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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7, 마지막 회>-엄창석

금릉은 큰 입구 자(口) 형태의 안채와 옆채를 둘러본다. 넓은 마당 한가운데에는 키 작은 백일홍과 적단풍과 매화나무가 곱게 어우러져 있다. 다섯 핸가 여섯 핸가, 앵무의 품으로 들어온 게 까마득한 옛일 같다. 노래를 배우고 가야금을 익혔지. 남자와 시(詩)도 배웠잖아. 어쩜, 남자는 시와 같았지. 가야금 줄 튕겨 상사곡 마치니, 봄은 가고 제비만 남네...... 그런 시 속에 남자가 있었어. 하지만 이것도 오래 전이야. 금릉은 고개를 갸웃 젖힌다. 시가 없어진 뒤로 남자는 짐승이 됐어. 사내와 여인 사이에 흐르는 음악 같은 공간이 지워지자 서로가 닳은 뼈마디처럼 부딪쳤지. 시(詩)든 뼈마디든 이제는 지나간 일이다. 정(情)과 비정(非情)이 한때 소나기를 뿌리고 남풍에 실려간 구름과 같다. 금릉은 사흘 전에 만난 계승을 떠올린다. 칸칸이 나눠진 수비대의 감옥이 객사 뒤쪽에 있었다. 아직 벽돌 감옥을 짓기 전이었다. 석재가 도움을 주어 면회가 성사된 것이다. 감옥 안 면회실에서 계승을 만났다. 그의 모습은 믿을 수 없는 정도였다. 죽통에 머리를 처넣은 삽살개처럼 얼굴이 시꺼멓고 온통 수염투성이였다. 금릉은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함께 가 준, 석재 선생과 앵무 아주머니와 장상만이 계승과 긴 얘기를 나누었다. 금릉은 미리 골라둔 말을 하나도 꺼내지 못했다. 칼과 포승줄에 묶이지 않았지만 수렁에 빠진 것 같은 그의 모습이 앞으로의 모든 것을 일러주고 있지 않은가. "터널 안에서 붕괴 사고가 났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들을 해친 것은 아닙니다." 계승의 어조는 책을 읽듯이 침착했다. 금릉의 귀에는 생(生)과의 고리를 놓친 나뭇가지가 툭툭 부러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오빠, 나를 보아요. 내 얼굴을 만져보세요. 내게 다가와 손을 들어서 내 양쪽 귀를 잡고 입술을 맞춰보아요. 그녀는 주먹을 쥐고 그를 보았다. 그의 눈이 잠깐 그녀의 얼굴에 머물다 석재 선생으로 돌아갔다. 힘을 내게. 보름 뒤에 재판이 있다고 하네. 선생님, 저쪽에서도 증인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자네가 그때 일을 소상히 밝히게. 또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던가. 후루쇼 경보부가 다가왔다. 후루쇼가 석재에게 절도 있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석재 선생님, 걱정 마십시오. 일본은 조금의 부당함도 없이 공정한 법으로 이 사건을 처리할 것입니다. 후루쇼가 언제 한국어를 저렇게 잘했지? 떡과 고구마를 넣어주고 면회실을 나왔다. 후루쇼의 말은 위안일까, 위협일까. 면회실을 찾는 넷은 서로 다른 표정을 지으며 거리로 나섰다. 금릉은 짐을 챙긴다. 새로 얻은 집으로 짐을 옮기는 것이다. 가져갈 것은 많지가 않다. 이부자리, 수저, 다탁, 호롱, 화로....죄다 공동의 것이다. 더러 그녀가 돈을 주고 산 것도 있지만 농루에 두고 갈 것이다. 금릉은 가야금을 가져가야 할지 말지를 망설인다. 처음 악기를 배울 때는 앵무 아주머니의 것이었으나 그후 그녀가 악기를 구입했다. 그녀는 가야금을 기증한다는 생각보다 앞으로 가야금을 튕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두고 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러고 보니 옮겨 갈 게 별로 없다. 벽장에 넣어둔 그림은 가져가야지. 왠지 남자들과 주고받은 시는 버리지 못할 것 같다. 앞으로 사내들과 술상에 앉을 일은 없지만 그들과 나눈 시구에 밴 애틋함과 사모의 정은 허공에 날려버리고 싶지 않다. 그분들의 정이 모두 육욕에서 나온 게 아니야. 넓은 방 안에 홀로 자자니 병풍 속 원양이 부럽기만 하네(十二湘簾人獨宿.....). 님 만나서 물이 막혀 연밥 던졌는데 사람들에게 들키고서 종일 수줍었네(逢郞隔水投蓮子.....). 당지에 쓴, 이런 시들을 접어 보자기 에 넣는다. 두 해 전, 석재 선생이 풍죽(風竹)을 쳐주었던 속치마가 벽장에서 나오자 금릉은 아연해한다. 손으로 흰 비단치마를 펼친다. 굵은 대나무가 거센 바람에 맞아 땅에 누울 듯이 휘어진 묵화(墨畵)이다. 아니면 몰아치는 바람에 대나무가 활처럼 휘며 튕겨 일어서려는 모양인가. 그림이 마치 예언(豫言) 같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그후 성이 무너지고 도시가 일색(日色)으로 변하면서 생긴 일들이 눈앞을 스친다. 옥에 갇힌 계승도 풍죽이 아닌가. 바람을 가장 앞서 맞는 기녀들도 한명 한명이 모두 안타까운 풍죽이다. 어제는 농루에 일인들이 단체로 술을 마시러 왔다. 근자들어 일인 손님들이 북적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아무리 올곧은 앵무 아주머니라 해도, 그들이 손님으로 온 이상 접대할 수밖에 없었다. 성이 무너지고 유곽이 생기면 일인들은 그리로 갈 테지만, 유곽으로 옮겨가기 전에 조선 예기(藝妓)의 맛을 보겠다고 찾아든 것이다. 갑자기 손님이 느는 까닭을 넉넉히 짐작하지만, 기녀들은 그들 앞에서 노래와 시를 써 보인다. 그러니 은낭화, 설루, 옥매......그녀들도 하나 하나 슬픈 풍죽이 아닌가. "김씨가 금릉의 짐을 새 집으로 옮겨다 주세요." 마당에 나와서 앵무가 김씨에게 이른다. 하지만 미리 이사하는 것을 알고 김씨는 농루 앞에 나귀를 대기시켜 놓았다. 짐이 형편없이 적은 것을 보고 지게로 나를까 하다가 김씨는 나귀 수레에 금릉은 짐을 싣는다. 옷가지와 보자기 몇 개, 다탁과 노리개와 베개를 싣고 나자 작은 수레가 반도 차지 않는다. 설루가 이사 간 집까지 같이 가주겠다고 나선다. "아주머니, 자주 들를게요." "그러겠니?" "네. 멀지 않은데요뭐." 앵무는 그녀는 꼭 껴안는다. 기적이 없어졌으니까 농루에 온다 해도 술잔은 잡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 갑자기 서운하다. 농루를 떠남이 지난 여섯 해의 젊음이 허공에 날리는 것 같아서, 그녀는 앵무의 품에서 잠깐 몸서리를 친다. 금릉과 설루는 수레를 타지 않고 수레를 뒤를 따라 달서교로 내려온다. 김씨는 나귀 고삐를 잡고 앞을 보며 걷는다. 참 청정한 날씨다. 버드나무는 어느새 푸르렀고 며칠 전의 비로 불은 개울물이 티 없이 맑다. 수레 뒤로 아이들이 재잘대며 따라온다. 수레는 번잡한 달서교를 건넌다. 달서교 앞 뒤로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다. 이날이 장날인가. 금릉은 수레를 따라가다 흠칫, 뒤를 돌아본다. 뒤에서 길을 비켜라는 고함소리가 들린다. 이상하지 않아? 짐을 옮긴 날은 5월 2일데, 그녀의 기억은 5월 7일에 머문다. 나귀 수레를 따라가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 게 그날이 아닌가. 서문과 달서교 사이로 많은 이들이 붐빈다. 사나운 고함 소리에 사람들이 우르르 양 옆으로 비켜서고, 남문이 무너진 텅 빈 자리로 또 다른 수레가 등장한다. 말이 끄는 그 수레에는 무엇이 얹혀 있던가. 우물 두레박 걸이 같은 커다란 삼각형의 각목들이다. 십수 개의 각목이 수레에 세워지거나 눕혀져 있다. 그것이 교수형 형틀이라는 것을, 금릉은 금방 알아챈다. 수레 양쪽으로 붙어서 일본 수비대들이 총을 가슴 앞으로 모아 쥔 채 저벅저벅 걷고 있다. 수레 뒤로 조금 떨어져서 한 떼의 죄수들이 걸어오고 있다. 포승줄에 묶어서 끌려오고 있다. 그러나 발을 바닥에 끌 뿐 아무도 비틀거리거나 몸부림치지는 않는다. 어쩌면 가벼운 걸음으로 당당하게 걷는 죄수들 무리 속에서 계승이 끼어 있음을 발견한다. 금릉은 눈이 파르르 떨린다. 면회 간 날, 보름 뒤에 있을 거라는 재판이 갑자기 닷새나 당겨졌다는 사실은 금릉이 나중에 알게 된다. 청송에서 잡혀온, 부유한 호족을 살해한 화적들이 재판을 받을 때 임계승의 건도 같이 취급되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전날 재판에서 교수형이 떨어지고 다음날 해가 지기 전에 형장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도. 금릉은 주춤주춤 구경꾼들과 멀어진다. 구경꾼들의 흐름을 보아 계승이 어디쯤에 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형틀과 죄수와 수비대 군인들이 달서교를 건너고 큰장 서쪽으로 가로지른다. 시장이 끝나고 내비동이 시작되는 구릉에서 형틀을 땅에 박을 것이다. 금릉은 흐르는 무리들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계산성당 건너편, 계승이 얻은 집으로 들어선다. 작은 기와집은, 이사한 날 이후로 수없이 쓸고 닦고 하여 마루와 문짝과 방이 제법 말끔하다. 그러나 가져온 짐들은 풀지 않아, 새로 산 이부자리만 방 한쪽에 포개져 있다. 그녀는 다시 걸레를 빨아 기둥을 닦으려고 한다. 갑자기 손목에 힘이 풀린다. 걸레를 집을 아귀힘조차 없다. 그녀는 망연해 하다 방 구석에 둔 금빛 종(鐘)에 눈이 간다. 서울로 가기 전에 계승이 준 종이다. 사람들이 버린 담배통을 녹여 만든 종이라 했지? 그녀는 주먹만 한 종을 흔들어본다. 경쾌한 종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린다. 금릉은 방을 나와 집을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굴뚝으로 뚫린 처마, 뒤쪽 문, 곳간 기둥이 계승의 손길을 얻다 말고 멈춰 있다. 그것을 보강하다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서울로 떠났지? 그가 언제 돌아와 남은 곳을 고쳐 줄까? 그녀는 거기서 생각을 멈춘다. 지금쯤, 내비동 구릉지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계승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그녀는 쌀을 사와 저녁밥을 지어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사 온 후로 며칠 동안 식점에 가서 밥을 사먹었다. 식점 문을 열지 않은 아침은 그냥 굶었다. 그녀는 집을 나선다. 골목을 나서자 높은 성당 첨탑이 눈을 막아선다. 엷은 노을빛이 첨탑에 걸려선지 기괴한 건축물이 쓸쓸해 보인다. 그녀는 싸전에 가지 않고 성당 건너 개울둑에 앉는다. 언제였지? 계승이 집 수리할 재목을 지게로 져 오다 개울가에 앉은 것이. 그때 그녀도 계승 옆에 나란히 앉았다. 지게를 등 뒤에 세워두고서. 성당 앞에서 어떤 연사가 목청껏 소리를 높이고 있었어. 계승은 지게 작대기에 턱을 괴었고 그녀는 치마를 말아 붙이고 무릎을 안았지. 그때처럼 금릉은 둑에 앉아 치마를 허벅지에 붙이고 무릎을 안는다. 성당 앞은 한 사람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오늘따라 개울가에 아무도 없다. 강아지와 오리 몇 놈만 물가를 돌아다닌다. 그녀는 경사진 둑을 이용해 무릎에 손을 얹고 턱을 괸다. 한참동안 텅 빈 연단을 바라본다. 그럴 때였다. 배에서 뭔가 꼼틀거리는 것 같다. 뭐지? 금릉은 놀라워하면서 허리를 편다. 배에 손을 대본다. 손끝에 미동이 느껴진다. 아까도 이렇지 않았어? 조금 전 방에서 종을 흔들 때도 배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았잖아! 그녀는 믿을 수 없어 하며 손가락을 꼽아본다. 몇 달 전으로 줄곧 거스르면서 날짜를 짚는다. 그러고 보니 달거리를 안 한지도 꽤 된 듯했다. 성당 앞으로 개 두 마리가 달려간다. 앉아 있던 새들이 날아오른다. 버찌 몇 알이 나무에서 톡톡 떨어진다. 그녀는 옷 속으로 손을 넣는다. 살금살금 배를 쓸며 귀를 기울인다. 또 미동이 손끝에 묻는다. 금릉은 입술을 달싹여 계승을 불러본다. "여보......" 아까 미동하던 배가 잠잠하다. 금릉은 다시 귀를 열고 고개를 숙인다. 달서교 쪽 개울둑을 따라 사람들이 걸어오는 게 보인다. 큰시장 뒤 구릉지로 갔다온 사람들이 돌아오는 모양이다. 수많은 이들이 왁작왁작 발소리를 내면서 서문 쪽으로 흩어지고, 또 성당 앞으로 몰려온다. 도시를 덮은 구름 속으로 노을빛이 번진다. 하늘이 환해진다.

2017-09-26 17:05:51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6>-엄창석

승강장 출입구로 승객들이 들어온다. 금릉은 철재로 가로막힌 출구로 바투 다가선다. 그녀의 앞과 뒤에서 반가움이 배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무명옷과 양장을 은 사람들이 그녀 옆을 스쳐간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내 사람들이 줄어들고 허연 불빛이 깔린 바닥이 드러난다. 그녀는 등을 보이며 정거장을 빠져나가는 아무 남자나 붙잡고 '왜 이제 왔어요?' 울음을 터트리고 싶다. 텅 빈 승강장에 서 있던 기차가 증기를 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역무원이 승강장 출입구를 닫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찌른다. 이튿날도 기차 시간에 맞춰 정거장으로 나와 보지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계승은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날 오후, 그녀는 앵무 아주머니와 같이 성 안으로 들어간다. 광문사에 가서 김광제와 서석림을 만나 무슨 말이라도 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성은 처참했다. 4미터가 넘던 성곽은 톱으로 벤 나무 등걸처럼 낮아졌다. 허리쯤 되는 곳도 있고 아예 돌 하나 남지 않아 평지처럼 깎인 데도 있었다. 그녀가 자주 드나들었던 아름다운 누각을 뽐내던 서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삭 주저앉았다. 문짝이나 나무 기둥들은 성곽 자리에 쌓아놓았는데, 사람들이 장작으로 쓰겠다고 다투듯 집어 날랐다. 먼지인지 낮은 구름이 깔려선지 거리가 희뿌옇다. 성 안에 있는, 감영의 정문인 관풍루는 헐리지 않고, 독보적인 모습으로 서 있다. 그녀와 앵무는 관풍루를 보면서 걷는다. 저게 없으면 방향도 모를 뻔했어. 성 안은 그토록 낯설다. 아카시아와 라일락 향기가 잔존한 먼지 속에서 피어오른다. 둘은 관풍루 옆, 광문사로 들어간다. 회의실이나 접견실로 쓰는 인쇄실 옆방에 앵무와 금릉이 서석림과 박해령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 두루마기에 넓은 갓을 쓴 서석림의 차림새가 변함이 없어 금릉은 왠지 안도가 된다. 보상운동이 전국을 휩쓸면서 김광제는 서울로 올라갔고 서석림도 경상도 각지를 다니며 연설회를 하느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서석림은 광문사에 들러 금방 찍은 인쇄물을 살피고 있다가 앵무와 금릉을 만난 것이다. "임군이 지금 대구 감옥에 있다네요." 서석림이 앵무와 금릉 사이의 벽으로 눈길을 던지며 말한다. 금릉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날마다 역에 가서 기다리지 않았는가. "시찰님.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앵무가 차분한 어조로 묻는다. 서석림이 깊은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다. 옆방에서 인쇄기가 철컥철컥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어젯밤에 아들놈이 집에 와서 알려준 말입니다. 임군이 3년 전에 일본 노무자 셋을 살해했다고 하네요. 청도의 철도 터널 공사장에서 말이오." "그럴 리가 없어요!" 금릉은 자기도 모르게 소릴 지르고 만다. 흙탕물이 쏟아지듯이 온갖 것이 섞여 세상이 흘러가지만 계승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서석림이 애틋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아버님, 임계승이 1급 살인범으로 체포됐어요." 서석림은 아들 서요의 말에 자리를 고쳐 앉으며 되물었다. "무슨 소린냐? 임군이 광문사 일로 서울에 갔다." 서요에게, 임계승이 취지문을 가지고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고는 하지 않는다. "며칠 전, 대전 정거장에서 붙잡혀서 대구 감옥으로 압송되었습니다. 3년 전 성현터널 사태 때문이랍니다. 한인 넷이 살해에 가담했는데 모두 처형되고 계승만 혼자 남았다가 이번에 잡혔습니다." "3년 전이라고? 내가 그걸 믿으란 소린냐?" "저도 믿지 않습니다." 서요가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 무릎 다가왔다. "하지만 아버님, 지금 일본의 계책이 어느 때보다 치밀하고 강경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이토 히로부미 각하마저 나라를 지키자고 돈을 모으는 한인들이 갸륵하다고 칭찬하지만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어코 허를 찔러 이 운동을 주저앉힐 겁니다. 임계승뿐 아닙니다. 동양(김광제)이 경무관을 했을 때 범법이 없었겠습니까? 아버님, 전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합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10년 간 외획(外劃, 국가 세금을 대신 거두는 일)을 수행하시면서 엽전 한 냥 남의 돈을 취하시지 않았다고 자신하시겠습니까?" "음......" "여기서 그만 두십시오. 보상운동이 수그러들지 않으면 누구든 다칩니다. 지금 박제순 내각을 사퇴시킨다는 정보까지 올라옵니다. 박제순이 누굽니까? 을사년 조약때 일본편의 주역입니다. 이런 마당에 임계승 따위는 날파리 하나에 불과하지요." 임군이 황제를 만났기 때문에 날파리가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는 뜻인가? 아니면 더 커지기 전에 제거해버린다는 뜻인가? "그 아이는 너와 동갑이고 네 친구인 셈이잖아. 구해낼 방도가 없겠는가?" "차라리 보상 운동을 잠재우는 게 쉬울 겁니다." 서석림이 갓을 벗고 금릉의 여린 손을 잡았다. "나도 자네들이 어여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었네. 재판이 있을 거니까 기대해보자." "면회는 할 수 없나요? 직접 물어봐야겠어요." 금릉은 소리치며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앵무가 그녀를 껴안는다. 금릉이 앵무의 품에 안긴다. 이따 면회 신청을 해보자. 앵무가 금릉의 등을 두드리곤 서석림에게 눈을 돌린다. 감옥소에 동행을 해주길 바라는 표정이다. 서석림은 경제계를 이끄는 거물이 아닌가. 은행들과 각종 공장과 농원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상층부 일인들과도 거리가 멀지 않다. 기루에 들러 기녀들과 시화(詩畵)를 즐겨 나누는 석재도 있다. 이사청 수장인 부이사관이 대구로 부임할 때 열흘 동안 석재의 자택에서 숙식을 하기도 했다. 앵무가 호소를 하면 석재는 언제든 달려와 줄 것이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앵무에 안겨 흐느끼면서 금릉은 한 줄기 햇살을 느낀다. 앵무와 금릉은 접견실을 나와 댓돌로 내려선다. 서석림와 박해령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고, 마당을 가로지른다. 성을 허물면서 생긴 먼지가 구름처럼 떠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라선지, 먼지 구름은 분지를 쉽게 빠져나가질 못한다. 뿌연 연기 같은 것이 퍼져 있지만 그것이 폐허처럼 허물어진 성곽 위를 좇아 하늘에서 환(環)을 그리고 있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수창사에는 이전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는 것 같다. 부역을 나오면서 한 푼씩 들고 수창사를 찾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계산성당 앞 연설회장은 연일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도부 인사들이 성당 앞 개울에서 연설을 하면 부역을 마친 사람들이 모여들어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이날도 계산성당 개울 건너에는 많은 이들이 앉아 있다. 자신의 손으로 성곽을 무너뜨린 미묘한 죄책감이 수창사와 계산성당 앞으로 사람들을 모여들게 한 것인가. 온몸이 먼지투성이여서 손을 흔들어 환호할 때마다 사람들 머리 위로 허연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난다. 금릉과 앵무도 개울 둑에 앉는다. 계승이 이 일로 잡혀갔고 자신도 어제까지 허물어진 성곽의 돌을 날랐으나 부민들과 섞여 연설을 듣는 게 왠지 위안이 된다. 먼지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더니 굵은 빗방울이 우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둑에 앉은 군중들이 비를 피해 나가려다 다들 그냥 앉는다. 연설자가 목청껏 소리 지른다. 금릉도 박수를 친다. 비가 쏟아진다. 빗줄기가 거무튀튀하다. 성곽 모양으로 허공에 떠 있는 먼지구름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거무스름한 빗줄기가 얼굴에 흐르고 옷을 적시는 옆 사람을 보면서 금릉도 벌떡 일어나 공중으로 손을 뿌린다.

