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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시의원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9) 김동식(더불어민주당·수성구 제2선거구)

대구시의원. 아는 사람만 압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은 알아도 또 다른 우리 동네 대변자인 시의원은 잘 모릅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관심이 우리 구(區)·군(郡) 나아가 우리 대구를 잘 돌아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매일신문은 이번 6·13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시의원들의 인터뷰를 싣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동네 시의원의 참모습을 확인해보세요.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김동식 대구시의원 득표율 50.06%, 86표 차. 살얼음을 걷는 승부였고 간발의 차이였다. 만약 투표자 44명이 마음을 바꿔먹었으면 낙선의 쓴맛을 봐야 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김동식 대구시의원(52'더불어민주당)은 개표 당시 담담했다고 털어놨다. 오히려 1표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꼈기에 자신의 의정 활동에 큰 밑거름이 될 거라고 한다. '리틀 김부겸'이 아니라 '정치인 김동식'이 되겠다는 그의 포부에 무언가 해내겠다는 기대감을 품을 수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 상대 후보에게 86표 차이로 당선됐는데 당시 심정이 궁금하다. ▶솔직히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개표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상대가 3선의 오철환 후보여서 만만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자체 여론조사에서도 3% 이상 이기고 있었다. 4년 전 무소속의 시민 후보로 도전해서 실패한 이후 정말 열심히 뛰어왔다. 선거운동 기간에도 이 상태로만 열심히 하면 이긴다는 자신이 있었다. 개표할 때도 엎치락뒤치락했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당선됐을 때 십 년 감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표 차이가 별로 나지 않다 보니 마지막 선거 직전 48시간 유세를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나름 분석도 해봤다. 사실 24시간까지는 어느 정도 유세를 하겠던데 그 이상은 너무 힘들더라. 사람 중에는 새벽 3~4시까지 유세를 하니까 웃는 이들도 있었고 "꼭 찍을게요"라며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 선거유세를 안 했더라면 떨어졌을 수도 있다. 부인은 울다가 웃다를 몇 차례 했다고 토로하더라. 이번 결과가 1표의 소중함을 새삼 가르쳐줬다. 앞으로 저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한다. -대구참여연대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했는데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대학 다닐 때부터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회개혁이나 시민운동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1993년 대학 졸업 후, 고향인 경북 성주에 있는 농협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당시 우루과이라운드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농민들과 함께 시위를 많이 했다. 농협은 1년 정도 다니다 직업에 대한 회의 등으로 그만두고 성주에서 조그만 시민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 시민운동이 정당 운동을 다변화시키는 제3물결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다. 그러다 1997년 결혼을 했는데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 사생활이 별로 없어 부인과 계속 마찰이 생겨 시민단체 활동을 잠시 접고 대구에서 사업했다. 그러는 와중인 1998년 대구참여연대를 결성하자는 제의가 있었고 항상 시민운동에 대한 열망이 있던 차여서 같은 해 4월 참여연대가 창립될 때 창립회원으로 합류하게 됐다. -시민단체 활동 중에 특히 도시공동체 활성화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하는데. ▶급속하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모두 익명화가 됐는데 이런 상황이 도시범죄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제가 시골에 살 때는 아이 누가 울면 어른들이 부모가 누군지, 어느 집 아이인지 물어봤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그런 일이 잘 없는데다 누구 집 아이라고 해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공동체 의식을 잊어버리는 게 도시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이를 해결하려면 도시공동체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는 도시의 건강성을 확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차원에서 수성구 시지에 터를 잡고 협동조합이나 마을기업 활성화에 매진해서 어느 정도 도시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졌다. 문제는 아파트다. 우리나라 도시는 아파트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아파트가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데 외국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다. 하지만 아파트 문화에서는 공동체 문화가 많이 약하고 이에 대한 연구도 미흡하다. 상당수 아파트 주민은 외지 사람이 방문하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외지 사람이 주차하는 것도 싫어하는 등 폐쇄성이 강하다. 아파트 상가 고객을 위해 낮에 주차공간이 있으면 개방하면 되지만 온종일 주차 금지를 하고 있다. 아파트 인근 소공원의 수풀에 벌레를 잡으려고 구청에서 방역하면 아파트는 방역이 안 되니까 못 한다. 그러면 벌레가 아파트로 다 넘어간다. 아파트의 폐쇄성이 결국 아파트로 피해가 가는 것이다. 아파트 문화가 개방돼야 한다. 주변의 빌라와 단독주택과의 화합도 필요하다. 공공기관도 아파트 내 시설을 담당 시설로 인지해야 예산 투입이나 관리 등이 가능하다. -15년간 대구참여연대에 몸을 담다 제도권 정치로 들어오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2014년 6'4 지방선거 당시 대구참여연대에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시민운동을 제도권으로 넓혀보자는 취지에서 무소속의 시민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낙마는 했지만 무소속인데도 36%의 지지율을 얻은 성과가 있었다. 같은 해 12월쯤 당시 수성구 국회의원을 도전하던 김부겸 행정안전부장관 캠프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스스로 대구의 1당 독점을 타파하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김부겸 캠프 조직본부장을 맡았다. 2016년 총선에서 이기고 지역 사무국장을 거쳐 김 장관(당시 국회의원) 보좌관까지 맡았다. 제도권 정치에 참여하면서 크게 느낀 부분이 있었다. 시민운동은 문제를 제기만 하면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보지만 제도권 정치에서는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역할이다. 예를 들어 시민단체에서 민원이 들어오면 같이 울어주거나 같이 목소리를 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과거 황산테러사건 부모가 한창 재조사를 요구할 때도 시민단체에서는 같이 외쳐주는 일밖에 못 했다. 제도권 안에 있으면 사회적 약자나 소수라는 이유로 억압이나 불이익을 받으면 같이 해결해줄 수 있다. 그게 가장 큰 보람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 영역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인생에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고 들었는데? ▶대구참여연대는 비상근직이다. 시민단체 활동으로는 밥벌이가 안 된다. 1997년 결혼 후 대구로 온 뒤 조그마한 웨딩가게를 했다. 하지만 IMF 이후인 2000년 초반에 너무 경기가 좋지 않아 폐업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겪었다. 당장 갈 때도 없고 먹고사는 일이 막막해 막노동판에서 일했다. 당시 일당이 5만원 정도였다. 막노동에 얻은 경험으로 설비배관공으로 10년 가까이 전국을 떠돌면서 살았다. 이후 2012년쯤 인테리어 가게를 제 이름으로 개업했다. 그런 과정에서 정말 죽고 싶다는 상황도 맞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보다 어려운 시기가 앞으로 올지 생각된다. 정말 제가 오랫동안 몸소 겪었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리틀 김부겸'이란 타이틀이 붙었다. ▶선거운동하면서 김 장관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곧잘 들었다. 집안 동생이냐는 물음까지 들었다. 아무래도 지역구가 김 장관의 지역구이고 밑에서 보좌관 생활을 했으니 그런 별칭이 붙은 것 같다. 사실 김 장관과 추구하고 바라보는 시각도 비슷하긴 하다. 그러나 소위 '가신'(家臣)은 절대 아니다.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지지자일 뿐이다. 정치적인 꿈이 같을 뿐 상하관계는 아니다. 어찌 보면 김 장관처럼 훌륭한 정치인이 되라는 의미에서 붙은 별칭인 것 같다. 솔직히 리틀 김부겸이라는 별칭이 그리 달갑지는 않다. 제 나름의 정치관과 소명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의정활동을 잘 펼쳐 '정치인 김동식'으로 불리고 싶다. -교육 복지 공약 중 진로진학지원센터 개설이 눈에 띈다. ▶중'고교에 진학센터가 많지만, 지금까지 별로 효과를 못 내는 것 같다. 수성구는 서울의 강남 다음으로 학구열 높은 지역인데 진로진학지원센터가 없다. 그렇다 보니 일부 학부모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까지 올라가서 고액의 입시진로진학 상담을 받고 온다. 물론 부유한 학부모는 이를 감당할 수 있지만 문제는 맞벌이하는 학부모들이다. 자녀의 진로진학에 관심은 많지만 바쁘고 경제적인 부담 탓에 제대로 컨설팅을 해주지 못한다. 부모가 입시제도를 꿰뚫고 있지 않으면 자녀가 좋은 대학을 가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런 무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성구 내에 진로진학지원센터를 만들고 서울 강남 수준의 지원관들을 상시 배치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 중이다. 수성구청과도 큰 맥락에서는 합의됐다. 이렇게 되면 센터 예약을 통해 언제든지 학부모나 학생들이 입시제도의 전반적인 상황이나 변화 등을 상담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공약은 임기 중에 꼭 이루고 싶다. -어떤 시의원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시의원 자리가 대구 시민의 요구와 이익을 대변하는 자리지만 민주당 소속의 시의원의 역할도 있어 가끔 헷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역할이 있으면 대구 시민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이후 민주당 지지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나는 어떻게 생각할지를 고민할 것이다. 인기있는 시의원보다는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시의원이 되고 싶다. 자리에 상관없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조하는 시의원으로 기억되고 싶다.

