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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

[정덕현의 엔터인사이트] '아스달 연대기'에 깃든 글로벌 콘텐츠의 향기

최근 한국드라마가 단단했던 과거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오고 있다. 그 새로운 세계는 다름 아닌 글로벌 시장이다. 넷플릭스와 왓차플레이 같은 글로벌 동영상 서비스업체들이 글로벌 콘텐츠들을 우리네 시청자들 앞에 내놓으면서 본격화된 변화다.◆'아스달 연대기'에 '왕좌의 게임' 베끼기 논란이 나온 건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는 방영 이전부터 '왕좌의 게임'과의 비교에 시달렸다. '왕좌의 게임'의 원제인 '불과 얼음의 노래'를 본따 '아스달 연대기'를 '마늘과 쑥의 노래'라고 비교하고, 심하게는 '표절의혹'까지 제기한다. 그 근거로서 '왕좌의 게임'과 '아스달 연대기의 의상, 미술의 유사성과,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북측 얼음장벽과 '아스달 연대기'의 대흑벽이라는 설정이나, '왕좌의 게임'의 7왕조와 '아스달 연대기'의 새녘족, 흰산족, 해족 같은 종족 구분의 유사성이 제시되었다. 의상이나 미술에 있어서 실제로도 유사한 점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얼음장벽과 대흑벽 설정이나 종족 구분 같은 것들은 두 작품이 확연히 다른 지점이다. 무엇보다 두 작품은 그리려는 세계 자체가 다르다. '왕좌의 게임'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말 그대로의 7왕국의 쟁투와 그 모든 걸 엎어버리는 더 큰 위협을 중요한 메시지로 담고 있다면, '아스달 연대기'는 아스달족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정복전쟁에 맞서 자연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와한족의 전사 은섬(송중기)의 대결이 중요 메시지다. 즉 '아스달 연대기'는 좀 더 문명의 발달과정을 정복과 수탈의 과정으로 보는 문화인류학적 비판의식이 담긴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여기서 흥미로운 건 '아스달 연대기'가 '왕좌의 게임'을 베꼈는가 아닌가의 문제보다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대중들의 눈높이다. '왕좌의 게임' 같은 작품들을 이미 본 우리네 시청자들이 많다는 이야기고, 그러니 '아스달 연대기'가 비교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상륙하기 이전부터 우리네 대중들은 인터넷을 통해 해외의 드라마들을 보고 있었다. '프리즌 브레이크'가 신드롬을 일으키고 그 주인공인 마이클 스코필드를 우리식으로 '석호필'이라 부르는 해프닝은 이미 2006년부터 생겨났던 일이었다. 그렇게 미드나, 일드, 영드를 보던 대중들은 이제 넷플릭스가 본격 국내에 상륙하면서 마음껏 해외의 드라마들을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게 됐다. 이제 이런 해외의 드라마를 보는 일은 일부 마니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편적인 시청이 됐다. 넷플릭스의 본격 한국 진출과 함께 왓차플레이 같은 국내의 서비스가 생겨났고, 이렇게 다양화된 글로벌 플랫폼 속에서 '왕좌의 게임'을 '몰아보는' 새로운 시청패턴까지 생겨났다. 이러니 비교가 자연스러워진다. ◆'미스터 션샤인', '킹덤' 그리고 '아스달 연대기'에 담긴 글로벌마치 구한말에 해외 열강들이 몰려들어와 미국, 일본, 중국, 프랑스 등등 다국적 문화가 혼재되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듯이, 지금 인터넷을 타고 열린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들은 국내의 콘텐츠 시장을 휘젓고 다니고 있다. 이제 국내 콘텐츠들은 과거처럼 '우물 안 개구리'로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게 됐다. 이미 열린 세계에 적응하고, 오히려 이를 기회요소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여기에 마침 해외에서 들어온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은 '현지화' 전략으로서 우리네 콘텐츠에 적극 투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약 400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미스터 션샤인'에 넷플릭스는 300억원을 들여 판권을 구매했고, '킹덤'은 아예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200억의 제작비를 투자했다. 또 '아스달 연대기' 역시 넷플릭스는 상당한 비용을 치러 선 판권을 구매했다고 한다.그런데 이러한 커진 제작비와(물론 미드 등과 비교하면 아직은 적은 수준이지만), 그 제작비에 넷플릭스 같은 해외 자본이 투입되고, 그것이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독점 혹은 동시 방영된다는 사실은 당연히 콘텐츠의 내용과 형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미스터 션샤인'과 '킹덤' 그리고 '아스달 연대기'가 이런 글로벌 프로젝트의 향기가 묻어나는 작품이라는 건 그래서 우연적인 일이 아니다.'미스터 션샤인'은 과감하게도 일제강점기 의병들의 항일 투쟁을 소재로 하면서도 곳곳에 글로벌한 장르적 색채들이 집어넣었다. 물론 그 구한말이라는 시점 자체가 다국적 문화가 겹쳐진다는 점도 우연적인 선택이라 보긴 어렵다.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과 프랑스, 미국 등의 문화가 더해진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대결을 벌이는 대목에서는 사무라이 무비나 서부극의 장르적 특색까지 엿보인다. 글로벌 콘텐츠로서 '미스터 션샤인'은 구한말이라는 지점을 제대로 배경으로 세우면서 그 위에 보편적인 사랑이야기와 특수한 한일관계의 문제를 균형있게 담아냈다. '킹덤'은 아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좀비 장르를 구현해냈다. 우리네 '아귀'를 좀비로 해석해내면서 그 굶주린 민초들의 형상을 그 안에 투영시켰다. 전 세계인들에게 익숙한 좀비 장르에 우리네 조선시대의 특수함이 더해져 '킹덤'은 독특한 글로벌 콘텐츠가 되었다. 이런 사정은 '아스달 연대기'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가 역사 이전의 선사시대를 시공간으로 다루고 있다는 건, 민족적 특수성이 나타나기 이전 글로벌한 보편적 세계를 그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문화인류학적 메시지를 가져온 건 '아스달 연대기'가 우리의 고조선 건국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글로벌 콘텐츠의 낯설음 혹은 새로움그렇다면 이렇게 우리가 새롭게 추구하기 시작한 이른바 '글로벌 콘텐츠'들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들은 어떨까. 사실 국내 드라마라고 하면 그 근간이 주로 멜로드라마, 사극, 가족드라마 그리고 여기에 최근 급성장한 장르드라마 정도를 떠올린다. 제작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따라서 비현실적 판타지보다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주로 소재로 다뤄진다. 멜로드라마가 그토록 많았다는 건 그것이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었다. '겨울연가'나 '미남이시네요'처럼 적은 제작비로도 달달하고 특색 있는 멜로는 의외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한류의 문을 두드린 바 있다. '대장금' 같은 사극 또한 그 독특한 세계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며 글로벌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내 드라마의 새로운 경향은 장르물로 넘어가고 있다. 미드나 일드 등에 영향을 받은 결과다.하지만 이제 글로벌 콘텐츠들은 이런 장르물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좀 더 독특하거나 큰 스케일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제작규모는 커졌고,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판타지적 소재들도 이제 갈 수 없는 곳은 없어 보인다. '아스달 연대기' 같은 상상의 공간이 드라마의 소재로 시도되고 있는 건 그만큼 한국 드라마의 자신감도 커졌고 꾸는 꿈도 커졌다는 걸 잘 말해준다.그렇지만 이제 막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변화는 대중들에 따라 낯설거나 새로운 양극단의 반응으로 나뉘어진다. "도대체 저게 드라마야?"라고 묻는 낯설음이 있는 반면, "우리 드라마도 이런 시도를?"하며 반색하는 새로움이 있다. 물론 여전히 갈 길은 멀다. 보다 글로벌에 일찍 뛰어든 선진화된 해외의 콘텐츠들이 만들어낸 세계의 튼실함과 비교해보면, 우리의 첫걸음은 아직 어설퍼 보이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걷다 보면 길도 생기고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조금씩 걸어 나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걷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네 글로벌 드라마들이 만나게 해줄 수도 있을 테니.

