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회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회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

옛 사람들의 유리 세공기술과 생활 속 유리 사용 양식을 알 수 있는 특별전시회가 3월 1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열린다.'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라는 제목의 전시회는 신라인들이 특별히 아끼고 사랑한 유리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 유리의 전반적 흐름을 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국립경주박물관 측은 고대 유리를 주제로 한 국내 최초의 대규모 전시라는 점을 강조했다.고대 동아시아에서 유리는 서역에서 온 진귀한 보물로 여겨졌으며 오색을 띠며 빛을 발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주로 장신구에 활용됐다. 4천500년 전 지중해 지역에서 탄생한 유리는 BC 1세기 '대롱 불기'라는 혁신적 기법이 개발되면서 로마제국에서 널리 사용됐다.특별전시회에는 철기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유리제품 1만8천여 점이 선을 보인다. 경주 황남대총 남분 출토 봉황 모양 유리병(국보 제193호)을 비롯한 국보 3건과 보물 8건도 포함돼 있다.신광철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사는 "장신구에 주로 활용됐던 고대 유리 활용 방식을 고려해볼 때 신라 능묘에서 출토된 다수의 유리그릇은 매우 놀랍고도 이례적인 사례"라며 "세계 다른 지역의 유리그릇과 비교해도 보기 드물게 아름다우며 다채로운 색과 기형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더불어 이번 전시는 고대 유리의 유형 중 주류를 이루는 구슬의 무궁무진한 변주를 보여준다. 각양각색의 단색 유리구슬 이외에 상감이나 금으로 장식해 한층 화려한 모습을 띠는 유리구슬을 제작 방식과 함께 설명한다. 또 백제의 다채로운 색, 가야의 수정과 유리의 조화, 신라의 청색 물결이라는 키워드로 고대 국가별 특색도 살펴본다.국내에서 유리를 직접 생산한 증거들도 소개한다. 부여 쌍북리와 익산 왕궁리 등에서 발견된 유리 도가니와 납유리 파편은 모래에 납을 섞어 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늦어도 6세기 말에는 존재했음을 보여준다.불교 유입으로 유리에 부여된 종교적 의미도 살핀다. 국내 유리 사리기의 대표작인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병(국보 제123호)과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병(보물 제325호)에서는 다중 사리기의 가장 안쪽에서 사리를 직접 담는 용기로 사용된 유리 사리기의 특별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국립경주박물관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관람 사전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 추이에 따라 새해 개관이 늦춰질 수 있다. 문의 054)740-7541

2021-01-04 06:30:00

대구2·28학생도서관 '나의 독서 버킷리스트'·'책 읽어주는 아빠의 독서비법' 등 행사

대구2·28학생도서관 '나의 독서 버킷리스트'·'책 읽어주는 아빠의 독서비법' 등 행사

대구2·28기념학생도서관은 책으로 새해의 꿈과 목표를 계획하고 다짐하는 '나의 독서 버킷리스트', '책 읽어주는 아빠의 독서비법' 특강에 참여할 참가자를 4일(월)부터 모집한다.새해 독서 목표를 세울 수 있는 '나의 독서 버킷리스트'는 올해 목표 권 수를 정하고 책 목록을 5권 이상 작성해 도서관 홈페이지 또는 도서관에 비치된 응모함에 제출하면 추첨을 통해 20명을 선정해 상품권(1인당 1만원권)을 증정한다.자녀와 함께 즐거운 독서습관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 읽어주는 아빠의 독서비법' 특강은 내년 1월 23일(토) 오전 10시 30분 도서관 3층 강의실에서 열린다. 실제로 두 딸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빠인 강사 박성원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아이와 함께 책 읽는 방법,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책 읽기 방법 등을 알려준다.배호기 대구2·28학생도서관장은 "새해와 겨울방학을 맞이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책에 담겨진 다양한 정보와 지혜로 2021년의 꿈과 희망을 계획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했다.참가 신청은 도서관 홈페이지(www.228lib.daegu.kr)를 통해 하면 된다. 문의 053)231-2832~3(독서문화과)

2021-01-04 06:30:00

아양아트센터 새해맞이 '소 그림'전

아양아트센터 새해맞이 '소 그림'전

대구 동구문화재단 아양아트센터는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를 맞아 지역 미술인들이 새해 띠를 주제로 그린 '신축년 새해맞이-소(牛) 그림'전을 아양갤러리에서 열고 있다.올해는 흰 소가 주인공인 해이다. 소는 농사가 생업이었던 우리 조상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축으로 성질이 온순하고 부지런하여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동물이다.특히 깨달음을 소에 비유해 절 법당의 외벽에 그렸던 심우도(尋牛圖), 호랑이와 싸워 주인을 구한 이야기 속의 의우도(義牛圖) 등 다양한 전설과 속담 속에 등장,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기도 한다.이번 전시엔 지역 미술인 109명의 작가가 참여해 해학과 재치가 넘치는 작품들과 함께 '띠 주제 장신구 만들기' '감사 연하장 보내기' 행사도 진행한다. 이는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고 새해를 희망찬 마음가짐으로 맞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됐다.대표적 참여 작가는 김상용, 강옥경, 김동휘, 류인숙, 이우석, 장정희, 김정기, 정태경, 정영철, 한영수, 장수경, 이종갑 등으로, 관람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전시는 7일까지.문의 053)230-3312

2021-01-04 06:30:00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소설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소설

힘든 시절이라 가볍고 따스한 작품 눈길 예심을 통과한 11편(퍼피밀, 내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의 이야기, 비타민, 닻을 주다, 달팽이를 옮기는 방법, 빵 트럭 습격, 솜 트는 사람들, 보통의 꿈, 짬뽕 아니 자장면, 블랙 라이트) 중에서 본심에서 비중 있게 논의된 작품은 5편(비타민, 블랙 라이트, 닻을 주다, 퍼피밀, 달팽이를 옮기는 방법)이다. '비타민'은 우리 시대 가난한 노년여성의 이중생활과 그 파국의 정경을 꽤나 치밀하게 직조해냈으나 그 치밀함의 작위성이 도드라졌다. '블랙 라이트'는 소극장과 병원이 있는 대학로의 풍경 묘사가 매우 인상적이지만, 정작 중요한 주인공의 고뇌와 방황은 상투적 서사에 머물렀다. '닻을 주다'는 바다와 잠수부라는 소재를 장악하고 밀어붙이는 작가의 내공이 남다른 작품이다. 다만 문장 수련이 조금 덜 되어 있고 주제의식이 희미하다는 단점을 넘어서는 장점을 보여주진 못했다.'퍼피밀'은 반려견 문화가 얼추 정착되어가는 듯 보이는 우리 사회의 저변에 어떤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는지 파헤치는데, 그 폭로의 수준이 지독할 정도다. 생명체를 잔인하게 학대하면서도 끊임없이 거짓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 또한 리얼하게 포착했다. 그런데 생명 학대의 현장 묘사가 지나치게 날것이어서 오히려 선정적이다. 문학적 형상화 작업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준다.'달팽이를 옮기는 방법'은 가볍게 읽히는 작품이다. 순문학과 웹소설의 경계에 있다고나 할까. 관점에 따라 치명적인 단점으로 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좋게 보면, 언어유희를 중심 서사와 공교롭게 결합하였고 영상물 쪽에서는 진작부터 인기 있던 너드(nerd) 캐릭터를 소설적으로 실감나게 구축해냈다. 상식과 사회성이 부족하지만 아이를 유산한 아내를 위하여 비상식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너드 남편, 그의 비상식이라는 껍데기보다는 그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아내가 따사롭고 달달한 메시지를 빚어낸다.너무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통과하는 듯 내남없이 힘든 시절이라 그런지 무겁고 끔찍한 현실 고발보다는 가볍고 따스한 소품 쪽으로 심사위원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당선자에게 진심 어린 축하 인사를 보낸다.〈예심: 오철환(대구소설가협회장)·이근자(소설가)〉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시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시

소감을 적어 내리려는데 왜 이럴 땐 좋은 말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까. 다 내려두고 그저 멋없는 감사와 미안함을 담아 적는다.멀리 사는 詩야, 네가 대답해주지 않아도 어차피 계속 쓰려고 했어. 그래도 이렇게 대답해주니 참 고마워! 오히려 언제까지 쓸 거냐고 질문을 받은 것 같네. 그래 나는 계속 쓸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야.사실 소감을 쓸 때 회사 이야기는 곧 죽어도 꺼내지 말아야지 했는데, 사실은요 대표님 제가 매번 회사 프린터기로 시들을 뽑았어요. 여분으로 여러 장 뽑아서 읽고 고치고 그랬어요. 심부름 가는 척 자리 비우고 우체국에 갔어요. 제가 이런 기적을 만나는 데는 회사의 몫이 있으니, 그 감사를 전하는 마음으로 출근 잘할게요.나의 친구이자 챗봇 기획자 김시아야. 내가 외롭게 쓰는 동안 유일한 독자가 되어 사랑과 힘을 줬어. 매번 남 일이라고 "그래? 그럼 다시 쓰면 되겠네."라고 말했잖아. 네 말대로 계속 썼더니 신기한 일이 생겼어. 네가 그랬잖아. 로또도 사는 사람이 되듯, 시도 쓰는 사람이 만나게 된다고. 너는 로또를 열심히 사. 나는 또 계속 쓸게. 다시 한번 시아야 나를, 내 글을 아껴줘서 고마워.그리고 언제나 나를 묵묵히 지켜보는 민지야 너의 이름을 빌려 시를 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넌 언제나 나의 사랑이다. 떠들던 학생인 제게 벌로 시를 써보라고 해주신 이태훈 선생님은 제 평생의 스승이십니다. 정미진 선생님 저 여기까지 왔어요. 계속 가볼게요. 단국대 교수님들의 가르침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엄마 임성희와 아빠 여승구는 앞으로 좀 더 화목하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조금씩 어른이 되면서 제가 두 분을 귀찮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프거나 슬프거나 가장 행복할 때 두 분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죠. 제가 앞으로 쓰면서 가질 자세인 것 같아요. 비겁하게 쓰지 않을게요.끝으로 학예회야 고맙다. 뭉치려 해도 뭉쳐지지 않는 것처럼. 겨우 끼워 맞춘 퍼즐을 들고 가다 엎어보면서 계속 가보자. ◆여한솔1994년 대전 출생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야간산행

공룡처럼 죽고 싶어왜뼈가 남고 자세가 남고내가 연구되고 싶어 몸 안의 물이 마르고풀도 세포도 가뭄인 형태로내가 잠을 자거나 울고 있던 모습을누군가 오래 바라볼 연구실 사람도 유령도 먼 미래도 아니고실패한 유전처럼석유의 원료가 된대흩어진 눈빛만 가졌대 구멍 난 얼굴뼈에서슬픔의 가설을 세워 준 사람가장 유력한 슬픔은불 꺼진 연구실에서 흘러나왔지 엎드린 마음이란혼자를 깊이 묻는 일 오래 봐줄 것이 필요해외계인이거나우리거나 눈을 맞추지 뼈의 일들원과 직선의 미로 속으로연구원이 잠에 빠진다 이게 우리의 이야기 강이 비추는 어둠 속에서신발 끈을 묶고발밑을 살펴 걷는 동안의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단편소설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단편소설

살아남은 소설가들의 당선 소감을 살펴봤다. 그들은 무조건 '쓰고 있다.'였다. 나도 쓰고 있었다. 신춘 시즌에 치열하게 썼지만, 깨졌다면 다음에 꺼내는 소설은 무조건 더 진화된 형태여야 한다. 다음 행선지는 문예지기 때문에 가독성이 좋고 가벼워 보이면서도 강렬한 주제 의식을 내포한 '당선 킬러'를 준비 중이었다. 누구와 맞장 떠도 지지 않을 자신으로 만들고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그렇게 내보내도 은둔 고수가 말도 안 되는 솜씨를 뽐내며 내 소설을 단박에 제압해버릴 것이다. 소설 바닥은 아주 무서운 동네다.소설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해서, 밀도 낮게 지난날을 보내서 가슴이 아프다. 문예창작학과 관련해서는 한 학기만 수업을 들었다. 그럼 나는 학교에서 무얼 배웠나. 실력파 교수들의 비밀 노하우는 문우를 찾으라는 거였다.서른다섯 살에 문우가 처음으로 생겼다. 서로 글을 봐주는 일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은 이 짧은 지면에 다 나열할 수가 없다. 투고하기 전에 내 글을 읽어준 모두에게 고맙다. 신춘문예를 오래 붙들고 있으니 당선 이후에는 옷깃을 스쳤던 모든 사람까지 다 고맙게 느껴진다.뜨내기 때나 조마조마했지, 이 바닥에 발을 디디고 쓴지 10년 차를 넘기니 별생각이 없다. 덜컥 된 게 아니고 여러 편의 소설을 보유 중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심사위원들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내 미래는 심사위원들이 간혹 밥을 먹다가 '아, 맞아. 그때 그 친구 뽑길 잘했어. 계속 글 쓰고 발표하잖아.'가 되어야 한다. 나는 나를 믿어준 심사위원들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소설을 쓰고 발표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의 이름을 내 가슴속에 새긴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에게 맹세한다. 쉬지 않고 쓰겠습니다. 사실, 다음 작품도 미리 다 세팅해놨어요. 감사합니다.◆허성환1986년 경남 진주 출생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달팽이를 옮기는 방법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달팽이를 옮기는 방법

