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대회 우승 타이틀…예천 그린실버관악합주단

예천 그린실버합주단은 15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퍼포먼스 밴드이다. 박노익 기자 noik@imaeil.com 예천 그린실버합주단은 15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퍼포먼스 밴드이다. 박노익 기자 noik@imaeil.com

 

경북 예천의 한 시골마을(용문면)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평생 농사만 짓던 어르신들이 모여 악기를 배우기 시작해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시니어 연주단은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 밴드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들의 탄생은 쉽지 않았다.

 

◆악보 없는 연주자들

"처음엔 시골노인들이 연주를, 아니 여럿이서 합주를 한다고 했을 때 그게 가능하냐고 의심했어요. 악기를 만져보기는커녕 악보도 읽을 줄 모르니까 당연한 반응이었지요."

지난해 예천 그린실버관악합주단(이하 실버합주단)은 당당히 전국대회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5년 전 창단할 때만 해도 모임이 지속될 거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 시골 노인들이 모여 연주하며 화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시작조차 어려울 것 같았던 실버합주단은 신창규(74) 단장의 베테랑적인 경험과 단원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탄생했다.

출발은 꽤 좋은 편이었다. 시골 마을에 도시에서 온 음악선생님이 근사한 악기를 가르쳐준다고 하니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플롯, 색소폰, 클라리넷 등 신 단장의 시범연주를 지켜보던 주민들은 자신들도 멋진 연주가가 되는 상상을 하며 단원 신청서를 내밀었다. 특히 색소폰을 불겠다는 지원자가 쇄도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번쩍이는 색소폰을 연주하는 로망을 품었기 때문일 터. 양봉업, 축산업 등 평생 논밭에서만 시간을 보낸 어르신들에게 실버합주단은 신선한 바람이었다. 이들 모두가 어엿한 연주가가 되어 화음을 자아내는 그림을 그리며 실버합주단에 가입했다.

꿈에 부풀었던 실버합주단이 좌절하기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모객이 되어 신이 났던 신 단장은 물론이고 악기를 배우겠다고 모인 사람들의 의욕이 금세 꺾여버린 것이다. 단원이 되겠다고 모인 사람 대부분은 평생 농사일만 해오던 농민이었다. 음악공부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열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악기 연습은 고사하고 음표를 읽지 못하면 당장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신 단장의 연주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은 바로 낙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악보를 읽지 못하는 실버합주단을 위해 계이름을 적어 두었다. 강민호 기자 kmh@imaeil.com 악보를 읽지 못하는 실버합주단을 위해 계이름을 적어 두었다. 강민호 기자 kmh@imaeil.com

 

◆어르신이 악기를 연주하는 법

"사실 앉아서 악기만 연주하는 것도 노인들에겐 힘든 일입니다. 실버합주단은 행진하며 연주하는 시니어 마칭 밴드예요. 요즘 단원들은 앉아서 연주만 하면 밋밋하고 심심하다고 합니다.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행진과 연주를 병행하는 퍼포먼스의 즐거움을 아는 거지요."

신창규 단장은 베테랑 밴드 지휘자이다. 86년 아시안게임, 그리고 88년 올림픽 당시 각각 대한민국과 대구·경북 대표단을 통솔했다. 그는 경희여상(現 경상여고) 음악선생님으로 부임한 이래 40여 년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행진 합주단을 지휘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교사로 재직하던 당시만 해도 교련과목의 일부로 학생들이 '밴드'를 배웠다. 대학에서 트럼펫을 전공한 신 단장은 가는 학교마다 최고의 밴드를 만드는 선생님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방송국 PD들의 눈에 띄어 대형 국제행사에도 학생들을 데리고 참가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 기본기가 있는데 사실 어르신들은 그냥 백지상태에서 시작한다고 보면 됩니다. 다행히 학생을 지도한 경험과 어르신들의 열정이 합쳐져 정식 합주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요."

신 단장은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어르신들에게 노래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르신 단원들이 먼저 음과 리듬을 익히고 그 다음 악기의 소리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음의 높낮이 그리고 악기 소리에 적응한 어르신에게는 악보를 주고 각 음계 아래에 '도레미파솔라시도' 계이름을 써주었다. 음계를 읽지 못하더라도 한글로 음을 알 수 있도록 표시한 것이다. 계명창(계이름으로 소리의 높이나 선율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음악을 공부하는 방법이다. 어르신 단원들은 차근차근 신 단장을 따라 연습했다.

악기 배정에 대해서도 확실한 기준을 정했다. 신 단장은 손가락의 길이나 크기, 그리고 호흡의 고르기 등 신체적 조건에 맞는 악기가 있음을 단원들에게 설명했고 어르신도 각각의 악기가 가지는 장점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입단 조건도 완화시켰다. 65세 이상 시니어 합주단을 목표로 창설했지만 나이 기준을 60세 이상으로 완화해 악기를 연주할 수 있거나 배우고 싶다면 단원으로 받아들였다. '실버합주단' 이라는 이름 앞에 '그린'이라는 단어가 붙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준 시니어에 속하는 60세 이상 65세 미만 단원은 '그린' 멤버가 되었다.