2019-06-12 09:46:23

[정덕현의 엔터인사이트] '기생충', 봉장르의 진수를 보여주다

보통 영화제 수상작은 깊이는 있지만 넓이는 없다는 게 통설이다. 이른바 예술로서의 가치는 충분하지만 대중성은 떨어진다는 것.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은 다르다. 여기서는 봉준호 감독 특유의 깊이와 넓이의 조화가 보인다.◆그냥 봐도 재밌지만 들여다보면 더 재밌는영화 '기생충'의 첫 장면은 반 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네 집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다. 영화에서 창이란 소재는 영화의 관점을 드러내곤 한다.'기생충'은 반 지하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을 그린다. 그런데 그 광경이 흥미롭다. 사람의 눈높이보다 살짝 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때론 차가 지나간다.어두워진 밤이면 취객이 다가와 전봇대를 잡고 토악질을 하기도 하고 때론 노상방뇨를 한다. 그걸 보고 있는 기택네 가족들의 리액션이 더해지면서 이 광경들은 웃음이 빵빵 터지는 장면을 연출한다.이를테면 간만에 가족이 모여 고기 좀 구워먹으려는데 누군가 토를 하고, 맥주 좀 마시려는데 취객이 노상방뇨를 하는 장면이 교차되면서 만드는 웃음이다.이처럼 '기생충'은 그 자체의 상황이 만들어내는 웃음이 있다. 하지만 만일 이 반지하라는 공간을 우리네 사회의 계급적 구조를 표징하는 것으로 의미화해서 바라보면 더 재밌는 영화적 경험들이 가능하다.반지하는 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도 아닌 그 중간에 걸친 어떤 위치라는 점에서 계급의 경계가 애매한 지점이다.'기생충'은 결국 이 반지하에 사는 기택네 가족이 햇살 가득한 지상에서 살아가는 박사장(이선균)네 가족과 어우러지면서 생겨나는 파열음을 그린다.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존재하지만, 박사장네 가족이 보지 않을 때 기택네 가족은 무시로 그 선을 넘나든다. 그 과정은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선을 넘는 짜릿함이 있고, 그것이 발각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존재한다.누군가는 숨고 누군가는 찾으려는 그 욕망은 마치 숨바꼭질 같은 근원적 재미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 경계를 넘는 일들이 은폐되어 있을 때만 해도 모든 게 평화롭게만 느껴지던 이 계급의 풍경은 어느 순간 정체가 드러나며 파국에 이르게 된다.그 과정은 마치 바퀴벌레의 출몰을 떠올리게 한다. 어둠 속에 숨어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막상 불빛 속에 튀어나와 있을 때는 난장판을 만들어버리는 이질적 존재가 만들어내는 불안감.기택네 가족이 박사장네 가족과 섞이는 과정들은 이처럼 그 자체로도 흥미진진하지만, 어디선가 우리가 겪었던 기생충 혹은 바퀴벌레 경험 같은 것들을 거기서 떠올리고 그러한 '기생의 삶'이 어쩌면 우리네 삶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그 블랙코미디적 희열이은 더욱 커진다. 이것이 이른바 '봉장르(봉준호 장르)'라 불리는 세계다. 그냥 봐도 재밌지만 들여다보면 더 재밌는. ◆이미 '지리멸렬'에서부터 추구됐던 풍자의 세계놀라운 일이지만 봉준호 감독의 이런 블랙코미디적 풍자의 세계는 그가 영화아카데미 시절 만든 첫 작품이었던 '지리멸렬'(1994)에서부터 지금껏 일관되게 추구된 것들이다.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지리멸렬'의 첫 에피소드 제목이 '바퀴벌레'라는 사실은 그래서 '기생충'을 보고 다시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도색잡지를 보다 여학생에게 들킬 뻔한 교수가 책을 던져 잡지를 가린 후, "무슨 소리냐"는 질문에 "바퀴벌레가 있어서"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봉준호 감독의 세상을 꼬집는 위트가 이미 '지리멸렬'에서부터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봉준호 감독 특유의 세상을 바라보는 풍자적 시각을, 그만의 독특한 색깔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요인은 장르를 비틀고 변주하는 그의 연출방식이다. 장편 데뷔작이었던 '플란다스의 개'는 시끌벅적한 소동극 속에 사회극을 심었고, '살인의 추억'은 필름 누아르에 사회풍자를 더해 넣었다.괴수물로서의 '괴물'은 위기에 대처하는 콘트롤타워의 부재를 담는 블랙코미디가 뒤섞였고, 범죄 미스터리를 담은 '마더'는 모성애의 또 다른 잔인한 얼굴을 그려냈다.SF 장르로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렸던 '설국열차'는 놀랍게도 질주하는 열차를 자본주의 시스템을 표상하는 공간으로 표현해냈고,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온라인 전 세계 방영을 시도했던 '옥자'는 모험극에 인간과 동물 사이의 사랑이야기를 휴머니즘으로 담아냈다.이러한 봉준호 감독의 장르 비틀기는 그 자체로 독특한 유머를 만들어내는 장치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살인의 추억'의 그 살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수사반장'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주는 풍자적 웃음을 경험했고, '괴물'로 인해 파괴되는 서울의 풍경 속 한 가족이 겪는 비극 속에서도 이를 대처하는 시스템의 무능을 고발하는 통쾌한 웃음을 터트린 바 있다.모성애의 잔인함을 담아낸 '마더'는 그 엔딩에서 보여진 김혜자의 춤사위로 섬뜩함과 웃음이 뒤섞인 그 느낌을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기생충'도 마찬가지다. 시종일관 빵빵 터지는 블랙코미디적 웃음은 후반으로 가면 묵직한 울림으로 변주된다.◆공간으로 담아내는 봉준호 감독의 풍자 세계'지리멸렬'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바퀴벌레"가 그의 풍자적 성향을 드러냈다면, 두 번째 에피소드인 '골목 밖으로'는 봉준호 감독 특유의 공간에 대한 해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어느 집 앞에 배달된 우유를 마치 자기 집이나 된다는 듯 까먹고는 심지어 신문배달원에게 하나를 건네는 뻔뻔한 신문사 주필. 조깅을 하는 주필이 떠나고 나자 집주인에게 우유도둑으로 몰리고, '신문사절' 통보를 받은 신문배달원이 골목에서 주필과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을 통해 봉준호 감독은 골목을 미로 속에서 진실을 찾는 당대 언론의 풍경으로 상징해낸다.공간으로 담아내는 봉준호 감독의 풍자 세계는 '괴물', '설국열차'에서도 빛을 발한다. '괴물'은 '한강의 기적'으로 지칭되는 한강이라는 공간을 가져와 그 곳이 사실은 괴물을 잉태하는 공간이었다고 해석해낸다.'설국열차'는 꽁꽁 얼어붙은 빙하의 시대에 같은 레일을 빙빙 도는 열차라는 공간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굴러가는가를 그려낸다.꼬리 칸에서 머리 칸으로 가는 여정을 마치 미식축구 경기를 보듯 하나의 미션 클리어 과정으로 담아내는 영화는 그 칸 하나를 오를 때마다 윗계급의 달라진 풍경들을 보여준다. 결국 이 계급상승의 욕망으로 인해 멈추지 않고 달리는 열차라는 공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동력을 보여준다.'기생충'은 이 공간으로 담아내는 봉준호 감독의 풍자 세계를 거의 극점으로 보여준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반지하와 지상 그리고 지하라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너무나 다른 삶이 대비된다.그 공간들은 보이지 않는 계급의 선에 의해 나뉘어져 있지만, 냄새라는 지울 수 없는 인간의 흔적은 그 선을 넘는다. 봉준호 감독은 이렇게 누군가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낮은 지대에서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가 다시 그 곳에서 밑바닥으로 내려오는 그 공간의 이동을 통해 그려낸다.이처럼 봉준호 감독이 구축해온 그만의 장르적 세계는 깊이(완성도)와 함께 넓이(대중성)를 모두 만족시키는 쉽지 않은 성취를 해낸다.보다 쉽게 공간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풍자적으로 상징하고, 익숙한 장르적 틀을 비틀어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봉장르의 세계는 완성되었다. 그냥 봐도 재밌지만, 한층 들여다보면 더 재밌는.

2019-06-05 11:03:29

드라마 '봄밤'

[정덕현의 엔터인사이트] '봄밤', 안판석 감독의 멜로는 무엇이 다를까

안판석 감독이 '봄밤'을 들고 돌아왔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쓴 김은 작가에 정해인이 출연했다는 점에서 '봄밤'은 전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안판석 감독의 멜로는 무엇이 다른 것이며 그것은 왜 비슷한데도 또 사람들을 빠져들게 만드는 걸까. ◆과 는 다른가안판석 감독과 김은 작가 그리고 배우 정해인. MBC 수목드라마 의 라인업은 여러모로 JTBC 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유사성을 확증이라도 하듯, 조연들 중 많은 배우들이 이른바 '안판석 사단'으로 불리는 이들로 채워졌다. 길해연, 주민경, 오만석, 서정연, 김창완 등이 그들이다. 드라마의 색깔도 다르지 않다. 가 커피 프랜차이즈업체에서 일하는 연상녀 윤진아(손예진)와 게임업체에서 일하는 연하남 서준희(정해인)의 '현실 연애'를 담아냈던 것처럼, 도 약사 유지호(정해인)와 사서 이정인(한지민)의 '현실 연애'를 담고 있다. 게다가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기성사회가 가진 편견이나 억압을 내세우고 있는 면도 유사하다. 에서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소로 등장한 건 윤진아의 엄마였고 그 이유는 서준희가 부모 없이 자란 아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에서도 아직 등장하진 않았지만 유지호가 아이를 가진 비혼부라는 점은 유사한 장애요소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는 이정인의 아버지 이태학(송승환)은 이사장의 아들과 결혼을 강권하는 인물이다. 딸이 유지호 같은 비혼부를 사귀는 것 자체를 탐탁찮게 여길 여지가 다분하다.이쯤 되면 대중들은 '자기복제'를 의심하게 된다. 너무 비슷한 설정의 이야기를 직업과 배우들만 조금 바꿔 변주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다. 실제로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유지호가 가진 아이가 의 윤진아가 낳은 아이가 아니냐는 농담 섞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결국 이정인과 유지호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이 사랑을 가로막는 사회적 편견과 억압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걸 극복하고 사랑해나가는 이야기. 어찌 보면 의 이야기는 다소 뻔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져드는 건그런데 이렇게 뻔하게 느껴지는 스토리와 전작의 기시감에도 불구하고 은 의외로 흡인력이 강하다. 아주 소소하고 자잘한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지만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인 한지민과 정해인이라는 배우의 아우라 때문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몰입감이다.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그것은 안판석 감독의 연출에서 나온다. 이정인과 유지호가 처음 만나는 그 시퀀스를 예로 들어보면 안판석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별 일도 벌어지지 않는 사건을 아주 특별하게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전 날 친구 집에서 과음을 하고 늦게 일어나 부랴부랴 나온 이정인이 술 깨는 약을 사먹으러 유지호가 약사로 있는 약국으로 들어오고, 약을 달라고 하자 돈도 지불하지 않은 이정인에게 손수 약병을 따주는 유지호의 모습이 그렇다. 그 장면에서 유지호의 배려 가득한 성품이 슬쩍 드러나고, 그 배려심은 마침 지갑을 가져오지 않은 이정인에게 그냥 가라며 오히려 돈 몇 만 원을 챙겨주는 모습을 통해 더 확실해진다. 그 아무 것도 아닌 일이 그러나 이정인에게는 달리 보이게 된다. 그것은 이정인의 주변인물들과의 비교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이태학은 이정인의 언니를 사랑도 없는 치과의사에게 결혼시켜 불행하게 만든 인물이다. 이정인은 그래서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외부인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다. 거꾸로 자신을 배려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가 유지호와의 첫 만남에서 약병을 따주는 한 모습만으로도 어느 정도 호감을 갖게 되는 이유다.안판석 감독의 카메라는 군더더기 없이 담담하게 '연애의 풍경'을 담아내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기류들을 포착해낸다. 이정인과 유지호가 만나고 헤어지는 걸 반복하는 그 과정들은 별 사건이 없어 보이지만, 카메라는 그 과정에서 오고가는 감정의 기류들을 담아낸다. 에서 비 내리는 날 우산을 함께 쓰고 걸어가는 남녀의 모습만으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연출해낸 것처럼, 에서는 눈 내리는 날 만나 함께 걸어가는 모습만으로도 그 감정을 포착해낸다. 안판석 감독은 이러한 연출을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랑이 사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감정의 변화 때문에 주변 풍경들을 송두리째 달리 보이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실제가 그렇지 않은가. 눈에 콩깍지가 끼면 달리 보이는 세상이란. ◆관찰 카메라 시대와 안판석 감독의 현실 멜로그래서 은 어떤 시각으로 이 드라마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너무나 다른 반응들이 나올 수 있다. 즉 스토리 중심으로 보면 이 드라마는 너무 뻔한 느낌일 수밖에 없다. 그 흔한 멜로의 구도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반복하고 있는 것이고, 심지어 전작이었던 를 거의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스토리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스토리가 아니라 그 과정들 속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변화들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려 한다면 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다가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정인이 유지호에게 "친구 하자"고 말할 때 그에게 마음이 있는 유지호가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들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건 액면의 대사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설렘이 묻어난다. 친구가 별거냐며 가끔 만나 밥 먹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정인이, 자기 동생이 친구라고 만나는 남자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장면은 그의 숨겨진 속내를 보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사실 친구가 별 거냐고 말은 했지만 그건 이정인이 유지호에 대한 남다른 마음이 있었던 걸 숨기려는 거짓말이었다는 걸 그 소소한 대사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이건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니라 이른바 관찰 카메라 프로그램을 보는 것만 같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한참을 자세히 보다보면 그 행동 하나에서 말 한 마디에서 느껴지는 속내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가 별거 아닌 것처럼 그저 스쳐지나가며 했던 말들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관찰 카메라 형식의 프로그램들은 이런 일상의 말들과 행동들을 콕콕 집어 자막과 편집으로 강조해 보여줌으로써 '보통의 일상을 특별한 체험'으로 만들어 준다. 안판석 감독의 멜로는 그 섬세한 시각 때문에 마치 관찰 카메라가 가진 '특별한 일상'을 담아내게 되었다.하지만 관찰 카메라 프로그램과 드라마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관찰 카메라가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일상의 도화지 위에 자막과 편집을 통해 덧칠을 해줌으로서 좀 더 명확한 이야기를 담아내지만, 드라마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드라마도 연출의 문법이라는 것이 있어 카메라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피사체를 잡아내는가가 갖고 있는 의도가 있기 마련이다. 영상을 공부한 이들이라면 그 의도를 파악해가며 장면들이 갖는 숨겨진 이야기들을 읽어내겠지만, 보통의 시청자라면 그저 소소한 일상으로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다.어쨌든 안판석 감독은 이른바 관찰 카메라 시대에 자신만의 현실 멜로를 하나의 스타일로 갖게 됐다. 그는 에 이어 이번 에서도 그 세계의 재미를 또다시 추구하고 있다. 과연 시청자들은 그 '관찰의 묘미'를 공감할 수 있을까. 결과가 사뭇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2019-05-29 10:20:54

