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구미시, 새벽에 발생한 유해화학물질 유출사고에 허둥지둥

구미시, 새벽에 발생한 유해화학물질 유출사고에 허둥지둥

경북 구미의 반도체 제조업체인 KEC 구미공장에서 유해화학물질 유출사고가 발생한 가운데 구미시의 적절치 못한 대응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21일 오전 1시 47분쯤 구미시 공단동 KEC 공장에서 유해화학물질인 트리클로로실란이 유출되자 경북도는 1차례, 구미시는 2차례 문자를 발송했다. 하지만 사고 발생 직후에는 경보음이 울리지 않는 안전안내문자를, 방제작업이 끝난 뒤에는 경보음이 울리는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했다. 경북도는 오전 2시 43분, 구미시는 3시 10분에 각각 안전안내문자를 보냈고, 구미시는 4시 12분에 방제작업을 모두 마쳤다는 긴급재난문자를 보냈다.게다가 경북도와 구미시는 안전안내문자에서 서로 다른 대응 방법을 안내했다. 경북도는 'KEC공장 유해화학물질 누출 발생. 인근 주민들께서는 안전한 곳으로 대피 바랍니다'라고 한 반면 구미시는 '인근 주민들께서는 창문 닫고 실내 대피 바랍니다'라고 했다.이처럼 새벽 시간에 발생한 사고에 구미시가 허둥지둥한 것은 근무시간이 아닌 탓에 시청 당직실에서 대응했기 때문이다. 당직실 근무자들은 재난사고 비전문가들인데다 재난사고 발생시 대응 매뉴얼을 숙지하지 않아 안내문자를 잘못 보낸 것이다.이날 사고는 트리클로로실란 용기를 이동하던 중 밸브 파손으로 113㎏가량 누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 근처에 있던 7명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모두 귀가했다.트리클로로실란은 염화수소 냄새를 지닌 무색 액체로 흡입하면 호흡 곤란, 두통, 어지러움 등을 초래하는 물질로 반도체 막 형성공정에 쓰인다. 장기 흡입 시 소화계 질환, 섭취 시 구토·저혈압 등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구미국가산업단지에선 지난 2012년 한 화학물질 취급공장에서 불산 유출 사고가 발생해 5명이 숨지고 공장 근처 주민 등 3천여 명이 피해를 입은 바 있다. 구미시 안전재난과 관계자는 "안전안내문자와 긴급재난문자 발송 순서가 뒤바뀐 것은 당직 근무자들의 업무 미숙 때문"이라며 "야간에도 재난상황실을 운영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2020-07-21 16:27:41

경북 구미소방서, 경북 일반인 심폐소생술 경연대회 은상 수상

경북 구미소방서, 경북 일반인 심폐소생술 경연대회 은상 수상

경북 구미소방서(서장 한상일)는 20일 경주 켄싱턴 리조트 마키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제9회 경상북도 일반인 심폐소생술 경연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2020-07-21 15:22:04

[손님]서부지역본부

◇서부지역본부▶김일수 구자근 국회의원 보좌관

2020-07-21 15:10:01

[오늘의 역사] 1961년 7월 22일, 종합경제재건 5개년 계획

[오늘의 역사] 1961년 7월 22일, 종합경제재건 5개년 계획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7월 22일 경제재건 5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국민경제의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해 양적 성장과 아울러 질적 발전, 그리고 국민 생활의 향상에 중점을 둔 5년 단위의 경제 계획이다. 이 계획은 이듬해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름을 바꿔 시행된다. 그 결과 경제발전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차츰 공업국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박상철 일러스트레이터 estlight@naver.com

2020-07-21 14:50:53

경상북도구미교육지원청, 구미예술교육협의회 발족

경상북도구미교육지원청, 구미예술교육협의회 발족

경상북도 구미교육지원청(교육장 신동식)은 20일 구미지역 예술교육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초·중·고 7개교 교장을 위원으로 '2020 구미 학교예술교육협의회'를 발족했다.

2020-07-21 14:19:45

(박스)변화에 잘 대응해 기회로 삼아야…언택트 산업 선점 필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시작된 언택트 문화는 이제 일상이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극복 이후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비한 준비가 필요하다. 코로나 사태가 완전히 새로운 문명적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라며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안종배 국제미래학회장은 "우리에게 코로나는 위기이자 기회"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미래 사회는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는 사회가 될 것이고, 산업과 비즈니스, 그리고 일자리의 변혁적 변화가 동반될 것"이라며 "이러한 변화의 방향에 맞게 대응해 기회로 삼는 자와 그렇지 못하는 자의 간격이 오히려 더욱 커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트렌드 변화와 글로벌 경쟁 심화에 발맞춘 적극적인 산업 육성을 주문하는 전문가도 있다. 곽노성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특임교수는 "글로벌 가치사슬 재편이 초가속화 되고, 특히 4차 산업혁명과 언택트 산업 생태계 선점을 위한 글로벌 주요 기업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곽 교수는 비대면 교육 부문을 예시로 들며 "구글은 '지 스위트', '구글 클래스룸'과 같은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통해 글로벌 에듀테크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정민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위기의식이야말로 변화 촉발의 가장 확실한 동인이라는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를 인식하는 동시에 미래지향적으로 코로나 이후 달라질 소비행태, 트렌드 변화 등에 정착할 수 있도록 변화를 관리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성장 전략"이라며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시작은 변화관리에 있다"고 강조했다.

2020-07-21 14:03:35

경북 구미시, 한국로봇융합연구원 ‘구미 URI-Lab’ 유치

경북 구미시, 한국로봇융합연구원 ‘구미 URI-Lab’ 유치

경북 구미시가 구미국가산업단지 제조업의 재도약을 위해 '사람+로봇'이란 혁신성장 동력을 장착하고 있다.구미시는 21일 한국로봇융합연구원과 '구미 URI-Lab(Urban Robotics & Innovation Lab·도심지역 로봇&혁신 연구소)' 설치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URI-Lab은 로봇이 보편화될 시대를 대비해, 노동자들이 로봇 활용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로봇전문 우수인력을 양성하는 국책사업이다.이번 URI Lab 유치는 경북도와 구미시가 2024년까지 295억원(국비 144억원)을 투입해 로봇분야 단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로봇직업혁신센터 구축사업과 맥락을 같이한다. 로봇직업혁신센터 구축사업은 미래의 유망 일자리가 될 로봇오퍼레이터, 로봇 코디네이터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다.장세용 구미시장은 "로봇 인력 양성 사업은 제조현장의 체질을 개선, 지역산업이 되살아나는 변곡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20-07-21 13:47:36

세대를 초월한 연대를 위해…극단 함께사는세상 연극 '할매의 방'

세대를 초월한 연대를 위해…극단 함께사는세상 연극 '할매의 방'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할머니와 상처많은 어린 소녀가 시린 손을 맞잡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까. 연극 '할매의 방'이 청소년을 위한 특별기획공연으로 꾸려져 오는 23~25일 3일간 소극장 함세상에서 펼쳐진다.대구 지역 유일 마당극 제작 극단인 극단 함께사는세상과 (사)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공동으로 지난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초연한 바 있다.연극 '할매의 방'은 절대 울지 않는 할머니를 울리는 한 소녀와 소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은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고 기억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성폭력과 성불평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연대의 문을 활짝 열고자 한다.'할매'가 운영하는 정 많고 손맛 좋은 '할매국시'는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동네사람들의 단골식당이다. '폐지김'과 '공시생' 그리고 '통장네'는 평소 절대, 어떤 상황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할매에 대한 궁금증과 걱정으로 자신들의 슬픈 사연을 늘어놓으며 할매를 울리려고 갖은 노력을 하지만 역부족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국시집에 '소녀'가 뛰어 들어와 숨겨달라고 한다. 소녀를 쫓아 온 공시생은 소녀가 편의점에서 담배를 훔쳤다고 전하며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극작은 김인경, 연출은 박연희가 맡았다. 김헌근, 문경빈, 박희진, 강신욱, 탁정아, 김지홍이 출연한다.전석 1만원(청소년 무료). 평일 오후 7시 30분, 토요일 오후 3시. 문의 053-625-8251, 010-4525-8251.

2020-07-21 13:02:22

한국도로공사, 고속도로 전문용어 순화집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한국도로공사, 고속도로 전문용어 순화집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한국도로공사는 도로·건설 분야에서 관행적으로 오랫동안 사용해 온 일본어투 용어와 외래어를 개선하기 위해 국립국어원과 함께 편찬 중인 '고속도로 전문용어 순화집'의 명칭을 공모한다고 21일 밝혔다.공모는 8월 2일까지 진행되며, 국민 누구나 한국도로공사 홈페이지(www.ex.co.kr) 또는 공식 블로그, 페이스북을 통해 참여 할 수 있다.도로공사는 8월 중 심사를 거쳐 최우수 1건(상금 50만원), 우수 2건(각 20만원), 장려 3건(각 10만원)을 선정하고 참여자 100명에게는 추첨을 통해 상품도 제공한다.김일환 한국도로공사 건설본부장은 "공모전에서 선정된 새로운 이름은 내년 발간될 전문용어 순화집의 명칭으로 사용될 예정"이라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순화된 전문용어의 특징이 잘 드러날 수 있는 좋은 제안들을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2020-07-21 11:35:26

한국도로공사, ‘고속도로 영웅을 찾습니다’

한국도로공사, ‘고속도로 영웅을 찾습니다’

한국도로공사와 고속도로장학재단은 '고속도로 의인상(義人賞)' 후보자 추천을 8월 19일까지 받는다.고속도로 의인상은 고속도로 사고현장에서 시민의식을 발휘해 인명을 구하거나 2차 사고를 예방하는 등 안전한 고속도로를 만드는데 이바지한 개인 및 단체에게 수여하는 상이다.후보자 추천은 국민 누구나 가능하며, 추천서와 함께 블랙박스 영상 등의 증빙자료를 고속도로장학재단 전자우편으로 제출하면 된다.추천서는 한국도로공사(www.ex.co.kr) 또는 고속도로장학재단(www.hsf.or.kr) 홈페이지에서 받을 수 있으며, 자세한 사항은 한국도로공사(054-811-1342) 또는 고속도로장학재단(031-712-8942)으로 문의하면 안내 받을 수 있다.선정된 의인에게는 공적에 따라 최대 1천만원의 포상금과 감사패가 수여되고, 추천인에게도 상품이 지급된다.진규동 고속도로장학재단 이사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의 생명과 고속도로 안전을 위해 용기를 내신 분들의 선행은 사회적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며 "고속도로 사고 예방을 위해 용기를 낸 주변의 숨은 영웅들을 많이 추천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2020-07-20 18:59:49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바람개비/ 이능수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바람개비/ 이능수

요양원 마당에 오색바람개비가 돌아간다. 노인들이 마당가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뛰어다니며 돌리던 바람개비로 기억력을 되살리려 설치한 것이라 한다. 화단에 활짝 피어난 바람개비들이 봄꽃 같다. "안녕하셨어요?"라고 인사를 드려도 삼촌은 멍하니 얼굴을 쳐다보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버린다. 동행한 아버지가 삼촌의 손을 잡고 '빠야'를 외치며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쓴다. 혈육의 정이 애잔하게 다가와 눈물이 글썽인다. 가슴속의 회한을 풀어내기 위해서일까? 당신은 수백 번도 더한 '바람개비 얘기'를 오늘도 꺼낸다. 어른들은 논밭에 가고 열 살의 아버지가 다섯 살 삼촌을 돌보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삼촌이 계속 울어대자 '빠야'를 만들어주겠다며 달랬다. '빠야'는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삼촌이 바람개비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대나무와 낫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바람개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삼촌은 신기한 표정으로 바투 다가와 앉았다. 앗, 순간이었다. 미끄러진 낫이 동생의 눈을 스쳤다. 눈동자가 찢어져 피가 얼굴에 쏟아졌다. 당황하여 허둥대고 있을 때 부모님이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업고 병원으로 내달았다. 찢어진 눈동자를 당시 의술로는 봉합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가 아물고 눈의 부기가 가라앉았지만 결국 한 쪽 시력을 잃고 말았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란 속담이 있다. 삼촌은 왼쪽 눈에 하얀 안대를 끼고 살았다. 친구들이 외눈박이라 놀리며 따돌렸다. 미움이 마음속에 똬리를 틀자 사람만 보면 시비를 걸었다. 술에 취하면 밤낮 없이 아버지를 찾아와 눈을 고쳐내라 악을 썼다. 잘못했다며 용서하라고 사정해도 통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제삿날엔 특히 더 했다. 심적 갈등은 극한상황으로 치달아 수면제를 먹고 병원을 찾는가하면 언덕에서 아래로 굴러 팔을 부러뜨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삼촌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있었고 도서관에서 밤을 새웠다. 노력 끝에 상위성적으로 유명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삶의 희망을 찾은 삼촌은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입사원서에 학교장추천서까지 받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필기시험엔 우수한 성적이 나왔으나 면접이 문제였다.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때였다. 삼촌은 다시 어둠 속을 헤매었다. 외모장애(障碍)는 배우자 선택에도 걸림돌이 되었다. 학창시절 사귀던 여자 친구들이 취업에 문제가 생기자 곁을 떠나갔다. 맞선은 조건이 너무 복잡하였다. 삼촌이 좋아하면 여자가 싫어하고 여자가 마음에 들어 하면 삼촌이 퇴짜를 놓았다. 고집스러운 성격은 조건을 낮추어 혼인을 성사시킬 생각도 없었다. 백여 회가 넘도록 맞선을 보았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동생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출발한 일이 평생의 한을 안겨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의술이 허락한다면 자신의 안구를 이식해주고 싶다며 동생의 손을 잡고 통곡하곤 했다. 삼촌의 개비를 돌리는 바람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불자 바람개비의 날개가 움직인다. 하나 둘씩 돌아가는 소리가 창을 넘어온다. 병실 사람들이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저마다 어릴 적 골목을 뛰어놀던 때를 떠올리는 것일까? 가끔씩 미소를 짓기도 한다. 오후 회진시간이 되어 의사선생이 병실에 들렀다. 요즘 삼촌의 기분이 많이 가라앉아있다고 말을 꺼낸다. 얼마 전까진 옆 사람과 대화도 하고 식사를 잘하더니 이즘은 밥도 남기고 혼자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날이 많아졌다고 한다. 삼촌은 결국 세상과 화해를 못 했지만 스스로 치매 속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분노를 거둔 것일까? 그 고단했던 삶을 잊어버리기 위해. 문병을 마치고 요양원 마당을 걸어 나온다. 화단의 바람개비들이 힘차게 돌아간다. 하나를 골라 날개에 꽂힌 못을 뽑아 하늘로 던진다. 옥죄었던 장애에서 벗어난 개비는 자유를 찾아 허공을 날아간다. 날개 위에서 삼촌이 활짝 웃는다.

2020-07-20 18:35:59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성(城)/ 이범수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성(城)/ 이범수

저물녘, 감빛 노을 한 자락을 잡고 성을 오른다. 그곳 팔각정엔 세월한테 외면을 당한 소리, 소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왕조의 하늘을 풀어놓으며 저마다 손짓을 한다. 아예 젖무덤까지 까발린 모습들도 있다. 언제 들어도 실증을 모르는 그들의 무채색 이야기는 가을 이맘때가 가장 들을 만하다. 나는 그들과 나누어 가질만한 믿음을 찾아 먼저, 오늘에서 나를 멀리 떼어놓는다. 역사를 들여다보는데 연민(憐愍)만큼 나를 헷갈리게 하는 건 잘 없다. 지혜로운 자들의 속삭임도 항상 나를 흔드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또 하나 배운다. 성의 존재의미는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의 다름에 있다. 다름은 모양이나 색깔이 아니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과도 별개의 문제다. 그 다름은 형체가 아닌 인식에 뿌리를 두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다름에는 상대적, 시대적 불화가 한가운데서 가치 싸움을 하고 있다. 때문에 한 쪽에서 그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한 다른 쪽 가치는 덩달아 유효하다. 검정은 하양이 있기 때문에 더 희고 하양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내가 연민을 쉽게 못 버리는 고민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서로가 미워하면서도 때로는 그리워하며, 하지만 호적수로, 쌍수도(雙手刀)의 양날로 존재한다.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 가슴속에 유형, 무형의 성을 하나씩 만들어 쌓아놓고 살아간다. 성은 고유의 영역이며 공간이다. 동물이 분비물로 자기들의 생활반경을 다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성은 방어가 목적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유혹으로, 올가미로 변하기도 한다. 하나의 깃발로 나부끼어 으르렁 댈 때도 당연히 있다. 하늘의 거미줄도 또 하나의 거룩한 성이다. 성은 경계를 표시하는 울타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은 역사를 요리해서 먹고 사는 유령이다. 고도(古都)에서, 관광지에서, 길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는 곧잘 성을 만난다. 지난날 영화를 더듬어 얼기설기 복원해놓은 곳도 있지만, 풍마우세(風磨雨洗)에 빛을 잃어 세상과 이별을 서두르는 곳도 있고, 이미 자기 살을 다 뜯어먹어 빈터에 팻말 하나가 그냥 일러주기만 하는 딱한 곳도 많다. 어느 성 치고 영고성쇠의 생로병사는 피할 수가 없나보다. 한 예로 잉카문명으로 남아있는 마추픽추를 찾노라면, 아니 이야기만 나와도 나는 허상과 인욕의 세월을 버티어 온 민초들의 함성과 절규를 듣는다. 성은 보호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희생을 담보로 태어나, 마침내는 그 회생한테 조차 그리움이 못되는 하나의 허물로 버려진 게 태반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구조물 가운데 인공위성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중국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광활한 사막 위에 죽은 한 마리 뱀의 형상으로 누워있다는 것이다. 당나라 태종은 만리장성 저쪽의 흉노족과 화친을 성공적으로 체결하고 돌아온 이세적(李世勣) 장군에게 그 공을 치하, 의 네 글자가 든 족자를 하사했다. 만리장성을 쌓아놓고도 안심하지 못했던 그 좌불안석을 마침내 사람으로 풀었다는 그 공을 만천하에 알려, 성의 무용론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장성의 배경 없이는 어려웠다는 게 후일담이고 보면 때때로 성은 필요악으로서 존재 의미를 갖기도 한다. 성도 진화를 서두른다. 요즘 성은 성채(城砦)가 아예 없다. 사이버 공간에다 쌓아두어 그 높이와 위험도 알 수가 없다. 바다에도 성이 있고, 하늘에도 성이 있다. 자세히 눈을 닦고 들여다보면 너와 나 사이에도 분명히 성은 있고, 우리는 그 성을 지키기 위해, 또 넘보기 위해 저마다 최상의 수단을 동원한다. 시대는 지구촌과 글로벌을 추구하면서도 성은 여전히 알게, 모르게 자꾸만 곳곳에서 더 높게, 더 튼튼하게 쌓여가고 있다. 성 때문에, 그 성을 지키기 위해 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성도 허다하다. 엄살이 아니다. 이러저러한 설익은 담론들이 모여 하루아침에 없던 성이 또 하나 태어나기도 한다. 대다수 성은 탐욕의 상징물이다. 화려함에서 그러하고, 웅장함에서 그러하고, 그 깊이에서 더욱 그러하다. 깊은 만큼 탐욕은 무성하고 난해하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현인이 숨고 미련한 자가 득세를 한다. 미련의 결정(結晶)이 탐욕으로 변하는 건 순전한 자만의 횡포일 수도 얼마든지 있다. 구비치는 역사의 물줄기를 가로막은 만리장성, 머리를 구름 속으로 숨긴 한 마리 뱀으로 누워있는 장성 위로, 오늘도 수많은 관광객들은 역사란 이름으로 떠다니는 그들만의 소리를 여과 없이 즐긴다. 제왕의 웅지를 이야기 하는 사람, 도로(徒勞)로 남아 있는 허상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 민초를 밟고 휘날리던 도포자락에 입맛을 다시는 사람, 성을 돌아보는 그들의 표정도 각양각색이다. 한 마리 큰 뱀이 새로 살아 꿈틀거린다. 성은 저마다 당신 이야기를 하나씩 만들어 숨기고 살아간다. 만나는 성마다 하소연들이 다투어 엄살이다. 들어줄만한 읍소도 없는 건 아니지만, 함부로 밭을 수 없는 행방이 수상한 소문들을 제 것인 양 품어, 앙가발이 짓으로 사람을 곤혹스럽게도 만든다. 필요에 의해 쌓은 것까지는 모두가 공유한다. 엉뚱한 의기투함이 성으로 태어난다는 것도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고성낙일(孤城落日)에 동정할 필요는 천만에 없다. 이 가을, 성터는 역사소설의 마지막 장에나 나옴직한 가랑잎 뒹구는 소리로 마냥 처연하다. 말발굽소리 아득히 멀어간 노둣돌 옆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낙목한천도 까맣게 잊은 채 아직도 한양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달개비풀 한 포기, 오늘 나는 그 풀의 이야기를 듣는다. 폐서인으로 버려져 살아온 그의 서러운 세월을 듣는다.

