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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 비안면 구 이두초교(일제강점기 비안공립보통학교) 뒷산에 건립된 비안 3'1운동 기념탑. 의성군 제공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6> 의성 비안면 쌍계리, 안평면 대사리 만세 시위

의성군의 만세 시위는 3월 12일 비안면 서부리 비안공립보통학교 뒷산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시발점이 됐다. 그후 4월 3일까지 23일 동안 18개 면 가운데 7개 면에서 총 21번의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와 안평면 대사리의 3·1 만세 시위는 예수교인들이 주도 면밀하게 기획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만세 시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만세 시위는 안평면 괴산교회 김원휘 조사와 대구 계성학교 재학생인 박상동(쌍계교회 박영화 목사 아들) 주도로 이뤄졌다. 김원휘 조사는 평양신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경성과 평양의 만세 시위 상황을 접하고 돌아와 비안면 쌍계교회 박영화 목사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박상동 또한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쌍계리로 돌아와 아버지 박영화 목사에게 대구 시위 소식을 알린 것이 비안면 쌍계리 만세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안평면 괴산리 괴산교회 박우완 영수가 대구 성경학교에 갔다가 3월 10일 남문 밖 만세 시위를 확인하고 돌아와 대구 시위의 열기를 전한 것 또한 비안면 쌍계리 만세 시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안평면 괴산교회 김원휘 조사와 쌍계교회 박영화 목사, 대구 계성학교 학생 박상동과 박우완 등은 쌍계교회에서 만나 교회 간부들과 밀의 끝에 13일 만세 시위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 때 박영화 목사는 "나는 일찍부터 한국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는데, 지금 경성과 평양, 대구에서 한국 독립 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조선인으로서 묵시할 수 없다"며 교인들에게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배도근, 이일만, 김명출, 박세길 등이 만세 시위에 가담키로 했고, 3월 12일 박영신은 자신의 집에서 교인인 배달근, 배중엽 등과 함께 한지에 물감을 사용해 태극기 200장 정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거사일 하루 전인 12일 오전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전 11시 학교 뒷산에서 독만세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그러자 쌍계교회 교인들과 마을 주민들이 잠시 술렁이기는 했으나, 낮 12시쯤 학생들이 쌍계리로 들어오자 마을에 모여 있던 교인들과 주민들이 학생들을 맞이하고 곧바로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박영화 목사와 배중엽은 박영신의 집 앞 도로에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줬고 태극기를 든 학생들과 마을 주민 200여 명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세를 힘차게 불렸다. 그러고는 마을 뒷산까지 올라가 만세를 부른 후 해산했다. 이날 오후 4시쯤 쌍계리에는 의성경찰서 경부와 순사부장 1명 그리고 비안주재소 순사가 만세 시위 주동자 검거에 나서 이일만을 비롯한 5명이 검거됐다. 잠시 몸을 피한 박영화 목사는 나중에 스스로 찾아가서 독립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날 시위로 모두 18명이 재판에 넘겨졌는데 박영화 목사, 김원휘 조사 등 교인이 10명 이상이었다. 학생들도 50명 정도 만세 시위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이는 학생들의 연령이 16세가 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13일에는 비안면 동부리와 서부리에서 김석근 등이 12일 쌍계리 만세 시위에 자극받아 시장에서 만세 시위에 나섰다. 이에 주민 등 100여 명이 동참했고 늦은 밤까지 이어진 시위는 김석근이 검거 되면서 시위대는 흩어지고 말았다. 한편 3월 12일 오전 11시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학교 뒷산에서의 3·1 만세 시위는 의성군 만세 시위의 시발점이자 도화선이 됐다. ◆안평면 대사리 만세 시위 1919년 만세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비안면 쌍계교회의 만세 시위 소식을 접한 안평면 대사교회 교인들은 3월 15일 예배를 마친 후 박영화 목사(쌍계교회와 겸임) 등이 모여 만세 시위를 모의했다. 이날 교회에서 이호출 영수가, "다른 지방에서도 만세를 부르고, 시위 운동을 하고 있으니 우리도 실행하자"고 제의 했다. 참석한 모두가 찬성한 가운데 시위를 교인과 마을 주민에게 알리고 태극기를 수백장 만들었다. 안평면 대사리 1차 만세 시위는 3월 15일 오후 7시쯤 교인들과 마을 주민 60~70명이 합세해 대사2리 마을 뒷산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마을 곳곳을 누비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오후 10시쯤 자진 해산했는데 이날의 시위는 일본 경찰에 알려지지 않아 경찰은 출동하지 않았다. 2차 만세 시위는 3월 16일 오후 8시쯤 마을 앞에서 김길도와 최상근 등이 교인과 주민 50, 60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날과 같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마을 출발해 마전리와 기도리 등을 지나 면소재지인 창길리까지 행진한 다음 해산했다. 1차 시위는 마을에서 이루어졌지만 2차 시위는 마을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는 안평면소재지까지 행진이 이어졌다. 경찰의 제지를 받지 않고 시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3차 시위인 3월17일 오후 8시쯤 1, 2차 시위에 참여했던 대다수 사람들이 중심이 된 가운데 150여 명이 우리골에 모여 만세 시위를 했다. 전날과 같이 마을을 떠난 시위대는 마전, 기도, 괴산리를 돌면서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합세해 시위대는 400여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고무된 시위대는 마침내 창길리 안평면 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이날의 시위대는 창길리를 지나 30리나 되는 하령리에서 해산했으며 일부는 삼춘리까지 행진한 후에 해산했다. 이날 만세 시위도 영수 이호출과 집사 이원춘 등이 주도했다. 그러나 의성경찰서가 순사부장 외에 2명을 보내 안평주재소 순사와 함께 주동자 검거에 나서면서 12명이나 검거됐다. 4차 만세 시위는 전날 12명 체포 됐음에도 불구하고 18일 밤에도 시위는 계속됐다. 이호출 영수 등이 이끈 300여 명의 시위대는 기세가 크게올라 하늘을 찌를 듯 한 가운데 일본인 순사부장과 한인 순사 이창복, 이백영 외에 군청 직원들도 시위대의 기세에 눌러 함께 만세를 부르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안평면 대사리 만세 시위는 날이 갈수록 수그러들지 않았고 시위 범위도 점차 넓혀가고 기세도 충만했다. 3월 19일 5차 만세 시위에는 안평면을 벗어나 도리원 주재소를 포위해 공격했고 군경이 발포해 권해문이 총상을 입고 순국하는 등 사상자를 낳는 대규모의 만세 시위로 기록되고 있다. 안평면 대사교회 교인들이 주도한 안평면에서의 5일간의 만세 시위는 대구에 있는 일본 군경까지 동원해 시위를 막을 정도로 강했다. 이와 같이 의성의 만세 시위가 대구 서문시장과 포항 죽도시장에 이어 경북에서 3번째로 기록되는 것은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의성이 '의와 예의 고장' 임을 스스로 각인 시키는 것이다. 의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도 의병을 일으켰다. 직접 전투에 참여한 의병 62명 중 23명이 전사했다. 의성에서의 전투 지역으로는 건마산성 전투, 봉양면 덕은동 전투, 단밀 전투지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의성의 의병은 의성은 물론 군위와 안동, 경주, 팔공산, 화왕산성 등지 전투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이와 관련, 김홍배 의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은 "의성군에서 첫 3·1 만세 시위는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했으나 비안면 쌍계리와 안평면 대사리 만세 시위는 교회 교인들이 주도했다"고 말했다. 김 향토사연구소장은 또 "의성에서의 3·1 만세 시위는 경북도 내 다른 지역에 비해 횟수도 월등히 많고 주재소 습격 등 매우 격렬했다"면서"이 때문에 독립유공자 수도 경북에서는 안동(357명), 영덕(205명) 다음으로 의성(168명)이 많다"고 강조했다. ※참고 문헌=의성의 독립운동사, 의성문화원 경북선비아카데미 교양 과정, 항일독립운동 의성군 자료집, 3·1운동과 기독교, 의성교회 100년사.