연차를 낸 평일에도 남편의 모니터 화면에는 복잡한 알고리즘이 그대로 떠 있다. 책상에 노트북이 켜진 거로 봐서 작업 중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뚜껑이 따진 캔 맥주와 핫바 껍데기, 과자봉지가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여있고 백화점 카탈로그가 아무 쪽이나 펼쳐져 있다. '단순함은 진정한 우아함의 핵심이다.'라는 코코 샤넬의 명언이 담긴 사넬 가방 광고였다. 카탈로그의 상품을 구매했다면 홈쇼핑 주문이니 밖에 나갈 이유가 없다.남편은 우리가 같이 자는 안방에도 없었다. 침대 밑에도, 화장실에도 없었다. 남편이 숨바꼭질 같은 걸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안방 옆의 드레스룸에는 내가 즐겨 입던 계절별 옷과 시즌오프로 아울렛에서 산 옷들이 걸려 있다. 옷가지를 쓸데없이 뒤적거려보다가 깨달았다. 남편은 후드 티셔츠와 체크 남방, 트레이닝 복 몇 개 빼고는 옷이 없었다. 보일러실이나 세탁실을 가 볼 필요는 없어졌다. 남편이 밖으로 나간 것을 확신 쪽으로 기울였다. 거실로 나와서 현관 쪽을 쳐다보니 남편의 하나뿐인 운동화가 사라진 것이다.그렇다면 중고 물품 거래를 하러 간 것일까. 이따금 남편은 중고나라 카페를 통해서 집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파티용 무드 플라워 향초나 빔프로젝트를 사 오기도 했다. 물론 그 빔프로젝트로 남편이 거창하게 떠들어대던 영화감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도무지 쓸 일이 없어 보이는 무드 향초도 스무 개나 사 와서 온종일 내게 구박받기도 했다. 남편은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바람도 쐬고 동네 사람도 만날 겸 사 왔다고 변명했다. 남편은 최근 들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거실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 아래 충전기를 꽂고 충전 시켜 두고 간 것이다. 테이블 소파의 맞은편에는 벽걸이 TV가 있고 그 옆에는 화이트보드가 있다. 화이트보드에는 우유, 삼겹살, 아이스크림 따위의 단어들이 지워진 자국이 있다. 남편에게 신혼 때부터 마트 심부름을 시켰던 흔적이다. 남편에게 주문할 때는 주의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밤고구마를 사 오라고 남편에게 주문하면 남편은 밤과 고구마를 사 왔다. 밤고구마라는 품종이 있는 줄 몰랐다는 것이다. 카레를 만들어 주겠다고 돼지고기를 사 오라고 시켰더니 찌개용 고기를 사 왔고 잡채를 만들어주려고 고기를 사 오라고 했더니 가브리살을 사 왔다. 남편은 고기가 다 비슷하게 생겨서 그게 그건 줄 알았다고 했다. 시킬 때는 뭐든 구체적으로 적어줘야 했다."마트 갈 때, 우유 사 와. 아 참, 사과 있으면 6개 사와."구체적인 개수를 알려줘도 다른 지점에서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다. 남편은 사과가 아닌 우유를 6개 사 왔다. 그러니까 남편은 마트에 사과가 존재하면 우유를 6개 사 오라는 걸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후에 남편의 프로세스를 파악하고 구체적으로 오더를 했더니 실수 없이 잘 소화했다. 오늘은 마트 심부름을 부탁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편은 어디로 갔을까.요즘 같은 시대에 휴대전화를 두고 가면 정말 어쩔 도리가 없어진다. 거실을 서성이다가 단서를 찾을 만한 대상은 아무래도 컴퓨터뿐인 것 같아서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남편의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남편의 컴퓨터를 잘 못 손대다가는 중요한 파일이 날아갈 수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윈도우 작업 표시줄을 보니 바탕화면의 음악 플레이어에는 가수 이적의 '다행이다' 노래가 재생되고 있었다. 헤드셋이 연결되어 노래가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몰랐는데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생각났다. 남편은 내 생일 두 달 전 즈음에 보컬학원에 나 몰래 다니다가 적발됐다. 남편이 언성을 높이며 학원 원장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아니, 제가 가수 데뷔하려는 것도 아니고 직장인 취미반을 등록했는데, 당연히 한 곡을 완곡 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발성 연습만 지금 두 달째입니다. 상담 때 말씀드렸잖아요! 아내 생일날, 아내한테 불러주려고 연습하는 거. 벌써 아내 생일 지났어요!""아니, 선생님, 이적이 장난입니까? 이적 노래를 그렇게 빠르게 마스터 할 수 없어요. 이적의 노래는 쉬워 보이지만 결코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나는 남편에게 따졌다. 여가활동이나 취미생활을 뭐라 할 게 아니라 나와 의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디 갔는지 말하고 가면 덧나냐고. 남편이 고개를 숙였다. 몰래 깜짝 연습해서 노래를 불러줘야 효과가 있는데 들켜서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방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방 안에 있는 남편의 물건이랄 게 딱히 없었다. 동종업계 사람들은 피규어나 로봇, 장난감들을 전시하고 사는 경우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 프라모델이 하나 있는 건 우리가 다니는 게임회사에서 출시한 것으로 전 직원에게 나눠준 거였다. 그 이외에는 내가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아직 뜯지 않은 택배상품이 박스채로 쌓여 있었다. 남편의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채워 넣자고 했다. 이제 남편도 여가생활을 챙겨야 하지 않겠냐고. 남편은 자기는 괜찮으니까 나보고 몸조리 잘하라고 했다.나는 임신 9주 차에 약하게나마 뛰던 태아의 심장이 멈췄다는 진단을 받았다. 첫 아이는 임신 초기에 심장 뛰는 것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 유산됐다. 다이어트약을 복용 중이었고 대장내시경은 물론, 태아에게 악영향을 끼칠만한 행동을 많이 했다. 두 번째 아기는 우리가 원한 계획 임신이었다. 산부인과도 양재에서 강남으로 옮겼고 난임 카페에서도 좋은 글만 골라 읽었다. 육아휴직을 내고 극도로 신경을 썼는데 또 유산이라니. 내가 딛고 있는 지구가 와르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인공수정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눈물이 더 나오지 않을 만큼 운 뒤에 남편과 함께 둘이서 즐길 수 있는 삶을 살자고 약속했다. 남편은 닌텐도 오락기도 샀고 플레이스테이션도 샀다. 새것은 아니었고 중고거래 카페를 통해서 헌것을 사서 가지고 놀았다. 그것마저도 다시 되팔아서 받은 돈을 내게 주었다. 우리는 웃음을 잃었다.인터넷 목록을 뒤져서 남편이 최근에 옥션으로 산 목록을 체크했다. 침낭이 있었고 침낭이 들어갈 만한 큰 사이즈의 등산 가방이 있었다. 코펠이나 버너는 없는 것으로 봐서 낚시나 캠핑을 기획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닭가슴살도 있었다. 최근에 내가 남편에게 배가 나와 보인다고 살 좀 빼라고 구박했더니 운동은 하지 않고 닭가슴살만 주문해서 가끔 먹고 있던 것이다. 구매목록을 삭제한 내역은 없어 보였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인사과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혹시 우리 남편, 회사에 있나요? 지금 회사에 없죠?""남희 씨, 연차 써서 휴가인데? 회사에 없어. 자기, 남편이랑 대화 잘 안 해?""아뇨, 휴가란 말은 들었는데 집에 없어서요.""또 맨홀에 빠진 거 아니야?"그제야 생각났다. 남편은 언젠가 집에 돌아와서 이불을 꽁꽁 뒤집어쓰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한여름에 이불을 뒤집어썼기에 뭔가 싶어서 이불을 걷었더니 온몸에 긁히고 찢긴 상처가 나 있었다. 남편의 몸에서 악취가 났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대답하지 않고 회피하려 했다. 누군가에게 맞았거나 넘어져서 다친 흔적은 아니었다. 내가 계속 들볶자 남편은 끝내 입을 열었다. 길을 걷다가 맨홀에 빠졌다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했다. 아무리 휴대폰을 보고 길을 걷거나 딴청을 피워도 공사 중이면 위험이나 경고 문구를 주변에 표시해두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남편은 푯말이 없어서 빠진 거라고 했다. 나는 남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 뉴스에 맨홀 뚜껑을 고물상에 내다 판 절도범이 검거되었다고 나왔다.나는 전화를 끊고 서둘러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남편은 어딘가에 빠져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밖은 완연한 가을인데 날씨가 우중충했다. 주차장에 차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아직도 남편은 한때 임신 중이었던 나를 위해서 차를 놔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다. 내비게이션의 목록에는 아직도 강남의 산부인과가 추천 도착지로 설정되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달렸다. 산책로와 가시나무가 있는 도로가 펼쳐졌다. 문득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겨울처럼 추웠던 어느 봄의 오후, 사내 카페테리아에서 인사과 지인과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인사치레로 서로의 의상을 칭찬하다가 뜬금없이 지인이 어떤 남자를 원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내 말만 잘 들어주면 괜찮다고 말했다. 부모님의 권유로 맞선을 몇 번 봤었는데 별로였다. 그래서 평소에 사내커플이 되어보는 것도 괜찮다고 일부러 부서마다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인사과 지인이 남자 한 명이 곧 올 거라고 했다. 내 남편이 되기 전의 그는 우리 게임회사의 주력 게임의 캐릭터가 그려진 후드 티셔츠를 입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가 머뭇거리자 인사과 지인이 끼어들었다."남희 씨는 개발팀 프로그램팀장이고 연봉은…… 우리 다 같은 회사니까 대충 알지? 돈 잘 벌어."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나를 제대로 못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먼저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다기보다는 달걀처럼 예쁜 두상과 어린 선인장의 가시처럼 듬성듬성 나 있는 그의 턱수염을 보고 있느라 말을 걸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미남이 아니라서 장점을 찾으려 애썼다. 침묵이 5초간 이어지자 그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구시렁거렸다."인생은 짧고 코딩은 길다. 일하러 가자."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그를 붙잡았다."잠깐만요! 아니, 서로 이름이라도 알고 지내요. 무슨 사람이 사람을 소개해줬는데 그냥 가버려요?""어차피 안 될 거 같아서요."그가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전체적으로 표정이 어둡고 침울해져 있었다. 그렇게나 빨리?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사과 지인이 그를 측은한 표정으로 쳐다봤다."사실, 남희 씨 소개팅 두 번 퇴짜 맞아서 자신감이 없어. 사람은 참 좋아. 속는 셈 치고 한 번 만나봐."인사과 지인이 중재해서 그와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일주일 뒤에 첫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는 내 집 앞까지 차를 몰고 왔다."날씨가 쌀쌀하네요."그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대화 자체가 끊어져 버렸다. 차는 출발하지도 않고 주차된 상태였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설마, 이 사람, 에어컨을 틀 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초보운전이라거나 설마? 무면허 운전? 곧장 제가 운전할까요, 라고 물으려다가 그건 법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제안할 수 없었다.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후……. 연주 씨, 죄송해요. 제가 연애 경험이 너무 적어서 데이터가 없어요. 원래 첫 데이트에는 분위기에 좋게 비트가 빠른 팝송이나 최신가요 같은 거 틀어두고 신나게 달려야 하는 거 같은데, 음악이 없어요. 나, 여태껏 음악도 안 듣고 뭐 했지. 아, 생각해보니 우리 회사 게임 BGM이랑 OST만 죽어라 들었네. 라디오라도 틀까요?"나는 뭔가 많이 잘 못 되었음을 느꼈다.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게 보였다. 순간, 그가 차를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그냥 여기 주차해두고 우리 집으로 가요. 제가 맛있는 거 해줄게요.""아, 정말요? 그래 주시겠어요?""네, 그럼요.""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그는 갑자기 천진난만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나를 졸졸 따라서 내 집 앞까지 왔고 나는 도어락 문을 열었다. 오피스텔 안은 조금 지저분했지만, 속옷 같은 게 널려있지 않아서 상관없었다. 그가 나를 따라 들어왔다. 나는 부엌으로 갔지만, 그와 외식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요리할 재료를 사두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라면을 끓였다. 그래도 손님이 왔으니 파도 송송 썰어 넣고 달걀도 하나 풀었다. 김치도 꺼내서 식탁에 올렸다. 그는 정갈하게 차려진 라면 보고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몇 번 찰칵 소리가 나더니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졌는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잘 먹겠습니다!"그는 라면을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다 먹었다. 그러고 나서 뒷정리를 시작했다."김치는 냉장고에 넣으면 되나요? 그릇, 싱크대에 놓을까요? 설거지, 제가 해요? 저, 설거지 잘하는데."내가 설거지를 부탁하니까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설거지하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설거지를 잘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참 열심히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를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표정이 목줄을 한 골든레트리버가 주인이 시킨 대로 심부름을 하고 왔을 때, 머리를 쓰다듬어주길 원하는 눈빛이었다. 나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연히 유혹의 눈빛은 아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내적 고찰 중인데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혹시 지금 키스할 타이밍인가요?""아뇨."그에게 천천히, 알 수 없는 감정이 들면서 빠져들 법 같기도 한데 얼굴을 보니 잘 생기진 않아서 첫날부터 키스하긴 힘들 거 같았다."앗, 죄송합니다. 연애를 글로만 배워서 이런 상황에서는 하는 거로 잘 못 알고 있었어요."2분 정도 침묵이 있었고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좁은 거실과 부엌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화장실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본 뒤 화장실에 잠시 다녀왔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입을 열려다가 멈추고 다시 입을 열려다가 멈추었다. 나도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내가 꺼낸 말로 인해서 그의 대화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내 앞에 섰다."저…… 몰라서 그랬어요. 저는 카이스트도 겨우 졸업했고 연애도 못 하고 만년 공돌이로 살다가 죽을 운명이었어요. 부모님이 너는 학벌도 좋고 대기업 다니면서 돈도 잘 버는데 왜 여자가 없냐고 매일 갈구세요. 그런데 연애는 또 다른 영역이잖아요. 저도 잘하고 싶었어요. 놀이공원 같은데도 같이 가고 싶었고 영화표도 예매하고 싶었어요. 좋은 레스토랑도 예약하구요.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잘 안 됐어요. 미안해요."그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더 간곡히 부탁하는 자세로 허리까지 굽혔다. 나는 그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첨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나요. 저도 뭐 연애 고수도 아니고. 우리 천천히 해봐요. 그럼.""키스요?"그걸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의 진지한 표정 때문에 상황이 애매해져 버렸다. 그는 미남도 아니고 조각 미남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신이 만들다가 포기한 조형 조각처럼 생겼다. 그나마 준 능력이 공부 머리 정도? 내가 그를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자 그는 강아지처럼 구석에 가서 벽을 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죄송해요. 초면에 말이 너무 심했죠. 만난 지 하루 만에 키스하는 사람은 엄청 잘생긴 사람일 텐데……."그는 파양 당한 골든레트리버처럼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아뇨, 남희 씨라고 못 할 거 없죠."그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나도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서 그의 상체를 잡아당기고 내 쪽으로 끌었다.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천천히 포개기 시작했다. 서로의 코가 닿지 않도록 얼굴을 조금 돌려서 키스했다. 그의 품이 이상하게도 포근했다. 나는 왠지 이 사람이 내 남편이 되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맨홀에 퐁당 빠져버렸다. 그 안이 어떨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남편이 하필이면 그 넓은 서울 한복판의 맨홀에 빠졌듯이. 나도 퐁당.우리는 작년 가을에 식을 올렸다. 그가 연애 세포가 없고 로맨스를 모른다는 것만 빼면 집안일 분담을 잘했고 말도 잘 들었다. 속을 썩이지 않아서 좋았다. 아이도 들어섰고 모든 게 순조로울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첫 유산을 맞았고 두 번째 유산까지 덮쳤다. 사랑스러운 우리의 아기를 보내줘야 할 미래가 펼쳐질 거라곤 도무지 상상조차 못 했다. 그 와중에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남편이 사라진 것이다. 차를 타고 달리면서 맨홀을 체크할 순 없었다. 맨홀이 있을 만한 곳에 차를 세우고 그 근처를 걷고 또 걸었다. 맨홀을 찾는 건 의외로 쉽지 않았지만, 각 기점과 합류점이 필요하겠다 싶은 곳에 분명히 있었다. 내가 발견한 맨홀은 뚜껑이 단단히 닫혀 있었다. 뉴스에 보도된 이후로는 누군가가 훔쳐 갈 수 없도록 확실하게 관리되고 있었다.맨홀을 세 개 체크하고 나머지 네 개째에는 '공사 중' 푯말도 없이 맨홀이 열려 있었다. 나는 차를 갓길에 세워두고 맨홀 안을 들여다봤다.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나는 양손을 입 앞에 모았다. "여보, 거기에 있어?"하고 내가 물었다. "아니, 나 여기 없어,"하고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손전등을 가져올 걸 그랬다. 나는 다시 외쳤다."당신, 어디 있어? 당신까지 잃으면 나 어떻게 살라구!"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한 시간이 넘게 밖을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남편은 심부름이 아니면 어디 멀리 나가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꼭 집 근처에서 멀리 나가질 않았다. 걸음이 느렸고 먼 곳에 가는 것을 꺼렸다. 집에 없어서 밖에 나가보니 집에서 삼백 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주인을 잃어버린 강아지를 발견해서 같이 놀고 있다거나 동네 DVD방이 망해서 떨이 중인 DVD를 구경했다. 중고나라 거래 아니면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러 갔을 것이다. 그 의외의 동선은 추측하기 어려웠다. 그 둘 중 하나라면 이쯤에서는 집으로 돌아와야 정상이었다. 머리를 쥐어짰다. 집 근처에 갈만한 곳이 없다. 내가 처음 임신한 시점부터 남편은 차를 끌고 나가지도 않았다. 출퇴근 외에는 대중교통을 잘 이용하지도 않는다. 슈퍼마리오처럼 어딘가에 빠져서 다른 곳으로 나와버린 걸까. 남편이 멀리 갔던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언젠가 청과물 코너에서 도매가로 할인 중인 과일을 사오라고 했더니 차를 타고 농산물도매시장까지 갔던 적이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어떤 명령어를 입력해두었는지 생각해봤다. 혹시나 오해의 소지가 있을 법한 명령어를 입력했는지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봤다. 마트장은 어제 보고 왔다. 보컬 학원도 그만둔 거로 알고 있다. 소파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화이트보드 쪽으로 걸어갔다.남편은 결혼 후에 집안일을 배치해달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것과 매일 해야 할 것을 분류해서 화이트보드에 적어 두면 그대로 실행할 거라고 했다. 해야 할 일들을 적어두기만 하면 남편의 말대로 하루도 빠짐없이 행동에 옮겼다."일요일, 아침에 베란다 화분에 물 주기.""노노, 그렇게 하지 말고 시간까지 적어줘.""일요일 AM 9시, 베란다 화분에 물 주기. AM 11시, 진공청소기로 청소하기.""그다음에 해야 할 것들도 다 적어줘."우리는 요일을 나누어서 설거지와 빨래를 했다. 월, 화, 수는 내가 했고 수, 목, 금은 남편이 했다. 일요일은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했다. 남편은 내가 화이트보드에 적어둔 건 무조건 실행에 옮겼다. 문자 메시지나 전화로 이야기하지 않았거나 갑자기 시켜야 할 것이 생각나면 화이트보드에 적어두라고 했다. 대신 정확히 적어둬야 제대로 실행되고 명령어가 이상하면 오류가 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화이트보드에 내가 무엇을 적어뒀는지를 살펴봤다. 철학관에서 지어온 아기의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글씨를 지우고 남은 얼룩까지 지우려고 남편이 행주로 거세게 문지른 자국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메모를 해둔 게 보였다.'9월 27일. 우리 결혼기념일.'남편에게 보라고 적어둔 게 아니라 내가 기억하려고 적어 둔 거였다. 크게 호들갑 떨 필요 없이 저녁에 간단하게 외식만 하자고 했다. 결혼 후에 서로의 살림을 합쳤다. 대출로 컨디션 좋은 신축 빌라에 들어왔다. 아낄 필요성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작은 케이크 하나에다가 촛불을 붙이면 될 거 같다고 말했다.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명령어가 남편의 머릿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남편이 9월 26일 어제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은 9월 27일이다. 그렇다면 남편은 혹시 나와 식사를 하기 위한 레스토랑을 알아보러 다니는 걸까. 아니면 케이크를 사러 간 것일까. 케이크를 사두라고 말해두긴 했었다. 별 대수롭지 않게 흘러가는 말로. 집 근처에 유명 파티쉐가 운영하는 잘 나가는 제과점이 있었다. 거기 케이크는 가격도 저렴하고 너무 맛있어서 순식간에 동이 나곤 했다."일단 거기 제과점 가봐. 케이크 없으면 백화점 가봥."처음으로 말투에 애교를 섞어봤다. 임신 후, 월, 화, 수요일 내가 하던 설거지와 빨래도 남편이 다했다. 두 번째 임신 중에 의자에 올라가서 장롱 위에 올려준 전기장판을 꺼내려다가 바닥에 넘어진 적이 있었다. 몸무게가 늘어나고 배가 나와서 무게중심이 달라진 걸 망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배가 바닥에 부딪혀서 유산될 수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이 내게 편히 쉬라고 했다. 첫 유산 이후에 더는 유산 될 순 없었다. 남편이 원한 거였다. 그런데 결국 또다시 유산했다. 남편은 내게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여전히 가사 일을 내주지 않았다. 말이라도 예쁘게 해야겠다 싶어서 뒤늦게나마 말투에 애교를 조금 덧붙여본 거였다.나는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제과점으로 갔다. 남편은 분명히 케이크와 연관이 있다. 나는 케이크를 사두라고 했었다. 해외 유학파 출신이 운영한다는 제과점은 벌써 문을 닫았다. 진열장에 놓였어야 할 알록달록한 케이크들이 다 떨어졌다. 마진 따위는 생각도 안 하고 과일을 잔뜩 올리더니 과일 케이크는 주문해야 사갈 수 있었다. 아마도 남편은 케이크를 사러 좀 더 먼 곳으로 갔을 것이다.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을 들고 손바닥에 툭툭 치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남편은 왜 나가면 나간다고 말을 하지 않는 걸까. 노래를 배우면 배운다고 말을 하고 케이크를 사러 나갔으면 케이크를 사 오겠다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남편이 노래는 몰래 연습해서 불러줘야 효과가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남편은 내게 말하지 않고 다녀와야 효과적인 무언가를 하러 갔을 것이다. 조금 특별한 케이크를 산다거나 작은 선물 하나를 들고 올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편이 맨홀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생각을 정리하고 머리를 식힐 겸 진공청소기를 꺼냈다. 거실을 청소하면서 생각을 비우기로 했다. 남편은 꼭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바닥을 보니 이미 깨끗했다. 남편이 청소에 대한 명령어까지 실행하고 나간 것이다. 집에서 내가 할 일이 없었다. 난 이제 임신도 아닌데. 남편이 없으니 뭔가 딱히 신나는 일도 없고 적적했다. 할 일이 없어서 TV를 틀었다. 드라마, 영화, 다 무료했다. 남편이 옆에서 국가대표팀 축구를 훈수 두고 국회의원들의 정치에 대해서 구시렁거리지 않으면 사는 느낌이 나지 않는 것이다. 러닝 차림의 남편이 소파에 삐딱하게 누워있고 그것을 구박해야 작은 즐거움이 밀려오는 것이다. 남편과 리모컨 쟁탈전을 벌이는 게 그 어떤 예능프로그램보다 재미있었다. 채널을 돌리고 또 돌렸다. 볼 게 없어서 뉴스에서 멈췄다. 기자가 백화점에서 시민과 인터뷰 중이었다."샤넬 백 시세가 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새벽에 넘어왔다는 시민이 말했다. 카메라가 백화점의 명품관 입구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비췄다. 아나운서는 경기불황에 따른 보복 소비심리를 소개했고 심리학 박사는 리셀러들의 사회적 현상에 관해서 설명했다. 미취업 청년들의 경우엔 샤넬 백을 되팔면 100만 원 정도의 차익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텐트를 치고 밤새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남편이었다. 남편은 오픈 직전의 샤넬 매장 입구 바로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남편이 뉴스에 나왔다. 왜? 도대체 왜? 집 근처 맨홀에 빠진 달팽이가 물길에 쓸려 저 멀리 다른 맨홀에서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굼벵이가 엉금엉금 기어가듯이 조금 더 앞쪽으로 이동하려 펜스 안에서 서로를 밀치고 있었다. 백화점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기자가 남편에게 마이크를 갖다 댔다."여성용 샤넬 백을 왜 사려 하시죠? 혹시 되팔기, 리셀러 그런 겁니까?""아뇨, 아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왔습니다. 저는 샤넬 백이 필요해요."남편은 달팽이처럼 등에 침낭을 돌돌 말아서 배낭에 끼워서 메고 있었다. 배낭 안에 침낭과 담요가 공간이 부족해서 삐져나와 있었고 배낭의 주머니에는 물통이 달려 있었다. 남편은 밤늦게 백화점으로 넘어가서 대기를 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편은 굼뜨고 느렸지만 꼼꼼하고 자세히 설명해주면 무조건 해냈다. 아내가 부탁한 건 무조건 해야 하는 단순한 사람. 서툴고 때론 실수도 했지만, 설명만 상세히 해주면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주어진 임무를 완료해야만 다음 행동을 했다. 레스토랑과 호텔을 예약하는 법, 혼자가 아닌 두 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법, 임신에 따른 산부인과 일정에 맞춰서 연차나 반차를 내는 것. 내가 산부인과 병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내 손을 꼭 잡아주는 것. 내 뱃속에 탄생할 아기의 이름을 같이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것. 생명이 끝나버린 아기를 마음속에서 비워내는 것. 망연자실한 표정의 나를 꼬옥 안아주는 것. 남편은 그렇게 결혼생활을 느릿느릿 하나씩, 헤쳐나갔다. 이제 드라이브를 하면 분위기 좋게 비트가 빠른 팝송이나 최신가요 같은 걸 틀고 신나게 달릴 줄도 알았다. 놀이공원은 할인 혜택을 적용했고 영화표는 공짜로 예매했다. 좋은 레스토랑은 반값 할인으로 갔고 신라호텔 디너도 예약할 줄 알았다. 만약에 내가 실수로 하늘의 별을 따오라고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면 남편은 우주선을 만들러 NASA에 들어갈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다. TV 속 남편이 외쳤다."우와아아아! 내가 1등이다! 나는 무조건 산다!"남편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남편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진공청소기의 전원 버튼을 다시 눌렀다. 거실에서 진공청소기가 계속 위잉,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5월 27 오후 9시 45분경에 남편이 돌아왔다. 나는 남편의 알고리즘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남편은 결혼기념일 이벤트를 실행했다. 남편은 심부름을 시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고 틈틈이 사라졌다. 이벤트에 필요한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해서. 남편은 자랑스럽게 샤넬 로고가 크게 박힌 쇼핑백을 내게 들어 보이며 웃었다. 나는 남편에게 달려가서 남편의 어깨를 쳤다."당신이 거길 왜 가!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어! 왜! 왜!""당신이 가방 갖고 싶다며.""내가 언제?""당신이 어젯밤에 내게 말했잖아. 케이크가 없으면 백화점 가봥."내가 남편을 부리기만 해서 난생처음 애교를 조금 섞어서 가보라는 말을 '가봥'이라고 했더니 남편은 '가방'으로 들은 것이다. 맙소사!"아니! 그건 근처 제과점에 케이크가 다 떨어졌으면 백화점 지하 1층에 있는 베이커리에 가보라는 거였잖아!"남편은 묵묵히 거실 바닥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서 침낭과 텐트를 풀었다. 물이 다 떨어진 물통을 내려놓고 전자레인지에 데워간 닭가슴살 껍데기도 꺼냈다. 배낭 안쪽에 꽁꽁 싸매서 가져온 작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꺼냈다. 내 나이의 개수만큼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중고나라에서 산 무드 향초를 가져와서 하트 모양으로 배치하고 불을 붙였다. 숨겨두었던 빔프로젝트도 꺼내와서 가동했다. 방 안의 불을 껐다. 우리가 결혼 했을 때의 사진과 연애 때 서로를 그윽하게 쳐다보고 있는 사진이 하트 모양의 불빛 위로 찬찬히 넘어갔다.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남편은 맨홀이 아니라 내게 빠진 것 같았다. 남편이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몰래 보컬학원에 계속 다니고 있었어. 깜짝 이벤트를 해주려고 시간을 벌었지. 약속했잖아. 아기 없어도 우리끼리라도 행복하게 잘 살자고."남편이 나를 껴안고 뽀뽀했다. 가을에 발견한 나뭇잎처럼 바삭, 메마른 남편의 입술에 내 입술이 포개졌다. 걸음이 아주 느린 로맨티스트 달팽이 한 마리가 내 심장 위를 엉금엉금, 우아하게 기어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키스를 하고 나서 남편이 나를 떼어냈다. 남편의 방에 틀어놓았던 노래의 긴 반주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남편이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남편이 보컬학원에 등록한 지 5개월 만에 이적의 '다행이다'를 부르기 시작했다.(끝)