2018-09-03 14:17:13

박우근 대구시의원.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8) 박우근(자유한국당·남구 제1선거구)

대구시의원. 아는 사람만 압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은 알아도 또 다른 우리 동네 대변자인 시의원은 잘 모릅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관심이 우리 구(區)·군(郡) 나아가 우리 대구를 잘 돌아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매일신문은 이번 6·13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시의원들의 인터뷰를 싣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동네 시의원의 참모습을 확인해보세요.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박우근 대구시의원 박우근(64'자유한국당) 대구시의원은 경찰 출신이다. 33년간 경찰로 지내면서 그는 남구의 각종 민원을 발 벗고 나서는 '민원해결사' 역할을 자처했다고 한다. 그런 인연이 남구 구의원을 거쳐 지금의 시의원의 자리에까지 있게 했단다. -경찰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많을 것 같은데? ▶1978년부터 2011년까지 33년 동안 경찰 생활을 하고 명예퇴직을 했다. 퇴직 직전에는 남부경찰서 보안계장(경감)을 지냈다. 33년 중 25년을 정보과에 근무했고 남부서에서 주로 활동했다. 기억에 남는 일이 많지만, 무엇보다 보람된 것은 집단 민원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1991년으로 기억한다. 당시 대명5동 인근 캠프 워커 A-3 비행장에서는 '시누크'(수송 헬기)가 수시로 뜨면서 소음이 엄청났다. 100m 상공에서 떠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소음뿐 아니라 분진도 많이 생겼다. 인근 몇몇 집에서는 유리창이 깨지는 일도 생겨 주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대 앞에서 주민들이 시위도 많이 할 때였다. 하지만 해결이 쉽지 않았다. 그때 주민들의 피해 상황을 당시 미군 민사처장에게 계속 알렸다. 현장에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권유도 많이 했다. 이후 미군들이 부대 내에서의 시누크 훈련을 자제하더라.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영대네거리에서 캠프 워커까지의 도로가 1990년대 초반까지는 왕복 4차선이었다. 그렇다 보니 항상 정체됐고 민원도 계속 들어왔다. 이런 상황을 시청에 수시로 찾아가 알리고 주민들의 입장도 전했다. 결국 왕복 8차선으로 확장됐고 주민들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경찰을 그만두게 된 이유가 있다면? ▶남구와는 인연이 깊다. 고교 때부터 살았고 경찰 생활하면서도 대부분을 남구에서 보냈다. 하지만 경찰이라는 직업이 사회 안정과 함께 범죄와 관련된 업무를 주로 한다. 뭔가 구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해결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경찰을 명퇴하고 바르게살기운동 대구남구협의회 사무국장을 3년 동안 지내면서 다양한 봉사 활동을 했다. 이후 2014년 6'4 지방선거 때는 남구 구의원에도 당선됐다. 구의원을 지내면서도 무엇보다 주민들의 민원 해결에 앞장섰다. 민원인과 해당 부서를 직접 연결해주면서 직접 만나도록 했다. 민원 해결이 어려우면 친절하게 사정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점이 주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었고 시의원으로 당선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광역시의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의 선거제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해왔다는데?▶광역시의 경우는 기초단체장은 현재 선출직에서 임명제로 바꿔야 한다. 기초단체장을 선출직으로 하다 보니 당사자가 재선 또는 3선을 하고자 선심성 행사를 너무 늘린다. 축제 행사를 새로 만들어 가수 부르는 게 일이다. 모든 게 예산 낭비다. 결국 사람을 모아서 단체장이 얼굴을 알리려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불필요한 혈세가 소모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단적인 예가 비슷한 축제를 대구시에서 하는 것뿐 아니라 각 구청에서, 심지어 요즘은 동(洞)에서조차 하고 있다. 또한 임명제로 바꾸면 굳이 부구청장 직을 두지 않아도 된다. 부구청장 제도도 기초단체장을 선출직으로 바꾸면서 생겨났다. 구청에 국장도 있기 때문에 부구청장은 하나의 옥상옥일 뿐이다. 광역시의 기초의원도 문제다. 지방자치의 근간이 기초의원이긴 하지만 서울시나 도 단위 정도만 남겨놓고 광역시 기초의원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초의원 업무는 사실상 시의원이 맡아도 된다. 광역시는 구 단위의 의회 역할이 별로 크지 않다. -교육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는데 가장 중점을 두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최근 문제가 되는 미세먼지와 관련, 관리조례를 만들 계획이다. 학교의 각 교실에 공기청정기를 배치하도록 하고 미세먼지가 심할 때는 학생들에게 마스크를 지급하는 방안을 찾아볼 생각이다. 이를 위해 교육위원회 위원들과 간담회를 가져 의견을 교환했다. 또한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미세먼지가 '아주 나쁨'일 때는 강제휴교를 할 수 있는 내용도 담을 계획이다. 지역 간 교육격차 해소와 학교폭력 줄이기에도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겠다.

2018-08-27 15:03:59

강성환 대구시의원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7) 강성환(자유한국당·달성군 제1선거구)