2018-08-05 11:53:49

박팔문·장영조 판결문.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3·1정신 대구경북의 '얼'] <5>칠곡군 인동·약목·석적면의 만세시위

칠곡군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2일 인동면 진평동(1978년 구미시로 편입)을 시작으로 4월 10일 석적면 성곡동까지 한 달 동안 네 곳에서 여덟 차례 일어났다. 하지만 약목면 약목시장 독립만세는 기획단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인동면 진평동 독립만세는 3월 12일부터 3일 동안 네 차례에 걸쳐 마을 뒷산에서 펼쳐졌다. 규모가 작게는 20~30명, 많을 때는 약 200명이었다. 4월 9일에는 약목면 평복동과 석적면 중동에서 마을 청년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석적면 성곡동에선 4월 9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마을 인근 밭에서 전개됐다. 칠곡지역 3·1운동은 기독교 측 인사들과 유림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인근 지역인 대구나 성주·선산은 물론 3월 1일 이후 전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독립만세운동(이하 독립만세)을 계획했다. 특히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독립만세에 참가했던 이영식과 안도수는 이 지역의 독립만세를 끌어내는 촉매 역할을 했다. ◆인동면 진평동 만세시위 이곳의 독립만세는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이 인동교회 목사 이상백을 만나면서 시작됐다. 이영식은 3월 7일 독립선언서 20장을 들고 이내성과 함께 진평동 이상백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보이며 전국적으로 독립만세가 일어나고 있으니 이곳에서도 일으킬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더 많은 사람을 참여시키고자 같은 동네에 사는 진평교회 목사 권영해와 이영래·임점석·임용섭·박명언·허도언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이며 동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동지를 모은 이들은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거사일이 돌아오자 이들은 필사해 둔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붙이는 한편, 동네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아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약속 시간인 오후 8시가 가까워지고 200여 명이 모이자 이상백과 이영식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독립될 것이라고 연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에 사람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들의 독립을 향한 열기는 다음날에도 이어져 약 20~30명이 3월 13일 오후 4시와 9시에 같은 곳에 모여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상백은 징역 2년, 이내성은 징역 1년 6월, 이영래·임점석·임용섭은 각각 징역 1년, 박명언·권영해는 각각 징역 10월, 서천수·박순석·장주서·이윤약·서기옥·박근술·임삼선·장상건은 각각 징역 6월을 받았다. 6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상백은 징역 1년 6월로, 이영래·임점석·임용섭은 징역 8월로, 박명언과 권영해는 징역 6월로 형이 감형됐다. 한편, 이영식과 같은 계성학교 학생인 김도길은 자신의 고향인 진평동에 들어와 독립만세를 이어 나갔다. 그는 동네에 사는 박봉술과 김성윤 등을 만나 독립만세를 협의했다. 이후 3월 14일 오후 9시 200여 명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해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박봉술은 징역 1년, 김성윤·박삼봉·박명출·장영직·김삼용·권경보·장준현은 각각 징역 6월을 받았다. 그리고 김도길은 1919년 8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 외에도 임동석이 3월 14일 밤 진평동 길에서 허도봉 등 여러 사람과 함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1919년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가 6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태형 90(대)으로 감형됐다. ◆약목면 평복동 만세시위 3월 14일 계획됐던 약목시장 독립만세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독립을 향한 열기는 4월 9일 약목면 평복동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곳의 독립만세는 지하수에 의해 마을 동쪽 산에서 펼쳐졌다. 지하수는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3·1운동이 점점 치열해지고 4월에 들어와서는 이웃 성주군에서 활발하게 펼쳐지자 평복동 독립만세를 결심하게 됐다. 이에 몇몇 사람들을 만나 논의한 후 4월 9일 저녁 마을 청년들을 권군필 집에 모이게 했다. 김동술·박수병·장상흠·박수환·김봉근 등 12명이 모이자 지하수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독립국이 되기 위한 것이니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권성수도 나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 같이 부르자며 적극 권유했다. 이들은 바로 실행하기로 하고 마을 동쪽 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주도자 여섯 사람이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지하수는 나중에 체포돼 1919년 11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나머지 다섯 사람인 김동술·박수병·장상흠·박수환·김봉근은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가 5월 30일 태형 90으로 형이 바뀌었다. ◆석적면 중동 만세시위 석적면 독립만세는 중동에 사는 양반 장지희·장영창·장도식에 의해 주도됐다. 평소 일제강점에 대해 분개하며 국권회복을 염원하고 있던 이들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돼 4월 8일에는 성주와 선산군에서 크게 일어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서도 독립만세를 펼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들은 4월 9일 장지희의 형 장철희 집에 모여 이날 밤 마을 뒷산에서 실행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오후 9시가 되자 이들은 마을 청년 22명을 이끌고 뒷산 꼭대기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불렀다. 그러나 바로 달려온 경찰에 21명이 체포됐고 그 가운데 장지희와 장영창을 비롯한 김득룡·장두박·장영희·장영남·장영옥·장영석 등 8명이 재판에 넘어갔다. 장지희와 장영창은 1919년 5월 2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가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로 감형됐고 장지희는 9월 8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그리고 김득룡·장영희·장영남·장영옥·장영석은 5월 2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월을, 장두박은 태형 90을 받았다. ◆석적면 성곡동 만세시위 이곳의 독립만세는 성곡동에 거주하는 양반 장병규·장준식·장영조·장재식 네 사람이 이끌었다. 이들은 3·1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높아가자 자신들의 마을에서도 독립만세를 결행하기로 결심했다. 특히 장영조는 인근 선산에서 독립만세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박팔문 등 마을 사람들에게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드디어 36명이 모여 4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오후 8시 성곡동 북쪽 밭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해 21명이 체포됐으며 그 가운데 장영조와 박팔문은 재판에 넘겨졌다. 장영조는 1919년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월을 받았다가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로 감형됐다. 박팔문은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을 받았다가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태형 90으로 형이 확정됐다. ◆3·1운동 이후...장진홍 의사 3·1운동 이후 칠곡군 출신 독립운동가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장진홍(1895~1930) 의사다. 칠곡군 인동면 무림리가 본관인 그는 1907년 칠곡군 소재 인명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광복단에 가입해 활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장 의사는 1925년 베이징으로 망명해 폭탄 제조법을 배우고 국내에 잠입, 영천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해 대구 덕흥여관 박노선을 시켜 포장된 폭탄상자를 배달토록 해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했다. 이 사건 후 장 의사는 오사카에 거주하는 동생 장의환의 집에서 체포됐고 사형이 확정되자 일제에 의해 치욕스런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는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두고 향년 36세에 자결했다. 장 의사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은 감방을 파괴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장 의사의 유품은 독립운동관에 전시돼 있으며, 칠곡군 왜관읍 애국동산에는 '순국의사 장진홍 선생'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962년 3월 건국공로 훈장이 추서됐다.

2018-07-29 12:04:38

영해만세운동 당시 시위 군중들에게 파괴당했던 일제 경찰 영해주재소 자리. 현재는 영해파출소가 그 자리를 쓰고 있다. 김대호 기자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4>가장 격렬했던 영해만세운동

