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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시니어문학상] 대상-논픽션 '뒤로의 여행'/ (삶은 주문을 외우며 헤쳐 나가는 가시덤불)

 그가 말했다. 걸을 수 있을 때 가 보고 싶은 곳을 가보지 못하고,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싶은 걸 먹지도 않았는데 이루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 크게 후회된다고,…… 병원 병상에 누워 토하는 지인의 넋두리가 칠순의 모자를 눌러쓴 나의 가슴에 음각처럼 새겨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나중에 어떤 후회를 하게 될까? 버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겨울밤거리를 내다보며 결심했다. 내 삶의 흔적을 기록해보자고. 며칠 고민 끝에 ‘뒤로의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시련의 연속이었던 내 삶을 알몸으로 보여주기가 부끄러워 망설이자 마음 한구석에서 용기의 용트림이 일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얼굴이 없듯이 똑같은 삶도 없다고, 내가 새긴 나이테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존재라고, 무엇보다도 시간이 내 편이 아니라는 가슴의 외침이 컸다. 여행 방법은 나만이 탈 수 있는 기억 열차를 타고 현재를 출발 나만이 드나들 수 있는 어머니 기록관으로 가서 고난의 연속이었던 삶을 찬찬히 되새겨보고, 반환점을 돌아 나의 길은 가정을 이룬 이후부터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기로 했다. 기억 열차는 빨랐다. 어머니 기록관이 가까워지자 먼저 어머니가 걸어온 길이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는 철길처럼 길게 다가왔다. 길은 한눈에도 험했다. 좁고, 가파르고, 바닥에는 울퉁불퉁 돌멩이가 지천이었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어린 사형제를 태운 수레를 끌고 어떻게 저 험한 언덕길을 걸어왔을까? 잠시 숨을 고르고 기록관 안으로 들어섰다. 첫 번째 방은 병원중환자실이었다. 매캐한 소독 냄새가 몸과 마음을 짓뭉갰다. 병상으로 어정어정 걸어가 어머니를 내려다봤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깊은 주름이 한가득 힘겨운 삶을 견디어온 걸 대변해주고 있었다. 눈을 감고 꼬챙이 다리를 주무르자, “인제 그만 가면 안 좋게나.” 자식의 온기를 느낀 어머니의 신음 넋두리가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이 순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自愧感)이 쓰나미처럼 밀려드는데 어머니는 또 자책이시다. “잘 가르치지도 잘 먹이지도 못했는데, 고생만 시킨다.” 라고 어머니 침상에 얼굴을 묻는데 얼마 전 병원을 오기 위해 집 비우던 날의 영상이 아리게 돌아갔다. “불은 다 껐나, 물은 잠그고,” 자동차 문을 닫지 않고 주문 외우시던 어머니는 급기야 차에서 내리셨다. 왼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데다 시도 때도 없이 앙탈을 부리는 두 무릎을 지팡이로 겨우 달래며 부엌으로 간 어머니는 행주와 걸레를 갖고 나와 빨랫줄에 널며 말했다. “며칠 비우면 곰팡이 핀다고,” 그리곤 언덕 위 밭에 널브러져 있는 땔감인 빈 깻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비 올 것 같으니 창고에 넣으라고.” 그 깻단은 겨우내 눈비를 맞아 반쯤이나 썩은 것이었다. 깻단이 다 옮겨질 즈음 어머니는 또 장독대로 가셨다. 멸치젓 항아리 뚜껑을 열고 검지로 젖 장을 찍어 쩝쩝 입맛을 다시곤 혼잣말을 항아리에 담았다. “올해 김장은 정말 맛있겠다.” 이런 행동을 낱낱이 내려다보던 집 뒤란 감나무에 터를 잡은 까치 부부가 우듬지에 부리를 닦으며 반복해서 물었다. “며칠 있다가 오실 거죠?” 까치 물음에 감나무 올려다보는 어머니 눈가에 이른 봄볕 한 점이 반짝거렸다. 오전 내내 씨름 끝에 병원으로 출발한 어머니는 뒷좌석에 꼿꼿이 앉자 거르지 않던 낮잠도 잊으시고 눈 카메라로 스쳐 지나는 산천을 찍고 있었다. 병원에 온 지 보름 만에 담당 의사의 호출을 받았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준비를,…… ” 순간 삼천 볼트의 전류가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쫙 흘렀다. 한평생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잠 한 번 편히 자지 못하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 한 몸 불사른 그 어머니가 지금 이 세상의 공기를 마시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단다. 청천벽력에 칠월 가뭄의 쩍쩍 갈라지는 논처럼 목이 탔다. 모든 것이 보기 싫었다. 푸른 나뭇잎들이 미웠다. 흰 꽃, 붉은 꽃잎들은 볼 성 사나웠다. 온통 세상이 뒤바뀌는 것 같았다. 바뀌는 세상을 보고 싶었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올려다보이는 것도 내려다보이는 그 무엇도 변한 것이 없었다. 오가는 자동차 행렬은 여전히 꼬리를 물고 빌딩 사이로 바쁘게 오갔다. 세상은 모두 그대로인데 나만 망망대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난파된 배를 타고 한줄기 불빛을 갈망하는 신세였다. 하염없이 추적거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다 막막함에 눈을 감자 최근 삼 년간의 어머니의 모습이 엉금엉금 걸어오며 나를 후회의 늪으로 잡아끌었다. 미수의 어머니는 거동이 힘겨운 상태에서 경주 산내 산골에서 홀로 기거하고 계셨다. 슬레이트 지붕의 방은 겨울이면 전기장판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덮는 이불만 세 개를 보태 겨울을 나던 어머니였다. 한 달에 서너 번 찾아가 한 끼 밥을 같이 먹고 몇 푼의 돈을 마른 풀잎 같은 손에 올려주면 어머니는 머릿속 가계부를 꺼내 읽으셨다. 지난번에 주고 간 돈으로 수도세, 전기세, 유선 세, 전화세, 나 약 조금 사 먹었다. 그리곤 덧붙이는 말은 매번 똑같았다. “돈을 너무 많이 써 미안하다.” 겨울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산내에 도착했다. 내 손으로 밥을 지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전기밥솥을 열었다. 밥솥에 밥이 반 이상이다. 한눈에 봐도 풀기가 없었다. “언제 한 밥이요?” “어제 아래” 어머니는 이틀을 먹었는데 며칠은 더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지 말고 때마다 따뜻한 밥을 해 먹으소,” 그러자 어머니는 잠시 잠깐 나를 쳐다보시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가 얼어 물이 안 나온다.” 어머니는 요 며칠 동안 주전자를 들고 약 오십 미터 떨어진 이웃집에서 물을 떠 와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을 떠 오는 일이 너무 힘이 들어 며칠 먹을 밥을 한꺼번에 짓는다는 설명이었다. 걷기가 힘겨운 어머니에겐 이웃집이 십 리 산길이었음을 난 모르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기어이 구름사다리를 타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다. 봄비가 질척거리는 날이었다. 암울한 시대에 여자 홀몸으로 사 형제를 키워 낸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어머니의 나이 91세였다. 2010년 4월 18일 어머니의 인생 종착역 도착 일력日曆이 삭풍에 시달려온 조락처럼 구겨져 비에 젖고 있었다. 그동안 나의 모든 행동들은 후회투성이고 갚을 수 없는 빚이었다. 어머니 은행은 핏줄이라는 담보에 은행자산 전부를 대출하고도 빚 독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은행이 파산하도록 나는 원금 한 푼 갚지 않은 나쁜 채권자였다. 눈을 감았다. 까만 허공 무대에선 삼십 대에 홀로되어 유복자(遺腹子)까지 사 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생의 기록이 기억영상물레에서 실처럼 풀려나오고 있었다. 영상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강물에 씻긴 오석烏石처럼 선명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내 나이 여덟 살이었다. 막냇동생은 어머니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엄마는 종잇장처럼 구겨진 삼베 치마저고리에, 머리엔 새끼줄을 동여매고, 온몸을 대나무 지팡이에 의지 짚신을 끌며 근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비틀 상여 뒤를 따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짜낸 탓인지 목에서 게워내는 울음소리는 처량했다. 동네 사람들이 눈물을 훔치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홀몸으로 저 어린 것들을 어찌 키우노” 나는 그 중한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상여가 구불구불 아랫마을 앞을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 가파른 황토 언덕을 올라가자 나는 저만치 떨어져 어기적거렸다. 누군가가 나의 손을 끌어 상여 뒤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밀어 넣었다.  (계속)  

2018-07-07 05:00:00

[2018 시니어문학상] 대상-논픽션 당선소감- 김영관 '뒤로의 여행'

전화를 받고 한참 동안 멍했다. 정신을 차리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힘들게 걸어온 길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고 최근 몇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그동안 나는 나에게 소질이 없다며 면박만 준 것이 미안했다. 오늘만큼은 내가 나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막걸리도 한 잔 권하고 싶었다. 두 번째는 내 글의 최고 애독자이면서 내 글에 관심이 많은 두 손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로서 괜찮은 자랑거리를 만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세 번째는 내 머릿속의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 가슴에 담아보니 감사해야 할 일이 참 많았다. 특히 내 가족은 힘든 삶을 지게에 지고 일어설 때마다 지팡이가 되어 주었고, 언덕길 오를 땐 내 장딴지 힘의 원천이었다. 무엇보다도 요즈음 유행어인 '소확행'의 생산기지였다. 나는 판단했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 그래서 삶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나는 다짐을 했다. 칠 학년의 무게를 마음속에서 내려놓고 내 가슴속 화덕에 글쓰기라는 장작을 가득 넣어 불을 지피자고…. 매일신문과 심사위원님들께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2018-07-06 05:00:00

[2018 시니어문학상] 당선소감-김길영 '바람의 사생활'