대구시의원. 아는 사람만 압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은 알아도 또 다른 우리 동네 대변자인 시의원은 잘 모릅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관심이 우리 구(區)·군(郡) 나아가 우리 대구를 잘 돌아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매일신문은 이번 6·13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시의원들의 인터뷰를 싣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동네 시의원의 참모습을 확인해보세요.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강성환 대구시의원 대구 달성군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달성에서 나고 군청에서 30여 년 공직생활을 이어왔던 강성환(62·자유한국당) 대구시의원은 그 변화상을 생생히 지켜봤다. 그는 "지금도 거대한 공사장"이라고 비유했다. '달성 사나이'라고 자부하는 강 의원은 부족한 도시기반시설을 늘리는 데 힘을 쏟겠다고 강조했다.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달성군은 이제 신도시의 메카로 여겨진다. 이를 줄곧 지켜봤을 텐데? ▶1979년 10월 달성군청에 정식 공무원이 됐는데 당시에는 달성에 아파트라고는 전혀 없었다. 정말 순수한 농촌이었다. 1984년에 대구와 달성군 경계지점인 화원 구라리에 한우아파트가 달성군에 지어진 첫 아파트였다. 연료를 연탄으로 떼는 아파트였다. 이후 달성 1, 2차 산업단지가 잇따라 생기고 몇 년 전 테크노폴리스 등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대변혁이 생겼다. 죽곡 1, 2지구의 예를 들면 과거엔 이곳을 '메기 하품하면 물 담는 지역이었다'고 불렀다. 한마디로 침수지역이었다. 이를 대구지하철 2호선 공사과정에서 나온 토사를 갖고 와 메우면서 택지로 개발됐다. 달성 전체가 거대한 공사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변화를 두 눈으로, 온몸으로 느꼈다. -급격한 발전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앞으로 보완할 점이나 부작용이 있다면? ▶아파트나 상업지구 개발은 잘 이뤄지고 있는데 도시기반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신도시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등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테크노폴리스 어린이들이 논공공단까지 오는 실정이다. 신도시의 버스 노선도 배차 간격이 길고 노선도 많지 않다. 세천지구의 경우 한 버스정류장에 40여 명이 몰려 있는 풍경을 봤다. 신도시 개발이 원주민에게는 꼭 좋은 것은 아니다. 특히 소농을 하던 원주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개발 이익은 부동산업자들에게 돌아가고 기존에 살던 소농 원주민들은 생계 유지가 어려워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났다. 이 문제로 가족 간의 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심심찮게 봤다. 개발의 어두운 단면이라 안타깝다. -달성군에 최근 젊은층 유입이 상당했다. 정치 민심도 사뭇 달라졌을 것 같은데? ▶달성군에 신규 아파트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어느새 전국에서 가장 젊은 자치단체가 됐다. 평균 연령이 38세다. 그렇다 보니 정치 민심도 몇 년 사이에 확 바뀌었다. (물론 자유한국당이 잘못한 부분이 많지만) 이번 투표 성향을 보면 젊은 층은 무조건 1번(더불어민주당)이었다. 한국당이 싫어서 1번을 찍는다. 달성군의원 선거구가 4곳인데 모두 민주당 의원이 1등을 차지했다. 저도 신도시지구인 서재나 세천, 죽곡 2지구 등에서 많이 밀렸다. 앞으로 젊은 층을 설득하지 못하면 누구도 당선된다고 보장할 수 없다. 이번에 선거운동을 다녀보면 유치원에 마중 나온 젊은 학부모는 "한국당이 싫어요"라고 대놓고 이야기한다. 또 식당에 명함을 돌리면 받자마자 쓰레기통에 넣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명함을 다시 챙겨오기도 했다. 누구 탓도 아니고 우리 당의 잘못이다. 한국당도 젊은 층과의 소통이 시급하다. -달성군청에 근무하면서 노조 전신인 직장협의회 초대회장을 맡았다고 들었다? ▶2000년 달성군청에서도 젊은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직장협의회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하지만 자칫 불이익을 받을까 봐 회장에 나서는 이가 없었다. 후배들이 회장 할 사람이 이렇게 없느냐고 푸념을 하더라. 고민 끝에 제가 총대를 멨고 3번째 총회만인 2001년 달성군 직장협의회 초대회장을 맡았다. 처음에는 운영 자금이 모자라 아주 애를 먹었다. 그래도 직원들의 관심을 얻으려고 홈페이지에 매일 좋은 글을 올리고 각 직원 생일날 장미꽃 한 송이 전달하는 행사도 했다. 올린 글 중에는 '우리 한 직급 승진만 포기하자'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모두 한 직급만 포기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난생 처음 머리띠를 매고 거리로 나서 투쟁도 했다. 직장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인사 상의 불이익도 받는 등 어려움도 많았다. 그래도 2년 간의 활동을 마무리한 후 2005년 직원들이 최우수 간부로 뽑아주더라. 후배들이 어느 정도 저를 인정해주느냐는 뿌듯함이 있었다. -달성군장학재단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 ▶88고속도로의 출발점이 달성군 옥포이고 종점이 전남 담양군이다. 이런 인연으로 88고속도로 개통 때 달성군과 담양군이 자매결연을 맺고 꾸준히 교류해오고 있다. 1998년 10월쯤 4박5일 일정으로 공무원 교환 근무를 간 적이 있었다. 당시 담양군이 대외적으로 자랑하는 제도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니까 기금 8억원의 장학재단을 꼽더라. 달성군청에도 도입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기금 50억원 목표로 장학재단 설립을 추진했다. 부서가 바뀌어도 계속 업무를 보면서 1999년 조례 초안을 만들었고 2000년에 조례 공표를 하면서 같은 해 달성군장학재단이 설립됐다. 그런 재단이 지금은 전국에서 가장 잘 운영하는 장학재단 중 하나가 됐다. 2008년에는 군 단위에서 읍'면 단위의 확대되기까지 했다. -최근 대구시맑은물공급추진특별위 위원이 됐는데 대구의 수돗물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 이후 먹는 물에 대한 관심은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뚜렷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공항 이전 문제도 중요하지만, 대구에 가장 시급한 것은 먹는 물 해결이라고 본다. 생명과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대구 시민들이 수돗물을 불신해 좋지 않은 보도로 마트 생수가 동나는 사태는 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취수원을 빨리 이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부산·경남지역 등에서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시장은 대구 시민을 책임지는 대변인인 만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전해야 한다. 구미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이 종류만 2천8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반면 검사하는 가짓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환경 기준을 넘지 않는다고 해서 해롭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화학물질이 앞으로도 수없이 흘러내릴 수 있고 앞으로 수돗물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수돗물을 시민들이 믿고 마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열심히 독려하고 지원하겠다. -임기 중 이것만은 꼭 이루겠다는 공약이나 정책이 있다면? ▶달성군이 전국 지자체 중에서 가장 젊은 곳이다. 학생들도 급격히 늘었는데 다사지역에 고등학교가 부족해 다사지역 학생들이 성서 쪽으로 통학하고 있다. 다사읍 죽곡 2지구 내 학교 부지로 2021년 3월 심인중·고를 옮기려고 추진 중이다. 임기 중에 이전이 완료되고 남녀공학의 명품 고교로 거듭나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겠다.

2018-08-21 13:57:01

김재우 대구시의원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6) 김재우(자유한국당·동구 제1선거구)

