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 숨은 이야기 <19> 심상의 풍경

 

클로드 모네 작, 수련 연작(총 8점), 캔버스에 유화를 패널에 부착, 높이 197cm·너비 600~1천700cm, 1914~1926,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을 나와 튈르리 공원을 가로지르면 오랑주리 미술관에 이른다. 원래 이곳은 1852년에 건축가 F. 부르주와가 튈르리 공원의 오렌지 나무들을 겨울 동안 보호하는 용도로 설계하면서 오렌지 나무 온실이라는 뜻의 오랑주리로 불렸다. 인상파와 후기인상파의 그림이 주를 이루는 이 미술관에서 가장 핫한 공간은 클로드 모네(1840~1926)의 거대한 <수련> 연작 8점이 설치되어 있는 방이다.

1883년, 모네는 파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자리 잡았다. 처음엔 경작지에 딸린 농가를 빌렸으나 평단과 언론에서 대호평을 받기 시작해서 경제적 상황이 좋아진 1890년엔 이곳을 매입하고 총면적이 무려 1㏊에 이르는 경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원예가 J.B. 라투르-마를리악은 유럽 자생종 흰색 수련과 열대지방의 수련을 교배해서 개량한 다섯 색의 열아홉 종의 수련을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선보였다. 이곳에서 처음 본 아름다운 색상의 수련품종에 흠뻑 빠진 모네는 자신의 정원에 거대한 연못을 파고 수련을 심었다. 모네는 '나는 오로지 그림 그리기와 정원을 가꾸고 꽃을 키우는 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은 바로 이 정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수련으로 넘쳐나는 정원에 심취했고, 여기서 그의 마지막 역작인 수련 연작이 탄생했다.

미술작품에서 하나의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연작은 모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890년부터 밀을 추수한 밭에 쌓여 있는 낟가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각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린 <낟가리> 연작(20여 점)에는 '눈의 인상, 흐린 날', '늦여름, 저녁 인상'과 같은 부가적인 제목이 붙어 있다. 엡트강물에 비쳐 수직으로 길게 확장된 <포플러> 연작(20점), <루앙 대성당> 연작(40여 점)도 연달아 발표되었다. 이 연작들의 주제는 무엇일까? 빛! 이것이 바로 그림의 진정한 주제였다. '외광파'를 주도한 마네에게 낟가리, 나무, 고딕 성당은 사물에 닿아 찰나적으로 변하는 빛을 포착해내는 수단에 불과했다. 현장에서 여러 개의 캔버스를 동시에 펼치고 그는 날씨와 시간,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포착하기 위해 빠른 붓 터치로 진동하는 색채 하모니를 화면에 쏟아부었다.

 

<수련> 연작은 1895년에 시도되었다가 본격적으로는 1902년부터 1926년 모네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약 250점의 이 연작은 오르세 미술관과 파리 16구에 있는 마르모땅 미술관에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1896~1897년 사이 모네는 정원 가꾸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일본풍(Japonism)에 영향을 받아 연못 위에 일본식 다리도 놓았다. 지평선 없이 수련으로 덮인 연못을 클로즈업한 화면은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에 나타난 전면(all-over) 회화를 무려 반세기 이상 앞당겨 실행했다고 볼 수 있다.

1914년 초, 오랜 투병 끝에 맏아들 쟝이 죽자 모네는 비탄에 잠겼다. 그해 7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불안한 상황에서 작업에만 몰두하기가 어려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년 전에 진단을 받은 양쪽 눈의 백내장이 조금씩 더 진행되고 있었다. 시야가 뿌연, 화가로서는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노화가 모네는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점진적으로 심상의 풍경으로 침잠한 그의 그림은 거의 추상적・시적인 비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무렵 모네는 '대장식화'로 이름을 붙인 어마어마하게 큰 수련 연작을 구상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바로 다음 날인 1918년 11월 12일, 모네는 유력한 정치인이자 친구인 조르쥬 클레망소를 작업실로 불러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평화를 기념하는 의미로 2개의 패널화를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클레망소의 오랜 설득으로, 또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모네는 총 8개의 패널화를 기증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서약서에는 전시장 천장으로부터 자연채광이 들어와야 하며 무한(∞)을 상징하는 타원형의 두 전시장을 새로 만든다는 조건이 들어있었다.

박소영(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박소영(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모네는 20세기의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높이는 동일하게 2m, 넓이는 6m에서 17m까지)을 위해 신축된 공간에서 탁월한 무대디자이너 감각을 발휘했다. 그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 경로에 따라 거기에 걸맞은 그림을 배치해서 관람객들의 눈앞에서 하루 또는 사계절의 흐름이 펼쳐지는 공간연출을 했다. 모네는 사람들이 이 특별한 공간에서 그 당시 전쟁 직후의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나 평온함을 얻기를 원했다. 지금도 이곳은 관람객들을 순간이 영원으로 느껴지는 특별한 시공간의 체험으로 안내하고 있다.

박소영(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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