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⑧세상과 함께 <끝>

사회와 소통·약자와 동행…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다

김수환 추기경(가운데)이 가톨릭시보( 현 가톨릭신문) 사장 시절, 논설위원들과 좌담회를 갖고 있다. 사진=가톨릭신문 제공 김수환 추기경(가운데)이 가톨릭시보( 현 가톨릭신문) 사장 시절, 논설위원들과 좌담회를 갖고 있다. 사진=가톨릭신문 제공

◆가톨릭시보 사장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맡았다. 비서신부 시절 교황청 산하 통신사의 대구 통신원으로 일한 적은 있지만 신문을 만들어 보지는 않았기에 막막했다. 신문사 형편도 열악했다. 기자와 직원 다 합쳐 10명이 안되는 데다 봉급 주기도 힘들었다. 사장, 기자, 영업사원 3역을 했다. 사설은 거의 다 썼고 수금도 다녔다.

월급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후원금을 관리하던 직원이 입학금이 없어 쩔쩔매던 추기경 생질녀에게 몰래 돈을 보냈다가 혼이 났다. 가족보다는 직원들이나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쓰고 싶었다. 동고동락한 직원들과는 말년까지 소식을 주고받았다.

가톨릭신문사 내에 마련된 역사전시관.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가톨릭신문사 내에 마련된 역사전시관.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가톨릭시보는 1927년 천주교대구교구 청년연합회가 발간한 천주교회보로부터 시작했다. 종교 신문이지만 비신자도 보고 싶은 신문을 만들고자 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과 함께해야 한다고 믿었다. 종교 밖의 문제도 신앙적 시선으로 다뤘다. 목사나 스님 교수들의 글도 받았다. 가톨릭을 비판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지만 보내 온 원고대로 실었다. 가톨릭 신문이 이래도 되느냐며 장면 전 총리는 걱정스런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세상이 가톨릭을 어떻게 보는지 알아야 고치고 바로잡을 것이란 믿음대로 밀고 나갔다. 복음 선교에 있어 매스컴이 소중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김수환 추기경의 가톨릭시보 사장시절 신분증. 매일신문 DB 김수환 추기경의 가톨릭시보 사장시절 신분증. 매일신문 DB

독일에서 전공한 그리스도교 사회학 공부는 신문사 일에 보탬이 됐다. 독일 현지 신부들과 일반시민들은 물론 한국 간호사 및 광부들과의 만남과 체험은 그의 시각을 폭넓게 했다. 무엇보다 크고 소중한 배움과 경험은 로마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흔일곱의 고령에 교황에 오른 요한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다. 교황은 세간의 추측과 달리 전통과 관습을 벗어던졌다. 세상을 향해 교회의 문을 열고 변화와 쇄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추기경에게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대에 적응하려는 희망의 대역사였다. 독일에 살면서 마음은 로마에 가 있었다. '성령께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교황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가톨릭시보사가 같이 쓰던 대구 남일동 매일신문사 건물에는 통신사도 입주해 있었다. 외신 중 공의회 관련 뉴스는 죄다 달라고 했다. 기사와 사설 칼럼을 통해 공의회 정신을 알렸다. 신년호 연두사도 직접 썼다.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생각과 생활태도를 바꾸어야 사회가 변화되고 인류 구원이 이뤄진다는 요지였다.

가톨릭신문 김문상 사장신부(오른쪽 두번째) 등 간부들이 서울 본사 직원과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가톨릭신문 김문상 사장신부(오른쪽 두번째) 등 간부들이 서울 본사 직원과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타 종교와의 소통과 대화 역시 공의회 정신의 하나였다. 천주교회 안으로만 묶여 있던 시선을 세상으로 돌렸다. 소통은 이해였다. 철학자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서로 등지고 살던 시절 추기경이 대화의 문을 열었다"고 했다. 최연소 추기경 선임 역시 그가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실천할 적임자였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

추기경은 가수 인순이의 삶을 사랑하고 격려했다. 인순이가 물었다. "하느님, 하나님 뭐가 맞아요?" 한 음반에서 둘 다 불렀다는 말을 덧붙였다. 딸에게 하듯 추기경이 답했다. "글쎄, 나도 하나님이라고도 하는 것 같은데……."

소통과 이해는 평생토록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게 했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도록 열심히 기도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말년의 추기경이 웃으며 한 말이다. "기도 너무 많이 하지마라. 실망한다."