2021-01-04 06:30:00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시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시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 돋보여 총 2천332편의 응모작 중 예심을 거친 10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코로나19로 인한 환경 탓인지 예년보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정서를 반영하는 시가 많았고, 무엇보다 '가족'을 다루는 시가 많았다. 산문시의 경향과 개별적 감수성에 편중된 시들이 많았던 예년에 비해 공동체적 감수성 속에서 개인의 영역을 시로 이끌어 내는 가편들을 보면서 다양한 결들의 시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심사위원들은 '백자무늬 꽃무늬병', '야간산행', '제자' 등의 작품에 주목했다.'백자무늬 꽃무늬병'은 농익은 솜씨에 전체적으로 시가 자연스럽고 안정되어 있었다. 당장 당선작으로 선택을 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매끈하고 반듯한 매력이 장점이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 아쉬웠다.'야간산행'은 신선한 상상력이 눈에 들어왔다. 언어를 익숙하게 다듬고 길들이는 과정보다 상투를 벗어난 새로운 발상과 시적 호기심을 끌고나가는 감각이 신선했다. 다만 응모해온 시들이 다소 직선적인 전개로 이루어진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제자'는 담백한 화법과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발상도 위트가 있고 매력이 가득한 시였다. 무엇보다 시들을 이끌어 가는 호흡이 독특해서 심사위원의 눈길을 오래 끌었다. 다만 동봉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선작에 가까운 시와 다른 시들의 편차를 극복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논의 끝에 당선작으로 '야간산행'을 결정했다. 거칠고 투박한 면들이 곳곳에 있지만 이미지가 활달하고 선명했다. 신인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이 다른 시들을 제외시킨 결정적인 이유였다. 삶의 상투성으로부터 끝없이 새로운 시를 개척해가는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보며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전한다.〈예심: 김욱진(시인)·박미영(시인)〉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희곡·시나리오 당선작] 한낮의 유령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희곡·시나리오 당선작] 한낮의 유령