김길영  등단 3년 차인 내가 시를 써서 상을 받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 속살을 보이는 것 같아서 어디에 발표하지도 못했다. 이제는 여기저기 자랑하고픈 생각이 앞선다. 나이 들어서 상을 받는 다는 게 쑥스럽기도 하지만 한편 기쁘기도 하다. 글쓰기 도반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원했던 친척에게까지도 알리고 말았다. 이처럼 칭찬이라는 것이 어른 아이 막론하고 좋은 것이다. 지난 9년 동안 늦깎이 문학도로써 “늦게 배운 도둑이 밤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물 같아서 더욱 기쁘고 감개무량하다. 매일신문시니어문학상이 벌써 4회째를 맞는다. 대한민국 시니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시니어문학상에 참여할 수 있는 연령층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을 맞고 6.25전쟁을 겪었으며 4.19와 5.16, 12.12 같은 혼란 정국을 거쳤다. 더구나 IMF라는 국가부도 위기상황에서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세대들이다. 비록 우리가 몸은 늙었지만, 이제 굽은 허리를 펴고 희미해진 기억을 되살려 벌려놓은 마당에서 실컷 즐겨볼 만한 일이다. 나는 오늘 이 상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다음에도 다른 장르에 또 도전할 것이다. 내가 이 상을 받기까지 여러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텃밭시인학교 김동원, 이승주 시인, 푸른시창작원 강문숙 시인과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한다. 대한민국 시니어들에게 시니어문학상을 제정해 주신 매일신문사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면서 졸작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2018-07-06 05:00:00

김상연

[2018 시니어문학상] 당선소감-김상연 '질경이'

저는 평생 사업을 하느라 문학에 대한 곁눈질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일단 시작하면 대차대조표를 무시하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렇게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오다가, 어느 날 거울 속에서 다 늙어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그토록 힘들게 살아왔는가 싶고, 나도 이제 좀 편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그동안 애써 키워온 사업을 정리했습니다. 사업을 그만두면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채 일 개월도 안 되어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 없이 무엇엔가 쫓기는 사람처럼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몸은 쉬고 있어도 정신이 쉬지 못하니 진정한 휴식 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왔던 커다란 기둥이 뽑혀나간 것처럼 삶의 의미와 목적까지 잃고 한동안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앞으로 노후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생각 끝에 글을 쓰는 일이 새로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일이 될 수 있겠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때부터 수필과 시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일을 하듯이 참으로 열심히 썼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문학상 공모 공고문을 봤습니다. 그 공고문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내가 써온 작품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평가받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응모했습니다. 그러나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당선의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문학이 내 노년의 황량한 들판에 새로운 삶의 등불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이렇게 큰 기쁨을 안겨주신 시니어 문학상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여러 가지 힘든 감정에 시달리고 있는 노인들을 위해 제정한 문학상이기에 더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받은 이 상에 걸맞은 진정한 시인이 되도록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2018-07-06 05:00:00

[2018 시니어문학상] 수필 당선소감- '어미, 비나리가 되려하다'

김순향 수필 당선인 아들의 갑작스러운 출가는 평온하던 삶을 강타한 태풍이었습니다. 인연 맺었던 사람들과의 교류는 이어졌지만 그들에게 복닥거리는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 없었지요. 털어놓지 못해 활활 타는 장작불이 되었던 나는 수필 쓰기로 생 속을 다스렸습니다. 글을 쓰면서 내려놓는 법과 기다림을 배우며 뭉근한 숯불이 되어갔습니다. 한 때는, 간곡히 말리는 부모를 뿌리치고 제 갈길 찾아 간 아들을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괘씸한 생각도 잊어지고, 지금은 계절 바뀔 때쯤이면 한 번씩 들려주는 수화기 너머 아들의 목소리가 그지없이 반갑습니다. 이 모두가 늘그막에 만난 수필의 선물입니다. 수필은 내면의 이야기들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어 편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글 속에 쏟아내며 감정을 추슬렀지요. 감추고 싶은 상처도 과감 없이 글 속에 담아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비로소 좁았던 시야도 점차 넓어져 갔습니다. 앞으로도 지난 삶과 펼쳐질 새 삶의 체험을 진솔하게 담아내며 따뜻함이 배어 있는 수필을 쓰 보려고 합니다. 따뜻한 수필로 사람들의 마음을 데우고 싶은 야무진 꿈도 꿔봅니다 이 글은 지금도 큰아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일가친척과 친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친정식구들이 이 글을 만나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더없이 행복해하니 그의 가는 길이 복되기를 함께 기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의 부족한 글 보듬어 주시고 늦게 만난 수필에서 당선소감을 쓸 기회를 주신 대구 매일 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글쓰기의 끈을 놓지 않도록 격려하고 다독여 주신 오영수 문학관 선생님과 서로를 다독이던 문우들께도 고마운 말씀 전합니다. 2018년 6월 김순향  

2018-07-06 05:00:00

김종욱 수필가

[2018 시니어문학상] 수필 심사평-수필은 성깔 있는 쏘가리 같은 글

시니어 문학상은 그 의미가 깊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시대에 나이 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매일신문사가 전국 언론사 가운데 최초로 제정 운영하고 있는 야심찬 프로그램이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이 땅의 시니어 세대는 가난과 폐허, 절망과 상처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우리네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경제 대국으로 자리 잡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고단한 삶을 헤쳐 온 세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들었다고 해서 뒷전으로 물러나게 하거나 쓸모없는 늙은이 취급을 당하고 있다. 더러는'인생 다 살았네'하면서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늙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매일시니어문학상은 올해로 네 번째를 맞는데, 수필부문만 하더라도 618편의 작품이 접수되었다. 지역별로 보아도 대구는 물론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응모하였고, 연령층도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심사에 앞서 토론을 거쳐 기준을 마련하였다. 신춘문예와 달리 문학성보다 치열한 삶의 흔적에 무게를 두기로 하고, 아울러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발굴 소개하는데 중점을 두기로 하였다. 또한 수필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에 충실한가를 깊이 있게 따져보았다. 흔히들 수필은 신변잡사를 자유롭게 쓰는 글쯤으로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붓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쓰는 쉬운 글이라는 생각이다. 지역에 흩어져 있는 수필교실에서도 문학이론에 바탕을 둔 체계적인 지도보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에 치중하고 있다. 그리하여 등단을 하거나 수필집이라도 내고 나면 대가연하며 우쭐거리는 모습이 우리네 현실이다. 하지만 수필은 그렇게 만만한 문학 장르가 아니다. 제목에서부터 문장 다듬기에 이르기까지 품격을 상실하면 잡문이 되고 만다. 물고기로 비유하자면 성깔 있는 수필이다. 응모작품을 두 사람이 나누어서 읽었다. 다시 바꿔서 읽으면서 당선작의 배수에 해당하는 작품을 가려 뽑았다. 그리고 당선작이 아닌 함께 제출한 다른 작품의 수준도 참작하였다. 결코 수월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김현숙의 「내 영혼의 까치발」, 류재흥의 「지심도 동백」, 김순향의 「어미, 비나리가 되려하다」, 김정래의 「고급 노숙자」, 정경용의 「씨름 혹은 싸움」, 정순연의 「두 개의 삼베이불」, 김철순의 「매화 향기를 배다」, 신송우의 「이름 짓기」, 최상근의 「낮달」, 장기성의 「달빛 상념」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자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어깨를 펴고 환하게 웃으며 일상을 가꾸시기 바란다. 그와 함께 뽑히지 못한 분들에게도 다시 도전하시기 바라며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아무쪼록 시니어 문학상이 나이 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의욕을 북돋워 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매일신문사에 성원을 보낸다. 심사위원=김종욱․허창옥

2018-07-06 05:00:00

[2018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심사평-"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붙들고"

시니어 문학상은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 이겨낸 분들에게 드리는 표창장이다. 전쟁과 가난의 모진 고개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시니어들에게 드리는 박수이다. 이번에 응모한 논픽션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역사가 만든 역경 속에서도 의지와 희망을 품고 견뎌낸 보통 사람들을 읽을 수 있었다. 세월을 탓하기보다 부모를 모시기 위해 참고 자식을 돌보기 위해 내일을 기약하며 살아온 착한 사람들을 보았다. 응모작품을 쓰면서 스스로의 삶을 반추하고 이 과정에서 지난한 세월을 치유하는 시간이 되었기를 기대한다. 문학이 가지는 치유의 힘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인생의 연륜이 드러나는 응모작들은 소재 면에서 전쟁과 어머니, 학도병, 가난이 가져온 시련, 학창시절 선생님과의 사건이 평생 자신을 좌우했던 일 등 다양함이 돋보였다. 주제 면에서는 기어코 이겨냈다는 미덕이 주류를 이루었다. 전쟁의 참상과 시대가 만든 가난이 현재의 풍요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시니어 문학상만이 가지는 특징이자 장점일 것이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아내가 남편이 하던 사업을 맡아 경영하는 분투기,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빈궁하게 자라다 사춘기 시절에는 당숙모집에서 식모살이까지 했지만 배움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소녀가 시골에서 도시로 나와 살아가는 성장기, 지독한 가난과 그로 인한 병마를 딛고 주위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의사로 성공하고 이후 봉사로 인생 후반을 살아가는 과정들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응모작 중에서 세 작품이 최종심사에 올랐다. 6.25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주인공이 전장의 비참함과 무서움을 진술한 '노병의 증언'과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 가족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성공을 하겠다고 미국으로 건너가 언어의 장벽과 인종차별을 이기고 우체국 직원이 된 사연을 그린 '어느 낙엽의 시', 노모를 하늘나라로 보낸 후 가난이 삶의 전부였던 어머니와의 시간을 거슬러 회상하는 "뒤로의 여행"이 그것이다. 익숙한 구성이지만 탄탄한 문장력과 생에 대한 깊은 사유로 끝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뒤로의 여행"을 대상으로 선정했다. 어머니와의 회고를 마치며 삶이란 작은 행복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전한다. 평범함 속에 깊은 울림이 있다. 또한 '삶이란 주문을 외우며 헤쳐 나가는 가시덤불'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고단한 삶이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 주문이란 사랑이고 희망이 아닐까. 응모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며 수상자들에게 축하를 전합니다. 심사위원= 박덕규 · 엄창석 ‧ 이미영

