던 그 얼굴이. 문득 70대의 나이에 그렇게 여유롭고 낭만적인 기품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이의 오늘이란 어떤 것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김혜자는 배우로서 오래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랑했기 때문에 배우로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연기를 해온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서 연기를 해왔다. 그래서 나는 김혜자 같은 배우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 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라는 대사를 현실적인 울림으로 전할 수 있는 배우란 언제나 귀하고 중한 법이니까. 무엇보다도 지금의 세상에는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므로. 배우 김혜자가 좀 더 오랫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길 바라는 건 그래서다. 이 세상이, 김혜자라는 배우를 보다 오래 만났으면 좋겠다. 민용준(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19-03-27 11:54:17

성접대 의혹을 받는 빅뱅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14일 오후 서울지방경찰청으로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용준의 엔터인사이트]승리와 정준영의 단톡방이 남긴 것

지난 1월 28일 에서는 강남에 위치한 한 유명 클럽에서 폭행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클럽을 찾은 한 손님이 클럽의 이사와 보안요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전치 4주의 상해를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2018년 11월 24일에 벌어진 사건의 정황이 2개월이 넘은 시점이 돼서야 보도된 것도 특이했지만 클럽을 찾은 손님들 간의 문제가 아니라 클럽 관계자가 폭행을 감행한 가해자로 지목됐다는 것도 조금 기이했다. 어쨌든 단순한 폭행 사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버닝썬 폭행사건으로 열린 판도라 상자잘 알다시피 그 이후 상황은 일파만파였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자리한 클럽 버닝썬에서 벌어진 폭행 사건은 이후 클럽 운영자와 경찰의 유착 의혹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버닝썬에서 마약 유통과 투약이 빈번이 발생하고 있으며 소위 물뽕이라 일컫는 마약류 약물을 먹이고 항거불능 상태가 된 여성을 성폭행하는 범죄행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폭로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클럽 관계자가 알고도 방조하거나 오히려 이를 VIP로 분류된 손님에게 알선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실제로 클럽 관계자가 '여성흥분제 판매를 중단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정황이 포착되면서 의혹이 실체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 있는 인물로 지목된 것은 버닝썬의 사내이사로 재직했던 가수 승리였다. 한류스타 빅뱅의 멤버인 승리는 최근 몇몇 방송을 통해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이미지를 굳혀 나가고 있었다. 버닝썬 역시 승리가 운영하는 사업체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MBC의 예능프로그램 에 출연하며 자신이 새롭게 오픈한 클럽이라며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버닝썬과 관련된 각종 범죄 의혹이 불거지자 승리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대외적으로 클럽을 알리는 역할'이라며 '실질적인 클럽 경영과 운영은 제 역할이 아니었다'며 버닝썬과의 관계에 선을 그었다. 승리의 소속사인 YG 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 역시 승리를 두둔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승리는 3월 군입대가 예정됐다는 이유로 버닝썬 사내이사직을 사임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버닝썬과 승리의 관계는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지난 2월 26일 에서는 승리가 해외투자자를 상대로 성접대를 주문했다는 내용이 담긴 카카오톡 대화를 입수했다며 그 내용을 공개했다. 내용에 따르면 승리가 동업자들에게 해외에서 온 투자자들에게 유명 클럽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동시에 동석시킬 여자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것. 그리고 메시지 대화상에서 '잘 주는 애들'이나 '창녀들'이라는 단어를 동원됐으며 이는 일종의 성접대를 알선했다는 혐의가 추정될 만한 사안이었다. YG엔터테인먼트 측에서는 이에 대해 '조작된 문자 메시지'라며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내놓았으며 '가짜 뉴스를 비롯한 루머 확대 및 재생산 등 일체의 행위에 대해 법적으로 강경 대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승리가 포함된 해당 메신저 대화를 입수해 조사한 경찰 관계자는 해당 대화가 조작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했고 승리는 성매매 알선 혐의로 입건된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 이후로 해외 원정 도박 및 외환관리법 위반 논란과 각종 탈세 의혹 등 승리를 둘러싼 다양한 범죄 의혹이 제기됐다. 