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대의 우리나라 고사성어] 자기도리(自己道理)

임종대 (사)효창원 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임종대 (사)효창원 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자기'는 자신의 몸가짐이고 '도리'는 마땅히 해야 할 행위라고 '고려사'에 전한다.
이공수(1308~1366)는 공민왕 때 문신으로 1340년에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고, 그 후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교부령(典校副令)을 지낸 후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왕을 시강(侍講)하였다. 1361년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침입하여 평장사로 죽전(竹田)에 둔을 쳤으며, 개경을 압박하자 왕을 따라 남행(南幸) 하였다. 참의평리(參議平理)가 되어 원의 요청으로 일본 정벌을 위해 도사직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363년 원에서 공민왕을 폐위, 덕흥군을 세움으로 원에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복위를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에 머물렀다. 공민왕이 복위되자 귀국하여 국학(國學)을 수리하는 것을 보고 기뻐 원나라 왕에게서 받은 금대를 풀어 비용에 충당하였다.

신돈이 들어서자 관직에서 물러나 덕수현에서 남촌선생(南村先生)으로 한가롭게 지냈다. 1365년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성품이 곧아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은 행하지 않았다. 품행이 공명정대하여 공민왕은 그를 칙사로 임명하여 원나라에 다녀오도록 하였다.

개경에서 출발하여 압록강 근처에 이르렀을 때 말이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직도 갈 길은 먼데 사방을 둘러봐도 허허벌판이라 쉴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멀지 감치 들판 저쪽에 조를 쌓아 놓은 낟가리가 보였다. 이를 보고 가지고 있던 자루에서 조 한 단 값에 해당하는 돈을 꺼내 그 사유를 적은 뒤, 이 돈을 낟가리에 찔러 넣고 조 한 단을 가져오게 하여 말을 먹였다. 그러자 심부름하는 사람이 말했다.

"마소를 모는 사람이 지나가게 되면 보나마나 가축에게 조를 먹일 게 아닙니까? 그럼 낟 가리에 찔러 놓은 그 돈을 그냥 두겠습니까?"
그러자 칙사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남의 소중한 곡식을 그냥 축낸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않는가? 내가 감찰규정으로 있었다고 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땀 흘려 농사를 지은 밭 임자에게 아무 인사도 없이 먹인 나의 작은 도리야."
말을 마친 뒤에 혼잣말처럼 두런거렸다.
'그냥가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아. 이 조 한 단을 가꾸기 위해 봄부터 밭에 나가 일하고 이제야 겨우 가을걷이를 해 낟 가래를 쳤는데 공짜로 갖다 먹이면 내 마음이 용납지 않아.'
"말씀을 들으니 이해가 됩니다. 허나 그 돈이 낟가리에 부디 꽂혀 있어야 할 텐데…."
"허허, 일이 어떻게 될지 나중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네. 내 할 도리만 하면 되는 것이야. 우리는 흔히 자기의 행실을 '남은 그렇지 않다'고 핑계대면서 미루는데 그리되면 올바른 세상은 언제 오겠는가?"
"내 도리를 내가 다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그 세계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네. 그러나 그 세계는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야. 알겠는가?"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도리'를 다한다면 그 세계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이공수는 1376년(우왕2)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사)효창원 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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