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정종여(1914~1984) '위창선생옥조'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담채, 23×52.5㎝, 오천득 소장 종이에 담채, 23×52.5㎝, 오천득 소장

자유로운 형식의 감상용 초상화를 소조(小照)라고 했는데, 경남 거창 출신인 정종여는 78세의 위창 오세창(1864-1953) 선생 소조를 특이하게 부채에 그렸다. 오세창 선생의 생전 모습은 그림, 사진이 여럿 남아 있다. 사진으로는 1946년 8월 15일 대한제국 국새를 미군정으로부터 국민을 대표해 인수받는 하얀 모시 두루마기 차림의 모습이 널리 알려졌다.

오세창 선생은 삼일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8개월 감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이자 신문사 기자와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며, 전서를 잘 쓴 서예가이다. 16살에 역과에 합격한 위창 선생까지 8대가 중국어 역관을 지낸 가문이어서 국내외 정세와 외국문물에 밝은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 역매 오경석의 서화, 금석문 수집과 연구의 가품(家品)을 이어받은 외아들로서 한국미술사 최초의 근대적 업적인 우리나라 서예가, 화가의 기록을 집대성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년)을 편저했다. 나라가 없을 때였기 때문에 '근역'이라고 했다. 문헌 조사와 연구 뿐 아니라 수천 점의 고서화를 동구서매(東購西買) 하여 '근역화휘', '근역서휘', '근묵' 등 체계적인 컬렉션을 완성했고, 우리나라 서화가, 학자 850명의 인장 4천 여방을 수록한 인보 『근역인수』도 완성했다. 간송 전형필의 수집을 자문한 일도 중요하다. 위창 선생이 개화운동가, 개혁사상가, 종교가, 전각가, 서화 감식가, 서화 수집가, 미술사학자로서 다각적으로 빛나는 생애를 살았음도 잘 기억되어야 한다.

부채꼴 한 가운데 검은 비단으로 만든 동파관을 쓴 연푸른 마고자 차림의 위창선생이 바위에 기대 앉아 있다. 방한용 토시도 소매 자락 안으로 보인다. 손에 쥔 지팡이는 손잡이를 용머리 모양으로 장식했고 신발은 나막신을 신었다. 젊은 정종여가 압도되었을 노대가의 당당한 아우라가 느껴진다. 나무 신발인 나막신은 한자로 '극(屐)'이다. 중국의 산수시인 사령운(謝靈運)이 산길을 다닐 때 신어 '사극(謝屐)', '사공극(謝公屐)'은 '자연을 소요하는 은둔자의 발걸음'을 은유한다. 위창 선생은 이런 뜻으로 나막신을 신으셨을 것이다. 정조 때 규장각에 근무한 이만수는 퇴근하면 나막신을 즐겨 신었는데 이 사실을 안 정조가 나막신 한 켤레를 하사했고, 자신의 취향을 존중해준데 감동한 이만수가 호를 극원(屐園)으로 바꾼 일이 있다. 정종여는 7년 후 대작의 내리닫이로 위창 선생을 다시 그렸는데 역시 나막신 신은 모습이다.

배경은 정원이다. 소설(小雪) 무렵이라 봉오리가 맺는 매화를 그렸고 괴석과 대나무, 소철, 시든 파초, 낙엽이 드문드문한 잡목 등이 있다. 오른쪽 모퉁이에 "신사 소설 전석(辛巳小雪前夕) 위창선생 옥조(葦滄先生玉照) 정종여(鄭鍾汝) 근사(謹寫)"로 화제를 썼다. '옥 같은 모습'이라는 옥조(玉照)는 초상이다. 위창 선생은 육이오동란으로 가족과 함께 피난 중이던 1953년, 90세의 나이로 대구시 중구 대봉동 31번지에서 작고하셨다. 대구에서 사회장으로 모셔졌고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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