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의 한시산책] 시냇물에 목욕함(浴川·욕천)-조식

온몸에 사십 년간 쌓여온 때를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깊고 맑은 시냇물에 모조리 씻네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혹시 때가 내장에서 생긴다면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씻어버리리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조선 전기의 불같은 선비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마흔아홉 살 때 의령 감악산 골짜기에서 목욕을 하며 지었다는 시다. 보다시피 남명은 마흔 해 동안 온몸에 묻은 때를 맑고 깊은 물에 모조리 다 씻어내고 있다. 마흔아홉에 지은 시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마흔 해'는 그의 일생 전체를 말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나이에 목욕을 하면서 한평생 동안 쌓여온 때를 모조리 다 씻어내다니? 마치 마흔아홉이 되어서야 목욕을 처음 하는 사람 같다. 설마하니 남명이 마흔아홉 살에 처음 목욕을 했던 걸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말하는 '온몸의 때'가 실은 마음의 때이기 때문에, 남명은 지금 평생 마음 속에 쌓여온 때를 씻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이다.

"혹시 때가 내장(內臟)에서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씻어버리리." 그가 마음의 때를 씻어내기 위해 얼마나 무섭도록 과감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대목의 내용은 "신체발부는 부모가 준 것이므로 그것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출발점(身體髮膚·신체발부/ 受之父母·수지부모/ 不敢毁傷·불감훼상/ 孝之始也·효지시야)"이라는 유교의 도덕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마음의 때를 씻어서 자아를 고결하게 지키는 일과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발부를 잘 갈무리해야 한다는 유교의 도덕률이 서로 충돌할 경우에는 도덕률을 포기하고 자아 수호를 선택하겠다는, 전율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무시무시하고도 숙연한 발언이다.

지난 여름의 폭우와 폭염, 천둥 번개와 여러 개의 태풍을 용케도 뚫고 우리나라에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이제 가을도 깊을대로 깊었다. 그동안 때 묻은 내 마음을 차가운 냇물에다 첨벙 담그고 오랜만에 목욕을 하고 싶다. 상대방이 지록위마(指鹿爲馬)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면서, 서로서로 삿대질을 해대는 사람들아. 그대들도 여기 와서 시속 잡배들끼리 목욕이라도 좀 하지 그래. 시냇물에서 목욕할 철은 이미 지났지만, 정신을 번쩍 차리는 데는 대가리가 서늘해지는 차디찬 물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도 있을 테니까.

이종문 시조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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