영덕군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은 '영덕 만세운동'이 아닌 당시 영덕군 영해면에서 벌어진 '영해3·18독립만세운동'으로 통한다. 영해 만세운동은 서울보다 17일 정도 늦었지만, 3천명에 가까운 시위참여 규모도 만만치 않은 데다 특히 영해지역에서는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격렬한 시위 양상이 벌어졌다. 총검으로 무장했던 주재소 일경으로는 감당이 안 돼 울진 평해와 포항의 헌병대까지 출동했고, 결국 대구의 일본 군대까지 시위해산에 동원됐다. 맨손으로 일제의 총검에 저항한 시위 군중 8명이 숨지고 16명이 부상당했다. ◆만세 관련 체포자 도내 최다 1919년은 경북 북부·동해안을 무대로 항일의병투쟁을 벌이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이 1908년 겨울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 계곡에서 허무하게 스러진 지 11년 된 해였다. 어쩌면 영해만세의거는 다시 타오른 항일구국의 횃불이었다. 영해애향동지회에서 발간한 '영해3·18독립만세의거사'에 따르면 1919년 말 당시 일제 조선헌병대사령부 보고서를 분석해 보니 그해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사람이 당시 강원도에 속해 있던 울진을 포함해 총 2천133명이었다. 이들 중 영덕 지역이 총 489명으로 도내(대구 포함)에서 단연 최다였다. 영덕의 체포자 중에는 여성도 4명이나 있었다. 영덕의 뒤를 이어 안동이 392, 대구 297, 의성 190명 순이었다. 영덕군 광복회 임만진(83) 전 회장은 "영덕군 전체에서 3·18만세운동과 관련해 숨지거나 재판을 받거나, 일경에 의해 구금된 사람 등 크고 작은 고초를 겪어 영덕의 '독립의거탑'에 이름을 올린 유공자들이 모두 240명이며 만세의거로 훈장과 포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는 163명이다"며 "아직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이처럼 영덕의 만세의거 관련 체포자나 기소자, 그리고 국가유공자가 많은 것은 영해만세의거로 대표되는 영덕의 만세운동이 그만큼 격렬했었다는 반증이다. 물론 영해 이외에 병곡면 창수면 축산면 영덕면 남정면 등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지만, 단연 영덕 지역 만세운동의 핵심은 영해만세운동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3월 18일 경북 동해안 북부권의 최대 시장인 영해 장날 정오 사람들은 태극기를 품에 안고 가슴 뛰는 거사를 위해 모여들었다. 뜻을 함께한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눈 이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눴다. 오후 1시쯤 영해주재소(현재 영해파출소 자리) 앞에서 만세의 첫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한동안 이어지던 평화로운 시위에 영해주재소 일본인 순사부장 스즈키가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하고 이어 대형 태극기를 뺏으려 달려들었다. 흥분한 만세시위대는 주재소 안으로 들이닥쳐 집기를 부수고 순사들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았다. 또한 주재소의 무기를 모두 탈취해 파기해 버렸다. 소식을 접한 영덕경찰서에서 일경이 달려와 다시 군중의 해산을 시도하지만, 시위 군중은 이들을 제압하고 무기를 뺏고 감금했다. 시위 군중은 공립보통학교, 심상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를 응징했다. 3월 18일 오후 정규하를 비롯한 영해만세시위 지도부와 군중은 병곡면까지 진출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시위대는 3월 18일 영해만세시위를 진압하러 왔던 영덕경찰서장과 일경을 축산면까지 추격해 붙잡아 구타하고 구금하기도 했다. 특히 3월 19일 영해만세의거에 참가하지 못했던 창수면 주민들도 격렬한 만세의거를 일으켰다. 경찰 주재소를 습격해 문서와 서류 그리고 심지어 마당에 있던 나무까지도 도끼로 찍어 없애버렸다. 3월 18일과 19일 만세시위군중은 사실상 영해면과 인근 병곡·창수·축산 등 일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만세시위가 이어지면서 일제는 결국 대구로부터 군대까지 동원해 무자비한 유혈진압작전을 벌였다. ◆기독교·유림 "영해장날 거사 한뜻" 영해만세운동의 단초는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가던 김세영이 경성에서 거국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발길을 돌려 영덕으로 돌아오면서부터이다. 김세영은 마침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평양신학교도 휴교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3월 12일 영덕으로 돌아온 그는 구세군 관계자 권태원을 만나 이러한 뜻을 논의하고 영해와 영덕면 병곡면 창수면 지품면 등에 사람을 보내 세를 규합한다. 이어 영덕 북부권의 대표적인 문중인 '권, 남, 박, 백, 이' 등 이른바 5대 성씨 유림들과도 접촉해 기독교·유림 등이 서로 일제의 침탈에 맞서 힘을 합쳐 떨쳐 일어선 경성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뜻을 모은다. 하지만 당시 유림 측에서도 이미 전국적인 만세의거를 위해 움직인 듯하다. 고종의 국장이 선포되자 유림은 대표를 서울로 보내 봉도단(奉悼團·임금의 상여를 메기 위한 조직)에 참여시키고 그 지역에서 청정한 장소를 정해 상투를 풀고 북쪽을 향해 곡(哭)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영해 지역 유림들 역시 봉도단을 통해 경성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이와 관련된 움직임을 계획하려 했다. 영해 만세의거에 앞서 당시 영해에서 신망이 두터운 유림인사들인 남효직과 남여명이 김세영과 거사를 논의 중이던 권태원과 정규하와 접촉했다. 당초 영덕군의 군청 소재지인 영덕면이 거사 장사로 논의되기도 했지만, 영해면 송천교회 조사(助事·목사를 도와 전도와 교회일을 모는 사람) 정규하가 영해장을 제안해 그대로 실행됐다. 영해가 거사 장소가 된 배경에는 19세기 말까지 영해가 인근 8개 면(현재 영덕군 대부분)을 장악한 중심고을이었고, 1914년 형식적으로는 영덕군 밑으로 영해군이 위상이 격하되기는 했지만, 당시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남쪽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였다. 거리상으로도 영해에서 영덕까지는 16㎞, 병곡과 창수에서는 20~30㎞이다. 유림들의 참여가 절실했던 상황이나 경북 동해안 최대인 영해장날인 점을 고려하면 영해를 거사지로 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었고 많은 조선 민중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반일정서와 상실감 겹쳐 폭발 영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대 4개 면의 만세의거가 다른 지역보다 더 격렬했던 이유는 영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영덕지역 향토사학자 이완섭(57) 전 군의원의 설명이다. 첫째는 뿌리깊은 배일(排日)감정이다. 이 지역이 삼국시대부터 왜구들에 의해 노략질을 당했으며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더욱 도가 세졌고 백성들이 대거 살해당하기도 했다. 구한말의 신돌석 장군의 의병진을 탄압하는 과정에서도 일본과의 악연은 이어졌다. 다음으로 영해지역의 저항정신이다. 영해는 낙동정맥에 의해 서쪽과는 고립된 지역으로 귀양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다시 말해 똑똑하지만, 체제비판적인 지식인들이 많은 곳이다. 1840년 석전제 제관 참여를 둘러싸고 기존의 유림 즉 구향(舊鄕)과 서얼차별 폐지로 인한 신분상승을 주도하였던 서얼 출신들인 신향(新鄕)이 상소 대결까지 벌였던 영해향전(鄕戰)과 최초의 동학혁명인 1871년 영해 신미년 동학전쟁 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여기에 일제의 농민들에 대한 수탈정책도 민심을 자극했다. 면 단위 행정개편을 통해 농민들에게 뽕나무 묘목이나 비료를 강제로 사게 하고 논밭 그리고 집 등을 도로부지로 무단 편입시키는 기부를 강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경성과 대구 등에선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면 영해만세운동에선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많았다는 점은 이와 무관치 않다. 이 전 의원은 "가장 결정적이었던 요인은 영해사람들의 상실감을 들 수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손에 넣고 난 4년 뒤인 1914년 영해를 영덕군에 포함시켰다. 영덕군 영덕면에는 경찰과 검찰 등 일제의 압제 기관을 배치했다. 구한말까지 영해는 중심지로 자부해 왔지만, 단번에 위치가 역전돼 버린 것이다. 영해를 중심으로 한 북부 4개 면의 자존심을 일제는 철저히 뭉개버린 것이다"고 했다. 1919년 영덕지역 만세운동 전개 상황 3월 18일 영해면 2천여 명, 병곡면 400여 명 3월 19일 영해면 연속 시위, 창수면 400여 명 3월 21일 지품면 60여 명 4월 4일 장사면 17명 ※참고자료영덕독립운동사영해3·18독립만세의거사영덕군지, 영해면지 등

