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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정신 대구경북의 '얼'] 포항 3·1운동 정신 계승한 비밀단체 '삼일동지회' 독립운동 이어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포항 비밀 독립운동 단체 '삼일동지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단체는 1920년 4월 포항 청하·송라면을 중심으로 3·1운동에 참가해 옥고를 치룬 26명이 송라면 조사리 교회에서 은밀하게 결성했다. 이 단체는 3·1운동과 그 정신을 기리고 항일투쟁을 회고하며 결속을 견고히 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직을 결성한 이들은 매년 비밀리에 정기총회를 개최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다. 일제의 감시가 유독 심한 포항에서 이들의 비밀스러운 움직임도 간혹 들통나기 일쑤였다. 9년간 명맥을 이어가던 삼일동지회는 1929년 영일군 경찰서로부터 회록과 장부를 압수당하고, 해산 명령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주신회(主信會)로, 시온회로 일제의 눈을 피해 이름을 바꿔가며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제의 끈질긴 감시에 결국 얼마 못가 회를 완전히 해산해야 했다.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날, 삼일동지회는 다시 조직되기 시작했다. 재결성 때는 청하·송라면뿐만 아니라 포항면과 영덕, 경주 등 지역 의사들도 회원에 이름을 올렸다. 초대 회장을 역임한 안화종은 삼일동지회가 1954년 펴낸 '영일 3·1 동지사' 서문에 "전능 하시도다. 하나님이시여. 8·15 해방을 주셨도다. 왔도다. 우리 3·1 동지회를 재건할 기회가 왔도다. 우리들이 3·1 동지회를 재건하는 의도는 우리의 희망을 달성했다고 방심할 것이 아니라 3·1운동 정신을 첫 번째는 우리들이 강조하고, 두 번째는 우리 자손만대에 이 정신을 계승하고, 세 번째는 우리 대한의 우국지사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함일러라"고 기록했다. ※해방 후 재결성한 삼일동지회 명단 최경성, 허담, 정성욱, 안화종, 김진순, 김종만, 이태원, 김진봉, 이태하, 정재선, 이봉학, 오용간, 윤영복, 송문수, 이상호, 정상용, 안도용, 윤도치, 김윤선, 김유곤, 정백용, 김광재, 안덕환