2018-07-06 05:00:00

[2018 시니어문학상] 시 당선작 1-질경이

철심처럼 질기고 질긴 잡초라는 이름으로 짓밟고 가는 자들 힘 빌려 새 길 열고 혼 벼린 담금질 속에 고봉밥 소박한 꿈 큰 줄기 욕심 없이 꽃으로도 자랑 않고 밤이슬 목 축이고 빗물로 살지라도 구차히 구걸하지 않아 더 빛나는 저 궁핍 이유 없이 짓밟고 무시하고 차별해도 저린 가슴 삭혀가며 숨죽이고 바짝 엎드려 약한 듯 뿌리 깊은 삶, 천년 지혜 배였다

2018-07-06 05:00:00

[2018 시니어문학상] 시 당선작-바람의 사생활

   몸을 섞는 데는 이골이 난 선수다.   병적인 역마살로 정처 없이 쏘다닐 줄은 알아도 직각보행을 배우지 못했다며 갈팡질팡 걷는다.   더듬이 촉을 세우고 떼 지어 다니다가 누구라도 멱살 잡히면 깡패의 행패는 저리 가라한다.   통통한 부분을 주삿바늘로 콕 찌르면 피-이 피-이 소리를 내며 죽는 시늉을 한다.   부풀었던 몸체가 금세 쭈글쭈글 해지는가 하면 흔적을 남기기 위해선 냄새를 아무데나 풍기고 다닌다.   가장 작게 최적화된 몸체로 물방울 속에 웅크릴 줄도 안다.   말랑말랑한 살결에 서릿발 가시가 꽂혀있어 슬쩍 대이기만 해도 상처가 난다.   이슥한 밤에는 담을 타넘고 들어와 창문에 대고 쇳소리 휘파람을 분다.   비맞은 어깨를 용케도 찾아내어 삭신을 쑤셔대다가 뼈 속에 구멍을 송송 내기도 한다.   여래처럼 열반에 들기도 하고, 예수처럼 부활도 한다.   하루해가 지루하다 싶으면 짱짱한 바다를 주름잡았다 펴기도 하고 하늘을 들어 올렸다 끌어내렸다 야단법석을 떤다.  

2018-07-06 05:00:00

[2018 시니어문학상] 수필 당선작-어미, 비나리가 되려하다

아침만 해도 햇살이 보였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니 비가 내리더니 어느새 가지산 골바람을 타고 눈이 되어 창을 흔든다. 볕이 들다가 바람과 눈이 되어 내리는 날씨는 아들의 승가대학 졸업 날짜를 받아 든 내 마음과 꼭 닮은꼴이다. 큰 아들은 우리 집 대들보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후 중국에서, 대만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 중국사를 공부한 아들은 국내 대학의 교수로 거론되고 있었고 좋은 곳에서 중매도 들어와서 어미로서의 핑크빛 꿈을 꾸고 있었다. 몇 해 전, 잠시 귀국했던 큰아이가 스승과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며 상경했었다. 달포가 지났지만 연락이 없었고 휴대폰도 꺼져 있었다. 워낙 착실한 아이였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기에 두루두루 만나서 회포를 풀고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안한 마음을 애써 잠재웠다. 수필 삽화  권수정 그 해, 땡볕이 내리쬐던 칠월 스무날, 우편함에 꽂혀 있던 편지 한 통이 우리 부부를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발신지는 잘 알려진 사찰이었다. 서너 줄을 읽던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팽그르르 하늘이 도는가 싶더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부모님 전상서, 오랫동안의 소망으로 많이 번민하였습니다. 부처님께 귀 의하여 포교활동을 하며 좀 더 가치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중략 ”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달려간 절에서는 아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삼대가 적선을 하여야 가문에서 중이 나온다는 말로 우리를 회유하려고 하였다. 우리가 좀 체 돌아갈 기미가 없자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들은 죄인인 양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가자는 말엔 완강히 거절하여 속수무책이었다. 살아오면서 이처럼 무력한 적은 없었다. 절문을 내려오며 작은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밤인데도 천 리 길을 득달같이 달려와서 큰 아들을 데리러 갔다. 그러나 만날 수가 없었다. 가족들의 거친 항변에 겨우 종무소로 나온 큰 아들이었다. 맙소사! 하룻밤 사이에 삭발을 하고 행자 승복을 입고 있었다. 작은 아들은 울부짖었다. 죄인 닦달하듯 몰아붙이는 동생에게 한마디도 못하는 큰 녀석과 흥분을 삼키지 못하는 작은 녀석을 보는 가슴은 아리다 못해 짓이겨졌다. 대만에 있는 짐을 가져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책은 이미 대학에 기증을 했고 옷이랑 소지품은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왔다고 했다. 아까웠다. 돈만 생기면 책을 사는 녀석이기에 내가 중국에 갔을 때도, 대만에 갔을 때도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세상 무엇보다 책을 아끼던 아들이었기에 이미 가족들의 만류도 소용없음을 알았다. 절에 들어 온지 한 달 남짓인데 손이 헤지고 습진이 돋아났다. 하루 종일 일을 하며 수행이란 이름으로 다독이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렸다. 남편은 자식도 내 것이 아니라 세상에 와서 빌려 쓰는 것이라고 나를 달랬다.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알고 살아 온 것이 죄가 되어 이리도 아팠다. 돌아오는 차 속에선 쓰린 속 감춘 채 속울음만 삼키는 남편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아들의 행자 승 생활이 끝나갈 즈음 우리는 이사를 했다. 삼십 년이나 정들었던 집과 이웃들이다. 승복을 입은 아들을 본집에 들일 수 없어서 이사를 했지만 묵은 정을 떼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었다. 아직도 아들의 출가를 알리지 않았고 나는 모임에 참석을 하지 않아 오해를 받기도 한다. 신 새벽이면 멀기만 한 불혹의 살점 하나로 나는 명치부터 아렸다. 삭풍 부는 동지섣달에는 새벽 버스에 눈을 박으며 중얼거렸다. 저 버스만 집어타면 늙은 햇 중을 볼 수 있는데, 산중 얼음물에 마음 베이지는 않았는지, 살 에는 새벽예불에 두 귀는 무사한지, 눈도 귀도 먹먹해진 어미는 길에다 안부를 물었다. 그 애물단지가 오랜만에 세상 집에를 왔다. 귀가한 승복을 다림질 하는 아린 모정이 회색장삼 위로 방울방울 번졌다. 채식으로 허약해졌을 속을 다스리려고 등심과 낙엽살, 제비추리도 넘치도록 구웠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대던 모습에 얼마나 흐뭇해했던 지난날인가, 그러나 줄어 든 것은 채소 반찬과 김 한 쟁반이다. 먹성도 입성도 이미 속가를 벗어났다.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등짝엔 바랑 가득 어미 눈물만 지고 떠났다. 시큰거리는 것은 저도 매한가진지 한 번 쯤 돌아보련만 끝내 뒤통수만 남겼다. 부모가 사력을 다해 말리던 그 길을 타고 난 제 길처럼 잘도 가지만 나는 미련에 통째로 젖어 허우적댔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내가 중 어미가 되리라 상상이나 했던가? 잦아드는 햇살로 나의 삶도 한 뼘 남짓 남았을 뿐 그리 길지 않음을 안다. 아들의 졸업식에도 동참하여 축하해 주리라. 꺼진 횃불이어도 자식은 가슴에 담아야 한다. 나는 법랍이 낮은 아들의 성불을 위해 기꺼이 비나리가 될 것이다.        

2018-07-06 05:00:00

[2018 시니어문학상] 대상- 논픽션 '뒤로의 여행'/ (삶은 주문을 외우며 헤쳐 나가는 가시덤불)