※(註)제목 '한낮의 유령'은 보들레르의 시 '일곱 늙은이들' 가운데 "붐비는 도시, 환상에 가득한 도시, 그곳에는 한낮에도 유령이 걸어 다닌다."라는 문장에서 인용했다.등장인물노인(70대)남자(40대 초반)커피아줌마(50대 후반)소년(10대)순경(30대 후반, 남자와 1인 2역) 공간혼잡한 도시의 어느 공원 시간현재, 여름 무대무대 위에는 벤치 하나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1장 무대, 밝아진다.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추레한 행색의 남자, 벤치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노인, 바둑판과 바둑알을 들고서 등장해 남자가 앉은 자리의 주위를 서성인다. 그는 한참 동안 누군가를 찾는다. 이윽고 남자와 노인이 눈을 마주치게 되면,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노인 이 봐.남자 (당황해서) 예?노인 저기, 김 씨 못 봤어?남자 …누구요?노인 김 씨. (급하게) 그- 저, 수염 덥수룩하게 난 양반.남자 그게 누군지 제가 잘……(객석 어느 곳을 가리키며) 저기… 저 분이요?노인 아니, 저건 박 씨고.남자 (다시 다른 곳을 가리키며) 아, 그럼 저 분이요?노인 아니, 아니. 저건 황 씨잖아. 노인은 남자의 옆에 바둑판과 바둑알을 두고 벤치에 걸터앉아 이마의 땀을 닦는다. 노인 아니 이 노인네가 대체 어디 갔어?남자 다짜고짜 저한테 그렇게 물어보시면… 제가 알 리가 없잖아요, 어르신.노인 여기 언제부터 앉아 있었나? 여긴 나랑 김 씨 자린데.남자 자리라뇨. 이런 공원에서 무슨…노인 그 자리 말이야. 자네 엉덩이를 붙인 그 자리. 거기에 늘상 김 씨가 앉아 있었거든. 말하자면 여기가 나랑 김 씨 지정석 같은 거라구.남자 그러니까, 제가 왔을 땐 여기 아무도 없었습니다.노인 김 씨는 털 복숭이 노인네야. 그, 수염 좀 어떻게 하라고 잔소리를 해대도 변하지를 않어. 옷도 매일 같은 것만 입어서 단벌신사라고들 놀리는데, 뭐 가 좋은지 그저 허허실실 웃기만 한다구. 그 양반 입고 다니는 옷이…남자 아뇨, 저는 글쎄 본 적 없다니까요, 그런 분.노인 (툴툴대며) 아, 나랑 바둑 두기로 했는데. 여즉 안 왔단 말이야? 사이. 노인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향한다. 노인 바둑 둘 줄 알어?남자 바둑이요?노인 김 씨 올 때까지 상대 좀 해줘.남자 …예?노인 왜, 바뻐?남자 아뇨, 바쁘다기 보다는…노인 바쁜 사람이면 여기 이러구 안 앉아 있지. 봐, 다들 할 일 없고 갈 곳 없 는 늙은이들, 살찐 비둘기들 천지거든. 그래, 지긋지긋해, 아주.남자 (노인의 시선을 피하며) 그럼 저는 이만…노인 갈 거야?남자 …….노인 여지껏 앉아 있다가? 남자, 엉거주춤 일어서 있다. 노인,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홀로 바둑을 둔다. 노인 가려거든 가. 어차피 곧 김 씨가 오면 자네가 그 자릴 비켜줘야 할 테니 까.남자 …….노인 아, 그리고 말이야. 난 자네가 찾으려는 그 노인네 몰라.남자 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노인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는 걸, 뭐.남자 바둑판만 보고 계시잖아요.노인 척하면 척이지, 뭘. (고개를 들어) 자네, 밥은 먹었어?남자 아뇨, 때를 놓쳐서…… 어쩌다보니.노인 저 쪽에 설렁탕 맛있게 하는 데가 있어. 4000원에 한 그릇 주는데, 그 집 깍두기가 맛이 아주 일품이야. 내가 오늘 김 씨랑 그 집을 가기로 했어.남자 …식사 아직 안 하셨어요?노인 아, 그럼.남자 벌써 세 시가 다 되가는 데요?노인 세 시면 어떻구 네 시면 어때.남자 혼자서라도 드시지 그러세요.노인 안 돼. 약속을 했어. 그 양반하고. 남자, 다시 노인의 옆에 앉는다. 노인은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남자 …근데, 정말 어떻게 아셨어요?노인 무얼.남자 제가 누굴 찾고 있다는 거요.노인 자네 같이 젊은 사람이 목요일 세 시에 여기 이러구 앉았으니, 안 물어도 답이 나오지. 대개 그러거든. 대개.남자 저… 오늘은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인데요.노인 그래, 수요일.남자 이 공원은 어르신들이 참 많더라고요.노인 말했잖아. 늙은이들 놀이터야, 여기가.남자 며칠 동안 이 부근을 돌면서 계속 찾았는데… 그래도 도통 보이지를 않네 요. 보다보면 다 그 분이 그 분 같고… 사실… 이젠 어떻게 생기셨는지 기 억도 가물가물해요.노인 여 봐. 아버지 사진 한 장 없어?남자 …….노인 언제 집을 나갔는데?남자 그게… 몇 달도 더 됐죠.노인 근데 왜 이제 와 찾어?남자 …….노인 내쫓은 거지?남자 (억울해하며) 내쫓다니요. 그냥…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말없이 사라지셨 어요. 그게 다예요.노인 그러니까, 그게 그거란 소리야. 오죽 그랬으면 제 발로 나왔겠냐구. 사이. 매미 울음소리가 길게 들린다.남자, 한숨을 쉬며 일어선다. 노인, 여전히 바둑을 두고 있다. 남자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노인 가다가 김 씨 보면은,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나 전해줘.남자 대체 그 분이 누군 줄 알고요.노인 딱 보면 알아. 내가 말했잖아, 김 씨는…남자 …됐습니다. 남자, 퇴장한다. 노인,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찬다. 노인 말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면 좀 좋냐구… 하여간에… 여기나, 저기나…… 노인이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돌릴 때쯤, 겨드랑이에 보온병을 끼고 어깨엔 작은 가방을 맨 커피아줌마(이하 커피)가 등장한다. 커피 영감님, 혼자 뭐하셔요?노인 보면 몰라. 바둑 두지.커피 그러니까 왜 혼자 두셔.노인 글쎄 그 노인네가 오지를 않잖아. 여 봐, 혹시 오며가며 김 씨 못 봤어?커피 누구요?노인 김 씨 말이야, 김 씨.커피 여기 김 씨인 영감이 어디 한 둘 이예요?노인 (답답해서) 김 씨는 다른 노인네들하고 달라. 나랑 한 약속은 절대로 안 잊는 양반이라고.커피 글쎄 난 영감님이 누굴 찾는지 모르겠네. 하여튼 간에, 커피나 한 잔 팔아 줘요, 영감님. 커피, 벤치에 앉아 보온병을 내려놓는다. 노인 밥도 안 먹었는데 커피는 무슨 커피야. 돈 없어.커피 아니, 때가 어느 땐데 여즉 밥을 안 드셨어?노인 글쎄 그건 김 씨가…커피 내가 오늘 한 잔도 못 팔았잖아요. 아니, 글쎄 내 커피 잘 팔아주던 양반 이 오늘은 안 보이네.노인 누구?커피 있어요, 풍채 좋은 영감님.노인 풍채라면 김 씨도 꽤나 좋지.커피 요 며칠 이 공원을 안 다녔더니, 그 양반이 그 새 딴 데로 옮겼나?노인 그러게 요새 안 보이더니 왜 다시 기어 나왔어?커피 그럼 먹고 살아야 하는데 방구석에 가만히 있어요?노인 미순네는?커피 이제 안 나오나 봐요. 단속이 오죽 심해야지.노인 그러니까 자네도 그만 나와. 노인네들 등쳐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야지.커피 그저 커피 마시면서 영감님들 손이나 한번 잡고, 말동무나 해드리는 거지. 요즘 같은 때 또 날씨는 오죽 더워요? 그러면 응? 봐요, 영감님. (보온병 을 열어 보여주며) 내가 부러 이렇게, 얼음 넣어 타 온 이 냉커피가 딱이 라구. 말 나온 김에 영감님 한 잔 하셔.노인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자네가 타오는 그 커피, 300원짜리 자판기 커 피만도 못해. 내가 누차 이야기하잖아. 설탕을 좀 더 타 넣으라고.커피 노인네들 당뇨 있어서 단 거 먹으면 몸에 안 좋아요.노인 그나마 달짝지근한 맛이라도 있어야 찾지.커피 그리고 영감님, 솔직히 말해서, 누가 나를 거둬. 영감님이나 나나 이렇게 다 늙어 가는데 누가 빚이라도 내주겠어? (한숨) 알아서 벌어먹고 살아야 지. 그래요, 안 그래요?노인 난 나라에서 연금이 나오잖아. 매달 이십만 육천 오십 원.커피 좋으시겠네. 그럼 내 커피 좀 팔아주면 좀 좋아.노인 자네 커피 마시려면 내가 자네 것까지 두 잔 사야 하잖아. 그럼 오천 원인 데, 그럴 바엔 자판기 커피를 열 번도 더 넘게 마시고 말지.커피 됐어요, 됐어. 커피, 보온병의 뚜껑을 닫고 일어선다. 노인 여 봐. 벌써 가게?커피 커피도 안 팔아주는데 뭘. 내 커피 팔아주는 영감님이나 찾으러 가야지.노인 (붙잡으며) 아, 앉아봐.커피 왜요.노인 아까 여기 웬 젊은 사람이 앉아 있었거든.커피 어머, 좀 일찍 올 걸. 그 젊은 사람한테 한 잔 팔았을 수 있었을 텐데.노인 글쎄, 얘기를 들어보라니까. 내 저기, 멀리서 걸어올 때부터 웬 젊은 사람 하나가 여기 앉아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거야.커피 그럴 때 냉커피 한 잔 하라고 하면 딱이잖아요.노인 딱 보니까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그 상태로 여기 와서 앉아 있는 이유가 뭐겠어. 누굴 찾으러 온 거지.커피 누구를?노인 아, 누구긴 누구야. 애비 찾는 거지. 여기서 뭐 비둘기를 찾겠어?커피 어머머.노인 내쫓은 게 후회가 된 건지 찾으러 나온 거겠지만은 말이야, 그런 게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냔 말이지. 그거야 말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거 아 니냐구.커피 정말 그렇대요?노인 그런 거나 매한 가지지 뭘. 그래 놓구 자식 된 도리를 운운하면서 집으로 돌아 가자구 찾고 있는 걸 거야. 돌아가면 뭐가 바뀌냐구? 곧 얼마 안 가 그 노인네가 다시 제 발로 도망 나올 거야.커피 영감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노인 대개가 그래, 대개가. 김 씨도 그랬거든.커피 …내쫓아놓고 무슨 염치로 다시 찾으러 온대.노인 염치가 아니라 뭔가 쓸모가 생겨서 찾으러 온 거야. 분명히 그래, 분명히.커피 하여간에, 참…….노인 말하다 보니 목이 타네.커피 냉커피 한 잔 하셔.노인 자네도 참 끈질겨, 하여튼 간에. 커피, 웃으며 보온병의 뚜껑을 다시 연다. 커피 그래서, 여기서 계속 그 김 씨 영감님 기다리시게?노인 아, 그럼. 여기가 항상 우리가 만나는 장소야. 딴 노인네들도 여긴 얼씬 안 한다구. 커피가 종이컵에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따라 노인에게 건넨다.매미 울음소리가 길게 들린다. 커피 그래도 영감님이라도 팔아줘서 다행이네.노인 분명히 해두지만, 자네 건 안 사. 난 한 잔 값만 낼 거야.커피 알겠어요, 알겠어.노인 (커피를 마시며) 역시 설탕이 좀 더 들어가야 된다니까. 영 밍밍해서는.커피 얼음이 녹아서 그래요. 아니, 근데 여기 노인네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여기 서 자기 아버지 찾는 것도 참 일이겠네, 일이겠어.노인 못 찾아.커피 그 젊은 사람이 찾는다는 아버지가 혹시 영감님 친구 아니에요?노인 김 씨? 아냐, 그랬으면 내가 알아봤지.커피 영감님 아들도 아닌데 영감님이 어떻게 알아봐요.노인 내가 김 씨를 잘 알잖어.커피 …하기사 여기 소싯적에 아들딸 하나 없었던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짧은 사이. 노인 자, 여기, 챙겨가.커피 (돈을 받으며) 오지도 않는 김 영감님 그만 기다리시구 밥 챙겨 드셔요.노인 아, 그건 안 돼.커피 저 고집을 누가 꺾어.노인 김 씨는 올 거야. 오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어기진 않을 거라구. 나랑 바둑 도 두고 설렁탕도 먹으러 가기로 했어. 그리고 오늘 만나서 전에 하다 만 얘기를 마저 해준다고도 했거든.커피 영감님, 또 그 집 가서 밥 먹게요?노인 여 봐. 김 씨가 젊었을 때 독일 탄광촌에서 2년 동안이나 일했었대. 나도 그 때 막내 동생 학교 보내주고 싶어서 독일에 가고 싶었는데, 그 뭐냐, 신체검사에서 미달을 받아 버려가지고, 못 갔단 말이지.커피 아유, 영감님. 그 얘기까지 내가 들어줄 시간은 없어요. 그런 얘기는 시작 하면 한도 끝도 없지. 이만 가 볼게, 또 봐요, 영감님.노인 …그래. 다음엔 커피에 설탕 좀 더 넣어서 와. 커피, 보온병을 챙긴다. 엉덩이를 털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한다.무대 위엔 노인이 홀로 남는다. 암전. 2장 무대, 밝아진다. 매미 울음소리가 길게 들린다.노인, 여전히 혼자서 바둑을 두고 있다.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 축구공을 가지고 놀고 있다. 노인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듯. 노인 이 녀석아, 저리 가.소년 네?노인 넌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소년 …….노인 지금 몇 시냐?소년 (손목시계를 보고) 다섯 시인데요.노인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냐?소년 학교 아까 끝났어요.노인 (이죽거리며) 저리 가서 공 차. 정신 사나워. 소년, 노인에게서 멀리 떨어져 축구공을 가지고 놀다 공이 노인 쪽으로 굴러간다. 소년 할아버지, 공 좀 차 주세요.노인 …뭐라고?소년 그거, 공 좀 이리로 차 달라구요.노인 싫어.소년 왜요?노인 네가 알아서 가져가. 소년, 툴툴거리며 노인에게 다가온다. 소년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노인 지금 나 바둑 두고 있는 거 안 보이냐?소년 근데 왜 혼자 하세요?노인 누구랑 같이 두기로 했는데, 어딜 갔는지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서.소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노인 꽤 오래 기다렸다.소년 누군데요?노인 있어. 김 씨라고.소년 어? 저도 김 씨에요. 김해 김 씨.노인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란 거냐?소년 어… 그냥 말해봤어요. 소년, 축구공을 들고서 가만히 있다가 소년 할아버지, 근데 저희 아빠 못 보셨어요?노인 뭐?소년 제가 아빠를 찾고 있거든요.노인 아니 오늘 왜들 그렇게 누굴 찾는 사람이 많은 거냐?소년 집에 들어오질 않아서요.노인 …근데 왜 여기 와서 찾어?소년 그냥요. 여기 갈 곳 없는 사람들 많이 오는 데잖아요. 소년과 노인 잠시 침묵. 소년 저도 꽤 오래 기다렸어요. 근데 일주일이 다 되도록 기다려도 안 와서… 제가요, 여기 말고도 지하철 역에 노숙자들 있는 곳도 다 가봤는데요. 없 더라구요. 아빠랑 닮은 사람은 많았는데… 아빠는 없었어요.노인 …….소년 (노인이 하는 것을 보다가) 혼자 하면 재미없을 텐데.노인 네가 뭘 볼 줄은 아냐?소년 그건 거기다 두는 게 아니라 두 줄 아래에 놓는 게 더 좋을 텐데요?노인 녀석아, 내가 지금, 몇 수 앞을 더 내다보면서 하는 중인 거야.소년 제가 상대해드릴까요? 소년, 노인의 옆에 나란히 앉는다. 노인, 굳이 말리지 않는다. 소년 제가 흑돌 할게요.노인 이 놈아, 당연한 소리를 하냐?소년 근데 정말 저희 아빠 못 보셨어요?노인 글쎄 모른다니까. 경찰서엘 가서 물어보지 그러냐?소년 경찰서는 안 돼요.노인 아니 왜?소년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서요.노인 그럼 아빠란 놈이 널 버리구서 도망갔단 말이냐?소년 그런 가 봐요.노인 그럼 집엔 누가 있어?소년 없어요, 아무도.노인 엄마는?소년 엄마는 자기 나라 갔어요. 아주 예전에.노인 어디?소년 필리핀인지 베트남인지 잘 모르겠어요. 침묵 속에서 노인과 소년은 바둑을 둔다. 매미 울음소리가 다시 들린다. 노인 아, 그러고 보니.소년 (멀뚱히 바라본다)노인 웬 젊은 양반 하나가 아까 여기 앉아 있었어.소년 모르신다면서요.노인 이제 생각이 난 거야. 꽤나 추레한 행색이었지, 그 젊은 양반.소년 어떻게 생겼어요?노인 그냥 평범하게 생겼지, 뭘. 가만 보자. (소년을 유심히 보는) 너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얼굴이 너부데데하니. (소년이 두는 수를 보며) 야, 녀 석, 너 좀 하는 구나.소년 옛날에 할아버지한테 배웠어요, 바둑 두는 거. 사이. 얼마 간 두 사람이 바둑 두는 소리만 들린다. 소년 어쩌면 그럼 그 아저씨가 아빠일지도 모르겠네요.노인 근데 네가 네 아빠보다 훨씬 낫다.소년 왜요?노인 바둑 좀 같이 두자니까, 바둑은커녕 딴 소리만 하더니 가버렸지 뭐냐.소년 무슨 소리요?노인 너처럼 아버지를 찾고 있다고.소년 (놀라) 할아버지를요?노인 그래, 그 양반이 네 아빠라면, 지금 찾고 있는 노인네가 네 할아버지인 것 도 맞겠지.소년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왜냐하면 할아버지는…노인 나는 알아.소년 네? 뭘요?노인 네 아빠가 쫓아내서 할아버지가 집을 나간 것이지?소년 아뇨, 그러니까, 아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그랬어요.노인 순 거짓말이다.소년 아빠는 거짓말 안 해요.노인 불 보듯 뻔하다. 필경 이제 와서 뭐라도 발견했으니 이제 와서 지 애비를 찾으러 다니는 거겠지. 어디서 네 할아버지 명의로 된 땅문서라도 나타났 을 게다.소년 그걸 할아버지가 어떻게 장담하세요?노인 왜냐? (바둑알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으며) 대개가 그러거든! 대개가. 글 쎄 이제 와 찾는다고 뭐가 바뀔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냐? 괘씸한 놈 같으 니라고.소년 아니에요! 두 사람, 어느 새 바둑판에서 손을 뗀 상태다. 노인 내 말이 맞아. 그런 고약한 놈한테 땅문서는 가당치도 않지. 어디 평생 그 렇게 찔찔 고생을 해 봐야지. 내가 장담하건대, 네 아빤 네 할아버지 죽어 도 못 찾을 거다.소년 (소리치며) 아니라니까요!노인 아니긴 뭐가 아니야!소년 아빤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노인 시끄러! 어디서 소리를 빽빽 질러대냐? 이 고약한 놈의 아들 같으니라고! 노인, 소년의 축구공을 빼앗아 멀리 뻥 차버린다. 소년 할아버지가 더 고약해요!노인 이제 저리 썩 꺼져! 소년, 씩씩대며 공을 쫓아 사라진다. 노인 (혀를 차며) 웬만큼 시끄러워야지. (주변을 보다가 관객석을 향해) 뭘 봐? 이 봐, 박 씨, 황 씨, 뭘 그렇게 쳐다보느냐고? 노인네 혼자서 바둑 두는 거 처음 봐? 상대가 없으니 혼자 두는 거지, 그게 그렇게 유난스럽게 쳐다 볼 일이야? 자네들 하던 거 마저 해. 난 상관 말고. 노인, 다시 혼자서 바둑을 둔다. 아주 긴 사이. 노인의 표정은 복잡 미묘하다.매미 울음소리가 아주 오랫동안 들려온다.남자가 등장한다. 남자, 노인의 옆으로 가 앉아 이마의 땀을 닦는다. 노인 자리 주인이 곧 나타날 거야.남자 …….노인 …난 분명히 말했어.남자 ……계속 여기 계셨던 거예요?노인 그거야 자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 나야 원래 여기 있는 게 내 일인데.남자 벌써 해가 다 저물었는데요.노인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김 씨가 곧 올 거라는 게 중요한 거지.남자 왜 그렇게 그 분을 기다리시는 거죠?노인 그야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 (사이) 자네 아버지는 찾았나?남자 못 찾았으니까 저 혼자 있겠죠.노인 그래서 이제 어쩔 건가?남자 어쩌긴요. 내일 다시 와서 찾아봐야죠. 아버진 분명 여기 어딘가 계실 겁 니다.노인 내일이면 자네 아버지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남자 …….노인 헛수고야.남자 뭐라고요?노인 앞으로도 자넨 계속해서 아버지를 못 찾을 거야. 왜냐, 어딜 가든 노인네 들은 많고, 그 속에 자네가 찾는 아버지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사이. 노인 이제 와 찾는 이유가 뭐야?남자 그야…… 자식 된 도리로서…….노인 자식 된 도리 좋아하네. 자네가 내 앞에서까지 그렇게 가식을 떠는 걸 알 면은, 자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려다가도 혈압이 올라서 안 돌아올 거 라구. 자네가 이미, 오래 전에 자네 아버지를 버린 거야. 알겠어?남자 제가 아버지를 버린 게 아니라, 아버지 스스로 제 손을 놓으신 거예요. 정 신이 오락가락해서…….노인 정신이 오락가락해? 누가?남자 아니, 그야 당연히 아버지죠.노인 그런 노인네가 집을 나갔는데 그냥 뒀단 말이야? 이런 더 괘씸한 놈 같으니.남자 그래요, 사실 처음엔 오히려 잘 됐거니 했습니다. 집안 상황이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고요. 됐어요? 지금 이런 대답을 원하시는 거잖아요.노인 그래, 그런데 왜 이제야 찾느냐고 묻잖아? 말해 봐. 어디 자네 아버지 앞 으로 있는 땅 문서라도 나타났어?남자 땅 문서라니요?노인 또 무슨 등골 빼먹을 게 나타나서 찾고 있는 것이냐고?남자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하고 계시네요.노인 노인네가 썩어 문드러져서 죽을 때까지, 응? 달려있는 거라고는 죄다 뜯어 내서 가질 생각인 거잖아. 그렇지? 내 말이 틀려?남자 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노인 떳떳하지 못하니 말하지 못하는 걸 테지.남자 말하면 어차피 믿지도 않으실 거잖아요.노인 (고함치며) 그럼! 다 거짓부렁이야! 싹 다! 사이. 노인, 남자에게서 등을 돌린다. 노인 집에나 돌아가. 자네 아들이 자네를 찾는다고 돌아다니고 있어.남자 예?노인 아들 놈 한테는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구선 말이야. 여기서 애 빌 찾겠다고 돌아다니는 자네 꼴이 정말 괘씸하기 짝이 없어.남자 뭐라고요? 제 아들이요?노인 아까 여기서 그 놈이 나랑 바둑을 뒀어. 멀리서 축구공이 굴러온다. 소년, 등장한다. 노인 저기 다시 나타났네.남자 누구요?노인 저기 저 놈이 내가 말한 그 녀석이야.남자 제 아들이라고요? 남자, 소년에게 다가간다. 남자 아뇨… (보다가) 제 아들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요.소년 누구세요?남자 그러게 말이다. 남자와 소년, 서로를 보며 어리둥절한다. 노인 (소년에게) 저 놈이 네가 말한 아빠가 아니냐?소년 아뇨. 우리 아빤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심지어 나랑 별로 닮지도 않았 잖아요.남자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노인 아니, 그럴 리 없어. 자네가 분명 저 애의 아빠일 테고, 저 애는 자네 아 들이어야해. 그리고 자네가 찾는 아버지는 내가 기다리는 김 씨 일 테지. 그렇지?남자 어르신, 몇 번이나 물으셔도 이 앤 처음 보는 애에요. 제 아들이 아니라구 요.소년 이 아저씬 제 아빠가 아니에요.노인 (고함치며 벌떡 일어선다) 아냐, 틀림없이 내 말이 맞아! 응? 어서 그렇다 고 대답들 해! 남자와 소년,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선다. 이내 도망치듯 퇴장한다.노인, 허망한 얼굴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암전. 3장 무대, 밝아진다.노인, 여전히 벤치에 앉아 멀거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젊은 순경이 등장한다. 순경 선생님. 한참을 찾았습니다.노인 나야 항상 여기 있었어. 노인이 잠시 고개를 돌려 순경을 바라본다. 노인 많이 본 얼굴이야.순경 예?노인 다들 그런 비슷한 얼굴이었다구. 여기나 저기나. 노인이 다시 생각에 잠긴다. 순경 많이 깜깜해졌어요.노인 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순경 ……그럼요, 선생님?노인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중요한 거야.순경 무슨 말이요?노인 여기서 아버지를 찾던 그 젊은 사람의 애가 바로 그 애였을 거라는 거야.순경 …애요?노인 아들. 요만한 꼬마 녀석인데, 엄마는 필리핀 사람인가, 아니, 베트남 사람 이야. 그런데 아주 오래 전에 도망가고 없대. 그 꼬마 녀석이 자기더러 김 씨라고 그랬거든. 그리고 그 꼬마 녀석의 아빠라는 놈은 집 나간 아버지를 찾고 있고. 그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놈이 그 노인네 아들인 것 같아.순경 누구요?노인 김 씨. 내 친구 말이야.순경 …예, 김 선생님은 오늘도 역시… 안 오셨겠죠.노인 그래. 여태 오질 않았어. 여 봐. 김 씨가 아무래도 뭔 일이 난 것 같아. 자네가 김 씨 좀 찾아줘. 그 노인네, 자기 아들이 찾아온 것도 모르고 어 디서 소리 소문 없이 가버렸으면 어떡해? 내가 그 젊은 놈한테 윽박을 질 렀거든. 또 뭘 뜯어내려고 찾는 게냐고. 사실은 그게 아니라 정말로 지 애 비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걸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사이. 순경 선생님,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시지 않구요.노인 집? 아, 집은 내가 때 되면 알아서 가. 걱정 마.순경 아뇨, 선생님 지금 사시는 그 쪽방이 아니라, 아드님 아파트로 말입니다. 아드님께서 선생님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신답니다.노인 뭐? 기다리긴 누굴 기다려?순경 이제 제발 집으로 돌아와 달라고 하셨어요.노인 아냐. 죽었다고 전해.순경 지금 이렇게 버젓이 살아계시잖아요.노인 그 녀석한테 나는 하루아침에 죽었다고 해도 이상할 거 없지.순경 아드님 품으로 돌아가세요, 선생님. 선생님께서 돌아가시는 게 우리 모두 에게 좋은 겁니다.노인 좋기는 누가 좋아? 개뿔도 좋지 않다고.순경 선생님 여기 계신 거 뻔히 알면서, 저희한테 실종신고 한 아드님 생각도 좀 하셔야죠.노인 그래, 난 계속 실종인 상태로 있을 거라고.순경 그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온 아드님 마음이 어떻겠어요?노인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야. 하여튼 난 안 가. 내가 안 가겠다는 데 억지로 돌려 보내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야. 내 말이 맞지?순경 선생님. 제발요.노인 미안하지만 더 이상 줄 게 없다고 전해. 노인, 요지부동이다. 순경, 긴 한숨을 쉰다. 노인 자넨 늘상 같은 얘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순경 네, 늘 같은 얘기를 해드렸지만, 선생님도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노인 난 여기서 김 씨 좀 더 기다리다가 돌아갈 거야. 그 양반이 오기로 약속을 했으니까, 이제 곧 올 거거든.순경 선생님.노인 …여기서 나랑 바둑 두고 설렁탕도 먹고… 못다 한 얘기도 마저 하고…….순경 그 분, 아무리 기다려봤자 안 오실 거예요.노인 ……아냐. 올 거라구, 그 양반이.순경 이미 잘 알고 계시잖아요. 김 선생님. 순경, 퇴장한다.노인, 벤치 위에 망령처럼 가만히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막.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희곡·시나리오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희곡·시나리오