드라마 '녹두꽃'

[정덕현의 엔터인사이트] 대하사극 '이몽'과 '녹두꽃', 기대만큼 큰 아쉬움

최근 지상파가 야심차게 내놓은 대하사극 두 편이 눈에 띈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을 소재로 한 MBC '이몽'이고, 다른 하나는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SBS '녹두꽃'이다. 많은 제작비가 투여된 기대작들, 과연 성과는 있는 걸까. ◆김원봉을 소재로 한 '이몽', 어째 매력이 없을까애초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제작된다고 했을 때 나왔던 우려는 정치적인 해석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남북이 대결보다는 소통하려는 분위기가 더 만들어지고 있지만, 1948년 월북한 김원봉을 미화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논쟁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시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영화 '암살'과 '밀정' 등을 통해 김원봉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었고, 올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시점에 이 인물을 담은 다큐멘터리들이 나왔다. 이제 충분히 우리네 독립운동사에서 이 인물을 다루는 일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어느 정도는 생기고 있었다는 것이다.실제로 김원봉을 주인공으로 세운 MBC '이몽'이 방영되면서 이런 우려들은 사라졌다. 오히려 왜 이제야 이런 중요한 독립운동가를 다루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하게도 드라마의 완성도에서 불거져 나왔다. 김원봉이라는 중요한 인물을 다루고 있고, 그 인물의 삶 자체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는 걸 이제 우리네 대중들이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드라마에 등장하는 김원봉(유지태)은 그다지 매력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이유는 대본과 연출 그리고 연기까지 총체적으로 부실한 완성도에 있었다.김원봉이 납치해간 이영진(이요원)을 구하기 위해 홀로 중국 상하이 청방에 뛰어 들어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조폭 영화' 같은 느낌을 줬다. 치밀한 심리묘사나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은 별로 보이지 않고 '멋있어 보이려는' 액션에만 치중하다보니 드라마는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표면적으로만 그리게 됐다. 연출에 있어서도 시대극에 중요할 수밖에 없는 미장센이나 '톤 앤 매너'가 거의 보이지 않고, 세트가 거의 드러나는 장면들이나 허술한 CG가 더해져 전혀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한계를 보였다. 이러니 연기에 몰입이 생기기 어려웠다. 유지태는 너무 감정적인 인물처럼 김원봉을 연기하고, 이요원은 밀정이라는 캐릭터를 너무 가녀리게만 연기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김원봉 같은 중요한 인물을 거의 처음으로 다루는 드라마가 이렇게 떨어지는 완성도로 그 인물을 매력없게 그리고 있다는 건 여러모로 아까운 일이다. 무려 200억이 투자된 작품이지만 그 수치가 무색하게 느껴진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당연히 시청률은 뚝뚝 떨어졌다. 처음 기대감을 가진 시청자들로 7% 시청률(닐슨 코리아)로 시작한 드라마는 심지어 4%대까지 시청률이 빠졌다. ◆'녹두꽃', 동학농민혁명을 잘 녹여내곤 있지만동학농민혁명 역시 우리네 사극에서는 좀체 다뤄지지 않았던 소재다. 그 많은 조선과 고려를 다룬 사극들이 있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이 그 소재가 된 적이 거의 없게 된 건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좌파니 우파니 하며 진보와 보수가 팽팽히 이념대립을 하던 정치상황 속에서 동학농민혁명 소재의 드라마는 그 자체로 보수 우파들의 날선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민초들의 봉기나 '혁명'이라는 단어에도 민감해하던 시절이 아닌가. 하지만 최근 몇 년 간 촛불시민혁명 같은 민중의식을 경험하면서 그 뿌리로서 동학농민혁명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흔히 "촛불 이전에 횃불이 있었다"고 표현되는 동학농민혁명이 재조명되게 된 건 최근의 촛불시민혁명과 무관하지 않다. 작년 드디어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제정되고 올해 처음으로 열린 기념식 자리에서 이낙연 총리가 "촛불혁명도 잘못된 권력을 백성이 바로잡는다는 동학정신의 표출"이라고 표현한 건 이런 변화를 잘 말해준다.동학농민혁명을 다룬 사극 SBS '녹두꽃'은 그러나 주인공으로 녹두장군 전봉준(최무성)을 주인공으로 세우지 않았다. 대신 '거시기'로 불리며 저잣거리에서 민초들을 핍박하던 백이강(조정석)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워, 훗날 동학군 별동대장으로 변모해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피도 눈물도 없이 민초들을 수탈해온 고부관아의 이방 백가(박혁권)가 본처의 여종을 겁탈해 태어난 백이강은 본처 소생인 동생 백이현(윤시윤)과 엇갈린 길을 가게 된다. 백이강은 동학군의 별동대장으로 백이현은 그들을 토벌하는 향군으로 맞서게 되는 것. 전봉준이 아닌 한 민초를 주인공으로 세운 건 이 드라마가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걸 잘 보여준다. 그것은 전봉준 같은 한 영웅에 의해 이 혁명이 이뤄진 게 아니라, 이름 모를 무수한 민초들의 봉기로 이뤄진 것이라는 의미다.'녹두꽃'은 실제를 방불케 하는 스케일이 돋보이는 전투장면들을 재현해 보여주고 있고, 또 인물들 간의 욕망과 심리가 잘 다뤄져 있어 대본, 연출, 연기의 완성도 자체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이런 완성도에 비해 시청률은 6,7% 대에 아쉽게 머물러 있다. 이렇게 된 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소재 자체가 갖는 뭉클함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결국은 '실패한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만들어내는 우울한 정조가 드라마 시청의 어떤 장벽 같은 걸 만들어내고 있어서다. 의미와 재미도 충분하지만, 요즘처럼 하루하루가 힘겨워 고구마보다는 사이다를 더 원하는 대중들에게 '녹두꽃'은 쉽게 넘길 수 없는 퍽퍽함으로 다가온다는 것.◆귀한 소재지만 아쉬운 성적, 그래도 남는 위안'이몽'도, '녹두꽃'도 기대한 만큼 아쉬움이 큰 사극이다. 김원봉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조명을 제대로 해 그 인물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보여줘야 할 '이몽'은 기대에 못 미치는 드라마적 완성도로 소재 자체를 아깝게 만들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어찌 보면 우리네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소재를 가져와 재현해내려 애썼지만 '녹두꽃'이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이야기 구조로 시청자들이 쉽게 진입하지 못하게 된 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그나마 남는 위안은 이런 소재들이 이제 사극이나 시대극으로 다뤄질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사실 일제강점기는 근현대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많아 드라마 같은 작품들이 이를 어떻게 해석해내느냐에 따라 많은 논란이 야기되기도 했던 시점이다. 김원봉 같은 인물은 더더욱 논쟁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몽' 같은 작품이 그만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지 않다는 건 이제 이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은 여유가 생겨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동학농민혁명도 마찬가지다. 사실 '혁명' 혹은 '횃불'이라는 말만 들어도 색안경을 끼고 보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시대를 넘어 동학농민혁명을 기념일로 제정했고, 이를 자유롭게 소재로 하는 사극 또한 볼 수 있게 됐다. 민중의식의 확장이 만들어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기대가 컸던 만큼 큰 아쉬움을 남기는 두 작품이지만, 그래도 이런 소재들이 다뤄지기 시작했던 건 그나마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향후 이 시대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담는 작품들의 초석이 될 것이니 말이다.

2019-05-22 12:19:46

[정덕현의 엔터인사이트] 질타 받은 '개그콘서트', 위기 극복할 해법은 없을까

어느새 '개그콘서트'가 1천회를 맞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축하 박수 소리가 날 법 하지만, 어쩐지 분위기는 정반대다. 끝없는 시청률 추락과 점점 사라져버린 화제성으로 위기를 맞고 있어서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개그콘서트'의 위기를 불러왔을까. ◆'개그콘서트' 1천회 기자간담회에 쏟아진 질타지난 13일 KBS 신관에서 열린 '개그콘서트' 1천회 기자간담회는 결코 축하의 자리가 되지 못했다. 1000회라는 엄청난 수치와 무려 20년 간의 명맥을 이어온 프로그램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은 대부분 지금의 '위기'에 대한 것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한 때는 무려 30%(닐슨 코리아)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일요일 밤 주말이 아쉬운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껏 받았던 이 프로그램은 2012년부터 추락을 거듭해오더니 현재는 5%에도 못 미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지워져가고 있다. 기자들이 축하보다 이 위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묻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하지만 기자들의 이런 아픈 질문에도 1천회를 맞는 제작진이나 개그맨들 당사자들도 이렇다할 해법을 내놓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축하가 아닌 질타의 모습에 사뭇 당황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한때 '개그콘서트'를 이끌었지만 잠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신봉선은 이것이 온전히 개그맨들의 탓이 아니라는 걸 토로했다. 그는 희극인들이 생각 없이 앉아있는 게 아니며 여전히 아이디어는 많지만 "지상파 방송에 녹이는 게 어렵다"며 '개그콘서트'를 나갔을 때 "요즘은 이렇게 밖에 못하나 생각했는데 돌아오고 보니 개그에 제약이 너무 심하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그는 자신이 "활동할 때 재밌었던 인기 코너를 지금은 못 올린다"며 달라진 환경의 문제를 털어놓았다.전유성은 이 자리에서 따끔한 지적을 해 주목을 끌었다. 그는 처음 자신이 '유머일번지'같은 TV의 인기 있는 개그를 대학로로 가져가 공연을 했고, 이후 '개그콘서트'는 거꾸로 대학로에서 충분히 검증이 끝난 코너를 다시 지상파로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점점 "공연장의 검증 없이 제작진이 재미 여부를 결정해 바로 방송에 내보내기 시작했다"며 그것이 "나태하고 식상한 개그"가 됐다고 꼬집었다. 또 700회, 1천회를 기념하는 자리에나 자신을 부르고 정작 조언을 들어보려 하지도 않는 제작진의 태도 또한 비판했다. ◆달라진 환경, '개그콘서트'는 변화에 대처하지 않았다사실 현재 같은 상황에서 1천회를 '축하'의 자리로 꾸미려했다는 지점에서부터 벌써 '개그콘서트' 제작진의 안이함이 묻어난다. 지금 같은 상황에 어찌 축하라는 말이 가능할까. 차라리 그것보다는 솔직하게 지금의 위기를 인정하고, 그것을 깨치기 위한 공청회 같은 걸 1천회에 즈음해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이미 위기의 징후는 몇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보여진 바 있다. 이미 인터넷을 넘어 모바일로 미디어의 헤게모니가 바뀌어가고 있었고, 유튜브를 통해 리얼한 현장이 살아있는 짤방을 보는 일에 익숙한 시청자들이 여전히 짜여진 콩트 형식의 '개그콘서트'를 찾아볼 리가 만무였다. 무엇보다 새로운 세대를 이끌어갈 신인 스타 개그맨이 등장하지 못해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과거 '개그콘서트'를 이끌던 개그맨들이 돌아와 추억의 코너들을 재연하기 시작한 건 퇴행에 가까웠다. 1천회 기자간담회를 김미화, 전유성, 신봉선, 유민상, 김대희 같은 과거의 영광을 이끈 선배 개그맨들로 가득 채우고 현재를 잇는 후배 개그맨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그래서 꽤나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미디어 변화와 함께 '개그콘서트'가 또한 그 변화를 알고 있으면서도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감수성의 변화'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외모비하나 가학성, 피학성, 성차별 같은 그간 '개그콘서트'의 대부분 코드를 채우고 있던 소재들이 모두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지만 이를 대체할만한 개그소재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늘 해왔던 방식으로 한 주 한 주를 그저 채워 나가다보니 새롭게 검증된 개그소재를 실험하지 못했고, 나아가 '확실한 웃음 코드'가 되던 논란의 소재들을 마치 차포 떼듯 떼놓고 내보내다 보니 "재미없다"는 말을 듣게 된 것. 물론 원종재 PD가 "요즘 못생긴 개그맨은 뽑지 않는다"는 말로 설명한 것처럼, KBS라는 공영방송의 잣대가 더 엄격한 면이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tvN '코미디 빅리그'가 하는 개그들을 '개그콘서트'는 하지 못한다. 그러니 재미의 차원으로만 보면 '코미디 빅리그'는 재밌는데 '개그콘서트'는 재미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공영방송이라는 위치는 과거 한 때 날카롭던 풍자 개그 같은 것들도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 이유로 작용했다. 물론 직접적인 외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간 여러 차례 '소송까지 겪으며' 생겨난 자기검열은 시사나 정치 같은 소재를 점점 피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보면 '개그콘서트'가 재미없다는 소리를 듣는 건 자명해 보인다. 어느 정도의 여지도 부여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해법은 개그맨들의 생존에 있다그렇다면'개그콘서트'를 새로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지금 이대로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그것은 매주 무대를 채워야 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해법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잠시 휴지기를 갖고 재정비를 한 후 돌아오는 게 정상적인 해법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여기도 문제는 남는다. 그 많은 개그맨들의 당장의 생계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프로그램 자체가 폐지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는 당장의 희생은 불가피하지 않을까.'개그콘서트'는 이제 시즌제를 고민해 봐야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저 매주 프로그램을 채우는 방식이 아니라 어느 정도 충분한 검증기간을 거쳐 시즌제로 담아내는 게 훨씬 밀도 있는 코미디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다. 대신 휴지기 동안 많은 개그맨들이 활약할 수 있는 새로운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도 중요할 듯싶다. 무대 개그가 아닌 현장성을 강조한 예능 프로그램들을 개그맨들을 출연시켜 그 가능성을 찾아보고 '개그콘서트'와 연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최근 개그맨들이 유튜브 등에 1인 방송을 하며 크리에이터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 건 그 쪽이 훨씬 가능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흐름을 방송이 끌어안아 프로그램화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른바 '관찰카메라' 전성시대에 개그맨들처럼 재능 있고 가능성이 풍부한 자원이 있을까. 그들이 현장에서 웃기기 위해 만들어가는 다양한 노력들이 방송 프로그램으로 보여질 수 있다면 웃음과 함께 감동도 줄 수 있지 않을까. '개그콘서트'를 반드시 공개무대라는 형식적 틀로만 고집할 게 아니라, 지금의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 맞게 시즌2로 재포맷하는 고민도 해볼 만한 시도가 아닐까 싶다.지금의 '개그콘서트'를 만든 건 결국 무수한 개그맨들이다. 그러니 이 위기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은 개그맨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들이 현재 겪고 있는 고충들을 들여다보고 드러내지 못하는 끼와 재능들을 최대한 꺼내놓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일. 그것이 '개그콘서트'가 현재의 위기를 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단지 갖가지 제약을 들어 스스로 자기검열 속으로 빠져들게 할 게 아니라.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2019-05-15 12:30:34