2020-07-20 18:35:49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최고의 유희/ 백명철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최고의 유희/ 백명철

올해로서 결혼 사십 년을 맞았다. 고맙게도 그간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왔다. 아내는 나의 일이나 생활습관 등에 대해서 별 말없이 잘 따라 주며 가장의 대우를 해주었다. 그런데 일흔을 넘기고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점차 잔소리가 많아졌다. 나의 어둔함이 자꾸 눈에 뜨인 때문이었다. 한번은 이웃 혼사에 빈 봉투를 축의금으로 낸 일이 있었다. 집에서 정성스레 봉투를 마련했는데 그 안에 돈을 넣지 않은 채 접수했던 것이다. 다행히 다음 날 전후사정을 감지한 혼주가 귓속말로 알려주어 얼른 송금했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황당한 그 사건을 들은 아내는 순간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 후, 아내는 '물가에 내 놓은 아이' 운운하며 부쩍 나의 행동거지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듣기 좋은 말도 한 두 번이라고, 급하게 현관을 나서는 사람에게 휴대폰을 챙겼느냐, 비가 예상되니 샌들대신 구두를 신으세요 등의 말들은 멀쩡한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는 지나친 참견으로 들렸다. 우리 아파트노인회에서는 매월 월례회 겸 점심식사를 한다. 회원들이 대개 팔십대 이상임을 알고 있는 나는 몇 번 초대를 받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비슷한 또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봄 이십년 지기 형님뻘인 L이 회장이 된 후 사정이 달라졌다. 매사 적극적인 그는 월례회 며칠 전부터 꼭 나와야한다고 채근했다. 참석인원이 많아야 위세가 선다며 간청을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알려준 식당에 나갔다. 식당에는 이미 이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한쪽에는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들이, 다른 한 쪽에는 점퍼 등 간편한 차림의 할아버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여섯 분은 안면이 있었다. 한 눈에도 내가 가장 연소자 같았다. 마침 사인용 식탁에 빈자리가 있어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앉았다. 음식이 나오기 전 신상파악을 위한 질문이 한 순배 돌았다. 나이, 퇴직 전 직업, 고향 등등 이었다. 나의 맞은편과 옆자리에는 전직 공무원, 이곳이 고향인 건물주 그리고 나보다 스물네 살이나 많은 구십 육세 상노인 한 분이 계셨다. 한국 전쟁 참전용사라며 휘장을 새긴 붉은 모자를 내 보였다. 말도 또렷하고 소주 두어 잔을 거침없이 비웠다. 대부분의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은 멀리 있고, 이곳에서 부부 두 분만 사신다고 했다. 노인들의 대화는 주로 자신이나 동료의 장래에 대한 것이었다. 후손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생을 평안히 마무리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칠십대 초반인 나의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앉는 여러 가지 사회현상을 개탄하고 걱정하며 열변을 토하는 편이지만 이분들은 그 단계를 넘어선 듯했다. 세상사보다 눈앞의 전골 국물이 싱거운지 짠지를 두고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식사 후 모두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식당이 아파트인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연히 백수를 바라보는 상노인 부부와 또 다른 서너 명의 일행과 함께 걸었다. 노부인도 정정했는데 식당을 나설 때부터 새초롬한 얼굴로 무언가 자기 남편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저 고집쟁이 영감탱이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옆의 상노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는 실실 웃었다. "오늘 외출 때 깨끗한 양복바지를 입지 않았다고 저래 타박을 하네." 노인의 바지는 다른 사람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눈에 띄게 화려하거나 다림질 줄이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후줄근하지도 않았다. "저 영감탱이는 언제나 자기 멋대로야." 성이 차지 않았는지 노부인이 옆의 사람이 다 들을 수 있게 또 쏘아댔다. 소중한 남편을 번듯하게 드러내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영감탱이'는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얼핏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극성엄마가 연상되었다. '내일 모레가 백세이신데, 이제 좀 놓아드리면 안 되나.' 잔소리가 심해지는 아내를 생각하며 나는 침울해졌다. 아파트 정문에 이르렀을 때, 계단을 오르느라 상노인이 뒤뚱거렸다. 얼른 그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 마른 나무 가지처럼 쇠약한 그의 팔이 한 줌에 잡혔다. 숨소리가 불안스레 밭았다. '아, 이런 노인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다니.' 자기주장의 밧줄을 끝까지 당겨 쥐고 놓아주지 않는 할머니의 처사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짢은 마음에 뒤따라오는 할머니를 힐끗 돌아보았다. 연초록 겉옷으로 한껏 멋을 부린 노파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태평스레 옆의 할머니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계단을 다 오른 후 우리는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쉬었다. 그때 상노인은 장난스런 미소를 띠며 뜻밖의 고백을 했다. "우리 집 할망구는 내게 잔소리하는 하는 재미로 산다네. 심심치 않아 나도 좋아." 순간 나는 노부부의 속마음을 알았다. 저들은 무료한 노년의 적막함을 달래기 위해 짐짓 상스런 잔소리를 하고 서로가 그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친한 친구사이의 아슬아슬한 농지거리나 곧 주먹다짐을 할 듯이 함부로 내 뱉는 거친 언사가 기실은 그들만의 탄탄한 친밀감을 나타내듯이 이분들도 수십 년을 함께한 희로애락의 사랑표현을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울했던 내 마음속 먹구름이 확 걷히며 백수를 바라보는 상노인부부가 어찌하여 바깥출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정한지 짐작이 되었다. 현관에 들어서는 내게 '대낮부터 웬 술을'이라는 아내의 참견이 더 이상 잔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잔소리가 점점 발전해서 언젠가는 '영감탱이'가 되고 내 입에서도 '할망구'라는 말이 거침없이 나오면 좋겠다. 노부부의 잔소리, 그것은 어쩌면 이승에 혼자남기 전 두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유희인 것 같다.

2020-07-20 18:35:39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지우개/ 박정화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지우개/ 박정화

54세의 만길 씨 기억 속으로 들어 가 보고 싶다. 어디쯤에서 멈춰진 건지 그의 주치의도 모르고 그의 아내도 모른다. 일상의 대부분은 대여섯 살쯤 된 아이로 살고있는 만길 씨는 하얀 벽 속에 갇힌 삐에로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당혹스럽게 한다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54세의 만길 씨가 되어 사내의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과거와 현실을 오가며 여러 인격체를 보여주는 그의 기억이 궁금하다. 그런 그가 그제 점심때쯤 옥상 나무의자에 앉아 눈물 한 방울 무겁게 떨군다. 육 십 년을 살고도 철 이란 게 덜 들었는지 남은 세월이 지겹다며 우울이란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때였다. 진솔한 삶의 가치조차 왜곡하며 인격장애를 앓던 때, 친구의 권유로 호스피스라는 명찰을 달았다. 나의 못남과 지극한 이기가 수치가 되었던 곳, 늦은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그곳에서 만길 씨를 만났다. 너무 젊고 옆집 아재 같은 후덕한 남자였다. 췌장암 말기와 초로기 치매를 함께 앓고 있는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남자, 만길 씨 그의 한 뼘쯤 남은 마지막 시간을 울면서 웃으면서 같이 보냈다. '젠장 가을도 더럽게 가기 싫은게벼 웬 놈의 낙엽은 아직도 낭구에 달렸다냐.' 옥상 위에서 내려다본 아스팔트 위엔 어젯밤 내린 늦가을 비에 은행잎들은 널부러저 누웠다. 홑이불 같은 한 겹 환자복의 깃을 여미며 무심히 내뱉는 만길 씨의 눈에 가을빛이 투영된 눈물 안 방울 반짝인다. 이 순간 그는 54세의 만길 씨일까? 불현듯 찾아온 그가 반가워 살며시 들여다본 그의 기억의 출구는 어느새 닫히고 어린아이가 되어 보챈다. 병동이 발칵 뒤집혀 졌다. 발가벗은 만길 씨가 뛰어다닌다. 거품을 물고 씩씩거리며 간호사실이며 병실이며 종횡무진이다. 간 병 사 선생님이 목욕을 시키다가 느닷없이 비누 거품을 달고 뛰어나가는 만길 씨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죽여 버린다고 고함을 지르며 날뛰는 그를 제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 간호사 두 분이 겨우 안정제를 주사하여 잠재웠지만 잠이든 그의 얼굴엔 풀어내지 못한 울분이 남아있었다. 오늘의 이 광란은 그의 어디쯤의 분노일까? 무엇이 그리 억울하고 분했을까? 누구를 죽일 만큼 고통이었을까. 그의 머릿속 지우개는 왜 이것마저 지우지 않았을까. 이제 곧 가야 할 사람, 울분의 기억마저 지워주면 좋겠다. '코드블루' 다급한 멘트가 하얀 벽들 사이를 분주하게 번진지 두 시간 도 안되어 승강기에 홑이불 씌운 별 하나 지하로 내려갔다. 떨어질 별도 없는데 또 하나의 별이 지던 날 배설하지 못한 묵직한 분노가 스멀거린 하루였다. 슬금슬금 뒷걸음만 치다 집으로 돌아온 날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나의 행동에 두려움이 엄습한다. 승강기에서 내린 9층, 맨발이었다. 어디에 신발을 벗어놓았을까, 캄캄하다. 기억의 출구는 닫히고 행간에서 이탈한 사연처럼 승강기 앞에서 미아가 되었다. 얼마나 그렇게 나를 내려놓고 있었을까. 기억 따라 1층 승강기 앞에서 신발을 찾아올 때까지 나는 머리에 수십 마리 쥐가 들락거렸던 것 같았다. 승강기 앞을 내 집 현관으로 착각했던 머릿속은 지우개가 자라기 시작하는 건지, 피해갈 수 없는 수 순인가. 다 살아버린 사람처럼 한참을 울었다. 어느 한 부분을 도려내고 싶을 때 가 있다. 존엄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던 오욕의 세월이 있었다. 경솔함과 만용의 젊음이 수치가 되는 한 페이지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도리질을 수없이 해도 유리창에 남아있는 묵은 때 같아 애써 외면하고 살았던 단편의 시간이다. 희석되지 않고 사금파리처럼 생채기를 내던 시간 들, 그러한 단면들을 지울 수 있는 지우개는 삶의 마지막 페이지가 아닐까. 울분으로 회한으로 표출되는 치매라는 지우개는 끝까지 놓아버릴 수 없는 삶의 욕구 때문이 아닐까. 그 마지막 페이지를 힘겹게 끌고 가는 만길 씨, 캡슐 속에 묻혀진 그의 기억 속에 행복한 순간들만 표출되기를 빌어본다. 막막함과 수렁 같은 병 앞에서 줄기차게 남편을 향한 악다구니로 버티는 젊은 아내, 가난을 무겁게 이고 생계마저 위급한 상황에서 차라리 오늘 밤의 절명을 바라는 그녀를 보며 나의 젊은 날을 본다. 피가 한 사발쯤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 담지 못할 악다구니를 쏟아내던 젊었던 시절의 나와 만길 씨의 아내가 무엇이 다를까. 그녀의 암울한 절망이 연민이 된다. 젊은 허리를 동여맨들 다가올 긴 겨울을 어떻게 견딜까. 몰핀 주사 한 대에 췌장암 말기의 고통을 잊고 잠들어있는 그의 얼굴은 울분도 없다. 어쩌면 그의 지우개는 아픈 그의 삶에 대한 신의 마지막 배려일까? 어머니의 치마폭에 싸인 어린애의 기억으로 떠날 수 있도록 선물이었다면 역설일까. 포근포근하게 함박눈이 내리는 날 병실을 들어섰다. 비어있는 침대에 하얀 홑이불만 허물처럼 누워있다. 다녀가는 텀 사이에 마지막 수인사도 없이 그는 갔다. 간호사가 건넨 쇼핑백 속에 그의 와이프가 쓴 손편지가 들어있고 팬티스타킹 세 켤레가 얌전히 들어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 사람 잘 갔어요" 편지지에 몇 점의 얼룩은 그녀의 눈물이었을까. 창밖엔 십이월의 눈이 꽃이 되어 쏟아지고 내 마음에도 눈물이 꽃이 되어 핀다. 어린아이의 웃음으로 각인된 만길 씨처럼 나의 마지막도 복사꽃 피던 유년의 웃음으로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좋은 기억만을 남겨주는 지우개를 바라며 만길 씨의 짧은 생을 위로한다.

2020-07-20 18:35:25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우산/ 김애자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우산/ 김애자

희멀건 눈으로 멍하니 쳐다본다. 햇살이 환하면 우산은 현관 귀퉁이에서 무료한 삶을 이어간다. 형형색색이 행렬을 이룬다. 비 오는 날은 누군가에게 들림을 받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하다. 주인의 요구에 따라 반원이 되는가하면 중세의 사원처럼 뾰족하고 둥근 지붕이 된다.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 지나는 눈길을 잡아채거나, 화려한 색으로 자태를 뽐내며 빗속을 누빈다. 날이 들면 찾아오는 실직의 소식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우산의 걸음이 활기차다. 우산은 임시직이다. 언제라도 불러주기만 하면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워한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쓰임 받는 날은 높은 꼭대기에 오른 것 같다. 어께를 으쓱거리며 주변을 살필 여유도 잠시 뿐, 언제 관심 밖으로 밀려날까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며 가슴을 졸인다. 이 십 여년 시간강사를 했다. 강의가 있는 몇 달 동안만 일할 수 있는 날이다. 제 몸 하나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점포하나 가지지 못한 보따리 장사처럼 휴게실이나 도서관에서 어정쩡하게 빈 시간을 보냈다. 학기가 끝나면 선생도 학생도 아니다. 철저하게 무노동 무임금의 학문을 파는 떠돌이다. 방학이면 맑은 날 우산처럼 한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서 비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반짝거리는 장식품이 달린 우산도 다를 게 없다. 해외 명품이 들어오거나 낙하산이라도 떨어지면 비 오는 날마저 구석으로 보내진다. 허울 좋은 간판과 가방끈이 길다는 겉모습 때문에 햇빛 뒤에 감춰진 고통과 좌절을 실감하지 못했다. 가방끈에 맞지 않는 대우와 차별은 견딜 수 있지만 학기가 끝나면 기약 할 수 없는 다음이 불안해 착잡하다. 표류하는 난민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서류를 넣고 기다린다. 전화기로 전해지는 탈락의 소식보다 선택받기를 기다리며 날을 세우고 눈치 보는 모습이 더 처량하다. 소나기가 내리면 긴 세월동안 빛바랜 우산이라도 요긴하지 않는가. 연륜만큼 옛스러운 멋을 바라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좋아해주는 이들을 만날 때면 무던히 견뎌온 우직함에 뿌듯해진다. 잠깐 쓰이는 것일수록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한다. 화려한 경력으로 자리를 지켜왔더라도 잠시만 보이지 않으면 새것으로 바뀌는 현실을 알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장마철을 대비하며 우산을 손질하듯 새 학기를 기다리며 단장한다. 잠시라도 비 맞는 누군가를 덮어 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주저앉을 수 없다. 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가지고 싶은 소망이 온몸의 촉각을 세웠다. 떠돌이에서 안정된 내 자리를 얻기 위해 오십 중반에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임시직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박사학위가 없어 밀려났던 설움을 만회하기 위해 마음을 팽팽하게 조였다. 젊은이들 틈새를 뛰어다니며 가방끈을 더 늘리겠다고 세월을 거슬러 뜀박질했다. 주저앉으려는 몸을 채근하며 한 단계씩 조일 때마다 입에서 단내가 난다. 부질없는 짓이 될지라도 하고 싶은 일을 얻기 위해 고난과 흥정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 주인공이 되어 내 자리에 앉고 싶다. 힘겹게 사다리를 오르는 여정은 불안한 쫒김의 연속이었지만 안정된 자리를 가지겠다는 욕심으로 온 몸을 혹사시키며 안간힘을 썼다. 한쪽 구석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뼈를 깎는 수고를 하더라도 세상의 한가운데 당당히 서고 싶다. 정상은 신기루처럼 늘 산 넘어서 넘실거렸다. 눈을 뜰 때마다 점점 더 작아져가는 내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은 길고 지루하다. 욕망의 유혹을 외면하고 살았더라면 더 행복할 수 있을까. 마지막 학위를 받고 난 뒤 몇 년 동안 죽음에 걸 맞는 병치레를 했다. 발은 땅을 딛고 있는데 머리는 하얗게 비었다. 초점 잃은 눈만 허공을 떠다니며 습관처럼 먹고 잤다. 자격만 갖추면 앞길이 환하게 펼쳐 질 줄 알았다. 임시직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준비했지만 현실은 결코 공정한 게임이 아니었다. 경력이나 실력보다 금력과 연줄에 의해 쉽게 앞뒤가 바뀌었다. 꿈은 그냥 꾸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보다. 운명은 늘 비켜갔다. 파리 목숨 같은 임시직을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장대처럼 꼿꼿이 서서 쏟아지는 물 폭탄도 온몸으로 받아 흘려보낼 수 있는 우산이 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할까. 기약이 없다. 임시로 앉은 자리에서 밀리거나 잊혀 지지 않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냈다. 곱게 들림 받는 양산 팔자는 못되어도 급할 때 손쉽게 잡을 수 있도록 얌전히 기다려야 할 게 아닌가. 우산의 신분에 맞게 길들이기 위해서라면 더 힘든 여정도 견뎌야 한다. 해가 뜨면 존재조차 흩어져버릴 운명일지라도 기다림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단련되는 것 또한 내 몫인 것을. 물기 머금은 우산들이 각진 통속에 거꾸로 꽂혔다. 장대비를 맞아도 쓰임을 받았으니 뿌듯하지 않는가. 온몸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훔치며 젖은 몸을 말린다. 다음을 위해.