2017-09-22 15:35:20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5>-엄창석

주요 정거장에는 경계 병력들이 상주했고 범죄자 임시 유치 시설을 두고 있었다. 헌병과 보조원이 나간 후로 계승은 지하실에 혼자 남았다. 두어 평 되는 공간은 사방이 막혀 있고 어두웠고, 곰팡이 냄새가 들이쳤다. 포승줄에 팔과 가슴이 묶인 계승은 구석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미미한 진동이 천장에서 쿵쿵 울렸다. 어젯밤에 황제를 만나고 온 몸이 아닌가. 나라와 백성을 한 손에 쥔 황제의 용안을 바라본 눈과 그의 앞에 엎드렸던 이마와 그의 말을 담았던 귀가 이 궁벽한 정거장 유치소에 갇혀 있는 것이다. 말할 수 없이 무참했다. 오히려 등짝에 감춘 폐하의 칙유가 저놈들 손에 넘어가면 그것이 폐하의 위대함을 가리키긴커녕 수모를 안기게 할 것이다. 보조원이 나간 후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포승줄이 느슨해지도록 몸을 비틀어보았다. 다부지게 묶여 있어 팔을 움직일 여지가 없었다. 밖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열쇠로 문을 따고 헌병들이 들어왔다. 금릉은 걸레로 방을 꼼꼼히 닦는다. 성당 앞 개울에서 길러 왔던 물에 걸레를 빤다. 몸을 옮기며 문설주, 문틀, 봉창에 일일이 손을 댄다. 물걸레질로 손바닥이 빨갛다. 계승이 세를 얻은 계산성당 건너편 마을에 위치한 집이다. 집은 아직도 곳곳에 소재할 게 많다. 도장방 구석에 쳐진 거미줄, 죽은 벌레가 썩어서 곰팡이로 부풀어 있는 부뚜막, 봉창에 끼여 죽은 곤충들. 아침에는 기루에서 글씨를 쓰다 버린 당지와 지난 신문을 챙겨 왔다. 걸레를 놓고 종이에 풀칠을 한다. 도배를 마치면 뽀얀 새집이 될 것이다. 그런 상상이 금릉에게 힘을 솟게 한다. 겉옷을 벗고 엎드려서, 가늘고 흰 팔을 휘저으며 종이에 풀을 묻힌다. 며칠 전의 영상이 금릉의 머릿속에 넘실거린다. 도톰한 입술, 넓은 그의 가슴. 원숭이처럼 털이 북슬북슬한 허벅지가 그녀의 뺨에 대였지. 그 촉감이 어떻더라. 너무 커지 않아요? 그녀는 그의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성기 같다고 생각했던 것을 지금 그녀는 떠올린다. 어찌나 튼튼했던지. 그가 여기 누워 있었어. 사랑을 끝내고 조금 지친 듯이 팔을 벌리고 누워 아름다운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았지. 그녀는 다시 손바닥에 풀을 흠뻑 묻혀 종이에 문지른다. 손바닥에 담기는 부드러운 감각 때문에 그날 누워 있는 그의 가슴을 어루만질 때의 촉각이 섬세하게 되살아난다. 풀을 묻힌 종이를 벽에 척척 걸친다. 손바닥과 마른 걸레로 꼭꼭 여미듯 벽에 종이를 접착시킨다. 뒤꿈치를 한껏 세워 키를 높인 뒤 천장까지 이르도록 벽지를 바른다. 벽지를 붙이다가 한순간 그녀는 망연해진다. 벽을 껴안고 숨을 죽인다. 풀이 종이 위로 배어나와 그녀의 뺨이 젖는다. 그가 오지 않는다면 혼자 여기서 살 수 있을까. 만약에 그가 오지 않는다면 이 집이 왜 필요할까. 그녀는 벽을 부둥켜안는다. 장상만이 농루로 찾아온 것은 그저께 저녁이었다. 성벽 철거 부역을 마치고 돌아와 몸을 씻고 났을 때였다. 그녀는 장상만을 따라 달서교 옆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장상만의 얘기는, 추풍령에서 잠을 깼는데 계승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일등석에서 삼등석까지 다 뒤져봤다고 했다. 그녀는 아연했다. 장상만은 어릴 때부터 알았던 동네 오빠였다. "황간에 내려서 밤새도록 걸어 대전까지 올라갔어. 연변에 다른 기미라곤 없었어. 기차를 공격하다가 사살된 시체들이 더러더러 있었지만 시일이 꽤 지난 것이었고...... 다음날 아침에 대전 정거장에 도착했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일본 헌병에게 누가 여기서 체포가 되었냐고 물을 수는 없잖아." 금릉은 장상만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핏발 선 눈과 초췌한 모습이 그녀의 항변을 막았다. 장상만과 헤어지고 그녀는 세를 얻은 집으로 가보았다. 풀을 뽑고 흙은 돋운 마당에 저녁 어스름이 져 있었다. 계승이 기울어진 처마를 세운 게 며칠 전이 아닌가. 비틀어진 문짝을 뜯어내고 새 문짝을 끼운 안방에서 그가 문을 활짝 열며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사뭇 떠난다고 했던 홍란이 어느 날 기루 문을 두드리면서 "언니 저 왔어요." 배시시 웃던 일. 철도 연변의 어떤 사건으로 죽은 줄 알았던 이모부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와 담배 밭에 일을 나가지 않는가.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어릴 때 동무들 가운데 몇은 소식도 없이 종적을 감추었고 유학자인 성주(星州)의 외할아버지는 생사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집마저 잿더미가 되었다. 계승도 7년 만에 홀연히 출현했다가 갑자기 증발해버리는 건가. 날이 어두워서 세를 얻은 집을 나선다. 서툰 도배질을 하느라 머리와 팔과 어께에 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성당 뒤, 제일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성당 종탑 옆에 있어야 할 서장대가 별안간 눈에 띄지 않는다. 남문과 서문 사이, 성곽 위에 높이 솟은 주승루(서장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늘 높이 뻗은 종탑의 허리쯤에 걸쳐져 있던 합각지붕의 풍경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 마치 계승이 불현듯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바로 어제 서장대를 헐었다. 지난 해 무너뜨린 북쪽 성곽을 빼고 나머지 성곽을 철거하기 시작한 것은 나흘 전부터였다. 성 안팎의 주거민들에게 부역령이 떨어졌다. 동문 쪽에 사는 사람은 동쪽 성벽을, 남문 쪽에 사는 사람은 남쪽 성벽을 헐었다. 인구가 많은 서문 밖 사람들은 동쪽 성벽 철거에 동원되었다. 금릉도 서문 옆, 성곽 아래에서 쏟아진 흙을 나르는 짓을 했다. 지난 해 성 철거를 두고 온갖 사건이 꼬리를 물지 않았던가. 사람이 죽고, 대구 사람을 쓰지 못해 부산에서 인부를 구해왔다. 한쪽 성곽이 허물어지자 원형으로 서로를 지지하던 성곽의 균형이 틀어져 곳곳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위태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누구나 성 철거를 반대했지만 금이 생기자 상황이 변했던가. 그러나 아무도 철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부역령이 내려졌다. 전체 부민 동원령이 내려진 게 30년 만이라고 한다. 군수 박중양이 내린 부역령은 확고했다. 갈팡질팡하던 부민들의 마음을 관통하면서, 지난 가을 숨어서 성을 허물던 유약함을 만회하겠다는 듯이, 북후정 연설회와 단연 연금 행렬로 한쪽에 밀려났던 도시의 행정력을 단번에 되찾겠다는 듯이, 부역령은 기습적이었고 힘이 넘쳤다. 마욱진의 지게부대가 성곽 위에 올라갔지. 수백 명은 돼 보였어. 마욱진이 그렇게 많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있는 줄 몰랐어. 또 소와 말이 끄는 수레는 얼마였던가. 동민들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성 위에서 돌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어. 군사들과 헌병들이 감시에 나선 것은 오히려 정오부터였지. 모든 부민들이 불려나왔고, 수백 마리의 소와 말들이 늘어서서 돌과 흙을 실어나를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어. 아주머니, 저걸 다 없애면 저들이 성 안을 다 차지할 거 아니예요? 어쩌겠니......앵무 아주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시가 일인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우리가 도와야 하는구나. 아주머니가 머리에 수건을 쓰며 말했다. 문밖에서 진위대원들이 얼른 나오라고 재촉하는 소리를 들렸다. 성이 사라지는 것은 그녀들에게는 또 다른 일이었다. 성이 사라지면 그녀들은 기생이 아니라 창녀가 될 거야. 아무도 그런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무명 치마를 두르고 흙을 소쿠리에 담을 때에도, 돌무더기 사이에 앉아 나눠준 주먹밥을 입에 우겨넣을 때에도, 이틀 뒤, 서문과 주승루가 붉고 굵은 기둥이 꺾이면서 먼지 속으로 주저앉는 것을 눈앞에 목격할 때에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저 흙돌로 북후정 위의 저지대를 메워서 유곽을 세우면, 우린 거기서 일해야 돼. 하루 일을 마치고 금릉은 정거장으로 간다. 기차가 마지막으로 대구로 들어오는 시각이 9시다. 금릉은 허름한 정거장 안에서 지인을 마중 나온 부민들에 섞여 계승을 기다린다. 나무로 된 기둥마다 석유램프가 켜져 있다. 하루 종일 노역에 시달린 부민들이 바닥에 앉거나 서 있다. 금릉은 이제 곧 계승이 나타나기라도 할 듯이 승강장 출입구를 노려본다.

2017-09-18 15:48:44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4>-엄창석

배가 살살 아팠다. 통로를 빠져나와 객차 문을 열었다. 객차와 객차 사이의 공간에는 사람들이 서 있거나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장죽을 빨고 있었다. 벌어진 쇠판 틈으로 객차를 연결하는 굵은 고리가 으스스하게 보였다. 바람이 솔솔 올라왔다. 계승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 밑으로 자갈과 침목이 훤히 보였다. 변기에 쪼그리고 앉았다. 전날 내내 신경을 쏟은 탓인지 똥이 잘 나오지 않았다. 밖에서 화장실 문을 쿵쿵 두드렸다. 기차가 달릴 때 객차 사이마다 있는 화장실에서 대소변이 레일 위로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상상하자 웃음이 나왔다. 기차가 움직여야 항문이 열리지 않을까. 기차가 떠난 자리에 똥이 쌓여 있는 건 아무래도 흉측한 노릇이다. 다시 밖에서 문을 쾅쾅 두드렸다. 가까스로 용변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변소를 쓸려고 기다리는 이들이 많구나 싶었는데 뜻밖에 밤색 제복들이 문 앞에 우글거렸다. 그들이 계승의 팔을 낚아챘다. "왜 이러시오?" 일본 헌병들이었다. 계승이 팔을 휘둘러 그들을 떨치려 했다. 헌병들은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계승을 사납게 끌어내렸다. 엎어지다시피 승강장으로 튕겨나갔다. 뭔 일이냐, 사람을 잘 못 봤다고, 소리 질렀지만 헌병들이 억세게 계승의 팔과 가슴에 포승줄을 묶었다. 부우붕,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승은 끌려가다 기차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구경하고 있었고, 3등 객차에는 장상만이 창가에 앉아 자고 있는 게 보였다. "네놈이 임계승이지?" 계승을 역사 안에 있는 방에 밀어 넣고는 제복 하나가 다가와 우리 말로 물었다. 헌병 보조원이었다. 일인 헌병들은 보조원을 한둘씩 두고 있는데 그들은 한인이고 통역을 맡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일까. 경운궁에서 나올 때부터 미행을 시작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서울 정거장에 도착한 후로 따라붙었는지. 그때는 긴장이 풀어져 조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첩보를 받고 대전역에서 헌병들이 동원되었는지도 모른다. 계승은 임계승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맞다고 실토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부인한다고 해도 당장 풀어주진 않을 테다. 보조원이 헌병에게서 종이를 받아들고 계승의 얼굴과 번갈아 대조해보며 흐물흐물 웃었다. 얼굴이 그려진 체포 전단인 모양이었다. "입술이 얇고 턱주가리가 긴 게 똑 같구만." 계승은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많아요. 왜들 이러시오. 난 그릇 장사하는 상인이오." 출판사 직원이라고 할까 하다가 어물쩍 말을 돌렸다. "이 새끼 봐라. 너, 경운궁엔 왜 갔어?" 가슴이 우지끈, 내려앉았다. 궁궐에 들어간 것까지 안다 말인가? 계승은 충격을 받았지만 곧 힘이 솟았다. 폐하를 뵙고 왔다는 자신감이 탱탱하게 부풀었다. 통역을 맡은 보조원이 한인은 아닌가. 계승은 눈을 번쩍 떴다. 너는 조선놈이잖아! 내가 황제의 인장이 찍힌 칙유를 가지고 있어,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때 일인 헌병 서넛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그렇게 벼락같이 내질렀을지도 몰랐다. 늦게 들어온 헌병들과 보조원이 뭐라 일어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헌병 하나가 허리에 찬 칼을 뽑았다. 묶인 채로 주저앉아 있는 계승의 머리 위로 뽐내듯이 허공을 베었다. 시퍼런 살기가 스쳤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때 보조원이 발을 들어 그의 가슴을 걷어차며 무슨 말을 내뱉었는데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그 말에 계승의 몸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일 급 화적이 걸려들었네. 이 새끼, 경상도 성현터널에서 일본인 세 명을 죽이고 도주했잖아." 계승은 망연하게 맞은 편 벽을 바라보았다. 성현터널에서 일본인 셋을 죽었다고...... 그럴지도 몰랐다. 부산 초량에 가기 전에, 밀양과 언양을 떠돌기 전에 그는 성현터널 공사장에 있었다.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 때 그는 청도의 성현터널에 투입되었다. 경부선 공사에서 가장 긴 터널로, 험악한 산악지대를 뚫는 탓에 거기에 사용한 스위치백 공법을 천황에게 보고할 만큼 중요했던 현장이었다. 수백 명이 동원된 그 산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터널 속은 암반 사이로 자주 지하수가 쏟아졌고 무른 토사가 쌓여 좁은 늪을 이루기도 했다. 계승은 삼년 전, 그 일이 아뜩하게 머리를 스쳤다. 그날 밤, 21번째 구간에서 지지대가 무너지고 있다고 그는 보고 하지 않았다. 그 안에 횃불을 켜고 이십여 명의 일꾼들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모두가 일본에서 건너온 노무자들이었다. 그놈들은 하나같이 사악했다. 계승과 다른 넷은 지지대를 보완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용구를 집어던지고 넷은 좁은 터널 속을 뛰었다. 퍼낸 흙을 나르는 운반조들이 곳곳에 지렁이처럼 엉켜 잠들어 있었다. 밤낮을 구별하지 않은 격무에 시달렸던 탓이다. 터널 밖으로 나올 즈음 굉음이 들렸던가. 계승은 자신의 가슴에서 굉음이 들린다고 생각했다. 노역장에서 도주하는 게 꿈이었다. 야밤을 타고 산비탈로 내려오자마자 넷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가 계승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홀로 떠돌던 계승은 초량을 거쳐 대구로 돌아오는 데 3년이 걸렸다. 급변하는 세월에 떠밀려 멀리 물러가 있을 줄 알았던 그 사건이 대전 정거장의 한 구석방에서 헌병 보조원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2017-09-14 15:33:41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3>-엄창석