tvN '스페인하숙'의 제작 발표회에서 나영석 PD, 장은정 PD, 김대주 작가. tvN 제공

[정덕현의 엔터인사이트]  '스페인 하숙'으로 보는 나영석 사단 승승장구의 비밀

저런 하숙집이라면 하룻밤 머무는 것만으로도 삶의 피로가 모두 씻길 것만 같다. tvN 은 이런 로망을 자극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알베르게(숙소)에서 그 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한 끼와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게 이 프로그램의 콘셉트. 어촌편으로 부부(?) 케미를 자랑했던 유해진, 차승원과 새 멤버로 배정남이 의기투합했다. 요리솜씨가 좋아 '차주부'로까지 불렸던 차승원이 알베르게의 메인 셰프로 '요리부'를 맡았고, 손재주가 좋아 뭐든 뚝딱 만들어내는 유해진은 이른바 '이케요(IKEYO)' 브랜드까지 세워 '설비부'를 맡았다. 배정남은 차승원의 밑에서 손발이 되어주는 보조였지만 자신만의 '리폼 능력'을 되살려 차승원과 유해진의 작업복을 만들어주는 '의상부'를 런칭(?)했다. 프로그램은 최근 이 곳을 많이 찾는 한국인 순례자들이 주요 대상이지만, 외국인 순례자들의 출연도 적지 않다. 함께 걷는 것만으로 금세 친구가 된다는 순례길이라는 공간 자체가 그러하듯이, 국적이나 언어 그리고 나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저녁 시간에 한식을 앞에 두고 다양한 국적과 나이의 외국인들과 한국인이 어우러져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풍경은 전혀 부자연스러움이 없다.언뜻 보면 나영석 사단의 전작들이었던 와 을 합쳐 놓은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법 하다. 실제로 차승원이 요리하고 유해진이 설비하는 그 풍경은 에서 익숙하게 봤던 것들이고, 두 사람이 마치 남편과 아내처럼 때론 툭탁대지만 척하면 착 알아 듣는 오랜 친분의 훈훈함 역시 그대로다. 여기에 외국인 순례자가 저녁에 한식을 먹으며 "맛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의 풍경이 떠오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은 이 두 프로그램들과 유사해보여도 완전히 다른 관전 포인트를 갖고 있다. 그것은 그 집을 찾는 손님들의 사연이나 리액션에 집중하기보다는, 손님들을 맞는 하숙집의 유해진, 차승원, 배정남의 그 준비과정에 더 집중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하고 불편한 게 없도록 집기를 수리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 놓는 그 마음을 시청자들과 공유하는 것. 손님이 한 명밖에 오지 않았어도 마치 임금님의 한 끼처럼 준비해 내놓는 그 마음이 주는 훈훈함과 뿌듯함이 시청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보며 느끼는 기분 좋은 감정의 실체다. 은 최근 11.6%(닐슨 코리아)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연전연승 나영석 사단 그 승승장구의 비밀을 보면 나영석 사단이 어떻게 그 많은 프로그램들을 연달아 성공시켰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최근 tvN 에 나온 KBS 을 연출하다 지금은 tvN으로 이적한 유호진 PD는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며 나영석 PD를 만났던 사연을 털어놓은 바 있다. 유호진 PD는 완전히 새로운 도전을 하고픈 마음이 반이라고 했지만, 나영석 PD는 그에 대해 "네가 제일 잘 하는 게 뭔지 고민을 해보고 본인이 제일 잘 하는 것에 10%나 20%의 새로운 가능성을 덧붙이는 게 좋지 않겠니"라고 했다는 것. 이것은 나영석 사단이 를 시작으로 , , , 그리고 까지 연달아 성공을 거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나영석 PD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KBS에서 tvN으로 왔을 때 유호진 PD처럼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걸 하고픈 욕망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지금껏 해왔고 또 잘 할 수 있는 '여행'이라는 소재를 택했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덧붙이는 것으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냈던 것.돌이켜 보면 에서 이서진이 "나도 요리할 수 있다"는 말 한 마디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였고, 이것이 어촌편으로 스핀오프되면서 차승원과 유해진의 조합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부부 케미의 조합은 다시 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던져짐으로써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여행에 인문학을 더한 같은 콘셉트 역시 과거 에서 명사와 함께 하는 여행을 통해 시도됐던 것을 진화시켜 나온 프로그램이다. 특정 지역을 여행하고, 그 여행지에 담겨진 인문학적 이야기들을 저녁 식사자리에서 풀어놓는 방식은 우리에게 어렵게 여겨지던 인문학을 훨씬 쉽고 흥미롭게 전해주었다.즉 나영석 사단의 성공 비결은 바로 그 익숙함과 새로움의 조화에 있다는 것이다. 이미 성공했던 코드나 소재들을 여전히 활용하지만, 거기에 새로운 시도들을 더함으로써 실패 확률을 줄이고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이는 대중적인 콘텐츠의 기본적인 성공 요건이기도 하다. 성공하는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보편성과 차별성을 잘 조화시키는데서 나오기 마련이다. 즉 보편적으로 공감할만할 정도로 익숙하면서도 어떤 콘텐츠와도 다른 차별점이 특별함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 ◆개인이 아닌 사단이 갖는 다양성의 힘하지만 여기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건 나영석 PD 개인이 아니라 '사단'으로 불리는 이들의 집단 창작 시스템이다. 나영석 사단이 만든 프로그램의 엔딩 크레딧을 보면 PD와 작가 란에 여러 명의 이름들이 적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은 나영석 PD가 전면에 나서서 연출한 프로그램이지만, 엔딩크레딧에는 장은정, 박현용, 양슬기 PD가 들어있다. 지난해 방영됐던 스페인편의 경우, 나영석 PD와 함께 신효정, 장은정, 이진주, 양정우, 이지연, 정민경, 임경아, 양슬기, 박현용이 모두 들어가 있다. 아마도 이들이 모두 이 프로그램을 위해 스페인까지 날아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기획 단계에서의 회의 등을 통해서라도 이들은 함께 머리를 모은다. 그런 점에서 엔딩 크레딧에 모두 이름을 적어 두는 것이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집단 창작 시스템이 가져오는 효과다. 그것은 결국 보다 다양한 취향과 생각이 한 프로그램 안에 담길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한 사람이 만들면 그 한 사람의 취향과 생각 위주로 프로그램의 색깔이나 방향성이 그려지지만, 이처럼 여러 사람의 의견들이 반영된 프로그램은 보다 많은 이들의 취향과 생각을 공유하게 해준다. 결국 이 부분은 나영석 사단의 프로그램이 갖는 폭넓은 공감대를 가능하게 한다.물론 이런 시스템이나 기획방식도 오래도록 반복되다 보면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 이를테면 최근 나영석 사단이 계속해서 만들어낸 여행과 먹방 소재에 대해 다소 '식상하다'는 이야기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는 문제가 그렇다. 제 아무리 많은 새로운 후배 PD들이 합류해 아이디어를 더하고는 있지만 워낙 나영석 PD 개인의 아우라가 커지면서 그 취향에 다소 편향되는 데서 생기는 문제들이다. 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나영석 PD가 키워낸 후배 PD들이 이제는 저마다 자기 자리를 마련하고 제 색깔을 찾아가는 변화를 모색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은 이제 나영석 사단이라는 시스템에서 나온 성공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간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PD 개인의 역량에 의해 성패가 갈리곤 했지만, 이제 나영석 사단은 이를 시스템 안에 넣어 보다 안전한 성공률을 담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함과 새로움, 보편성과 차별성을 조화시키는 그 집단 창작 시스템은 그래서 현재 많은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추구하는 하나의 방향이 되고 있다.