2020-07-20 18:35:15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황혼길/ 전보규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황혼길/ 전보규

황혼길곰삭혀 눌려 놔도 식지 않은 설렘이 뜸 들여 들춘 추억 옛정을 우려내어이 빠진 장뚝배기에 늙은 속내 채운다.주름져 거친 손을 포개어 마주 잡고 깨진 언약 조각 맞춰 애틋한 정 일깨우며굵어진 손가락 마디 보담어서 어른다.젊을 때 꾸던 꿈을 뼈다귀만 발레내고 물렁한 맨 살점만 김칫독에 삭혀두면 한순간 지난 세월이 빛바래도 웃는다.

2020-07-20 18:35:03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막사발/ 박순돈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막사발/ 박순돈

막사발 그 함바집 사각 탁자 위에막사발팔 다리는 아예 접어 몸통 속으로머리는 무릎 사이에 파묻은사람 사는 일에는 이력이 난 여자입은 몸뻬가 헐렁해서마음 씀씀이도 헤플 것 같은 여자어제를 씻은 구정물을문 밖 길바닥에 확 내다 뿌리는함바집 여자의 넉살 좋은 엉덩이를 닮은막걸리 잔비 오는 날은 파전 지지는 날기디리는 사내가 오나 안 오나입 찢어지게 벌리고 하품을 하는무뚝뚝한 사각 탁자가 제 서방인 줄 모르고연신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고 있는그 여자 만나러 내가 간다

2020-07-20 18:34:52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웅덩이/ 이다온(본명 이미숙 )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웅덩이/ 이다온(본명 이미숙 )

웅덩이흰 거품 물고 막무가내 뛰어내리는 폭포물줄기는 흩어져 웅덩이에서 하나가 된다잠시 머물다 가는 물의 간이역낙하의 무게로 깊이 파이는 상처에점점 깊어진다물의 목소리가 우렁차다파문을 끌어안는 격렬한 감정이물무늬를 만들고 먼 길을 떠나보낸다물소리에 산의 기운이 녹아있다이곳까지 끌려오는 계곡아무도 중력을 거스를 수 없다소낙비가 다녀간 뒤흐린 심기를 걷어내고 다시 맑아진 물빛늘어진 담쟁이덩굴 쓰다듬으며 다슬기 개구리알을 보듬어준다별처럼 빛나는 씨앗들을 천지에 뿌려놓아골짜기 가득 연둣빛 향기가이끼로 낀다꿈에 젖는 물웅덩이제 살 허물어 뭇 생명을 키우고 있다

2020-07-20 18:34:42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족발집 저녁/ 이상유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족발집 저녁/ 이상유

족발집 저녁 경비 아저씨가, 청소 아줌마가먼지 털며 돌아오는 저녁차려 놓은 술상 위에육중한 무게를 견뎌온, 발 하나가 누워 있다예리한 칼날들을 질서정연하게 받아낸무릎 아래가 술안주로 빛나고 있다경복궁 문지기가, 탱크 수리공이, 4대강 트럭 기사도발소리 죽이며 어둠을 따라 들어오고 있다터질 듯 눌리면서 단단하게 살아남아 있는가장 맛있는 과거를 오늘은 물고 뜯는 거지높이든 배신의 술잔이 철철 넘쳐도시간은 순리처럼 빠져나가고우리 속 같은 식당 바닥은 허공을 밟고 내려온달의 마당질척하다

2020-07-20 18:34:30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화엄사 흑매(黑梅)/ 이태숙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화엄사 흑매(黑梅)/ 이태숙

흑매는 없지만 있다 보려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눈물 다발로도 부족한 당신의 마음이 닿는 순간 벙근다 휴월(虧月)의 그믐밤 수천 밤을 포개어 보내며 혈관이 터지도록 꽃물을 끝까지 퍼 올리면 가슴에 묶어둔 회한이 온통 붉음으로 눈을 멀게 한 후 핀다 산통을 겪는 소리, 귓가에 신생의 자지러짐처럼 들린다 나의 온몸이 아프다 꽃샘바람은 오늘부터 자신을 시샘하는 바람이고 그 흔한 꽃말들은 속내를 감추기 위한 소문이다 만개한 꽃잎이 어느새 잠잠해지는 동안 풍경소리가 쉼 없이 산사를 맴돌며 애잔한 번뇌를 삭힌다 오래 참았던 기침처럼 그대에게 왈칵 쏟아내고 싶던 늦은 전언, 말없이 떨어뜨리며 봄날과 함께 내가 지고 있다

2020-07-20 18:34:14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불망(不忘)/  최상근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불망(不忘)/ 최상근