1년이 지나자 악기를 연주하는 어르신 단원이 생겨났다. 2년째가 되던 해 열심히 계명창으로 연습한 단원들이 악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합주가 시작되었다.

 

예천 그린실버합주단은 전국 각종 행사에서 축하공연을 한다. 박노익 기자 예천 그린실버합주단은 전국 각종 행사에서 축하공연을 한다. 박노익 기자

 

◆그가 실버합주단을 구상한 이유

실버합주단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니어 마칭밴드로 성장하기까지는 신창규 단장의 역할이 컸다. 일평생 마칭 밴드를 지휘한 관록, 그리고 공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현재의 합주단을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던 그는 초등학교 합창단 그리고 중고등학교 악단을 거쳐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학과의 전신인 서라벌 예술대학에서 관악기를 전공했다. 음악가가 되겠다는 그를 반대한 부모님에 맞서 1년 간 학교를 가지 않은 적도 있고, 대학을 마칠 때에도 평생 음악을 공부하겠다고 선언했다가 결국 아버지의 권유로 음악선생님이 되었다.

그는 살면서 음악과 떨어진 삶은 살아본 적이 없다. 군대로 육군사관학교 군악대로 복무했고, 월남전 당시에는 주월사령부로 발령받아 베트남에서 1년 간 근무했다.

그는 현직에 있을 때부터 은퇴 후 시니어 합주단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 학생들과 함께 했으니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동년배와 재능을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음악이 주는 즐거움과 성취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실버합주단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악보를 읽지 못하는 어르신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일이 힘들 거라는 사실은 예상했고, 열의만 가지고 있다면 음악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회라 여겼다.

2014년 창단 때부터 실버합주단을 지키고 있는 권외숙(79), 신옥림(70), 김희정(73. 이상 클라리넷), 장국희(73. 트럼본), 김갑연(66. 테너색소폰) 5명의 멤버들은 백지의 상태에서 어엿한 연주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몸소 경험한 증거이다. 실버합주단 멤버 김희정 씨는 "어르신들이 스스로 이뤄낸 성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요. 종일 농사일에 피곤한데 저녁에 모여 연습을 하는 걸 보면 열정이 체력을 능가하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트럼본 연주자 장국희 씨는 악기 연주의 장점이 셀 수 없다고 자랑했다. "뒤늦게 인생의 새로운 낙이 생겼습니다. 아직까지 부족한 실버합주단에 공연 요청도 많아 신기해요.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숨이 차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평생 연주하며 살고 싶습니다."

 

◆방탄소년단을 연주하는 시니어합주단

첫 연습곡 '반짝반짝 작은별'으로 시작한 실버합주단은 현재 예천지역의 양궁을 상징하는 곡 'William Tell Overture', 예천비행단을 상징하는 군악대 음악까지 다양한 곡을 연주한다. 특히 지난해 전국 230여개 팀이 경합한 실버문화페스티벌 '샤이니스타' 대회에서는 당당히 대상을 거머쥐었고, 1등 팀의 자격으로 올해 축하 공연도 준비 중이다.

실버합주단이 대외적으로 각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단원들의 지긋한 연세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행진하며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마칭 밴드이기 때문이다. 한때 고등학교에 교련과목이 남아있을 때만 해도 학생들이 행진하며 연주하는 '마칭 퍼포먼스'를 배울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관악 밴드를 운영하는 학교도 흔치 않다. 신창규 단장은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하나의 공연 장르가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다. 그렇기 때문에 실버합주단을 구상할 때도 가만히 앉아서 연주하는 게 아니라 행진하면서 합주하는 팀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실버합주단이 전국대회에서 수상하면서 관련 행사 러브콜도 이어지고 있다. 이미 참가한 대구컬러풀페스티벌은 물론이고 여수국제관악제, 제주국제관악대회 등에서 참가 요청을 받고 있다.

이미 목표를 이룬 것처럼 보이는 실버합주단은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더욱 다양한 곡들과 퍼포먼스를 선보일 계획입니다. 다양한 연령층과 만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겠지요." 실버합주단은 현재 행진곡 위주로 구성된 선곡 리스트를 한국 전통 민요부터 최근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방탄소년단(BTS) 노래까지 늘릴 계획이다. 어르신 단원을 모으고 어린 친구들에게도 마칭 밴드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마칭 밴드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공연 장르입니다. 실버합주단은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그리고 항상 발전하는 밴드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관련기사

AD

경제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

기획 & 시리즈 기사

[매일TV] 협찬해주신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