2019-05-01 13:20:37

방탄소년단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민용준의 엔터인사이트] K팝스타도, 한류스타도 아닌 오직 방탄소년단

지난 2013년, 매거진 에디터로 일할 당시 매니지먼트사로부터 신인 아이돌 그룹의 화보 인터뷰 제안을 받았다. 이름을 듣고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생소한 이름이었다.속되게 말해서 팔리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이를 성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만한 동기부여를 찾기도 어려웠다. 소위 대형 기획사라고 말하는 SM, JYP, YG 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한 아이돌 그룹이 아닌 이상 처음부터 크게 주목하지 않는 업계의 관성이 작동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크게 눈에 띄는 그룹이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다.인지도가 떨어지는 신인에게 투자할 지면의 가치를 확신하기 어려웠고, 당연히 화보 인터뷰 진행은 성사되지 않았다. 며칠 전, 문득 그날 생각이 났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음반차트 1위를 기록할 것이라는 뉴스를 보면서 말이다. 그렇다. 그 신인 아이돌 그룹은 요즘 BTS라 불리며 전 세계적인 열광을 부르고 있는 방탄소년단이었다.◆세계적 아이돌로 거듭난 BTS사실 그 당시의 결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방탄소년단이 처음부터 대단히 각광받는 아이돌 그룹은 아니었고, 데뷔 이후에도 몇 년 동안은 고만고만한 인지도를 가진 아이돌 그룹 정도로 치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합이 딱 떨어지는 칼군무 실력이 대단하다는 인정을 받기도 했고, 힙합 콘셉트의 남성 아이돌로서 박력 있는 무대를 선보이는 것이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빅히트 엔터테인먼트라는 중소 기획사 출신의 아이돌 그룹이란 점 역시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하는 요인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방탄소년단에게 다른 아이돌 그룹에 비해 대단한 스타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도 부재했던 것이 사실이었다.하지만 방탄소년단은 성공했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아이돌 그룹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겁게 주목을 받는, 캐스팅 1순위 팝 아티스트가 됐다. 그러니까 이건 굉장히 독특한 케이스라는 것이다. 지금 방탄소년단이 받고 있는 주목과 환호의 결과라는 것이 말이다.물론 방탄소년단의 성공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방탄소년단의 성공은 상당히 인상적인 결과다. 현재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서 아이돌 그룹을 기획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나 그 주변에 있는 산업의 관계자들 그리고 이를 논하는 대중음악 관련 언론 종사자들 입장에서 방탄소년단의 성공을 통해서 얻어야 할 깨달음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2013년에 데뷔한 방탄소년단이 팬덤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고 감지할 수 있었던 건 2014년 무렵이었다. 가수의 음원 차트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예상 밖의 반응이 감지됐다. 방탄소년단은 포털사이트 상의 공식 블로그와 SNS 공식 채널을 통해 멤버 개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했다.특히 브이로그라는 형식을 통해 멤버 개인마다 사소한 일상과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라는 미디어 디바이스를 소유하고 어디서든 영상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지금 이 세계의 트렌드에 어울리는 마케팅 전법이라 할 수 있었다. 동시에 TV나 기성 미디어에 노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신인 아티스트 입장에서는 잠재적으로 팬이 될 수 있는 대중과의 접점을 더욱 친밀하게 형성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적절했다. 동시에 TV 프로그램의 기획된 방향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자신들의 개성을 어필할 수 있다는 면에서 보다 매력적인 지점이 있다.◆온라인 채널을 통해 전 세계적인 인기 얻어흥미로운 건 이런 방식이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방탄소년단의 지금을 만드는 반석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SNS를 비롯해 온라인 상에 콘텐츠를 만들어 유통한다는 건 자연스럽게 국경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능성으로 작동했다.방탄소년단은 2017년 5월 21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17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 참석했다. '톱 소셜 아티스트;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까닭이었다. 이전까지 6년 동안 수상자로 호명됐던 저스틴 비버를 비롯해 셀레나 고메즈, 아리아니 그란데 등의 뮤지션들과 경쟁한 결과였다.톱 소셜 아티스트 부분의 수상자가 되는 건 일종의 인기투표와 같다. 빌보드 차트에서 운영하는 '소셜 50' 차트는 온라인 상의 SNS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를 선정하는 차트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의 SNS 상에서 얻는 '좋아요'나 팔로워 수, 조회수 등의 다양한 반응들을 집계해 산정하는 차트다. 이 차트의 수상자가 된다는 건 동시대에서 실시간으로 가장 많은 관심을 얻고 있는 아티스트로 인정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이는 방탄소년단이 꾸준히 온라인 상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다채로운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주체가 돼서 팬들과 소통을 하고, 더 넓은 세상과 너른 접점을 만들어 나가고자 노력한 결실일 것이다. 심지어 세계 팝시장의 중심무대라 불리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비틀스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비견되는 아이돌 그룹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현상은 일시적인 해프닝이라 간과할 만한 사건이 아닌 것 같다.물론 방탄소년단이 비틀스에 견줄 만한 음악계의 성취라고 찬사를 바친다면 다소 지나친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방탄소년단이 현재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팝 차트에서 증명하고 있는 대단한 영향력은 기존의 K팝 시장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반향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는 K팝의 최전선에 놓인 아티스트의 범주에 놓고 방탄소년단을 규정하는 것이 그리 좋은 해석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기존의 K팝 시장은 SM, YG, JYP 엔터테인먼트라는 3대 기획사에서 만들어낸 아이돌 그룹의 팬덤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에 가깝다. 국내에서 형성된 팬덤을 기반으로 해외 팬덤 개척에 나서는, 일종의 대기업식 제품 마케팅에 가깝게 진행됐다.방탄소년단은 반대로 국내의 팬덤보다도 해외의 팬덤이 뚜렷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통해 역수입된 결과처럼 보인다. 비슷한 사례로는 2002년경 보아가 'No.1'을 통해 일본에서 얻게 된 대단한 인기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반향을 일으킨 것과 유사한 타입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방탄소년단은 이와 달리 국내와 해외 그 어디든 개방된 윈도를 통해 자신들을 어필할 수 있었다. 시대가 달라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는 매니지먼트사에서도 자신들이 발굴해낸 아티스트의 미래를 견인해내고자 꾸준한 투자와 인내를 가져간 결괏값에 가깝다.방탄소년단 역시 3대 대형 기획사를 비롯한 수많은 매니지먼트사들에서 기획된 아이돌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된 아이돌 그룹이었다. 지금은 끝내 세계적으로 성공한 아티스트로 부상했지만 그들에게도 데뷔 초기 이후 몇 년 동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닦아내야 했던 '피, 땀, 눈물'의 시절이 있었다.그래서 방탄소년단의 성공을 통해 K팝의 비전을 논하거나 한류 시장의 성공을 지칭하는 이들을 보면 결국 이 시장이라는 것이 노력과 인내가 동원되는 과정이 아니라 반짝이는 결과로만 여겨지는 것인지 궁금하다. 방탄소년단의 성공이 과연 한국 대중음악계의 미래일까? 방탄소년단의 빌보드 차트 석권이 K팝의 청사진일까?물론 그들의 영향력이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쏘아 올린 하나의 결실이라 여길 수는 있겠지만 방탄소년단의 성취는 오로지 그들만의 영광일 뿐이다. 그러니 방탄소년단이 그들 스스로 올라선 영광의 무대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길 바란다. K팝스타도, 한류스타도 아닌, 방탄소년단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글_민용준(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19-04-17 17:20:50

연예인이나 유명인사의 분장쇼로 인기를 얻은 박나래. 사진은 개그맨 김구라를 따라한 분장 모습. 박나래 SNS

[민용준의 엔터인사이트] 지금은 '박나래 시대'…예능정글 1인자 우뚝 선 '박나래'

한국기업평판연구소에서는 매월마다 다양한 브랜드의 평판에 대한 빅데이터를 분석해 리포트를 발표한다. 예능방송인도 그중 한 분야다. 그리고 지난 4월 6일에 발표한 예능방송인 브랜드 분석 결과 평판지수 1위를 차지한 건 박나래였다. 김종민, 이영자, 유재석, 강호동 등의 이름이 차례로 이어졌다. 박나래가 이 분야에서 1위에 오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2018년 10월, 11월에도 1위를 차지했다. 2018년부터 꾸준히 10위권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다. 지금 박나래는 대한민국 방송계에서 가장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분장쇼와 '나혼자산다'로 인기 급상승박나래가 개그맨으로 데뷔한 건 2006년이었지만 처음으로 대중적인 반응을 얻게 된 건 2011년 KBS '개그콘서트'에서 진행한 코너 '패션 No.5'를 통해서였다. 장도연, 허안나와 함께 출연한 이 코너에서 다른 두 출연자보다 과하게 눈에 띄는 의상이나 아이템을 입고 나오며 웃음을 유발하는 역할을 맡았다. 실질적으로 이 코너에서 재미를 책임지는 건 박나래였던 것이다. 장도연, 허안나보다 훨씬 키가 작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스스로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역할을 자처했다. 대부분의 개그 코너들이 타인의 약점을 공격하거나 상대를 바보처럼 몰아가는 방식으로 객석의 웃음을 유발하는 것과 달리 자기 희생적인 개그를 통해 관객에게 재미를 선사했다.2012년에는 지상파 방송사에 출연하는 개그맨으로서 이례적으로 tvN의 '코미디빅리그'에 출연하게 됐는데, 어쩌면 개그우먼 박나래를 확실히 알린 신호탄이라 할 수 있는 분장 개그를 선보이며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분장을 통해 연예인을 비롯한 유명인사들의 외모와 행동을 복사하듯 따라하는 박나래의 모습은 유머를 넘어 굉장한 볼거리에 가까웠다. 덕분에 분장의 달인이라는 수식어를 얻은 박나래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간복사기로서의 재능을 십분 발휘했다. 장도연과 함께 출발한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도 분장을 주제로 한 방송을 진행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공중파 방송국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위의 센 개그를 펼치며 방송 본방이 아닌 온라인 생방송을 본 관객의 호응이 상당했다.사실상 오늘날의 박나래를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프로그램인 '나 혼자 산다'의 제목은 본래 2013년 2월 10일 설날 특집으로 기획된 파일럿 프로그램 '남자가 혼자 살 때'를 정규 편성하며 지어진 것이었다. '나 혼자 산다'의 멤버를 의미하는 무지개 회원 역시 초기 파일럿 시절에 출연한 7명의 남자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나 혼자 산다'에 박나래가 합류한 건 2016년 무렵이었다. 당시 동시간대에 SBS에서 새롭게 선보인 '미운 우리 새끼'에 밀려 시청률이 하락세를 보이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현무, 박나래, 한혜진, 이시언, 기안84, 헨리 등을 필두로 고정출연자 라인을 정비하고, 출연진의 매력과 '케미'를 어필하며 시청률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2017년 이후로 MBC를 대표하는 간판 예능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하지만 위기가 찾아왔다. 전현무와 한혜진의 결별 사실이 알려진 뒤 두 사람이 잠정 하차를 하게 되면서 전현무와 한혜진의 빈 자리를 남은 멤버들이 채워줘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박나래의 존재감을 더욱 확실히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전현무와 한혜진의 하차는 주요한 역할을 하던 캐릭터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프로그램에 타격을 주는 사건이기도 했지만 진행을 주도하며 프로그램을 이끌어 나가던 전문MC로서 전현무의 빈 자리를 당장 채울 수 없다는 점에서도 심각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답도 확실했다. 기존의 출연진 중에서 전현무를 대신해 이시언, 기안84 등 상대적으로 방송 경험이 적은 이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진행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박나래 뿐이었다.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리고 '나 혼자 산다'에서 전현무의 빈 자리에 앉게 된 박나래는 우려와 달리 원만하고 능숙한 진행을 통해 MC로서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현재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예능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여성 예능방송인의 경력을 시작하게 된 셈이다.◆남성 방송인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하루하루가 막막하고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오랜 무명 시절이 계속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더니 어느 순간부터 나를 알아 봐주시는 분들이 생겼다." 최근 유명한 글로벌 스포츠웨어 브랜드의 캠페인 모델로서 공식 행사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박나래가 남긴 말이다. 한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 올린 이들 대부분에게는 고난과 불안으로 점철된 시작점이 있기 마련이다. 박나래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남성 위주의 쏠림 현상이 심한 예능방송계에서 개그우먼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예능방송계에서 대세라 불릴 만한 여성MC로 떠오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아마 이영자 혹은 박미선 정도?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남자 출연자 전부 혹은 남자 출연자 다수에 여성 출연자 한두 명 정도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그 안에서 간헐적으로 주어지는 한두 자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증명하는 것 자체가 결코 만만할 리 없다.박나래가 유재석, 전현무, 강호동, 신동엽, 김구라 등 쟁쟁한 남성 방송인들을 제치고 예능방송인 브랜드 평판지수 1위를 차지한 건 대단히 놀라운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둘러싼 환경의 삭막함을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다. 예능방송인 브랜드 평판지수 10위권에 이름을 올린 여성 예능방송인은 박나래와 이영자뿐이다. 50위까지의 순위 안에 이름을 올린 여성 예능방송인도 9명에 불과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성 방송인이 출연할 만한 예능 프로그램이 좀처럼 기획되지 않거나 여성 방송인에게 출연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 적기 때문이다. '1박2일'도, '무한도전'도, '라디오스타'도, '미운 우리 새끼'도, '신서유기'도, '아는 형님'도, '집사부일체'도, 웬만큼 인지도가 있는 예능 프로그램 대다수의 고정 출연자는 한결 같이 남자 방송인들이었다. 대부분의 여성 출연자는 1회성으로 등장하는 게스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박나래에게 주어진 기회도 대부분 그런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언제나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보여줌으로써 대중에게 각인되는 존재로 거듭났다.지난 2018년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건 이영자였다. 당시 박나래도 유력한 후보로 꼽혔지만 올해의 예능인상을 받는 데 그쳤다. 수상 전 인터뷰에서 이영자는 "진정한 대상은 박나래"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이영자는 한동안 무대의 중심에서 멀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독보적인 경력을 가진 방송인이었다. 이영자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무도 없었다. 무대의 중심을 장악한 방송인이라 불릴 만한 여성 예능방송인은. 그리고 박나래가 나타났다. 이영자 이후로 예능방송계의 원톱 스트라이커가 될만한 여성방송인이 오랜만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박나래는 독한 분장이나 수위가 센 사연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끄는 존재가 아니다. 대신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모습을 통해 보다 성숙한 이미지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나 혼자 산다'에서 얼간이들을 담당하는 남자들을 이끄는 리더로 거듭나고 있다. 그리고 단언컨대, 2019년의 말미가 다가왔을 때 어김없이 기획될 다양한 결산에서 박나래라는 이름이 올해의 인물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지 않은 지금도 이미 그럴 자격은 충분하다.민용준(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19-04-10 11:37:53