형의 유품이 불타고 있었다. 옷과 책 그리고 구두였다. 유품 더미 위에서 여러 장의 사진도 다투어 타들어 갔다. 그 속에 대학교 개교기념 마라톤 대회 때 형이 선이 누나와 나란히 찍은 사진이 보였다. 불길이 갉아먹듯 야금야금 사진을 태우자, 사진은 온몸을 오그라뜨렸다. 이윽고 아무 미련도 없이 하얀 재로 변했다. 그 사진은 나와도 인연이 있었다. 군 복무 중이던 형이 내게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술값 대신 맡겨 놓은 학생증을 찾아놓으라는 내용이었다. 당시만 해도 학생증은 현금으로 통했다. 술값이 모자라 학생증을 잡히면 받아주던 70년대였다. 그러나 졸업도 했는데 학생증이 왜 필요한가 싶었다. 영업도 시작 전인 오전 10시쯤, 알려준 술집을 찾아갔다. 주인은 참 희한한 일도 다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에 맡겨진 막걸리 외상 담보물이 학생증이었다면,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겠냐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외상값 대신 학생증 따위는 받아주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주인의 말에서 풍겼다. 주인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아가씨 너덧 명이 둘러앉아 저녁때 손님 앞에 내어놓을 술안주를 장만하고 있었다. 땅콩을 나누고 오징어를 잘게 찢던 아가씨들이 나를 보자 일제히 까르르 웃었다. 밖에서 내가 주인아저씨와 나눈 대화를 다 들었던 것 같았다. 주인이 조그만 서랍을 열고, 내용물을 방바닥에 부었다. 두껍게 쌓인 먼지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크고 작은 동전과 낡은 시계, 학생증도 더러 보였다. 그 가운데 하얗게 탈색된 학생증이 든 비닐 팩 하나가 있었다. 형의 학생증이었다. 비닐 팩에는 학생증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이미 불에 타서 재가 된 그 사진이 함께 들어있었다. 읍네 농업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형은 선이 누나를 좋아했다. 겨울 어느 날 밤, 형이 아랫동네 선이 누나를 만난다며 나가더니, 밤늦게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울었다.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바깥바람에 문풍지가 파르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밖에서 일어난 일을 귀띔이라도 하는 듯했다. 선이 누나는 아랫동네에 살았다. 누나네 집은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다. 형보다 한 학년 아래였는데, 눈같이 흰 피부를 가진 여고생이었다. 거기다가 인근 동네 또래 중에 단연 뛰어난 미모를 가졌다. 인사성도 밝아 누구에게나 상냥했다. 그런 누나가 무슨 말을 했기에 형을 울렸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영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누나에게는 이미 좋아하는 대학생이 있었다. 면 소재지에 있는 술도가 아들이었다. 그가 검푸른 색 대학교 교복을 입고 거리로 나서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선망의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좀처럼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의 이목 끄는 것을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선이 누나 만날 때만 검은 구두를 신고 동네에 나타나곤 했다. 선이 누나에게는 수요일과 일요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선이 누나가 교회에 예배 보러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누나 동네에 교회가 있었지만, 신도들끼리 패가 갈려 한쪽 편이 딴 살림을 차렸다. 선이 누나 집은 살림난 교회 편이었다. 새로 생긴 교회는 면 소재지를 거쳐 골짜기 동네에 있었다. 술도가 아들은 그때마다 선이 누나를 살림난 교회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는 저녁 예배가 있는 일요일 저녁이면 동네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선이 누나 집 대문에 그의 모습이 실루엣처럼 어른거렸다. 교회로 가는 길 도중에 과수원 농막이 있었다. 겨울철이면 농막은 텅 비어 있었다. 거기에는 방과 부엌도 있었다. 술도가 아들과 선이 누나가 교회도 안 가고 그 농막에 들어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둘이 들어가기만 하면 농막에서 연기가 난다고도 했다. 심지어는 농막에 빨래가 널리는 날도 있다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농막은 가끔 동네 처녀 총각들의 야밤 데이트 장소였다. 그들은 배가 출출하면 국수를 끓였다. 미리 집에서 십시일반 가져온 깍두기며 온갖 나물 반찬이 방안에 펼쳐졌다. 거기다 소주까지 마시며 밤새도록 떠들고 놀았다. 동네와 떨어져 있어서 어른들의 감시망을 벗어난 최적의 사교장이었던 셈이다. 바깥은 공기조차 얼어붙을 정도로 찬 바람이 몰아쳤다. 들판의 못이란 못은 얼음으로 뒤덮였지만, 농막 안 방구들은 벌겋게 달아올라 발바닥이 델 정도였다. 농막에서 흘러나온 처녀 총각들의 웃음소리가 혹독한 겨울밤을 녹여낼 것만 같았다. 농막의 용도가 이와 같음을 잘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은 선이 누나와 술도가 아들의 농막 로맨스를 일소에 붙였다. 선이 어머니도 선이 누나와 술도가 아들을 둘러싸고 번지는 별별 소문을 다 들었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나쁠 게 없다는 태도였다. 돈 많은 술도가 아들이 딸과 가까이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하고 다녔다. 술도가 주인인 박 씨는 소작농을 겨우 면한 선이 누나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였다. 선이 어머니는 갑자기 신분 상승이라도 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몇 년 전 가뭄이 한창일 때였다. 멀리 대구에서 빨간 소방차 한 대가 온 적이 있었다. 술도가 박 씨의 빽으로 왔다고 했다. 불자동차는 물이 고여 있는 하천에서 허연 물줄기를 품어 올렸다. 바닥이 턱턱 갈라진 논에 폭포처럼 물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불자동차의 위력에 감탄하며 일제히 손뼉 쳤다. 선이 어머니는 그때 일을 들먹이기도 했다. 박 씨의 얼굴은 평소에도 늘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술도가에서 만든 막걸리를 시도 때도 없이 마셔서 오른 술 살이라고 했다. 술 살 오른 박 씨가 껄껄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면 남자다웠다. 씀씀이도 후했다. 술도가 박 씨의 위상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모든 상황이 형에게는 현존하는 위협이었다. 술도가 아들은 사실 형이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박 씨는 면장이나 지서장과 수시로 주막을 드나드는 사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술도가에서 뻗쳐 나오는 술기운이 면 전체 동네 골짝 골짝에 뻗치던 시절이었다. 어디서고 일하는 데는 어김없이 막걸리 통이 따라다녔고, 그때마다 술도가 술통 실린 배달 짐자전거가 요란하게 길을 달렸다. 형은 은근히 다급했다. 누나에게 고백 한 번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용기를 내본 것인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은 듯했다. 어째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 식의 게임을 벌였단 말인가. 우리 집도 중농中農은 되었지만, 술도가에 비하면 턱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타파할 방법이 형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형은 포기하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를 떠올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육사에 들어가리라. 멋진 육사 제복을 입고 나타나서, 다시 한번 선이 누나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마음먹었다. 비록 읍네 농고였지만, 형은 밤늦게 공부하며, 육사에 합격하려고 투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하고 말았다. 평발이 원인이었다. 평발은 발 안쪽에 옴폭 들어간 부분이 평평하게 된 것을 말한다. 평발인 사람은 심한 운동을 할 수 없다. 발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발바닥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먼 길도 가지 못한다. 군사훈련같이 격렬한 체력단련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신체검사에 대비해 신발 속에 볼록한 나무토막을 넣고 다녔다. 그렇게라도 해서 평발을 면해보려고 애썼으나, 발바닥에 시커먼 멍 자국만 생겨, 발을 절룩거릴 정도였다. 시험에 떨어지고 나자 선이 누나에게 다가가려던 노력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선이 누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마음속에만 쌓였다. 악착같이 사는 데 한계를 느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생활이 느슨해졌다. 노력해서 되는 것은 없다. 체념할 줄 알아야지. 그것이 현실이다. 형은 자포자기했다. 지방 국립대학에 진학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다. 대신 운동에 흥미를 느꼈다. 유도 공인 2단의 유단자가 되었다. 등산에 몰입해 3학년 때는 산행 대장을 하며 전국을 누볐다. 친구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며 놀기에 바빴다. 산행한 후에는 더 많이 마셨다. 거의 매일 마시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때는 방 안에서 노래를 불렀다. 오페라 카르멘이었다. 사랑하는 군인 호세와 또 다른 연인인 투우사 에스카멜리오 사이를 오가며 염문을 뿌리는 집시의 여인 카르멘이었다. 카르멘은 악마적 유혹에 능한 치명적인 여인이다. 형의 하모니카 소리는 호세를 애타게 부르는 카르멘의 노래처럼 특별해서 호소력이 강했다. 어딘가에 종속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듯한 비장미가 묻어났다. 사랑은 길들이지 않는 새, 누구도 길들일 수 없어, 누구나 불러도 소용없어, 한 번 싫다면 그만이야, 겁줘도 달래도 소용없어, 한쪽이 입 열면 한쪽은 입을 닫네, 그 다른 쪽이 나는 좋아, 말은 없지만 좋아져, 날 안 좋아하면 내가 좋아할 거야, 내가 좋아하면 조심해야 해, 당신이 잡고 싶었던 새는 날갯짓하며 날아가 버렸네, 사랑이 멀리 있다면 기다려도 되지만, 기다릴 필요 없이 여기 있는 걸, 당신 주위를 휙휙, 왔다 갔다 돌아오네, 단단히 잡았다고 생각하면 달아나고, 달아났다 생각하면 붙잡히네. 노래가 끝나도 한동안 여음이 남았다. 반딧불이가 날아간 선을 따라 채 사라지지 못하고 이어지는 가느다란 불빛과 흡사했다. 카르멘은 선이 누나였을까. 길들일 수 없는 새, 부르거나 달래도 소용없고, 한 번 싫다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나는 너를 좋아하리라. 네 주위를 날아다닐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매력 도발의 여인이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는 애가哀歌는 가슴을 아프게 했다. 형이 부르는 노래에도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감성이 넉넉하게 실려 있었다. 내 마음 어디를 건드리는지 무한한 상상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카르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선이 누나를 만나러 아랫동네로 갔던 그 겨울밤의 일을 떠올렸다. 술도가 아들이라는 연적戀敵이 없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선이 누나를 마음에 두었을까 싶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진열대 한쪽 구석에 있던 도자기 한 점이 감정을 옳게 받고 난 다음에 갑자기 귀한 보물 대접을 받는 경우가 있다. 선이 누나 역시 평범했는데 술도가 아들이 나타나자 형의 마음을 끌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 가난한 집에 한 처녀가 있었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였지만 가는 몸매에 얼굴이 예뻤다. 그 처녀가 빨래터에서 빨래하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던 낯선 대학생들이 그 처녀에게 말을 걸며 웃고 떠들었다. 대학생들은 방학을 맞아 근처 동네 친구 집에 놀러 온 도시 청년들이었다. 처녀는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그 장면을 목격한 우리 동네 청년 하나가 대학생들에게 달려들어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한동네에 살았어도 그 청년이 처녀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싸움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낯선 대학생들이 동네 처녀를 희롱한 데 대한 분노였다. 분노는 청년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별 감정이 없었던 처녀와 청년은 그 일로 급격히 가까워졌다. 이듬해 봄이 되자 청년과 처녀는 밤에 몰래 동네를 떠났다. 청년 부모의 반대가 뻔했기 때문이다. 청년은 과수원집 아들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이였지만 둘은 한 몸이 되었다. 나는 한때 형과 선이 누나 사이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염려한 적이 있었다. 형과 나는 자취를 했다. 주말마다 농사짓는 부모님에게 돈 타러 가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래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는 지난주 돈의 사용처를 형에게 물었다. 형은 술값으로 탕진한 돈을 책값과 대학교에서 하는 실습비인 것처럼 말씀드렸다. 국립대학은 전부 국비였다. 따로 실습비라는 게 없었다. 형이 말하는 실습비는 형의 막걸릿값이었다. 아버지의 호통이 이웃집 담을 넘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 곁에서 초점 흐리는 말을 했다. "자식 손톱 밑에 흙 들어가게 할랑교!" 어머니는 무조건 자식 편을 들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녹아내릴 듯한 땡볕이 내리쬐는 들판에 벌레처럼 달라붙어 농사일할까 봐 겁이 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동네에 눌러앉아서 일 거드느라 검게 탄 아이들을 그토록 보기 싫어했다. 내 자식이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성내(城內, 도시) 물을 먹어야 하얀 피부가 된다. 사람답게 살아야지. 어머니의 신앙은 자식들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역정에 아버지는 기가 한풀 꺾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정말 형과 내가 받아 가는 돈의 사용처를 궁금해 했다. 도시에서 자취하는 아이들이 우리 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네에 또래 아이들이 더러 자취를 했다. 아버지는 그 집 사람들에게서 들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집 아이들보다 턱없이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나와 형은 그저 어머니의 입만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동네의 이집 저집에서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왔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처럼, 형과 나는 어머니가 얻어온 빚을 야무지게 받았다. 얻어온 빚의 자초지종은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형과 나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형과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나는 간장 댓 병을 들었다. 형은 고구마 몇 개가 들어 있는 쌀자루를 짊어졌다. 막차 버스를 놓치는 날에는 내가 결석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헉헉거리며 국도를 향해 달렸다. 멀리서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버스의 불빛이 보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마음을 비로소 쓸어내렸다. 가끔은 고장이 나서 막차 버스가 오지 않을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형은 군에서 제대한 후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사회 초년생답게 패기와 희망에 차 있었다. 학생들 앞에서 형은 교사로서의 권위 같은 것은 일찌감치 내려놓았다. 학생들과 동등한 상황에서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싶어 했다. 학생들의 감춰진 생각들이 형과의 사이에서 자유롭게 오고 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교실 분위기가 흐트러진 듯했으나, 학생들은 형을 진심으로 따랐다. 형은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이 기성세대의 감성에 의해 다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학생들 나이 때 가지는 이성 관계, 친구 문제 등이 갈등의 핵심이었다. 학생들은 그것들을 터놓고 이야기할 곳이 없었다. 공부 이외에는 모든 것이 쓸데없는 잡념으로 취급되었다. 그것이 인격에 미칠 영향 따위는 학교에서 무시되었다. 형은 자연히 학교와 마찰을 빚었지만, 갈등이 심화하지는 않았다. 내가 학교생활을 물으면 형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선이 누나가 간호학과를 나와 모교인 국립대학병원에 근무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은 잘나가는 가구회사 사장이고, 아들이 공부를 잘한다고도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며 내가 의아해하자, 소문이 그렇게 났더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누군가를 마음에 두며 살아간다고 해서 죽을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영혼을 살찌운다. 감성이 풍부해지고 남들과 쉽게 공감하는 능력을 키운다. 이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한다. 나아가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비로소 건전한 한 사람이 사회에 뿌리내린다. TV에서 가수가 옛사랑 떠올리는 노래를 부르자, 따라 부르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다.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 치며 몸까지 흔들어댔다. 그리워하는 마음은 감추려 해도 감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들 비슷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움은 엄연히 실존하는 것이며 실존은 본질에조차도 앞선다고 했다. 사람은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들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대학교 개교 기념 마라톤 대회에서였다. 형은 2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기진맥진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데, 하얀 수건으로 어깨를 감싸는 여대생이 있었다. 선이 누나였다. 누나는 형과 같은 국립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누나의 모습과 엷게 번지는 형의 미소가 묘하게 어울린 장면이 사진으로 남았다. 그 사진을 보았을 때였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냐며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선이 누나는 대회 행사진행요원일 뿐이었다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그 겨울밤, 울먹이던 형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학이란 곳에는 마주하는 여학생도 고교 시절보다 몇 배 많았다. 사귀기도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선이 누나보다 더한 매력의 여학생이 없었다고 장담 못 한다. 그런데도 형은 다른 여학생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도덕적 결벽 같은 것이 마음 깊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내가 여태껏 보아온 형의 모습에는 없었던 또 다른 면이었다. 선이 누나를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까. 형이 가진 모든 기력과 판단력, 폭넓은 포용력을 동원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선이 누나 생각을 지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턱댄 감정의 쏠림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형이 가진 이성의 억제력은 도도하게 흐르는 그리움의 홍수에 속수무책이었다. 형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그리움이 배후처럼 버티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화가가 자연 풍경을 화폭에 담을 때는 몇 가지 화법을 적용한다. 필요한 부분을 더하고 불필요한 부분은 생략한다.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작품 속에 녹아 있다. 그래도 충분히 감동적이지만, 걸작이라 하지 않는다. 최고의 걸작은 자연을 가장 자연스럽게 그린 그림이다. 거기서 자연의 향기가 끊임없이 샘솟는다. 자연의 숨결이 느껴져야 걸작이란 칭송을 듣는다. 그리움도 걸작이 된 그림과 같다. 거기서 삶의 에너지가 끊임없이 분출한다. 우리는 늘 만나서 이야기하는 대상 너머에 진정으로 보고 싶은 누군가를 감춰두고 있다. 그 누군가는 밥을 먹거나 길을 걸을 때 문득 떠오른다. 이야기 도중에 생각나 이야기가 엉뚱하게 빗나가기도 한다. 이때는 감정의 변화를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거나 밝아지면 상대방으로부터 정신이 옳지 않다며 빈축을 살 수 있다. 형도 부지불식간에 선이 누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마다 찻잔 속의 고독으로 여기며 마음을 추슬렀다. 나에게도 몰래 표정 관리를 했던 것 같다. 형은 선이 누나라는 동굴에 들어가 동면했다. 암흑천지 속에서의 동면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기다림이나 욕망이란 욕망은 다 빠져나간 상태였지 싶다. 누가 와서 잡아가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으리라. 마음은 눈 오는 날의 새벽같이 그칠 것 없을 정도로 희고 적요했다. 동면은 죽은 상태가 아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를 뿐이다. 형이 간암 진단을 받았을 때였다. 조카의 간을 이식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가족과 친척들은 당연히 간이식으로 소문난 종합병원에 입원하는 줄 알았으나, 형은 엉뚱하게도 국립대학병원에 입원했다. 그 대학병원 간이식 수술 경험은 다른 종합병원에 비해 초보 수준이었다. 실패할 확률이 높아 환자들이 선호하는 병원이 아니었다. 모두 어리둥절해 했지만, 사연을 아는 것은 나뿐이었다. 그 대학병원에는 선이 누나가 수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악성 베토벤은 음악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젊은 시절 줄리에타 귀차르디라는 여인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녀에게 청혼했으나 그녀 집안의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결국 그녀는 다른 귀족 음악가와 결혼했다. 베토벤은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 자살하려고 유서까지 썼다. 몇 년 후 월광 소나타가 발표되었다. 1악장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처연하다. 달빛 비치는 호수 위의 조각배 같다는 데서 월광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할 정도다. 월광 소나타 1악장은 그때 실연失戀의 감정을 표현한 곡이 아닐까.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 이토록 애절하게 작곡된 것은 없는 것이 이유다. 