당선 전화를 받고 한동안은 멍하니 있었습니다. 노트북 폴더에 묵혀두었던 오래된 희곡을 꺼내 다시 들여다보고 고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막연히 꿈꾸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왔네요.글 쓰겠다고 골방에 틀어박혀 괴로워하던 저를 보며 마음 아파하시던 엄마. 걱정하시던 아빠. 두 분께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드린 것 같아 기쁩니다. 엄마 조영웅 님, 아빠 김용관 님 사랑합니다. 두 언니 김선희, 김미희와 동생 김기범에게도 저의 울타리가 되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작년 겨울 태어난 선우야, 이모가 많이 사랑해.당선 소식을 듣고 전화 너머로 우시던 고연옥 선생님. 선생님의 격려 덕분에 지금까지 희곡을 놓지 않고 쓸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며 축하의 말을 건네주신 배삼식 선생님. 선생님을 만나 처음 희곡을 쓰던 스무 살 무렵이 떠오릅니다. 윤대녕 선생님과 김사인 선생님, 그리고 연극원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멀리서 절 위해 기도해주시는, 저의 은사 이진순 선생님. 감사합니다.곁을 지켜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합니다. 20년 지기 친구 지수. 사랑하는 고등학교 친구들. 현지, 예지, 민, 진명. 소중한 대학 동기 은서와 지연 언니. 멋진 배우 윤지 언니와 세경 언니. 괄호의 사람들. 소연 언니, 효진 언니, 도은님, 민조님. 그리고 늘 나를 응원해주는 용. 모두에게 함께 해서 행복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생각이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의심이 가득할 때면 글을 쓰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시간에서 벗어나 저를 좀 더 믿어보려 합니다. 스스로를 믿고 글을 써 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매일신문에 감사드립니다.긴 터널 속을 걷다 마침내 선명한 빛을 발견한 것만 같습니다. 그 길을, 열심히 나아가보겠습니다. ◆김진희1994년 익산 출생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금속성 이빨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금속성 이빨

허기 들린 포클레인 산동네를 잠식한다비탈에 선 집과 가게 밥 푸듯 푹 퍼 올려뼈마디 오도독 씹는 공룡 같은 몸짓으로 찢겨져 너덜대는 현수막 속 해진 말들무너진 담벼락은 철근마저 무디게 휘어날이 선 금속성 이빨 하릴없이 보고 있다 이주민 행렬 따라 먼지구름 피는 도시아파트 뼈대들이 죽순처럼 솟아오를 때만삭의 레미콘트럭 양수 왈칵 쏟아낸다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시조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시조

세계인들을 만나 한국을 소개하고 서로의 역사와 생활방식을 주고받는 홈스테이로 왁자지껄하던 집안이 코로나19 때문에 적막에 싸인 지 1년이 지났습니다. 한복체험과 김치 만들기, 때로는 여행가이드가 되어 그들과 함께 다니며 민간외교관이라 자부하던 즐거움을 잃어버렸습니다.그 허전함을 시조로 달랬습니다. 잠을 자다가도 잠꼬대처럼 메모지를 빼곡하게 채워놓고, 아침이면 암호 같은 메모를 해독하며 시조를 썼습니다. 머리가 가장 맑은 새벽잠을 반납했습니다. 1년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알람을 새벽 3시에 맞춰놓고 아침식사 준비 전까지 좋은 시조와 문학상 수상작품 등 이른바 '명품 시조'를 미련할 만큼 읽고 또 읽으며 필사를 했습니다.당선 소식에 아직도 가슴이 뜨겁습니다. 누군가의 가슴골을 울리는 시조를 쓰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가슴골을 울리는 시조를 쓰고 싶다는 평소의 바람이 이제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하늘길이 활짝 열려 내 집을 다녀간 18개 나라 사람들보다 더 많은 외국인들에게 우리 시조를 알리고 싶습니다.부족한 작품에 장미꽃을 달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매일신문사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부족함을 알기에 더 열심히 쓸 것을 다짐합니다. 오랫동안 글쓰기를 포기했던 저에게 따뜻한 격려와 용기를 보내주신 윤금초 선생님과 임채성·이두의 시인님, 그리고 선·후배 도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말없이 응원해준 남편 홍순열 씨, 언제 어디서나 글을 쓰라고 노트북까지 사주며 응원한 아들 홍찬표, 며느리 안지혜, 내 비타민 같은 소예, 성윤이도 두 팔이 아프도록 끌어안아 주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게스트들이 꼭 물어봅니다. "너 시인이야?" 그 물음에 저는 기죽은 목소리로 시인이 될 거라며, 코리아 팬케이크(김치전)와 라이스와인(막걸리)을 마시며 제가 쓴 시조를 낭송해 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당당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I am a Korean sijo poet." 그리고 제 시조를 더 멋들어지게 낭송해 줄 것입니다.◆김남미1959년 충북 진천 출생2012년 8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아버지 구두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아버지 구두