대구시의원. 아는 사람만 압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은 알아도 또 다른 우리 동네 대변자인 시의원은 잘 모릅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관심이 우리 구(區), 나아가 우리 대구를 잘 돌아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매일신문은 이번 6'13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시의원들의 인터뷰를 싣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동네 시의원의 참모습을 확인해보세요.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김재우대구시의원 6) 김재우(48·자유한국당) 김재우(48) 대구시의원에게 '터줏대감'이라는 표현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대구 동구 신암동에서 13대째 터를 잡고 있어서다. 누구보다 신암동에 대해 잘 알기에 발전이 더딘 모습에 안타까움도 많이 토로했다. 동구 구도심을 바꿔보겠다는 열망. 그가 시의원을 도전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암동에서 13대째 살았다는데? ▶제가 김해 김씨인데 400여 년 전부터 김해 김씨가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하나의 집성촌을 형성했다. 현재 많이 빠져나가긴 했지만, 주위 친척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 오래전에는 신암동이 대구 교통의 요충지라 모든 길이 이곳을 거쳐 나갔다. 어릴 때부터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고 학교도 동구 쪽에서 나왔다. 어릴 때 요즘 같은 여름에는 금호강 밑에서 친구들과 수영도 많이 하는 등 추억거리도 많다. 도심 지역에서 한 곳에 이렇게 오래 정착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동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데?▶동구, 특히 구도심의 매력부터 이야기해보면 가장 먼저 지리적 여건을 들 수 있다. 도심이면서 멀리는 팔공산을, 가깝게는 금호강을 끼고 있다. 전국적으로도 이런 사례는 잘 없다. 또한 기차역과 공항이 같이 있는 것도 무척 매력적이다. 이런 지리적'교통적 이점 때문에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은 어느 구(區)보다 높다. 그러려면 K2 이전이 급선무다. 제가 사는 신암동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신암동 뒤쪽은 아직도 어릴 때 건물들이 그대로 있는 곳이 많다. 발전이 그만큼 안 됐다는 거다. 요즘은 재개발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지만, 고도제한이 걸려 개발사업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렇다 보니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외지로 많이 빠져나갔다. -정치 활동을 하기 전에 여러 가지 사업을 했다고 들었다?▶대학 졸업하고 개인적으로 운수업체를 15년 정도 운영했다. 한때 운수업으로 재미도 봤지만, IMF 이후 경기가 안 좋아지고 유류비가 급상승하면서 결국 운수업을 접었다. 2005년쯤 처남이 고깃집 장사가 괜찮다고 권유해서 동네에서 돼지고깃집을 창업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경기가 조금 나은 편이라 초반에는 손님이 꽤 있었다. 고깃집을 하면서 점차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맺게 됐고 우연히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청년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 쪽에 입문했다. 지난해 15년 정도 운영하던 고깃집도 접었다. 고깃집이 너무 많이 생겼고 한여름이면 고기값과 채소값이 많이 올라 남는 게 없었다. 더욱이 인건비까지 너무 많이 올라 장사를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쓴웃음을 지으며)지금 다시 장사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다. -국회의원 3명을 보좌하거나 옆에서 지켜봤다고 들었는데? ▶주성영 전 국회의원 때 청년위원장을 맡게 됐고 그게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류성걸 전 국회의원을 도와줬고 직전까지 정종섭 국회의원을 모셨다. 3명 모두 개성이 뚜렷하다. 주 전 의원은 검사 출신으로 화통한 면이 있고 류 전 의원은 경제기획부 차관을 지내는 등 공무원 출신이라 꼼꼼한 면이 있었다. 정종섭 의원은 학자 출신이라 양반 스타일이다. -공약 중 눈길을 끄는 프로젝트가 좀 있다?▶가장 먼저 신암 1동을 '청년 열정공간'으로 조성하는 공약을 들 수 있다. 이는 경북대 북문과 공원이 조성되고 있는 신암 1동 기상대 후적지, 그리고 평화시장 등 3곳을 잇는 것이다. 평화시장 닭똥집골목에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데 경북대와 연계해 2030세대를 잡기 위한 프로젝트다. 젊은이를 많이 유입시키려면 주변에 상가 조성을 해야 하고 젊은이 취향의 벽화거리도 조성하는 등 개발을 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게 되면 낙후된 신암동도 자연스레 개발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다른 하나는 동촌역사 주변을 추억의 전시&체험 공간으로 조성하는 방안이다. 동촌 역사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역사적인 역사다. 이 역사 주변에 구멍가게나 연탄가게, 다방, 교실 등 과거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장소로 재현하고 전자오락, 뽑기, 옛날 교복 입어보기 등 체험 행사를 운영하면 하나의 도심 속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시의원으로 남고 싶은지?▶이번 선거운동을 하면서 느낀 점이 많다. 무엇보다 구민들은 선거홍보 기간에만 얼굴을 보이고 당선되면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 입을 모으더라. 지금까지 정치인들의 스킨십이 부족했던 것이 아쉽다. 주민들에게 다가가고 발로 뛰는 시의원이 되고 싶다. 이를 위해 시의회에서 한국당 출신 40대 초선 의원들로 구성된 연구모임을 최근 만들었다. 앞으로 전문가를 초빙해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은 물론, 수시로 주민들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신암동에 쭉 살아온 만큼 구민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의원이 되겠다.