계승은 남자를 따라 작은 암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갔다. 주위가 캄캄해서 길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궁궐 수비대와 맞닥뜨리긴 했지만 그들은 둘을 모는 체했다. 밤 11시쯤 되었을 것이다. 장상만에게는 러시아공사관 옆, 여관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궁의 한가운데 있는 중화문에서 난폭한 발자국 소리가 어둠을 타고 우두둑우두둑 들려 왔다. 계승은 들어간 곳은 무지개 형 창문이 달린 2층 벽돌 건물이었다. 현관 처마에 중명전이라고 쓰였던가. 궁궐 안에 서양식 건물이 있는 것은 뜻밖이었다. 엄청난 청기와와 아름드리 기둥을 거느린 화려한 궁궐을 상상했던 계승에게는 서양식 건물이 기이하게 느껴졌고, 오히려 침착해지려고 다짐했던 마음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다. 천장이 높고 바닥이 반질반질한 복도를 걸어서 1층 끝 방으로 들어갔다. 전등이 켜진 방에서 책들이 꽂힌 서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경복궁 집옥재에서 옮겨온 책들일 것이다. 황제의 집옥재 서가는 김광제가 자주 거론하던 것이었다. 서울을 새로운 도시로 만들려고 하는 황제의 야심이 집옥재 서가에 있다는 것이다. "폐하께서 독서를 좋아하시네. 늦은 밤에 자주 중명전으로 오셔서 책을 읽으시지......." 같이 온 남자는(안호영이라는 내시였다.) 벅찬 투로, 그러나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계승은 서가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방에 놓인 긴 장방형 탁자에, 한 시간쯤 전에 신문사에서 만났던 이가 앉아 있었다. 이준이었다. 계승은 소스라칠 뻔했다. 그가 팔을 벌려 계승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이준이 안호영에게 말했다. "오는 길에 별일 없었겠지요?" "평리원 검사 나리. 폐하께서는 두려움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모든 백관들도 폐하의 담대함을 본받길 원하십니다...... 공께서 떠나실 날짜가 언제입니까? 준비는 다 되셨지요?" 어딜 떠난다는 말일까. "해아(海牙,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6월 15일에 열립니다.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가려면 시일을 많이 당겨야 합니다." 이준이 대답을 하자 안호영이 계승을 돌아보았다. "가지고 온 것을 꺼내놓게." 계승은 윗도리를 벗고 실로 봉합한 등을 뜯었다. 잘 접혀진 보들보들한 당지는 조금도 구겨지지 않은 상태였다. 세밀하고도 힘찬 글씨가 탁자 위로 펼쳐졌다. "신필(神筆)이신 석재 선생님이 쓴 국채보상 취지문입니다." 계승은 자랑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왜 이것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준은 글씨를 따라 손끝을 대면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안호영은 취지문을 골똘히 보더니 폐하의 뜻이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은 오늘날 백성들의 심장입니다! 폐하께서는 공(公)이 해아로 떠날 때 백성들의 심장을 품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듣고 있는 이준도, 말을 한 내시도, 취지문을 가져온 계승도. 한동안 셋은 탁자 위에 둔 취지문 휘호에 두려운 시선을 얹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먼저 몸을 틀어 말한 것은 안호영이었다. "다행히 이 글을 궐 안으로 가져오긴 했지만 다시 내가기는 힘듭니다. 무슨 일이 생길는지. 모레, 상궁이 상동교회로 가져가 전덕기 목사에게 맡겨 놓겠습니다. 해아 평화회의 위임장과 같이 말입니다." 대한매일신보사에서 영자신문을 뒤적이던 양기탁이 네덜란드 해아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사실을 전덕기와 이준에게 알렸다는 것을 계승은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이 상동교회 지하실에 모여 황제에게 평화회의 특사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자고 의논한 것도 계승은 알지 못했다. 이준과 양기탁은 서울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이준이 국채보상운동을 접고 해아로 떠나게 된 것은, 이날로부터 불과 닷새 뒤인 4월 22일이었다. 그리고 이 해아의 특사는 불과 석 달 후, 황제의 퇴위까지 몰고 온 1900년대 들어 가장 큰 사건으로 번졌다. 몇 마디 말이 오간 뒤에도, 셋은 여전히 취지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휘호를 언제 거둘지, 지금 일어나야 하는 건 아닌지. 계승은 배가 고팠다. 기차에서 주먹밥을 먹은 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오줌이 마렵기도 했다. 주변은 고요했다. 아주 멀리서 대포 소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복도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을 질질 끄는 여린 소리는 기이한 진동처럼 방문이 울리고 탁자가 흔들리는 듯했다. 취지문 당지도 부르르 떤다고 계승은 생각했다. 고개를 돌리자 문 열린 방 밖에 어떤 이가 서 있었다. 내시와 이준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내시는 허리를 깊이 숙였고 이준은 바닥에 고꾸라졌다. 계승은 무언가가 등을 후려치는 듯했고 손을 모은 채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황제구나. 나라와 백성을 한 손에 쥐고 있는 황제구나. 잠깐 본 흰빛의 얼굴이 망막을 가득 채웠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겨우 두 걸음 앞에 거대한 불덩이가 있어서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황제가 자신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계승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한 손에 쥔 자가 좁은 궁궐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황제의 음성은 속이 텅 빈 허물에서 들리는 공허한 울림 같았다. 힘없이 늘어뜨린 옷자락, 창백한 얼굴. 허옇게 센 부석한 턱수염. 황제는 소매 끝을 빠져나온 가는 손목에 취지문을 얹고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황제가 무슨 말을 했던가. 의정부 대신들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칙어를 내렸다는 이야기, 자신도 보상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 취지문의 한 글자마다 백성들을 감동시켰듯이 자신도 그러하다는 이야기, 이 자구들이 백성들의 심장을 흔들었듯이 자신의 심장도 뛰고 있다는 이야기...... 좀전과는 다르게 계승은 황제의 음성을 들으면서 스러지는 나라의 제왕이 품고 있는 거대한 비애를 느꼈다. 까마득한 슬픔의 깊이도. 제왕의 슬픔은 어딘가 달랐다. 그 비탄이 흰빛 나는 황제의 온몸에서 울러 퍼지고 있다고, 잠시 후 바닥에 엎드려 작별을 고하면서 계승은 생각했다. 계승이 러시아 공사관 옆, 여관으로 돌아온 것은 자정에 가까워서였다. 장상만은 2층 방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여관 주인이 갖다준 떡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황제를 만났어?" "그래." "어떻게 생겼지? 우리하고 같아?" "나중에 황제가 방으로 들어오셨어." 계승은 황제의 용모와 표정, 그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랑 달랐지. 황제를 보는 것이 산기슭에서 거대한 산을 우러러는 것 같았어." 하지만 슬픔이 담긴 뜨거운 목소리, 비탄의 물결 위로 솟구치는 황제의 고독한 기백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황제 앞에서보다 오히려 중명전을 나와서 내시의 안내를 받고 월곡문이라는 작은 암문에 도착했을 때 더 격심하게 느꼈다. 허리를 숙여 작은 문을 몰래 빠져나오던 계승의 눈에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황제의 옥새가 찍힌 작은 문서를 받아 등에 넣었기 때문에 더 눈물이 났을 것이다. 조그마한 종이에 "백성이여 힘차게 일어나라"라고 쓴 한글 문장. 황제는 꼭 서석림 김광제에게 그 말을 직접 전하고 싶었을까. 끝이 날렵하고 힘차게 뻗은 작은 글씨에, 탄탄하게 찍힌 붉은 인장. 계승은 또 눈시울이 더워졌다. 눈두덩에 팔을 걸치고 잠을 청했다. 소매가 조금씩 젖었다. 이튿날이었다. 오전이라선지 서울 정거장은 많이 붐볐다. 의주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 출발하는 기차였다. 화물차가 두 냥이었고 객차가 다섯 냥인 긴 열차였다. 계승은 상경할 때처럼 등을 의자에 기대지 못하고 꼿꼿이 세웠다. 등에 황제의 작은 칙유가 넣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취지문과 다르게 황제의 더운 입김이 등에서 후끈거렸다. 천안을 지나자 피로가 엄습했다. 아마 까북 졸은 것 같았다. 계승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칙유가 구겨졌을지 모른다. 3등실 안은 한인들로 북적거렸다. 일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한때 3등 칸을 죄다 차지하고 있는 게 일인 노무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빠르게 1,2등 칸으로 옮겨갔다. 옆에서 장상만은 잠에 빠져 있었다. 대전 정거장에서 기차가 멈췄다.

2017-09-11 17:08:57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2>-엄창석

계승과 장상만은 인파에 끼어 정거장을 나섰다. 꽤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고 공터 밖으로 작은 기와집과 초가들이 자갈이 박힌 푸성귀 밭처럼 어수선하게 뒤섞여 있었다. 가옥들 사이로 나 있는 넓은 길 끝에 웅대하기 그지없는 남문(숭례문)이 보였다. 석조로 된 무지개문 위로, 2층으로 된 우람한 기와지붕은 마치 두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펼치고 포개 앉은 것처럼 찬란했다. 대구의 영남제일문과 모양은 비슷했으나 규모가 컸고, 뚜렷한 기왓골과 양 옆으로 이어진 성곽의 단단함도 인상적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사대문 안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전차를 타고 가라는 서석림의 말과는 다르게 남대문 주변에는 전차가 없다는 것을 계승은 도성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 알게 되었다. 시장했고, 허리가 아팠다. 옷 등판에 숨겨둔 취지문이 훼손될까봐 기차에서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총을 지니고 있는 장상만도 긴장이 풀린 표정이었다. 도성 안을 구경하면서 계승에게 말을 걸거나 난전 앞에서 물건 값을 물어보고는, 대구와 비교하기도 했다. 길을 물어서 전동(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신문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문에서부터 줄곧 길이 넓었고 곧게 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문사는 2층 목조 건물이었다. 안내를 받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므로 복도가 컴컴했다. 양기탁을 뵈러 왔다고 하자, 한 젊은이가 방에서 나와서, 그가 외출했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일러주었다. 계승과 장상만은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 양기탁을 기다렸다. 양기탁이 다른 두 사람과 같이 신문사로 들어온 것은 방마다 불이 켜지고 있을 때였다. 물론 계승은 양기탁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2층으로 올라오는 세 사람에게 양기탁을 뵈러왔다고 하니까 그 중 하나가 "내가 양기탁이오." 하고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요?" "대구 서석림 선생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용익 공을 뵈러왔다고 하면 아실 거라 하셨습니다." 양기탁의 눈이 반짝했다. 둘은 양기탁을 따라 신문 조판실로 들어갔다. 여러 사람들이 조판과 교열을 하는 곳을 지나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계승은 발소리도 낼 수 없었다. 네댓 평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 신문을 짜고 있는 광경은 여간 감동적이지 않았다. 여기서 나온 신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지 않는가. 이 협소한 곳에서 번져나가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비분강개하고, 격렬하게 토론하고, 전국토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전깃불이 켜져 있는 것도 놀라웠다. 초량에서 전깃불을 보았지만 신문사에서 활자를 비추는 불빛은 어딘가 섬세해보였다. 대구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때였다. 내실에 있는 탁자에 다섯 사람이 앉았다. 계승과 장상만이 이쪽에 앉고 건너에 양기탁과 다른 두 사람이 앉았다. 곧 알게 되었지만 한 명은 신문에 논설을 쓰는 유명한 신채호고 다른 사람은 이준이란 이였다. 계승은 신문을 통해 늘 신채호의 글을 보았지만 그의 나이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국채보상이 이토록 전국을 흔들 줄 몰랐어요." 계승은 양기탁의 말이 자신을 칭찬하는 것처럼 들려서, 신문사 조판실을 지나면서 가졌던 위축감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신문에 이름이 실린 출연자만 해도 지금 십만 명이 넘었습니다." "오호!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신채호가 탁자를 두드리며 경탄했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목숨을 잃었습니까.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저항입니다." 양기탁이 양손을 펴고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 앉은 얼굴이 희고 둥근 이준이란 사람은 고개만 끄덕였는데 어딘가 침통한 빛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계승은 옷 속에 감춘 취지문을 보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옷을 뜯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계승은 이용익 군부대신을 언제 뵐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양기탁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용익 대감은 지금 나라에 없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서석림 공에게 편지를 받았어요. 임계승이라 했소? 이름을 기억하지요. 오늘밤에 바로 경운궁으로 들어가세요." "제 옷 속에 취지문이 있습니다만." 계승은 자신의 신분을 확인해달라는 뜻으로 벌떡 일어나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등을 가리켰다. 쉰 살쯤 된, 가장 나이가 많은 이준이 손을 저으며 앉으라고 했다. 이준이 약간 턱을 낮추고 긴밀한 어조로 계승에게 속삭였다. "지금 밖으로 나가서 숭례문 방향으로 걸어가세요. 길은 신경 쓸 거 없어요. 아무 길이나 가면 돼요. 얼마쯤 가다보면 넓은 도로를 만나는데, 그곳으로 전차가 다닐 거요. 전차 길을 따라서 서쪽으로 줄곧 가시오. 한참 가다가 광화문이 보이는 곳에서 멈추고,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요. 스무 발짝 걸어가 모자를 벗고 왼손에 들고 있으면 누군가가 나타날 거요. 그 사람을 따라 가시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점점 두려워진 계승은 간신히 예, 하고 대답했다. "거기서 궁이 멀지 않아요. 왜병들이 많이 깔려 있소. 천연덕스럽게 행동해서 저들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하시오. 자, 일어납시다." "제게 총이 있습니다. 총을 지니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일어나면서 장상만이 물었다. 이준이 장상만을 돌아보았다. "그건 이따 만나는 사람에게 물어보시오. 그리고, 궁에는 한 사람만 들어가야 합니다." 계승과 장상만은 밖으로 나왔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둘은 방향을 가늠한 뒤, 골목을 내려갔다. 얼마가지 않아 넓은 길이 나왔고 그곳으로 전차가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은 대구와는 다르게 청결했다. 장옷을 어깨까지 올린 여자들과 터벅머리의 사내들, 갓을 쓴 이들이 길가에 죽 늘어서 전차를 기다렸다. 한인들보다 오히려 일인들의 수는 적어보였다. 얼마 걷지 않아 느릿느릿 다가오던 전철이 그들 앞을 지나갔다. 둘은 자신 있는 걸음으로 바지런히 전차를 따랐다. 긴장해서 들은 탓인가, 좀전 이준이란 사람이 일러준 길이 마치 지도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거리에 이르자 정말 오른 편 길 끝에 웅장한 대문이 보였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이었다. 이준이 지시한 대로 둘은 첫 번째 골목으로 접어들어서 스무 걸음을 걸었다. 그 골목은 좀 번다했다. 그렇지만 누군가 미행을 하거나 의심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둘은 시장기마저 잊고 초조해 하면서 모자를 왼손에 들고 십여 분쯤 서 있었다. "아저씨, 절 따라오세요." 애들이 모여 칼싸움을 하고 있는 골목에서 조무래기 하나가 톡 튀어나오더니, 계승과 장상만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계승은 깜짝 놀랐다. 밀정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사방으로 눈을 굴리며 나타날 줄 알았던 터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계승과 장상만은 꼬마에게 사실을 확인할 틈이 없었다. 시커멓게 때 전 무명옷을 입은 꼬마가 저쪽 골목으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대로는 곧았지만 골목은 꼬불꼬불했다. 낮은 구릉을 따라 작은 집들이 빽빽했다. 그러나 일반 가옥 지대는 곧 끝이 났고, 서양식 건물들이 곳곳에서 치솟아 있었다. "저기 다리가 보이죠? 경운궁에서 경희궁을 잊는 구름다리예요. 저 다리 밑, 두 번째 교각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여긴 으스스해요. 경운궁은 폐하께서 계시는 곳이죠. 길바닥에 침이라도 뱉으면 당장 목이 싹 달아날 거예요." 꼬마는 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는 오던 길로 뛰어가 버렸다. 계승은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저기까지 갈까. 주변을 둘러본 뒤, 둘은 다리 밑을 따라가지 않고 길을 에둘렀다. 지나가는 행인처럼 먼저 서대문 쪽으로 옮겨가서 다리 밑으로 접근했다. 푸른 옷에 짧은 상투를 쓴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2017-09-07 17:22:38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1>-엄창석