그날 이후 체험으로 조금씩 깨달아갔다. 엄마가 푸성귀 가득 담은 함지박을 머리에 얹고 하루 두 번 읍내 십 리 장을 갔다 와야 보리밥을 먹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엄마의 손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손톱은 문드러지고 까만 얼굴 가득 주름은 나날이 깊어졌다. 허리는 수태골 비탈밭 잡초가 휘어잡아 초승달을 닮아갔다. 그 허리로 깨밭에서 긴긴 여름 해와 씨름 할 때 하얀 깨꽃이 무리 지어 위로했지만, 엄마의 신음 한숨은 깊어만 갔다. 보리가 패기 시작하면 우리 집은 때를 걸려야 할 때가 다반사였다. 초등학교 삼학년 초여름이었다. 하교 시에 내일 도시락을 싸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와 반 친구들은 환호했다. 선생님은 야외 교장인 뫼 등에서 도시락을 먹을 거라고 설명해주셨다. 당시 6, 25전쟁으로 학교 본 건물은 군인들이 막사로 쓰고 우린 공동묘지 옆 산자락에 다닥다닥 지은 판자 교실에서 수업할 때였다. 책 보따리를 풀어 마루에 던지고 저수지 위 골짜기 끝에 있는 우리 밭으로 뛰었다. “엄마……,엄마.” 콩밭에서 유월의 뙤약볕을 휜 등줄기로 받아내던 엄마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당했다.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세상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나는 엄마 앞에 턱 버티고 서며 말했다. “엄마, 선생님이 내일 도시락 싸 오래 도시락” 그제 서야 엄마는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곤 칭얼대는 동생을 내 등에 올려주며 힘없이 말했다. “동생 업어 재우고 책 좀 읽어라.” 난 잠을 설쳐 꿈도 꾸지 못했다. 타다…… 타. 아궁이 불 지피는 소리에 부엌 봉창 문을 밀었다. 엄마가 도시락 싸는 걸 보고 싶었다. 문턱에 턱을 괴고 기다리길 한참 까만 솥뚜껑이 열리고 하얀 김이 솟아오르자 풍기는 냄새에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느 밥 냄새와는 달랐다. 구수하고 달콤했다. 솥을 들여다봤다. 이 밥이 누런 보리밥 한가운데 보석처럼 빤짝이고 있었다. 그 시절 이밥은 조상제사 때나 명절 때 어쩌다 맛보는 밥이었다. 엄마는 내 도시락에 이밥을 담고 남은 보리밥으로 밥그릇 네 개를 채우자 솥엔 더는 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린 사형제였다. 엄마는 솥에 물을 부어 나무 주걱으로 휙휙 저어 멀건 숭늉으로 엄마 밥그릇을 채웠다. 아침 밥상에서 엄마는 숭늉 그릇에서 사금 고르듯 보리 밥알 건져 올려 숟가락 꽁무니로 날된장을 찍어 오물거리며 허겁지겁 밥 먹는 우리를 쳐다보는 눈빛이 애잔했다. 나는 계란 반숙이 얹어진 도시락을 책 보따리에 싸며 오직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까먹을 생각만이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산 고개를 넘으며 나는 깡충깡충 신나했다. 두 아이를 키우며 깨달았다. 그날 엄마는 한 술도 뜨지 못한 빈 가마니 배로 산비탈 밭에서 긴긴 여름 해를 서산으로 밀어 넘긴 고난(苦難)을, 나의 그 추억은 가슴속 멍울이 되어 세월 따라 커져만 갔다. 이어지는 영상은 동짓날이었다. 밀기울 수제비로 배를 채우고 잠을 잤다. 으스스함에 잠이 깼다. 얇은 이불로 몸을 말아 문풍지 틈새로 들어오는 얼음 바람을 막으며 코를 골고 있어야 할 엄마가 없었다. 나는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귀를 쫑긋거렸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끊어지길 반복했다. 이불을 어깨에 걸치고 방문 앞으로 기어갔다. 황소바람 드나드는 문틈에 외눈을 박고 밖을 내다봤다. 엄마였다. 희뿌연 달빛 아래 장독대 뚜껑 위에 팥죽 한 그릇과 정한 수 한 사발을 올려놓고 초승달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며 두 손을 비비고 있었다. 아마도 정한 수는 꼭두새벽에 아랫마을 가는 길 언덕 아래에 있는 우물에서 떠온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팥죽은 봄부터 여름내 싸리나무 울타리에서 키운 팥 한 종지를 엄마만이 아는 장소에 보관해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자식들 무병장수하게 하여주시고, 세끼 밥 따뜻하게 먹게 하여주시고, 많이 배우게 해주시고.” 엄마는 차가운 새벽바람과 맞서며 자식들만은 어둠보다 더 까만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머리에 하얀 이슬이 방울방울 맺히고 있었다. 아랫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가 찬 공기를 가르며 달려오고, 옆집에서 쇠죽 끓이는 시큼한 내음이 담장을 넘어 내 코로 들어왔다. 나도 빌었다. 엄마의 시린 손이, 휜 허리가, 굳어지기 전에 기도가 끝나기를,…… 그날의 그 기억은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동지는 나에겐 특별한 날이 되었다. 동지가 다가오면 아내가 묻는다. “올해도 팥죽을 끓여야 하느냐고?” 나는 가슴속 멍울을 만지며 고개를 끄떡인다. 아내가 다시 따지듯 되묻는다. “팥죽 먹을 거냐고,” 나는 또 고개만 끄떡인다. 아내는 입을 삐죽거리며 팥을 팍팍 힘주어 씻었다. 내가 팥죽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며칠 동안 팥죽을 먹어야 하는 아내로선 팥죽 끓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나는 매년 동짓날에는 어김없이 아내의 불만을 흘려들으며 아내가 팥죽을 끊이는 동안 나 혼자의 기도는 길고 간절해졌다. 다음으로 풀려나온 기억 필름은 화장실 청소 당번이었다. 초등학교 사학년 가을이었다. 종례 종이 울리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은 지저분했다. 청소에 필요한 물도 교실 세 개를 지나쳐 가야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압감을 주는 건 청소 후 선생님의 검사를 받아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숨 가쁘게 청소를 끝냈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서산 위에서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낮에도 귀신 나온다는 공동묘지를 지나 산 고개 두 개를 넘어야 했다. 기다리는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나오시지 않았다. 나는 안절부절 교무실 앞까지 갔다 되돌아오기를 몇 번 그러다 생각했다. 어두운 밤에 홀로 공동묘지와 산 고개를 넘는 것과 교무실 문을 미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무서운지,…… 그래도 밤중에 공동묘지와 산을 넘는 것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았다. 교무실 문을 열고 주뼛주뼛 거리며 선생님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서야 선생님은 생각났다는 듯 집에 가라는 손짓을 했다. 학교를 벗어나자 노을 속으로 어둠의 띠가 사바나 강을 향해 가는 누우 무리처럼 길게 얼룩지고 있었다. 웅긋쭝긋 솟아있는 공동묘지를 지나면서부터 나는 울음과 숨을 동시에 턱에 걸었다. 어스름한 묘 사이사이에서 근방이라도 도깨비 불빛이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갈 것 같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동생들도 보고 싶었다.  

2018-07-06 05:00:00

편지…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윤숙현

책장을 정리하다가 옥천댁 앞이라고 쓴 편지 한통을 발견했다. 책갈피에 찔러놓은 체 오랫동안 까맣게 잊었던 편지가 기억의 저편으로 나를 데려갔다. 내가 옥천댁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 조부모님은 고향본가에 사셨고 우리 자매들은 학교 때문에 읍내에서 따로 살았다. 나는 조석으로 할아버지 댁에 들러 할머니의 식사준비를 도왔다. 너무나 권위적인 할아버지가 무서워 우린 서로 가라고 미루다가 끝내 가위 바위 보로 순번을 정했다. 할머니는 어린 동생보다는 내가 와 주기를 바라고 용돈도 주시며 구슬리곤 하셨다. 어느 날 할아버지 집에 가보니 산뜻한 색깔의 한복을 입은 낯선 여자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본 그녀는 "네가 현이구나," 라고 알은 체를 하며 살갑게 웃었다. 그리고 상차림을 마친 그녀는 할머니에게" 어머니 갔다가 내일 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애썼다며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 말씨나 눈빛은 정감이 가득 넘쳤다. 그녀와 할머니가 하는 말을 듣고 짐작은 했지만 그 여자가 말로만 들어오던 아버지의 첩 옥천댁 이었다. 집에만 있는 엄마보다 젊고 예쁘게 보였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이 옥천댁 때문에 엄마가 또 약을 먹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아버지의 바람기 때문에 엄마가 약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엄마는 웃음을 잃고 말수도 적어졌다. 가끔 "내가 어서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하는데..."하면서 한숨만 내쉬었다. 딸만 다섯을 낳은 엄마는 밖으로만 도는 아버지를 거의 포기한 듯 했다. 아버지가 또 새 여자를 봤다는 소문이 들리면 "잘난 사내 열 기집 못 거느리겠냐." 그렇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봉건주의적 유교사상이 몸에 배인 할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부덕을 갖춘 지혜로운 며느리라고 칭찬했다. 엄마는 안주인의 체통과 예의범절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러나 정작 남편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었으니 아내로서의 삶에 무슨 낙이 있었을까? 엄마는 약을 먹은 후유증으로 위장이 상해 음식을 맘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가끔 음식물을 게워 내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항상 겁이 났다. 만약 엄마가 죽으면 그 자리는 옥천댁 차지가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싫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외도는 대부분 그냥 스쳐가는 바람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옥천댁 과는 정이 꽤 깊은 것 같았다. 나는 그 여자가 우리가 받아야할 사랑을 빼앗는다고 생각하니 증오심이 싹텄고 아버지도 미웠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가 임신을 했다. 이번에는 꼭 남동생을 낳아 아버지를 집으로 오시게 해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무렵 옥천댁도 임신을 했다. 나는 만약 옥천댁이 아들을 낳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옥천댁 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 다음날 옥천 댁을 찾아가서 밤새 끙끙거리며 쓴 편지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와버렸다. 엄마가 곧 동생을 낳을 테니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내용이었다. 동생들은 철도 없이 잘 대해주는 옥천 댁을 따랐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아버지 곁에 있는 이상 엄마의 마음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아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읽은 옥천 댁은 그 후 나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망설이다가 울먹이며 "네 엄마가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는 집으로 가실거야" 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아들을 낳으면 자기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그렇게 오매불망 원하던 아들을 낳았다. 우리 자매들과 엄마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동생의 재롱으로 집안에는 생기가 돌았다. 바람이란 어떤 위력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할퀴고 지나간 상흔이 얼마나 깊었던지 엄마는 여전히 쉽게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이제 옥천댁은 아버지와 사랑이라는 일시적인 회오리바람 속에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가 남동생의 출생으로 첩의 자리를 내어 놓아야할 벼랑에 서게 되었다. 어느 날, 남동생을 안고 가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옥천댁 이었다. 많이 수척해 보이던 그녀는 내게서 동생을 빼앗듯이 받아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 남동생에 대한 애증이 한꺼번에 밀려드는지 팔을 부르르 떨었다. 뭔가 쉽지 않은 용단을 내린 듯, 이제 자기를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를 지우고 떠날 준비를 했던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모성애를 포기했다고 생각되어 그동안 그녀를 무작정 미워했던 마음에 갑자기 죄의식이 확, 밀려와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또 다시 한 통의 편지를 써들고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그녀를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니 빈방을 지키고 있던 그녀가 반갑게 맞았다. 그냥 편지만 건네주고 돌아오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내손을 억지로 잡아끌어 안으로 들였다. 처음으로 본 작은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랫목 벽에 쳐진 수놓은 횃댓보가 신혼 방 같았다. 낮 익은 아버지의 옷도 긴 못에 걸려있었다. 옥천 댁은 내 나이 때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면서 책상위에 쌓인 책 중에서 시집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지적 수준에 순간 위축감을 느꼈다. 엄마와 우리에게도 미안하다면서 "나도 내가 이렇게 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했다. 정말 그랬을 것이다. 숨어서 불안한 마음으로 가정이 있는 남자와 떳떳하지 못한 삶을 누군들 살고 싶을까? 남의 자리에 끼어들어 살지만 옥천댁은 첩으로 손가락질 받고 살기에는 품성이 아까운 여자였다. 엄마도 딸이 많으니 팔자타박은 못한다고 말하며 옥천댁에 대해 함부로 욕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동생을 많이 예뻐한다. 약속을 지켜주어 고맙다."고 옥천댁 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당신에게 다시는 돌아가지는 않을 거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나는 적어간 내용을 이미 말로 했기에 받은 시집 속에 편지를 슬쩍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얼마 후 옥천댁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 불던 바람도 잠잠해졌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는데 가슴 한편에 아릿한 통증이 남았다. 하지만 사춘기 때 겪은 마음의 상처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뒤늦게 아버지는 당신이 가족들에게 준 고통을 깨달았는지 엄마가 많이 아플 때면 자신의 죄 값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그런 고백에 위안을 받은 것처럼 엄마는 아버지께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가장으로써 권위를 잃은 아버지는 갈수록 왜소하고 풀이 죽어보였다. 나 역시 한때는 못 견딜 것 같았던 고통이 점차 하찮게 생각되며 아버지가 불쌍했다. 나는 조금씩 아버지를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항상 시랑고랑 아픈 엄마가 먼저 돌아가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 발인 전날,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밤늦게 옥천댁이 문상을 왔다. 몇 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삶의 고달픔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 결혼했지만 다시 혼자가 되었다고 했다. 혹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머뭇거리는 그 여자 손을 끌어당기다시피 하여 잡았다. 한 남자의 마음을 나누어 가지고 살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의 세월은 엄마나 옥천댁 모두 잊은듯했다. 두 여자는 다만 한 남자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나 역시 그동안 옥천댁 에게 편지를 계속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 끝맺음을 할 때가 되었다. 나는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마지막 줄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용서해달라고....그리고 내 편지 때문에 여자의 꿈을 포기했다면 나를 용서해달라고...