2018-08-13 14:20:19

이진련 대구시의원.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5) 이진련(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대구시의원. 아는 사람만 압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은 알아도 또 다른 우리 동네 대변자인 시의원은 잘 모릅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관심이 우리 구(區), 나아가 우리 대구를 잘 돌아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매일신문은 이번 6'13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시의원들의 인터뷰를 싣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동네 시의원의 참모습을 확인해보세요. 5) 이진련(43·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이진련 대구시의원 "저에게 보통 사람들과 다른 DNA가 있는 모양이에요."이진련(43·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대구시의원을 보자마자 '걸크러시(멋진 여성) 포스'가 나왔다. 어릴 때부터 우리 사회에 눈을 떴고 학생운동을 오래한 까닭일까. 그녀에게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시원스런 답변. 그녀에게는 젊은 여성 정치인의 DNA가 풍겼다. -고교 때부터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는데?▶경북 의성이 고향인데 의성여고 다닐 때부터 학생운동에 관심을 뒀다. 고교 때 전교조 선생님들'고교 선후배들과 함께 철학 모임을 하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떴다. 당시 시골에서 잘 접하기 어려웠던 '말'과 시사성 잡지도 많이 봤다. 사회운동에 관심 많은 의성 학생들과 모여 '제3교실'이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자연스레 도시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학생들과 교류하게 됐다. 1993년쯤인가. 학생운동의 마지막 세대가 활동하던 시기인데 서강대 학생 1명을 만난 기억이 난다. 당시 그 학생은 목소리가 안 돌아온다고 하더라. 이유인즉슨, 강경대 열사가 학생운동을 하다 사망했는데 너무 많이 울어서 그렇다고 하더라. 그때 나를 비롯한 많은 학생이 큰 충격을 받았고 우리 사회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웃으며) 여담으로 그때 연을 맺었던 선배들을 한 번씩 보면 "아직도 그렇게 사냐?"며 혀를 내두른다. 그 선배들은 전부 먹고살기가 바쁘니까 사회 운동 등에 관심을 거의 두지 못한다. -학생운동 문제로 부모와 갈등을 겪지는 않았나?▶부모님이 보수적이면서 제가 하는 일은 크게 말리지 않았다. 고교 때부터 제가 동네에서는 똑똑한 아이로 인정받아서 부모님의 기대도 컸다. 이 때문에 제가 학생운동을 하는 것을 반대할 법도 하지만 내가 하는 일에 한 번도 잔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예를 들어 내가 방학인데도 학생운동 업무로 계속 학교에 있어 학교에서 부모님에게 연락해서 좀 데리러 가라고 했는데도 부모님은 "딸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며 나를 끝까지 믿어줬다. 아버지는 저의 영원한 팬이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2명의 동생도 내가 학생운동을 하는 것은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만, 지금은 걱정을 해주며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대학 전공이 물리치료학과던데 하는 일을 생각하면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원래 대학을 갈 생각이 없었다. 고교 졸업 후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전문대라도 가라고 워낙 타일러 어쩔 수 없이 대구의 모 전문대 행정학과를 갔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학생운동을 계속 했다. 전문대를 졸업한 뒤 의성으로 학생운동 하려고 다시 가기도 했다. 1998년쯤 당시 의성에 농민회 간사를 한 사람이 없어서 간사로 간 것이다. 어머니는 직장을 다니라고 했지만 제가 행복하게 살고 싶다며 무릎 꿇고 빌어 가까스로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다 2000년쯤 어머니가 중풍으로 갑자기 쓰러지면서 학생운동 일을 잠시 접고 병원에서 8개월 정도 먹고 자면서 간병을 했다. 병실 청소도 도맡으면서 지극정성으로 간병했다. 다행히 심각했던 어머니 병세가 호전됐다. 병원에서도 이를 보고 기적이라고 이야기도 하더라. 간병을 하면서 재활을 배워야 하겠다 싶어서 안동과학대 물리치료학과를 들어갔다. -경북 노사모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2002년쯤 '바보 노무현'이란 제목의 시를 우연히 보게 됐다. 내용이 가슴에 참 와 닿았다. 그렇게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찾아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노사모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는 노사모가 막 활성화되던 시기였다. 지금은 정치인 팬클럽이 많지만 아직 노사모만큼 격조 높은 팬클럽은 없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노사모는 정치인 팬클럽의 롤모델이다. 그때는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을 앞두고 한창 유세하던 시기였다. 저도 경북 전역하러 다니면서 노 전 대통령의 지지를 호소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노 전 대통령이 구미 경선 유세를 위해 구미역에 왔을 때였다. 역에서 맞이하고 있는데 노 전 대통령이 보이기에 제가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랬더니 노 전 대통령이 "저, 저 말입니까? 아저씨 맞죠?"라고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고위 정치인은 권위적이고 거리감을 느낀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노 전 대통령이 인간적이고 소탈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눈빛 또한 무척 해맑았다. -일반 병원 재활센터에서 물리치료사로 근무한 것으로 아는데?▶10년 가까이 물리치료사로 근무하면서도 환자들에게 민주당 입당을 권유하고 노 전 대통령의 홍보대사 역할을 해왔다. 대구가 보수적이라 노 전 대통령에 대해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계속 만나는 사람들을 설득했다. 동성아트홀 대외협력팀장을 한때 맡으면서 인수 과정에서 역할을 했다. 워낙 바빠 거의 나들이가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결혼도 생각이 없었는데 남자친구가 제가 결혼을 안 할 것 같으니까 날을 아예 잡아서 통보했다. 결혼하기 직전에 보통 받는 마사지나 웨딩숍을 가는 것도 못 했다. 바쁜 것도 있었지만, 형식적인 절차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던 것 같다. 특이한 제 스타일을 남편이 다 맞춰주니까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남편이 이해심이 많다. -여성정치아카데미 대표도 맡고 있는데?▶여민포럼 내 산하 조직으로 여성정치아카데미가 있다. 여민포럼은 전국적인 조직에서 2015년 대구에서 발족했다. 정권을 재창출하고 여성 정치인을 키워내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초반에 정규 회원이 200명에서 출발, 현재 회비를 내는 정회원은 40명 정도 된다. 발족할 때 대구 대표를 하면서 지금은 중앙에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조직을 운영하면서 가장 뿌듯한 것은 여성들이 아이의 엄마가 아닌 개인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점이다. 지역에도 여성 인재들이 적잖은데 누구 엄마로만 살고 있다. 어디를 가서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 앞에 나설 기회가 없었다. 멤버들 또한 초반에는 자기 삶에 대한 이야기조차 잘 못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 나가서 자기 이야기를 서슴없이 한다. 한 멤버는 울기도 했다. 아이의 언어로만 이야기하다 자기 삶을 이야기하면서 감동하였다고 했다. 그렇다고 제가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최근 논란이 되는 온라인 커뮤니티 '워마드'의 극 페미니즘적인 성향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상식적이지 않고 극단적인 언어나 표현이 많아서다. 여성 성(性)을 이야기하면서 남성을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동반자적인 개념을 가져야 한다. -일반 여성들이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여성들 개개인이 생활 정치인이 돼야 한다. 정치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문제나 급식 문제 등도 엄마의 눈으로,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것도 엄연한 정치다. 모든 사람이 정치 영역에 들어가 있다. 착한 소비도 정치의 일종이다. 그러려면 사회 현상이나 문제에 관심을 둬야 한다. 여민포럼이 그런 계기를 꾸준히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를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제도권에 끌어들여 관심을 두도록 하는 것이 제 역할이기도 하다. -젊고 정치 색깔이 확실하니까 대구시에서 긴장을 많이 할 것 같은데?▶대구시 공무원 중에 처음에는 되게 센 줄 알았는데 막상 겪어 보니까 예의도 바르고 보기 좋다고 이야기하더라(쑥스러운 듯 웃음). 시의회에서도 각 소속당이 있는데 이념이나 성향으로 부딪힐 때는 첨예하고 부딪혀야 한다. 그러나 합심해서 무언가를 만들 때는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한다. 시의회 의장도 여성이라 사안에 대해 거리낌없이 상의를 하자고 하더라.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것만은 꼭 이루고 싶다는 게 있으면?▶논란이 되는 대구취수원 이전만이 답은 아니다. 취수원 이전을 두고 시민 공청회 등을 거쳐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취수를 강물에서 하는 것이 맞는지, 낙동강을 살려내지 않고 이전만 해서 되는지 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여겨진다. 또한 여성들의 가치철학을 높일 수 있도록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꾸준히 할 계획이다. 청소년 정치아카데미 등 형식의 사업도 꾸준히 해보고 싶다. 대구시의회와 대구시, 민주당 사이의 소통할 방법을 찾아서 가교 역할을 하겠다. 제가 교육위원회 소속이라 이번에 당선된 강은희 대구시교육감이 생각하는 교육관과 역사관 등과 관련해 대구시교육감과 꾸준히 조율하고 논의하겠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역사관 등도 논의 대상이다. 젊은 엄마들이나 교육청 산하 노동자들을 현장에서 많이 만나는데 그들에게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답을 찾겠다. 결국 현장에 답이 있으니까.

2018-08-06 18:03:59

윤영애 대구시의원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4) 윤영애(자유한국당·남구 제2선거구)