제14장 길게 뻗은 레일이 아침 햇살을 게으르게 반사하고 있었다. 높이 솟은 첨성대 모양의 급수탑에서는 허연 증기가 평화롭게 피어올랐다. 평지에 가로 놓인 두 가닥 레일이 초량에서 만주까지 이어져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병사들과 무기를 태우고 러시아 전쟁터로 질주할 때만 해도 기차는 거대한 독사(毒蛇) 같았다. 언제 어디서 한인들이 공격해올지 몰라 칸마다 초병들을 세웠고, 독을 뿜듯이 증기를 푸우푸우 토하며 산야를 달렸다. 이제는 병사들이 사라지고 객차에는 성장(盛裝)한 귀부인과 신사들과 유람객들이 앉아서 한가롭게 신문을 뒤적였다. 이런 와중에도 대구는 그렇지 않았다. 1907년 4월. 도시 가운데 있는 성의 안과 밖은 격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정거장 건너편으로 펼쳐지는 넓은 담배 밭은, 초봄에 밭두렁을 태운 뒤로 파종을 하지 않은 채 버려두고 있었고, 향교 너머의 담배 밭에는 흙은 고르고 파종을 하느라 일꾼들이 떼로 모여 있었다. 며칠 사이에 도시의 풍경은 쪼개진 상태였다. "하필 이런 때에 떠나는 군." 기차를 기다리다가 장상만이 말했다. 계승도 가방을 품에 안으며 역사(驛舍) 쪽을 돌아보았다. 역사의 낮은 지붕 위로 먼지가 옅은 안개처럼 번졌다. 사흘 전, 박중양은 남은 성곽을 헐기 위해 주민에게 부역령을 내렸다. 지난 늦가을에는 부산에서 인부를 데려와 야밤에 몰래 성곽을 헐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성 안팎에 포고문을 붙였다. 성이 위험에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면서 조정의 명령까지 떨어졌다고 했다. 성을 본격적으로 허물기 하루 전, 그러니까 그저께 마욱진의 지게부대가 나서서 서쪽 성벽 철거작업을 시작했다. 철거 부역령에 갈등하던 사람들이, 마욱진의 부대가 앞장서 작업을 시작하자 철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성을 철거해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해. 붕괴 위험 때문이란 거야. 반면에 성을 철거하고 나면 일인 상인들이 대구를 먹어치울 게 뻔하지. 하지만 그건 하나의 가정일 뿐이고, 심정적인 거잖아." "왜 지금 성이나 헐자고 하는지 모르겠어. 국채 보상으로 도시가 뜨거워져 있는데 말이야." "박중양은 뱀처럼 교활해. 가는 곳마다 이토 히로부미처럼 국채보상을 하는 한국민들이 갸륵하다고 떠벌리면서 성은 위험하니까 철거해야 한대. 뭔가 정신적인 것을 노리고 있어. 성 자체가 왜침(倭侵)을 막았던 수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거든. 도시민들 가슴 속에 담긴 그 기억을 제거하겠단 거지......"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얘기였다.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수천 명의 의병을 제압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뜻이다. 저항과 압제, 음모와 살육이 횡행하고 있지만 시골의 농민들과 도시의 상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공기의 흐름이었다. 정신적인 투쟁이란 면에서 서석림도 이를 놓치지 않았다. 석달만 담배를 끊으면 국채를 갚을 수 있다는 충정의 뒷면에는 보부상 출신의 예지가 담겨 있는 게 아니던가. 석달만 끊으면 사람들이 담배 맛을 잃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인 상인들이 절반쯤 몰락할 터였다. 이 무렵 대구는 일인들이 경작하는 담배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배 밭은 무려 70정보나 되었다. "국채를 다 갚는 날에는 모든 백성이 모여서 축하 담배를 피우자"는 어느 신문의 지지 논평은, 그러니까 금연 보상의 깊은 뜻을 모르고 나온 말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계승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갈색 가죽 가방을 손에 들고 있지만 황제에게 보여줄 국채 보상 취지문은 상의 속에 숨겨두었다. 상의 등판에 바느질을 하여 거기에 석재가 쓴 취지문을 넣은 것은 서석림의 의견이었다. "가방을 수색 당할지 몰라. 취지문을 목숨보다 귀히 여겨야 하네. 폐하의 각별한 뜻이 계실 거네." 계승은 서울에 가본 적이 없었다. 정말 아무 일 없이 궁궐에 이를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황제의 권력보다 일본 통감부가 더 윗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게 지금의 상황이 아닌가. "장상만과 같이 가겠습니다. 그는 총을 잘 다룹니다. 무슨 변고가 닥치면 그가 저를 엄호할 것입니다." 서석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매일신보를 찾아가게. 전동에 있네. 서울정거장에서 전차를 타면 될 거야. 신문사에 들러 총무 양기탁을 만나서 은밀히 이용익 대감을 뵐 수 있느냐고 물으면 되네." 가슴이 벅차올랐다. 양기탁이 누구인가. 베델이라는 영국인이 설립한 대한매일신보를 실제로 운영하는 이가 양기탁이었다.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대한매일신보에서 연일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지지 논설을 띄워 이 운동이 전국으로 퍼지게 된 것이다.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양기탁과 신채호의 글을 애독했었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유명한 논설로 정간을 당한 후, 대한매일신보가 저항 언론을 대표했는데 그 핵심적인 인물이 양기탁이었다. 매일신보의 대구 지사가 광문사이니까 계승은 매일 그 신문을 볼 수 있었다. 기차가 괴성을 지르며 다가왔다. 기차 기관실에서 허연 증기가 펑펑 쏟아졌다. 일곱 냥의 기차는 거대한 몸체를 지네처럼 철컹철컹 순차적으로 멈추며 주변을 압도했다. 계승과 장상만은 세 번째 객차에 올랐다. 객차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표를 보고 좌석을 찾아 앉으면서 계승은 누가 한인인지 일인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지난해만 해도 옷차림과 머리 모양만으로 쉽게 알아차렸다. 이즘엔 한인들도 짧은 머리를 하고 프로코트를 입는 이들이 늘어났다. 한인들이 따라 프로코트를 입으니까 일인들은 되레 기모노나 하오리를 걸치는 쪽이 많아졌다. 아니면 화려하게 양장을 하고 달팽이 같은 모자를 쓰거나. 돌아올 수 있을까. 이 길이 마지막이 아닐까. 계승은 옷에 감춘 취지문을 의식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죽어도 괜찮아! 그렇게 작심하고 떠나는 길이지만 애란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서 다시 돌아오고 싶었다. 애란과 살려고 얻어놓은 집을 나흘 동안 수리하고 청소를 했다. 헐어진 벽에 흙을 다져넣고 깨진 부엌 축담에는 힘들게 시멘트까지 구입해서 발랐다. 연금 수납 등을 마치고 오다 보니 수리를 할 때는 대개 저녁 이후였다. 사방에 호롱을 피워서 일을 하는 데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보다 어두운 가운데서 호롱의 불빛 속으로 걸어다니는 그녀의 몸이 말할 수 없이 뜨거웠다. 계승은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문밖 어둠 속에서 그녀가 불쑥 나타났고, 불빛에 드러난 얼굴이 영롱했고, 치마 속으로 불빛이 너울너울 들어가 엉덩이의 윤곽을 사뭇 그려냈다. 흙이 묻은 그녀의 흰 팔과 뺨, 그에게 다가와 속삭이던 흰 치아와 입 냄새, 부드러운 손바닥, 젖은 듯한 눈, 일을 끝낸 뒤 방과 부엌에서 나누었던 몇 차례의 사랑.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냥 폐하께 취지문을 전해주고 오는 거지. 이런 것을 우편으로 부칠 수는 없잖아. 장상만은 옆에서 팔짱을 끼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위험할지 몰랐다. 대화를 엿듣던 옆 사람들이 어떤 낌새를 느낄지 알 수 없었다. 황간을 지나면서 주먹밥을 나눠 먹을 때도 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신문사까지는 장상만과 동행하지만 아마 입궐은 혼자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신문사에서 만날 양기탁의 의견을 따를 예정이었다. 기차는 40여 킬로미터마다 정지했다. 역에서 승객을 태우기도 했지만 증기기관을 돌릴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높은 급수탑에 옆에 멈춘 기차는 긴 수관을 걸치고 오랫동안 대기했다. 기차가 멈춰 있으면 몹시 불안했다. 의병들이 기차에다 대고 총질을 할지 몰랐다. 느닷없이 군인들이 들어와 수색을 할는지도. 굳이 그와 장상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해도, 쫓기는 의병이 기차에 타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까지 가는 동안 기차는 스무 번쯤 멈췄다. 의주까지 간다면 간이 콩알만 해질 것 같았다. 서울에 도착할 즈음엔 차라리 무덤덤해졌다. 다섯시가 조금 지나 서울정거장에 진입했다. 역사는 규모만 클 뿐 대구정거장이나 다를 게 없이 짧은 기둥 위에 얇은 함석지붕이 얹혀 있었다. 아주 볼품없는 역사지만 사람들은 정말 많았다.

2017-09-04 16:06:26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40>-엄창석

"이러지 말아요!" 금릉은 휘몰아치는 격정에서 빠져나온다. 억센 동작으로 그를 떠민다. 남자의 뻔뻔스러운 짓이 까닭 모르게 그녀를 안도하게 했지만, 그것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막무가내로 들개처럼 몸을 섞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발 물러선, 불빛에 비친 남자의 눈은 고양이 눈과 같다.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갑자기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를까. "기억나요?" 금릉은 애처롭게 그를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인다. "삼봉산(수도산)에 놀러 갔을 때 말이에요."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본다. 봄날이었어요. 우리가 앉은 바위 주위로 개나리나 목련이 향기를 뿜고 있었으니까. 오빠가 방각본 열녀춘향전을 펴고 내게 읽어주었던 거 기억하나요? 새로 부임한 사또가 27명의 기생을 하나씩 점고(點考)하는 대목이 있었잖아요. "비온 후의 동산, 명월이" 하고 부르면 기생 명월이 "점고 맞고 나가요" 대답하며 사또 앞에 부복했지요. 27명이나 되는 기생의 이름은 모두가 은유였어요. 오빠가 서책에 손가락을 끼우곤 말했어요. "명월(明月, 밝은 달)을 비가 온 후의 동쪽 산(東山)으로 비유했네. 특이해." 오빠는 놀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요. "밝은 달을 그냥 산이라 하지 않고 왜 비에 젖은 동쪽 산이라고 했을까?" 난 모르겠다고 했어요. 정말 알 수 없었어요. 난 그때 열한 살이었잖아요. "묻노라 술집이 어드메뇨, 목동이 아득히 먼 곳을 가리키네, 행화(살구꽃)." 난 그저 27명 기생들의 이름에 붙는 비유가 간드러져 깔깔 웃고 있는데, 오빠는 내 등에 팔을 두르면서 "슬프다 그지?" 음울하게 내뱉은 그때 당신 음성을 기억하나요? 기생이 되고 나서야 그 말을 이해했어요. 명월이 왜 젖은 동쪽 산이 되어야 하는 건지요. 그것은 정말 슬펐고, 그래서 당신이 자주 떠오르고는 했지요. 그 남자가 지금 그녀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남자는 들개처럼 파렴치할 뿐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어떤 격분에 싸여 그녀를 껴안으려고 한다. 금릉도 7년 만에 그를 만나자 슬픔, 회한, 후회가 격하게 밀려왔다.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와 몸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격정과 남자의 격정은 성질이 다르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곱사등이가 죽었다고요? 이제 당신도 잡혀 죽을지 모른다고요? 그것이 여자 몸을 탐할 이유가 되나요? 교활한 남자들은 항상 절박하다고 핑계를 대지요.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순수한 상태로 사랑할 수는 없나요? 왜 이리 까다로워. 기생 주제에. 이제 유곽에 나가 몸이나 팔 텐데. 그가 그렇게 생각할까. 금릉은 불현듯 두려워진다. 그가 떠나갈까 두렵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까다롭게 굴고 싶어요. 당신에게만요! 금릉은 그 방을 빠져나온다. 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삼봉산에서 책 읽었던 때가 기억나." 아침에 그 방에 들어가 보니 계승은 떠나고 없었다. 금릉은 새벽에 있었던 그와의 일이 꿈결 같다. 미명이 어슴푸레하게 스며들 때 다시 그의 방을 찾아갔던가.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계승도 깨어있었다. 긴 입맞춤, 남자의 눈빛, 뺨, 가슴, 그의 성기가 매화나무 가지 끝에 맺힌 순처럼 붉고 고왔다고 금릉은 되새긴다. 이른 아침부터 골목은 부산했다. 2월 하순에 접어들었지만 음력으로는 정월 이레다. 초하루가 지나고 첫 번째 서는 날이었다. 종이 장수, 포목 장수, 옹기 장수들이 골목을 지나갔고 계승은 그들 틈에 섞여 농루를 빠져나간 것 같았다. 오후가 되어서 금릉은 몇몇 기녀들과 함께 불이 난 곳으로 나가본다. 우현서루 앞을 지나 정거장 쪽으로 얼마 가자 이와세 상점이 사라지고, 검은 빈터만 남은 게 보인다. 반듯한 일식 지붕인 이와세 상점이 전소한 모양이다. 그 자리에 기둥 몇 개가 꽂혀 있고 드문드문 잡동사니들이 흩어져 있다. 마욱진의 지개 부대가 와서 화재 뒤처리를 하고 있다. 지게 부대가 40명이나 되니까 잿더미를 지게에 실어 걷어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듯하다. 오히려 이와세 상점 옆에 붙은 두 채의 가옥이 무너질 듯 서 있는 게 볼썽사나웠다. 그 두 채에도 불이 붙었다. 마욱진의 지개부대는 불에 반쯤 탄 건물을 철거하려고 여기저기 흩어진다. 얼마 전에 영천에서 화적에게 습격을 당한 마욱진은 인력거에 앉아 철거를 지시한다. 동문 앞 병원에서 보름가량 치료를 받고 나왔다는데 아직도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다. "언니, 오돌매가 불을 질렀다는데 맞아?" 설루는 재가 날린다는 듯이 코를 싸안으며 묻는다. "누가 그래?" "저 순사가 내게 말해줬어." 이와세 상점 빈터에 일본 순사가 모여 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아." 금릉이 설루를 나무라듯 빤히 눈을 뜬다. 이와세 상점이 불에 탔지만 한인들 가운데는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없을 거다. 성을 무너뜨려 유곽을 만들려는 이와세를 아무도 편들지 않는다. "난봉쟁이들은 애가 타겠네. 유곽 설치가 늦어진다고 말이야." 설루가 까르르 웃는다. 설루의 말처럼 유곽 설치는 늦어질 거다. 유곽 사업을 주도하는 이와세가 자기 상점에 불이 났으니 한동안 정신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불을 지른 게 누군지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인들은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 것 같았다. 도시가 시끄러워진 것은 다시 이틀이 지나고서였다. 금릉이 백당지(白唐紙)를 사려고 큰시장으로 갈 때였다. 이즘 들어 기루에 손님들이 줄어들어, 앵무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서 기녀들이 골패 놀음을 하곤 했다. 장죽을 입에 물고 골패를 겨누며 차라리 유곽이나 얼른 세우지, 하는 자조 섞인 농담을 내뱉었다. 금릉은 손님이 없는 시간에 방에 앉아 대나무와 난을 쳤다. 색재에게 배운 운미난(芸楣蘭)이나 석파난(石坡蘭)에 빠져들었다. 그러다보니 종이가 남아나지 않았다. 금릉이 큰시장 길목인 달서교에 이르렀을 때 웬일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걸 보았다. 인구가 밀집한 계산성당까지 사람들이 길게 이어진다. 시장이 섰나? 아직 대시(약령시)가 열릴 때는 아니다. 달서교 밑을 흐르는 개천을 따라서 둑 위로 마치 흰 나무들이 우거진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큰장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뭔 일이에요?" 앞에 가는 아낙에게 묻는다. 아낙이 손사래를 친다. "몰라. 사람들이 가잖아. 그냥 가보는 거지." "구경거리가 있어요?" 간혹 서양 사람들이나 피아노와 종탑 같은 서양의 진귀한 물건들이 도착할 때가 있었다. "저 앞에 상여가는 거 보여? 오늘 곱사등이 오돌매 장례야." 옆에서 사내 하나가 손을 뻗어 앞을 가리킨다. 멀리 닭시장에 상여 같은 게 보인다. 금릉은 깜짝 놀란다. 시장이 설 때의 활기와 다르게 사람들이 어딘가 흐느적거리며 걷는 것을 본다. 아직 쌀쌀한 데도 젖가슴을 내놓은 아낙들, 상투를 쓴 노인들, 새카맣게 때 전 옷을 꿴 사내애와 계집애들이 발을 끌면서, 달서교를 건너기 위해, 방천둑에서, 계산성당 앞에서, 읍성 서문에서, 골목에서 앞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2017-07-27 15:46:34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9>-엄창석