2018-07-22 14:47:10

[3·1운동 정신 대구경북의 '얼'] 포항 3·1운동 정신 계승한 비밀단체 '삼일동지회' 독립운동 이어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포항 비밀 독립운동 단체 '삼일동지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단체는 1920년 4월 포항 청하·송라면을 중심으로 3·1운동에 참가해 옥고를 치룬 26명이 송라면 조사리 교회에서 은밀하게 결성했다. 이 단체는 3·1운동과 그 정신을 기리고 항일투쟁을 회고하며 결속을 견고히 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직을 결성한 이들은 매년 비밀리에 정기총회를 개최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다. 일제의 감시가 유독 심한 포항에서 이들의 비밀스러운 움직임도 간혹 들통나기 일쑤였다. 9년간 명맥을 이어가던 삼일동지회는 1929년 영일군 경찰서로부터 회록과 장부를 압수당하고, 해산 명령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주신회(主信會)로, 시온회로 일제의 눈을 피해 이름을 바꿔가며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제의 끈질긴 감시에 결국 얼마 못가 회를 완전히 해산해야 했다.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날, 삼일동지회는 다시 조직되기 시작했다. 재결성 때는 청하·송라면뿐만 아니라 포항면과 영덕, 경주 등 지역 의사들도 회원에 이름을 올렸다. 초대 회장을 역임한 안화종은 삼일동지회가 1954년 펴낸 '영일 3·1 동지사' 서문에 "전능 하시도다. 하나님이시여. 8·15 해방을 주셨도다. 왔도다. 우리 3·1 동지회를 재건할 기회가 왔도다. 우리들이 3·1 동지회를 재건하는 의도는 우리의 희망을 달성했다고 방심할 것이 아니라 3·1운동 정신을 첫 번째는 우리들이 강조하고, 두 번째는 우리 자손만대에 이 정신을 계승하고, 세 번째는 우리 대한의 우국지사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함일러라"고 기록했다. ※해방 후 재결성한 삼일동지회 명단 최경성, 허담, 정성욱, 안화종, 김진순, 김종만, 이태원, 김진봉, 이태하, 정재선, 이봉학, 오용간, 윤영복, 송문수, 이상호, 정상용, 안도용, 윤도치, 김윤선, 김유곤, 정백용, 김광재, 안덕환

