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달빛상념

달빛 상념/장기성

일러스트 전숙경 (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 (아트그룬)

한가위에 고향 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가슴을 뛰게 한다. 그리움일까 설렘일까. 아무래도 달빛에 대한 환상이 폐부 깊숙이 각인 된 탓일 게다.

초저녁이 되면 앞산자락에 둥근 달이 나무가지에 걸린다. 한낮에 대지를 뜨겁게 달구었던 햇빛은 온데간데없다. 간간히 길섶과 논두렁에 몸을 숨긴 희뿌연 열기의 흔적만이 햇빛이 다녀갔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줄 뿐이다.

무심한 세월이 흐른 탓일까. 고향엔 길동무가 되어줄 도반(道伴)이 없어진지 오래다. 혼자서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달빛을 쫒아 바람도 쐴 겸 호젓한 오솔길로 나서본다. 어슴푸레 달빛 속에서 눈대중으로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이곳이 그곳이고 그곳이 이곳이다.

길섶의 벤치 위에 턱을 괴고 앉으니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수많은 상념들이 머릿속 언저리를 맴돌며 지금의 나를 잊게 만들고, 잡다한 상념들이 이 틈새를 놓칠세라 먼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우리 동네는 산비탈에 위치해있어, 달빛이 창문을 통해 몰래 들어와 방안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달빛이 너무 해맑고 투명하여 차마 잠자리에 들기가 아쉬울 지경이었다. 이런 밤이면 나는 뒷마당 뜰에 물끄러미 서서 물처럼 출렁이는 달빛 풍경을 탐닉했다. 멀리서 가까이에서 서로 사모하듯이, 나뭇잎들 속으로 달빛이 깊게 스며들었다.

나무 그림자가 달빛을 받아 들쭉날쭉 땅위에 수묵화를 그려낸다. 그리움이 이 순간을 놓칠세라 빗살무늬를 일으키며 가슴팍으로 내려앉는다. 내친김에 달님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본다.

"달님은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나요?"

"아무래도 달맞이꽃이지요."

"왜요?"

"달맞이꽃은 원래 나를 따르던 요정이었답니다. 그믐이 될 때마다 나를 볼 수 없게 되자, 상심한 나머지 그만 쓰러져 달맞이꽃이 되었지요.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꽃을 애절한 그리움의 상징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죠. 지금도 꽃말이 그리움이 아니던가요. 그 꽃을 생각하면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답니다."

"해님은 달맞이꽃을 좋아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야 그렇겠지요. 자신을 따르는 꽃이 따로 있으니까요."

"궁금하네요. 무슨 꽃입니까?"

"해바라기 꽃입니다. 그 놈은 해님을 지겹게 따라다니지요. 심지어 해님이 귀찮아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흐린 날에도, 님 향한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답니다."

"달님, 혹시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

"물론이지요. 이태백이 나를 처음으로 낭만적인 사모의 대상으로 만들어 주었지요.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신다는 '월하독작'은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가 경포대와 인연 맺을 것이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어요. 한 번 들어보실래요. 거울처럼 맑은 호수라는 뜻의 '경포호'에는 네 가지 낭만의 얼굴이 보인답니다. 첫 번째는 하늘에 뜬 저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바다에 뜬 모습, 세 번째는 호수에 뜬 모습. 마지막 모습은 술잔 위에 뜬 저의 모습이지요. 하나를 더한다면 해맑은 눈동자에 들어있는 저의 모습이랍니다. 그 당시만 해도 풍류와 해학이 넘칠 시절이라 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답니다."

상념이 상념의 꼬리를 물며 심연의 세계에 빠지니, 광음의 촉감이 무디어져 간다. 해님과 달님의 열광적인 팬은 누구일까? 생뚱맞은 쪽으로 생각이 미치기 시작한다. 해님의 팬은 아무래도 '해바라기'가 아닐까. 이글거리는 태양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퍼부으니 말이다. '너무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숨쉬기조차 힘든 폭염 속에서도 맹목적으로 퍼붓는 사랑, 그것은 출세와 소유, 격정과 독선의 이미지와 왠지 닮은 듯하다.

하지만 달님의 팬인 달맞이꽃은 새색시 마냥 수줍은 에로스적인 사랑이다. 앞에 나서는 법이 없다. 양보와 인내, 조화와 공존 같은 이미지와 왠지 닮아있다. 해님이 이성이라면 달님은 감성에 가까워 보이고, 해님이 현실이라면 달님은 낭만에 가까워보인다. 해님보다는 달님이 왠지 텅 빈 내 가슴에 포근히 내려앉는다.

환영(幻影)적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의식세계로 돌아오니, 달님은 이미 서녘에 걸려있고 밤이슬은 내 가슴속에 함초롬히 파고든다.

<10월23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수필 당선작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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