이상도 하지......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가 왜 한밤중에 농루 후원으로 숨어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다. 이 일로 자신에게 어떤 불행한 여파가 닥친다 해도 두렵지 않다고 그녀의 마음이 속삭인다. 그가 옆방에 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른 일들은 하찮게 여겨진다. 청도에서 밀양으로, 언양으로, 부산으로 돌아서 왔다고 했잖아. 아라사(俄羅斯)까지 날개 치며 갔다가 반도로 내려온 두루미처럼 말이지. 금릉은 날개 안으로 바람을 품으며 우아하게 내려앉는 두루미를 잠시 생각한다. 그녀는 목욕방으로 손을 내밀어 옷을 내려놓고 다시 문을 닫는다. 계승이 목간통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서그럭서그럭, 그가 옷을 입는다. 잠시 기다렸다가 금릉이 목욕방 문을 연다. 그는 좀 전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마치 목욕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녀가 준 옷을 껴입긴 했지만, 초췌한 얼굴로 꺼벙하게 움츠린 그에게서 불길한 동요가 느껴진다. 그가 떨고 있다. 감추려는 듯 애써 입술을 깨물고 있으나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그와 그녀 사이에 괸 공기를 미세하게 흔든다. 그가 나타남으로 그녀에게 다른 모든 것이 지워졌지만 그는 여전히 다른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금릉은 느낀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금릉이 묻는다. 그의 퀭한 눈이 그녀를 보다가 옆으로 흐른다. "곱사등이가 죽었어. 말들이 쓰러진 곱사등이를 짓밟았어." 그의 말이 끝난 뒤에야 간신히 말뜻을 알아듣는다. 그녀는 실망한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은 것은 그게 아니다. 계승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것이다. 밤중에 담을 넘어 올 만큼 간절하지 않았을까. 금릉은 그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말은 사람을 밟지 않아요." 그녀는 짜증스럽게 그의 말을 부정한다. 말은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가 없다. 기수가 떨어져도 밟히지 않도록 겅중 뛰어오르는 게 말이었다. 어이가 없다. 밤중에 찾아와서 하는 소리가 고작 그거냐고 내쏘려다 그만 둔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차갑게 말한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찾아온 거 미안해." "그럼, 돌아가요." "지금 나갈 수 없어. 밖에 헌병들이 깔려 있을 거야." 그가 두려움에 싸여 고개를 젓는다. 왜 그런 생각이 들까. 나갈 수가 없다는 말에서, 마치 그가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거라고 금릉은 제멋대로 해석한다. 빈방은 많았다. 멀리서 온 손님들은 며칠씩 기루에서 머물기도 했다. 여관이 곳곳에 생기고 일인들이 운영하는 요릿집들이 늘어나, 이즘 들어 자고 가는 손님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따라와요. 발소린 내지 말아요." 금릉이 앞장서서 장마루를 걷는다. 그가 따라온다. 목욕방과 몇 달 전에 떠난 자운영이 썼던 빈 방 사이를 걸어, 후원 쪽에 걸친 뒷방으로 들어간다. 온돌이 연결되어 방은 따뜻하다. 호롱을 켜고, 시렁에 개켜둔 이불을 내린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예요, 금릉이 한숨 쉬듯 말하고 등을 돌린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그가 팔을 잡아챈다. 뒤에서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린다. 금릉이 뒤를 돌아본다. 그가 두렵고 초췌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본다. 그의 표정이 혼란스럽다. 울먹이는 듯하다가 불안해 하다가 애원하는 듯하다. 금릉은 팔이 잡힌 상태로 그의 턱밑에서 그를 쏘아보며 다시 묻는다. "뭔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요." "곱사등이가 죽었지. 이젠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어."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이른 아침에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여길 나가세요." 금릉은 비아냥거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는 잡힌 팔을 빼낸다. 이거 놔요. 다시는 나를 찾지 말아요. 그녀는 속말을 뇌까리며 외면한다. 그녀가 팔을 거두자 그의 손아귀가 가볍게 풀린다. 그녀는 무참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린 남자에게 견딜 수없이 모욕을 당한 기분이다. 그때 그의 초췌한 눈빛이 갑자기 이글거린다. 그가 돌아려는 금릉의 젖가슴을 와락 움켜잡는다. 그녀는 얼어붙는다. 무슨 일일까. 남자의 파렴치한 짓이, 그 순간 쪼개져 있던 그녀의 감정 한 틈을 매우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금릉은 당혹스러워서 어깨를 약간 움츠린다. 거부하지는 않았다. 남자가 손으로 얼굴을 잡고 덮치듯이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그녀의 입술 위에 남자의 입술이 거칠게 움직인다. 금릉은 눈을 감는다. 어릴 때부터 꿈꾸어온 그와 입맞춤은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그러니 사랑스럽지가 않았다. 황홀하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사랑스러움이 꺾어지면서, 갑자기 죽음 같은 격정이 몰려왔다. 하늘로부터 소나기가 거세게 쏟아지는 것 같았다.

2017-07-24 15:33:45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8>-엄창석

제9장 "밖으로 나가지 마." 여자들 다섯 명이 내의 차림으로 초연 언니 방에 모인다. 설루, 은낭화, 옥매, 금릉. 다른 여자들은 자기 방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바깥의 동향을 살피고 있을까. 설루가 대문 밖으로 나가보겠다고 하자 초연 언니의 말이 떨어진다. 모두 우현서루 동편에 불이 난 걸 알고 있다. "일인 상점들이 있는 곳이잖아." 누군가 두려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렇지. 거기엔 일인 상점이 많이 모여 있어. 금릉은 일인 상점이란 말에 맺힌 어감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 말은 이전과 다르다. 어쩌다 일인들이 들어와 작은 가게를 열어 눈깔사탕을 팔았거나 빈궁한 철도 공사 인부들이 나타났지만, 어느새 성곽 북편 땅을 거의 차지했다. 이제는 도시를 휩쓸고 있다. 마치 바다 가운데서 힘을 얻어 해안을 밀어붙이는 해일처럼 일인 상점들의 위력은 갈수록 드세졌다. 그래서 불길하다. 하필 일인 상점이라니. 누군가의 실수로 난 화재라 해도 한동안 뒤숭숭할 게 틀림없다. 만약에 그들을 원망하는 한인이 불을 질렀다면 어떻게 될까? 금릉은 진저리를 친다. 여자들은 불안한 눈짓으로 서로를 확인한다. 눈을 깜빡이며, 입술에 희미한 웃음을 띄우면서. 그녀들은 무엇을 확인할까? 그녀들은 최근 사태가 주는 변화에 자신들이 가장 앞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변화에 제일 민감한 게 자신들이다. 하지만 단지 그녀들만 민감할 뿐이다. 누구도 그녀들의 불안과 상처를 눈치 채지 못한다. 정원에 아름답게 피어서 방문객들의 눈길을 받다가 어느 날 서리를 맞아 대궁까지 꺾여버려도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는 꽃처럼. 어린 여자들은 하나씩 슬그머니 초연 언니 방을 빠져나간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흰 그림자들이 문지방을 타넘고 장마루로 스르르 이동하는 것 같다. 금릉도 자신의 방으로 걸어간다. 방문 앞에서 언뜻 걸음을 멈춘 것은 골목 밖으로 횃불이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박. 따박. 따박. 어둠이 한주먹씩 날아오는 것 같다. 말발굽이 바닥을 차는 소리였다. 단호하고 자신감이 밴 말들의 발굽 소리. 그녀는 방 뒤에 붙은 좁은 도장으로 들어가서 봉창에 눈을 댄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은 믿을 수 없어한다. 그녀의 시선이, 그녀에게 일순, 마비를 일으킨다. 골목이 아니라 담장 안이다. 본채에서 길게 돌출된 굴뚝 연통로 옆에 숨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일꾼 김씨가 아니다. 그는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갔다. 농루에 숙식하는 사내라고는 밥을 얻어먹고 잔일을 거드는 소년 둘뿐이다. 잠깐의 마비에서 풀려난 금릉은 굴뚝에 몸을 가린 남자가 임계승임을 알아챈다. 계승은 골목 밖으로 지나가는 불빛을 주시하면서 몇 발짝 앞에 묻힌 김칫독으로 뛰어들까 기회를 엿보는 것 같다. 아니면 망설이고 있는지 모른다. 두 번째, 빈 김칫독에 뚜껑이 열려 있다. 횃불이 지나가고 골목은 다시 캄캄해진다. 금릉은 뒷방을 나와 후원으로 통하는 좁은 마루로 살금살금 걸어간다. 맨발로, 본채 뒷처마 아래를 따라가면서 일부러 기척을 낸다. 낮은 연기 통로 너머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저예요. 놀라지 마세요." 계승의 텁수룩한 머리가 기와로 덮인 연기 통로 위로 쓰윽 올라온다. 두엄 냄새가 확 끼친다. 시궁창에서 기어 나온 양 그의 옷이 더럽다. 금릉은 자신의 침실 옆방으로 그를 데려간다. 그가 머뭇거리다 잠자코 따라온다. 그녀의 침실 옆방에는 대나무 목욕통이 그대로 놓여 있다. 좀 전, 불 소동이 나기 전에 그녀가 목욕했다. 이날따라 일하는 소년들이 감기가 들어서 목욕통의 물을 비우지 못했다. 아침에 치우라고 이른 것이다. 옆 침실에 밝혀놓은 호롱 불빛이 목욕방 장지문에 은은하다. 금릉은 어슴푸레함 속에 오도카니 선 계승을 힐끗 보다 고개를 돌린다. "물이 식었지만 씻으세요." 입술에 손가락을 붙이며 낮은 소리로 말한다. 조용히 씻어야 한다는 뜻이지만 그보다 자신의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신호에 가깝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그가 대답을 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는다. 그제야 금릉은 계승을 바로 쳐다본다. 방 사이의 창호를 통과한 엷은 불빛이 그의 가슴과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를 비춘다. 좁은 공간에서 그와 둘만 있을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그녀도 이제 열아홉 살이다. 마치 그의 나이를 따라잡은 듯이 성숙했다. 그런데 왜 그의 몸에서 시궁창 냄새가 풍기지? 야윈 뺨과 쑥 들어간 눈두덩에 초췌함과 불안이 가득하다. 뭔가 바깥의 사태와 관련 있다는 것을 직감하지만 거기서 생각을 멈춘다. 그녀가 말한다. "옷을 가져올게요." 당연히 사내 옷이다. 기루에는 사내 옷이 여러 벌 준비되어 있다. "애란아." 어둠 속에서 그가 부른다. "애란이 아니에요. 금릉이라고 부르세요." 그녀가 고개를 젓고 장마루로 나온다. 잠시 후 사내 옷을 가지고 침실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옆방에서 찰랑찰랑하는 물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옷을 가슴에 안고 숨을 멈춘다. 물이 찰랑거리는 사이로 몸을 문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얼굴이 상기된다. 그러나 창호지에는 불빛만 가득하고 결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그럴 때가 있었다. 계승을 떠올리면 그가 사라지고 그저 백색(白色)만 펼쳐질 때가 있었다. 목소리, 손바닥, 머리카락, 눈빛이 지워져서 더 이상 회상해볼 게 없었다. 그는 7년 속으로 사라졌어. 한번이라도 소식을 주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거야. 지금 저 백색의 문을 열면 그는 존재하지 않고 물소리만 홀로 찰랑거리고 있을 것 같았다. 금릉이 장지문에 손을 댄다.

2017-07-19 15:11:08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7>-엄창석

노적가리 속이 굳은 흙더미처럼 딱딱했다. 몸을 집어넣는데 얼굴이 할퀴고 가슴이 긁혔다. 볏단 속은 꽝꽝 얼어 있었다. 계승이 얼은 볏단 더미 사이를 비집고 지렁이처럼 파고들었다. 볏단이 꿈틀거리는 게 보이지 않을까. 이렇게 딱딱한 건 눈이 내렸기 때문이겠지. 볏짚이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물러지고 흐무러지겠지. 그래야 봄이 되면 제대로 썩은 거름이 되지 않을까. 어이없게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계승은 노적가리에 몸을 숨긴 채, 밖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허리와 다리를 비틀어서 언제든지 뛰쳐나갈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앞에서 들렸다. 계승은 볏짚 틈으로 눈알을 대고 밖을 훔쳐보았다. 일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횃불을 휘둘렀다. 어디를 얻어맞았는지 오돌매가 쓰러져 있었고 갑자기 일인들이 오돌매를 버려두고, 불이 난 장소로 우르르 달려갔다. 이와세 상점 쪽에서 화염이 치솟는 게 보였다. 불꽃놀이를 하듯이 캄캄한 창공으로 화염이 솟구쳤다. 놈들이 돌아오기 전에 곱사등이를 업고 도망을 쳐야겠다 싶었다. 계승이 노적거리에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불이 난 이와세 상점 쪽에서, 어둠속으로부터 거대한 빛 덩어리가 왈칵 튀어오르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이쪽으로 달려왔다. 말을 탄 일본 병사들이었다. 수비대 군복을 입고 한손에 총을 쥔 채 말을 타고 달려왔다. 뒤따라온 병사가 말 위에서 횃불을 오돌매에게 비추었다. 바닥에서 오돌매는 달팽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맨 앞의 병사가 말 등에서 총구를 아래로 내리고 오돌매를 겨냥했다. 계승의 눈앞에서 횃불이 일렁였다. 불과 2미터 거리였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어둠의 한가운데, 곱사등이와 말의 다리가 오롯이 드러났다. 오돌매는 비쭉 튀어나온 등을 위로 웅크리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기둥처럼 서 있는 붉은 마각(馬脚)은, 마치 아름다운 듯이 잔털까지 불빛을 받아 미세하게 반들거렸다. 총구가 위로 올라갔고, 말이 뒷걸음을 쳤다. 병사가 말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횃불은 여전히 곱사등이를 비추고 있었으므로 병사의 말은 눈앞에서 사라진 듯 보였다. 왠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그때였다. 얼마쯤 뒤로 물러섰던 말이 앞으로 치달았다. 붉은 마각은 오돌매의 짧은 다리와 튀어나온 등을 짓밟았다. 검은 발굽이 목덜미에도 떨어졌다. 오돌매는 몸을 비틀었고, 말은 마치 구르는 작은 바위에 올라서려는 듯이 집요하게 오돌매를 유린했다. 배에서 내려오는 붉은 다리와 끝에 달린 검은 말발굽은 어떤 잔혹성을 반복하듯이 이상스러울 만큼 작은 몸체에 집착하고 있었다. 계승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눈을 감고 있었던가. 오돌매가 그에게 이와세 상점에 불을 질러라 해놓고 걱정되어서 뒤쫓아 왔을까, 아니면 망을 봐주려고 했는지 모른다. 달리지도 못하는 놈이...... 하지만 그딴 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돌매가 말에 짓밟히는 것을 보고 뛰쳐나가 말의 배라도 걷어차고 말겠다는, 잠시 치솟던 용기도 사그라졌다. 모든 게 허물어졌고 무의미했다. 볏짚이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거름이 되듯이, 자신도 여기서 얼었다 녹았다는 반복하면서 거름의 일부가 되겠거니 했다. 바깥이 고요했다. 수비대들이 떠난 듯했다. 계승은 노적가리에서 기어 나왔다. 주위는 깜깜했다. 오돌매는 죽었을 것이다. 시신을 말에 싣고 갔을까. 칠흑 속이라 길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그곳에 아직 오돌매가 쓰러져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잘 알 수 없었다. 계승은 손을 더듬어 오돌매가 있는지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이와세 상점은 아직 불길이 잡히지 않은 듯했다. 사람들이 우글대고 있는 게 멀리 보였다. 계승은 우현서루 앞으로 걸어갔다.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가끔씩 수비대들이 말을 타고 지나갈 때마다 깜짝 놀라 담장 아래로 그림자처럼 몸을 피했다. 짚북데기나 두엄이 옷에 묻어서 의심을 받을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 때문은 아니었다. 혼자 살아남은 터였다. 그래서 죄의식이라도 들었던가. 그것도 아니었다. 계승은 처참했고 무력했다. 불을 지르러 올 때처럼 개천을 건너고 천왕당지로 에둘러서 자신의 자취를 감출 수도 있었다. 큰장으로 가서 지난달에 파놓은, 노새 마굿간 밑 아지트에 들어가 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욕이 일지 않았다. 말들이, 그 아름다운 다리를 율동적으로 움직여서 오돌매를 밟고 있는 모습에서 한없는 무력감이 느껴졌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동물에 밴 익숙한 잔혹성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지 않나. 계승은 터벅터벅 걸었다. 우현서루를 지나 달서교 쪽으로 내려가다가, 큰 기와집을 보고 멈췄다. 골목으로 사람들이 나와 있는 집도 있었고 불구경하려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앞에 보이는 기와집은 농루였다. 왜 갑자기 애란이 보고 싶은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눈앞에는 오돌매가 말발굽에 짓밟히는 영상이 떠나지 않는데도 애란의 목소리와 흰 팔과 쳐다보는 눈빛이 그리웠다. 농루 대문은 닫혀 있었다. 불이 켜진 방도 있었지만 기루의 여자들은 아무도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강가를 따라 한 떼의 헌병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았으나 말발굽 소리와 횃불의 이동으로 알 수 있었다. 헌병부대는 달성토성 앞에 있었다. 내려가다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다. 계승은 농루 뒤를 돌아 담을 타고 넘었다. 담장이 낮아 월담하기는 쉬웠다. 컴컴한 후원으로 들어섰다. 광문사 문회가 열리던 날, 그녀와 김치를 꺼냈던 김칫독이 어렴풋이 보였다. 만약에 헌병 부대가 지나다가 농루에 들이닥치면 빈 김칫독에 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농루 옆 골목길로 헌병대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계승은 담에 바싹 붙어서 땅에 묻힌 일곱 개 김칫독 가운데 비어 있는 김칫독을 바라보았다.