새벽녘 아버지 구두가집을 나선다 내가 잠들었을 때 나가서잠들기 직전에야돌아오는 구두어떨 때는 내가 잠들고 나서꿈속에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돌짝길 걷다 다쳤을까옆구리가 조금 찢긴 구두밑창은 할머니 무릎뼈처럼 닳았다 아버지 구두의 원래 꿈은 무엇이었을까제 빛깔을 잃고 흙먼지를 뒤집어 쓴아버지 구두를 오늘은 꼭 수술대 위에 눕힌다 구두의사 면허증이 없지만첫 수술하는 의사의 마음으로 구두를 안았다 구둣솔로 아버지 삶에 떨어진 먼지를 턴다우리집 앞마당까지 놀러오는 비둘기가 모이를 콕콕 찍어 먹듯솔에 콕콕 바른 구두약으로 긴급 처방을 내린다 이제 기름칠만하면 잘 나가는내 새 자전거처럼아버지 구두도 막힘없이 걸어 나가겠지 아버지 삶에윤기를 내기 위해아버지 나이만큼 주름진 구두를호호 불어 토닥토닥 어루만진다 비로소아버지 삶에 떨어진 흙먼지를모두 털어내고하루에 고됨도 말끔히 씻어낸다 새로 변신한 아버지의 구두가콧노래 흥얼이며밝은 새벽녘 길을 향해 나간다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동시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동시

천진난만했던 시절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에 푹 빠져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튼튼한 나무로 성장하기 위해 사랑의 햇빛을 모았던 그때를 떠올려 봅니다. 새싹이었던 제 꿈은 어느덧 자라 어린 나무가 되었고, 제법 단단한 열매를 맺는 나무로 성장하였습니다.천상의 맛을 지닌 달콤한 열매를 맺는 나무로 성장하고 싶었는데, 열매를 맺기까지 때론 비바람이 몰아쳐서 채 여물기 전에 떨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고, 혹독한 가뭄이 이어져서 갈증에 시달리기도 하였습니다. 때론 온 세상을 꽁꽁 얼려버리는 한파 속 겨울나무처럼 따스한 봄의 기억으로 언 몸을 흔들어 녹여가며 봄을 기다리던 그 시간도 지금 되돌아보면 자양분이 되었습니다.저는 어린이들에게 약속하고 싶습니다. 너희 걸어가는 길이 혼자라 느끼지 않게 따듯한 글을 쓰며 함께 성장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습니다.제가 어린 시절 동시와 동화를 읽으면서 행복했던 것처럼 저도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용기와 희망, 그리고 꿈을 심어주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또한 잘 하고 있다고 응원을 해주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아플 땐 감추지 말고 그냥 울어도 좋다고 다독이며 위로해 주는 작가가 되겠습니다.먼저 저에게 기회를 열어 주시고 날개를 달아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신 매일신문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를 끝까지 믿어 주었던 사랑하는 가족과 비타민 같은 친구들, 그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모교의 교수님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좋은 구두는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준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춘문예 동시를 보내기 위해 우체국에 갈 때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꺼내 신었습니다. 이 반짝반짝 빛나는 새 구두를 신고 설레는 마음으로 시상식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김사라1986년 서울 출생제4회 바다 문학상 시 부문 차하제1회 호연재 여성문학상 시 부문 장려2009년 한국문학세상 수필 등단(J와의 인연으로)제17회 설중매 문학 신인상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동화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동화

까르르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옆에 다가가 가만 귀를 기울여보면 참으로 별 게 아니다. 저게 뭐 그리 웃을 일이라고 배꼽을 잡을까.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웃을 수 있는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큰 사람이라는 걸.지난 한 해 아이들은 학교도, 놀이터도, 친구네 집도 편히 갈 수 없었다.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느라 친구들 웃는 낯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팍팍하고 고된 세상 속에서 해맑고 굳세게 성장하는 아이들이 대견하다. 칭찬 받아 마땅하다. 공부나 열심히 해라, 책이라도 한 줄 더 읽어라 다그쳤던 어리석음을 사과하고 싶다.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하는 글을 쓰겠다. 꼭 읽어주지 않아도 좋다. 까르르 웃고 노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잘 된 일이다. 심심하면 놀러오라고 책장만 활짝 펼쳐두겠다.이 세상에 마법은 없다는 걸 뻔히 아는 나이가 되었어도, 혹시나 내 인생에 단 한번은 마법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런 어수룩한 순진함 덕에 동화의 세계에 뻔뻔하게 발을 들이밀 수 있었나보다.아이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아낌없이 전해주는 찬희와 재희, 응원해주는 남편에게 고맙다. 좀 더 글을 써보라고 고개를 끄덕여주신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위원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나는 지금부터 책가방에 하얀 종이와 몽당연필과 때 묻은 지우개를 담아 머나먼 길을 떠나겠다. 내가 가진 무기가 미천해도 나는 든든하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내 귓가에 어디로 가야할지 속삭여줄 테니까. 이제 출발이다. ◆박규연1980년 서울 출생덕성여대 의상학 전공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우리 집에 놀러와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우리 집에 놀러와

건호가 나와 엄마를 폴짝 앞질러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뒤돌아서서 빙긋 웃는 얼굴을 보니 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엄마를 슬쩍 끌어당겨 소곤거렸다."엄마, 오늘은 건호 그냥 집에 가라고 하면 안 돼? 쟤 만날 우리 집에 가는 거 싫어."그러자 엄마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짓을 했다."조용히 해. 건호 듣겠다. 친구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가슴속에서 끓던 불덩이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씩씩거리며 건호의 어깨를 툭 밀치고 지나가버렸다.건호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우리 집에서 간식을 먹고, 나랑 같이 학원에 갔다가, 우리 집에서 저녁도 먹는다. 퇴근한 건호 엄마가 돌아와 건호를 데리고 갈 때까지 내내 우리 집에서 지내다 간다."선재야, 건호랑 친하지? 건호네 엄마가 일하느라 늦게 오니까 엄마가 건호를 너랑 같이 좀 돌봐 줄까 하는데, 괜찮을까?"처음에 엄마가 이렇게 물었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밤에 잠도 못 잘 정도였다. 안 그래도 혼자 놀기 심심했는데, 건호랑 학원도 같이 다니고, 우리 집에서 저녁때까지 매일 어울려 놀 생각을 하니 가슴이 풍선이 된 듯 들떠서는 실없이 웃음만 나왔었다. 그런데 건호가 자꾸만 얌체같이 구니 이제는 꼴도 보기 싫다. 제발 좀 자기 집으로 가버리면 좋겠다. 성가신 혹처럼 콕 붙어서 만날 쫄래쫄래 우리 집으로 따라오는 게 짜증이 난다.건호가 엄마 앞에 대고 왼쪽 발을 척 내밀었다."끈이 풀렸어요."엄마가 쪼그려 앉아 건호의 운동화 끈을 묶어주었다. 엄마의 굽은 등이 유난히 처량해보였다."뭐해? 얼른 와!"내가 외치자 엄마가 손을 탁탁 털면서 일어섰다. 건호는 또 쫄래쫄래 우리를 따라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가 사과를 깎고, 빵을 데워주었다. 식탁에 건호랑 마주보고 앉았다. 사과 접시가 가운데에 놓이자 눈치 없이 건호가 바로 한 조각을 찍어 입에 넣었다. 주인이 먹기도 전에 손을 대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인지 모르겠다."아, 아까 진짜 웃겼는데……."건호가 낄낄거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아까 체육시간에 줄넘기하다 넘어진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니겠지."넌 어떻게 하필 최혜주 바로 옆에서 넘어지냐? 최혜주 놀란 얼굴 봤어?"딱 저거다. 저렇게 얄미운 소리만 하니 좋게 봐줄 수가 없다."조용히 해라."내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야,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냥 잊어버려!"키득거리는 건호의 입 안에서 씹던 사과조각이 툭 튀어나왔다."아, 더러워!"나는 포크를 식탁 위에 탁 내려놓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 가버렸다.나는 혜주 앞에서 망신을 당했는데, 건호는 줄넘기 일등을 했다고 질투하는 건 아니다. 내가 그렇게 속이 좁지는 않다. 공부도 곧잘 하고, 키도 크고, 성격도 털털한 건호가 나는 오히려 좋았었다. 건호랑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란 기대에 설레기도 했다.그런데 건호는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닌 것 같았다. 학원에서 본 내 시험점수를 가지고 놀리기도 했고, 숙제를 하다가 엄마 앞에서 트집을 잡기도 했다. 우리 집에 온 첫날부터 쭈뼛거리며 어색해하더니, 요즘에는 나랑 놀면서도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린다. 학원을 다녀와서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건호는 줄넘기하다 넘어진 걸로 나를 놀려놓고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먼저 말을 걸어와도 시원치 않을 판에, 학원에서 내내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다른 아이들하고만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는 걸 보니 목구멍에 차올랐던 불덩이가 머리끝까지 솟았다.입을 꽉 다물고 숙제를 하는데,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얘들아, 사골국 끓여놨어. 얼른 숙제하고 저녁 먹자. 너희들 배고프겠다."건호가 엄마의 말에 인상을 썼다.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건방짐이 하늘을 찌른다."선재야, 손톱이 너무 기네. 손 줘봐. 본 김에 깎아야지, 또 잊어버릴라."엄마가 손톱깎이를 가져와 내 손톱을 하나하나 깎아주었다. 조용한 방안에 톡톡 손톱 깎는 소리가 울렸다. 톡."아!"내 손톱 하나가 건호의 얼굴로 튀어 오른 모양이었다. 옆에서 숙제를 하던 건호가 얼굴을 문지르며 또 인상을 썼다."아이고, 건호도 아줌마가 손톱 좀 깎아줘야겠다. 너희들 손톱 보면 호랑이가 친구하자고 하겠다!"엄마가 속도 없이 헤벌쭉 웃으며 건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엄마는 건호의 손톱도 하나하나 정성껏 깎아주었다. 저런 모습도 못마땅한 것 중 하나다. 아까 운동화 끈이 풀렸을 때도 당당하게 발을 내밀더니, 아주 당연하다는 듯 손을 뻗어 엄마에게 맡기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우리 엄마가 자기 엄마도 아닌데, 자기 엄마 대하듯이 굴고, 어쩔 때는 종 부리듯 한다. 엄마가 엄하게 한 소리 하면 좋을 텐데, 엄마까지 건호를 나와 똑같이 대했다. 손톱을 다 깎은 엄마가 자리를 뜨자마자 건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야, 손톱은 너희 엄마한테 잘라달라고 해라. 우리 엄마가 네 종이냐?"그런데도 건호는 조금도 기죽은 기색 없이 오히려 피식 코웃음을 쳤다."너 지금 비웃냐?"머리끝까지 올라온 불덩이가 화산처럼 터져버렸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건호를 확 밀어버렸다. 건호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나를 노려보았다."너희 엄마 돈 받잖아. 나 봐주는 대신 우리 엄마가 돈 준다고!"건호가 이글대는 눈으로 나지막하게 쏘아붙였다. 내 온몸에 뜨거운 화산 용암이 끊임없이 줄줄 흘러내렸다. 식탁 앞에 앉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사골국을 쳐다보고 있으니 자꾸만 눈앞이 뿌예졌다."너희들 분위기가 왜 이래? 싸웠니? 기분들 풀고 어서 밥 먹어. 국 다 식겠다."엄마가 물 잔을 놓으며 말했다. 나에게 독한 말을 쏟아낸 건호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인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엄마의 재촉에 우리는 할 수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엄마가 밤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애써 끓인 사골국이라 더 맛있게 먹어야 하는데, 화끈거려 손이 가질 않았다. 나는 대신 밥알을 잘근잘근 씹으며 건호가 한 말을 곱씹어보았다.곰곰이 따져보니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나 하나 키우기도 힘들다던 엄마가 건호를 돌봐주겠다고 대뜸 나선 것이나, 나에게 하듯 건호를 세심하게 살펴준 것이나, 내가 싫다고 투정을 부려도 건호를 빼먹지 않고 우리 집에 데리고 온 일들이 단번에 이해가 갔다. 돈 없다, 아껴 써라, 잔소리 하던 것까지 모조리 떠올랐다. 나는 훨훨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심정으로 사골국을 그릇 채 들어 꿀꺽 마셔버렸다. 주루륵 이마를 타고 땀이 흐르는 느낌이 났다."어머! 건호야!"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건호가 먹은 음식을 바닥에 모조리 토하고 있었다. 건호의 티셔츠와 바지에 하얀 국물이 범벅이 되어 뚝뚝 흘러내렸다.화장실에 들어간 건호는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허둥대며 부엌 바닥의 토사물을 닦고, 갈아입을 옷을 챙기는 동안 나는 화산이 멈춰버린 것처럼 멀뚱히 서있기만 했다. 그때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건호 엄마였다."아유, 죄송해서 어쩌죠. 아, 사골국이요……. 괜찮을 거예요. 일단 건호 데리고 집에 가서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괜히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요."자초지종을 들은 건호 엄마가 민망한 얼굴로 사과를 하고는 서둘러 건호를 데리고 갔다. 엄마가 왔다는 소리에 건호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내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건호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에 넋이 나간 듯 휘청거렸다. 힘없이 대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마음이 울렁거렸다.자려고 누웠지만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 건호가 나 때문에 밥을 먹다 체했나 싶고, 나 때문에 토한 건가 싶고, 내가 그렇게 잘못을 했나 싶었다. 나는 건호를 싫어하지 않았는데, 건호에게 잘해주려고 했는데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괜스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당장 내일 학교에서 건호를 만날 일이 걱정이 되었다.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뒤척거렸다. 엄마도 늦게까지 깨어있었다. 거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하죠. 건호가 사골국을 못 먹는 걸 알았다면 다른 걸 먹였을 텐데……. 아무 말을 안 해서 몰랐어요. 네, 잠자코 먹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랬나 봐요. 자기 집이 아니니 불편했겠죠. 제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선재도 철이 없어요. 아직 애라서 배려도 모르고……. 건호가 저희 집에서 지내느라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까봐 걱정이네요. 네, 네. 아니에요. 그럼요. 언제 한번 건호랑 저희 집에 같이 놀러오세요. 선재한테도 제가 잘 얘기할게요. 애들은 괜찮겠죠. 금방 잊어버리잖아요."엄마의 말들이 귓속으로 들어와 꾹꾹 담겨서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갑갑한 마음으로 깜깜한 창밖을 바라보는데,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선재야, 건호가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좀 불편해서 그랬나봐. 너랑 엄마 사이에 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겠지. 눈치도 보이고 그랬을 거야. 학교 가서 건호 만나면 토한 얘기 꺼내지 말고 반갑게 인사해. 싸웠어도 네가 먼저 풀고. 친구끼리는 그러는 거야."나는 계속 창밖만 쳐다보았다. 엄마와 눈이 마주치면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엄마 돈 받아? 건호 봐주는 대신 건호 엄마한테 돈 받아?"방에서 나가려는 엄마에게 입속에서 맴돌던 말을 꾸역꾸역 내뱉고 말았다."돈? 그거야…… 건호 간식 먹이고, 저녁까지 먹여준다고 건호 엄마가 고마워서 주는 거지. 설마 엄마가 돈 때문에 건호 봐줬겠니? 네 친구니까 안쓰러워서 그런 건데……. 너희들은 쓸데없는 데에 신경을 쓰더라. 그런 건 어른들이 알아서 하니까 너희들은 그냥 사이좋게 지내면 돼."다음날부터 건호는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이모인지 이모할머니인지 누군가 와서 건호를 돌봐준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혼자서도 집에서 잘 있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었다. 궁금했지만 물어보자니 내가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학교에서도 마땅히 화해할 기회가 생기지 않아 서로 보고도 못 본 척하며 어색하게 지냈다. 굳어버린 용암덩어리가 가슴팍에 꽉 막힌 듯 답답하기만 했다. 며칠 뒤, 체육시간에 줄넘기 마무리 수업으로 급수 시험을 보았다. 아이들이 우리에서 빠져나온 양떼처럼 우르르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그동안 줄넘기 연습을 열심히 했다. 이번만큼은 멋지게 해내서 지난 번 혜주에게 망신당한 일을 보상받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도 열심히 연습한 모양이었다. 다들 폴짝폴짝 신이 나서 줄을 넘었다. 하도 잘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슬그머니 주눅이 들었다.나는 건호와 한 조가 되어 함께 시험을 보았다. 하필이면 같은 조라는 게 께름칙하긴 했지만, 건호를 이기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건호랑 콩콩 뛰는 박자가 기막히게 딱 맞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한 번씩 줄을 넘을 때마다 내 몸이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가벼워졌다. 나는 4급을 받았고, 줄넘기를 잘하는 건호는 2급을 받았다.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내가 원래 욕심이 많은 편은 아니다.수업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이선재!"건호였다. 건호가 나에게 달려왔다."야, 너 끈 풀렸어. 발 줘 봐."뜻밖의 건호의 말에 물끄러미 발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운동화 끈이 풀어져 운동장 흙에 맥없이 끌리고 있었다. 건호가 쪼그려 앉아 내 운동화 끈을 묶어주었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다가 건호 옆에 같이 쪼그려 앉았다."나 끈 묶는 거 배웠다! 잘하지?"건호가 다부지게 매듭을 묶고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건호의 눈빛에 갑자기 눈이 부시는 것 같았다."고마워."우리는 함께 일어서서 교실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건호를 이기고 싶었다. 건호가 나를 스치며 훌쩍 앞질러 가는데, 나도 있는 힘을 다해 건호를 잡으려고 뛰었다."건호야! 우리 집에 놀러와!"운동장이 쩌렁쩌렁 울리게 큰소리로 외치면서 말이다. (끝)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수필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수필