[민용준의 엔터인사이트] 박찬욱 감독의 첫번째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2017년 8월에 박찬욱 감독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아가씨'의 제작 과정이 담긴 백서 '아가씨 아카입'의 출판을 앞두고 인터뷰를 할 기회가 주어진 덕분이었다. 당시에는 봉준호 감독이 넷플릭스와 손을 잡고 '옥자'를 발표한지 두 달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데이비드 핀처 같은 감독이 넷플릭스에서 제작하는 시즌제 드라마 연출을 맡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박찬욱 감독이 시즌제 드라마의 연출이나 넷플릭스와의 협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궁금했다. 박찬욱 감독은 "시즌제 드라마에도 흥미를 갖고 있다"고 답했다. 다만 에피소드 일부만 연출하는 데이비드 핀처와 달리 자신은 전체 에피소드를 연출하길 원할 거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달 후 박찬욱 감독이 TV드라마를 연출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거장 감독의 첫 TV드라마"TV드라마를 하고 싶어서 '리틀 드러머 걸'을 한 것은 아니고, '리틀 드러머 걸'을 하고 싶어서 TV라는 형식을 따라가게 된 거죠." 지난 3월 20일 오후 3시경에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리틀 드러머 걸' 언론시사회에서 1, 2화 상영이 끝나고 이어진 기자간담회에서 박찬욱 감독이 한 말이다.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 감독이 처음으로 연출한 TV시리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원티드 맨'의 원작자이기도 한 존 르 카레가 발표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연출한 작품이기도 하다.1950년대에 영국 정보국에서 실제로 첩보원으로 활동한 바 있는 존 르 카레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단히 사실적인 스파이물을 지칭하는 에스피오나지 소설을 발표해왔고 거장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존 르 카레가 1983년에 발표한 '리틀 드러머 걸'은 그의 작품 중에서 보기 드물게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첩보소설이다.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 시오니스트들과 팔레스타인 독립을 주장하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팔레스타인 영토의 주권을 두고 서로의 진영에 극렬한 공격을 주고 받던 1970년대 후반을 배경에 둔 첩보전을 그리는 작품이다.런던에 거주하는 무명배우 찰리(플로렌스 퓨)는 비밀스러운 오디션을 통해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공작원으로 캐스팅되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핵심부로 접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훈련시키는 모사드의 요원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에게 점차 연모의 감정을 품게 되면서 점차 혼란을 느끼게 된다. 스파이의 세계에 휘말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위태로운 사랑 속에서 사랑을 느끼게 된 감정적 혼란 속에서도 배우로서의 호기심을 놓지 않고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흥미로운 건 '리틀 드러머 걸'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시오니스트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사이에서 첩보전의 주역이 되는 주인공이 영국인 여성이라는 점이다. 이는 최근작인 '아가씨'를 비롯해 '스토커', '박쥐', '친절한 금자씨' 등 인상적인 여성주인공을 앞세운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해온 박찬욱 감독의 경력을 염두에 뒀을 때 흥미로운 흐름이기도 하다. 동시에 남성적인 세계관으로 인식되는 스파이 장르의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무게중심 역할을 해내는 여성 스파이를 그려낸다는 점에서도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양식을 제시할 기회라는 측면에서 적절한 만남처럼 보인다. 게다가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이라는 대가의 입장에서도 호감이 가는 주제로 다가왔을 것이다.주목받지 못한 무명배우였던 찰리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간의 영토 갈등에서 빚어진 피의 역사로 지어 올린 첩보전의 무대에서 스파이를 연기하며 첫 주연을 맡게 된다. 허구적인 캐릭터의 탈을 쓰고 극단적인 대립의 역사를 이어오던 양진영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깊숙하게 대면하게 되는 현실과 마주한다. 딜레마로 점철된 현실 속에서도 완벽하게 자신의 허구적인 소명을 완수해내는 아이러니에 빠져든다. 그 과정에서 '이 쇼의 제작자이자 작가이자 감독'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모사드의 요원 커츠(마이클 섀넌)는 야비한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든 상황을 기획하고 조율하는 역할이란 점에서 감독 입장에서는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밖에 없는 대상처럼 보인다.실제로 커츠 역을 맡은 마이클 섀넌은 한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 입장에서는 커츠와 자신을 동일시할 만하다"고 말한 바 있다. 박찬욱 감독 역시 인터뷰를 통해 커츠가 특별하게 다가왔다고 피력한 바 있다. "커츠는 허구의 세계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디테일을 추구하고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몰두하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다. 지금껏 내가 다뤄보지 않았던 유형의 인물 같다고 생각한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과 커츠의 공통점이 디테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원작과 달리 '디테일, 모든 건 거기서 시작되는 거야'라는 커츠의 대사가 추가된 것도 감독으로서 자신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국내에는 월 정액 스트리밍 서비스로 제공무엇보다도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빨강, 파랑, 노랑 등 비비드한 톤의 색감이 다채롭고 조화롭게 입혀진 공간과 의상은 '리틀 드러머 걸'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찬욱 감독이 품고 있었던 '리틀 드러머 걸'의 미장센에 대한 비전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미술감독이었던 마리아 듀코빅의 참여를 통해 구체화됐다. 마리아 듀코빅의 참여는 박찬욱 감독의 요구가 관철된 결과인데 이는 '리틀 드러머 걸'의 판권을 갖고 있었던 제작자이자 존 르 카레의 아들이기도 한 사이먼 콘웰의 협조 덕분이기도 했다.201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아가씨'로 칸을 찾은 박찬욱 감독은 현지에서 만난 사이먼 콘웰에게 '리틀 드러머 걸' 연출에 관심이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이먼 콘웰은 '리틀 드러머 걸'을 TV시리즈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에게 대본을 보냈지만 그가 큰 관심을 갖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영화에 비견할 만한 안목을 버리지 않는 선에서 연출을 원한다는 조건을 제시했고 제작자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동시에 주연배우로 '레이디 맥베스'에서 호연을 펼친 플로렌스 퓨를 추천했다. 박찬욱 감독은 인지도가 낮은 배우라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반대였다. 플로렌스 퓨는 사이먼 콘웰과 제작사가 캐스팅 1순위로 생각하는 배우였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이 그녀의 이름을 말했을 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고 밝힌 바 있다.물론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에피소드마다 1시간 남짓한 6회 분량의 드라마를 81회차만에 촬영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144분의 러닝타임을 가진 '아가씨'만해도 68회차로 촬영된 것이었다. 기존에 영화를 찍던 관성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 쫓기면서도 다양한 로케이션을 소화해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후반작업을 위해 허락된 시간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국내에서 공개되는 '리틀 드러머 걸'에 '감독판'이라는 부제가 더해진 건 그런 아쉬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공개된 '리틀 드러머 걸'은 해외에서 공개된 버전과 편집이 다르다. 박찬욱 감독의 말에 따르면 제작사와의 견해차이로 삭제된 장면들이 다수 포함됐고, 컷의 편집 순서나 음악이 바뀐 부분도 적지 않다고 한다.흥미로운 건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이 지난 3월 29일 '왓챠플레이'를 통해 공개됐다는 사실이다. 왓챠플레이는 넷플릭스처럼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한 동영상 서비스를 스트리밍 방식으로 공급하는 플랫폼이다. 월정액 방식으로 해당 플랫폼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스마트TV를 비롯해 인터넷이 수신되는 영상 디바이스로 연결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박찬욱 감독이 처음으로 연출한 TV시리즈가 국내에서는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을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박찬욱 감독 입장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편집본을 관객에서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왓챠플레이 입장에서는 박찬욱이라는 대가의 작품을 독점으로 제공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윈윈'하는 결과가 된 것 같다.한편 박찬욱 감독은 차기작을 연출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해외로 나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박찬욱감독은 미국의 아마존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서부극 연출 제안을 수락한 상황이라고 한다. '인터스텔라'의 주연배우 매튜 맥커너히가 주연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박찬욱 감독은 국내 연출작으로 기획 중인 작품의 제작 여건을 살피는 중이라고 한다. 