2017-07-18 01:34:45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6>-엄창석

이와세 상점은 허물어진 북쪽 성곽 밖, 철도 사이에 위치했다. 그러니까 성곽 모퉁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망경루와 우현서루와 이와세 상점이 등거리(等距離)로 삼각형을 띠고 있었다. 이와세 상점 옆으로는 일인들의 주택과 요릿집, 여관, 무역상, 잡화점, 화물취급소 들이 대구 정거장까지 이어졌다. 계승은 아무 일도 아니란 듯 우현서루 앞을 지나 일인 상점 지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외지 학생들이 기숙을 하며 공부하는 우현서루에는 불이 켜진 방들이 더러 있었지만 일인 상점 지역은 캄캄했다. 날짜를 짚어보았다. 음력으로 정월 초엿새니까 달도 뜨지 않을 것이다. 며칠 간 번다하게 이어진 정월 초하룻날의 잔치가 끝나 거리는 여느 때보다 적막하고 피로에 젖어 있었다. 긴 엔가와와 처마 밖으로 돌출된 쯔케쇼인으로 화려하게 구성된 일본인 저택을 몇 채를 지나면 이와세 상점이 나왔다. 나중에 보험으로 업종을 바꾸었지만 이 무렵 이와세는 일본에서 가져온 담배제조 도구와 라이스페이퍼를 팔면서 한편으로는 무역을 했다. 그는 무사시노, 치바 같은 오래된 일본 담배 상회의 이름이 적힌 담배봉지를 일인과 한인 가게에 도매하면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곳에서 가까운, 대야동 북편 저지대의 땅을 사들여 유곽을 만들려고 성곽을 허문 장본인이었다. 성곽에서 나온 흙으로 넓은 저지대를 메우려는 계산이었다. 계승이 성곽을 허무는 데 참여했으니까 결국 유곽을 세워 돈을 벌려는 이와세의 작업에 일조한 셈이었다. "더러운 새끼." 마욱진을 겁박하려다가 자경단의 방해를 받았고, 그 자경단을 이끄는 이와세에게 일격을 가하려는 게 이번 일의 단초였다. 그런데 이와세가 성곽 철거와 유곽 건설의 입안자이도 한 것이다. 도시의 상황이 얽히고설켜 있으나 주요 인물들은 흐르는 물줄기처럼 곳곳에서 마주쳤다. 계승은 처마가 넓게 펴진 이와세 상점이 어둠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상점에 불빛 한 점 비치지 않았다. 거리는 텅 비었다. 계승은 몸을 숨기듯이 이와세 상점을 돌아 골목으로 들어섰다. 상점은 6미터 폭의 큰길에 접했지만 좁은 골목을 끼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계승은 이와세 상점 벽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나무껍질을 다닥다닥 붙여놓은 일본식 특유의 비늘 판벽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품에서 석유 깡통을 꺼냈다. 석유를 판벽에 끼얹고 성냥을 던지면 그만인 것이다. 그는 깡통을 더듬어 밀랍으로 막은 구멍을 찾다가 고개를 돌렸다. 휘익휘익, 처마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는 큰길 쪽을 건너보았다. 여전히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으로 멀리, 망경루가 높이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망경루는 초롱처럼 작았고 곧 사라질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계승은 소스라쳤다. 골목 안쪽에서 뭔가가 어슬렁거렸다. 잘 짖지 않는 털북숭이 삽살개였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다른 개들까지 몰려나오면 곤란했다. 계승은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석유 깡통을 들고, 다른 손으로 판벽을 빠르게 쓰다듬으면서 디귿자로 옴폭 들어간 지점을 찾으려고 했다. 며칠 전에 봐 두었었다. 공사를 잘 못한 탓인지 판벽에 틈이 많아 불이 잘 붙을 만한 곳이었다. 그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닥에서 술오줌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계승은 밀랍으로 막은 구멍을 뚫고는 석유를 판벽에 뿌렸다. 판벽 위에 걸쳐져 있는 처마에도. 손을 아주 민첩하게 움직였다. 성냥을 그어 판벽에 댔다. 불이 퍽, 치솟았다. 불기운이 그를 밀어냈다. 그는 뒤를 돌아 골목을 내달렸다. 두어 골목을 꺾었을 때, 개들이 짖어댔다. 순식간에 컹컹컹 떼거리로 짖는 소리에 골목은 마치 화염에 휩싸인 듯했다. 계승은 급히 방향을 틀었다. 하마터면 정거장으로 달릴 뻔했다. 그쪽은 일인 상가 지대였다. 상가문은 닫았지만 잠을 깬 일인들이 뛰쳐나올 것이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계승은 잠깐 방향을 헤아리다 우현서루 쪽으로, 이번에는 천천히 걸었다. 막무가내로 달리다가는 오히려 발각되기 십상이었다. 이와세 상점은 제대로 불이 붙은 듯했다. 골목 건너에서 불꽃이 치솟는 광경을, 직접 볼 수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골목 하나를 지나 우현서루가 보이는 큰 길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뒤에서 횃불이 비쳤다. 자경단인가? 길 저 끝이 희뿌옇게 밝아지고, 이와세 상점 쪽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오돌매였다. 곱사등이가 왜 저기 있지? 놀라워할 틈도 없었다. 곱사등이가 뭐라 소리 지르며 계승에게 손을 뿌렸다. 계승은 멈칫, 했다. 이와세 상점에서 우현서루 길로 한 무더기 횃불이 쏟아져 들어왔다. 길이 환해졌다. 곱사등이가 구르듯이 달렸지만 횃불을 든 일인들에게 이내 따라잡혔다. 계승은 혼자 달아날 수도 없었다. 불빛이 발밑으로 파도처럼 밀려왔다. 계승은 머뭇대다 다짜고짜 길 옆 두엄더미 속으로 뛰어들었다. 두엄이 아니라 두엄을 만들려고 썩히고 있는 노적가리였다.

2017-07-12 15:02:40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5>-엄창석

곱사등이 오돌매가 밤중에 광문사로 찾아온 것은 2월 중순이었다. 계승이 아궁이 앞에 앉아 군불을 때면서 애란에게 보낼 편지를 읽고 있을 때였다. 문회가 있던 날 잠시 만났지만 더 사무치게 그립다고, 광문사에 신문 사러 언제 오느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전달할 요령이 없었다. 농루까지는 한달음에 갈 수 있는 거리지만 그 길은 염소의 창자 속과 다름없었다. 그녀가 어찌 생각할지, 대문 앞에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염농산이나 다른 기녀들이 흉보지 않을지. 계승은 서석림 댁의 심부름꾼 아이에게 돈을 몇 푼 주어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어제도 우롱차 봉지를 들고 광문사로 조르르 달려왔다. 그즈음 서석림과 김광제만 아니라 대구 문회 사람들이 날마다 회의실에 모여 일을 논의하고 있어 잔심부름거리가 적지 않았다. "요새 똥개들이 취지문 벽보를 물고 다니더구만." 오돌매가 계승의 옆으로 다가왔다. 계승은 읽고 있던 편지를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소리 듣기 불편해요." 밤중에 오돌매가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그 일을 재촉하려는 것이겠지. "우라터질, 광문사 문회 때문에 일이 너무 늦춰졌잖소." "......" "간이 콩알만 하나보네. 불 싸지르는 짓은 애들도 할 수 있어." 오돌매가 아궁이에서 불씨를 당겨 필터담배에 붙이며 빈정거렸다. "겁나지 않소." 계승이 화난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럼, 당장 이와세 상점으로 달려가시오." 계승은 튀어나온 등을 굽혀서 담배를 빠는 오돌매를 돌아보았다. 곱사등이는 모서리가 삐쭉 튀어나온 돌에다 무명천을 덮어놓은 꼬락서니였다. 피와 감정이 조금도 없는 놈이었다. "한 됫박들이 석유통을 사놓았어요." 계승이 다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불은 지르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청도 터널 공사장에서 뛰쳐나와 밀양과 양산 등지로 헤매며 다닐 때 풍찬노숙을 했고 초량에서도 매립 공사를 하다 바다에 빠져죽을 뻔한 일도 여러 차례였으니까. 물론 계승은 성을 허무는 것이 대구의 젊은 상인들을 벼랑에 몰게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봄이 되어서. 허문 성곽을 마저 정리하면 대구 상인들은 빠르게 몰락할 것이다. 주요한 거리들은 일인들이 다 차지하겠지. 하지만 그런 앞날보다, 지금 몇 달 간 허물어진 채로 방치된 흉물스런 성곽 안에 자신이 거처하는 이 상황은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마치 숨통을 서서히 죄듯이, 흉물스런 성곽이 가리키는 몰락의 예감과 그 과정을 자신의 눈으로 하나씩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다만, 가슴이 뒤숭숭했다. 위태롭고 불가항력적인 대치 상황의 저 한쪽에, 그녀가 존재했다.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열한 살의 소녀는 불아궁이 같은 이 도시와 무너진 성곽 밑에 깔려 몰락하게 될 대구 상인들보다 더 강렬하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눈웃음, 낮은 콧등, 긴 눈썹, 십 승(升)으로 곱게 짠 옥양목 치마가 계승의 심장을 어지럽혔다. "걱정 마시요! 오늘 자정에 이와세 상점으로 갈 거요." 마침내 계승은 오돌매에게 말을 던졌다. 바람이 거꾸로 치는지 아궁이에서 불꽃이 훅 밀려 나왔다. 오돌매가 움찔 뒤로 몸을 젖혔다. 튀어나온 놈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오돌매가 흰창을 번들거리며 아궁이 안에 침을 뱉었다. "간단한 일이라니까. 불은 자주 일어나는 거야. 촛불이 넘어지거나 석유통이 잘못 과열돼도 불이 나잖소? 얼마 전에 서울 중국인 거리가 홀랑 타버렸지. 임형이 십자 성모당에 다녔죠? 임형이 대구를 떠난 뒤로, 성모당 제대 위에 켜둔 촛대가 지진으로 넘어져 성모당 전체를 태웠지. 그 자리에 들어선 게 계산성당이야. 불을 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이와세 상점도 그냥 불이 나는 거야. 아무도 지르지 않았어." 곱사등이가 일어났다. 어둠 속으로 마당을 빠르게 걸어가는 모습이 울퉁불통한 돌이 굴러가는 것 같았다. 밤이 깊었다. 계승은 성냥과 칼집이 있는 단도를 주머니에 넣었다. 석유를 채우고 밀랍으로 구멍을 막은 통조림 통을 품에 안고 남문으로 나갔다. 거리는 지독히 고요했고 개 한 마리 다니지 않았다. 기온은 급격히 내려갔다. 바람이 거세게 불지 않은 것이 왠지 다행스러웠다. 어제만 해도 북풍이 몰아쳤다. 그렇다고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계승은 동산 서쪽, 천왕당지 앞까지 내려가서 큰 시장 사잇길로 접어들었다. 큰시장에서 이와세 상점이 있는 북성(北城)으로 가려면 달서교를 통과해야 하지만, 계승은 얼음으로 덮인 폭이 좁은 대구천을 건넜다. 밀랍으로 구멍을 막았는데도 깡통에서 석유냄새가 솔솔 피어올라 코를 자극했다.

2017-07-11 15:31:43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4>-엄창석

서석림이 국채를 갚아야 한다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계승은 광문사를 나왔다. 문회가 시작될 때와 다르게 성 안에는 수비대들이 한층 늘어난 것 같았다. 계승은 곧장 서문을 빠져나와 농루로 향했다. 농루 마당에는 연기와 김이 자옥했다. 아낙들과 기녀들이 가마솥에 불을 넣고, 돼지고기와 산적, 부침개, 떡, 갖가지 젓갈 반찬을 준비하느라 한창이었다. 방마다 놓여 있는 상 위는 아직 비어 있었다. "곧 문회가 끝나요. 상에 음식을 올리랍니다. 참, 금릉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계승은 행수로 보이는 나이든 기녀에게 염농산의 말을 전하고, 마치 긴요하다는 듯이 다급한 말투로 애란이 있는 곳을 물었다. 김치를 가지러 뒤안에 갔다고 다른 기녀가 일러주었다. 입구자(口) 본채에서 북향으로 나 있는 후원엔 잎이 떨어진 연산홍과 개나리가 담장 밑에 촘촘했다. 백일홍, 매화나무가 본채의 뒷처마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라고 있어서 봄이 되면 후원이 퍽 아름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땅에 묻은 독에서 김치를 꺼내고 있는 애란이 보였다. 김칫독 예닐곱 개가 두 줄로 나란히 묻혀 있었다. 후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실 줄 알았어요." 애란이 대야에 포기김치를 담으며 슬쩍 곁눈질을 했다. 그녀의 청아한 음성이 계승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염농산 아주머니가 가보라고 하셨어." 계승은 비굴하게 입을 뗐다. 그는 어색함을 감추려고 자신이 온 게 광문사의 업무라는 듯 "내가 할게. 우리 손님들이 드실 거잖아."라고 말했다. 애란이 비켜 앉았다. 김칫독은 꽤나 깊어서 거의 머리까지 집어넣어야 했다. "저를 보고 싶었나요?" 엎드린 그의 등 뒤에서 애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승은 김치를 거머잡고 독에서 머리를 빼내다가 바투 앉은 애란의 치마 속 살결에 눈이 찔렸다. "그래." "얼마나 보고 싶었나요?" 계승은 김치를 대야에 놓고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7년 동안 그녀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애란이 잡힌 손을 빼내지 않고 물었다. "부산에 유곽이 있다죠? 거기 여자들보다 내가 더 예쁜가요? 빨리 말해줘요." 애란이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그를 쏘아보았다. 자신이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지막으로 부산을 거쳐 대구로 돌아왔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은 듯했다. 계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는 비할 수 없는 다른 무엇이 있다고 말했고, 그녀는 웃었다. 계승은 독 밑까지 훑어 김치를 꺼냈다. 대야에 가득 담기자 애란이 김치를 안고 안채로 사라졌다. 문회가 폐막되었다. 수백 명 외지인이 한꺼번에 도시를 빠져난 후로 성 안은 오히려 한산해졌다. 광문사는 이전보다 더 분주했다. 서석림과 김광제는 매일 나와 뒷일을 논의했고, 직원들은 밤을 새워, 김광제가 쓴 국채를 갚자는 취지문을 옮겨 적었다. 필사할 취지문은 3백 장이었다. 글씨 솜씨가 모자라는 계승은 필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에 먹을 갈거나 취지문을 봉합하여 우편소로 가져갔다. 전국의 각 지역과 신문사, 일본과 미국까지 취지문을 발송했다. "전국의 모든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으면 국가가 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다는 거요. 그날 현장에서 김광제 사장이 석 달 담뱃값으로 60전을 냈고 추가로 10원을 헌납했어요. 발의한 서 시찰(서석림)께서는 즉석에서 800원을 바쳤죠." 계승은 달성회 회원들에게 문회의 얘기를 전했다. "2천만 백성이 광문사 손바닥 안에 있는 줄 아나 보지? 누가 광문사 얘길 듣는대? 취지문을 보낸다고 한들 그걸 선비들이나 읽고 부들부들 떨겠지. 글을 읽을 줄 아는 백성은 백 명에 하나뿐이야. 제일 많이 찍는 대한매일신보도 고작 만 부인데 뭘 기대해." 오돌매가 코웃음을 쳤다. 옆에서 다른 이도 비슷한 소리를 했다. "설령 그랬다 쳐도 우리 같은 장사꾼들에겐 쓸데없는 소리지. 일본 잡상인들이 물러날 리가 없잖아. 그 양반들은 몰라. 우리가 얼마나 일본 날파리 떼들에게 시달리고 있는지. 흥, 나라 빚을 갚자 하면 은행이나 금광쟁이 거부들은 좋아하겠네. 그걸로 또 백성들 등을 후려쳐 먹을 수 있으니까." 거기서 마욱진의 마차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광문사 문회가 열리기 이틀 전에, 달성회로부터 정보를 받은 영천 의병이 급습하려던 마욱진의 마차 소식이었다. 그날 조영하 의진 수십 명이 영천 시티재에서 매복하고 있었는데, 마욱진의 마차가 영천에 이르기도 전에 먼저 다른 화적떼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서로 몇 차례 총질 끝에 화적들이 도주했고, 대구에서 수비대를 급파했다. 그 일로 마욱진은 하루가 지나 수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시티재를 넘었다. 조영하 의진은 정해진 날짜에 마차가 오지 않자 몇 명이 줄어들었고, 남은 의병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도착한 마욱진의 마차를 공격하다가 대구 수비대에 섬멸돼 버렸다는 것이다. 일본은 의병과 화적을 구분하지 않고 토벌했는데 이번엔 진짜 화적이 나타난 셈이었다. 그런 일로 달성회는 분위기가 서늘했다. 가담한 일부만 그 소식을 알았고 다른 이들은 캐묻지 않았으나 뭔가 우울한 낯빛을 서로 나누었다. 광문사는 문회를 마친 후,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다. 성주와 동래에서 몇 사람만 다녀갔을 뿐이었다. 각 지방과 신문사에 발송한 취지문에도 반응이 없는 듯했다. 신문에 기사조차 실리지 않았다. 형편없이 작은 제국신문이란 곳에 단신기사 한토막이 오른 게 18일이나 지나서였다. 문회가 끝난 후, 아직 헐리지 않은 성문 옆에 취지문을 붙여놓았지만, 한자로 쓰인 김광제의 긴 문장을 읽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리를 맞아 흐물흐물해진 취지문 종이가 뜯겨져 개가 물고 다녔다.