2018-07-15 15:48:23

구한말 영일군 포항면 여천장날 풍경. (사)최세윤의병대장 기념사업회 제공.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3>대구서 포항으로 불붙은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1일 영일군 포항면 여천장날(현재 포항 죽도시장 인근). "대한 독립 만세!" 외침이 군중 속에서 터져 나왔다. 하나의 소리는 수백 명의 목소리로 번졌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벽보를 품에 숨긴 채 때를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어린 학생과 노인까지 구분이 없었다. 외침은 여천장터를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이들은 행진하는 동안 벽보를 보이는 곳마다 붙였다. 전날인 3월 10일 북본동(현재 중앙동) 예수교 포항교회(현재 포항제일교회)가 세운 영흥학교(현재 포항영흥초교) 학생 60여 명이 교내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소식이 이곳에서 퍼지면서 만세 소리는 갈수록 높아졌다. 이 시기 서울과 대구에서 3·1 만세 운동이 잇따르면서 일본 군경의 감시가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더욱이 포항 만세 운동 계획을 주도했던 인물 4명이 결행 당일 체포되는 등 공포와 긴장감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제의 총과 칼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수㎞를 행진했다. 낮 동안 진행된 이 행진은 무장한 일본 군경이 출동해 강제 해산시키기 전까지 수 시간 동안 계속됐다. 일제의 진압에 해산한 것처럼 보였던 이들의 만세 운동은 단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12일 저녁 포항교회에 다시 모였다. 어두운 밤을 횃불로 밝히며 다시 시내로 달려가 "만세"를 외치며 수㎞를 걷고 또 걸었다. 이들이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왔을 땐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이 운집한 장소는 당시 포항교회 내에 있던 영흥학교였다. 이날 이곳은 포항 3·1운동 진원지로 역사에 크게 이름을 새겼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영일·포항지역에서 진행된 3·1운동은 모두 9회, 2천900여 명이 참가했다. 횟수가 거듭하는 동안 40여 명이 숨지고, 380여 명이 다쳤다. 320여 명이 일본 군경에 잡혀 고초를 당했다. 이 중에는 어린이들도 어른들의 만세 운동을 흉내 내며 '만세놀이'를 했다는 '3·1 만세촌' 송라면 대전리의 청하장터 3·1 운동도 포함돼 있다. ◆대구에서 포항으로 이어진 3·1운동 영흥학교 학생들이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은 대구 3·1운동이 있은 지 불과 3일 만이었다. 본격적인 포항 3·1운동은 그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이 운동은 대구 3·1운동에 참가했던 최경성(당시 36세)과 송문수(당시 37세)가 이끌었다. 최경성은 1883년 1월 대구에서 태어나 1905년 22세의 나이로 포항으로 이사했으며, 포항교회를 다니며 문맹퇴치 목적으로 사립 영흥학교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송문수는 1882년 11월 영일군 포항면 남빈동에서 태어났다. 포항교회를 다녔고, 1913년 대구성경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은 대구 3·1운동을 주도한 남성정교회 이만집 목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남성정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안의화 선교사가 설립했는데, 포항교회 역시 안의화 선교사가 1905년 개척한 곳이다. 이만집 목사에겐 3·1운동을 확산시킬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적임자는 같은 계파 포항교회에서 나타났다. 최경성과 송문수였다. 이만집 목사 등의 설득으로 대구 3·1운동에 동참하기로 한 최경성과 송문수는 잡화상으로 변장해 대구 큰장터(서문시장) 강 씨 소금집 앞 빈터로 갔다. 여기에는 영일군 청하장터 3·1운동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 포항 송라면 조사리교회 허담 목사(당시 33세)와 그의 조카 허방(당시 21세), 장해동(당시 19세) 등도 있었다. 대구 3·1운동 당시 일제 군경의 잔혹한 진압에 이들 중 송문수를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무사히 몸을 피한 송문수는 하루가 걸려 포항으로 넘어왔다. 포항에는 그를 기다리던 청년들이 있었다. 이기춘(당시 20세), 이봉학(당시 24세), 장운환(당시 32세) 등 3명은 인적이 없는 곳에서 송문수가 전하는 말을 들었다. 이봉학과 장운환은 영흥학교 교사였고, 이기춘은 학교장의 사위였다. 송문수는 "(애국지사들이)조선의 독립을 계획하고 현재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운동에 관한 서면을 제출하려고 고종황제로부터 날인을 받으려 했지만 이완용이 거절했다. 그 후 왕은 누군가에게 암살됐다"며 "이런 내용의 서면을 작성해 예수교 날인을 받아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한 결과, 회의에서 3월 28일까지 조선인민이 소요하고 있으면 독립을 허용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 각지에서 인민이 시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들에게 말했다. 이들은 3·1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히며 함께할 사람들을 모집, 대구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벽보를 만들고 시위 때 군중에게 나눠 줄 선전문도 인쇄했다. 그러나 포항 3·1운동이 계획된 3월 11일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 관헌에 송문수 등 4명이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사실상 대구 3·1 운동이 계획되던 3월 4일쯤부터 은밀하게 준비된 포항 3·1운동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닐지 우려됐지만, 시민들은 굴하지 않는 용기로 여천장터에서 태극기를 높이 지켜 들었다. ◆조선총독부에 비수 꽂은 포항 3·1운동 포항 곳곳에서 3·1운동이 진행될 당시 포항은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해 조선총독부의 감시가 극심했다. 이 시기 포항면 인구 중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24.35%로 기록돼 있을 정도다. 일본인들은 수산업, 상업, 금융업 등에서 일하며 포항의 경제, 정치, 기관 등을 장악해 부를 쌓았다. 총독부는 이들을 보호하고자 1910년 포항헌병분견소를 설치한 데 이어, 1914년에는 이를 대구헌병대 소속 포항헌병분대로 승격시켜 영일군과 영덕군, 경주군, 울릉군을 관할에 두고 민족운동 등을 감시하도록 했다. 특히 포항은 총독부가 1917년 제령 제1호로 공포한 '면제(面制)'에 의해 '포항지정면'이 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지정면(指定面)이란 총독부가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 특별 예산을 지급하는 모범 읍면 보조제도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3·1운동이 확산하자 총독부는 포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하려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그럼에도 일본인 집단거주지가 있었던 본정(현재 상원동)이 가까운 곳에서 3·1운동이 시작돼 주변으로 확산했다는 점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포항의 독립운동사'를 대표 집필한 이상준 향토사학자는 "사실상 일본인들이 포항의 경제계와 정·관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포항·영일 사람들은 당당하게 일제에 맞서 3·1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포항사람만의 강인한 독립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이 같은 일 군경의 삼엄한 경계와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했다. ※참고자료: (사)최세윤의병대장 기념사업회 포항의 독립운동사,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포항제일교회100년사 사료편찬 위원회 포항제일교회 100년 등