2017-10-10 13:57:42

종이 한 장…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박윤효

서재 겸 사무실로 쓰는 방을 정리한다. 강산이 한 번 바뀔 동안 쌓인 짐들이 한 트럭은 될 듯하다. 선생님이란 호칭이 쑥스럽기만 하던 것이, 제 자리인양 쌓여가는 물건 만큼이나 익숙해졌다. 책상을 학원문과 정면으로 보이게 배치했다. 분위기가 훨씬 좋아 보인다. 십여 년 전 인생의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한 가정주부에서 무언가 사회에 봉사하는 선생님으로 거듭나고 싶었다. 교육청에 등록할 서류가 여러 가지 필요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자격요건이었다. 방송통신대학교 정문에 서서 한 참을 서성거렸다. 위축되고 자신이 없었다. 자동 출력기 앞에 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심스럽게 이름과 전공학과와 학번을 눌렀다. 시원스럽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학위 증명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한다. 떨리는 손으로 가슴에 안고 읽고 또 읽었다. 이제 교육청에 제출할 서류를 다 갖추었다. 스스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여, 남편에게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종이 한 장의 소중함을 되새겨본다. 남들처럼 학창시절을 보내지 못한 서러움은 가슴 밑바닥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들의 학업이 올라갈수록 못난 부모가 될 까봐 두려웠다. 그 동안 사업하는 남편을 내조하면서 손에서 책을 놓아 본적이 없다. 크나큰 결심을 하고 대입시험을 위해 교육청에 체력장원서를 냈다. 남편에게 보여줬더니 한 숨만 쉬었다. 남편의 사업은 작은 업체라 경리일을 도와줘야했다. 또 아이들 뒷바라지며 시어머니 병수발 등 역할이 많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기는 무리였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방송통신 대학교였다. 스스로 공부하고, 출석일수도 적고, 등록금도 저렴하다. 하버드서원으로 원서상담을 받으러 갔다. 만학도가 많은지 인기학과는 불합격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안전하게 국어국문학과에 원서를 냈다. 겨울 끝자락 봄을 재촉하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만물을 소생 시키는 단비와 함께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반가움에 하루 종일 눈물을 질금거렸다. 왕언니라 불리며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고2학년 큰아들에 중3학년 작은아들, 그리고 나까지 남편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온 가족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에 언제나 흐뭇해하는 남편이 초인처럼 느껴졌다. 안 사람이 공부하려고 하면 허락은 고사하고 면전에서 타박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정규대학을 보내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기대에 저버리지 않으려고 학점관리에 충실했다. 가끔씩 출석수업을 하는 날이면 학교까지 등교를 시켜주는 남편이었다. 명실공이 나의 후견인이 되었다. 가정주부가 학업을 마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정 팔남매 시집 팔남매, 양가의 둘째라는 위치는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등 중요한 시험이 닥아 올라치면, 예기치 않던 크고 작은 일들이 발생했다. 밤새워 공부 했지만 형제들의 일 처리가 우선이었다. 그러다보면 시험시간을 맞춰서 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시험을 포기하려 하면 그 때 마다 남편의 한마디. "어렵게 시작한 일일수록 포기하지 마라 나중에 후회가 더 큰 법이다."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는 협력학교인 k대학교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곤 했다. 이러기를 팔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사 년제 대학이지만, 만학이라는 단점과 주부라는 입장을 저버릴 수 없는 처지여서, 영어학점 이수와 논문 쓰기에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었다. 처음의 마음으로 끝까지 후원을 아끼지 않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배움에 목말라 하던 내 인생의 맑은 샘물 같은 반려자요, 나의 키다리 아저씨이다. '한문학원교습소'는 자격지심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나에게 자존감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스로 아정(我庭)이라는 호를 지었다. 나의 뜰에서 묘목을 키우듯 아이들을 기르고 싶은 꿈을 꾸게 되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따갑다. 언감생심 학원 선생님이라니, 닥터설비나 하는 주제에. 백안시 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을까.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조심 한 발짝 씩 나아갔다. 앞쪽 벽에는 커다란 칠판을 설치하고, 뒤쪽 벽 전면에 천자문을 붓글씨로 정성을 다 하여 써서 붙였다. 제법 교실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처음 학부형이 상담을 하던 날, 마음은 무척 떨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를 보내겠다고 한다. 선생님이라 불러 줄 유일한 학생이 생겼다. 가슴이 뛴다. 꿈같은 현실이다. 어느 듯 한명이 스무 명이 되고, 학원수업은 무르익어갔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매일 쓰고 읽기를 학생들 보다 더욱 열심히 한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사자소학에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마지막 구절이 있다. '욕보심은 호천망극(欲報深恩 昊天罔極)'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하늘처럼 다함이 없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남편이 베푼 은혜가 이보다 못하지 않다는 생각에 이른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만이 은혜의 전부가 아닐 것이다. 남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애가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인간애의 근본은 효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학생들 마음에 조그마한 효의 싹을 심어주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될는지. 말끔하게 정리 된 책상 앞에 앉아서, 학생들의 수업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종이 한 장의 값어치를 가슴 깊이 생각하면서……

2017-10-10 13:56:36

笑而不答(소이부답)…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이원달

사람이 할 말이 있어도 그냥 웃어넘겨야 할 경우가 있다. 지난 사월 초, 먹던 약이 떨어져서 두 달 만에 병원을 찾아갔을 때였다. 여러 병원들이 한 건물 안에 모여 있어, 그 뒷마당에 공동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무단주차를 막기 위해서인지 전에는 없던 주차관리원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주차장에 들어서는 나에게 육십 대 전반으로 보이는 그 관리원은 주차권을 건네주면서 어느 병원을 방문했는지 확인도장을 받아오라고 한다. 그런데 3층에 올라가서 의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주차장에까지 내려와서야 비로소 호주머니 속의 주차권 생각이 났다. 확인도장 때문에 다시 승강기를 타고 오르내리기가 번거로워 관리원에게 주차권 대신에 처방전을 보여주었더니, 그는 "비뇨기과에 다녀왔습니까." 하며 내 아랫도리를 슬쩍 훔쳐본다. 그러고는 궁금증이 발동한 듯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냐고 묻는다. 전립선 비대를 앓고 있다고 하자, "아이고, 나도 전립선 비대입니다." 하며 반색을 한다. 同病相憐동병상련의 벗을 만난 것이 그리도 반가운 모양이었다. 이럴 때 가만히 있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서 나도 그의 증세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마치 나에게 하소연이나 하듯 이것저것 자기의 딱한 사정을 늘어놓는다. 소변을 보아도 도시 시원치가 않으며, 특히 밤에는 수도 없이 화장실에 들랑거리느라 마누라와의 잠자리 기분까지 잡쳐버리니, 혹시 이러다 남자 구실까지 못하게 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된다는 등. 내가 겪었던 초기의 증상 그대로였다. 나는 자동차 출입이 거의 끊어진 늦은 하오의 시간이어서 그동안의 내 경과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면서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차차 회복될 것이고, 또 수술이라는 마지막 수단도 남아있어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나의 말을 다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가 다시 말문을 연다. "실례입니다만 금년에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무언가를 더 캐내려는 듯한 이 질문에 나는 바로 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몇 살로 보이느냐 되물었다.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아무래도 얼추잡기가 쉽지 않은지, "환갑은 넘으신 것 같고…" 하며 끝을 맺지 못한다. 이 과분한 착각에 내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팔순잔치를 치룬지 몇 해가 된다고 하자, 그는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넉넉잡아 70대 초로 보이며, 흰 머리만 아니면 60대로도 보인다고 했다. 좋은 소리 들을 때 그만 물러가야겠다고 눈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아직은 작별할 때가 아니라는 듯 "선생님" 하면서 나를 불러 세운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얼굴에 야릇한 웃음까지 지으면서 한마디. "그건 잘 됩니까." 초면의 연장자에게 사생활의 은밀한 프라이버시까지 캐묻는 그의 당돌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 대해서 어찌 할까 잠시 망설이다 결국 나는 그냥 笑而不答하기로 하였다. 물론 '가까이하되 함부로 어울리지 않는' 和而不同화이부동의 군자다움을 보이자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자발없이 "잘 된다."고 대답했다간 더 짓궂은 질문 공세에 시달릴 것이 뻔하며, 그렇다고 그 반대로 대답하자니,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비칠 것만 같아 입을 다물기로 한 것뿐이다. 주차장을 빠져나와서도 내 마음은 그가 내게 던진 마지막 질문의 언저리를 내내 맴돌았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곁부축이라도 받아야 할 노물이었다면, 그가 나를 어떻게 대했을까. 아마 그는 연민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아무런 호기심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얼굴에 야릇한 웃음까지 지으면서 야하디야한 질문을 주저치 않았던 까닭은 분명 그의 눈에 내가 아직은 그런 불쌍한 노물이 아닐 뿐더러 지금도 남자의 반열에 떳떳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백발만 아니면 60대로도 보인다고 했는데, 그것이 한낱 공치사만은 아니었을 터이고… 어쩌면 제자랑 같기도 한 자문자답 하느라 얼마가 지났는지, 어느덧 땅거미