2017-07-05 21:52:34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3>-엄창석

본채 모퉁이와 붙어 있는 곳간에서 내일 쓸 상(床)을 꺼내는 중이었다. 기녀 하나와 집일하는 초로의 집사가 곳간 안에 보관하고 있던 상을 밖으로 나르면 애란이 상에 물걸레질을 했다. 3백 명이 온다면 상이 적잖게 필요할 것이다. 계승은 애란이 기녀가 되었단 말을 들었지만 실제 기루에서 처음 만났다. 물걸레질을 하는 그녀에게 다가가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광문사 사장님이 여기 가서 일을 좀 도우래." 애란은 계승을 쳐다보지도 않고 길고 아름다운 눈썹을 내린 채, 오래되어 흙처럼 상에 달라붙은 먼지덩어리를 걸레로 박박 문질렀다. 기녀임이 꼼짝없이 드러났는데도 그녀가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아서 계승은 당황했다. 애란이 몸을 돌려 대야에 걸레를 넣었다. 그녀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걸레를 빠는 것을 보고, 이 순간이 오는 것을 - 기루에서 만나게 될 것을 -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애란이 사랑스러웠다. 계승은 한 발짝 다가갔다. 팔을 뻗으면 어깨를 만질 수 있는 거리였다. "저기...... 곳간에 들어가 상을 날라줄래요?" 애란이 걸레를 빨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그를 보지 않고서. 집사와 맞잡고 상을 옮긴 기녀가 물걸레를 집어 들었고, 계승은 집사를 따라 곳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계승은 곳간에서 상을 꺼내 애란 앞으로 옮겼고 청소를 마친 상을 안채로 날랐다. 애란을 지척에 두고서, 마치 파도처럼 덧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상을 날랐다. 상을 스무 개쯤 옮겼을 때, 달구지가 도착했다. 계승은 애란에게 손도 흔들지 못하고 내비동 도살장으로 떠났다. 이튿날 9시쯤부터 문회 사람들이 광문사로 모이기 시작했다. 백여 평 되는 마당 가운데에 멍석을 깔았고 한쪽에는 의자를 놓아서, 신분과 나이에 따라 적절하게 멍석이나 의자를 선택해서 앉도록 배치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멍석에 올랐다. 멍석 위 여기저기에서 맞절을 하는 광경. 박장대소를 하고, 대구로 오면서 벌어진 일을 설명하고, 상대방에게 겸양과 양보를 다투며 서로 의자에 오를 것을 강권하는 따위로 마당이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그러다보니 회원들이 거의 입장을 마쳤는데도 앞에 놓인 의자는 드문드문 비어 있었다. 날씨는 춥지 않았다. 같이 온 종자들이 담장가로 늘어서 있고 마당에는 백로가 내려앉은 듯 하얀 옷들이 햇살을 받아 눈에 부셨다. 종자들까지 합쳐 사오백 명이 광문사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지만 봉화 예천 영덕 상주 같은 먼 지역에서 달려왔다는 피로와 열망으로 마당의 풍경은 더없이 장중해보였다. 계승은 대문 앞에 서서 뒤늦게 오는 인사들에게 자리를 안내하면서,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일본 수비대 군영의 동향을 의식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방해는커녕 남문이나 관풍루 아래에서 수비대원들이 경계 자세만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광문사의 위용은 대단했다. 단순한 출판사가 아니란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영향력이 크다는 게 놀라웠다. 광문사가 설립된 것은 불과 한 해 전이었다. 한 단체의 힘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상스러울 만큼 가열한 취회(聚會)였다. "대구광문사는 지금까지 도내 곳곳에 배움터를 마련하여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앎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 지식은 왕조가 수백 년 간 우리를 인도한 것과 전혀 다른 종류입니다. 이제 우리 젊은이들은 눈을 높이 들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서방이 동방을 힘으로 제압한다고 슬피 울거나 그냥 앉아서 분노할 까닭이 아니란 사실을, 젊은이들이 알았을 겁니다. 우리나라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세계는 동방과 서방으로 나눠져 있지 않아요! 압제당하는 나라와 압제하는 나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대구광문회는 더 넓은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 문회도 대구가 아니라 세계의 일부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에 대구광문회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변경할 것을 제안합니다......" 사장 김광제가 앞에 나가 긴 연설을 했다. 그런 논의는 한두 달 전부터 있었다. 지난해 일본 통감부가 들어선 후로 정부의 자금줄이 차단되자 광문사는 출판 교육 업무가 지지부진해졌다. 이런 현상은 다른 도시의 계몽사업도 마찬가지였다. 김광제 사장은 대한제국 정부나 일본 통감부에 원조를 사정할 거 없이 외국으로 눈을 돌려 중국과 일본의 민간단체와 교류하면서 지식 사업의 방향을 모색하자고 했다. 막힌 계몽운동을 뚫기 위해 새로운 판을 짜보겠다는 김광제의 의도는, 나중에 곱사등이 오돌매가 빈정거렸듯이 꿈과 같은 도안(圖案)이었다. 문제는 각처에서 몰려온 문회 회원들이 김광제의 달콤한 꿈을 만장의 박수로 통과시킨 직후에 나왔다. 광문사 부사장인 서석림은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 국가 빚부터 갚자는 국채(國債)의 보상(報償)을 제안했다. 국가가 빚을 지고 있는 한 타국의 훼방을 끊임없이 받게 되고 따라서 새판을 짜는 게 불가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다분히 추상적이었던 김광제의 도안에 홀연 현실감이 부여되었다. 그러니까 국가 빚부터 갚자는 서석림의 제안은 김광제의 도안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현실적인 첫 걸음인 셈이었다. 모든 빚을 변제하고, 새로 시작해보자는. "농루에 가보시게. 점심 준비가 덜 됐으면 빨리 하도록 재촉해요." 문 앞에서 김광제가 말한 새판의 도안을 어렴풋이 머리에 그리고 있는 계승에게, 염농산이 다가와 말했다.

2017-07-03 15:32:40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2>-엄창석

엿새 후, 광문사 문회(文會)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도시는 수런거렸다. 점심 무렵 기차 정거장을 빠져나오는 외지인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하면서 경산에서 들어오는 길에서, 서울에서 내려오거나 밀양에서 올라오는 경부가도로 낯선 사람들이 줄곧 도시로 들어오고 있었다.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선비 차림의 초로들, 머리를 짧게 깎고 푸른 외투를 걸친 중년들, 가마에 몸을 실은 양반들, 조랑말에 얹혀 오거나 붉은 큰 말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서는 남자들도 보였다. 겨울 내내 한산했던 성의 남문과 감영 정문인 관풍루 사이가 모처럼 번다했다. 구경꾼들마저 늘어서 있어서 남문 밖의 옹기전과 서문 밖의 달서교는 아주 어수선했다. 말들의 발굽소리와 아낙들의 비명소리와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 길을 트라는 종자(從者)의 고함소리가 자옥한 먼지에 섞여 낭자하게 피어올랐다. 계승은 김광제의 지시를 받고 농루(隴樓)로 가는 길이었다. 어제 의병들이 영천 시티재에서 마욱진의 마차를 공격했을까? 계승은 도시의 소란이, 멀리 떨어진 영천의 격전과 관계가 있지 않은지 자세히 살폈다. 이날 아침에 수비대 기병들이 남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게 마욱진의 마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숨은 의병들을 색출하거나 전투를 치르기 위해 수비대를 급파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제 오늘, 달성회 회원들을 만나 소식을 들을 겨를도 없었다. 지금 계승이 찾아가고 있는 농루는, 지금은 초로에 접어들었지만 한때 유명한 기녀였던 염농산이 운영하는 예자옥(藝者屋)의 명칭이었다. 이 무렵 대구에는 60여개의 예자옥이 있었는데 일인이 차린 곳을 제외하면 농루가 가장 규모가 큰 편이었다. 규모에서만 아니라 농루 주인인 염농산이 내일 문회 손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문회 준비를 위해 광문사 직원들이 일을 나누웠다. 계승은 참가자들에게 배포할 문서를 빠르게 필사(筆寫)할 능력이 되지 않아, 여자들처럼 음식 준비나 돕는 허드렛일에 처해졌지만,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애란이 농루에 있기 때문이었다. 농루는 서문 앞 수창사가 있는 삼거리에서 철도 방향으로 걸어가 망경루가 보이는 지점쯤에 나타나는 입구 자(口) 기와집이었다. 어째 농루가 이곳에 있는 것을 몰랐을까. 자신이 7년 만에 대구로 돌아왔을 때, 성을 헐고 난 다음날 아침, 농루 앞을 지나서 계산성당까지 내려가지 않았던가. 망경루 앞에 우현서루가 우람하게 있었지만 그것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오래되고 낡은 정자인 북후정만 개울물 건너에 보였었다. 성벽이 헐리고 홀로 남은 망경루의 앙상함이 괜히 처참해서 다른 건물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은 탓이었다. 애란이 기녀가 되었다는 소식을 장상만에게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이상하리만큼 반가웠다. 사실 누구의 아내가 되었거나 돈 많은 남자의 첩으로 들어갔다면, 자신이 이곳을 떠난 후 7년 동안 늘 꿈에 그렸던 애란은 다시 가까이할 수 없는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농루에서 기녀를 하고 있다면 몸 파는 창기가 아니란 뜻이었다. 흐흥, 창기면 어때? 예기(藝妓)든 창기든. 그가 떠날 때 열한 살이었던 애란은 뽀얗게 베를 짠 옥양목 치마를 나풀거리며 헤실헤실 웃는 얼굴을 한 채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약간 주저앉은 콧등과 머루 같은 눈동자와 탐스런 머릿결이, 어느 날 광문사를 찾아온 그녀에게서 열한 살의 모습 그대로 발견되었다. 광문사에 신문을 사러온 그녀를 만난 것이다. 신문대 앞에서 계승을 본 그녀는 어깨까지 올린 장옷이 발밑으로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나무에 박힌 못처럼 굳었다. "쟤가 앵무 뒤를 잇는다는 기생 금릉이야. 가야금과 난을 잘 친다네." 권종성이 일러주었다. 애란과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애란이 어느 기루에 있을까? 계승은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다시 신문을 사러 오겠지. 광문사는 당시 가장 많이 팔리는 대한매일신보의 대구지국이었다. 그녀가 돌아간 후 광문사는 정말 뜨거웠다. 인쇄실도, 신문대가 놓인 회의실도, 마당도, 마루 밑의 아궁이도, 계승이 잠자는 인쇄실 뒤칸 도장방도. 하지만 애란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이곳에 나타날 애란은 여전히 열한 살 앳된 소녀겠지만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신문대 앞의 공기는 견딜 수 없는 질투로 끈적거렸다. 그녀가 지금 어디 있지? 어디서 무엇을 하지? 계승은 신문을 집었다 놓았다가, 펼쳤다 덮었다가 하면서, 어떤 사내놈에 대해 끓어오르는 기분 나쁜 질시를 억눌렀다. "아, 마침 잘 왔네요. 내비동(비산동)에 돼지고기를 가지러 가야 하는데 손이 부족해요." 농루의 열린 대문을 들어서자 주인인 앵무가 마당 한가운데 연못에서 얼음을 건지다가 계승을 보며 활짝 웃었다. 아낙들과 기녀들이 부산하게 부엌을 오가고 있었다. 애란이 보이지 않았다. 부침개 냄새가 부엌에서 흘러나왔고, 마루에서는 어린 기녀 두엇이 산적을 만들려고 대나무를 잘라 가늘게 다듬고 있었다. 무엇을 끓이는지 가마솥이 김을 내뿜었다. 내비동 도살장에서 지게로 돼지고기를 가져오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고 했다. 달구지를 기다리는 동안 계승은 옆채를 돌아 후원으로 갔다. 거기에 애란이 있었다.

2017-06-28 15:09:29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1>-엄창석

"27일에 불을 지를 수 없소. 광문사 문회 날짜와 너무 가까워요." 광문사에서 열리는 문회는 이틀 후인 29일이었다. "그게 뭔 소리야? 광문사 행사는 언제나 있는 거고, 그게 우리와 뭔 상관이란 말이오!" 계승은 어둠 속에서 오돌매가 칼을 빼들고 자신을 겨누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승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문회는 예전과 다른 거 같소. 나흘 전에, 김광제 회장의 지시를 받고 내가 도내 각처에 있는 회원 유지들 3백 명에게 편지를 뛰었어요. 멀리 함경도까지 초청장을 보냈어요." "함경도?"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는 최대 인원이 대구를 찾을 거요. 3백 명이 온다면 하인이나 종자(從者)를 합하면 적어도 5백은 되겠죠. 타고 온 말들도 성 안에 북적일 거고." "흥, 서석림이나 김광제, 이 자들 마음에 들지 않소. 서석림은 어릴 때 배가 고파 멍석을 뜯어먹으며 가난을 알았고, 김광제는 을사년(1905년)에 황제폐하께 피 끓는 상소를 올린 뒤 경무관을 때려치웠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다 헛소리요. 아니꼽게 진화론 따위나 입에 달고 살지. 아이들에게 책을 건네고, 거지들과 궁민(窮民)들에게 국수를 먹이며 잘난 체하지. 오일장 다음날에 국밥을 얻어먹으려고 문둥이 떼거리들이 머리통에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나 장사가 안 될 판이야. 정말 가증스러워. 그게 사실 자신의 몸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 해서지. 서석림과 김광제는 결코 손에 칼을 들지 않아. 흥, 대신 커피 잔이나 들고 있잖아? 저 둘이 광문사 앞에서 일본 수비대 장교들과 시시덕거리며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지." 계승은 느꼈다. 젊은 시절에 한인들끼리 상권을 지키려고 수창상회를 열었고 이제 쉰 살이 넘어 교육과 금융 사업에 손을 대고 있는 대구의 상층부 상인들과 20대 젊은 상인들이 규합한 달성회가 갈수록 길이 갈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염미두(魚鹽米豆). 보부상 출신인 거부(巨富)들의 손에는 더 이상 생산 비린내가 풍기지 않았고, 쌀겨 한 알도 등에 붙어 있지 않으니 젊은 한인 상인들의 절실함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농장과 학교 건설, 은행 운영에 관심을 두고 있는 저들의 눈에는 어쩌면 시장터의 젊은 상인들이나 일인 장사꾼들이 한 가지로 비칠지 몰랐다. 일본 장사꾼들도 거류민 지휘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콧구멍만한 점포를 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죄다 철도 공사 때 일본에서 건너온 막노동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집요하게 장사하는 콧구멍만한 점포가 얼마나 거세게 왜색바람을 일으키는지! 그것을 직접 맞는 이들이 달성회 회원 같은 젊은 한인 상인들이 아닌가. 물론 달성회가 대구의 젊은 소상인들을 대표하진 않았다. 벌써 많은 상인들은 일인들의 자잘한 수입 상품이나 그들의 군용 물자를 헐값에 사들여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 이와 성격이 다르지만 광문사도 대구의 노장 상인들과 지식인들을 모두 규합한 것은 아니다. 북장대 건너편에 있는 우현서루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구 광학회'와 어느 정도 대립관계에 있었다. "오돌매 형, 27일에 이와세 상점에 불을 지른다고 칩시다. 성공을 하더라도 도시는 쑥대밭이 될 거요. 이와세 상점과 다닥다닥 붙은 왜놈 판자집들이, 바싹 말라있으니 금방 옮겨 붙을 테죠. 여간 난리가 아닐 거요. 광문사는 문회고 뭐고 엉망이 될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거야." "난 열흘 전에 서석림과 낙동강 배를 타고 동래에 다녀왔소. 짐작이지만 이번 일은 전과 다른 것 같소. 사흘 동안 함께 다녀본 내 느낌이 그래요. 엄청난 구름이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광풍이 몰아칠지 몰라요. 이와세 상점에 불을 질러도 불아궁이가 되지만 우리가 앞서 일을 치르기에는 지금 도모하는 광문사의 사업이 너무 크고 중대한 것 같소." 지하실은 음습한 침묵이 감돌았다. 숨이 막힐 즈음 오돌매의 말이 떨어졌다. "좋소. 한번만 더 연기해주지. 하지만, 자꾸 늦추면 우리 비밀이 샐 수 있단 걸 알아야 해." 오돌매는 죽음과 삶의 권한을 가진 마왕이라도 되듯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연기를 허락했다. 광문사 문회가 방해받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계승의 가슴에 벅차게 피어올랐다. 그 기쁨으로 어둠 속에서 오돌매의 얼굴이 마치 눈에 보이는 환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기쁨이 정말 광문사 행사 때문인지, 아니면 방화자로 발각되어 자신이 처형당할 거라는 공포심에서 헤어났기 때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2017-06-26 15:19:52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0>-엄창석