명곡의 탄생 이면에는 이처럼 슬픈 사랑의 사연이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의 마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수많은 월광곡을 선이 누나에게 헌정했을 것만 같았다. 형은 선이 누나로 인해 그리움 외에도 고통을 함께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리움 쪽으로 향하면 할수록 고통도 따른다. 씨줄과 날줄이 얽혀 피륙이 만들어지듯 우리의 삶도 고통과 그리움으로 직조된다. 고통과 그리움으로 삶의 피륙을 짜는 사이에 세월이라는 청룡열차는 쇳소리를 내며 종착역으로 달려가는 것이리라. 우리는 우연히 세월의 청룡열차를 탔을 뿐이다. 그다음의 일은 다 정해져 있다. 마치 버스가 정류장에서 멈춰 섰다가 다음 정류장에 다시 멈추는 것처럼. 간암이라는 차표를 끊고 탔으니 어느 지점에 이르면 내려야 한다. 내리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차 안에서 멀그니 바깥 풍경이나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보는 것이 형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지 혹은 다른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지를 놓고 선택하는 정도의 자유만 있다. 형과 조카는 간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종합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날은 우리나라와 스페인 간 2002년 월드컵 8강전이 있는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온 나라가 흥분으로 들떴다. 군중들의 환호와 자동차 경적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수술실만 정적 속에 묻혀 있었다. 수술이 시작되었다는 자막이 전광판에 떴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중환자실에서 심장 박동기에 매달린 형과 조카의 목숨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라는 답도 없는 물음을 윷가락처럼 던져보며 나 혼자 지쳐갔다. 선이 누나는 형이 입원해 있는 병동과 떨어진 다른 병동에 근무하고 있었다. 형은 선이 누나에게 자신이 입원한 사실을 알리려 하지 않았다. 오가는 간호사에게 귀띔만 했어도 될 일이었지만, 병원 주위를 산책하며 회복에 신경 쓸 뿐이었다. "여자는 많다. 세상 사람의 반은 여자다. 선이 누나도 여자일 뿐이다. 버스와 여자는 기다리면 또 온다. 떠난 여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가버린 버스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오지 않을 줄 알면서 기다리다니." 이런 말로 선이 누나를 잊으라고 한다면 잊을 수 있을까. 세월이 흐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을 두루 살피는 객관적 안목이 생기는 법이다. 과일이 익은 것과 같다. 그러나 익기 까지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형은 눈앞의 선이 누나가 세계고 전부였다. 다른 것은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바로 앞만 바라보는 근시안적 마음이 사랑인가? 그 사랑도 세월 앞에서는 시들고 만다. 어느 날, 옛 추억의 그 사람을 만났다 하자. 그 시절의 아름다움이 털끝만치의 손상도 없이 그대로 남아 있을 리가 만무하다. 추억이 그려놓은 이미지가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다. 순식간에 후회하는 마음이 가득 찰 것이다. 추억은 앨범 속에 들어 있는 오래된 사진처럼 그렇게 간직할 수밖에 없다. 나는 형이 선이 누나를 구태여 찾으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고 시절의 단발머리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려는 형의 마음이 엿보였다. 앨범 속 사진처럼 이따금 선이 누나가 쓴 시집을 꺼내 보면서 그 시절로 조용히 돌아가 보았으리라. 멀어져 있다는 느낌은 한순간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집은 중년이 된 선이 누나가 틈틈이 쓴 시를 묶어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다. 누나의 친필 싸인이 없어 형이 서점에서 직접 구입한 것 같았다. 그 시집에는 형이 고등학교 시절 쓴 것이 틀림없는 시들이 몇 편 삽입되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형은 시를 썼다. 각종 백일장에서 여러 번 입상한 경험도 있었다. 그 시절, 형이 사용하는 책상 위에는 두툼한 고무판 깔려 있었는데, 고무판 아래에 시 쓰인 종이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한 장 한 장 쌓이다 보니 고무판 가운데가 언덕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나는 형 몰래 고무판을 들춰서 그중 몇 편 꺼내 읽곤 다시 덮어두었다. 형이 쓴 시를 훤히 외울 정도였기 때문에,. 나는 선이 누나의 시집에서 형의 시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시집은 수십 편의 시가 몇 개의 단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형이 쓴 시는 시집 맨 첫 단락 '손 떨리던 시절' 편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시 중 '너'라는 제목의 시를 좋아했다.내가 너에게로네가 내게로실눈 터지는 눈짓 머물기 전까지는너와 나는 하찮은 풀이나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다차라리 그때가별것 아닌 그 시절이그리움이 무엇인지 아픔이 어떤 건지천지간에 먹통이었던 그때가세상에 없는 평화였다좁쌀만 한정말 먼지보다 작은 욕심이었던지너를 들여앉히고부터나는 왜 더욱 허기지는가너를 기다리는가형에게 황달 증세가 나타났다. 수술 경과가 좋다고 했지만, 눈의 흰자위가 노랗게 변해 있었다.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황달이 오면 간이식 수술은 실패한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의료진이 무표정하게 오고 갔다. 입원실 벽 한 곳에는 황달을 시시각각으로 기록하는 기록표가 붙어 있었다. 그 표에는 형의 황달 상태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다. 일시적으로 내려간 적은 있으나 전반적으로 꾸준히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퇴근길에 형의 입원실에 들렀다. 나는 누워있는 형에게 황달 수치가 조금씩 내려간다고 말했다. 듣고 있던 형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병실을 지키던 조카와 치솟기만 하는 황달 수치에 대해 늘어지게 걱정한 뒤였다. 내 말은 근거 없는 말이 되어 병실에 메아리처럼 떠돌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지우려고 조카가 입을 열었다. "어제 매일신문 기자가 아빠와 나를 취재하고 갔어요." 하며 오늘 일자 신문을 들어 보였다. 환자복을 입은 형과 조카가 침대에서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당시로써는 간이식 수술이 드물었던 때라 기삿거리가 될 만도 했으나, 억장이 무너지고 기가 막혔다. 웃는 표정이 내게는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형은 눈알이 퀭하게 드러나 유난히 커 보였다. 환자복 바깥으로 어깨 쇄골이 앙상하게 튀어나왔다.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질의 몸은 온데간데없었다. 뜬금없이 어린 시절 나를 다독이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읍네 중학교에 다녔던 형은 하모니카를 잘 불었다. 나는 3살 위의 형을 따라다니며 하모니카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잠시 하모니카 불기를 그만두기라도 하면, 생떼를 쓰곤 했다. 그럴 때마다 형은 하모니카 잡은 두 손을 오므렸다 펴면서 더 멋지게 불어주었다. 나는 감정이 한껏 고조되어 감미롭게 들리는 배음에 정신을 빼앗겼다. 까마득한 그때 일들이 당장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마도 그때부터 내 삶 곳곳에 형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졌을까. 잠시라도 형이 곁에 없으면 허전했다. 차츰 형의 말이라면 무조건 옳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꼬리처럼 따라다니며 당연하게만 느껴지는 형의 언행을 받아먹고 자라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형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형이 내 앞길을 비춰줄 거야. 나는 그런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성년이 되어 바라보니, 형이 어딘지 모르게 허물어져 있었다. 학교에 대한 불만이 형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는지, 음주벽까지 생겼다. 나는 형의 중언부언하는 말투에서 거리감을 느꼈다. 무조건 따르며 우상처럼 여겼던 형에게서 흠모의 정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형과 나 사이에 틈이 생기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형의 교직 생활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형은 학교 재단의 부당한 공금 유용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알고도 눈감는 동료 교사가 많았다. 부조리에 등 돌리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재단이 심지어 학생끼리 장난치다 깨뜨린 유리창 값까지 해당 학부모에게 청구했다. 파손비는 별도 예산이 편성되어 있어서 청구하지 말아야 하는 비용이었다. 형은 크게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없었다. 학부모 모임에서 교장 선생은 학생들을 교육 이념에 따라 성실히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면 불량배가 될 겁니다."라며 학부모 대표와 여담을 나누었다. 깨진 유리창 값 받아내는 것도 전인교육이냐며 항의하는 학부모가 있다면 교장은 또다시 말을 돌려댔을 것이다."물건을 아껴야 한다는 의식교육 차원에서지요. 요새 아이들은 물건 귀한 줄 모르죠. 잃어버리면 도통 찾을 생각을 안 해요." 형은 학교라는 사회가 모순과 모순이 엉겨 붙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가식과 모순의 난립 속에 형 자신도 무너져 내렸다. 완전히 내려앉았더라면 그나마 견딜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따금 명치를 타고 오르는 수치심이 각혈하듯 쏟아졌다고 했다.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형은 학교에 사직서를 냈다. 몇 번의 반려가 있었지만 형의 주장이 워낙 완고해 사표는 결국 수리되고 말았다. 당장 생활이 어려웠다. 뭐라도 해야 할 처지에 놓인 형이 시작한 것은 일수놀이였다. 영세한 재래시장 장인들에게 목돈을 빌려주고 매일 이자를 합쳐 수금하는 일이었다. 일정한 직업 없이 놀고 있는 외사촌 동생이 부추긴 사업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시간이 갈수록 형의 돈을 떼먹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끝까지 추적해서 밀린 돈을 받아야 하는데도 그런 일은 하기 싫어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달아나기까지 했겠느냐." 두리뭉실한 일 처리에 화를 내는 나를 형은 이런 말로 오히려 나를 타일렀다. 하루는 형이 내 사무실로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부담될 정도로 큰 금액이 아니었는데도 매몰차게 거절했다. 형은 괜한 말을 꺼내서 미안하다며 황급히 일어섰다. 그러더니 염려 말라고 하면서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형이 너무 무능해 보여서, 속이 끓었다. 형은 싸늘하게 식은 내 마음도 모른 채, 오히려 나를 염려하느라 쩔쩔맸다.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형은 한겨울인데도 여름용 코트를 입고 있었다. 영락없는 노숙자의 모습이었다. 카키색 코트는 마치 은박지를 이리저리 꾸겨놓은 것처럼 촘촘하게 접혀 있었다. 그 코트의 각진 틈 사이로 햇볕이 스며들자 코트가 물비늘처럼 반짝거렸다. 비참함이 아름답게 보일 때도 있다. 형의 몸은 온통 비극미悲劇美로 포장되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 형이 불어주던 하모니카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찾아온 형의 등을 떠밀었지만, 결코 밀어낸 적 없는 형이 하모니카 소리로 다가왔다. 한여름 당산나무 아래 시원한 그늘이 보였다. 말뚝에 메여있는 황소가 게으른 눈으로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형을 바라보는 풍경까지 헛것처럼 나타났다. 나를 위해 하모니카를 불어주던 형이었지만, 나는 여태껏 어릴 적 하모니카 소리조차 까맣게 잊었다. 바르르 떨며 들리는 소리판의 울림이 내 마음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린 나를 팔베개 해주던 버릇은 형이 군에 입대할 때까지 이어졌다. 형의 팔베개는 얼마나 편안한지 몰랐다. 나는 형의 팔베개 없이는 깊이 잠들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형은 나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우상도 흔한 추억이라며 사소한 것들과 뭉뚱그려 내 무의식의 공간에 부려놓았다. 일수놀이 실패로 떠돌 수밖에 없었던 형은 바닥을 헤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엠에프 시절이 다가오자, 더는 버틸 재간이 없어 얼굴 내밀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나로부터 면박당한 형은 무슨 생각을 하며 돌아갔을까. 병원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허겁지겁 달려갔다. 인사불성 된 형이 침대 위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오는지 잠시 조용해지더니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이내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이 세상을 하직했다. 형의 나이 53세였다. 사별이란 이렇게도 쉽게 이루어지는가. 형과 나 사이에 수만 가지 추억이 쌓여 있다. 그중에서 빛바랜 추억은 다시 선명하게 하고, 잊힌 것들은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형의 옛 우상이 다시 나타나리라.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형도 가버린 지금 모든 것이 공염불 같았다. 존재하는 것은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 어차피 무너질 모래탑을 땀 흘리며 쌓는 꼴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위해 힘들게 노력하며 고통을 참고 견디는 걸까. 희망을 품어야 하고 달성해야 할 목표 몇 개쯤 가져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며 우리 스스로 최면을 거는가. 형이 최면을 건 대상은 선이 누나였다. 선이 누나에 대한 그리움은 호수처럼 깊고 아득했다. 그 아득함이 현실에서 부닥치는 무수한 고통을 잠재웠으리라. 퇴직 후, 온갖 역경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선이 누나라는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는 오아시스를 만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오아시스에는 우물이 있어 마음껏 타는 목을 축일 수 있다. 비로소 쇠잔해진 기력을 회복한다. 우리 역시 그리움으로 목을 축여 삶을 재충전한다. 여행자들이 오아시스를 꿈꾸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움을 찾아 헤맨다. 그리움은 오아시스 같은 것이다. 형의 오아시스는 선이 누나였다.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가슴 저미는 상심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이때 멀리서 구원의 등불처럼 깜빡이며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움이다. 그것이 다시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한다. 우리는 비로소 질곡에서 벗어난다. 팍팍한 현실을 초월할 힘은 그리움에서 나온다.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두렵지 않은 것은 마음속에 그리움을 간직한 때다. 그리워하는 마음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자라지도, 줄어들지도, 흩어지지도 않는다. 그 어떤 변화도 하지 않는다. 시간의 경과와도 관계없다. 그것은 해와 달처럼 불멸이다. 사라져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이야말로 진정 죽은 것이다. 기억할 수 있거나 회상되는 추억은 죽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다. 서로 떨어져 있는 섬도 바닷물 아래서는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초월한 영원성에서 보면 그것은 서로 이어져 있다. 독립적으로 영원히 갈라서는 것이 아니다. 선이 누나는 여기 있고 형은 저기 있을 따름이다. 형이 임종을 앞두고 얼핏 나를 지켜보던 그 짧은 순간이 떠올랐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라도 기다렸다는 듯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언어 너머에 구체화하지 않는 말인 듯 우물거렸다. 결실도 하기 전 꽃봉오리 째 떨어진 자리. 그 빈자리에 남아 있는 웅성거림 같았다. 그것은 열매를 맺지 못해 앓는 신음이었다. 나는 그것이 선이 누나를 향한 가슴앓이처럼 느꼈다. 형은 그 가슴앓이에서 벗어나려고 술을 마시고 몸을 단련하며 미친 듯이 산을 탔다. 그 순간만은 마약에 취한 듯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선이 누나가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한 이유도 이와 같았다. 혹시라도 수술이 잘못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선이 누나라는 동굴에서 영면하리라. 꿈같은 일이 아니다. 환상도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형은 판단했을 수 있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선이 누나를 생각하는 일이 어쩌면 운명 같다. 운명은 지우거나 바꿀 수 없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디엔에이 같아서, 대체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거기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그 테두리를 벗어난다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우환을 당할 뿐이다. 좋든 싫든 주어진 운명의 그물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운명인 한, 우리는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고국에서 기다리는 애인을 떠올려." 전장에서 죽어가는 병사에게 옆에 있던 전우가 한 말이다. 부상당해 죽어가는 병사에게서 마지막 삶의 의지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였다. 병사는 기적적으로 감은 눈을 뜨고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그 병사의 눈에 무엇이 보였을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즐거웠던 한때였을 것이다. 병사의 마음은 이미 극도로 밀려드는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나 그녀 곁에 가 있었으리라. 그리움이란 무덤 저 너머에까지 간직하고 가는 영혼일지도 모른다. 베토벤이 죽자 그의 책상 서랍에서 의문의 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수신인 불명의 편지에는 어떤 여인에게 고백하는 내용의 애절한 글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의 가슴에만 묻어두려고 일부러 수신인을 밝히지 않았다. 붙여지지 않은 편지는 그 자신을 위해 쓴 연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허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친 듯이 술을 마시거나 난폭한 행동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파괴적으로 변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구해야 했다. 그것은 자신을 달래기 위해 쓴 편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선이 누나를 향해 쓴 형의 편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느 집 섬돌 아래에서 부서져 내리는 달빛에 녹아 있을 것이다. 오래 가보지 못한 시골집 방문 문풍지에 남아 바람이 불 때마다 파르르 떨며 울고 있을지 모른다. 혹은 고요한 밤 풀벌레 울음소리에 가뭇없이 흘러나올지도. 이것이 선이 누나에게 쓴 형의 편지일 것이다. 선산 무덤을 벌초할 때였다. 형 무덤 아래에 석등 하나가 있었다. 그 속에 하얀 종이가 보였다. 선이 누나가 막 꼴인 하는 형을 하얀 타올로 감싸는 장면의 사진이었다. 형의 유물을 불태울 때 불에 타 재가 된 바로 그 사진이 틀림없었다. 이럴 수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사이 누가 여기를 왔다 간 것일까. 이렇게 멀고 험한 산속. 아니면 아직도 형은 저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배회하는 중인가. 꺼낸 사진에 급하게 불을 붙였다. 늦가을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서 예초기 소리가 앵앵거렸다. 그 소리가 나를 다그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잠시 꿈속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벌초하는 친척들의 말소리, 눈앞에 드러난 떡갈나무와 길게 자란 풀을 보면서 나는 꿈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어째서 불에 태운 사진을 또다시 태울 수 있는가. 흘러간 시간과 현재가 겹쳐졌다. 어릴 적 보았던 형의 시가 선이 누나의 시집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선이 누나라는 동굴에 들어가 동면하는 형을 떠올렸다. 이 모든 징조가 나를 덮어 눌렀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불가사의한 일은 또 있었다. 선이 누나의 사위는 한의사였다. 그가 내 사무실 좀 떨어진 곳에서 개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고향의 누군가로부터 그가 선이 누나의 사위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있었지만, 몇 년째 그 병원 앞을 지나다니기만 했다. 몸에 탈이라도 나면 그때 들러볼 참이었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그 병원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왠지 무단히 지나칠 수 없었다. 어느 날, 나는 불문곡직하고 그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후에 선이 누나의 사위인 젊은 의사가 나타났다. 나는 그의 장모님 되는 분과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내 이름과 살았던 마을 이름도 알려 주었다. 고향과 인연이 있는 곳이라 찾아왔다는 말도 곁들였다. 그가 반색하며 내게 음료수를 권했다. 나는 그에게 선이 누나의 안부를 물었다. 선이 누나의 아들 근황도 물어보았다. 형이 공부를 잘한다고 자랑하던 그 아들이었다. △△처남은 목사가 되어 몇 년 전 미국에 이민을 갔다고 했다. △△이라고? 순간 내 입에서 형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목사가 된 선이 누나의 아들 이름이 형의 이름과 똑같은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긴장되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몇 년 만에 불러보는 형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불러서 안 될 이름 같았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얼굴을 더는 쳐다볼 수 없었다. 건성으로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모님에게 내 안부를 전해달라고 말했다. 형의 죽음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연락처라도 남겨 달라는 그의 말이 내 등 뒤에서 들렸다. 형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이 세상에서 형은 가진 것 대부분을 잃었다. 직업과 재물, 우상의 몰락. 형의 삶은 세상이란 척박한 토양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선이 누나와의 사랑마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 사랑은 정말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모든 것은 여전히 진행 중일 뿐이었다.