지난 2017년 인터뷰 당시 박찬욱 감독은 기대만큼 투자금이 모이지 않아 제작을 보류했던 영화 '도끼'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한 바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거장 감독이 해외로 나가 작품을 연출할 기회를 얻는 건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자국에서 영화를 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비좁아지는 탓에 연출의 기회를 잡기 위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거장의 현실을 보고 있는 것 같다면, 그저 기우일까? 그런 의미에서 '리틀 드러머 걸'은 거장의 자존심과 고민이 함께 투영된 현실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영화를 가능한한 빨리 보고 싶다.민용준(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19-04-03 12:59:15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민용준의 엔터인사이트] 김혜자라는 존재감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지난 3월 19일에 방영이 종료된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10화가 끝날 무렵 들려진 이 내레이션의 주인공은 바로 김혜자였다. 아마 '눈이 부시게' 10화를 본 시청자라면 김혜자의 음성으로 전해진 이 언어들이 뜨겁게 데운 마음의 온도를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치매 노인의 시선으로 본 세상그전까지 '눈이 부시게'는 종종 마음을 잠기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도 대체로 경쾌하게 와 닿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10화는 그 결말로 종착하기 전까진 이전의 모든 화 중에서 가장 명랑하게 느껴지는 편이었다. 물론 그 결말로 닿기 전까진 지나치게 과장된 판타지처럼 보여서 당황스럽기도 했다.노인을 상대로 보험 사기를 치려는 일당에게 반하다 지하에 감금된 이준하(남주혁)를 구하기 위해 김혜자(김혜자)는 다른 노인들을 규합해 구출 작전을 펼친다. 그리고 늙고 쇠약한 노인들이 건장한 건달들을 피해 지하로 잠입하고 이준하를 구해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노인들은 마치 주성치의 영화를 연상시키듯 허무맹랑한 능력을 발휘한다.이를 테면 시각장애인 노인은 지팡이로 땅을 내리쳐 잠수정의 초음파 레이더처럼 벽 너머의 존재를 감지하는 식이랄까. 그만큼 귀엽고 명랑한 구석도 있지만 9화까지의 흐름에 비해 지나치게 산만하고 과장된 활극을 보는 인상이라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0화에서 벌어진 그 모든 사건들이 사실상 치매에 걸린 노인의 망상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시청자들이 봐온 김혜자의 일상이 모두 다 질환에서 비롯된 착시임을 알게 된 순간, 모두의 마음에 파도가 치고 결국 여운으로 넘쳤을 것이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비애와 공허로 출렁이는 슬픔과 허무의 바다를 각자의 마음으로 느꼈을 것이다.'눈이 부시게'는 9화까지만 해도 타임슬립 즉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통해 미묘한 긴장을 일으키는 동시에 유머를 구사하는 드라마였다. 참신했다.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노인문제라는 작금의 시대상과 연결하며 탁월하게 동시대 현실을 관통했다. 10화 말미에 밝혀진 반전이 시청자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던 것도 9화까지의 서사가 노인들의 삶에 대한 공감대를 생생하게 쌓아 올려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눈이 부시게'에서 눈이 부시게 극적이었던 바로 그 순간, 배우 김혜자가 있었다.◆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배우, 김혜자1941년생 그러니까 올해로 79세. 배우 김혜자는 오랫동안 국민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1980년에 시작해 2002년에 끝난 무려 22년간 방영된 '전원일기'에서 김혜자는 이은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지만 시청자들에게는 남편인 김 회장의 아내 혹은 아들인 용식이 어머니로 통했다. 그리고 김혜자를 어머니의 대명사로 연상하도록 만든 건 아무래도 '그래, 이 맛이야'라는 유명한 대사로 잘 알려진 조미료 광고였다. 그렇게 김혜자는 한국의 어머니상을 대변하는 배우로 여겨졌다.지난 2009년 김혜자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에게 어머니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자식들에게는 폐가 되는 엄마일 거예요. 항상 한심한 말이나 하고, 오히려 자식들한테 밥 좀 먹으라는 얘기를 몇 번씩 들으면서 밥도 얻어먹고. 그러니까 제가 대표적인 엄마상이라는 건 어폐가 있는 일이죠. 그냥 제가 그동안 배우로서 어머니 역할을 잘 해왔으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엄마로서 내 생활은 엉터리였어도."김혜자는 전형적인 어머니상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나는 김혜자가 실제로 모성애가 넘치는 어머니가 아니었다는 사실보다도 그렇게 자신이 살아왔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김혜자의 답변이 흥미로웠다. 그만큼 김혜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배우였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실제로 그 직전 김혜자는 국민 어머니라는 수식어를 배반하는, 남다른 어머니를 연기했던 터였다. 2008년에 방영됐던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말이다.제목처럼 '엄마가 뿔났다'는 결혼 후 30여 년간 성실한 아내이자 엄마이자 며느리로 살아온 여자의 각성과 일탈을 그린 드라마다. 김혜자가 연기한 한자는 시댁살이를 하며 시누이 뒷바라지에 세 아이까지 키우며 환갑을 넘긴 나이에 가족을 향해 그 모든 의무감에서 벗어나 안식년을 갖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심지어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에게 방을 하나 내줄 것을 요구한다. 당황한 가족들 중 일부는 타이르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 고집을 꺾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지난 세월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한자는 상당히 선구자적인 면이 있는 엄마죠. 그리고 이젠 그런 시대가 올 거예요. 가족만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는 점점 없어질 거라 생각해요." 김혜자의 말처럼 그는 '전원일기'보다는 '엄마가 뿔났다'에 가까운 엄마이고 그 이전에 여성이었다. 시대가 그를 국민 어머니라 칭송하게 만든다 해도 그는 김혜자로서의 삶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철학과 일치하는 존재를 연기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배우가 됐고, 인정받았다. 그 누구보다도 배우로서의 삶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저는 직업이 배우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냥 삶이었지. 제가 연기를 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을 때가 오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살아있다 해도 제가 연기하고 있지 않다면 그냥 반쪽의 저만 있는 거니까요. 물론 그 반쪽의 삶은 살고 있겠지만 배우로서의 저는 죽은 거죠." 김혜자는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를 넘어 연기하기 위해 살아가는 배우였고, 배우다. 그럼으로써 여전히 배우로서 형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대중의 이목을 끄는, 실로 다시 보기 힘들 마지막 배우일지도 모른다. '눈이 부시게'에서 김혜자는 바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기한다. 김혜자를 김혜자가 연기한다. 그래서 '그래, 이 맛이야'라는 패러디는 보다 짜릿한 감칠맛을 내는 유머가 되고, 김혜자의 언어와 행동은 우리가 보고 싶었던 배우의 말과 삶으로 전해지는 것만 같다. 나는 2009년 당시 인터뷰에서 김혜자가 죽음에 대해 말할 때 굉장히 인상적이라 생각했다. 김혜자는 종종 김중만 작가의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영정 사진을 준비한다는 건 언제나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처럼 들렸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말했어요. 예쁜 사진만 보면 '이거 영정사진으로 써야지'라고. 습관처럼 입에 달고 다녀서 우리 애들이 질색할 정도죠. 그런데 저는 항상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요. 그리고 언제가 돼도 상관없어요. 저는. 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죽음이 그렇게 두렵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오래 사는 게 이상하다니까요. 물론 이런 말 해도 저희 애들은 질색하죠." 여전히 선하다. 은은한 미소가 번진 표정으로 자신의 죽음과 생의 끝을 덤덤하게 말하던 그 얼굴이. 문득 70대의 나이에 그렇게 여유롭고 낭만적인 기품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이의 오늘이란 어떤 것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김혜자는 배우로서 오래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랑했기 때문에 배우로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연기를 해온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서 연기를 해왔다. 그래서 나는 김혜자 같은 배우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 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라는 대사를 현실적인 울림으로 전할 수 있는 배우란 언제나 귀하고 중한 법이니까. 무엇보다도 지금의 세상에는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므로. 배우 김혜자가 좀 더 오랫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길 바라는 건 그래서다. 이 세상이, 김혜자라는 배우를 보다 오래 만났으면 좋겠다. 민용준(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19-03-27 11:54:17

