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안아주는 공

일러스트=아트그룬 전숙경 일러스트=아트그룬 전숙경

그 집에서 아이가 주로 지내는 놀이방은 나의 일터다. 놀이방 한 켠에 공이 오종종히 모여 앉아 있다. 한데 어우러진 노랑, 초록, 빨강, 분홍색 공이 줄기를 자른 꽃송이를 둥글게 묶어 만든 플라워 볼처럼 보인다.

공을 집어 들어 바닥에 던진다. 저녁 강 물 위로 뛰어오르는 피라미처럼 탄력적으로 튀어 오른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이 바닥을 칠 때, 공은 제 몸을 딛고 일어난다. 방바닥을 박차고 오른 공이 아치형 발걸음을 뗀다. 그러다 냅다 달음질친다. 공이 달려가서 아이를 안아준다. 공을 품에 안은 네 살짜리 아이 얼굴에서 분홍색 실타래 웃음이 풀려나온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두 눈에 미음 돌 듯* 그늘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아니던가.

아이를 안아준 공은 둥글다. 둥글다는 말 속에는 모나고, 거칠고, 투박한 것들을 품어 아우르는 기운이 깃들어 있다. 공은, 모서리를 내민 아프고 슬픈 기억들을 원형 속에 꿍쳐 어루만지며 치유해주는 힘이 있다. 땀이 나도록 공을 던지고 굴리며 놀다 보면, 어느새 찌무룩한 얼굴에 볕뉘가 드리워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또한 공은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언틀먼틀한 길도 마다하지 않는 여유와 설산에서 크레바스의 스노우 브릿지를 만나더라도 겁내지 않고 뛰어 넘는 기개도 지녔다.

아이에게 달려간 공은 코바늘로 둥근 모양을 떠서 구름솜과 삑삑이를 넣고 마무리한 뜨개질 공이다. 여러 날 내 손끝에서 아기둥 바기둥 뒤척이던 실타래가 내어 준 웃음 뭉치인 것이다.

몇 달 전, 구직 면접 보는 자리에서 아이를 처음 만났다. 여자 아이가 불안한 얼굴로 흘끔흘끔 쳐다봤다. 아이 엄마와 아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아빠 없어."

아이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해서 아이 엄마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애정결핍과 분리불안증으로 보채고 울면서 한시도 내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유난히 애착이 심했던 아이에게 안아주는 공이 돼 주고 싶었다. 시간 나는 짬짬이 색깔 별로 뜨개질 공을 뜨면서 아빠의 빈자리에 굴러가서 사랑으로 채워지길 바랐다. 공에 보풀이 일면서 불안했던 아이의 시선이, 움츠렸던 태도가 안온해졌다. 실 한 올 한 올이 포근함으로 부풀어 올라 아이 마음속을 넘나들면서 모서리와 응어리를 뭉툭하게 매만져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의 정서적 긴장을 해소시키기 위해 신문지 찢기 놀이도 했다. 아이가 찢어 놓은 신문지를 뭉쳐서 종이 공을 만들었다. 바구니에 공 던지기 놀이를 했다. 아이가 던진 공이 바구니 모서리에 맞고 내 앞으로 굴러왔다. 그때였다. 아이가 던진 종이공이, 어릴 적 동생과 놀았던 우그러진 무채색 종이 공을 불러왔다 .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었던 집안에서 신문지를 뭉쳐 만든 종이 공은 유일한 놀잇감이었다. 날짜 지난 신문지를 모아서 둥글게 뭉쳐 풀칠하고 테이프를 붙여 만들었다. 운동회 날 운동장에서 구르던 백군 공처럼 커다란 종이 공을 굴리면서 놀았다. 황토마당에서 굴리던 공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둥글게 말아 안아주는 것 같았다.

초록의 유년시절을 지나 어느새 중년의 늦가을이 찾아왔다. 낙엽비가 내리면. 속수무책으로 휑한 가슴팍에서 휘돌아나오는 소슬바람을 어찌하랴. 그럴 때 재활용통에 모아둔 폐지로 하릴없이 종이 공을 만든다. 종이 공을 벽에 던져 받기 놀이, 공차기 놀이를 한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공놀이를 하다보면, 초라한 종이공일지라도, 괜스레 휘청거리는 마음을 보듬어 안아주는 공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세상에는 부모의 든든한 지원과 응원을 받으며 모두에게 환영 받는 빛나는 공만 있는 건 아니다. 우그러지고 못난 무채색 종이 공도 존재한다. 어른이 되어도 종이 공을 외면하지 않고 갖고 노는 건, 어린 시절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 주고 둥글게 안아 준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이 굴러 온 삶의 흔적이야 초라하든, 빛나든 품은 뜻만은 따뜻했으면 한다.

공이 데리고 오는 세상은 모나지 않고 둥글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기억하는 공은 세상을 둥글게 안아주는 따뜻한 품새를 갖고 있다.

늘 그랬듯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 연결된 탯줄 같은 실타래를 풀어 아이들 마음을 둥글게 보듬고 안아주는 삶을 한 코 한 코 이어가리라.

아이가 분홍색 뜨개질 공을 집어 던진다. 놀이방이 비좁다는 듯 튀어올랐다가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공이 아이처럼 늘품 있고* 늡늡하다*. 놀이방 한 쪽에 플라워 볼처럼 놓여 있는 공들 중에서 초록색 공을 집어 들어 아이에게 굴린다. 지구별만 한 공이 데굴데굴 굴러가서 아이를 안아준다.

 

*미음 돌 듯 : 눈물이 가장자리로부터 조금씩 피어드는 모양

*늘품 있다 : 앞으로 좋게 발전할 가능성

*늡늡하다 : 속이 너그럽고 활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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