2020-07-20 18:34:05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바다 위에 지은 집/ 조춘기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바다 위에 지은 집/ 조춘기

2017년 3월 31일. 선원 24명을 태우고 남대서양을 항해하던 스텔라데이지호가 원인 미상의 이유로 침몰했다. 승선하고 있던 선원 24명 중 필리핀 선원 2명만 구조되고, 한국인 선원 8명과 필리핀 선원 14명이 실종되어 지금까지 시신조차도 찾지 못했다. 해난사고라는 펼쳐보기 싫은 음울한 기억의 페이지가 채 바래지기도 전에 또 매스컴에서 해난사고 소식을 전한다. 그때마다 덜컥 나의 가슴이 내려앉는다.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숨이 가빠오고 답답하다. 그것은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바다에 20대 청춘을 온전히 바친 동병상련의 안타까움, 아니면 원양을 항해할 때마다 여러 번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자신의 바다에 대한 트라우마가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신문이나 TV에서 선박침몰사고 소식을 접한 날 밤에는 어김없이 악몽을 꾼다. 간밤에도 악몽을 꾸었다. 내가 탄 배가 접안을 위해서 항구로 접어들어 항로를 따라 항해하고 있는데 점점 수로는 좁아지고 나중에는 배가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도랑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배 밑바닥이 돌에 긁히는 소리....아악 곧 충돌한다......아니면 출항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 상황이 설정되고 나는 가족들과 몇 년간 또 헤어져서 혼자가 된다는 고독감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출항은 꼭 죽으러 가는 마지막 항해 같은 무서운 예감으로 괴로워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나곤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선원 생활을 청산한 지 무려 40년이 되어 가지만 늘 이런 식의 악몽을 꾸는 것은 아직도 내 몸속에는 20대 청춘을 오롯이 바다에 바친 그때의 마도로스 DNA가 남아 있는 까닭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두려움 한편으로는 애틋한 바다에의 향수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다시 바다로 나가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생각도 불쑥 들 때도 있다.친구들이 대학생 배지를 가슴에 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갈 때 나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았을까. 그때 나는 고작 백 미터 길이의 배에 갇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선수에서 선미까지 갇힌 공간에서 마치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폐된 나폴레옹처럼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눈을 감고 나의 20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아직도 당시에 기항했던 항구의 이름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1973년 6월 21일 코리어호의 승선을 시작으로 바다에 주소를 옮긴 나의 마도로스 생활은 코리어오우션호, 리리호, 텐코마루호, 후지야수호를 끝으로 1982년 12월 12일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대략 다음과 같은 여정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아래는 기항했던 항구들을 나열한 것이며 기재 순서대로 항구에 입출항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리고 코리아호와 텐코마루호, 코리아오우션호는 일종의 부정기선이자 화물선으로서 주로 곡물, 시멘트, 철광석, 옥수수, 당밀 같은 화물을 취급한 반면 리리호와 후지야수호는 일종의 석유화학 탱커선으로서 벙커시유나 나프타 등을 운반했다.내가 처음 승선했던 항구인 부산항과 포항, 여수, 중국의 상해, 일본의 고베, 오사카, 나고야, 요코하마, 지바, 한남, 홋카이도의 무로란. 나가사키, 대만의 타이중, 카오슝, 기륭, 홍콩, 필리핀의 마닐라, 세부, 일로일로, 베트남의 사이공, 태국의 방콕,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수라바야, 말라카 해협과 인도양, 인도의 캘커타, 고아, 뭄바이, 파키스탄의 카라치, 스리랑카의 콜롬보, 사우디아라비아의 담맘, 요르단의 아카바, 홍해와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지중해와 지브롤타 해협, 대서양, 그리고 미국 보스턴, 볼티모어, 리치먼드 노퍽, 잭슨빌, 코퍼스 크리스티, 로스앤젤레스의 롱비치, 샌프란시스코, 컬럼비아강의 포틀랜드, 시애틀, 캐나다 밴쿠버, 파나마 운하, 태평양, 호주의 타운스빌, 브리즈번, 시드니, 멜버른, 애들레이드, 퍼스를 때로는 왔던 방향에서 거꾸로 항해하며 다시 지구를 역순으로 한 바퀴 돌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방콕이나 싱가포르, 마닐라, 일본의 고베항, 미국의 포틀랜드항은 약방의 감초처럼 자주 기항하였다. 그 길었던 여정을 다시 회상하니 짜릿한 전율감에 뜨거운 피가 솟아오른다. 문득 그때로 돌아가 다시 마도로스가 되었으면 하는 욕망이 생긴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내가 하선한 몇 년 후부터 인공위성을 통한 통신수단의 발달로 선박 무선통신사라는 직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젠 태평양 한복판에서도 무선전화로 세계 어디라도 통화가 가능할 만큼 편리한 세상이 되었으니까. 앞으로 인공지능의 발달로 얼마나 많은 직종이 사라질 것인가.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국가로부터 마도로스의 자격으로 바다로 나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그 날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의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 1973년 4월 21일. 두 달 전 공업고등학교 통신과를 갓 졸업한 스무 살의 나는 부산지방해운국으로부터 부산지방해운국장의 직인이 날인된 여권처럼 생긴 선원수첩을 발급받았다. (선원수첩. 부산 제59902호. 1973.4.21.발급) 그날 나는 선원수첩을 들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미구에 닥칠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이 선원수첩 한 장 한 장 뒤에 발톱을 숨기고 숨어 있는 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나의 눈은 벌써 먼 바다를 향했고, 나의 가슴은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요동쳤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너무나 가난했다. 7남매의 셋째인 나는 사실상 장남 노릇을 해야 했다. 위로 형님과 누나가 있었지만 10살 위인 형님은 3년 전에 결혼하여 자신들의 가정을 꾸리기도 벅차 우리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4살 위인 누나 역시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 후 올바른 직장 없이 놀고 있었고, 아버지 혼자 막노동으로 우리를 부양하기에는 너무 힘에 벅찼다. 어린 마음에도 가난에 허덕이는 우리 집을 건져내는 길은 내가 수양산 그늘이 되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상 서랍 제일 위 칸에 소중히 간직되어있는 색바랜 선원수첩의 둘째 장을 펼쳐보았다. 거기엔 47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앳된 미소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어린 소년이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20대 피 끓는 청춘을 바다에 바쳤던 나란 말인가. 실감이 나지 않고 오히려 눈물이 핑 돌았다. 사진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반세기 전의 일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당시 외항선원은 크게 항해파트와 기관파트로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통신파트와 조리파트가 있었다. 하지만 인원수로나 항해상 중요도로 보나 아무래도 항해파트나 기관파트가 선박 구성의 주축을 이루었다. 즉 선장을 중심으로 1등항해사, 2등항해사, 3등항해사, 그리고 갑판장 그 밑으로 조타수를 포함 8-10명의 갑판부원이 있고, 기관파트는 기관장을 중심으로 1등기관사, 2등기관사, 3등기관사, 그 밑으로 8-10명의 기관부원들이 있었다. 거기다가 지금은 통신수단의 발달로 통신사란 직종이 사라졌지만 현재의 통신용 인공위성이 있기 전의 당시에는 망망대해에서의 통신수단은 오직 모스부호인 돈쓰 돈쓰로 일컬어지는 무선통신이 유일했기에 통신파트에 1-2명의 통신사가 있었다. 또 선원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조리부에 조리장과 조리사 그 밑에 설거지와 서빙을 담당하는 부원1-2명을 더해 보통 그 당시에는 최소 30명 정도의 선원이 있었다. 그래서 외항선원이 되려는 사람들은 위 파트마다 그리고 그 직책마다 그에 상응한 자격증을 취득하고 소정의 해양 연수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이를테면 1등항해사는 1등항해사 해기사면허를, 통신장은 선박통신사 면허를 취득하는 것처럼. 나는 1973년 2월, 부산대양공고 통신과를 졸업했다. 나의 운명은 고교 진학 이전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하였던 대로 우리 집의 형편으로 볼 때 하루빨리 내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니 고등학교만 졸업하고서도 단번에 목돈을 벌 수 있으려면 외항선을 타는 것뿐이었다. 그 당시 외항선 사관으로 승선하면 월 급료가 73년 공무원봉급 1년 치에 버금갈 만큼 목돈을 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나는 중학교 진학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해양대학생처럼 사관이 될 수 있는 통신사가 되기로 작심하고 대양공고 통신과에 진학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육지보다 보수가 후한 만큼 바다가 위험해도 나의 의지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달콤한 환상은 출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난 파도 앞에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바다라는 냉엄한 현실 앞에 나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한때 중학교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한 이후 잠시 문학을 동경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내겐 사치였다. 또 문재(文才)가 뛰어나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목돈을 만져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로 공업고등학교 통신과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당시 나와 친한 중학교 동창들은 나름 착실하고 성실한 친구들로서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 이름있는 인문계 고교를 갈 수 있는 실력이었고, 나를 제외하고는 결국 그들은 거의 다 서울 유수의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니까 나만 유일하게 그들과는 다른 길을 걸은 셈이었다. 이처럼 외항선 선원이 되기 위한 준비는 착착 잘 진행되어 공고를 졸업하자마자 외항선 선박통신사로서 승선하는데 필요한 2급통신사 면허와 해기사 면허인 을종선박통신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겸손히 표현하자면 운이 좋았다. 당시 고등학교 졸업생에게는 원칙적으로 3급 통신사 응시자격만 주어졌다. 그러나 제법 큰 외항선을 타려면 초급대졸이상의 학력자에게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2급통신사나 1급통신사 자격이 필요했다. 다행히 고교생도 노력 여하에 따라 2급통신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예비고사에 합격하면 초급대졸학력자처럼 바로 2급통신사 본시험을 볼 자격을 주었다. 나는 재학 중에 예비시험과 본시험을 모두 통과할 수 있었다. 공고 3학년 때 꿈에 그리던 2급통신사 본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를테면 육사를 나오지 않고도 장교 후보교육을 거쳐 장교가 된 것처럼 해양대학을 나오지 않고 외항선 사관 대우를 받는 국장(배에서는 통신사를 무선국의 장이라고 하여 국장이라고 부른다)으로 승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고교동창 중에서는 나와 친구 1명 만이 예비시험과 본시험을 거쳐 2급통신사 시험에 합격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하여 나는 공고를 졸업한 후 여러 경로를 통해 선박회사를 수소문하는 한편으로 승선에 필요한 교육이수 등 필요한 제반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드디어 외항선원에 필수적인 각종 소양교육까지 이수한 나는 외항선 코리아호에 승선할 수 있었다. 1973년 6월 21일. 약관의 나이로 부산항에서 첫 항해의 닻을 올렸다. 그리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다니며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진 스물아홉 되던 해인 1982년 12월 12일 인천항에 입항하여 마도로스의 험난했던 여정에 닻을 내렸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마치 젊은 날의 마도로스로 돌아가 흔들리는 배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1973년 6월 21일. 뿌우우웅 힘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부산항을 출항하던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접안했던 부두에서 파일럿(도선사)이 승선하여 오륙도 외항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한 후 작은 통선을 타고 부두 안으로 사라지자 드디어 한국을 떠난다는 실감이 들었다. 선명 코리아호, 부정기 화물선, 항행구역 원양, 총톤수 6819톤(적재톤수와 총톤수는 다르므로 실제 화물은 10,000톤 넘게 적재 가능함) , 디젤기관, 4800마력, 선수에서 선미까지의 길이가 약 백 미터에 이르는, 나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철선이었지만 부산 외항을 벗어나 대해로 나가니 일엽편주에 불과했다. 그때 새삼 자연의 위대함 앞에 이 거대한 철선도 종이배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현실에 문득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물밀 듯이 엄습해왔다. 바다 위에 지은 이 작은집이 침몰하면 어떻게 살 수 있으랴.오륙도를 좌현 쪽으로 바라보며 스타보드(우현)로 변침하여 제주 쪽으로 선수를 틀자 오른쪽으로 내가 살던 영도가 보였다. 손에 잡힐 둣 가까이 보이던 동네가 점처럼 까마득히 멀어질 때까지 나는 뱃전에 기대어 서서 영도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완전히 나 혼자다. 가족도 친구도 볼 수 없이 1년이고 2년이고 바다 위를 떠돌아다녀야 한다. 운이 나쁘면 상어밥이나 물귀신이 될 것이고 운이 좋으면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겠지. 비로소 죽음이, 고독이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이상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과 죽음과 고독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나는 며칠 동안 마음의 중심을 잡기 힘든 상태로 혼돈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에서는 그러한 생각도 사치라며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성난 파도가 나를 힐난하듯 배를 사정없이 때렸다. 그럴 때마다 배는 좌우로 크게 요동쳤다. 출항하여 며칠간을 잘 버티던 나는 결국 일주일쯤 지나 남지나해( 지금의 남중국해)를 통과할 무렵, 뱃멀미를 시작했다. 지독한 신고식인 셈이었다. 영도에서 물과 함께 자란 나는 뱃멀미에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역시 근해와 원양의 대해는 차원이 달랐다. 파도의 높이와 규모부터 달랐다. 산더미 같은 파도라는 표현은 이때 적용해야 어울릴 정도로 실로 어머어마 했다. 살아오면서 그런 파도를 처음 보았을 정도였다. 백 미터가 되는 큰 배도 파도의 정수리 부분에 올랐다가 다시 파도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때면 마치 작은 돛단배에 탄 기분이라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순간 배는 완전히 물속에 잠겼다가 몇 초후 물을 뚫고 수면 위로 솟구쳤다. 만약 물속에서 솟아오르지 못했다면 그대로 우리는 물귀신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냈다. 똥물까지 게워냈다. 사투 끝에 겨우 기운을 차렸으나 비몽사몽 간에 있던 나에게 "바다가 호수처럼 늘 잔잔하다면 너 같은 촌놈은 배 못 타지. 똑똑한 서울 사람들이 다 타지." K선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키는 약간 작았지만 당당한 체구의 선장은 해양대학 항해과를 졸업한 정통 엘리트 마도로스였다. 또 나를 제외한 모든 선배 선원들은 이미 바다에 잔뼈가 굵은 분들이라 그런지 전혀 무서워하는 기미가 없었다. 모두 바다에 자신들의 목숨을 의탁하고 그 처분만 바란다는 의연한 태도였다. 그들의 그런 당당함에 약간은 의지가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선원이 되고자 결심했을 때 바다에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초심도 막상 파도 앞에서 한갓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갈 수도 없다. 막상 내가 독 안에 든 쥐 같은 신세라고 생각하니 차츰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나의 선원 적응기는 이렇게 첫걸음을 떼었다.나의 승선 첫 직책은 견습 통신사였다. 나는 완전 초보 통신사이므로 적어도 6개월이나 1년의 경력이 쌓인 후에야 정식 통신사로 발령이 날 터였다. 마치 실습항해사나 실습기관사를 거쳐 3등항해사나 3등기관사가 되는 것처럼. 그런데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 발생했다. 직속 상관인 L국장이 부산 출항 후 일주일이 지난 후부터 오래된 위장병이 도져 도저히 선상생활을 못하겠으니 중간기항지인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겠다는 것이었다. 선장이 설득했으나 국장의 마음은 이미 코리아호를 떠난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절벽 난간에 선 기분이었다. 의지할 사람이 2주일 만에 떠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앞으로의 항해가 두려웠다. 선장은 따로 나를 불렀다. "차석, 혼자 해도 괜찮겠지. 대신 자넨 싱가포르에서부터는 바로 특별승진해서 정식으로 차석발령 나도록 할게." 물론 업무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돈쓰 돈돈은 면허를 획득할 때 이미 검증되었으므로 눈감고도 자신이 있었다. 나의 선박 내에서의 임무는 무선통신을 이용해 본사와 기항지의 에이전트 회사에 전보를 주고받아 그것을 타이핑하여 선장에게 전해주고, 매일 기상예보를 받아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무선통신실의 장비였다. 통신시설이 너무 노후화되어 전파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배는 선령 40년이 넘어 이미 폐선해야 했지만 선박이 턱없이 부족하던 당시의 우리나라 실정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1960년대 당시의 상황은 한국해양대를 졸업한 수백 명의 해기사들을 절반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우리나라의 조선해운업은 열악했다, 즉 이들이 승선할 선박이 없었다. 학비를 전액 국비로 양성한 엘리트 해양일꾼들에게 일자리가 없었던 그 시절이었으니까 최대한 선박을 오래 운항하려고 했다.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선원 수출이라고도 하는 해외 송출선원 일자리가 생겨 이들을 상당부분 소화할 수 있었다. 나도 해상생활의 반은 일본인이 선주로 있는 일본 배에 수출선원으로 일했을 정도였으니까. 경제도약을 꿈꾸던 그 시절, 외항선원들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숨은 애국자였다. 통계에 의하면 1967년 송출 선원 2000여 명이 외화 300만 달러를 번 것을 시발로 1978년 1만7000여 명이 1억달러, 1980년대에는 5만여명에 연간 5억달러를 상회하는 외화를, 1990년대에도 5억 달러가 넘는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렇듯 한국 선원 송출사를 보더라도 서독파견 광부나 간호사, 중동의 근로자, 월남전 참전 용사와 함께 조국의 경제발전에 큰 초석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은 송출선이 많이 사라졌고, 그 자리를 필리핀이나 베트남 선원들이 메꾸고 있다고 한다. 40년 전 빈한했던 우리가 일본 배를 타고 가듯 지금은 필리핀이나 베트남 선원들이 상당 부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신 휴가를 얻을 수 있는 의무 승선 시간도 그때보다는 많이 단축됐다고 한다. 그리고 인공위성의 발달로 육상과의 커뮤니케이션도 편리해져 전보다 승선 환경은 훨씬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선배 선원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코리아호가 일본 근해에서 좌초되어 거의 반 이상 침수되었다가 건진 똥배이니 통신시설을 포함하여 각종 기계들이 이틀이 멀다하고 고장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남지나 해상에서 엔진 고장으로 배가 표류할 때 이 배에서 거의 뼈를 묻은 갑판장에게서 전해 들은 일화이다. 이런 이야기를 국장도 듣지 않았을 리 없을 터였다.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근해에서는 전파의 강도가 세어서 통신기가 찍찍거려도 모스부호 수신에 별 지장을 못 느꼈지만 출항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한국에서 점차 멀어질수록 전파의 강도가 점점 미약해졌다. 국장과 내가 통신실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본사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를 수신하려고 귀를 쫑긋 세웠지만 찍찌직 잡음 투성이의 고물 단파수신기에서 좀처럼 말을 만들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국장이 볼펜을 책상 위에 탁 놓으며 말했다. "젠장 제대로 들려야 뭘 하지." 청각은 나이가 어릴수록 더 싱싱한 것일까. 그 와중에서도 국장이 잡아내지 못한 모스부호를 내가 잡아낼 수 있었고 도저히 들리지 않는 부호는 전후 문맥을 파악하여 그럭저럭 전보 내용을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숫자는 대충 넘어갈 수 없어서 몇 번이고 재송신을 요구하였다. 그럴 때마다 한국의 무선국에서는 몇 번이고 같은 신호를 재송신해 주었다. 아마 짜증이 나지 않았을 리 없건만 원양을 항해하는 우리를 이해하고 인내해 준 그분들께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근데 문제는 또 있었다.대만 해협의 거센 파도를 겨우 빠져나와 싱가포르로 향하는 도중에 엔진이 멈춘 것이었다. 선박 엔진의 힘은 놀라울 정도로써 거센 바람과 조류를 헤치고 항진해야 하므로 엄청난 마력이 필요했다. 우리 배의 경우 말 사천팔백 마리가 동시에 끄는 힘이니까 잘 때도 선체가 진동하는 것을 느낀다. 갑자기 선체가 멈추더니 일순 조용해졌다. 모든 것이 처음인 나는 생경한 이 상황이 의아했다. 나중에야 엔진 고장이란 걸 알았을 때 등골이 오싹했다. 천만다행으로 파도가 잦아드는 지점으로 진입한 후라서 전복의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며칠 전처럼 파도가 덮쳐올 때 기관 고장이 났더라면......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때 국장은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지 않았을까. 서울의 H대학을 나와 1급통신사면허를 가진 아내와 예쁜 딸아이까지 있는 30대 초반의 유능한 분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날 이후 국장의 위장이 탈이 난 것 같았다. 아무리 급료가 높아도 위장병이 도질 만큼, 아니 생명의 위협을 받을 만큼 고물배에 자신을 맡기는데 대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건 국장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어차피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까 이제 죽어도 바다에 뼈를 묻자며 각오를 다졌다. 물론 죽음이 두려웠다. 누군들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으랴. 하지만 내겐 굶주린 부모 형제가 있었다. 대학을 갈 처지도 못 되고 배운 기술이라곤 돈쓰 돈돈의 무선통신 밖에 없는데 육지에서 과연 내가 뭘 해 먹고 살까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오히려 육지에서의 생활이 두려워졌다. 저 배 바다를 산보하고 나는 여기 파도 흉용한 육지를 항행한다 라는 시구처럼. 위험한 만큼 나의 급료는 당시 육상 근로자의 평균 열 배 가까운 이십만 원 정도였다. 나는 첫달 치 봉급을 수령 하기도 전에 이미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동생들아. 앞으론 학비도 밀리지 않을거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먹고, 더 이상 해진 옷을 안입어도 될거고.....이렇듯 나를 황천항해의 두려움에서 다소나마 건져낸 것은 전적으로 나만 바라보고 있을 동생들의 창백하고도 버짐 핀 누렇게 뜬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장장 10시간의 기관 수리 끝에 다시 엔진이 돌아가고 스크루가 힘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10시간이나 조류에 떠밀려 하염없이 표류했던 우리는 다시 싱가포르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싱가포르에 입항했다. 부산을 출항한 지 약 보름이 넘었다. 그 정도로 속력을 제대로 낼 수 없는 느림보였다. 항만 사정 때문에 우리는 싱가포르 외항 묘박지에 하루 정박했다. 결국 국장은 나를 혼자 버려두고 매정하게 하선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후임자는 오지 않았다. 본사에서는 후임자를 못 구한 것인지, 나를 믿고 후임자를 안 보낸 것인지, 아무튼 나는 승선 2주만인 초보 실습통신사가 정식 차석으로 승진하였다. 물론 특별 수당도 덤으로 받을 수 있었다. 국장 없는 혼자만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모두 잘 될 거야 하면서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통신기기들이나 엔진이 고장 나지 않고 2년만 잘 버텨달라고. 나는 2년 동안에는 결코 하선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2년 후에는 번듯한 집도 살 수 있다. 내 이름으로 된 문패를 보며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니 모든 잡념이 눈 녹듯 사라졌다.해적의 연원을 거슬러가자면 기록으로는 고대 이집트 나일강 하구에서 징세관이 탄 배를 습격한 해적을 가장 오래된 해적으로 보지만 나는 바이킹을 먼저 떠올린다. 바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내겐 멋져 보였던 바이킹 앞에 요즘의 해적은 바이킹의 발톱 밑의 때보다 못한 조무래기들로서 해적이라는 말도 아깝다. 이 바다 도적들은 배들이 속력을 내지 못하는 좁은 해협 근처에 잠복해 있다가 상선에 침입하여 금품을 털어간다. 요즘은 소말리아 해적이 악명 높지만 당시에는 소말리아 해적이란 말은 생소했다. 대신 싱가포르와 인도양 사이의 말라카해협 같은 곳이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자 목표였다. 이런 곳을 항해하는 선박들은 좁은 폭 만큼 안전항해를 위해 약간 속력을 늦출 수밖에 없다. 이 틈을 노리고 육지 가까운 곳에 대기하고 있다가 해적들은 쾌속선을 타고 뱃전까지 몰래 접근한 후 갈고리를 배의 난간에 걸고는 갈고리에 연결된 밧줄을 타고 순식간에 배에 오른다. 방심하면 배의 크기와 무관하게 해적선에 쉽게 당한다. 도둑고양이처럼 접근하는 해적선을 좀처럼 알아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단 무기를 든 해적들이 선박에 올라오면 사단이 일어나게 마련이므로 아예 배에 오르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말라카해협을 지날 때는 갑판 당직을 더욱 철저히 세운다. 나에게 견시의 법정 당직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자청해서 남국의 열대를 감상할 겸 좌현 쪽 통신실의 바깥 뱃전에 서서 하얀 포말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코리아호의 흘수선을 긴장한 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남국의 평화롭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밤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별 탈 없이 말라카해협을 통과한 우리는 전속력으로 인도의 캘커타를 향해 항진을 계속했다. 아뿔사. 말라카해협을 빠져나온 지 사흘 만에 인도양에서 다시 엔진 고장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기관부는 모두 비상이 걸렸다. 기관장까지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열대의 무더위와 싸우며 찜통 같은 기관실에서 사투를 벌였다. 다행히 3시간 만에 고장 난 엔진을 수리하니 기다렸다는 듯 파랑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기항예정지인 캘커타에 도착하니 집을 떠난 지 한 달이 성큼 지나가 있었다. 표류하던 그 날의 소회를 담은 나의 항해일지에는 스무 살 문학청년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표류 - 1973년 7월 10일 인도양에서코발트 빛 인도양이 누더기처럼 찢어져 너덜거립니다파도의 조각난 잔영을 하나씩 기워가며 바닷길을 읽어가는 일은 맨발의 수행자처럼 고단합니다축 늘어진 하루를 바다 위에 눕히고 별을 세어봅니다하늘에서 시퍼런 별들이 뚝뚝 떨어져 내립니다물고기도 하얀 게거품을 수면 위로 토해내는 이런 날은하늘도 바다도 바람도 구름도모두 멀미로 하루를 토해냅니다겨우 이십 여일 항해했는데벌써 항구의 냄새나 킁킁거리며 맡고 있다니오늘은 무슨 고독을 요리해 주실래요 우리 주방장님엔진마저 고독하다며 가던 길 멈추고 홀로 사색에 잠깁니다향수병이라는 고독에 감염된 우리 허리 굽고 병든 늙은 배가 시간의 뒤꿈치를 붙잡고항구 너머 당신을 바라봅니다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지금그때 내가 지칭한 당신이 누구였을까. 괜히 혼자 센티멘털해져서 그랬을까.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스무 살 내겐 가족 말고는 사랑할 대상이 없었던 것 같다. 어설픈 시심이 발동해 그냥 한번 불러 본 이름이었을까. 그때 내가 느꼈을 진한 고독감이 확 밀려왔다. 한 달여의 항해를 마치고 우리는 인도 동부에 있는 캘커타에 입항했다,시멘트를 하역하는데 약 한 달이 걸렸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컨베이어 벨트라든지 자동화된 설비가 없어서 선박에 장착된 윈치로 일일이 시멘트 포대를 하역해야 했으므로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캘커타에서 검역, 출입국, 세관 등 각종 수속을 마친 후 갖는 첫 자유시간. 당직 근무자를 제외한 선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외출했다. 근처 시장이나 유적지 등을 관광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기도 하며 오랜 항해 끝에 목말라했던 육지에 대한 향수를 나름의 방식대로 달랬다. 나는 나보다 4살 위인 해양대학 출신의 K3항사와 동행하며 빅토리어 미모리얼 등 화려했던 영국의 유적을 관람했다.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기대했지만 우리는 결국 술집을 찾을 수 없었다. 인도나 방글라데시 등 중동 지역은 당시만 해도 금주령이 내린 곳이 많았다. 