2018-07-15 15:45:10

3·1정신 대구경북의 얼<2> 일제의 자제단에 맞서 투쟁 이어간 혜성단

대구의 끈질긴 3·1운동 뒤에는 일제가 독립운동을 억누르려 만든 ‘자제단’에 맞선 ‘혜성단’의 활약이 있었다. 3·1운동의 뜨거운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막고자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했다. 자제단은 3·1운동 참가자를 검거하거나 주동자를 설득해 독립운동 동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1919년 4월 6일 대구에서도 전ㆍ현직 관리들이 주축이 된 대구 자제단이 조직됐다. 단원들은 3·1운동에 동조하는 이들을 본부에 보고하거나 경찰에 신고하며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했다. 이에 대응해 1919년 4월 김수길, 이명건 등 대구 계성학교 학생과 졸업생 9명이 비밀결사 조직인 ‘혜성단(慧星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4월 6일과 13일 대구경찰서장과 대구자제회 의장 박중양에게 “독립만세 운동을 펼친 동포를 검거한 죄를 묻겠다” 또는“자제회를 설립하고 다수를 강제로 입회시킨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의 암살 경고장을 보내기도 했다. 혜성단원들은 상인들을 설득해 철시투쟁을 이끌어냈다. 이들은 3월 31일과 4월 1일 야음을 틈타 ‘독립을 위해 생명을 던지거나 옥중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있다. 서양의 신문기자들이 대구 시내를 방문할 것이니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폐점하라’며 철시투쟁을 종용하는 유인물 700매를 조선 상인들에게 배포했다. 이에 조선인 상인들은 4월 1일과 2일 서문시장에서만 80여곳이 일제히 문을 닫는 등 독립운동에 호응했다. 이밖에도 혜성단은 독립운동을 위한 각종 문서를 제작, 배포했으며 독립운동이 활발한 만주에 조직원을 파견해 항일투쟁을 이어가려했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비밀감시망에 적발돼 5월 중순까지 주동자들이 모두 검거됐다. 김수길은 징역 4년, 이종식ㆍ이영옥ㆍ이명건은 징역 3년, 이영식은 징역 1년, 권성우는 징역 6월을 선고받으며 옥에 갇혔다. 계성 100년사를 집필한 권영대 전 계성학교 교사는 "혜성단은 지역 학생들이 주축이 된 항일투쟁 비밀결사로 학생들이 일제의 위협에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독립운동의 선봉 역할을 한 것 "이라며 "지방에 근거를 두면서도 중앙 및 국외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하고자 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2018-07-08 19:00:00

1918년 계성학교 전교생 단체사진. 사진에 나온 학생 대부분이 이듬해 3ㆍ1운동의 주역이 됐다. 계성학교 제공.