2017-10-10 13:55:08

빈집…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배정순

어느 날 통로 현관 앞에 폐기 처분하듯 마구잡이로 끌려 나온 이삿짐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속 불편한 사람이 오물을 토해내 놓은 듯 뒤죽박죽이었다. 꽤 괜찮은 물건들도 더러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은 끄는 건 윤이 자르르 흐르는 장 단지였다. "장 단지가 참 곱네요." 했더니, 이삿짐센터 인부가 "필요하면 가져 가이소" 한다. 탐이 나는 단지를 골라 얼른 엘리베이터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다 싶어 주인을 찾았더니 만날 수가 없다. 인부의 말이 장독의 주인은 윗집 할머니라고 했다. 순간 흠칫했다. 횡재했다고 좋아하던 마음이 싸늘히 식어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단지를 슬그머니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장 단지로 인해 어르신의 외로움이, 병증이 나에게 옮겨붙을 것 같아 께름칙했다. 인부들은 이삿짐을 마구잡이로 트럭에 싣고 있었다. 버려지는 가재도구가 마치 윗집 할머니 모습 같아 짠했다. 윗집에 올라가 보니 할머니가 계실 때는 벨을 눌러도 열리지 않던 문이 활짝 열려 속살을 훤히 드러내 놓고 있다. 우리 집 위층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다. 층간 소음으로 갈등이 잦은 요즘 아래층에 사는 우리로선 시끄럽지 않아 좋았다. 윗집 할머니가 어떤 분이실까 궁금했다. 이사 떡을 돌리는데도 유독 윗집만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도 늙어서일까, 은근히 마음이 쓰였다. 그 후로도 먹을거리를 들고 찾아갔지만,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앞집 얘기로는 원래 할머니는 바깥세상이 두렵다며 문을 잘 열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우연히 할머니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교사 출신으로 정년퇴직해 혼자 살고 있으며, 명문대를 나와 성공한 두 아들이 있다고 했다. 하루는 분리수거장에서 여느 어르신과 달리 기품이 있어 보이는 할머니를 만났다. 내심 반가운 마음에 "혹여 우리 윗집 어르신이 아니신가요?"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경계하는 표정으로 낯설게 나를 바라보았다. 가냘픈 체형에 외로움이 묻어났다. 할머니 뵙지 못한지 몇 달이 지났나 보다. 뜻밖에 할머니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손질하지 않은 반백의 머리는 어깨 위에 어지럽게 늘어져 있고, 옷매무새도 전에 뵙던 모습과는 달랐다. 귀도 어둡다는 분이 물 내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며 우리 집에서 물을 쓰고 있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랫집에 와 물을 사안은 아닌 것 같아 "어르신 윗집에 가셔서 물어보시지요." 했더니 이미 확인을 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시설에 들어갈 것을 권했더니 자식들 체면 깎인다며 말도 못 붙이게 했다.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그 자식들은 알까? 내 안의 신체적 변화도 감지하지 못하고 밖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니 보통 일은 아니었다. 역시나 본인은 치매 증상을 갖고 있어서 정신이 없다고 했다. 일흔을 조금 넘은 분이다. 다른 노인들처럼 아파트 단지 내의 노인정이라도 나가 사람 냄새를 맡고 살았더라면 저리되지는 않았을 텐데. 많이 배웠다는 게 되레 이웃과 어울리는 데 걸림돌은 아니었을까? 할머니가 저 지경인데 누구도 돌보는 기척이 없다. 정신없는 중에도 아들 체면 생각하고 시설입소를 거부하던 할머니는 병증이 심해지자 그 아들 손에 의해 요양병원에 들어갔다. 이게 어디 윗집 할머니만의 일일까. 오늘따라 묵묵한 윗집의 동정이 썰렁하기만 하다.

2017-10-10 13:53:56

봉사하며 얻은 새로운 삶…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이형태

쫓고 쫓느라 바쁜 세상 시간을 할애하고 봉사하는 삶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재능이 있고 타고난 소질이 있다. 처음 시작이 어려울 뿐이다. 베트남전 참전 후 알지 못하는 사이 서서히 신장기능이 나빠져 결국 50대 중반에 혈액 투석을 받게 되었다. 그 전에 이미 IMF를 겪으면서 여러 공사장에서 부도를 맞은 상태였다. 정신적으로나 금전적으로 버텨내기 힘든 시기였다. 아픔과 시련을 이기려고 그 때 취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영천문화원풍물단원이 되어 각종 행사 때마다 공연을 하게 되었고, 영남아리랑보존회원이 되어 민요와 창도 부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 공연봉사단체인 아름예봉사단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엔 봉사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럴 마음조차 없었다. 그저 열심히 일만 하고 살았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봉사는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안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혈액투석 한 번 받을 때마다 한나절이 소요되데 그것을 일주일에 세차레씩 받자니 그건 정말 고통이었다. ‛나는 환자가 아니다' 마음을 다잡아 보았지만, 문득문득 죽고 싶은 생각은 어쩔 수 없었다. 봉사활동을 다니다 보니 차츰 생각이 달라졌다. 아 그래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지금 살아있음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두 발로 걸을 수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말 할 수도 있으니 난 지극히 멀쩡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요양원에 첫 공연 가던 날 그만 눈시울을 적셔야 했다.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로 헌신하며 살았을 그 청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느라 자식 위해 한평생 다 내어주고 빈껍데기로 남은 초점 잃어버린 눈 멍 한 쓸쓸한 모습에 충격을 받고 말았다. 치매로 아기가 되어버린 모습, 바라볼 힘조차 없어 고개 떨군 모습의 30여 명 어르신들, 큰 형님 같고 누님 같은,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은 분들이 거기 그렇게 모여 있었다. 할머니의 메말라버린 손을 잡는 순간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눌러보았으나 쪼그라든 작은 어깨를 안아드리자 결국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몇몇 여자 회원들도 친정엄마 생각이 난 듯 감정이 북받쳐 찔끔찔끔 눈시울을 훔치고 있었다. 한 시간 남짓 공연을 마치고 돌아서 오려니 왠지 미안 하고 죄지은 것 같아 한 분 한 분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날 밤은 미래의 내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래 남은 인생‚ 봉사하며 즐겁게 살자 다짐하며 더 열심히 봉사하러 다니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 새로운 걸 좀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마침 봉사단체 행사장에서 알게 된 이언화 무용 선생의 권유로 선비 춤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월 10만 원이란 수강료가 큰 부담이었다. 뿐만 아니라 음치 박치 인지라 선비춤 배우기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 받는 수업 몇 달이 지나도록 진도가 나가질 못 했다. 젊을 때만 해도 꽤 암기력이 좋았다 싶었는데, 일 년이 지나도록 순서조차 익히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했고 요가도 몇 년을 했으니 유연성은 자신이 있었다. 꾸준히 시간과의 싸움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무대에 서리라 기대와는 달랐다. 음악의 흐름에 따라 손끝 발끝 몸동작까지 맞추어 나가기란 내겐 너무 어려웠다. 결국은 어느 정도 익힌 후 선무당이 되어 용감하게 참좋은요양원에서 첫 공연을 하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늘어진 도포자락에 갓을 쓴 모습이 너무 뿌듯하였다. 긴장해서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지만 '와 멋지다' 회원들의 한 마디 칭찬이 싫지는 않았다. 그 후 조금씩 자신이 붙으면서 '공연이 곧 연습' 연습으로 알고 공연도 연습도 열심히 했다. 흐르는 음악에 따라 손끝 하나 어깨에까지 신명이 실리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려야 했다. 그렇게 차츰 선비 춤에 매료되기 시작 했다. 투석 받는 날과 무용학원 가는 날, 공연 가는 날을 조절 하면서 그런대로 즐거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혈액 투석을 받으며 생명을 연명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음식 조절도 하고 나름대로 몸 관리를 한다고 했으나 10년 쯤 지나고 나니 얼굴은 점차 검게 변하고 맥박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부정맥이 오자 이제 남은 생이 얼마 안 되겠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3년, 지금은 오히려 더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다. 아내의 콩팥 하나를 이식 받은 덕택이다. 아내와는 혈액형이 서로 달랐으나 발달된 의학 덕분에, 하늘이 도운 덕분에,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회복도 아주 빨랐다. 일주일에 세 번 받던 투석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이보다 더 큰 나눔이 어디 있을까? 아내에게는 남은 평생을 갚고 또 갚아도 다 갚지 못 할 빚을 졌다. 이제 남은 인생은 내 것이 아니고 아내의 것이고, 덤으로 얻은 것이기에 더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고 즐거운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수술 후 후유증 없이 둘 다 회복이 잘 되긴 했지만, 아내가 조금이라도 힘든 기색이 보이면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나누어 받은 신장을 잘 관리하며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모습이 아내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요양원 공연 가기 위하여 배운 선비춤은 이제 제법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고, 춤과 무술을 겸한 창작태극무도 나름 어디에서든 공연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건강은 덤으로 좋아졌고 이제는 초청공연도 다닌다. 경북재능시낭송협회 공연에도 서게 되었고, 2016년 봄 동서 공감 영호남문학교류, 시낭송공연이 열린 전주한옥마을에서도 한 바탕 신명을 펼칠 수 있었다. 영호남의 내로라하는 시인들과 낭송가들 앞에서 공연 할 기회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기에 가슴이 뿌듯했다. 행사 일원으로 참석한 것도 좋았고 뒤풀이 마당에서 강강수월래로 하나가 된 그 순간도 두고 두고 남을 감동이었다. 가을에는 영호남 문학인들이 구미에서 만났다. 봄보다 좀 더 정들고 가까워 진 것 같았다. 화합에 일조 한다는 생각으로, 금오산 배꼽마당야외무대에서 신명나게 혼신을 다하여 태극무공연을 했다. 일 년에 몇 차례씩 영호남을 오가는 문학교류, 이런 감동이 퍼지고 퍼지다 보면 영호남 관계도 점차 회복 되리라 믿어졌다. 크든 작든 내가 가진 무언가를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보람된 일이다. 감동을 주기도 하고, 마음의 담을 허물기도 하고, 생명을 살리기도 한다. 나눔은 돌고 돌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2017-10-10 13:53:00