그리고 3월 11일, 를 통해 승리와 정준영이 포함된 단톡방에서 성행위 영상을 불법 촬영하고 공유됐다는 정황이 보도되면서 버닝썬 사건의 파장이 연예계로 이어졌다. 2016년에 성행위 과정을 불법 촬영한 혐의로 기소된 바 있었지만 고소인이 고소를 취하하고 검찰 수사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던 정준영이 다시 한번 불법 영상 촬영을 했다는 정황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동시에 단톡방에 연예인이 더 포함돼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결국 '하이라이트'의 용준형과 'FT 아일랜드'의 최종훈, '씨엔블루'의 이종현이 그 당사자라는 것이 드러나며 파문이 확산됐다. 이들은 각각 자신이 소속된 그룹에서 탈퇴한 뒤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실명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행동을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밝혀왔다. ◆단순 연예인 스캔들에 그쳐서는 안돼승리와 정준영의 혐의에 대한 경찰 수사는 아직 진행 중이다. 아직 그들에게 씌워진 혐의가 유죄라는 판결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적인 판결 여부를 떠나 승리와 정준영을 비롯한 그들만의 단톡방에서 벌어진 일련의 대화 양상을 봤을 때 그들이 과연 대중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들이었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최근 몇몇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성공한 사업가라는 위상까지 얻었다. 방송에서는 승리가 사업가로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세계적인 인기를 가진 아이돌 스타를 넘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사업가로서의 철학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승리의 새로운 사업체로서 버닝썬이 노출되기도 했다. 방송사가 승리에게 성공한 사업가라는 후광을 만들어주는데 일조한 공범이라 지목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랄까. 물론 방송사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모든 출연자의 일상을 검증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내용을 거창하게 부풀리는데 일조했다면 그 역시도 문제라는 것이다. 최소한 승리를 성공한 사업가로 보이게끔 일조한 방송계 관계자들은 이번 사태를 각성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동시에 멀끔한 이미지로 대중의 인기를 얻어온 남성 연예인들이 단톡방에 모여 여성을 오로지 성적인 대상으로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주고받은 정황은 그들 대부분이 여성 팬덤을 기반으로 지금의 입지를 다진 젊은 아이돌 멤버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뒀을 때 더욱 충격적이다. 연예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적 요구를 하는 것에 동의하진 않지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의 범죄 행위가 대중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이에 대한 엄중한 법적 판단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사건은 젊은 남성 연예인들이 집단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성관계를 불법 촬영한 영상을 서로에게 공유하며 암묵적인 범죄 카르텔 양상을 보여줬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승리가 출연한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승리의 외장하드에 존재한다는 다량의 '야동'을 언급하며 이를 희화화한 바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가 남성들의 '야동' 문화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비뚤어진 성의식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만한 계기처럼 보인다. 최소한 방송에서 '야동'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인 언어처럼 인식되지 않도록, 성의식을 왜곡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가히 '승리 게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닌, 승리와 정준영을 비롯한 남성 연예인들의 왜곡된 성의식을 보여준 이번 사태는 한국 남성 사회의 한 단면을 축소판처럼 보여준 사건처럼 보인다. 최근 SNS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한 남성들의 인식을 묻는 영상이 공유되기도 했는데 '연예인이라서 너무 크게 이슈가 된 거 같다'거나 '남자라면 야동을 보고 싶어하기 마련이고 친구와 돌려보고 싶기도 하다'는 답변을 서슴지 않고 내놓는 남성들의 태도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승리와 정준영을 비롯한 남성 연예인들이 단톡방에서 보여준 일련의 대화와 행위들은 현재 한국 남성들이 자연스럽게 소비하는 음성적인 성문화가 잘못된 성의식을 잉태하고 끝내 성범죄에 대한 인식까지 흐린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사례가 될 것 같다. 그만큼 이번 사건은 단순히 연예계의 스캔들이 아니라 범사회적인 문제를 진단하는 기회로 인식돼야 마땅하다. 동시에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성의식을 되짚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도, 미디어도, 이 사건을 주시하는 동시에 경계해야 한다. 이 사건이 단순히 승리와 정준영을 둘러싼 진실게임으로 소비하고, 그에 관한 가십에 탐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더 이상 '위대한 승츠비'에 관한 드라마가 아니니까. 민용준(대중문화칼럼니스트)

2019-03-20 14:07:55

넷플릭스 영화 '블랙미러 : 밴더스내치'

[민용준의 엔터인사이트] 이것은 게임인가, 영화인가?

