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김태호 - 손자바보 ②

김태호 김태호

우리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때 밀양박씨 집안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당시 선친은 아들이 없어 우리 할머니를 유난히 애지중지 키웠다.

선친은 동네 지관으로 있으면서 묘 터를 잡아주고 농사도 많이 짓고 살았다. 당시는 아들이 없으면 가문의 대를 잇지 못했기에 건넛마을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께 시집을 보내어 가문을 잇도록 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재산도 없이 전전긍긍하다가 박 씨 집안의 우리 할머니를 만나 입에 풀칠할 신세를 면하게 되었고, 우리 할머니는 재산도 가지고 왔지만 성격이 올곧고 남자 못지않게 일을 척척 알아서 처리하는 여장부였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에도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배필로는 상대가 되지 못 했다. 양지마을과 음지마을, 양동에서 결혼했다고 '양동댁'이라 불렀다.
할머니의 선친은 할머니께 전 재산을 유산으로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로 우리 아버지가 할머니 유산을 이어받아 제사와 묘사를 지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지금은 내가 맏이가 되어 현재까지 할머니의 친정아버지 묘사를 모시고 매년 벌초도 하고 있다.

평소에 할머니는 성격이 올곧고 강직하여 사리판단이 분명했으며, 집안의 대소사에도 상 어른으로 추앙을 받던 인물이었다.
할아버지는 이런 할머니에게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약주가 과할 때면 할머니께 술주정을 하시던 기억이 일흔을 넘긴 이 나이에도 아슴푸레하게 되살아난다.

할머니는 부부간에 정은 없었고,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늘 맏이인 아버지와 집안일을 상의하고 일처리를 현명하게 하셨다.

당시 수리조합에서 우리 동네를 큰 저수지로 책정대상이 되었을 때, 우리 할머니는 동네 여성들을 대표하여 반대하는 데모대의 행동대장으로 활동해서 조합장과 면장을 만나 담판을 짓고, 동네가 물속에 들어갈 처지에 놓인 것을 부결시켜 동네사람들로부터 여변호사라는 닉네임을 듣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할머니 성격을 이어 받은 것 같다.

할머니의 선친은 동내에서 지관 일을 봐왔기 때문에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일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는 집안일을 도맡아가며 살림을 아들 못지않게 척척 잘 해냈다.
그래서 선친은 무남독녀인 우리 할머니에게 모든 살림을 맡겼으며, 할머니는 유산을 받아 우리 할아버지에게 한 동네로 시집을 온 것이다.

할머니는 우리나라 대하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비유한다면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 참판 댁과 같은 인물이었다. 성품이 온화하면서도 남성보다 더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다. 영리하고 사리판단이 분명했으며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신 분이셨다. 집안의 대소사에 제일 큰 어르신이었고 손자 사랑에는 유별났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평소에 술을 너무 좋아해서 내 기억으로는 하루도 술을 잡수시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로인해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자주 언쟁을 벌였고, 금슬은 좋지 못했다.
결국 술병으로 할아버지는 칠십대 후반에 돌아가셨고, 할머니와의 일생은 그리 편치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할머니는 우리 집 맏아들인 아버지께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마을 한문 서당에 넣어 공부를 시키려고 했지만, 우리 아버지는 산에 나무나 하고, 농사일은 잘 했지만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서당에 가보면 늘 우리 아버지는 꾸벅꾸벅 졸고 있어 할머니 속을 많이 태웠다고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못 가르친 한을 손자들에게 올인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손자 사랑은 할머니라고 했던가. 그 옛날 우리 오남매 할머니의 품안에서 옛날이야기 들으며 자랐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은 왜일까?
비록 당신은 꽁보리밥에 간장만 찍어 드시고, 우리 손자들에게는 쌀밥에 고기반찬을 챙겨 먹이던 할머니. 긴 여름밤 부채로 모기를 쫓으며, 해님과 달님 이야기, 호랑이와 귀신이야기, 첫날밤 신부가 방귀를 많이 뀌어 소박맞고 쫓겨난 이야기 등 감칠맛나게 얘기해 주신 것은 우리 할머니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따라하지 못하는 할머니만의 노하우였으리라.
훗날 내가 글을 쓰게 된 밑천도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게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 할머니만큼 손자들께 베푼 곡진한 사랑이 또 있었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추운 겨울날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감기로 아침밥을 먹지 않고 학교에 갔었다.
반나절쯤 되었을까? 한 친구가 나에게로 다가와 누가 교실 뒤에서 찾는다고 했다. 할머니였다.
주전자에 녹두죽을 쒀 와서 식을까 봐 품속에 꼬옥 껴안고 계셨다.
지금 같았으면 그 정성을 고마워했겠지만, 당시 어린 마음에 부끄러워 도망치듯 교실로 들어오고 말았다.
교실까지 따라와 한 숟갈이라도 뜨라면서 애원하는 할머니와 숨바꼭질을 하던 기억이 어제 일 같이 생각난다.
끝내 거절하고 말았지만, 그 때의 할머니 심정은 오죽했을까?
그 꼴 난 수치심에 할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내가 얼마나 못난 손자였다는 것을 지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뿐이랴.
당시 살을 에는 듯한 겨울,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일론 양말에 검정고무신 차림이다보니,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에 동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그 이후로 할머니는 겨울철이면 손자들의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 털실로 양말과 장갑을 손수 짜주셨다. 뜬금없이 그 기억이 아슴아슴해 온다.