3·1정신 대구경북의 얼 <2> 대구경북 첫 만세운동 벌어진 서문밖시장

1919년 3월 8일 낮 대구 서문시장. 전날 내린 봄비에 시장바닥은 온통 질퍽했지만 다행히 하늘은 활짝 개어 있었다. 토요일을 맞아 수업을 일찍 마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 40여명이 조용히 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려 교복을 벗고 지게를 지거나 상인처럼 옷을 갈아입은 채였다. 이어 신명여학교 교사와 학생 50여명도 동산병원 언덕길을 내려와 조용히 군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후 2시가 되자 대봉동에서 출발한 200여명의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교복 차림으로 뛰어왔다. 일본 경찰들은 몰려드는 학생들에게 가차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막아서기도 했다. 일제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서문시장 소금집 앞 빈터에는 1천여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지금의 섬유회관 맞은편 실골목 입구다. 군중 속에 섞여있던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전도사가 쌀가마니로 급조한 단상에 올랐다. "대한독립만세!" 이만집 목사의 절규가 시장 안에 울려퍼졌다. 학생들과 군중들도 하늘을 찌를듯한 함성으로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대구경북 3ㆍ1운동의 역사적인 출발이었다. 개신교 인사들과 학생들이 주축이 된 대구의 3·1운동은 8일 서문밖시장에서 시작됐다. 일제의 강경 진압으로 규모는 점점 줄었지만 두달여 동안 6차례에 걸쳐 이어지며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다. ◆ 서울부터 번진 만세운동의 불씨,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대구의 3·1운동은 대구 출신으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중 한 명인 이갑성이 불을 지폈다. 그는 1919년 2월 24일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를 방문, 당시 개신교 지도자였던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전도사를 만났다. 이갑성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국제사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할 것이며 이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 곳곳에서 독립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대구에서도 독립 만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만집 등은 만세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고 봤다. 또 지금의 남구 이천동 주한미군 캠프 헨리 자리에 주둔 중인 일본군 보병연대 탓에 민간인 희생이 클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나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동참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3ㆍ1운동의 불길이 확산되던 3월 3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이 이갑성을 대신해 독립선언서 200장을 이만집 목사에게 전달했다. 이만집과 김태련,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 등은 장날인 8일 오후 서문시장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또 계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에 소식을 알리며 동참을 유도했다. 닷새 뒤, 대구에서 마침내 첫 독립만세 함성이 터졌다.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는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방향으로 행진했다. 일본 경찰은 대구경찰서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으로 시위대를 겨누며 위협했지만 사태 악화를 우려해 발포하진 않았다. 시위 행렬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만경관을 지나 지금의 종로인 경정통을 지났다. 만세 행렬이 동성로를 거쳐 옛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 앞에 이른 것은 오후 3시 30분쯤. 그곳에는 기마헌병은 물론 무장한 일본군 보병 부대가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 군경의 가혹한 진압이 시작됐고 진흙밭 거리에 유혈이 낭자했다. 시위대는 해산됐고 157명이 붙잡히며 대구경북 첫 만세운동이 멈춰섰다. ◆ 각계각층 참여 2개월 간 이어진 만세운동 "219명 사망, 916명 부상"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운동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이틀 뒤인 3월 10일에는 김영서 등이 남문밖시장(현 염매시장) 장날을 기회로 다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오후 4시쯤 시작된 이날 만세운동은 일제 군경에 해산되기 전까지 1시간여 동안 200명의 군중이 동참했다. 주동자 중 상당수가 체포되며 막을 내릴 것 같던 만세운동은 동화사 지방학림의 힘으로 되살아났다. 이들은 3월 30일 대구 남문밖시장을 2천여명의 만세소리로 가득 채웠다. 이후로도 4월 15일 수성면 대명동(현 남구 대명동), 4월 26일과 28일에는 공산면 미대동(현 동구 미대동)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대구에서만 6차례 걸쳐 2만3천400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이 중 219명이 사망하고 916명이 다쳤다고 기록했다. 일제 군경에 검거된 이들만 3천296명에 이르렀다. 8일 서문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한 71명과 10일 남문 밖 시장 만세운동 참여자 9명 등 95명은 징역 6개월에서 3년의 실형을 받았다. 목사와 장로, 전도사 등 개신교 인사와 교사, 학생이 다수였지만 농민, 상인, 노동자도 26명에 달하는 등 비교적 다양한 계층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김희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은 "만세운동이 비록 자주독립으로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이는 일본이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어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이 의제가 되지 못한 게 결정적이었다"며 "지역민들이 일제의 탄압을 딛고 자주독립의 의지를 세계에 떨친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하고 의미를 되새길 일"이라고 했다. ※참고자료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경북독립운동사계성학교 계성100년사경북고등학교 경맥117년사 등