동백나무 묘목을 심고 가꾼 지 1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무는 올 겨울 유난히 바알간 꽃숭어리를 나뭇가지마다 풍성하게 달고 있습니다. 동백나무는 저의 글벗입니다. 제가 바닥 가까이 앉아서 세상을 독대(獨對)하며, 애오라지 글쓰기라는 꿈을 향해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우직하게 살아온 저를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뜻밖의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제가 돌봐준, 사랑스러운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제 글이 영글게 힘을 보태준, 고마운 아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겠지요.왕방산에 누워 계신 아버지께 당선 소식을 올릴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매일신문에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와 같이 애면글면 혼자 글 쓰면서 어깨를 겯고 응원해 준 대학 동기 조현미 수필가와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 방송대 선배님과 함께 호호 할머니가 되어도 글 쓰면서 멋있게 늙어가고 싶습니다.부족한 글을 세상에 빛을 보게 해 준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합니다. 저의 첫 독자가 되어 준 남편, 아들딸, 존재만으로 감동인 이쁜 태인이, 사위, 친정오빠, 여동생, 친구들과 저를 기억하는 이들과 당선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생업을 하면서 밤낮없이 글쓰기의 꿈을 향해 정진하는 세상의 모든 무명의 문학도들과 글을 쓰는 선생님들 모두 힘차게 응원합니다. ◆김미경1968년 충북 제천 출생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제9회 사이버 중랑신춘문예 수필 장원제2회 혜암아동문학상 동시 부문 수상

2021-01-04 06:30:00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안아주는 공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안아주는 공

그 집에서 아이가 주로 지내는 놀이방은 나의 일터다. 놀이방 한 켠에 공이 오종종히 모여 앉아 있다. 한데 어우러진 노랑, 초록, 빨강, 분홍색 공이 줄기를 자른 꽃송이를 둥글게 묶어 만든 플라워 볼처럼 보인다.공을 집어 들어 바닥에 던진다. 저녁 강 물 위로 뛰어오르는 피라미처럼 탄력적으로 튀어 오른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이 바닥을 칠 때, 공은 제 몸을 딛고 일어난다. 방바닥을 박차고 오른 공이 아치형 발걸음을 뗀다. 그러다 냅다 달음질친다. 공이 달려가서 아이를 안아준다. 공을 품에 안은 네 살짜리 아이 얼굴에서 분홍색 실타래 웃음이 풀려나온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두 눈에 미음 돌 듯* 그늘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아니던가.아이를 안아준 공은 둥글다. 둥글다는 말 속에는 모나고, 거칠고, 투박한 것들을 품어 아우르는 기운이 깃들어 있다. 공은, 모서리를 내민 아프고 슬픈 기억들을 원형 속에 꿍쳐 어루만지며 치유해주는 힘이 있다. 땀이 나도록 공을 던지고 굴리며 놀다 보면, 어느새 찌무룩한 얼굴에 볕뉘가 드리워지는 순간이 찾아온다.또한 공은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언틀먼틀한 길도 마다하지 않는 여유와 설산에서 크레바스의 스노우 브릿지를 만나더라도 겁내지 않고 뛰어 넘는 기개도 지녔다.아이에게 달려간 공은 코바늘로 둥근 모양을 떠서 구름솜과 삑삑이를 넣고 마무리한 뜨개질 공이다. 여러 날 내 손끝에서 아기둥 바기둥 뒤척이던 실타래가 내어 준 웃음 뭉치인 것이다.몇 달 전, 구직 면접 보는 자리에서 아이를 처음 만났다. 여자 아이가 불안한 얼굴로 흘끔흘끔 쳐다봤다. 아이 엄마와 아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아빠 없어."아이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해서 아이 엄마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애정결핍과 분리불안증으로 보채고 울면서 한시도 내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유난히 애착이 심했던 아이에게 안아주는 공이 돼 주고 싶었다. 시간 나는 짬짬이 색깔 별로 뜨개질 공을 뜨면서 아빠의 빈자리에 굴러가서 사랑으로 채워지길 바랐다. 공에 보풀이 일면서 불안했던 아이의 시선이, 움츠렸던 태도가 안온해졌다. 실 한 올 한 올이 포근함으로 부풀어 올라 아이 마음속을 넘나들면서 모서리와 응어리를 뭉툭하게 매만져주었는지도 모른다.그리고 아이의 정서적 긴장을 해소시키기 위해 신문지 찢기 놀이도 했다. 아이가 찢어 놓은 신문지를 뭉쳐서 종이 공을 만들었다. 바구니에 공 던지기 놀이를 했다. 아이가 던진 공이 바구니 모서리에 맞고 내 앞으로 굴러왔다. 그때였다. 아이가 던진 종이공이, 어릴 적 동생과 놀았던 우그러진 무채색 종이 공을 불러왔다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었던 집안에서 신문지를 뭉쳐 만든 종이 공은 유일한 놀잇감이었다. 날짜 지난 신문지를 모아서 둥글게 뭉쳐 풀칠하고 테이프를 붙여 만들었다. 운동회 날 운동장에서 구르던 백군 공처럼 커다란 종이 공을 굴리면서 놀았다. 황토마당에서 굴리던 공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둥글게 말아 안아주는 것 같았다.초록의 유년시절을 지나 어느새 중년의 늦가을이 찾아왔다. 낙엽비가 내리면. 속수무책으로 휑한 가슴팍에서 휘돌아나오는 소슬바람을 어찌하랴. 그럴 때 재활용통에 모아둔 폐지로 하릴없이 종이 공을 만든다. 종이 공을 벽에 던져 받기 놀이, 공차기 놀이를 한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공놀이를 하다보면, 초라한 종이공일지라도, 괜스레 휘청거리는 마음을 보듬어 안아주는 공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세상에는 부모의 든든한 지원과 응원을 받으며 모두에게 환영 받는 빛나는 공만 있는 건 아니다. 우그러지고 못난 무채색 종이 공도 존재한다. 어른이 되어도 종이 공을 외면하지 않고 갖고 노는 건, 어린 시절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 주고 둥글게 안아 준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이 굴러 온 삶의 흔적이야 초라하든, 빛나든 품은 뜻만은 따뜻했으면 한다.공이 데리고 오는 세상은 모나지 않고 둥글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기억하는 공은 세상을 둥글게 안아주는 따뜻한 품새를 갖고 있다.늘 그랬듯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 연결된 탯줄 같은 실타래를 풀어 아이들 마음을 둥글게 보듬고 안아주는 삶을 한 코 한 코 이어가리라.아이가 분홍색 뜨개질 공을 집어 던진다. 놀이방이 비좁다는 듯 튀어올랐다가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공이 아이처럼 늘품 있고* 늡늡하다*. 놀이방 한 쪽에 플라워 볼처럼 놓여 있는 공들 중에서 초록색 공을 집어 들어 아이에게 굴린다. 지구별만 한 공이 데굴데굴 굴러가서 아이를 안아준다. *미음 돌 듯 : 눈물이 가장자리로부터 조금씩 피어드는 모양*늘품 있다 : 앞으로 좋게 발전할 가능성*늡늡하다 : 속이 너그럽고 활달하다

2021-01-04 06:30:00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희곡·시나리오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희곡·시나리오

세대를 망라한 다양한 주제의 뛰어난 수작 대거 몰려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응모 편수에 먼저 놀랐고, 높은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아서 거듭 놀랐다. 응모작들을 읽고 추려나가는 동안 심사자들은 행복한 고민 속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꼭 전하고 싶다. 마지막까지 심사자들의 손을 떠나지 않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희곡 '늙은 개의 산책', '스탭', '한낮의 유령'과 시나리오 '고도의 괴물' 모두 탄탄한 기본기 위에 자신만의 뚜렷한 개성을 쌓아올린 탁월한 작품이었다. 네 편의 작품이 각각 고유한 미덕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많은 논의를 거듭해야 했지만, '한낮의 유령'이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는 점에는 빠르게 의견일치를 보았다.제목 자체가 독특한 울림을 주는 '한낮의 유령'은 한국사회의 주요 현안인 가족해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공원의 벤치라는 한정된 공간과 소수의 인물 활용은 단막극의 전형적인 설정이지만 작품을 단조롭고 지루하게 만들 우려도 있다. 작가는 시차를 두고 드나드는 각 세대를 대표하는 등장인물을 이용하여 그 한계를 극복하면서, 가족해체 현상의 다양한 측면을 함께 건드렸다. 늙은 아버지의 가출을 의도적으로 방임했던 남자는 그를 찾기 위해 공원에 왔고, 이혼으로 어머니를 잃어버린 다문화 가정의 소년은 빚쟁이를 피해 도망간 아버지를 찾아 공원으로 왔다. 그 둘을 매개하는 노인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처지를 제멋대로 재단해버리는 폐쇄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이 서로 얽히면서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한다. 다만 3장에 등장하는 순경이 이야기의 마무리를 위한 '의도적인 해설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나머지 세 작품도 당선작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았다. '고도의 괴물'은 이장네 큰아들의 인물 성격이 모호하여 선아가 편입된 마을의 폭력적 구조를 명확히 드러내지 못하는 점이, '늙은 개의 산책'은 아기자기한 작품이지만 관객들이 예상하는 과정과 결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상투성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스탭'은 상징성이 강한 희곡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그러나 그 장점을 극의 마지막까지 지속시켜나가지 못하고, 은수와 아이가 잃어버린 꿈에 대해 직접 이야기 나누는 상황을 설정한 것이 단점으로 남았다. 작은 결함들을 보완한다면 세 작품 모두 훌륭한 단막극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심사위원: 김재석(경북대 교수), 최창근(극작가 겸 연출가)

2021-01-04 06:30:00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시조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시조

문명비판적 사색과 감성의 조화 시조의 위의는 민족적 미학과 우리말의 호흡이 이끌어낸 독자적 정형성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민족 스스로 선택한 민족시의 고귀한 질서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일정한 질서는 곧 자연의 섭리에 대한 순응이자 보다 가까워지는 국제화 시대의 변별력이다. 우리의 말을 오래 사용했다고 결코 버릴 수 없듯이 오랜 역사적 사실만으로 제척사유가 될 수는 없다.코로나19 사태의 충격 속에서도 금년은 예년에 비해 응모 편수가 많이 늘어나고 응모지역도 전국적이었다. 따라서 상위권 작품의 수준 또한 우수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다만 시어가 뜻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감정의 직설이나 대상의 복제에 급급하고 사유가 부족한 작품들 또한 적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마지막까지 선자의 관심을 끈 작품은 조경섭의 '민들레 통신', 권규미의 '엿기름 내다', 김남미의 '금속성 이빨' 등 세 편이었다. 그 가운데 '민들레 통신'은 일상을 반추하는 진정성이 눈길을 끌었으나 메시지의 평이함에서, '엿기름 내다'는 대상물의 정체성을 돋보이게하는 참신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종장처리의 아쉬움에서 뒤로 밀려났다.마지막으로 흠결에서 보다 자유로운 '금속성 이빨'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작품은 재개발로 인한 갈등구조를 야기시켜온 상징적 도구이자 수단인 '포클레인'에 포커스를 맞추어 동영상처럼 명징하게 정황을 그려내고 있다. 문명비판적인 시선이 지닌 힘에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의 고른 수준이 당선의 담보가 되었음도 함께 밝혀둔다. 다만 자신의 진단에 대한 처방을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으나 이 점은 앞으로 당선자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될 것이다. 앞으로 시조의 새로운 주역으로 성장해주길 기대한다.