어느 해 가을 운동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바쁜 일손 다 제쳐두고 손자새끼 재롱이며 달리는 모습을 보러 할머니가 오셨다.
보건체조를 하면서 힐끗힐끗 할머니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눈 맞춤하던 일, 달리기할 때 학(鶴)처럼 목을 길게 빼고 손뼉 치며 응원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활동사진처럼 망막에 맺혀온다.
점심때가 되면 기름소금에 장아찌만 넣어 정성들여 싸온 김밥을 맛있게 먹기도 했었다. 햇고구마, 햇땅콩, 풋대추, 그리고 한 주 전부터 삭혀 온 감 등, 푸짐한 먹을거리가 지금의 뷔페식단과 비길 바가 있으랴.
짐승도 제 새끼가 아무리 못 생겨도 제일이듯이, 우리 할머니에게는 또한 내가 최고였었다.

6·25 직후의 경제사정은 또 얼마나 어려웠던지…. 농사가 흉작인데도 기성회비며 월사금, 수학 여행비는 줄줄이 이어졌다.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 몰래 이웃집에 빌려서 손에 꼭 쥐어주시던 것은 우리 할머니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또래 아이들에게 기죽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왕복 8km 거리를 걸어서 통학했는데, 내 평생 처음으로 동네 친구와 싸움을 했다. 양 같이 온순했던 나는 항상 다른 친구들에게 져주고 싸움은 난생 처음 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가 하굣길에 나에게 우리 부모님 욕을 하기에 분을 참지 못해 싸움의 발단이 된 것일게다.
그날따라 어둠살이 짙어서 상대방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시간이라 내 밑에 깔려있던 친구가 돌을 가지고 내 이마를 가격하는 바람에 내가 친구를 넘어뜨려 꼼짝 못하게 하고 이겼다고 방심하는 찰나 일격을 당한 것이다.
싸움결과는 내가 판정승이었으나, 이마에 피를 흘려 TKO패 당한 꼴이 되었다.
집에 도착하자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나를 보고 할머니께서 밤중에 싸운 친구 집에 찾아가 우리 손자 살려 내라며 호통을 치던 일이 어제 같은데 이마에 인생계급장을 단 지금에도 잊히지 않는다.

당시 우리 오남매 모두 농촌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것도 할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과연 해낼 수 있었을까, 물음표가 생긴다.

방학 때도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에게 농사일을 거들도록 하였지만, 할머니는 손자들에게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농사일을 시킨다면서 아버지께 잔소리를 하시곤 했다. 그리고 형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형에게 못다 한 사랑을 남은 우리들에게 골고루 베풀었다.

사진1=필자의 부모님

사진2=필자의 고향집에서. 필자의 막내여동생(윗줄 왼쪽), 필자의 둘째여동생(윗줄 오른쪽), 필자의 아들·딸(아랫줄)

사진3=필자의 고향밭에서. 필자의 막내여동생(오른쪽)과 막내여동생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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