1984년 7월 9일 오전 8시 30분, 스테판(핀 화이트헤드)은 리버풀의 5인조 밴드 '프랭키 고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se to Hollywood)'의 경쾌한 넘버 'Relax'를 듣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화장실에서 알약 두 개를 삼키고 거실로 나와 서먹하게 인사한 아버지와 식탁에 마주보고 앉은 스테판은 책장을 넘긴다.스테판은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읽었다는 '밴더스내치'라는 책을 동명의 게임으로 개발 중이라 한다. '벤더스내치'는 독자가 직접 이야기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집필된 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테판은 천재적인 게임 개발자로 꼽히는 콜린 리트먼(윌 폴터)이 소속된 게임 회사 터커소프트를 찾아가 게임 데모를 보여주고 정식 출시 계약을 의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아침 식사로 시리얼을 권한다. 두 가지 종류의 시리얼 중 하나를 선택하길 권한다. 그러니 선택해야 한다. 스테판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을 당신이 말이다.◆영화의 결말도 선택할 수 있다? 인터렉티브 서사 형식의 영화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영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이하, '밴더스내치')는 시청자가 이야기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당신이 선택하지 않으면, 혹은 정해진 시간 내에 선택하지 못하면 넷플릭스가 선택한다. 어떤 식으로든 '밴더스내치'가 제시하는 두 방향 중 한쪽으로 가게 돼있다는 말이다. 즉 적극적으로 방향을 선택할 수도 있고, 수동적으로 선택된 방향을 따라갈 수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는 계속 진전된다. 하지만 전진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후진도 가능하다. 이를 테면 극 초반에 찾아온 선택지에서 내린 결정에 따라 이야기 자체는 20여 분만에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는데 그게 끝이 아니다. '밴더스내치'는 시청자가 끝내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허망하게 찾아온 이른 결말 외에 다른 선택의 결과를 보고 싶다면 '돌아가기'를 선택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 리셋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은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되풀이가 가능하다.'밴더스내치'의 공식적인 프로그램 소개에는 러닝타임이 1시간 30분이라 명시돼 있다. 하지만 '밴더스내치'를 끝까지 본 이들 대부분의 시계는 1시간 30분보다 더 많이 돌아갔을 것이다. 선택에, 선택에, 선택을 거듭할 때마다 달리 진전되는 상황들을 마주하다 보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호기심을 끊을 수 없다.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리길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주저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넷플릭스라는 정액제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을 이용하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리플레이를 반복한다해서 추가비용이 들어갈 일도 아니다. 반대로 그 모든 과정을 확인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밴더스내치'가 제시하는, 인터랙티브 서사 형식은 넷플릭스라는 플랙폼에 최적화된 시도인 셈이다.서사적인 측면에서 '밴더스내치'가 새로운 판본인 것은 아니다. 사소한 선택이 판이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나비효과' 류의 설정과 동시간대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세계를 상상하는 '평행 우주'적 세계관은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동어반복된 것이다.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리셋 방식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타임슬립 영화의 유사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밴더스내치'는 시청자가 직접 나비효과를 선택하고, 평행 우주를 수집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온다. 선택을 반복할수록 앞서 목격했던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재조립되면서도 크고 작은 디테일을 수집할 수 있다. 