마침표는 아직도 찍지 못했다…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이수영

벌써 12년째다. 40여 년의 교직생활을 끝내고 퇴임을 한지가. 그러니까 내 스스로 그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생각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지가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남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얘기다. 늘 바빴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은 빈 말이 아니었다. 모임은 어찌 그리 많아지고, 가야할 곳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비행기도 타고, 전국의 온 산을 헤매고,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서예도 하고, 수필공부도 하고, 컴퓨터도 배우고……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그 바쁜 나날 속에 나는 40여 년을 살았던 교직 생활에 대한 미련에서도 벗어나려고 무척 노력했다. 나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 18세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는 군대 3년을 다녀온 것 외에는 줄곧 학교에서 살았다. 늘 같은 얘기만 나누는 동료 교사들과 순수한 어린이들 속에서 점점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굳어 갔다. 어쩌다 다른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과 만나, 처음 몇 마디의 인사를 나누고 나면 대화거리가 없었다. 그 첫째 이유가 나는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고, 그들은 아예 은근히 나를 왕따 시키고 저희들끼리 뭐라고 쑤근거려도 나는 그들의 대화를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아져갔다. 그러면서 그들은 초등학교 교사는 유치하고 쩨쩨해서 같이 못 놀겠다는 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과 어울리려 무한 노력했고 그들이 대화하는 시간에는 줄곧 경청하며 술잔을 비워냈다. 학부형들도 그랬다. 어쩌다 한 번 식사라고 대접 받는 날이면 처음 얼마 동안 아이에 대한 얘기가 끝나면, 저희들끼리 깔깔대며 뭐라고 얘기를 하는데 내가 모르는 애기가 많았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더 그랬다. 그런 일을 몇 번 당하고 나서는 나는 그들과 만나 식사를 하거나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만남은 한사코 거절했다. 교사가 아닌 친구들도 그랬고 학부형들도 그랬다.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말은 공통점이 있었다. '선생들은 유치하고 쩨쩨하다. 그래서 같이 대화할 상대가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아! 이제 나는 정말로 교사가 되어 가는 모양이구나.'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교사가 유치하지 않으면 어쩌란 말인가? 세심하고 쩨쩨하지 않으면 어찌 아이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일부 정치인처럼 손가락질 받아가며 막말이라도 해야 대범한 것인가. 사이비 사업가처럼 자기 이익만을 따지는 방법으로 아이들을 대하라는 말인가. 조폭들처럼 조직에 충성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게 남자다운가? 이상적인 교사는 세심하고 부드럽고 아이들을 배려하고 품을 수 있는 사람, 말을 바꾸면 세상 물정 모르는 유치하고 쩨쩨한 그리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야 하지 않을까? 세상 사람들은 그런 교사를 존경하고 그런 교사에게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쨌던 교사에 대한 그런 편견이 학교에서 남자 교사 수를 격감시킨 원인의 하나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의 경우 대도시는 여자 교사의 비율이 90퍼센트에 달하고 아이들은 6년 동안 한 번도 남자교사에게 배우지 못하고 졸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육은 성역할을 골고루 경험하는 것이 아이들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최근 들어 청소년을 중심으로 남성의 여성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도 그런 영향이 아닐까 싶다. 나는 40여년의 교직생활을 보내며, 유치하고 쩨쩨한 선생님들하고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사람들 속에서 그 유치함과 쩨쩨함을 끝까지 지키며 살아왔다.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나는 교단에 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퇴직을 하고 대범해지려고, 쩨쩨함에 마침표를 찍으려고, 객기도 부려보고, 생활 패턴을 바꾸어 보려고도 노력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내 말과 행동은 오랜 교직생활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습관이 되어 내 것으로 굳어 있음을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바뀔 수 없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찍어도 쉼표밖에 될 수 없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혼자 웃었다. 그래, 그렇게 살자. 나의 마침표는 아직도 쉼표에 머물러 있다고….

2017-10-10 13:52:06

돌아오지 않는 연어…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도무웅

연어의 모천회귀(母川回歸)는 극적이다. 강에서 태어났으나 바다에서 살다가 어미가 되어 산란기가 되면 강으로 되돌아온다. 폭포를 거슬러 뛰어오르는 사생결단의 투쟁과 산란, 부화 후, 먹이를 찾지 못하는 새끼를 위해 자기 몸을 보시하는 어미의 헌신적인 희생은 감히 상상을 초월한다. 이 종족보존의 본능은 연어뿐 아니라 모든 생물의 기본 생태이기도 하다.   이처럼 만물이 공존하는 자연에는 나름의 질서가 있다. 계절 따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생태계의 법칙에 의해 생사가 아름다운 연결고리를 갖고 조화를 이루며 쉼 없이 순환한다. 그런데도 근간, 이와 같은 자연의 순리를 배격하는 돌연변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외국에 나가 사는 외아들이었다.   세월의 순리인가, 노년에 접어들며 내 심신은 석양의 연 노을처럼 사위어가기 시작했다. 일에 대한 자신감과 체력에 한계를 느낄 무렵, 아들이 배턴터치를 하듯 사회생활로 접어들었다. 낯선 외국에서 직장을 얻고 한 사회인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결혼에 이어 손자까지 얻게 되었고 완연히 따로 한 일가를 이루어 살고 있으니 듬직하기가 천군만마였다.   마침내 그러기를 햇수로 또다시 십 년, 정녕 마음 속 정년 나이를 이미 넘기고 있었다. 이때쯤이면 누구나 갖는 소망으로 힘든 삶의 멍에를 벗고 퇴임하여 쉬고 싶은 것이 순리요 희망이다. 그것이 삶의 보람이요, 기대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매사가 실타래 풀어지듯 쉽게 풀어지지는 않았다. 추석 명절에 찾아온 아들에게 새봄이 오면 귀국할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아들은 내 바람과는 달리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지금껏 그곳에서 닦아온 생활터전을 쉽게 포기할 수 없으며, 오히려 손자를 그곳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겠다는 배수진을 치는 것이 아닌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이심전심, 자연스럽게 내 속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대했으나 믿은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되고 말았다. 심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글로벌 시대라고 한다. 빨라지는 소통문화의 덕으로 세계는 일일생활권으로 되어가고 교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자원이 열악하고 기술력도 부족하지만, 성실과 근면으로 이겨내면서 세계인과 더불어 어깨를 겨누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의 현주소다. 그 위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으니 시대에 맞는 생활사고 방식의 전환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외국어 학습 열풍이 조수처럼 밀어닥쳤다. 단순히 외국어 몇 마디 더 잘하고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는다고 모두 훌륭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웃이 이른바, '기러기아빠'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고, 심지어는 원정출산이라는 생소한 풍습마저 생기는 현실이었다. 아들 내외 역시 이러한 문물에 점차 젖어 들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우리의 정신문화를 더 많이 부러워하기도 한다. 외국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더 좋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연어가 넓은 대양에서 자란 후 회귀하듯, 아들도 돌아와 가업을 잇고 전통문화의 대를 이을 때 삶은 더욱 보람 있으리라 믿었다. 아들의 '귀국 불가'의 그 한마디 말은 내 자존심에 대못을 박고, 기대는 휴지조각처럼 힘없이 구겨져 버려지고 말았다.   문득 학교 동기 K가 생각났다. 두 아들이 근년에 외국에서 돌아왔다는 그였다. 그의 조언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통화 후, 그의 회사에서 회포를 풀기로 했다. 오랜만의 해후였다. 악수할 겨를도 없이 차를 탄 채, 그는 호기 있는 손짓으로 차를 몰고 뒤따라오라고 했다. 비록 퇴색하긴 했으나 옛날의 그 목소리, 그 얼굴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미 세월의 덧에 걸려 희끗희끗한 흰 머리카락에 젊은 날의 빛나던 안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졸고 있는지 앞서가는 그의 차가 가끔 차선을 벗어나면서 약간씩 좌우로 흔들리기도 했다. 열정적으로 살던 그도 노년으로 접어든 세월과 함께 이제는 어쩌면 모든 것이 그렇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퇴근 무렵으로 도로가 많이 붐볐다. 도심을 벗어나 한참을 달려가니 드디어 그의 회사가 나타났다. 매우 큰 규모였다. 이윽고 사무실에 도착하여 소파에 피곤한 몸을 털썩 던지고 웃으면서 그가 먼저 말을 끄집어냈다. "이젠 우리도 지칠 수밖에 없네. 자네도 뭔 문제가 생겼다고 했던가?" 탄식 같은 술회였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사회 통념상 그는 분명 성공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의 꿈을 실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무실 안의 잘 갖춰진 집기, 잘 정돈된 넓은 공장은 그 동안 그의 역정의 결실임을 충분히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위에 특히 이른바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는 항간의 소문이 가장 내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는 직접 공장의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만나는 직원마다 그에게 깍듯한 인사를 했다. 여유 있는 모습은 개선장군처럼 호기가 있었고 모든 것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충분히 짐작케 해주었다. 그럼에도 처진 그의 어깨에서 청춘을 묻은 훈장이 오히려 약간은 짐스러워 보였다. 나이가 들면 놀라거나 감격할 줄 모른다고 했으니, 감성 수치가 낮아지기 때문인가.   하지만 뒤늦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의 남은 삶의 목표는 종족보존의 본능으로 아들에게 사업을 대물림하는 것이라고 했다. 두 아들에게 3년째 경영 수업을 시키고 있으나 그들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지 않으려 한다고 하지 않는가. 때문에 기운이 빠지고 많이 초조해하고 있었다. 동병상련의 아픔만 가슴에 저려왔다.   지난날, 우리에겐 보릿고개가 있었다. 이는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상흔이며, 그 때문에 그 회한을 가진 우리는 빈곤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삶의 철학이 생겨났다. '눈물로 빵을 먹어보지 않는 사람은 꿈을 이룰 수 없다.'라는 지난날 가슴에 새긴 구호가 아직도 뇌리 속에 남아있지 않는가. 삶의 의지를 굳게 실천하기 위한 각오가 신앙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저녁이 되어 그와 함께 소주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 역시 모천회귀를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한 마리 연어였다. 한마디 탄식이 내 입에서 새어 나왔다. "말을 강가에 끌고 갈 수는 있으나,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한 것 같네." 세상이 바뀌어 이제 연어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따로 그들의 길을 찾아 갈 뿐이다.

