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요리산책] 도토리묵

친정 사랑채 아랫목이 자글자글하다. 예전엔 뜨겁고 등이 배겨서 몇 겁의 이불을 깔았는데 이젠 삭신이 녹아내릴 것 같은 이 뜨거움이 좋다.

평상시 친정에 들르면 꼭 엄마 곁에 잠자리를 편다. 엄마 뱃가죽을 주무르고 젖꼭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장난을 친다. 하지만 친정 행사 때 언니들이 오면 엄마 옆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다. 큰언니와 몸이 아픈 작은언니는 일찍 잠자리를 펴기도 하거니와 사랑채 아랫목에 몸 지지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큰언니가 묵을 쑨다. 내가 쑬 때는 떡 덩어리가 되어 식겁했는데 언니는 설렁설렁해도 묵의 농도가 딱 알맞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묵 쑤는 방법은 묵 가루와 물의 비율을 1 : 5로 잡고 뜸을 잘 들이면 된단다. 처음에 그 방법으로 묵을 쑤다가 실패를 보았다. 가령 묵은쌀과 햅쌀로 밥을 지을 때가 다르듯이 묵 가루도 물의 농도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큰언니는 도토리 열매를 분말로 만들지 않고 물녹말 상태로 냉동해 두었다가 사용한다. 물을 대략 부어 가스 불 위에 올려놓고 휘휘 젓는다. 공기집이 생기면 불을 낮추고, 솥 중앙에까지 뽀글뽀글 공기집 꽃이 피자 몇 번 저어주다가 불을 끈다. 뜸을 오래 들이지 않았는데도 찰진 묵이 되었다.

낱낱의 도토리가 모여 뭉근하게 묵이 되는 과정이 정겹다. 신갈나무 잎은 옛날에 과객들이 짚신 밑에 깔고 다녔다고 한다. 떡갈나무의 어린잎으로는 떡을 싸 먹고 도토리로 묵을 쑤었다. 잎이 곱다는 갈참나무며 열매가 장기판의 졸같이 생겼다는 졸참나무도 있다. 선조의 피란길에 상수리로 묵을 쑤어 올렸다는 상수리나무는 얼마나 대견한가.

어머니 곁에 모이면 우리 형제자매 역시 뭉근해진다. 큰 나무, 작은 나무, 앉은 나무, 누운 나무는 각자의 허세와 남루를 내려놓는다. 딱딱함, 뜨거움, 부드러움의 과정을 밟아 아우른다. 어머니라는 큰 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시간 속을 걷는다. 우리는 묵을 치고, 묵 한 사발에 웃는다.

사랑채 가마솥 뚜껑이 연신 픽픽거린다. 묵 만들랴, 물 데우랴, 딴에는 하루가 벅찼는가 보다. 모처럼 언니들과 누워 옛날얘기를 나눈다. 언니들과 고릿적 시절로 돌아가 마냥 깔깔거린다. 딸내미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엄마가 조용히 말씀하신다. 그때는 왜 그리 살림도 넉넉하지 못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지 모르겠다며. 우리에게는 푸릇한 추억이지만 어머니한테는 아픈 가시일 수도 있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같은 방향으로 향하던 소복한 수다가 차츰 사그라질 무렵, 갑자기 쌩하고 찬바람 불 듯 어지럽다. 주무시겠지, 생각했던 어머니가 한숨처럼 말씀을 토하신다. 분명 잠꼬대는 아니었다.

"이렇게 세 딸과 나란히 누워 한방에서 잠을 자다니, 내 생에 이런 날이 또 올는지 모르겠다." 모두 묵묵부답이다.

 

 

Tip: 도토리묵은 체내 중금속을 배출하고, 타닌 성분은 설사를 멎게 한다. 묵은 저열량이라 다이어트에도 좋으며, 항산화 작용까지 한다니 도토리가 나는 철에 먹어두면 득이다. 메밀은 찬 성질인데, 도토리는 따뜻한 성질을 가졌다. 여성들에게 특히 좋은 식품이다. 그러나 열이 많은 사람은 과하게 먹지 않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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