2018-07-15 15:48:23

구한말 영일군 포항면 여천장날 풍경. (사)최세윤의병대장 기념사업회 제공.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3>대구서 포항으로 불붙은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1일 영일군 포항면 여천장날(현재 포항 죽도시장 인근). "대한 독립 만세!" 외침이 군중 속에서 터져 나왔다. 하나의 소리는 수백 명의 목소리로 번졌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벽보를 품에 숨긴 채 때를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어린 학생과 노인까지 구분이 없었다. 외침은 여천장터를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이들은 행진하는 동안 벽보를 보이는 곳마다 붙였다. 전날인 3월 10일 북본동(현재 중앙동) 예수교 포항교회(현재 포항제일교회)가 세운 영흥학교(현재 포항영흥초교) 학생 60여 명이 교내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소식이 이곳에서 퍼지면서 만세 소리는 갈수록 높아졌다. 이 시기 서울과 대구에서 3·1 만세 운동이 잇따르면서 일본 군경의 감시가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더욱이 포항 만세 운동 계획을 주도했던 인물 4명이 결행 당일 체포되는 등 공포와 긴장감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제의 총과 칼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수㎞를 행진했다. 낮 동안 진행된 이 행진은 무장한 일본 군경이 출동해 강제 해산시키기 전까지 수 시간 동안 계속됐다. 일제의 진압에 해산한 것처럼 보였던 이들의 만세 운동은 단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12일 저녁 포항교회에 다시 모였다. 어두운 밤을 횃불로 밝히며 다시 시내로 달려가 "만세"를 외치며 수㎞를 걷고 또 걸었다. 이들이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왔을 땐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이 운집한 장소는 당시 포항교회 내에 있던 영흥학교였다. 이날 이곳은 포항 3·1운동 진원지로 역사에 크게 이름을 새겼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영일·포항지역에서 진행된 3·1운동은 모두 9회, 2천900여 명이 참가했다. 횟수가 거듭하는 동안 40여 명이 숨지고, 380여 명이 다쳤다. 320여 명이 일본 군경에 잡혀 고초를 당했다. 이 중에는 어린이들도 어른들의 만세 운동을 흉내 내며 '만세놀이'를 했다는 '3·1 만세촌' 송라면 대전리의 청하장터 3·1 운동도 포함돼 있다. ◆대구에서 포항으로 이어진 3·1운동 영흥학교 학생들이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은 대구 3·1운동이 있은 지 불과 3일 만이었다. 본격적인 포항 3·1운동은 그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이 운동은 대구 3·1운동에 참가했던 최경성(당시 36세)과 송문수(당시 37세)가 이끌었다. 최경성은 1883년 1월 대구에서 태어나 1905년 22세의 나이로 포항으로 이사했으며, 포항교회를 다니며 문맹퇴치 목적으로 사립 영흥학교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송문수는 1882년 11월 영일군 포항면 남빈동에서 태어났다. 포항교회를 다녔고, 1913년 대구성경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은 대구 3·1운동을 주도한 남성정교회 이만집 목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남성정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안의화 선교사가 설립했는데, 포항교회 역시 안의화 선교사가 1905년 개척한 곳이다. 이만집 목사에겐 3·1운동을 확산시킬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적임자는 같은 계파 포항교회에서 나타났다. 최경성과 송문수였다. 이만집 목사 등의 설득으로 대구 3·1운동에 동참하기로 한 최경성과 송문수는 잡화상으로 변장해 대구 큰장터(서문시장) 강 씨 소금집 앞 빈터로 갔다. 여기에는 영일군 청하장터 3·1운동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 포항 송라면 조사리교회 허담 목사(당시 33세)와 그의 조카 허방(당시 21세), 장해동(당시 19세) 등도 있었다. 대구 3·1운동 당시 일제 군경의 잔혹한 진압에 이들 중 송문수를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무사히 몸을 피한 송문수는 하루가 걸려 포항으로 넘어왔다. 포항에는 그를 기다리던 청년들이 있었다. 이기춘(당시 20세), 이봉학(당시 24세), 장운환(당시 32세) 등 3명은 인적이 없는 곳에서 송문수가 전하는 말을 들었다. 이봉학과 장운환은 영흥학교 교사였고, 이기춘은 학교장의 사위였다. 송문수는 "(애국지사들이)조선의 독립을 계획하고 현재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운동에 관한 서면을 제출하려고 고종황제로부터 날인을 받으려 했지만 이완용이 거절했다. 그 후 왕은 누군가에게 암살됐다"며 "이런 내용의 서면을 작성해 예수교 날인을 받아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한 결과, 회의에서 3월 28일까지 조선인민이 소요하고 있으면 독립을 허용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 각지에서 인민이 시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들에게 말했다. 이들은 3·1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히며 함께할 사람들을 모집, 대구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벽보를 만들고 시위 때 군중에게 나눠 줄 선전문도 인쇄했다. 