◆사형수를 사랑한 추기경

가톨릭시보 사장 시절 교도소를 자주 찾았다. 죄를 뉘우치는 재소자들을 대할 땐 교도소 바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려 애쓰는 수형자들의 눈에서 순백의 영혼을 만나기도 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실감났다.

살인강도를 저지른 사형수와 만났다. 사형수는 뉘우치며 하느님 품에 안겼다. 사형 집행 날 죽음 앞에 선 그는 평화로웠다. 죽음을 행복으로 받아들였다. 대신 일상으로 돌아갈 추기경이 울었다. 형틀이 고장나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진 채 죽지 못한 사형수가 웃으며 다시 사형대에 앉았다. 계산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올렸다. 추기경의 가슴에 그는 이미 용서받은 사람이었다.

추기경 시절 사형제도 반대에 앞장섰다. 강론과 언론을 통해 "사랑은 용서인데 사형은 용서가 없다"고 호소했다. 대통령에게도 사형을 집행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1997년 말 강원룡·한경직 목사와 함께 퇴임을 앞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사형 집행을 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다음날 23명의 죄수가 사형됐다. 우리나라 마지막 사형 집행이었다.

1983년 2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이 대구시립 희망원을 예고없이 방문했다. 추기경은 조정헌 원장 신부의 안내로 결핵환자들을 만나 일일이 악수하며 대화를 나눴다. 사진=(재)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1983년 2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이 대구시립 희망원을 예고없이 방문했다. 추기경은 조정헌 원장 신부의 안내로 결핵환자들을 만나 일일이 악수하며 대화를 나눴다. 사진=(재)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가톨릭시보 사장 시절 대구 희망원과 행려병자 시설, 영세민 판자촌도 틈틈이 찾았다. 치료 한번 받지 못한 병자와 거지, 장애인이 뒤섞인 희망원은 절망원에 가까웠다.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사랑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추기경 시절에도 빈민촌과 판자촌, 탄광촌, 교도소, 복지시설 등 낮고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사는 사람들과 자주 만났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녀원도 단골 방문처였다. 일부러 반찬 투정을 했다. 겨울에도 맨발에다 일년 내내 고기 한번 먹지 않는 수녀들에게 그렇게라도 해서 먹이고 싶었다.

추기경 시절 영적 갈등 때문에 한 달 피정을 갔다. 하느님이 내 존재의 바탕이라며 열심히 기도했다. 숙소 근처 동네 이발소에 갔다. 아무도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숙소에 들어서다 문득 '아까 만난 사람들이 내가 누군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란 우월감이 들었다. 신분과 환경, 받는 대접이 귀한 몸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에 놀랐다. 모든 이의 종이 될 만큼 가난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느새 귀족이 된 자신이 부끄럽고 슬펐다.

◆길 위에서 길을 찾아

신설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됐다. 마산은 외가가 있어 낯설지 않았다. 주교 사목표어는 '여러분과 많은 이들을 위하여'로 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옮겨 갈 땐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로 손을 봤다. 주교 취임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 달라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한다"고 강론했다. 평신자도 신부 수녀와 똑같은 하느님 백성이라고 했다.

성직생활에서 그에게 가장 큰 주제는 인간이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위한, 인간다운 사회를 갈구했다.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는 교회를 이루고 싶었다. 교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추기경에게 정의와 자유는 인간을 위한 길이었다. 인권이 유린되는 사건에는 침묵하지 않았다. 세상과 함께한 추기경 덕분에 서울 명동성당은 온 국민의 마음속에 정의와 자유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투사는 아니었다. 그 시대 기울어진 언덕을 바로잡고자 했을 뿐이었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희망했기에 독재 정권에는 정의와 자유를 외치며 맞섰고 이념 대결로 사회가 흔들릴 땐 애국과 질서를 말했다.

소통하기 위해선 우선 정직해야 했다. 죽음이 임박한 그를 환하게 웃게 만든 집안 손자손녀들에게 가르친 말도 "정직해라"였다. 이 땅에 천주교 씨앗을 뿌리느라 교회 밖 나라와 사회를 외면했던 선배들을 대신해 안중근 의사에게도 고백하고 사과했다. 시대의 어른으로 떠받들어졌지만 죽을 때까지 나는 죄인이라며 하느님께 용서를 구했다. 삶의 마지막까지 '길 위에서 길을 찾은' 추기경이었다.

〈서영관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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