지금은 아니겠지만.....꿀맛 같은 캘커타에서의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 왔던 항로를 역으로 되돌아 싱가포로를 거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수라바야항에 기항하여 곡물을 적재한 후 다시 인도양으로 항해했다. 지금부터 인도양에 있는 스리랑카의 콜롬보를 거쳐 홍해로 접어들어 요르단의 아카바에서 일부 하역하고 다시 이집트의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여 지중해를 거쳐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 북대서양으로 진입, 미국 동부의 보스턴까지 몇 달간의 긴 여정이 펼쳐질 것이다. 지금부터의 경험은 모두 내겐 첫 경험이어서 이국적 풍광을 모두 내 기억 속에 저장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특히 모세의 기적을 간직한 홍해를 지날 때는 비록 바다가 갈라진 지점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통과하는 내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요르단의 아카바항을 나오자 바로 수에즈운하로 진입했다.대기시간 포함 거의 하루가 경과 한 다음 날 오후 우리는 운하를 빠져나와 지중해로 진입했다. 지중해에 들어섰다. 배의 좌현 쪽에 아프리카 대륙이, 우현 쪽에 유럽대륙이 아슴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서 보면 호수처럼 갇힌 지중해인데 여기에서 그토록 찬란한 전설과 신화가 싹트고 수많은 해전이 발발했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멀리는 그리스군의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로마식으로는 율리시즈) 그리고 트로이군의 헥토르 등 영웅들의 전쟁, 가깝게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옥타비아누스 간의 악티움 해전이 벌어졌던 그 지중해. 에메랄드빛 지중해가 석양에 젖어드니 더욱 신비한 빛을 발했다. 마치 예전에 배웠던 세계사의 주인공들이 눈앞에 살아나 생생하게 그날을 재현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바다에 어둠이 깔리자 좌현 쪽 해안에서 찬란한 빛들이 명멸한다. 바람을 쐬러 뱃전에 나와 있던 조리장이 저건 알렉산드리아라고 말해주었다. 역시 그 옛날 클레오파트라의 숨결이 묻어있을 것 같은 알렉산드리아는 먼발치서 보아도 오색찬란한 불빛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며칠간의 항해 끝에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니 눈앞에 망망한 대서양이 우리를 반겼다. 정확한 표현을 빌자면 반기는 것이 아니라 거센 파도로 우리를 밀어냈다. 초대받지 않은 동양의 이방인들을 푸대접하듯이. 지중해와는 전혀 딴판인 대서양의 성난 파도를 맞으며 우리는 미국 동부의 보스턴 항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틀이 지나자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잔해졌다. 그러나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방심은 금물이다. 미국에서 방송하는 웨더캐스터를 실시간으로 수신하여 선장에게 전달하고 돌아오니 본사와 보스턴 에이전트에서 입항과 관련한 전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Please confirm ETA(도착 예정 시간)' 나는 캡틴으로부터 받은 답신을 본사와 보스턴 에이전트에 타전 후 뱃전으로 나왔다. 나는 평소 습관처럼 뱃전을 오른쪽으로 몇 바퀴 돌았다. 딱히 운동이라야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힐끔 위를 쳐다보니 우현 탑브리지 밖에서 3항사가 부지런히 하늘을 보며 위치를 측정하고 있었다. 항해사들은 자신의 당직 중간중간에 태양과 별자리를 보며 꼼꼼히 선박의 위치를 확인한다. 제대로 잘 항해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러나 향후 몇 년 내에 무인자동차처럼 완전자동화 된 무인선박이 등장할 것이라 한다. 그러면 통신기술의 발달로 통신사라는 직종이 사라지듯 선교를 지키며 배를 조종했던 항해사들과 조타수들 상당수가 직장을 잃을 것이다. 또한 다소 낭만적이기까지 했던 별과 태양으로부터 위치를 구하던 고전적인 항해술이랄지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던 바다와 별과 태양에 대한 구애도 멋쩍게 될 것이다. AI로부터 살아남은 항해파트 선원들은 하늘을 보며 이젠 전설이 되어버린 그 시절을 추억할지도 모르겠다. 기관파트 역시 AI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고국으로부터 어선을 타던 친구가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보통의 경우, 선박이 항구의 부두에 바로 접안 했을 때는 갱웨이(일종의 사다리)를 통해서 높은 배에서 부두 바닥으로 내려온다. 마치 비행기 트랩을 내려 오듯이.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항구에 접안하지 못하고 외항에 닻을 놓고 대기할 때는 통선을 이용해 육지로 간다. 외항까지 작은 통선이 와서 선원들을 태우고 육지로 가는 것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죽은 친구는 동료들과 술을 마신 후 귀선하다가 통선에서 갱웨이로 오르던 중 헛발을 디뎌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말았단다. 바로 구조 했지만 이미 심장마비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언제나 죽음이 상존하는 해상생활. 이렇게 의외로 파도가 치는 황천바다 보다 잔잔한 바다에서 죽음이 찾아올 때 선원들은 더 허무함을 느낀다.어릴 적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지나가는 배가 있으면 주먹 감자를 먹이며 뱃놈×× 12개라며 목청껏 놀려 댄 적이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구전되어오는 대로 배만 지나가면 그렇게 고함을 질렀다. 당시에는 선원들을 비하하여 예사로'뱃놈'이라고 불렀다. 사회적 인식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승선하고 보니 내가 상상하던 선원상 하고는 백팔십도 달랐다. 특히 상선의 경우는 너무나 달랐다. 우선 우리 배의 사관들만 해도 나만 빼고 전부 해양대학을 나온 수재들이었다. 전액 국비로 대학을 졸업하는 것도 큰 메리트이지만 외항선 한 달 급료가 육상 근로자의 10배 이상일 정도였으니까 SKY대학에 가고도 남을 실력자들이 해양대학에 많이 진학했다. 그리고 나를 또 놀라게 한 것은 웬만한 상선에는 몇백 권내지 천 권의 교양서적이나 소설, 시집, 무협지, 인문 철학서 등 제법 구색을 갗춘 그럴듯한 문고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마음만 먹으면 오히려 육지에 있을 때보다 다독할 수 있었다. 나는 승선 후 항해하면서 예전보다 더 많은 인문서적이나 소설, 시집을 읽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심취했는가 하면 장차 해양소설이나 해양시를 쓰는 작가가 되리라 마음먹었을 정도였다.북반구에서 호주로 가려면 적도를 지나게 된다. 선원들은 적도를 지날 때 오랜 관습대로 적도제를 지낸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인당수에 심청이를 던져 안전항해를 기원했듯이. 이를테면 서양의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 해당하는 용왕님께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것이 '적도제(赤道祭)'인 셈이다. 바람이 거의 없이 잔잔한 지역. 지금처럼 엔진의 힘으로 항해하지 않고 돛을 달고 바람을 이용해 항해하던 시기에는 바다의 신에게 바람을 보내 달라고 비는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무풍지대를 지날 때면 어서 이 후텁지근한 적도를 빠져나가기를 소망했을 듯하다. 우리는 탑브리지 바닥에 상을 차리고 적도제에 쓸 각종 나물과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 과일, 막걸리 그리고 삶은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절을 올렸다. 갑자기 바다의 살갗을 바늘로 찌르며 정오의 스콜이 내리고 있었다.우리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적도의 가슴 속으로 미끄러지듯 항해를 계속했다. 문득 그때 적도제를 마치고 감동을 받아 쓴 자작시가 생각났다.(바다 위에 지은 집)- 1979. 1. 27 적도를 지나 호주로 가는 남태평양에서안녕 남태평양 친구/ 너의 주소지에 전입신고를 마치던 날불안한 내 영혼 잠들 수 있었지/이삿짐 같은 것은 우리에겐 사치소금으로 간을 친 단단한 몸뚱이로 기둥을 세우고/바다의 심장을 이식한 뜨거운 피로 바다를 데우면어머니 자궁 같은 태평양이 내 집이니까/너의 품에 안겨 하늘을 본다물새들도 제집으로 가고 없는/물 젖은 종이 같은 날이면긴 항해에 나를 게워내느라 헝클어진 시간들/너의 가슴으로 던지리라/하루의 노동을 갑판에 풀어놓고너를 베고 누운 남국의 밤이 눈꺼풀 무겁게 닫아걸 즈음파도의 울음소리 달빛에 젖고먼 고향 바람에 실려 오는 아이들 웃음소리잠자는 너를 깨우기도 하겠지육지 소식 궁금해 뱃전을 두드리는 너에게바다에 멋지게 지은 우리 집 대문을 활짝 열고 때늦은 집들이에 너를 초대할게 그 바다에 지은 집에서 살다가 지금 사는 육지의 집으로 이사 온 지 어언 38년. 치기 어린 그때의 시를 보니 다시 바다의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달러가 부족했던 시절, 바다에 집을 짓고 살았던 외항선원들 덕분에 한국의 경제에 탄력이 붙었다. 누가 그들을 뱃놈이라 부를 것인가.누군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바다에서는 달빛에 물들건 햇빛에 바래지건 모두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된다. 바다에서는 모든 것이 신비롭기 때문이다. 망망대해에 길이 백 미터가 넘고 만 톤에 가까운 쇳덩어리가 가라앉지 않고 시속 이삼십 미터의 속도로 항진하는 것이나, 뱃전에서 나란히 자맥질 치며 몇 시간이고 따라다니는 돌고래를 보는 것이나, 일주일을 항해하여도 물새조차 없는 밤,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서 반짝일 때면 나는 무아지경에 몰입되고 만다. 두려움도 사라지고 고독감도 사라지고 문득 저 잔잔한 남빛 바다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불쑥 일어난다. 간혹 선원들이 항해 중 행방불명 되는 미스터리한 일이 벌어지는 것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무튼 바다에서의 전설과 신화는 언제나 호기롭고 그래서 더욱 신비한 카리스마를 만든다. 나는 승선 기간 중의 대부분을 부정기선에서 보냈다. 부정기선은 그때그때 본사와 에이전트에서 향후 2-3개의 항구만 정해주고 끝날 즈음에는 그때 가서 또 새로운 항구를 정해준다. 마치 미국 컬럼비아강에서 원목을 싣고 대만에서 하역하고, 포항에서 철 구조물을 적재하고 호주로 가듯 정기선처럼 항로가 정해져 있지 않다. 대신 정박 기간은 정기선에 비해 약간 여유가 있었다. 특히 시멘트 같은 것은 보통 보름 길게는 한 달 항구에 정박했다. 비가 오면 작업이 올스톱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하역시설이 자동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끔 성질이 다른 화물을 하역한 후 적재할 때는 갑판 아래 선창의 크리닝 작업이 고된 것은 별론으로 하고.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재수가 억세게 좋은 사람 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1975년 1월 한 달 내내 사이공(지금의 호치민, 공산화되기 이전의 이름)에서 시멘트 하역작업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초사(배에서는 보통 1항사를 이렇게 부름)와 3항사를 따라다니며 사이공 시내 곳곳을 관광했다. 말이 관광이지 오늘은 영화, 내일은 축구. 모레는 동물원 구경 이런 식이었다. 설마 그렇게 빨리 월남이 패망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불과 3개월 후인 4월30일에 월남이 패망했다는 뉴스를 듣고는 모골이 송연했다. 외출이 위험하고 무모한 줄 알았지만 억눌린 육지에의 향수를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던 셈이었다. 사이공 시내에 베트콩이 산재해 있었고 치안도 엉망이었다. 누가 우군이고 적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방심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 예사였다. 그래서 그즈음엔 모두 시내 외출을 꺼렸는데 우리는 시간만 나면 외출을 일삼았으니...... 아마도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나는 불귀의 객이 되어 구천을 떠돌거나 대양의 심연에서 잠 못 드는 물귀신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때 초사는 베트남 아가씨와 연인 관계(?)였는데 꼭 우리와 동행했다. 같이 외출하고 같이 배로 복귀했으니 연인이라기보다 친구 사이였을 것 같다. 그만큼 순수한 로맨스라고나 할까.마도로스하면 로맨스를 빼놓을 수 있을까. 내게도 순수한 로맨스가 있었다. 1975년 3월 7일 대만의 카오슝에 입항했을 때였다. 우리 배에는 실습생이 두명 있었다. 해양대학교 3학년이면 실습생으로 의무적으로 승선해야 하는데 우리 코리아호에는 항해과 L군과 기관과 S군이 승선해 있었다. 입항 후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우리 셋은 카오슝 시내로 나갔다. 실습생 두 명은 제복을 입어서 단연 거리에서 눈에 잘 띄었다. 셋이서 원동백화점(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앞을 걸어가는데 건널목을 건너오는 사람 중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아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우리 옆을 그녀가 지나칠 무렵 갑자기 자전거가 내 쪽으로 넘어졌다. 위험해.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그녀의 자전거를 잡아주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연신 감사하다는 그녀에게 유어 웰컴이라고 영어로 답하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모았다. 그녀는 연이어 컴 퍼럼 코리아, 아엠 시맨이라는 나의 말에 코리아? 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우리를 훑어보던 그녀가 실습생의 단정하고 멋진 제복을 보더니 약간은 경계하던 표정을 풀었다. 그렇게 그녀와 나의 인연은 맺어졌다. L과S는 나를 위해 먼저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尤淑華(우쑤화라고 그녀가 읽어주었다.). 오후 8시 통선을 놓치면 귀선할 수 없기에 우리는 오후 7시만 되면 내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정박한 3일 내내 같이 지냈다.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어떤 날은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도 하며 깔깔 웃었다. 그때 나는 22살, 그녀는 20살이었다. 지금 회고해 보면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이 그린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사랑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래도 20대 외로운 바다 위에서 그녀에게 올 편지를 기다리며 몇 년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내가 한국에서 결혼하면서 자연히 소식이 끊어졌지만 너무나 순수했던 그 날의 아련한 추억 때문에 언젠가 죽기 전에 기회가 된다면 카오슝을 방문하고 싶다.긴 항해 끝의 상륙은 선원들에게는 오아시스를 만나는 격이다. 모두 가족 선물을 살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나도 첫 항해 때는 싱가포르에서 누나에게 줄 스위스제 라도시계(당시에는 알아주는 시계였다)를 샀다. 그리고 선원들은 다음 행선지가 정해지면 잠시 풀어두었던 고독을 가슴에 담고 그동안 정든 항구를 떠난다. 선원들은 저마다의 육지에서 있었던 일을 약간씩 포장하여 다음 기착지까지의 얘깃거리로 삼는다. 물론 로맨스는 빠질 수 없는 단골 메뉴다.뭐니 뭐니 해도 선원 생활 중 가장 기쁜 순간은 계약 기간을 마치고 귀국하거나, 외국 현지의 항구에서 후임자와 교대하는 순간이다. 외국회사로 송출을 나가면 나는 보통 1년 6개월 이상을 버텼다. 그리고 몇 달간의 휴가 후 다시 승선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나에게는 금전 복이 없는 것 같다. 우리 집에 닥친 불행만 없었다면 코리아호에 처음 승선한 1973년 6월 21일부터 1975년3월18일에 인천에서 일시 하선할 때까지 총 19개월의 총 급료는 어림잡아 삼백여 만원은 족히 될 것이었다. 당시로는 꽤 큰돈이었다. 귀국하여 집으로 향하던 날 기차 안에서 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처음 계획대로 내가 사는 영도 중심가에 아담한 집을 살까 아니면 무엇을 할까 즐거운 고민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선 순간 반갑게 맞아 줄줄 알았던 부모님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누나가 병원에 있다, 가보자."나를 보자마자 던진 아버지의 축 처진 말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당시 부산에서 손꼽히는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메리놀병원으로 갔다. 누나는 참혹한 모습으로 두 손과 두 다리가 침대에 묶인 채 1인실 병동에 누워있었다. 처음 누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초점도 없는 동공으로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누나. 나 왔다 ." 나는 누나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묶인 두 손이 애처로왔다. "자 이거 봐 누나 주려고 싱가포르에서 스위스제 라도 손목시계 사 왔어. 어서 일어나야지." 그때였다. 누나의 눈이 나를 응시하는 듯하더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기적이라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착하고 순수하기만 했던 누나는 유부남을 총각으로 알고 사랑했다가 배신당하자 충격으로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고 했다.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켜 할 수 없이 사지를 묶어 놓았고, 비싼 병실에도 불구하고 1인실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번 돈이 아니었으면 누나가 죽었다는 것과 그래서 내가 번돈을 다 병원비로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너무 허망했다. 울 수도 없었다. 다행히 누나는 그날을 계기로 몇 달 후 완치되었다. 지금은 손주들도 여럿 본 평범한 할머니로 거제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 1년 후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은 나는 국적선인 리리호에 승선했다. 그리고 계약 기간을 다 채우고 나는 대우가 더 좋은 일본인이 선주인 일본 배를 타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덴코마루호는 요코하마에 정박 중이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통신장의 인수인계가 이뤄졌다. 일본 나리타 공항 도착 후 마중 나온 에이전트의 차를 타고 부두로 가서 정박 중인 선박에 올랐다. 이때 휴가를 못 가는 선원들은 새로 승선하는 선원들을 통해 고국의 가족들이 부친 여러 사연이 담긴 편지를 받아 볼 수 있는데 나 또한 그들의 편지나 기타 약 등을 전달해 주었다.또 다람쥐 쳇바퀴 같은 선상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항구 저 항구 본사의 지시에 따라 화물을 적재하고 하역해주고, 또 새로운 화물을 적재해 또 다른 항구로 떠나는 틀에 박힌 생활의 연속. 그러다가 항구에 입항하면 단 며칠간의 육지휴가를 즐기다가 다시 출항하고,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다 무사히 1년 2년의 기간을 채우면 그리운 고국으로 귀국하는 것, 이것이 선원들의 정형화된 삶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러한 삶의 순환 속에서 나의 20대도 그렇게 하염없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그나마 나는 통신실에 근무한 덕택에 다른 사람들보다도 먼저 세상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초단파 주파수 채널을 통해 미국의 소리(VOA) 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파방송으로 미국에서 송출되는 방송인데 한국어로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VOA 방송을 들으면서 무원고립 상태의 망망대해에서 그나마 고독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항해 도중 비번인 선원들이 망중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것 역시 해상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윤활유다. 텐코마루호 통신장 때의 일이다. 1979년 2월 10일. 호주 브리즈번과 멜버른을 경유하여 애들레이드에 당밀을 하역하러 갔을 때였다. 입항하기 전 부두가 준비되지 않아 선장이 스로우 어헤드(저속항진)를 지시하여. 속력을 낮춰서 시속 15km로 항해하던 배의 속도를 5km 정도로 줄였다. 뱃전에 나와 바다를 보니 거짓말 좀 보태어 물 반 고기 반이 아닌가. 당직이 아닌 선원들은 뱃전에 붙어서 낚시를 했는데 자그마치 건져 올린 갈치 종류 수백 마리를 잡았다. 또 접안 후 인근의 해변에서 바위에 붙은 전복을 두 자루나 땄다. 바위 밑이 온통 전복이었다. 조리장이 제일 좋아했다. 얼마간 우리는 싱싱한 생선과 전복요리를 실컷 맛볼 수 있었다. 아마 지금은 호주 당국에서 생선이나 전복 등 해산류에 대한 금어령이나 금채취령을 발동했을거라 짐작해 본다. '바다여 안녕' 한 십 년 이상 외항선에 승선하여 제법 짭짤한 자금을 손에 쥔 사람들이 바다를 떠나며 하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판다. 뼛속 깊이 마도로스라고 자처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하선할 때 '이제는 배를 타지 않고 육상에서 무슨 사업이라도 해야지'라며 호기롭게 바다를 떠난다. 그러나 몇 년 안 가 다시 배에서 만나기 일쑤다. 묻지 않아도 사업은 말아 먹었을 것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며 그들은 다시 배를 탄다. 안타까운 일이다. 적어도 바다에 있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선원들의 개성은 번데기처럼 바다 위의 집이라는 고치 속에 함몰된다. 정해진 시간에 당직을 서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야 한다. 모든 게 규격화된 해상생활에 몇 년 혹은 수십 년간 길들고 보면 그의 삶도 규격화되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육지의 환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간신히 바다라는 고치의 벽을 뚫고 훨훨 육지로 날아가 날갯짓을 하여도 육지의 맹랑하고도 음흉한 짐승들이 단번에 낚아채 가는 바람에 대부분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육지에서는 마도로스만큼 목돈을 못 만질뿐더러 아는 거라곤 바다밖에 없으니 또 바다에 목숨을 맡긴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서 세월은 흘러가고 그들의 바다에서의 새로운 무용담이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하나씩 밤바다에 떨어지며 훗날 새로운 후일담으로 술자리를 흥건히 적실 것이다.심심하고 맛없고 단조롭고 밋밋한 해상생활 때문인가? 선원들의 입맛은 의외로 까다롭고 민감하다. 그래서 주자(조리장)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상의 맛을 내기 위해 늘 노심초사한다. 부식비가 한정돼 있으므로 가성비 좋은 부식재료를 실어야 한다. 그래서 호주나 미국을 갈 때는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값싼 채소와 김치, 막걸리, 소주 등을,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육류와 윤기 도는 쌀, 오렌지 양담배, 양주 등을 구입했다. 당시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던 티본 스테이크는 촌놈인 내가 배를 타면서 난생처음 먹어본 귀한 메뉴였다. 미국산 티본 스테이크는 말 그대로 T자로 생긴 뼈에 붙은 쇠고기였는데 적당히 두툼한 스테이크를 먹을 때면 외항선을 타는 서러움을 단번에 날려 보낼 환상적인 메뉴였다. 솔직히 73년도에 서울서 대학에 다니던 내 친구들도 티본 스테이크를 먹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한 명도 없으리라. 특히 면세 맥주와 스테이크를 먹은 날은 하루 내내 배가 고프지 않은 것 같았다. 청수 또한 중요한 품목이다. 정박 중에 충분한 양의 청수를 공급받아야 항해 중 식수와 목욕물 등에 사용할 수 있다. 간혹 외항에서 정박이 길어지고 제때 청수가 공급되지 않아 절수할 때가 괴롭다. 배에서는 하루 4끼를 먹었다. 요동치는 뱃속이라 그런지 소화가 잘된다. 오전 7시에 아침, 11시에 점심, 오후 4시에 저녁, 8시에는 라면으로 야식을 즐긴다. 물론 선원 전부가 한꺼번에 식사할 수는 없다. 당직 시간이 식사시간과 겹치기 때문이다.터부처럼 선원들에게는 늘 마지막이라는 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이번 항차가 나의 마지막 항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충분히 고독했고 충분히 사선을 넘나들었으니 이젠 좀 육지에서 나를 돌아보고 싶었다. 보통 미국 서부지역에서 한국까지 보름 정도 소요된다. 그런데 캐나다 밴쿠버를 출항, 인천을 향하여 일종의 지름길인 북태평양 항로를 택해 항해를 시작한 지 일주일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 북위 49도 동경 177도 지점이 아닌가 싶다. 이제 일주일 정도만 더 순항하면 고국에 입항한다는 설렘도 잠시 1982년 12월 3일, 어제 종일 시야를 가리던 농무가 걷히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아침부터 갑자기 풍랑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 지점은 자주 해난사고가 발발하는 곳이었다. 몇 년 전에도 선원 28명이 수장된 곳이기도 했다. 뉴스 같은 데서 해난사고 후 화면 속에 비친 가족들의 절규를 들어보면 꼭 마지막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이번에 마지막으로 귀국하면 배 생활 청산하고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려고 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고" 가족들의 울부짖음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왜 마지막일 때 꼭 이런 슬픈 일이 벌어지는가. 나는 무슨 주술이나 미신 같은 이런 것을 믿지 않으려 했지만 보란 듯이 내게도 이런 시련이 닥쳤다. 파도는 진정되기는커녕 미친 듯이 날뛰었다. 다행인 것은 똥배인 코리어호와는 달리 일본 배인 후지야수호는 그리 오래된 배도 아니고 기관 고장도 드문 믿을만한 배였다. 하지만 그동안 경험했던 것보다 더 광포한 파도를 만나니 예의 그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롤링과 피칭, 브로칭, 항해에서 이 단어들을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배가 물 위를 항해하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수 없고 그 흔들리는 방향에 따라 앞뒤로 흔들리는 피칭, 옆으로 흔들리는 롤링, 뒤에서 파도를 받는 브로칭, 이 세 가지 바다의 불청객이 늘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여우를 피하니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풍랑이 날뛰기 시작했다. 잠자던 파도가 깨어나 배의 옆구리를 때려 배가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rolling)'이 찾아온 것이다. 원래 선박은 웬만큼 옆으로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이 있다. 복원력 때문이다. 물결이 약한 보통 때에도 삼사도 정도의 좌우 롤링이 있다. 이 정도는 해상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못 준다. 십도에서 이십도 정도의 롤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십중팔구 뱃멀미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롤링 각도가 복원력의 한계치를 넘나드는 경계선에서 왔다 갔다 했다. 내가 경험한 최고 롤링 각도는 거의 삼십 도에 가까웠다. 침실에 누워있는 몸을 양팔과 다리로 버티지 않으면 침대 밖으로 쓰러질 정도의 심한 롤링이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때 삼각파도나 피칭, 브로칭(선체 중앙이 파도의 마루나 파도의 오르막에 위치함으로써 급격한 선수 동요가 발생하여 선박이 전복될 위험이 있다)이 겹치면 바로 침몰하기에 노련한 선장은 파도의 방향을 잘 파악해 그때마다 선박의 선수를 돌려 횡파를 맞지 않게 노력한다. 그러나 예측불허의 대형 횡파를 맞을 때가 있다. 그때는 천운에 모든 걸 맡길 수밖에 없다. 사십도 정도까지 기울어지면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한다. 침몰 위기에 빠지니까.성난 파도의 길이는 족히 이삼백 미터는 되어 보였다. 파도가 높은 정점에 이르렀다가 다시 정점이 되는 파장의 늪에 빠지는 순간에는 백 미터의 후지야수호도 마치 종이배처럼 파도에 휘청거렸다. 파도가 저점을 향해 내려가자 우리 배도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쳤다. 여기서 다시 위로 솟아오르지 못하면 영락없이 우리는 침몰하고 마는 것이다. 언뜻 보니 배가 보이지 않는다. 솟아오를 힘이 없는 건가. 공포감이 확 몰려왔다. 이제 이대로 수장되는 건가. 여기서 허망하게 죽는구나 이제 일주일만 더 항해하면 그리운 고국에 입항할 수 있는데...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위로 솟아오르는 파도에 떠밀려 서서히 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휴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선수가 바다에 처박혔다. 이른바 '피칭(pitching)'이 시작된 것이다. 진퇴양난이었다.H선장은 노련하고 침착한 분이었다. 보지 않아도 선장은 연신 파도와 선수의 방향을 파악해 배의 복원력을 지키기 위해 스타보드(우현으로), 포트(좌현으로)를 숨 가쁘게 외치며 안간힘을 썼을 것이고, 조타수는 선장의 명령에 복창하며 부지런히 방향타를 돌렸을 것이다. 나는 더는 파도를 볼 자신이 없었다. 창을 커튼으로 가렸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언제든 SOS를 타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설사 SOS를 누가 수신한들 이 황천을 뚫고 구조해 올 수도 없을뿐더러 요행히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벌써 얼어 죽어 있을 것이었다.기도를 들어주신 것일까. 만 하루를 파도와 사투를 벌이고 나자 그 이튿날 다소 그 세력이 약해졌다. 오전 7시, 식사시간에 3항사가 하는 말인즉 어제 하루 꼬박 파도와 싸운 배는 거의 제자리에서 맴돌았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교회를 다니던 친구가 출항할 때 손에 쥐여준 성경책을 잡히는 대로 펼쳐 놓고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라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도를 기억한다. 왜 살려만 주신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했는지 왜 그런 기도가 나왔는지...... 바다여 고맙고 또 고맙다. 그대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 인도양, 태평양, 대서양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당신의 땅에 무상으로 집을 짓고 그것도 모자라 그대를 마음대로 부려 이만큼 일가를 이루어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딸까지 얻었으니 다 그대 덕분이다. 내 비록 어느새 시니어가 되었어도 마음만은 힘줄이 불끈 솟던 20대 선원 시절 못지않구나. 내 열심히 남은 생을 살아 기회가 된다면 크루즈를 타고서라도 다시 그대를 만나러 가고 싶다. 그대여. 검었던 내 머리가 세월의 백파 앞에 희게 센 것처럼 그대의 얼굴도 거센 풍랑 앞에 주름이 늘고 많이 늙었겠지. 그러나 친구여. 우린 서로의 냄새만으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대여 부디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잘 있게나.