대구시의원. 아는 사람만 압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은 알아도 또 다른 우리 동네 대변자인 시의원은 잘 모릅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관심이 우리 구(區), 나아가 우리 대구를 잘 돌아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매일신문은 이번 6'13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시의원들의 인터뷰를 싣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동네 시의원의 참모습을 확인해보세요.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윤영애 대구시의원 4) 윤영애 대구시의원(자유한국당·남구 제2선거구) 42년간이라고 했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공무원 사회에서 여성이 '롱런'하기는 참 쉽지 않다. 보이지 않는, 그러나 좀처럼 깨지지 않는 유리벽 때문이다. 윤영애(61'자유한국당) 대구시의원은 공무원 생활 42년을 반추하면서 "그래도 지금은 정말 좋아졌다"고 속삭였다. 그녀는 자신을 "지방행정의 산 증인"이라고 소개하면서 인터뷰를 조곤조곤 이어갔다. ◆대구 남구청에서 33년간을 근무했다고 들었는데? -1975년 6월 경북 상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고교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고3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공무원을 시작했다. 1984년에 남구 대명5동으로 전입한 이래 쭉 남구청에서 근무했다. 여성이다 보니 20년 가까이 민원 창구에만 근무했다. 옛날에는 민원실에서 호적등본을 많이 떼줬는데 컴퓨터나 DB화가 안 돼 있어 하나하나 손으로 적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시쳇말로 '노가다'였다. ◆오랫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남녀 차별을 누구보다 느꼈을 것 같은데?-(쓴웃음을 지으면서)지금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경리, 인사, 기획 등 중요 부서에 여성을 배치해주지 않았다. 여성 공무원은 주로 민원실에 배치했다. 업무 분담에 차별을 많이 뒀다. 예전에는 출산휴가도 제대로 못 갔다. 법적으로 60일이지만 2~3주 정도 가는 것이 전부였다. 저도 출산한 지 1개월이 안 돼 출근해야 했다. 상사가 일찍 출근하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던 시절이었다. 2000년대 전까지는 여성이 소수니까 분위기상 목소리 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업무적으로 남성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그래야 승진의 기회가 있었다. 1991년에 관선으로 여성인 이현희 남구청장이 왔는데 그때 경리계로 발령받았다. 당시로써는 파격적이었다. 경리계는 남자직원이 독점하다시피하는 부서였다. ◆올해 상반기 '미투' 운동이 거세게 불었다. 미투 운동을 쭉 지켜봤을 텐데?-무엇보다 '이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다 덮고 갔을 상황인데 사회가 많이 발전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과거에는 술자리에 가면 상사들이 '술을 치마 입은 여자가 따르면 맛있다'는 이야기를 으레 하고 여직원들도 속은 상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런 잘못된 문화를 공개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 아쉬운 점은 있다. 그런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를 낙인찍고 남성 중에는 '여자가 행동을 잘하지'하는 생각이 여전히 무의식 속에 깔려 있다. 그렇다 보니 이야기 꺼낸 당사자가 2차 피해를 본다. ◆양성평등전문강사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양성평등을 위해서는 가정부터 달라져야 한다는데?-지난해 1월 여성가족부로부터 양성평등전문강사 자격증을 땄다. 양성평등이라면 굳이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지 않고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차이보다 차별에 비중이 실려 있다. 이런 사회적 인식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 엄마들이 "사내아이는 울면 안 돼",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지 마"라고 이야기한다. 여전히 엄마들은 아들이 그런 행동을 하면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런 경향은 무의식 속에 아들은 강하게 키우고 딸은 곱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서다. 그런 생각은 할머니 때부터 계속 이어져 왔다. 이런 생각이 육체적인 것을 넘어 정신적인 부분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런 부분은 사실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다. 언론 매체나 담당 기관에서 지속적인 홍보를 하고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많이 해야 한다. 남녀차별을 금지하는 제도나 법규는 우리나라가 잘 돼 있지만, 의식이 못 따라가는 상황이다.. ◆공무원을 하면서 가장 보람됐던 때가 있다면?-2012년 대명3동장을 할 때였다. 당시 우리 동사무소에서 '사랑의 쌀독'을 운영했는데 한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쌀을 챙겨갔다. 그런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고 할머니에게 물어봤더니 평소 폐지를 줍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먹고살기가 어렵다고 이야기하더라. 좀 더 자세히 물어보니 4대가 허름한 빌라에 살고 있었고 아들이나 며느리 등은 몸이 좋지 않고 거의 할머니 혼자 생계를 책임진다고 하더라. 궁금증에 그 가정을 직접 찾아갔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외부에 자신들이 못 사는 것이 알려지는 게 싫다고 하더라. 예전에 사업했는데 부도가 났고 지금은 생계조차 챙기기 어려운 상황을 자존심 때문에 외부에 말 못한다고 했다. 너무 안타까워 아들을 계속 설득했고 결국 국가 혜택을 받도록 했다. 얼마나 그 할머니를 우연히 받는데 저를 보고 고맙다고 하더라. 정말 뿌듯했다. ◆누구보다 남구에 대해 잘 알 거라 생각된다. 지금 남구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또한 시의원에 재직하면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가장 시급한 것이 역세권 개발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구는 중구'서구와 함께 가장 살기 좋은 구였다. 당시 공무원들도 발령받고 싶어했던 곳이었다. 특히 남구 중에서도 대명동은 대구의 부촌으로 손꼽혔다. 이후 달서구와 수성구에 개발이 급격히 일어나면서 남구가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또한 남구는 미군부대가 있어서 건축 고도 제한도 걸려 있다. 이런 이유로 한때는 구민이 23만 명이었는데 지금은 15만 명에 불과하다. 남구에는 지하철 1호선과 3호선이 통과하니까 특별법이라도 제정해서 이런 역세권을 본격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앞으로 대구시에 꾸준히 이런 부분을 요구하겠다. 앞산 개발도 꼭 이루고 싶다. 앞산은 대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남구는 물론, 달서구와 수성구를 낀 전형적인 도심형 산이다. 앞산을 신천과 연계해 관광자원화해서 대구의 랜드마크로 만들고 싶은 것이 꿈이다. 그러려면 과감한 개발이 필요하다. 얼마 전에 보니까 원주 소금산에 출렁다리가 생겨 관광객이 몰려든다고 하더라. 앞산에 이처럼 친환경 구름다리를 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2018-07-30 13:47:15

김지만 대구시의원. 김태형 기자 thkim21@msnet.co.kr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3) 김지만 대구시의원(자유한국당·북구 제2선거구)

대구시의원. 아는 사람만 압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은 알아도 또 다른 우리 동네 대변자인 시의원은 잘 모릅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관심이 우리 구(區), 나아가 우리 대구를 잘 돌아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매일신문은 이번 6'13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시의원들의 인터뷰를 싣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동네 시의원의 참모습을 확인해보세요.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김지만 대구시의원 3) 김지만 대구시의원(자유한국당·북구 제2선거구) 대구시의회에 역대 최연소(보궐 당선 제외)로 입성하며 '40대 기수론'를 들고 나온 인물이 나타났다. 김지만(41'자유한국당) 시의원. 그는 각각 한국과 일본의 대학에 적을 두면서 누구보다 청년층의 고민을 몸소 체득했다. 그는 '3포 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로 요즘 젊은 층의 현실을 빗댄 신조어)의 이야기를 귀 기울이고 그들과 소통하겠다는 결의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역대 최연소 대구시의원'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는데?-직전인 7대 대구시의원이었던 배재훈(당선 당시 36) 의원이 보궐로 당선돼 활동한 적이 있다. 하지만 4년 임기로 당선된 시의원 중에서는 지금까지 가장 젊다. 이번에 구민들이 40대 청년인 저에게 역할을 준 것은 젊은 층과 소통하고 변화를 주도하라는 요구인 것 같다. 젊으니까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할 거라는 기대감이 높아 한편으론 어깨가 무겁다. 우선 40대 의원들 5명을 위주로 연구회를 조직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시정을 열심히 공부하고 발로 뛸 생각이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꽤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 문화 차이를 많이 느꼈을 텐데?-일본에서 공부하면서 일본 대학생들의 세미나 문화가 무척 부러웠다. 우리나라 대학은 여전히 주입식 교육이 주류를 이루지만 일본은 세미나 문화가 잘 발달돼 있다. 강의 시간에 교수가 주제를 정해주면 학부생 각자가 토론하는 문화가 활발하다. 자신의 관심 주제를 연구하는 동아리 문화도 잘 이뤄져 있다. 또한 일본엔 '장인문화'가 여전히 강하다. 대학생 중에는 아버지 대를 이어 가업을 물러 받으려는 이가 많다. ◆일본 와세대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는데?-남들보다 책임감과 집념이 좀 강한 편이다. 와세대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3년 만에 받았다. 일반적으로 외국 학생은 5~8년 걸린다. 한국 사람 중에서 정규 코스로 3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들었다. 목표를 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지만 한 번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해내는 편이다. 박사 학위에 들어가면서 그렇게 즐기던 담배도 끓었다. 논문 막바지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고 책상에서 잘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입던 바지의 엉덩이 부분만 닳을 정도로 열심히 한 것 같다. 일본 지도교수의 도움도 컸다. ◆일본 대졸자의 취업률은 거의 100%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와 사뭇 다른데?-일본에는 '기업 내정'이라는 게 있다. 보통 일본에는 대학생들이 3학년 때부터 취업 활동을 한다. 워낙 구인난이 심해 기업마다 인재 쟁탈전이 치열하다. '우리 회사에 내정돼 있으니까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거나 지원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요구하는 기업들도 있다. 보통 대학생들은 취업 준비를 하면 기업 3, 4군데 정도는 내정돼 있다. 3학년 때 취업 결정은 거의 끝나고 취업이 결정된 4학년 때는 학교에 수업만 들으려고 찾는다. 4학년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경우는 취업보다 대학원 진학이 주목적이다. 대학생들이 취업 걱정은 없지만 일을 하려는 열정이나 의욕이 좀 부족하다. 왜냐하면 아르바이트만 해도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대학생도 적잖다. ◆대학에서 강의하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박사학위 취득 후 2014년 수도대학동경(구 동경도립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결혼을 했다. 그러다 부인이 일본 생활을 좀 힘들어 해서 2015년 한국으로 넘어왔다. 한국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칠 요량으로 고향인 대구에 둥지를 틀었다. 경일대 특임교수와 수성대 외래교수로 근무하면서 젊은이들과 다양한 교류를 해왔다. 그런 과정에서 대구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별로 없고 너무 낙후돼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특히 북구는 경북대나 영진전문대 등 대학교를 끼고 있는데 젊은 층과의 소통 부재가 심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누구 하나 '3포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젊은이들이 보수'진보를 떠나 선거 때 소중한 한 표를 쉽게 포기하는 모습도 안타까웠다. 북구는 물론, 대구 전체를 말로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살게 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고 젊으니까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느낀 점은 없나?(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과 비교하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재미있었다. 운동을 명분으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젊은이 중에서는 "저는 자유한국당을 안 좋아한다"며 손사래를 치는 이도 적잖았다. 그래도 악착같이 가서 "한 번만 관심을 둬달라. 나를 안 찍어도 좋으니까 선거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다가갔다. 그런 모습이 계속 되니까 젊은이 중에서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같이 사진도 찍어주더라. 특히 '샤이 보수'가 적극적으로 호응해주는 모습에 힘도 얻었다. ◆국제 지적재산권법 전공인데 대구시의회 업무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지적재산권은 4차산업 혁명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대구가 '세계 속의 도시'가 되려면 지재권 분쟁이나 문제를 대구시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대구시가 이 역할을 하게끔 물심양면으로 돕겠다. 지재권 관련해서는 아직 우리나라가 걸음마 단계다. 국내법과 관련해서는 안타까운 점이 많다. 예를 들면 대구가 전기자동차도시로 거듭나려고 하는데 전기자동차는 자율주행차와 같이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자율주행차 발전이 더디다. 이유 중 하나가 법적인 제약 때문이다.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상에는 사람이 타고 있어야 운전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약이 많은 상위법을 바꾸기 위한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각계 분야 사람들과 토론하고 해결책을 찾도록 애쓰겠다.