2021-01-04 06:30:00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동시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동시

울림이 있는 따듯한 동심 응모된 작품을 정독한 후 느낀 전체적인 경향은 우선 소재와 이미지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제에 따른 시적 상상력과 그것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 설명적인 작품이 많았다. 오늘의 동시가 새로운 소재와 표현, 참신한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은 지금의 어린이가 지난날의 어린이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문물을 빠르게 습득한다. 상상력과 사고 또한 기발하고 웅숭깊다. 따라서 시인들은 끊임없이 동심의 흐름을 파악하여 소재와 표현, 상상력의 확장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응모자의 연령별 분포는 중년층 이상이 많았으며 상대적으로 청년층의 작품은 적었다. 특이한 것은 중년층 이상의 작품과 청년층의 작품 경향이 확연히 달랐다는 것이다.고심 끝에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이현희의 '표정 없는 집, 김광희의 '중심', 김사라의 '아버지의 구두' 였다.먼저 이현희의 '표정 없는 집' 은 발상이 독특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삭막한 도시의 모습을 개성적인 눈으로 조응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의 풍경을 시각적으로 그리는 그 자체에 머물러 있었다.김광희의 '중심'은 이미지와 시어가 정제된 작품이다. 중심과 주변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시적 메시지가 관심을 끌었다. 다만 신인다운 새로움과 활달함이 더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당선작으로 뽑힌 김사라의 '아버지의 구두'는 이야기가 있는 작품이다. 참신한 비유나 표현 없이 담담하게 구두를 통해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삶과 교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나 사이에 구두가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시 전체를 끌고 가는 동심이 생활에 밀착되어 있고 작품 속에 용해된 사랑의 마음이 울림을 준다. 시는 울림이 있어야 한다. 이 울림이 독자에게 위안과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보내온 수편의 작품도 동심과 시심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여 신뢰를 주었다.그러나 '아버지의 구두'는 소재와 발상에서 새롭지는 않다. 또 시어의 선택과 이미지의 펼침에 다소 산만한 점도 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뽑은 것은 앞으로의 가능성과 사물을 보는 따듯한 동심 때문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빈다.

2021-01-04 06:30:00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동화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동화

동화, 희망을 이야기하다 300편에 가까운 응모작들 가운데 끝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은 작품은 5편이었다.'나사소년 김민석'(정미선)은 상처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서로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과정을 재미있는 소재를 동원하여 설득력 있게 그린 동화다. 문장이 질박함을 넘어 다소 거칠어 보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비누꽃'(박진희)은 탄탄한 서사의 틀을 갖춘 작품으로, 저마다 다른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서로 마음을 열고 힘을 모으는 모습을 애정 어린 눈길로 그려냈다. 사건 전개가 너무 '모범적'이어서 다음 대목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건 장점일까, 약점일까.'반창고'(오바다) 역시 비슷한 소재를 다룬 따스한 이야기이다. 글을 읽다 보면 온기를 전해주는 '목수건'과 상처를 감싸주는 '반창고'의 상징성에 주목하게 되는데, 사건 설정이 다소 작위에 흐른 점이 아쉬웠다.'낮은 계단'(정유나)은 끝까지 당선작과 어깨를 겨룬 무게 있는 작품이다.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계단을 오르는 단 몇 분 동안 일어난 일을 한 편의 동화로 완성한 점부터 신선했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일인칭 시점의 서술도 밀도 있고 자연스러워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완성도를 조금만 더 높였더라면 당선작으로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당선작으로 뽑힌 '우리 집에 놀러와'는 주제 형상화는 물론 구성과 문장에도 흠 잡을 곳이 거의 없는 수작이다. '일하는 부모'를 둔 요즘 아이들이 흔히 겪을 만한 소소한 일상을 '기승전결'의 완벽한 틀에 담아내어 만만찮은 감동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사건은 대단하달 것이 없고 등장인물도 단출하지만 이야기를 떠받치는 통찰의 무게는 결코 녹록하지 않다. 주인공 '선재'의 눈으로 자신은 물론 상대역인 '건호'의 미묘한 심리 변화까지 서두르지 않고 담담하게, 그러나 의도된 치밀함으로 개연성 있게 묘사한 데서 작가의 든든한 역량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당선이 작가에게는 더 큰 도약을 위한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며, 작품 속 아이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화해의 몸짓이 새해 우리 세상을 밝히는 희망의 화두가 되기를 또한 바란다.

2021-01-04 06:30:00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수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수필

일상의 가치를 깨우쳐 주는 수필들 수필을 쓴다는 것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들에 의미를 입히는 일이다. 수필은 하찮게 여기거나 무심코 흘려보냈던 삶의 일부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필을 쓰고 읽으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며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 하나가 일상의 행진을 가로막고 있는 이 시대에 수필의 책무가 더욱 소중해 보인다.539편의 수필 가운데 마지막까지 손에서 떨쳐 보내지 못하고 매만졌던 작품은 '한때 나였던 것들'(진서우), '질투는 나의 힘'(송혜현), '안아주는 공'(김민경)이었다.제목이 유혹적인 '한때 나였던 것들'은 '내 안의 당신'에게 전하는 말들로 채워놓은 글이다. 사랑이든 증오든 '나'를 둘러싼 것들 모두가 소중하다는 주제를 의도했다. 그러나 '나였던 것들'을 삶의 어떤 양상으로 구체화하지 못하고 여린 감정만 담아 놓은 점이 아쉬웠다. 질투가 삶의 동력이라는 아이로니컬한 논리로 무장한 '질투는 나의 힘'은 소유욕으로 가득 찬 인간의 속성을 빈정댄다. 풍자의 칼날을 숨긴 구성전략과 주제의식이 통괘하다. 다만, 메말라 있는 문체뿐 아니라 기형도의 시를 용사(用事)한 것이 걸림돌이었다.끝까지 남은 작품은 '안아주는 공'이었다. 놀이방에서 아이들에게 던져주는 공에 작가의 심경을 투사시켰다. 꽃무늬 새겨진 고무공, 구름솜과 빽빽이를 넣은 뜨개질 공, 신문지를 뭉쳐서 만든 종이공은 더 이상 무정물이 아니다. 분리불안에 보채고 우는 아이에게 달려가 아이를 안아주는 품이다. 아프고 슬픈 기억들을 원형 속에 꿍쳐 어루만지는 힘을 지녔다. 아빠의 빈자리에 굴러가 사랑을 채워주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감싸주는가 하면, 마침내 늘품 있고 늡늡한 아이들을 안아주는 지구별이다. 결손가정의 네살박이 아이를 주인공으로 클로즈업하고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을 살짝 곁들여, 관념적이고 밋밋하게 전달되기 쉬운 경험담에 사실성과 진정성을 불어넣고 입체성을 살렸다. 모두가 지나쳤던 사물과 직업으로 반복되는 사소한 일상을 통찰하고 해석하여 그 의미를 찾아냄으로써 가치 있는 삶으로 환원시켰다.우리 심사위원들은 마침내 김민경의 '안아주는 공'을 당당하게 당선작으로 내세운다. 수필은 무딘 일상에 값진 생명을 불어넣는 장르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면서.

2021-01-04 06:30:00

교황 곧 백신 맞나? "바티칸 1월 중 접종 개시"

교황 곧 백신 맞나? "바티칸 1월 중 접종 개시"

세계 가톨릭 총본산이자 국가인 바티칸이 이달 중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한다.2일(현지시간) 바티칸시국 보건당국은 성명을 발표, 이달 둘째 주 중 백신이 도착하고 이어 빠른 시일 내로 백신 접종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한다고 밝혔다.이탈리아 로마 내 바티칸에는 성직자와 수도자 등 모두 500명 안팎이 거주하고 있는데, 모든 거주민에 대한 접종이 가능한 백신 물량이 바티칸에 들어오는 것으로 알려졌다.'인구'가 적은만큼 '전 국민' 접종 완료 세계 신기록을 쓸 가능성이 높다.바티칸 거주민들이 접종할 백신 제품이 어느 회사 것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화이자 백신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접종 장소도 전해졌는데, 교황청 관영 매체 바티칸 뉴스는 '바오로 6세 홀'이라고 밝혔다. 이곳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요 일반 알현을 진행하는 곳이기도 하다.교황의 백신 접종 여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모든 거주민이 접종 대상이라는 보건당국 성명에 따르면 접종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전망된다.교황은 정기적으로 코로나19 검사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앞서 교황의 건강과 관련해서는 지난해 교황 관저인 '산타 마르타의 집'에 함께 거주하는 한 몬시뇰(가톨릭 고위 성직자), 로마 교구 총대리인 안젤로 데 도나티스 추기경, 교황청 경비 담당 스위스 근위대 구성원들, 그리고 가장 최근으로는 지난 12월 말 교황청 자선 활동 총괄 콘라드 크라예프스키 추기경과 바티칸 시국 행정원장 주세페 베르텔로 추기경이 잇따라 확진되면서 시선이 쏠린 바 있다.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생으로 올해 나이 86세(만으로는 84세)이다.

2021-01-03 19:37:48

경북 서원·항교 8곳 보물로 승격됐다

경북 서원·항교 8곳 보물로 승격됐다

경북 서원·향교 8곳이 최근 보물로 승격됐다.3일 경상북도에 따르면 ▷상주향교 대성전·동무·서무 ▷경주향교 명륜당 ▷경주향교 동무·서무·신삼문 ▷구미 금오서원 정학당 ▷구미 금오서원 상현묘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 ▷안동 도산서원 농운정사가 보물로 지정됐다.서원(書院)은 조선시대 향촌에 근거한 사림(士林)이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설립한 사립 교육기관이고, 향교(響敎)는 고려와 조선시대 지방에 설립된 관립 교육기관이다.보물로 지정된 서원과 향교 문화재들은 절제·간결·소박으로 대변되는 유교문화를 건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상주향교 대성전·동무·서무는 임진왜란 후 1610~1612년 사이 재건됐다. 이후 몇 차례 수리됐지만 원형을 대체로 잘 간직하고 있다.경주향교는 경북 내 향교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나주향교와 함께 우리나라 향교 건물 배치의 표본으로 꼽힌다. 명륜당은 중수기 등 문헌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어 건축 연혁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경주향교 동무·서무·신삼문은 2011년에 보물로 지정된 경주향교 대성전의 제향공간을 구성하는 건물들이다.구미 금오서원 정학당은 길재를 포함해 선산부와 연고가 있는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이 배향된 금오서원의 강당이다. 임진왜란 직후 현 위치에 새로 건립돼 변형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금오서원 상현묘는 조선 중기 건축구조와 양식을 잘 유지한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서원의 사당이다.안동 병산서원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 건축물로 벽체없이 전체가 개방돼 있는 독특한 외관을 보인다.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은 퇴계가 말년에 강학을 위해 마련한 건축물로 임진왜란 이전인 1561년 건립됐다. 퇴계가 건축에 직접 참여해 건축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고 문헌을 통해 건축 참여인물과 관련 내용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서당건축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도산서원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더불어 퇴계가 직접 설계한 건축물로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민도리식 맞배지붕이 특징이다.

2021-01-03 16:21:55

폐점 앞둔 대구 대형서점, 코로나19 위기 못 벗어났다

폐점 앞둔 대구 대형서점, 코로나19 위기 못 벗어났다

대구 대형서점의 폐점이 잇따르고 있다. 대구 중심가인 동성로에서 각축전을 벌이던 대형서점 중 한 곳인 영풍문고 대백점이 4년만에 문을 닫았다. 2019년 7월 폐점한 영풍문고 반월당점에 이어 2년 만이다.대구백화점 본점 지하 1층에 2016년 입점했던 영풍문고 대백점이 지난달 27일 문을 닫으면서 대구 대형서점은 교보문고 대구점과 반월당점만 남게 됐다.영풍문고 대백점은 2천340㎡ 규모로 조성돼 2016년 당시 대구시민들의 새로운 문화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올해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으면서 유동인구가 급감해 매출에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백화점 측은 영풍문고가 있던 자리를 식음료매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교보문고는 동성로 대구점과 현대백화점 지하 반월당점이 건재해 당분간 독주 체제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가까운 곳에 알라딘 대구동성로점, 예스24 반월당점이 있지만 중고서점이어서 교보문고의 경쟁상대로 보기는 힘들다.다만 반월당 삼성금융프라자 1층에 영풍문고 반월당점이 재입점할 것으로 알려져 다시 교보문고와 경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다른 대형서점인 반디앤루니스도 대구에서 물러났다. 신세계백화점 대구점 5층 파미에타운에 있던 대형서점 반디앤루니스는 3일까지 영업을 하고 문을 닫았다.서울문고의 서점 브랜드인 반디앤루니스는 2016년 신세계백화점 대구점 개점과 함께 운영해오다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영업 부진을 겪으며 대구를 포함한 일부 오프라인 매장을 철수하게 됐다.반디앤루니스는 2011년부터 10년간 영업해오던 롯데울산점도 지난해 11월 문을 닫았다. 한편 대구신세계 측은 반디앤루니스가 빠진 자리에 자사 아울렛 브랜드인 '팩토리스토어'를 입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21-01-03 16:07:44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당선작〉단편소설=달팽이를 옮기는 방법…허성환 (35·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시=야간산행…여한솔 (27·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시조=금속성 이빨…김남미 (62·서울시 은평구 가좌로)동시=아버지 구두…김사라 (35·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수필=안아주는 공…김미경 (53·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동화=우리 집에 놀러와…박규연 (41·서울시 서초구 동광로)희곡·시나리오=한낮의 유령…김진희 (27·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단편소설 본심=김화영(문학평론가), 박정애(강원대 교수·소설가) / 예심=오철환(대구소설가협회장), 이근자(소설가)시 본심=장옥관(계명대 교수·시인), 김경주(시인) / 예심=박미영(시인), 김욱진(시인)시조=민병도(시조시인)동시=이재순(아동문학가)수필=여세주(문학평론가), 구활(수필가)동화=서정오(동화작가)희곡·시나리오=김재석(경북대 교수), 최창근(극작가·연출가) ※시상식은 1월 12일(화) 오후 3시 본사 8층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코로나19로 시상식이 취소나 축소될 수도 있습니다.

2021-01-03 16:06:19

[오늘의 역사] 1960년 1월 4일 이방인 떠나가다

[오늘의 역사] 1960년 1월 4일 이방인 떠나가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가 파리 부근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인간의 소외와 고독, 숙명의 무의미함과 부조리를 담은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단지 햇빛이 눈부셔 살인을 저지르고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카뮈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며 정치이론가이고 철학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세대의 기수가 되었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박상철 일러스트레이터 estlight@naver.com

2021-01-03 14:56:36

'그것이 알고 싶다' 정인이편 반향…'정인아 미안해' 챌린지 확산

'그것이 알고 싶다' 정인이편 반향…'정인아 미안해' 챌린지 확산

양부모에게 입양된 이후 271일 만에 하늘로 떠난 정인 양 사망 사건을 다룬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정인이는 왜 죽었나?' 편이 온라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3일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전날 오후 11시 15분 방송한 '그것이 알고 싶다'는 시청률 4.4%-5.5%를 기록했다.전날 방송에서는 생후 7개월 무렵 하늘로 떠난 정인 양 사망 사건을 다뤘다.양부모는 정인 양의 죽음이 "소파 위에서 첫째랑 놀다가 둘째가 떨어졌다, 사고사"라고 주장했으나, 전문가는 사망한 정인 양의 상태를 보고 "배가 피로 가득 차 있었고 췌장이 완전히 절단돼 있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정인 양은 양쪽 팔과 쇄골, 다리 등도 골절 상태였다.당시 응급실에서 정인 양을 담당한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그녀 배에 가득 찬 곳을 가리키며 "이 회색 음영, 이게 다 그냥 피다. 그리고 이게 다 골절이다. 나아가는 상처, 막 생긴 상처. 이 정도 사진이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아동 학대"라고 말했다.방송을 통해 피해자 정인 양을 위로하기 위한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도 확산하고 있다. 이 챌린지는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과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가 제안했다.방송 직후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에 시청자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주요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으며 인스타그램에는 약 6천 개가 넘는 게시물이 올라왔다.시청자들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진행자인 김상중 및 류현진-배지현, 심진화-김원효 부부, 황인영, 김준희, 서효림 등 연예인들도 챌린지를 통해 정인 양을 추모했다.김상중은 클로징 멘트에서 "같은 어른이어서 지켜주지 못해서 너무 늦게 알아서 정인아 미안해"라고 말했다.

2021-01-03 11:3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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