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예술, 나의 삶]추상화가 권기자

추상화가 권기자가 그녀의 화실에서 평면부조 작업인 '시간의 축적'(Time -accumulation) 시리즈를 제작하며 활짝 웃고 있다. 추상화가 권기자가 그녀의 화실에서 평면부조 작업인 '시간의 축적'(Time -accumulation) 시리즈를 제작하며 활짝 웃고 있다.

 

권기자 작 'Time -accumulation' 권기자 작 'Time -accumulation'

"나만의 세계에 집중할 수 있는 게 꿈이었어요. 인생은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에 있다고 봅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뒤처지기는 싫어서 늘 작업실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을 보내고 있지만 작가의 길을 걸으면서 한 번도 슬럼프에 빠져 본 기억은 없어요."

대구시 수성구 고산로 매호동 고층 아파트촌에 둘러싸인 660㎡규모의 화실은 마당도 있고 그 앞으로 도심 개울이 흐르고 있다. 때마침 긴 장마가 끝난 터라 물은 맑아졌고 좀체 보기 힘든 천둥오리와 해오라기가 한가로이 여름철 먹이활동을 하고 있다.

이곳은 추상화가 권기자(60)가 3년째 작품 활동의 아지트로 삼고 있다. 화실 안 작업의 흔적을 훑어보니 대개의 작품들이 200~300호에 이르는 대작 위주다. 소품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질 않는다.

"저의 성격과 화풍이 소품 제작엔 성이 차지 않아서 주로 100호 이상의 대작을 그리게 됐죠. 캔버스가 크기 때문에 이젤을 사용할 수 없어 주로 바닥에 펼쳐놓고 작업을 합니다."

젊은 시절 염색 사업가로 일을 하다가 IMF를 계기로 사업을 접고 평소 하고 싶었던 그림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 40대에 영남대 대학원 서양화과에 입학해 현재 화업 20년째를 맞고 있는 권기자는 2003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첫 개인전으로 가짐으로써 작가로 데뷔했다.

어릴 적 물리교사였던 부친의 교재용 부탁으로 해와 달, 금성, 화성 등 태양계와 같은 천체그림을 그리기도 했던 작가는 첫 개인전부터 밤하늘 우주나 물 속 깊은 심연 또는 땅속 마그마가 분출하는 화산 등 거대 자연을 오브제 삼고 거기에 작가적 상상력을 더해 화면을 꾸며왔다.

이런 까닭에 거대 자연을 표현하자니 그녀의 작품은 자연히 대작 위주일 수밖에 없고, 화면 전체를 구성하는 색감 또한 짙은 블루나 붉은 색 계열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염색 사업을 오래 하다 보니 색감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대형 캔버스에 상상의 자연을 완성하고 나면 제 스스로 만족감과 희열감을 만끽하곤 했죠."

작가의 작업은 염료나 안료를 기름과 물로 혼합한 후 캔버스 위를 수차례 덧칠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대자연의 모습이나 마티에르 자체가 남긴 흔적이 생성되는 방식을 따른다. 이러한 작업에 의해 탄생한 것이 그녀의 '우주'시리즈이다.

'우주'시리즈는 평단의 호평을 받으면서 2002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과 2003년 '하정웅 청년작가상'에 뽑혀 차규선, 박종규 등에 이어 광주시립미술관 초대전을 갖는 계기가 됐고 잇따라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출품과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다.

권기자는 20년 화업에 개인전만 26회를 열었다. 작가 스스로도 "참 바쁘게 작업을 해왔다"고밝혔다. 사실 '우주'시리즈는 대작이면서 캔버스에 수차례 덧칠과 색감을 우러나오게 해야 하는 이유로 무척 힘이 드는 작업이었다. 이에 그녀는 세상 또는 우주의 안보다 바깥의 밝은 면을 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이때부터 작가의 두 번째 화풍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다 위나 산의 형상이 추상적으로 화면에 등장하면서 색감도 이전보다 훨씬 밝아졌고 촘촘하게 늘어선 가는 선들이 화면 전반에 걸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던 차에 2012년 미국 LA등지를 여행하면서 작가는 사막의 다양한 색감과 야생화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특히 그 지역 특산 가로수인 '자카란다'(Jacaranda·푸른 보랏빛을 가진 가로수나무로 화려함으로 인해 미국 캘리포니아와 호주 등에 가로수로 널리 식재되는 종)의 보라색 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됐다. 자카란다는 작가의 두 번째 화풍인 '내추럴'(Natural) 시리즈 등장의 단초가 된다.

'우주'시리즈의 원천이 작가의 상상력이었다면 '내추럴'시리즈는 감성적 요소가 많이 가미되면서 화면에 중첩된 붓질로 인해 물감이 흘러내리는 선의 형상에 몰두한 작품이다. '내추럴' 시리즈에서 선의 형태는 가로 세로 또는 사선으로 묘사되며 그 형태는 가늘거나 또는 굵거나 하면서 다양하게 드러난다.

'내추럴'시리즈 작품에 몰입해 있던 2018년 작가는 대구 이천동 화실에서 현재의 매호동 화실로 이전하게 됐다. 이사를 하려고 짐을 정리하는 와중에 '내추럴'시리즈 작업으로 흘러내린 물감이 캔버스 아래에 쌓여 굳어 있는 걸 발견한 작가는 지금까지 화가로서의 작업 흔적을 굳어버린 물감덩이에서 발견된다.

"그때 저는 '아! 시간이 물성이 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화실에 있던 물감덩이를 모두 긁어모아 새 화실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 물감덩이로도 어떤 작업을 해 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권기자의 세 번째 화풍이랄 수 있는 '시간의 축적'(Time Accumulation)시리즈의 신호탄은 '내추럴' 시리즈의 흔적일 수 있는 굳어진 물감덩이에서 이렇게 시작이 된다.

캔버스에 물감을 부어 말린 후 얇은 층으로 굳어진 물감을 이용해 여러 층 쌓아 이를 적당한 두께로 잘라 캔버스 위에 붙이는 작업인 '시간의 축적'시리즈는 지금까지 작가의 평면 작업에서 평면부조 작업으로 변화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시간의 축적' 작품은 마치 지질학에서 긴 시간의 쌓임을 의미하는 지층의 다양한 변화와 닮은꼴이다.

이 작업은 올 상반기 중 본격적으로 선을 보일 예정이며 내년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릴 작가의 개인전에서도 볼 수 있다.

권기자는 현재 대한민국 미술대전초대작가, 대구미술대전초대작가, 대구현대미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글 사진 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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