2018-07-23 17:03:05

강민구 대구시의원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2) 강민구 대구시의원(더불어민주당·수성구 제1선거구)

대구시의원. 아는 사람만 압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은 알아도 또 다른 우리 동네 대변자인 시의원은 잘 모릅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관심이 우리 구(區), 나아가 우리 대구를 잘 돌아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매일신문은 이번 6'13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시의원들의 인터뷰를 싣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동네 시의원의 참모습을 확인해보세요. 2) 강민구 대구시의원(더불어민주당·수성구 제1선거구) "대구시의원이 되니 정신이 없네요." 수성구의원을 지내다 이번에 대구시의회에 입성한 강민구(53) 시의원. 그는 요즘 구의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증한 민원에 시의원의 자리를 실감하고 있다. 이른바 '리틀 김부겸'으로 통하는 강 의원은 일당 독점 체제였던 시의회에서 파란색 돌풍을 몰고 온 주역이다. "기쁨보다 책임감이 크다. 이번에 정말 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구 시민들은 다시 민주당을 외면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뭇 비장함이 어려 있었다. -일당 독점 체제였던 대구시의회에서 파란색 돌풍을 몰고 왔다. 의미가 남다를 것 같은데? ▶대구에서 기초의원 116명 중 50명이 민주당 소속이고 광역의원 30명 중에 5명이 민주당이 됐다. 시민들이 기초의회는 다양한 정당에 기회를 주겠다고 생각한 것 같고 광역의회에도 민주당에 조금의 기회를 준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는 엄중한 요구가 있는 것으로 본다. 시민들이 당을 바꿔봐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끼면 다시 한국당으로 갈 것이다. 책임감이 그만큼 크다. 지금까지 대구시 견제는 시민사회단체가 큰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는 제도권 내에서 우리 여당 의원들이 할 것이다. 단 발전을 위한 견제를 해야 한다. 또한 대구시가 잘하는 게 있으면 거리낌 없이 잘한다고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개표 결과, 상대편 후보에게 254표로 신승했다. 그 과정에서 긴장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사실 선거홍보 기간에 표면적인 민심은 뜨거웠다. 개표 초반에는 상대편과 표 차이가 13%p까지 났는데 후반에 상대편에서 엄청나게 추격했다. 보통 자정쯤 되면 축하메시지를 받는데 워낙 박빙이라 사무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나름 간이 크다고 자부했는데 새벽 3시쯤 183표까지 추격당하니까 시쳇말로 '엄청 쫄리더라'. 당시 추격 기세로 보면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판 범어4동과 황금1동 개표에서 제 표가 많이 나와 가까스로 이겼다. 그때가 새벽 3시 30분쯤이었다. 아무래도 민주당 후보가 대구시장이나 수성구청장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샤이 보수층이 막판에 투표에 많이 참여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구는 사실상 한국당 텃밭이었다. 선거 운동을 하면서 느낀 점은 없나? ▶4년 전에 수성구의원에 도전할 때만 해도 시민들에게 민주당 이야기 자체를 잘 못 꺼냈다. 특히 나이 드신 분에게는 더욱 그랬다. 당시 김부겸당이나 2번당이라고 주로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 달라졌다. 민주당이라는 이야기를 편하게 꺼낼 수 있었다. 경로당의 예를 들면 과거에는 고스톱을 치던 어르신들이 덕담 정도만 하면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이번 6·13 지방선거 때는 치던 고스톱을 멈추고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는 곳이 여러 곳 있었다. 어르신들이 젊은이가 왜 저러는지에 대해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민주당 기초의원들로 꾸려진 대구민주자치연구회 '파랑새' 멤버다. 연구회를 좀 설명해준다면? ▶2014년에 민주당 후보로는 유일하게 수성구의원에 당선됐다. 당시만 해도 대구에는 야당 기초의원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당 독점을 깨고 서로 힘을 모아보자는 취지로 파랑새를 결성했다. 8개 구·군 중에 6개 구 민주당 기초의원이 있었는데 무소속 의원 등을 모아 총 15명으로 꾸렸다. 최근 2기를 출범했다. 결성 후 자비로 회비를 거둬 주로 강의를 많이 들었다. 서울시의원의 모범적인 의정 활동이나 국가 예산 교육 등 의정 활동에 도움되는 교육을 받았다. 또한 구별로 정보를 공유하고 조례를 만들 때 벤치마킹도 하고 있다. 대구 전체를 아우르는 공동 성명도 곧잘 냈다. 대표적인 것이 '범안로 통행료 무료화하라'는 성명이었다. -삼성전자 마케팅팀 과장을 했다가 중소기업을 운영한 경력이 있다. 기업 운영과 정치를 비교해본다면? ▶삼성전자에 있을 때 운 좋게 미국 연수를 갔다 왔다. 당시 겉멋이 들어 사표를 내고 삼성전자의 하청업체를 운영했다. 10년 가까이 사업하다 더는 운영이 어려워져 회사를 접었다. 이후 대학 강의를 좀 다녔다. 기업 운영과 정치를 비교한다면 닮은 점이 많다. 기업에서는 물건을 팔고 정치에서는 사람을 파는 구조는 똑같다. 정치에서는 '강민구'라는 인물을 파는 것이다. 소위 '인물 마케팅'이 정치인 것 같다. 반면 물건을 팔 때는 2등을 해도 살아남지만 정치에서는 1등만 살아남는 점은 다른 것 같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의 권유로 수성구의원에 도전한 것으로 안다. 김 장관과의 인연을 소개해달라. ▶2011년 말이었다. 운동권 출신이었던 친한 선배가 '혁신과 통합'이라는 단체에 있었는데 그 단체가 민주당과 통합했고 그 과정에서 선배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 인연으로 당시 김부겸 장관이 수성구 국회의원에 도전할 때 선거운동을 도왔다. 아쉽게 낙선했지만 이를 계기로 정치에 전념하게 됐다. -수성구의원을 하면서 많은 점을 느꼈을 것 같다. ▶보통 기초의원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다. 행정감사와 조례 제정, 예산 심의를 3대 핵심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주민과의 소통을 1순위로 정하고 활동해 왔다. 주민들이 기초의원은 누가 당선되었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악수하고 명함 주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행사장에도 30분 전에 가서 "민원이 있으면 연락주세요"라고 강조했다. 구의원 하면서 전화번호를 되도록 많이 수집했다. 예를 들어 일요일 새벽에 동네 다니면서 주차 차량에 있는 휴대폰 번호를 많이 모았다. (혹여 오해하지 말라면서) 이런 방법은 개인이 특정이 안 돼 불법이 아니다. 다니면서 간판에 있는 휴대폰 번호도 모았다. (이런 방법이 공개돼도 괜찮으냐는 물음에) 알아도 못한다. 웬만큼 부지런하지 않으면…(웃음). -대구시의회에 입성했는데 가장 바꾸고 싶은 것이 있다면? ▶대구시의회 집행부에서 본회의장에서는 넥타이를 매고 배지를 달라고 하더라. 상대방에게 알리는 것도 있지만 이는 자칫 상대방에게 갑질할 수도 있는 관행이다. 지금까지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시각으로 쳐다보면 고칠 게 많다. 불필요한 관행이나 비합리적인 것을 많이 고치고 싶다. 민원도 의회 사무처를 거쳐야 하는 것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면 처리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관련 부처에 민원인 연락처를 주고 연락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민원이 곧바로 해결되지 않더라도 피드백을 받은 것만으로도 민원인으로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임기 내 '이것만큼은 꼭 이루겠다'는 공약이 있다면?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 특히 장애인에 대해서 지원할 것이 없는지 눈여겨볼 작정이다. 보훈단체 또한 젊음을 담보로 국가에 희생한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지원할 것이 없는지 세세하게 살피겠다. 또한 대구의 문화축제나 행사를 수익창출로 연결하는 방법은 없는지도 찾아보겠다. 이는 시의회 문화복지위원회를 자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2018-07-16 16:37:11