그러나 포항 3·1운동이 계획된 3월 11일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 관헌에 송문수 등 4명이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사실상 대구 3·1 운동이 계획되던 3월 4일쯤부터 은밀하게 준비된 포항 3·1운동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닐지 우려됐지만, 시민들은 굴하지 않는 용기로 여천장터에서 태극기를 높이 지켜 들었다. ◆조선총독부에 비수 꽂은 포항 3·1운동 포항 곳곳에서 3·1운동이 진행될 당시 포항은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해 조선총독부의 감시가 극심했다. 이 시기 포항면 인구 중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24.35%로 기록돼 있을 정도다. 일본인들은 수산업, 상업, 금융업 등에서 일하며 포항의 경제, 정치, 기관 등을 장악해 부를 쌓았다. 총독부는 이들을 보호하고자 1910년 포항헌병분견소를 설치한 데 이어, 1914년에는 이를 대구헌병대 소속 포항헌병분대로 승격시켜 영일군과 영덕군, 경주군, 울릉군을 관할에 두고 민족운동 등을 감시하도록 했다. 특히 포항은 총독부가 1917년 제령 제1호로 공포한 '면제(面制)'에 의해 '포항지정면'이 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지정면(指定面)이란 총독부가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 특별 예산을 지급하는 모범 읍면 보조제도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3·1운동이 확산하자 총독부는 포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하려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그럼에도 일본인 집단거주지가 있었던 본정(현재 상원동)이 가까운 곳에서 3·1운동이 시작돼 주변으로 확산했다는 점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포항의 독립운동사'를 대표 집필한 이상준 향토사학자는 "사실상 일본인들이 포항의 경제계와 정·관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포항·영일 사람들은 당당하게 일제에 맞서 3·1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포항사람만의 강인한 독립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이 같은 일 군경의 삼엄한 경계와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했다. ※참고자료: (사)최세윤의병대장 기념사업회 포항의 독립운동사,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포항제일교회100년사 사료편찬 위원회 포항제일교회 100년 등

2018-07-15 15:45:10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2> 일제의 자제단에 맞서 투쟁 이어간 혜성단

대구의 끈질긴 3·1운동 뒤에는 일제가 독립운동을 억누르려 만든 ‘자제단’에 맞선 ‘혜성단’의 활약이 있었다. 3·1운동의 뜨거운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막고자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했다. 자제단은 3·1운동 참가자를 검거하거나 주동자를 설득해 독립운동 동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1919년 4월 6일 대구에서도 전ㆍ현직 관리들이 주축이 된 대구 자제단이 조직됐다. 단원들은 3·1운동에 동조하는 이들을 본부에 보고하거나 경찰에 신고하며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했다. 이에 대응해 1919년 4월 김수길, 이명건 등 대구 계성학교 학생과 졸업생 9명이 비밀결사 조직인 ‘혜성단(慧星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4월 6일과 13일 대구경찰서장과 대구자제회 의장 박중양에게 “독립만세 운동을 펼친 동포를 검거한 죄를 묻겠다” 또는“자제회를 설립하고 다수를 강제로 입회시킨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의 암살 경고장을 보내기도 했다. 혜성단원들은 상인들을 설득해 철시투쟁을 이끌어냈다. 이들은 3월 31일과 4월 1일 야음을 틈타 ‘독립을 위해 생명을 던지거나 옥중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있다. 서양의 신문기자들이 대구 시내를 방문할 것이니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폐점하라’며 철시투쟁을 종용하는 유인물 700매를 조선 상인들에게 배포했다. 이에 조선인 상인들은 4월 1일과 2일 서문시장에서만 80여곳이 일제히 문을 닫는 등 독립운동에 호응했다. 이밖에도 혜성단은 독립운동을 위한 각종 문서를 제작, 배포했으며 독립운동이 활발한 만주에 조직원을 파견해 항일투쟁을 이어가려했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비밀감시망에 적발돼 5월 중순까지 주동자들이 모두 검거됐다. 김수길은 징역 4년, 이종식ㆍ이영옥ㆍ이명건은 징역 3년, 이영식은 징역 1년, 권성우는 징역 6월을 선고받으며 옥에 갇혔다. 계성 100년사를 집필한 권영대 전 계성학교 교사는 "혜성단은 지역 학생들이 주축이 된 항일투쟁 비밀결사로 학생들이 일제의 위협에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독립운동의 선봉 역할을 한 것 "이라며 "지방에 근거를 두면서도 중앙 및 국외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하고자 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2018-07-08 19:00:00