선택 사항에 따라 인과의 경험이 달라지고, 결말의 양상도 달라진다. 그 과정에서 관람의 목적이 변하는 것 같다. 선택을 번복할수록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보다 이야기를 수집하고 싶다는 소유욕이 커진다. 새로운 선택지가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점점 적극적으로 선택을 번복하게 된다. 이는 게임 내에 숨겨진 '이스터 에그'를 수집하는 재미와 흡사하다.그러니까 이것은 영화인가, 게임인가. '밴더스내치'는 아이러니한 영화다.'밴더스내치'는 게임의 묘미로 관객을 유인한다. 주인공이 죽으면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게임과 같다. 리셋이 가능하다. 앞서 선택하지 않은 인과를 선택해 플레이할 수 있다. 하지만 막힌 벽으로 뛸 수 없는 캐릭터처럼 '밴더스내치'의 서사도 모든 방향으로 뚫린 이야기는 아니다. 다양한 인과와 결말을 갖고 있지만 무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선택이 거듭될수록 이것이 우회전과 좌회전을 마음대로 허용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꾸 오른쪽 깜빡이에 불이 들어온다. 그 순간에도 좌회전을 선택하는 건 역시 자유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우회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리고 '밴더스내치'의 결말은 하나같이 비극적인 정서로 수렴한다.각기 다른 결말을 하나씩 수집할 때마다 '밴더스내치'가 해피 엔딩을 고려하지 않은 작품임을 실감하게 된다. 게임의 문법을 빌려왔지만 지극히 영화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선택이 어찌 됐건 이야기의 큰 흐름은 되돌려지지 않는다. 길을 선택할 기회를 주지만 목적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끝내 이야기의 결정권을 쥐는 것은 시청자가 아니라 창작자다.◆곳곳에 숨겨진 이스터에그로 흥미유발1시간 30분으로 명시된 러닝타임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체험했을 때 5시간 12분 13초까지 확장된다고 한다. 넷플릭스에서 인정하는 결말은 5개 정도라고 하지만, 각본가 찰리 브루커는 그것보단 많다고 말했고, 프로듀서 러셀 맥리언은 10개에서 12개 정도까지 변형된 결말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연출한 감독 데이비드 슬레이드는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이 결코 보지 못할 장면들, 즉 '골든 에그'가 존재한다며 숨겨진 이스터 에그의 존재를 시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떡밥이 되기도 하지만 몇 차례 플레이한 입장에서는 그만큼의 선택을 다시 거듭해야 한다는 피로감으로 대체된다. 마치 영동대교로 건너야 할지, 동호대교로 건너야 할지, 자꾸 어느 방향으로 갈지 묻는 택시 기사를 재차 만난 기분이랄까.무엇보다도 5시간 가까이 유사한 장면을 되돌려가며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경우의 수를 이루는 서사의 조각들이 일정한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다양한 인과로 진전되는 각기 다른 서사로부터 완성도의 편차가 느껴진다. 어떤 행위는 어떤 결말을 낳기 위한 수단 이상의 가치가 없어 보여서 해당 서사 자체가 잉여처럼 와닿고, 어떤 행동은 그저 과격한 충동으로 시청자를 몰아넣는 충격요법에 불과한 눈속임처럼 보여서 가증스럽다. 그래서 오히려 1시간 30분 분량으로 선별된 서사를 바탕으로 편집된 '밴더스내치'가 어떤 영화일 수 있었을지 되레 궁금해지기도 한다.그럼에도 흥미로운 콘텐츠라는 점은 확실하다. 콘텐츠와 소비자가 일대일로 매칭되는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에서 가능한 최상의 시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충실한 내면의 디테일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작품처럼 보인다.'벤더스내치'는 1980년대의 주류 게임사였던 이매진 소프트웨어에서 실제로 개발하던 비디오게임 프로젝트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밴더스내치'가 시작되는 1984년 7월 9일은 이매진 소프트웨어가 도산한 날이라고 한다. 또 극 중에서 '벤더스내치'의 원작자로 등장하는 제롬 F. 데이비스 역을 맡은 이는 전문 배우가 아니라 1980년대 당시 8비트 비디오게임 디자이너이자 프로그래머였던 제프 민터라고 한다. 이처럼 깨알 같은 이스터 에그는 다시 한번 플레이하고 싶게 만드는 진심으로 와닿는다. '밴더스내치'가 던지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남기고 싶은 건 그래서다. 영화도 리셋이 될까? 그렇다. 오직 넷플릭스에서만.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19-03-13 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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