김대현 대구시의원. 김태형 기자 thkim21@msnet.co.kr

[나는 대구시의원입니다] 1)김대현(자유한국당'내당동, 평리 2'4'5'6동, 상중이동)

대구시의원. 아는 사람만 압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은 알아도 또 다른 우리 동네 대변자인 시의원은 잘 모릅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관심이 우리 구(區), 나아가 우리 대구를 잘 돌아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매일신문은 이번 6'13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시의원들의 인터뷰를 싣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동네 시의원의 참모습을 확인해보세요. [우리동네 시의원을 소개합니다] 김대현 대구시의원 1)김대현(자유한국당'내당동, 평리 2'4'5'6동, 상중이동) 호탕하면서도 솔직했다. 그러나 눈매는 매서웠다. 대구시검찰청 수사관으로 20여 년을 지낸 연륜이 얼굴에 묻어났다. 이번에 초선으로 대구시의원에 이름을 올린 김대현(53·자유한국당) 씨. 그는 중학교 때부터 대구 서구에 살고 있다. 누구보다 서구의 발전을 갈구하고 열악한 서구를 바꿔보겠다는 의욕에 차 있다. KTX 서대구역사의 조기 완공. 그가 첫 손가락으로 꼽는 공약이다. -3형제가 모두 공직에 몸을 담거나 담았다고 들었다.▶맏형인 저는 시검찰청 수사관으로 23년을 보냈다. 둘째 동생은 현직 경찰관이고 막내는 세무직 공무원, (조금 더 자랑하면) 막내 제수도 대구시청 공무원이다. 어릴 때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부모님이 공무원을 선호했다. 특히 아버지가 틈만 나면 판'검사나 세무 공무원이 되라고 하셨다. 저도 대학교 4학년 1학기 때 검찰 사무직이 됐다. 그 과정에서 사법시험도 몇 차례 쳤지만, 아버지가 자식 중에 공무원 한 명이라도 빨리 만들고 싶어 저를 설득했다. 지금도 사법시험을 좀 더 쳐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안정적인 공직 생활을 접고 정치에 입문한 계기가 있다면?▶고향은 경북 고령이지만 경남 통영에도 좀 살았다. 중학교 3학년 때인 1979년 대구 서구에 터를 잡고 쭉 살고 있다. 그런데 주변에서 아직도 '서구에 사느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 큰아들도 한때 수성구에 원룸을 얻어달라고 하더라. 주위의 인식으로 자꾸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기회가 된다면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떠나는 서구가 아닌, 젊은이가 서구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뭔가 바꿔보자'는 생각이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된 것 같다. -본인의 캐릭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굳이 꼽으라면 조정 역할을 잘한다. 검찰 있을 때도 조사 과정에서 합의를 잘 이끌어내는 것으로 좀 유명세를 탔다. 현재도 대구서부검찰청 형사조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또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 한번 시작하면 열정적으로 하는 근성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사무실 여직원은 저보고 '공무원'의 이미지가 강하다고 한다. 꼼꼼한 면이 있다는 말이다. -이번 선거운동 기간에 둘째 아들의 문자메시지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던데?▶둘째 아들이 현재 대학을 자퇴하고 일식에서 요리를 배우고 있다. 1학년 2학기 때 갑자기 일식을 배우고 싶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당황하고 말리고 싶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시대 흐름도 공부가 능사가 아니다. 그래서 남은 대학 등록금만큼 창업비용으로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아들이 선거운동 기간에 저에게 편지 형식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다름을 인정해준 아버지가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이 문자 메시지를 선거 홍보 문자로 사용했는데 많은 사람이 따뜻한 가족애를 느꼈다며 칭찬을 많이 해주고 다른 지역에서도 회자됐다. -이번 선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자유한국당이 참패했고 대구에서도 민주당 바람이 적잖게 불었다. 원인이 무엇인가?▶시민, 나아가 국민의 바람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젊은 층과의 소통 부재가 가장 크다. 제가 선거운동 때 붉은 옷을 입고 명함을 돌려보니까 아예 안 받으려고 하는 젊은이도 심심찮았다. 젊은이 사이에 막연한 불신이 큰 것 같다. 시민의 이야기를 자꾸 들으려고 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스킨십을 해야 한다. 젊은피 수혈도 반드시 필요하다. -법무사로서 대구시의원을 하면 가장 큰 강점은 무엇인가?▶법무사를 업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잡사'라고 한다. 개 물리는 사건이나 아파트 층간 싸움 등 생활에 소소한 문제나 사건을 가리지 않고 상담하고 처리한다. 어떤 고객은 일본강점기 때부터 가지고 있던 등기부등본을 갖고 와서 해석해달라고도 한다. 이런 경험이 대구시를 감시하고 시책을 입안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재직 중에 꼭 이루겠다는 정책이 있다면?▶도시재생에 초점을 맞추겠다. 서구가 주거나 교통 여건이 많이 열악하다. 대구 구(區) 중에서 유일하게 지하철이 관통하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KTX 서대구역사가 빠르면 2020년 완공 예정인데 좀 더 빨리 완공되도록 온 힘을 다하겠다. 역사만 들어서도 인근에 주거환경이 크게 좋아질 거다. 지역 국회의원이 국비 확보에 힘을 쓰도록 계속 가 우선이지만 대구시의원으로서 지원할 수 있는 부분을 물심양면으로 노력하겠다. -4년간의 재직 이후 시민에게 어떤 의원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무능은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공부하고 뛰어다니면서 능력을 키우겠다. 능력 있고 청렴한 의원으로 남고 싶다. 또한 표만 의식하는 시의원은 되지 않겠다. 일부 시의원이나 구의원을 보면 표만 의식하기도 한다. 주변에서 행사 참여 여부나 시민을 만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 시선도 이런 보이기식 활동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정치인은 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시민들이 원하는 정치를 펼칠 수 있다.

2018-07-08 13: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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