1918년 계성학교 전교생 단체사진. 사진에 나온 학생 대부분이 이듬해 3ㆍ1운동의 주역이 됐다. 계성학교 제공.

3·1정신 대구경북의 얼 <2> 대구경북 첫 만세운동 벌어진 서문밖시장

1919년 3월 8일 낮 대구 서문시장. 전날 내린 봄비에 시장바닥은 온통 질퍽했지만 다행히 하늘은 활짝 개어 있었다. 토요일을 맞아 수업을 일찍 마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 40여명이 조용히 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려 교복을 벗고 지게를 지거나 상인처럼 옷을 갈아입은 채였다. 이어 신명여학교 교사와 학생 50여명도 동산병원 언덕길을 내려와 조용히 군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후 2시가 되자 대봉동에서 출발한 200여명의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교복 차림으로 뛰어왔다. 일본 경찰들은 몰려드는 학생들에게 가차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막아서기도 했다. 일제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서문시장 소금집 앞 빈터에는 1천여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지금의 섬유회관 맞은편 실골목 입구다. 군중 속에 섞여있던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전도사가 쌀가마니로 급조한 단상에 올랐다. "대한독립만세!" 이만집 목사의 절규가 시장 안에 울려퍼졌다. 학생들과 군중들도 하늘을 찌를듯한 함성으로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대구경북 3ㆍ1운동의 역사적인 출발이었다. 개신교 인사들과 학생들이 주축이 된 대구의 3·1운동은 8일 서문밖시장에서 시작됐다. 일제의 강경 진압으로 규모는 점점 줄었지만 두달여 동안 6차례에 걸쳐 이어지며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다. ◆ 서울부터 번진 만세운동의 불씨,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대구의 3·1운동은 대구 출신으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중 한 명인 이갑성이 불을 지폈다. 그는 1919년 2월 24일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를 방문, 당시 개신교 지도자였던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전도사를 만났다. 이갑성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국제사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할 것이며 이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 곳곳에서 독립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대구에서도 독립 만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만집 등은 만세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고 봤다. 또 지금의 남구 이천동 주한미군 캠프 헨리 자리에 주둔 중인 일본군 보병연대 탓에 민간인 희생이 클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나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동참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3ㆍ1운동의 불길이 확산되던 3월 3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이 이갑성을 대신해 독립선언서 200장을 이만집 목사에게 전달했다. 이만집과 김태련,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 등은 장날인 8일 오후 서문시장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또 계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에 소식을 알리며 동참을 유도했다. 닷새 뒤, 대구에서 마침내 첫 독립만세 함성이 터졌다.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는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방향으로 행진했다. 일본 경찰은 대구경찰서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으로 시위대를 겨누며 위협했지만 사태 악화를 우려해 발포하진 않았다. 시위 행렬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만경관을 지나 지금의 종로인 경정통을 지났다. 만세 행렬이 동성로를 거쳐 옛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 앞에 이른 것은 오후 3시 30분쯤. 그곳에는 기마헌병은 물론 무장한 일본군 보병 부대가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 군경의 가혹한 진압이 시작됐고 진흙밭 거리에 유혈이 낭자했다. 시위대는 해산됐고 157명이 붙잡히며 대구경북 첫 만세운동이 멈춰섰다. ◆ 각계각층 참여 2개월 간 이어진 만세운동 "219명 사망, 916명 부상"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운동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이틀 뒤인 3월 10일에는 김영서 등이 남문밖시장(현 염매시장) 장날을 기회로 다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오후 4시쯤 시작된 이날 만세운동은 일제 군경에 해산되기 전까지 1시간여 동안 200명의 군중이 동참했다. 주동자 중 상당수가 체포되며 막을 내릴 것 같던 만세운동은 동화사 지방학림의 힘으로 되살아났다. 이들은 3월 30일 대구 남문밖시장을 2천여명의 만세소리로 가득 채웠다. 이후로도 4월 15일 수성면 대명동(현 남구 대명동), 4월 26일과 28일에는 공산면 미대동(현 동구 미대동)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대구에서만 6차례 걸쳐 2만3천400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이 중 219명이 사망하고 916명이 다쳤다고 기록했다. 일제 군경에 검거된 이들만 3천296명에 이르렀다. 8일 서문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한 71명과 10일 남문 밖 시장 만세운동 참여자 9명 등 95명은 징역 6개월에서 3년의 실형을 받았다. 목사와 장로, 전도사 등 개신교 인사와 교사, 학생이 다수였지만 농민, 상인, 노동자도 26명에 달하는 등 비교적 다양한 계층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김희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은 "만세운동이 비록 자주독립으로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이는 일본이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어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이 의제가 되지 못한 게 결정적이었다"며 "지역민들이 일제의 탄압을 딛고 자주독립의 의지를 세계에 떨친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하고 의미를 되새길 일"이라고 했다. ※참고자료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경북독립운동사계성학교 계성100년사경북고등학교 경맥117년사 등