제8장 눈이 그치고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림자가 짙은 골목 구석엔 아직 잔설이 쌓여 있었다. 전날 열렸던 오일장의 흔적이 시장길 여기저기에 뒹굴었다. 달성토성에서 헌병대들의 말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우두둑우두둑 저녁의 맑은 대기를 흔들었다. 일본 상인들이 토성 안에 요배전(遙拜殿)을 거창하게 세운 뒤로, 일본 헌병대들은 주둔지 옆 공터를 버려두고 곧잘 이곳에 들어가서 훈련을 했다. 달성토성은 옛날 신라 때 높은 지대 위에 1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둘레로 성을 쌓은 곳으로, 마치 천지를 에워싼 백두산 같은 지형을 띠었다. 움푹 꺼진 중앙은 갈대가 무성했고 완만하게 경사진 가장자리 밖으로는 까마득한 벼랑이었다. 일본 황제의 조상을 모시는 요배전은 토성 입구 정면에서 보면 갈대밭 너머 둔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황제의 가호라도 느끼는 모양이지. 놈들은 꼭 요배전 근방에서 훈련을 한다니까. 계승은 초가들 사이로 난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낮은 초가와 점포 형 판자집에 가려 토성은 보이지 않았다. 몇 차례나 골목을 돌고 있는지 모른다. 어둠이 점점 내렸다. 오돌매가 아지트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낮에 심부름꾼 아이가 광문사로 와서 편지를 전해주었다. 6시에 '거기서'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거기'는 보름 전에 만들었던 마구간 밑을 가리켰다. 계승은 등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뜻을 납득해줄까. 핑계를 댄다고 여길지도. 만약 오돌매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자신이 이 아지트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버려야 할지 모른다.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비밀을 알고 있는 대가를 치르라는 위협이 아닐까. 살쾡이 같은 놈. 계승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침착해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골목 안쪽, 눈에 익은 초가로 들어섰다. 집은 비어 있었다. 마구간에는 노새 세 마리가 여물통에 머리를 처넣고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금방 여물을 준 듯했다. 오돌매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계승은 노새 엉덩이를 슬쩍 떠밀며, 닫혀 있는 입구를 두드렸다. 조금 뒤 문을 열렸고, 계승은 사다리를 밟고 내려섰다. 땅 밑이라선지 의외로 공기가 훈훈했다. 지하는 어두웠으나 공기통으로 빠져나온 희미한 조명으로 세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들어올 때 아무도 없었지?" 뜻밖에도 장상만의 목소리였다. "어, 상만이네?" 계승은 공연히 반가웠다. "여기가 헌병대 턱밑인데 발각되지 않을까?" "도시 안은 어디든 턱밑이오. 출입할 때나 조심하시오......그러고 어찌 됐어?" 오돌매였다. 뒷말은 장상만에게 묻는 소리였다. 장상만이 전날 안강에 간 일을 얘기하는 중인 것 같았다. 장상만은 앞뒤를 추려서 계승에게 알려주었다. "마욱진이 27일에 노새 수레 십여 대를 끌고 포항으로 간다는 정보를 알려주고 왔어. 신돌석 휘하에 있던 조영하란 사람이 안강을 중심으로 활동하거든. 영천에서 포항으로 넘어가는 시티재에서 마욱진의 수레를 칠 거라고 해." 마욱진은 저번에 달성회가 노렸던, 일본 상인들의 화물을 취급하는 유통업자였다. "27일이라고?" "그래, 닷새 뒤 27일이야. 기차로 하역한 왜놈 물건이 지방으로 가는 걸 막아야 하는데, 의병들과 접선하는 것부터 굉장히 힘들어. 이번에도 조영하 의진에 속한 하씨란 자를 시티재 아래서 만나기로 했거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거야. 눈앞에서 곰 가족이 슬금슬금 지나가는 데 오줌을 싸겠더라. 하씨는 오늘 새벽 3시에 나타나더라고." "숨어서 하는 게 오히려 위험해. 흐흐, 먼저 호랑이 밥이 될지 모르잖아. 영천이나 안강에 점포를 정해서 접선하는 게 낫지 않을까. 보부상으로 위장해서 말이야. 아니면 대구에 점포를 정하고 이쪽으로 부르던지." 옆에 있는 채소상 조씨가 말했다. "그런 방도 있네. 궁리해보자...... 여기 있을 거야? 난 피곤해서 안 되겠어. 먼저 집에 갈게." 장상만이 밖으로 나갔다. 옅은 빛이 출렁거리다 사라졌을 때 오돌매의 목소리가 좁은 공간에서 울렸다. "임 형, 눈도 그쳤고 날씨도 맑소. 27일이면 이와세 상점이 잘 마른 장작더미가 되겠어. 준비는 다 됐죠?" 이와세 상점에 불을 지르는 일을 셋만 아는 것 같아, 계승을 놀랐다. 하긴 최소한의 인원만 공유하는 게 비밀을 더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계승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두워서 곱사등이 오돌매가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2017-06-21 15:16:45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29>-엄창석

주물연 나루에 있는 초가 객점에서 잠을 자고 이른 아침에 다시 배에 올랐다. 일찌감치 돛을 올렸다. 북풍이 불자 돛은 위력이 대단했다. 삐딱하게 내걸린 누른 면포가 불어오는 북풍을 안고 가오리연처럼 휘어지자 배는 수면을 가르며 질주했다. 계승은 횡목에 앉아 돛이 삐꺽삐꺽 비명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돛대를 사이에 두고 머리 쪽에 서석림이, 맞은편에 구포 사람과 계승이 앉았다. 전날과 다르게 서석림은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는 장죽을 든 손을 무릎에 괴고서 이따금씩 입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강물에 무료한 시선을 던졌다. 계승은 서석림의 입에서부터 거의 1미터나 길게 뻗어서 갑판에 닿은, 연초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장죽 대가리를 보고 있었다. 백통으로 된 하얀 장죽 대가리는 마치 담뱃대와는 무관하다는 듯 갑판 마루에서 부들부들 떨거나 한번씩 꼼틀댔다. 민달팽이 같네, 계승은 빙긋이 웃었다. 서석림은 뭘 생각할까. 이 강에서 보냈던 젊은 날을 떠올리고 있을까.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서 대피하던 사건들, 우기(雨期)에 탄력을 잃은 고무줄처럼 늘어나버린 제방, 태풍이 강타하여 산산이 부서진 상선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태풍이 지나가면 터진 재방으로 빠져나가 들판 구석에 처박힌 배를 찾으려 다니던 상인들을, 계승도 사문진에서 보았다. 엽전을 가득 실은 배가 뒤집혀졌을 때 수백 명 사람들이 물에 뛰어들어 잠수하기도 했다. 물에 떠내려 오던 죽은 돼지와 말들, 발가벗은 여자 시체와 잘 익은 수박들...... 상인들은 긴 장대로 떠내려오는 것들 중에 여자만 골라서 강둑으로 끌어왔다. 배들은 자주 침몰했고, 어느 때는 배에서 불이 치솟아 마치 강은 횃불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하구인 명지도(島)에서 생산한 소금이 4만 석이니까 그 절반을 낙동강으로 거래했다면 소금배만 해도 1천 척이 이 강을 오르내렸다. 그러니 어떤 사건인들 없었을까. 이윽고 구포에 도착한 것은 태양이 너른 들판 위로 긴 그림자를 뿌릴 때였다. 산들은 나지막했고 강은 바다처럼 광활했다. 가히 구포 일대는 중상류와 다르게 아직도 엄청난 유통지역이었다. 강을 건너는 관아 소속의 나루터가 있긴 했지만, 수십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곳곳에 떠다니거나 강 복판에 닻을 내린 채 멈춰 있었다. 선착장 양편으로도 배들이 도열해 있었고 제방 위에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좀 더 내려가. 을숙도 가까이에 있는 강안이 엄궁동이야. 거기에 배를 대게." 일행은 배에서 내렸다. 계승은 오랫동안 배를 탄 탓에 다리를 약간 휘청거리며 서석림의 뒤를 따랐다. 서석림은 명지도와 을숙도를 쓰윽 돌아본 뒤, 익숙한 듯 강가에 늘어선 객주와 식점들 사잇길로 들어섰다. 서석림이 들어간 곳은 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창사였다. 커다란 판자에 검을 글씨로 쓴 '수창상회(壽昌商會)'가 기와집 앞에 내걸려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대구 수창사가 동래에 엄궁, 하단, 부산항, 세 곳에 지점을 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곳이었다. 이즈음 대구 수창사는 상거래를 하지 않아 각 지점들이 독립한 상태였다. 수창사 한쪽은 식점이었고 다른 쪽에는 창고 같은 바라크 건물들이 커다란 자물통을 대문에 걸고 길게 이어졌다. 수창사의 방문이 열리며 몇 사람이 마당으로 뛰어나와 반색을 했다. 그러자 어디서 왔는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소리로 떠들며 인사를 나누었다. 구포 사람이 돌아가고, 계승과 사공 방씨는 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서석림은 기다리고 있던 동래 사람들과 수창사 마루에서 식사를 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서석림이 나와서 여기서 잠을 자고 내일 떠날 거라고 말했고, 아이 하나가 와서 계승과 방씨에게 잠 잘 방을 일러주었다. 십여 명이나 모였으니 대화는 꽤 길게 이어질 것 같았다. 그동안 계승과 방씨는 강가로 나왔다. 갈대숲과 모래 둔덕으로 이루어진 을숙도가 눈앞에 보였다. 건너편의 넓은 평야 같은 지대는 명지도였다. 광활한 낙동강 삼각주에 낮은 창고와 설치물들이 끝없이 덮여, 마치 모래 위에 게딱지를 덮어놓은 듯했다. "저게 다 염전이요. 저기서 가마솥에 바닷물을 담고 나무와 갈대를 태워 소금을 얻지요. 일 년에 사오 만 가마니를 구워내니까, 이 일대가 소금천지죠." "정말 대단하네요. 어염미두(魚鹽米豆)라더니. 인부들 수도 어마어마하겠군요." "이제 저것도 끝장이요. 일본이 인천에다 바닷물을 논에 가둬놓고 햇살로 물을 말려서 소금을 거두게 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동래도 텅 빌 수밖에." "왜 그렇죠?" "가마솥 소금에 비해 논 소금이 일손이 적게 들어간다니까. 소금 값이 떨어질 텐데 버티질 못하죠." 그런 얘기들을 주고받다가 수창사로 돌아왔다. 서석림이 있는 방은 여전히 불이 켜 있고 말소리가 새나왔다. 사공 방씨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내 곯아떨어졌다. 뭔 얘기를 주고받고 있을까. 대구에서 동래까지 내쳐 달려왔고 부산 인사들이 모였으니 긴요한 얘기가 오갈 터였다. 바람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계승의 귀에 건너 방의 이야기가 수런수런 들려오곤 했다. "초량은 이미 일본 물자로 뒤덮였소. 여기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계승은 수개 월 전에 초량에서 바다 매립 공사장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항 쪽 현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지금 저들이 신화(新貨)를 풀고, 길을 닦고, 교량을 세우고 있어요. 그게 저들의 돈으로 만들고 짓는 거지만 실제는 우리 주머니에서 나올 돈이에요. 정말 해괴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돈을 빌려서 지은 거니 우리 것이 자명한데, 저들은 자기네 소유라고 주장합니다." 서석림이 격분에 차서 음성을 높였다. "우리가 돈을 못 갚을 게 뻔하다고 믿는 거지요!" 누군가 자조하는 목소리. "갚지 못하면 일본 게 된답니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하는 소리. "휴우, 나중에는 일본 것을 밟지 않으면 대문 앞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갈 거요." "그러면 어쩌야 합니까?" 방안이 잠잠해졌다. "서 시찰, 각 지역마다 사정이 달라요. 부산은 일본이 바다를 매우고 시가지를 건설하고 있어요. 이미 늦었습니다." 또다시 두서없는 말들이 왁자하게 쏟아졌다. "나라가 통치를 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상업이 번창했습니다. 백성이 살길을 찾아 스스로 일어난 거지요." 서석림의 목소리였다. "새로운 나라가 들어와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허허참, 우리에게 일본이 나라랍니까!" 문이 벌컥 열리고 몇 사람 뛰쳐나왔다. 배웅하는 이도 없었다. 다시 방에서는 조근거리는 목소리로 대화가 이어졌다. 바람벽에 기대앉은 계승은 이부자리로 몸을 눕혔다. 언제인지 잠이 들었고 깨어나자 사방은 고요했다.

2017-06-19 15:20:47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엄창석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28>-엄창석

계승은 대구에 온 뒤로 서요를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동문 앞에 있는 비어홀에서, 계산성당에서 그를 보았다. 그러나 광문사에는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때 개포에서 아버지를 흉내 내면서도 무언가 자신을 주장하던 어린 서요의 기질은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졌다. 아버지와 아들이 유사하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띠었다. 아버지는 어린 서요에게 일어를 배우게 했고 서요는 일어가 능숙해지자 불과 열여덟 살에 소규모 일어학당을 만들었다. 눈을 넓히라고 동경으로 견학을 보내자 사뭇 제국주의자가 돼 돌아왔다. 서요는 박중양과 더불어 대구에서 가장 일어에 능통했다. 박중양은 일어를 출세에 이용했지만 서요는 그것으로 자아(自我)를 형성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두 부자 사이에 벌어진 격한 다툼을 알고 있었다. 서요는 이사청 관료들과 경찰, 거류민회 간부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곤 했다. 한 해 전, 제일은행 두취(頭取, 은행장)인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대구를 방문했을 때 서요는 동료들을 끌어모아 성대한 환영식에 참여했다. 시부사와는 1902년에 서울과 동래에서 발행한 일본 제일은행권 지폐에 초상화로 그려진 인물이었다. 넓은 이마에 코가 크고 인중이 긴, 프록코트 차림의 초상화. 일본은 '시부사와 지폐'를 사용하라며 인천항에 군함 수 척을 모아 한국 정부를 굴복시켰다. '시부사와 지폐'는 한국이라는 물고기가 일본 경제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대구에서 시부사와가 성대한 환영을 받고 돌아간 뒤, 두 부자는 크게 맞붙었다. "왜 그자를 대접하느냐! 우리 금융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놈이 시부사와이다." "아버지께서는 자주 돈은 몸의 핏줄처럼 흘러야 한다고 하셨지요. 몸이 시들어 가는데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립니까?" "시부사와 얼굴이 담긴 지폐는 핏줄에 탄 독약이다." "아버지, 왜 나쁘게만 보십니까? 조금 인정하면 문둥이처럼 썩은 나라를 살릴 수 있는데요." "문둥이라니, 이놈아!" 서석림이 고령 개포에 드나들면서 수집한 가야의 기마 토기를 아들에게 집어 던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서요는 아버지의 영세명을 붙인 아우구스띠노 종탑(두 개의 종탑 가운데 다른 하나는 정규옥 부인의 영세명인 젤마나이다.)이 하늘 높이 치솟은 계산성당을 다녔다. 굳건한 신자인 서석림도 성당에 출석했으므로 부자는 일주일마다 만났다. 지난해 사순절 때였다. 두 사람은 재의 수요일에 미사성제에 참례했다. 성당 앞자리에서 서석림과 서요는 어깨가 닿도록 나란히 섰다. 프랑스인 로베르 신부는 보리수 나뭇가지를 태운 재를 손가락에 묻혀 서석림과 서요의 이마에 작은 십자(十字)를 그었다. 신부는 어눌해서 오히려 강조하듯 들리는 한국어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 서석림은 눈물을 흘렸고 서요는 눈썹에 이슬이 맺혔다. 사문진을 떠난 배는 두 시간쯤 뒤에 개포에 도착했다. 나루는 황량했다. 한때 객주만 사십여 채가 문을 열었을 만큼 번성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강가에는 상선 서너 척이 죽은 개구리처럼 매달려 있었고, 객주 기와집은 곳곳에 폭설로 내려앉아 있었다. 사문진보다 한층 을씨년스러웠다. 배를 선착장에 댄 후, 일행은 겨우 뚫린 눈길을 걸어서 문 열린 객주에 들어가, 메밀국수를 먹었다. 개포에서 낯선 사람 한 명을 배에 태우고 곧장 구포로 향했다. 돛을 올린 배는 빠르게 수면을 핥으며 내려갔다. 서석림이 왜 여행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낙동강 나루를 직접 눈으로 보려고 한 게 아닌지. 그런 거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성수기가 아니긴 해도, 철도가 생긴 지 겨우 두해 만에 낙동강 무역은 처참해졌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물산들은 빠르게 철도로 이동하여, 미리 넓힌 시장길을 따라 각처로 옮겨지는 것이다. 고령을 지나자 강줄기는 뱀처럼 휘어졌다. 산악 지대의 협곡으로 빠져 들어갔다. 깎아지른 양쪽 산기슭에서 눈 더미가 퍽퍽 떨어지며 허연 거품이 수면 위로 솟구쳤다. 그 진동으로 비탈에 선 침엽수들이 쌓인 눈을 털어서 그림자가 짙은 나무숲 사이로 하얀 입자가 번지고 있었다. 정오의 태양이 작열했다. 잔잔한 물결에서 햇살이 튀어 올랐다. 가까이에 있는 수면은 푸른빛이 났고 먼 곳은 은빛이었다. 이윽고 협곡이 낮아지며 강이 트이자, 전방에서 새떼들이 곡선을 그리며 비상했다. 가창오리인가, 흑부리오리인가. 마치 허공에서 커다란 부채가 수면을 쓰는 듯했다. 작고 검은 새떼와 교차하여 두루미와 백조 떼가 강 한가운데의 섬으로 날개를 펴며 우아하게 내려앉았다. 조금 전부터 서석림이 구포 사람과 장죽을 피우면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지금도 상선을 타고 장사를 한다는 구포 사람은 쉰 살쯤 보였는데 서석림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깎듯이 예대를 했고 서석림은 간간히 하대하며 남쪽 사정을 묻곤 했다. "동래 상인들에게 구포에서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네." "예, 동래에서도 국채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그 때문에 통감부가 나라를 휘저어도 막을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해관세나 철도노선, 황무지 개간권 등 죄다 국가 채무와 연결돼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국채를 빌린 자들이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은 쓸 궁리나 하지요." "만약 백성들이 돈을 갚겠다고 나서면 정부가 무슨 염치로 돈을 계속 빌리겠는가?" "백성들이 모두 가난한데 주머니를 열라하면 누가 듣겠습니까?" "그렇지......" 서석림은 강물로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해가 설핏하고, 멀리 또 다른 나루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창녕 주물연나루일 것이다. 계승은 주물연나루까지 가 본 적은 없었다. 처음에 하루 묵기로 했던 밀양 삼량나루를 앞두고서였다. "해가 짧군. 여기서 자고 내일 구포로 가세." 서석림이 사공 황씨에게 일렀다. 배가 선착장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틀 때 구포 사람이 서석림에게 물었다. "참, 시찰 어른께서 오래 전에 일본이 철도를 비밀리에 측량하는 걸 보시고 낙동강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저 앞 삼량진에서 말입니다." 서석림이 그 말이 맞다는 듯이 천천히 구포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비밀 측량이 1892년에 있었다고 요즘 들었습니다. 그 뒤로 10년이 지나서 철도공사를 시작했지요. 게다가 시찰 어른께선 철도가 생기면 낙동강이 쇠할 거라는 예측을 어떻게 하셨는지요?" "장사꾼이니까 가능하네. 돈이 내 귀에 그런 말을 속삭여주었지." 서석림은 불씨가 사그라지는 장죽을 갑판에 탁탁 털며 말했다. 계승은 깜짝 놀랐다. 1892년이면 자신이 열한 살 때였고, 개포에서 아버지를 따라 나온 어린 서요를 보았던 해였다. 서석림이 가장 크게 낙동강 무역을 하던 시기가 아닌가. 그런 때에 일본 측량단을 보고 무역을 접었다니! 계승은 그의 비범한 상상력에 혀를 내둘렀다. 실제로 서석림이 낙동강을 벗어난 것은 이듬해인 1893년이었다.

2017-06-14 15:2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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