2017-10-10 13:51:09

넋…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박홍

자락길을 걷는 날이다.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처음 가보는 곳이라 설레는 마음이 어린애다. 바람 한 점 없는 따뜻한 날씨에다 마치 여성의 아기집처럼 생긴 안온함이 육신사가 있는 마을 묫골에 깃들어 있다. 육신사(六神祀)는 조선 세종대왕의 손자요, 문종의 아들인 어린 단종 임금의 보위를 끝까지 지켜주려다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등 여섯 분이다. 역적에 몰리면 내외척을 불문하고 삼대까지 멸족시킨다는, 듣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끔찍한 형벌이다. 이러한 때 박팽년의 후손만이 혈통을 잇게 되었다고 하니 그 내력이 궁금해진다. 이들 충신들의 가문이 위기에 놓여 있었을 때,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인 성주 이씨가 임신을 해 있었다. 다행히도 이 씨 부인은 친정이 있는 대구 관아의 관노로 와 아이를 낳게 되었다. 때마침 친정 집안의 노비가 딸을 낳아 서로를 바꾸어 기르면서 간신히 멸족의 화를 면하게 된 것이다. 박팽년의 손자인 박비는 이 씨 부인의 친정집에서 노비의 아들로 길러지게 되었다. 노비(奴婢)의 아들이란 뜻으로 朴婢로 불러오다 뒷날 성종의 사면령을 받아 박일산이라 개명되었다. 이로 인하여 박팽년 집안만이 대를 잇게 되었으니 가히 하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이들 후손들이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오다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이 선생의 제사 전날 밤 꿈을 꾼다. 꿈에 사당문 밖에서 누더기를 입고 서성거리는 다섯 분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로 인하여 나머지 분들에 대한 제사도 같이 지내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육신사를 둘러보고 나니 문득 18대 조부이신 금은공(琴隱公) 선생의 일대기가 생각난다. 일찍이 포은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오다 철인(哲人)을 살해해 가면서까지 새 나라를 세운 것은 살일불고(殺一不辜)하면 득천하(得天下)라도 불위(不爲)라 여겨 분개하셨다고 한다. 왕도의 정신에 위배된 이 씨 왕조의 처사를 보고 마뜩찮게 여긴 선생께서는 임금의 부르심에도 완강히 거절하고 향리에서 은거했다. 그러던 중 외적이 쳐들어 왔을 땐 조정에서 선생을 원수(元帥)로 등용하자 이에는 거절하지 아니하고 기꺼이 출정하여 승전의 큰 공을 이루셨다. 이 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까지 정복하였다는 기록을 보고 나니,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 일컫는 일본의 만행에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 외치고 싶다. 전란을 수습한 후에도 간곡한 등용의 기회마저 간곡히 사양하고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만 힘쓴 분이다. 나라보다 자신의 영화만을 지키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처사들에 비긴다면 이 또한 의인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셔도 역사에 크게 뜨지 못한 것이 후손으로서 애석한 일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그려지니 가슴이 더욱 쓰려온다. 조선시대 동방 5현에 꼽히는 회재 선생께서도 "학문은 천인(天人)의 도(道)에 통하셨고 공적은 사직(社稷)의 업(業)에 존(存)하며 문무를 겸한 걸출한 분이시다."라고 칭하셨으니 가히 선생의 인품과 공적을 가늠하고도 남을 일이다. 선생의 피가 대대로 내려왔음인가. 선친께서도 일본에서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에 힘쓰시는 숙부님을 도운 일이 있었으나 흘러가는 구름에 가려있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삼족을 멸하게 되는 대역 죄인으로 몰린 가족은 물론이요, 당사자가 당해야 하는 참혹한 그 형벌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가끔 영화에서 보여주는 처참한 장면을 볼 때마다 고개가 절로 돌려지곤 한다. 그 무서운 극형에도 꺾일 줄 모르는 굳은 절의는 만고에 길이 빛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비를 세워 기리고 있음은 그 충신에 그 후예라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충효는 죽음도 초월한 숭고한 도덕적 관념을 지니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일 것이리라. 우리 선조께서도 불의로 왕조를 세운 이들에게 동조하지 않았지만, 외침이 있었을 때는 분연히 일어나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지킨 청사에 길이 빛날 의인이셨기에 정몽주 선생이 지은 시조 한 수로 추모에 대신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오늘날에 비하면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범(典範)이 되지 않겠는가. 불의에 항거하고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를 위해 홀연히 일어선 고귀한 정신을 보여준 분들의 넋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기에 천여 번의 외침이 있어도 우리 민족이 이 땅위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음이리라. 꺾이지 않은 절개와 신의, 구민애국의 고귀한 정신을 기르기 위하여 우리의 조상들은 늘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를 즐겼을만하다. 부귀영화는 한순간이라도 숭고한 넋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옛 현인들의 말씀이 되새겨진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육신사를 뒤로하는 발걸음 위로 무거운 침묵이 깃들어 숨소리도 죽여진다.

2017-10-10 13:50:14

굴레…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신송우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적색 신호를 무시하고 태연하게 건너는 청년이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심기가 불편해진다. 내가 교직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여 일어난 것 같아 마음이 찜찜하다. 퇴임하고 파크 골프를 배웠다. 모임의 회원들이 선생님이라 불렀다. 왠지 선생님이란 호칭이 굴레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선생님이라는 직업과 호칭에 눌러온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지금까지 선생님으로 살았는데, 여기서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다면서 '선생님' 대신 '대표'로 불러 달라고 했다. 모두가 한바탕 웃음과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흔쾌한 마음으로 그날 밥값을 주저 없이 치렀다. 그 뒤부터 골프 모임에서만큼은 '선생님'이라는 굴레가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잔디 구장에서 삼복더위도 잊은 채 삼삼오오 공을 치고 있었다. 따가운 햇볕을 피하느라, 얼굴에 선크림을 하얗게 발랐다. 머리에는 수건을 덮어쓰고 그 위에 모자까지 눌러썼다. 땀범벅이 되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한차례 라운딩을 하고 휴게실에 들어갔다. 휴게실에는 다른 클럽 회원들로 북적거렸다. 지난번 파크 골프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 다른 클럽회원인 A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내 골프채를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지난 대회에서 잃어버린 자기 것이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게다가 A가 속한 골프클럽의 임원이 그쪽 편을 거들고 나섰다. 모두가 단박에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도둑으로 내몰렸다. 맑은 날에 벼락을 맞은 꼴이 이럴까. 얼굴이 화끈거리고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함을 지르며 욕을 하고 싶었지만, '선생님'이라는 굴레가 가로막고 나섰다. 폭발하려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는 참에 경찰관이 들어왔다. 골프클럽 측에서 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 신고한 것이었다. 경찰관은 여러 사람에게 정황과 이야기를 다 듣고서는 나에게 의심을 두는 듯했다. 교직 생활 삼십여 년을 거론하며 그렇지 않다고 항변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그 클럽 임원에게 내 골프채를 잘 보관하라며 건네며 주었다. 누가 주인인지 판명이 나면 그때 돌려주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소문은 파크 골프장을 찾아온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자꾸 번져갔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보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사건이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둑으로 내몰린 그 날 자리에 없었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했다. 골프채 분실사건의 자초지종을 알렸다. 친구는 전화를 끊고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잠시 후에 자기가 소지하고 있는 골프채가 자기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밤잠을 설치며 고민에 빠져있던 터라 당장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파크골프 대회 날에 친구 골프채가 내 것과 바뀐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매미가 어두운 땅속을 기어 나와 두꺼운 껍질을 탈출하여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 이럴까. 골프채를 보관하고 있는 임원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 내 친구의 골프채가 바뀐 것임을 설명하고, 골프채를 돌려달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클럽 임원은 A의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관련 있는 사람이 모두 한자리에서 만나서 해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친구는 자기 골프채에 회원 일련번호를 클럽에서 정해진 자리가 아니고 다른 위치에 붙여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쉽게 문제 해결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것은 안이한 생각이었다. A는 정확한 물증이 아니라며 막무가내로 억지 타령을 늘어놓았다. 친구와 나는 A의 모욕적인 말에 어안이 벙벙해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희망이 아침 햇살에 안개처럼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대로 그만둘 일은 아니었다. 골프채를 잃어버리는 것도 그러려니와 억울한 도둑 누명만은 확실하게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친구와 나는 골프채를 돌려받을 확실한 근거를 찾기 시작했다. 친구가 골프채를 일본 상인을 통해 샀기 때문에 어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수소문 끝에 판매처로부터 친구 골프채의 일련번호가 적힌 서류를 받았다. 우리는 도둑의 누명을 일분일초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A에게 그동안에 구입처에 확인했던 내용을 조목조목 말했다. 일본에서 보내온 제조사의 일련번호와 골프채의 번호를 대조한 결과 친구의 것이 틀림없었다. A는 그제야 골프채를 건네주면서 서로의 착오로 일어난 일이라며 대충 얼버무렸다. 끝까지 제대로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능글맞은 그의 태도에 피가 또다시 끓어올랐다. '선생님'이라는 굴레에 순종하는 소가 될 것인가, 굴레를 벗어 버리고 괴물이 되어 응징할 것인가 갈등하였지만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선생님'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잠시 몸부림을 쳤을 뿐, 나는 결코 '대표'가 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선생님의 굴레 속에 머무르는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나다운 내가 아닐는지.

2017-10-10 13: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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