2018-07-08 19:00:00

안동 웅부공원에서 열린 '3.1 만세운동 재현'에서 시민들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안동시 제공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1>남녀노소 대동단결한 만세운동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3·1운동은 1910년 8월 29일 경술년에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고, 1945년 8월 15일 나라를 되찾기까지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가장 치열했던 운동이었다. 매일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국혼회복과 민족 정통성을 되찾기 위해 모든 백성들이 스스로 떨쳐 일어났던 거대한 시민사회 운동이었던 3·1운동의 현대적 의미를 되새긴다. 특히,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심지였던 대구경북의 3·1운동사를 되짚어 보고, 지금까지 숨겨진 종교계와 3·1운동 참여자들을 발굴하고 조명해 대구경북의 정체성과 얼을 22차례에 걸쳐 되살린다. ◆1910년 8월 29일 한민족 나라 잃은 백성되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였다. 이날 회의는 일제 데라우치 통감이 사전에 건네준 '한일병합조약안'을 체결하는 데 필요한 '전권위임에 관한 조서'에 순종의 재가를 받는 자리였다. 이날 순종과 고종의 거처인 창덕궁·경운궁을 비롯해 서울 안팎에는 2천600여 명의 무장한 일본군과 헌병들이 배치됐다. 이처럼 계엄과 다름없는 살벌한 상황 아래에서 순종은 전권위임장에 서명했다. 최고 통치자가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않은 채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이완용은 순종에게서 받아낸 전권위임장으로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8월 26일 조약을 공포할 예정이었으나 그 다음날이 순종의 황제즉위일이란 점을 고려해 29일 발표했다. 1910년 8월 29일. 순종은 이날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제에 넘겨주게 됐다고 발표했다. 순종은 황제 즉위 사흘째 되던 날, 조선 500년 사직을 이어갈 막중한 책임을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일제에 넘겨주었다. 순종은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됐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도저히 만회할 시간이 없고 방책을 찾을 수 없음을 탄식했다. 순종은 이날 종묘사직을 이렇게 일본제국주의 손아귀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민족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전락해 버렸다. 한반도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다. ◆국치 이후 국내외서 새로운 항일투쟁 모습 펼쳐져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일제에 맞선 새로운 투쟁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1909년까지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면서 저항했지만,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말자 항일투쟁이 새로운 모습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적 유림을 중심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의 침략과 통치가 한국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계에 알린 '자정순국'(自靖殉國)이라는 극단적인 투쟁으로 표현됐다. 계몽운동을 펼치던 인사들은 나라 밖으로 망명해 독립군을 기르는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기지에 인력과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대한 광복회'라는 국내 지원 조직도 만들어졌다. 나라 밖에서 틀을 잡은 독립운동가들은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국제적으로 상황 변화가 나타나야 그 틈을 이용해 우리가 독립을 성취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국제 정세 변화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나타나자, 독립운동 양상은 발 빠르게 변했다.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를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좋은 기회로 판단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국제 사회에 '한국이 일본 통치에 의해 발전하고 있고, 한국 민중도 일본 통치에 감복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주장보다 더 큰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것이 하나로 뭉쳐진 민족 전체가 하나 되어 부르짖는 함성이었다. 나라 밖 곳곳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들은 지역마다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일본 유학생들은 강화회의에 앞서 1월 말에 조국의 독립 선언 준비를 끝냈다. 이들은 2월 8일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독립운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국외 활동은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의 의사를 큰 함성으로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같은 열망이 바로 3·1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3·1운동은 세계 만국에 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면서 반드시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3·1운동, 한국 독립운동사의 분수령으로 평가 3·1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3·1운동은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으킨 집단항쟁이었다.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대부분 '민중'들이였다. 이 때문에 3·1운동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들은 황제와 지배층이 지켜내지 못한 나라를 자신들의 힘으로 되찾으려 나섰다. 이는 역사적 주인의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의식의 전환점이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침략이 한민족의 뜻과 상반되는 것이고, 강제병합이 무효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일제가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병합이라고 떠들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발표한 것이다. 또, 한국이 이미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독립선언서 첫 머리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대한제국을 일제가 멸망시켰지만, 이날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이다. 3·1운동은 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독립국'을 선언했으므로, 다음으로는 그 '독립국'을 유지하고 운영할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다. 민족 전체가 일어나 독립만세를 부르고,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자주독립국을 유지할 정부조직체를 꾸려 나가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정부 수립이야말로 민족의 뜻으로 제시한 과제였다. 3·1운동은 나라의 주인이 더 이상 황제가 아니라, 국민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민중들의 인식 속에 대한제국은 종결된 것이다. 사실상 3·1운동은 역사를 경술국치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논리에 종지부를 찍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의 선두에선 3·1운동 3·1운동은 세계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일어난 식민지 해방운동의 선두에 섰다. 3·1운동 직후에 일어난 독립운동은 4월 인도 마하트마 간디 주도의 비폭력·비협조운동, 5월 중국에서 터진 5·4운동, 그 해 여름에 일어난 베트남 독립운동, 필리핀 마닐라 대학생과 이집트 카이로 대학생들의 독립운동 등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으로 치달으면서 터져 나온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의 선두에 바로 3·1운동이 있었다. 제국주의가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면서 세계를 집어삼키던 그 시기에 3·1운동이 이를 비판하고 막아서는 흐름의 선두에 있었다. 3·1운동은 제국주의 침략 물결에 맞서는 사건이었다. 비록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 승전국이 중심을 이루어 판을 폈던 파리강화회의였지만, 여기에 식민지 해방문제를 다루도록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3·1운동의 결실이 한국사에서 최초로 근대국가, 민주공화제를 달성해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며 "전 민족이 참가해 비폭력투쟁으로 침략 세력에게 저항하고, 세계에 알려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자료도움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2018-07-05 18:3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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