2018-07-08 19:00:00

안동 웅부공원에서 열린 '3.1 만세운동 재현'에서 시민들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안동시 제공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1>남녀노소 대동단결한 만세운동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3·1운동은 1910년 8월 29일 경술년에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고, 1945년 8월 15일 나라를 되찾기까지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가장 치열했던 운동이었다. 매일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국혼회복과 민족 정통성을 되찾기 위해 모든 백성들이 스스로 떨쳐 일어났던 거대한 시민사회 운동이었던 3·1운동의 현대적 의미를 되새긴다. 특히,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심지였던 대구경북의 3·1운동사를 되짚어 보고, 지금까지 숨겨진 종교계와 3·1운동 참여자들을 발굴하고 조명해 대구경북의 정체성과 얼을 22차례에 걸쳐 되살린다. ◆1910년 8월 29일 한민족 나라 잃은 백성되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였다. 이날 회의는 일제 데라우치 통감이 사전에 건네준 '한일병합조약안'을 체결하는 데 필요한 '전권위임에 관한 조서'에 순종의 재가를 받는 자리였다. 이날 순종과 고종의 거처인 창덕궁·경운궁을 비롯해 서울 안팎에는 2천600여 명의 무장한 일본군과 헌병들이 배치됐다. 이처럼 계엄과 다름없는 살벌한 상황 아래에서 순종은 전권위임장에 서명했다. 최고 통치자가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않은 채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이완용은 순종에게서 받아낸 전권위임장으로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8월 26일 조약을 공포할 예정이었으나 그 다음날이 순종의 황제즉위일이란 점을 고려해 29일 발표했다. 1910년 8월 29일. 순종은 이날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제에 넘겨주게 됐다고 발표했다. 순종은 황제 즉위 사흘째 되던 날, 조선 500년 사직을 이어갈 막중한 책임을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일제에 넘겨주었다. 순종은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됐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도저히 만회할 시간이 없고 방책을 찾을 수 없음을 탄식했다. 순종은 이날 종묘사직을 이렇게 일본제국주의 손아귀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민족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전락해 버렸다. 한반도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다. ◆국치 이후 국내외서 새로운 항일투쟁 모습 펼쳐져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일제에 맞선 새로운 투쟁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1909년까지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면서 저항했지만,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말자 항일투쟁이 새로운 모습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적 유림을 중심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의 침략과 통치가 한국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계에 알린 '자정순국'(自靖殉國)이라는 극단적인 투쟁으로 표현됐다. 계몽운동을 펼치던 인사들은 나라 밖으로 망명해 독립군을 기르는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기지에 인력과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대한 광복회'라는 국내 지원 조직도 만들어졌다. 나라 밖에서 틀을 잡은 독립운동가들은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국제적으로 상황 변화가 나타나야 그 틈을 이용해 우리가 독립을 성취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국제 정세 변화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나타나자, 독립운동 양상은 발 빠르게 변했다.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를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좋은 기회로 판단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국제 사회에 '한국이 일본 통치에 의해 발전하고 있고, 한국 민중도 일본 통치에 감복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주장보다 더 큰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것이 하나로 뭉쳐진 민족 전체가 하나 되어 부르짖는 함성이었다. 나라 밖 곳곳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들은 지역마다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일본 유학생들은 강화회의에 앞서 1월 말에 조국의 독립 선언 준비를 끝냈다. 이들은 2월 8일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독립운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국외 활동은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의 의사를 큰 함성으로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같은 열망이 바로 3·1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3·1운동은 세계 만국에 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면서 반드시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3·1운동, 한국 독립운동사의 분수령으로 평가 3·1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3·1운동은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으킨 집단항쟁이었다.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대부분 '민중'들이였다. 이 때문에 3·1운동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들은 황제와 지배층이 지켜내지 못한 나라를 자신들의 힘으로 되찾으려 나섰다. 이는 역사적 주인의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의식의 전환점이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침략이 한민족의 뜻과 상반되는 것이고, 강제병합이 무효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일제가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병합이라고 떠들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발표한 것이다. 또, 한국이 이미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독립선언서 첫 머리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대한제국을 일제가 멸망시켰지만, 이날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이다. 3·1운동은 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독립국'을 선언했으므로, 다음으로는 그 '독립국'을 유지하고 운영할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다. 민족 전체가 일어나 독립만세를 부르고,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자주독립국을 유지할 정부조직체를 꾸려 나가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정부 수립이야말로 민족의 뜻으로 제시한 과제였다. 3·1운동은 나라의 주인이 더 이상 황제가 아니라, 국민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민중들의 인식 속에 대한제국은 종결된 것이다. 사실상 3·1운동은 역사를 경술국치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논리에 종지부를 찍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의 선두에선 3·1운동 3·1운동은 세계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일어난 식민지 해방운동의 선두에 섰다. 3·1운동 직후에 일어난 독립운동은 4월 인도 마하트마 간디 주도의 비폭력·비협조운동, 5월 중국에서 터진 5·4운동, 그 해 여름에 일어난 베트남 독립운동, 필리핀 마닐라 대학생과 이집트 카이로 대학생들의 독립운동 등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으로 치달으면서 터져 나온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의 선두에 바로 3·1운동이 있었다. 제국주의가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면서 세계를 집어삼키던 그 시기에 3·1운동이 이를 비판하고 막아서는 흐름의 선두에 있었다. 3·1운동은 제국주의 침략 물결에 맞서는 사건이었다. 비록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 승전국이 중심을 이루어 판을 폈던 파리강화회의였지만, 여기에 식민지 해방문제를 다루도록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3·1운동의 결실이 한국사에서 최초로 근대국가, 민주공화제를 달성해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며 "전 민족이 참가해 비폭력투쟁으로 침략 세력에게 저항하고, 세계에 알려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자료도움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2018-07-05 18:3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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