성접대 의혹을 받는 빅뱅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14일 오후 서울지방경찰청으로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용준의 엔터인사이트]승리와 정준영의 단톡방이 남긴 것

지난 1월 28일 에서는 강남에 위치한 한 유명 클럽에서 폭행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클럽을 찾은 한 손님이 클럽의 이사와 보안요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전치 4주의 상해를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2018년 11월 24일에 벌어진 사건의 정황이 2개월이 넘은 시점이 돼서야 보도된 것도 특이했지만 클럽을 찾은 손님들 간의 문제가 아니라 클럽 관계자가 폭행을 감행한 가해자로 지목됐다는 것도 조금 기이했다. 어쨌든 단순한 폭행 사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버닝썬 폭행사건으로 열린 판도라 상자잘 알다시피 그 이후 상황은 일파만파였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자리한 클럽 버닝썬에서 벌어진 폭행 사건은 이후 클럽 운영자와 경찰의 유착 의혹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버닝썬에서 마약 유통과 투약이 빈번이 발생하고 있으며 소위 물뽕이라 일컫는 마약류 약물을 먹이고 항거불능 상태가 된 여성을 성폭행하는 범죄행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폭로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클럽 관계자가 알고도 방조하거나 오히려 이를 VIP로 분류된 손님에게 알선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실제로 클럽 관계자가 '여성흥분제 판매를 중단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정황이 포착되면서 의혹이 실체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 있는 인물로 지목된 것은 버닝썬의 사내이사로 재직했던 가수 승리였다. 한류스타 빅뱅의 멤버인 승리는 최근 몇몇 방송을 통해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이미지를 굳혀 나가고 있었다. 버닝썬 역시 승리가 운영하는 사업체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MBC의 예능프로그램 에 출연하며 자신이 새롭게 오픈한 클럽이라며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버닝썬과 관련된 각종 범죄 의혹이 불거지자 승리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대외적으로 클럽을 알리는 역할'이라며 '실질적인 클럽 경영과 운영은 제 역할이 아니었다'며 버닝썬과의 관계에 선을 그었다. 승리의 소속사인 YG 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 역시 승리를 두둔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승리는 3월 군입대가 예정됐다는 이유로 버닝썬 사내이사직을 사임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버닝썬과 승리의 관계는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지난 2월 26일 에서는 승리가 해외투자자를 상대로 성접대를 주문했다는 내용이 담긴 카카오톡 대화를 입수했다며 그 내용을 공개했다. 내용에 따르면 승리가 동업자들에게 해외에서 온 투자자들에게 유명 클럽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동시에 동석시킬 여자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것. 그리고 메시지 대화상에서 '잘 주는 애들'이나 '창녀들'이라는 단어를 동원됐으며 이는 일종의 성접대를 알선했다는 혐의가 추정될 만한 사안이었다. YG엔터테인먼트 측에서는 이에 대해 '조작된 문자 메시지'라며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내놓았으며 '가짜 뉴스를 비롯한 루머 확대 및 재생산 등 일체의 행위에 대해 법적으로 강경 대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승리가 포함된 해당 메신저 대화를 입수해 조사한 경찰 관계자는 해당 대화가 조작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했고 승리는 성매매 알선 혐의로 입건된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 이후로 해외 원정 도박 및 외환관리법 위반 논란과 각종 탈세 의혹 등 승리를 둘러싼 다양한 범죄 의혹이 제기됐다. 그리고 3월 11일, 를 통해 승리와 정준영이 포함된 단톡방에서 성행위 영상을 불법 촬영하고 공유됐다는 정황이 보도되면서 버닝썬 사건의 파장이 연예계로 이어졌다. 2016년에 성행위 과정을 불법 촬영한 혐의로 기소된 바 있었지만 고소인이 고소를 취하하고 검찰 수사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던 정준영이 다시 한번 불법 영상 촬영을 했다는 정황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동시에 단톡방에 연예인이 더 포함돼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결국 '하이라이트'의 용준형과 'FT 아일랜드'의 최종훈, '씨엔블루'의 이종현이 그 당사자라는 것이 드러나며 파문이 확산됐다. 이들은 각각 자신이 소속된 그룹에서 탈퇴한 뒤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실명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행동을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밝혀왔다. ◆단순 연예인 스캔들에 그쳐서는 안돼승리와 정준영의 혐의에 대한 경찰 수사는 아직 진행 중이다. 아직 그들에게 씌워진 혐의가 유죄라는 판결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적인 판결 여부를 떠나 승리와 정준영을 비롯한 그들만의 단톡방에서 벌어진 일련의 대화 양상을 봤을 때 그들이 과연 대중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들이었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최근 몇몇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성공한 사업가라는 위상까지 얻었다. 방송에서는 승리가 사업가로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세계적인 인기를 가진 아이돌 스타를 넘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사업가로서의 철학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승리의 새로운 사업체로서 버닝썬이 노출되기도 했다. 방송사가 승리에게 성공한 사업가라는 후광을 만들어주는데 일조한 공범이라 지목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랄까. 물론 방송사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모든 출연자의 일상을 검증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내용을 거창하게 부풀리는데 일조했다면 그 역시도 문제라는 것이다. 최소한 승리를 성공한 사업가로 보이게끔 일조한 방송계 관계자들은 이번 사태를 각성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동시에 멀끔한 이미지로 대중의 인기를 얻어온 남성 연예인들이 단톡방에 모여 여성을 오로지 성적인 대상으로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주고받은 정황은 그들 대부분이 여성 팬덤을 기반으로 지금의 입지를 다진 젊은 아이돌 멤버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뒀을 때 더욱 충격적이다. 연예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적 요구를 하는 것에 동의하진 않지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의 범죄 행위가 대중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이에 대한 엄중한 법적 판단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사건은 젊은 남성 연예인들이 집단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성관계를 불법 촬영한 영상을 서로에게 공유하며 암묵적인 범죄 카르텔 양상을 보여줬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승리가 출연한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승리의 외장하드에 존재한다는 다량의 '야동'을 언급하며 이를 희화화한 바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가 남성들의 '야동' 문화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비뚤어진 성의식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만한 계기처럼 보인다. 최소한 방송에서 '야동'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인 언어처럼 인식되지 않도록, 성의식을 왜곡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가히 '승리 게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닌, 승리와 정준영을 비롯한 남성 연예인들의 왜곡된 성의식을 보여준 이번 사태는 한국 남성 사회의 한 단면을 축소판처럼 보여준 사건처럼 보인다. 최근 SNS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한 남성들의 인식을 묻는 영상이 공유되기도 했는데 '연예인이라서 너무 크게 이슈가 된 거 같다'거나 '남자라면 야동을 보고 싶어하기 마련이고 친구와 돌려보고 싶기도 하다'는 답변을 서슴지 않고 내놓는 남성들의 태도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승리와 정준영을 비롯한 남성 연예인들이 단톡방에서 보여준 일련의 대화와 행위들은 현재 한국 남성들이 자연스럽게 소비하는 음성적인 성문화가 잘못된 성의식을 잉태하고 끝내 성범죄에 대한 인식까지 흐린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사례가 될 것 같다. 그만큼 이번 사건은 단순히 연예계의 스캔들이 아니라 범사회적인 문제를 진단하는 기회로 인식돼야 마땅하다. 동시에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성의식을 되짚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도, 미디어도, 이 사건을 주시하는 동시에 경계해야 한다. 이 사건이 단순히 승리와 정준영을 둘러싼 진실게임으로 소비하고, 그에 관한 가십에 탐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더 이상 '위대한 승츠비'에 관한 드라마가 아니니까. 민용준(대중문화칼럼니스트)

2019-03-20 14:07:55

넷플릭스 영화 '블랙미러 : 밴더스내치'

[민용준의 엔터인사이트] 이것은 게임인가, 영화인가?

1984년 7월 9일 오전 8시 30분, 스테판(핀 화이트헤드)은 리버풀의 5인조 밴드 '프랭키 고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se to Hollywood)'의 경쾌한 넘버 'Relax'를 듣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화장실에서 알약 두 개를 삼키고 거실로 나와 서먹하게 인사한 아버지와 식탁에 마주보고 앉은 스테판은 책장을 넘긴다.스테판은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읽었다는 '밴더스내치'라는 책을 동명의 게임으로 개발 중이라 한다. '벤더스내치'는 독자가 직접 이야기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집필된 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테판은 천재적인 게임 개발자로 꼽히는 콜린 리트먼(윌 폴터)이 소속된 게임 회사 터커소프트를 찾아가 게임 데모를 보여주고 정식 출시 계약을 의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아침 식사로 시리얼을 권한다. 두 가지 종류의 시리얼 중 하나를 선택하길 권한다. 그러니 선택해야 한다. 스테판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을 당신이 말이다.◆영화의 결말도 선택할 수 있다? 인터렉티브 서사 형식의 영화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영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이하, '밴더스내치')는 시청자가 이야기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당신이 선택하지 않으면, 혹은 정해진 시간 내에 선택하지 못하면 넷플릭스가 선택한다. 어떤 식으로든 '밴더스내치'가 제시하는 두 방향 중 한쪽으로 가게 돼있다는 말이다. 즉 적극적으로 방향을 선택할 수도 있고, 수동적으로 선택된 방향을 따라갈 수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는 계속 진전된다. 하지만 전진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후진도 가능하다. 이를 테면 극 초반에 찾아온 선택지에서 내린 결정에 따라 이야기 자체는 20여 분만에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는데 그게 끝이 아니다. '밴더스내치'는 시청자가 끝내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허망하게 찾아온 이른 결말 외에 다른 선택의 결과를 보고 싶다면 '돌아가기'를 선택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 리셋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은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되풀이가 가능하다.'밴더스내치'의 공식적인 프로그램 소개에는 러닝타임이 1시간 30분이라 명시돼 있다. 하지만 '밴더스내치'를 끝까지 본 이들 대부분의 시계는 1시간 30분보다 더 많이 돌아갔을 것이다. 선택에, 선택에, 선택을 거듭할 때마다 달리 진전되는 상황들을 마주하다 보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호기심을 끊을 수 없다.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리길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주저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넷플릭스라는 정액제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을 이용하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리플레이를 반복한다해서 추가비용이 들어갈 일도 아니다. 반대로 그 모든 과정을 확인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밴더스내치'가 제시하는, 인터랙티브 서사 형식은 넷플릭스라는 플랙폼에 최적화된 시도인 셈이다.서사적인 측면에서 '밴더스내치'가 새로운 판본인 것은 아니다. 사소한 선택이 판이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나비효과' 류의 설정과 동시간대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세계를 상상하는 '평행 우주'적 세계관은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동어반복된 것이다.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리셋 방식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타임슬립 영화의 유사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밴더스내치'는 시청자가 직접 나비효과를 선택하고, 평행 우주를 수집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온다. 선택을 반복할수록 앞서 목격했던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재조립되면서도 크고 작은 디테일을 수집할 수 있다. 선택 사항에 따라 인과의 경험이 달라지고, 결말의 양상도 달라진다. 그 과정에서 관람의 목적이 변하는 것 같다. 선택을 번복할수록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보다 이야기를 수집하고 싶다는 소유욕이 커진다. 새로운 선택지가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점점 적극적으로 선택을 번복하게 된다. 이는 게임 내에 숨겨진 '이스터 에그'를 수집하는 재미와 흡사하다.그러니까 이것은 영화인가, 게임인가. '밴더스내치'는 아이러니한 영화다.'밴더스내치'는 게임의 묘미로 관객을 유인한다. 주인공이 죽으면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게임과 같다. 리셋이 가능하다. 앞서 선택하지 않은 인과를 선택해 플레이할 수 있다. 하지만 막힌 벽으로 뛸 수 없는 캐릭터처럼 '밴더스내치'의 서사도 모든 방향으로 뚫린 이야기는 아니다. 다양한 인과와 결말을 갖고 있지만 무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선택이 거듭될수록 이것이 우회전과 좌회전을 마음대로 허용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꾸 오른쪽 깜빡이에 불이 들어온다. 그 순간에도 좌회전을 선택하는 건 역시 자유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우회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리고 '밴더스내치'의 결말은 하나같이 비극적인 정서로 수렴한다.각기 다른 결말을 하나씩 수집할 때마다 '밴더스내치'가 해피 엔딩을 고려하지 않은 작품임을 실감하게 된다. 게임의 문법을 빌려왔지만 지극히 영화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선택이 어찌 됐건 이야기의 큰 흐름은 되돌려지지 않는다. 길을 선택할 기회를 주지만 목적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끝내 이야기의 결정권을 쥐는 것은 시청자가 아니라 창작자다.◆곳곳에 숨겨진 이스터에그로 흥미유발1시간 30분으로 명시된 러닝타임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체험했을 때 5시간 12분 13초까지 확장된다고 한다. 넷플릭스에서 인정하는 결말은 5개 정도라고 하지만, 각본가 찰리 브루커는 그것보단 많다고 말했고, 프로듀서 러셀 맥리언은 10개에서 12개 정도까지 변형된 결말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연출한 감독 데이비드 슬레이드는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이 결코 보지 못할 장면들, 즉 '골든 에그'가 존재한다며 숨겨진 이스터 에그의 존재를 시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떡밥이 되기도 하지만 몇 차례 플레이한 입장에서는 그만큼의 선택을 다시 거듭해야 한다는 피로감으로 대체된다. 마치 영동대교로 건너야 할지, 동호대교로 건너야 할지, 자꾸 어느 방향으로 갈지 묻는 택시 기사를 재차 만난 기분이랄까.무엇보다도 5시간 가까이 유사한 장면을 되돌려가며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경우의 수를 이루는 서사의 조각들이 일정한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다양한 인과로 진전되는 각기 다른 서사로부터 완성도의 편차가 느껴진다. 어떤 행위는 어떤 결말을 낳기 위한 수단 이상의 가치가 없어 보여서 해당 서사 자체가 잉여처럼 와닿고, 어떤 행동은 그저 과격한 충동으로 시청자를 몰아넣는 충격요법에 불과한 눈속임처럼 보여서 가증스럽다. 그래서 오히려 1시간 30분 분량으로 선별된 서사를 바탕으로 편집된 '밴더스내치'가 어떤 영화일 수 있었을지 되레 궁금해지기도 한다.그럼에도 흥미로운 콘텐츠라는 점은 확실하다. 콘텐츠와 소비자가 일대일로 매칭되는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에서 가능한 최상의 시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충실한 내면의 디테일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작품처럼 보인다.'벤더스내치'는 1980년대의 주류 게임사였던 이매진 소프트웨어에서 실제로 개발하던 비디오게임 프로젝트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밴더스내치'가 시작되는 1984년 7월 9일은 이매진 소프트웨어가 도산한 날이라고 한다. 또 극 중에서 '벤더스내치'의 원작자로 등장하는 제롬 F. 데이비스 역을 맡은 이는 전문 배우가 아니라 1980년대 당시 8비트 비디오게임 디자이너이자 프로그래머였던 제프 민터라고 한다. 이처럼 깨알 같은 이스터 에그는 다시 한번 플레이하고 싶게 만드는 진심으로 와닿는다. '밴더스내치'가 던지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남기고 싶은 건 그래서다. 영화도 리셋이 될까? 그렇다. 오직 넷플릭스에서만.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19-03-13 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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