2020-07-20 18:33:52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다시 돌아온 유월/ 장타관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다시 돌아온 유월/ 장타관

1. 프롤로그이 글은 한 가정의 책무를 다 하기 위해 평생 동안 지게의 밀삐 사이에 목을 넣고 살아온 한 아버지의 애환을 그린 이야기다. 우리 가족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내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했던 사실들과 부모님과 함께 지난했던 모진 삶을 내가 기록한 것이다. 대를 잇기 위해 아버지는 고향을 버리고 터를 찾아 일가친척 하나 없는 타향에서 살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타향에서 일제의 징용대상자가 되자 부산으로 가서 몰래 밤배를 탔다. 부관 연락선이 닿은 시모노세키에서 화물을 지게로 나르는 노무자가 되어 외국 생활을 했다. 해방이 되었고,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 해 여름 경찰관이 아버지를 잡아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그날 밤 아버지는 유학산 전쟁터에 투입되었다. 밤낮이 따로 없는 전장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 탄약을 지게에 지고 오르내렸다. 몸이 쇠약 할대로 쇠약해져 더 이상 쓸모없는 몸이 되자 군은 아버지를 풀어 주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한 그날 밤 아버지와 주고받은 지게부대 실상은 내 평생 아버지와 마주했던 가장 긴 시간이었다.2. 터열여덟 동갑으로 아버지와 결혼하신 어머니는 일곱 아이를 낳아 차례대로 모두 홍진으로 보내고 이어 누나가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작심한 듯 손주 아이 이름을 죽지 말라고 '돌이'라고 지었다. 내 사촌 중에도 '돌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 둘이나 있다. 할아버지는 그리해도 불안하셨는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셨다. 너희들은 여기서 살지 말고 고향을 떠나 어디든지 가서 아이나 잘 키우라고 당부하셨다. 아버지는 조부님의 말씀에 따라 누나가 태어난 이듬해 수성면 범물동에서 대구부 금정 지금의 태평로 2가로 이사했다. 그러나 막상 가서 살아보니 집과 먹을 양식은 해결되었으나 쓸 돈이 없었다. 그전에 범물동에서 살 때는 소깝이나 장작을 해서 소구루마에 싣고 남문시장에서 팔아 해결했으나 이제는 산도 멀고 소도 없는 처지에 전과 같이 하실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세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어디라도 가서 품을 팔았다. 농사일과 땔나무를 해서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르내리는 일은 일상의 일이었기에 힘으로 하시는 일은 만만했고 겁이 없었다. 그 당시에 동네 부근에서 제일 높았던 농아학교 3층 신축 공사장에서 여러 달 동안 지게질을 하며 건축자재를 운반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대구역 서쪽 도로변에 있었던 넓은 대구역 화물 하치장에서 대구역을 들어오고 나가는 화물의 상하차 일을 오래도록 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대구역으로 버스를 타고 갈 때 보면 언제나 하치장 마당에는 파손된 돌가리와 횟가루가 늘 여기저기 흩어져 허연 가루 때문에 마당은 늘 희뿌였었다. 아버지는 이런 일거리가 연속적이고 장기적으로 있지 않아서 이곳에서 만족하지 못하시고 더 많은 일거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오래도록 일을 하고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객지에 가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징용 대상자에 이름이 올라 그 명단에서 지울 수가 없게 되자 "집에 급한 일이 생기면 우체국에 가서 일본으로 전보를 쳐라" 하고는 부산항에서 부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한 아버지는 그곳에서 부두 노동자가 되었다. 임금 수준은 높고 물동량이 많아 오래 머물 작정을 하시고 일본 주소를 어머니에게 보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신 지 몇 달 후 어머니는 혼자 집에서 나를 낳고(1939년) 일본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전보를 쳤다. 아버지는 아들이 보고 싶었는지 일본 생활을 급히 청산하고 가방 하나만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가 들고 온 가방 안에는 작업복 몇 가지와 내 머리를 손수 깎을 일본제 바리깡, 유성기 바늘이 가득 든 주석 케이스 한 통이 있었다. 그 바리깡은 아버지가 오신 후부터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머리를 깎은 보물이었다. 지금까지도 반짝반짝하는 이 보물을 내가 보관하고 있다. 아들자식 하나 없이 딸만 셋을 두셨던 외조부님은 자신의 원을 풀어준 맏딸이 너무 좋아 자신의 일인 양 무척 기뻐하셨다. 내가 태어나고 한 칠이 지나자 외조부님은 딸네 집으로 오셔서 외손자 이름을 직접 지어야겠다고 하셨다. 도랑만 건너도 타관인데 범물동에서 여기까지 도랑을 몇 개나 건넜는데 하시며 두 타관 세 타관도 더 되겠다고 즉석에서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타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아버지는 내가 아직 넘어야 할 죽음의 큰 산이 버티고 있기에 출생신고는 미루고 계시다가 내가 제구실을 무사히 치르자 태어난 지 4년 후 출생신고를 했다. 그 기간 동안 어머니는 얼마나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오셨을까. 누나 역시 출생 신고한 그해 대구달성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식 성과 이름을 받고 공부했다. 누나는 해방이 된 그해부터 자기 본이름을 찾았지만 그 이름 때문에 늘 불평했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는 집에 와서 더 심하게 불평하더니 드디어 공부하기 싫다는 말까지 엄마에게 해댔다. 선생님들이 시간마다 바뀌어 들어오시면 그때마다 부르는 이름 때문에 반 친구들의 놀림에 괴로워했었다. 누나는 수시로 이름을 바꿔달라고 했다. 부모님은 딸을 살릴 걱정만 했었지 속마음을 몰랐고 누나는 누나대로 부모님의 마음을 몰랐다. 그 후 동생이 태어나자 이름을 일찍 짓고 출생신고도 곧바로 했다. 후일 내가 어머니에게 동생 출생신고는 왜 그렇게 빨리했는지 물어보니 한 사람 몫이라도 배급 식량을 더 많이 타려고 그랬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온 배급식량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이름만 식량이지 사람이 먹을 식량은 아니었다.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아프고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어머니가 배급이라고 타 오신 것은 콩깻묵이었다. 콩기름을 짜고 나온 깨묵을 얼마나 습하고 더운 창고에 두었던지 시퍼런 곰팡이가 콩쪼가리마다 붙어 여기에서 뿜어내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변질된 옥수수도 같이 나왔지만 그것도 그랬다. 나는 아버지가 고향에서 가져오신 보리쌀과 보리 속 등겨로 만든 개떡으로 끼니를 때웠다.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 외가에는 머슴이 징용으로 붙잡혀가고 그해 한 달 간격으로 외증조부와 외조부 두 분이 연달아 돌아가셨다. 외가에는 외증조모님과 외조모님 두 분 할머니만 남아 넓은 집을 지키고 계셨다. 농토는 일할 손이 없어서 그대로 놔두고 남자 세 분이 갑자기 없어진 외가에는 두 할머니들이 손을 놓고 탈기상태로 계셨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농사일을 척척 두 량할 줄 모르는 두 할머니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3. 집외가 동네의 총대 어른이 보다 못해 아버지를 불렀다. 자네가 처가 농사도 지어주고 수성들에 있는 전답을 팔아 여기 와서 대토하고 살라고 했다. "자네가 낯선 금정에서 그대로 있다가는 반드시 징용 간다. 대동아전쟁 말기라서 사람이 없어서 왜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난리인데 거기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자네는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다"고 했다. 처가로 들어오면 왜경에게 "자네가 없으면 이 집에 농사지을 사람이 없으니 사위라도 불러들여 농사를 지으면 공출도 받아낼 수 있다고 잘 이야기해서 징용에 안 가도록 빼주겠다"고 했다.아버지는 처가로 들어간다는 대목에서 며칠을 망설이시다가 결국 어머니의 재촉과 자신의 목숨을 보장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모두에게 옳다고 생각하시고 금정 집을 처분하고 처가로 들어갔다. 그 후 두 해가 지나고 해방을 맞았다. 아버지는 고향들에 두고 온 농토를 팔고 집 판 돈을 합하여 외가 곳에 대토하셨다. 어머니는 친정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안 계시는 집안에서 딸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전보다 다르게 나를 더 귀하게 여겼다. 수시로 절을 찾아 아들의 명이 길도록 기도드리고 해마다 돌아오는 삼짇날 새벽에는 맑은 금호강 물가에서 정갈한 음식으로 상을 차리시고 동해바다 용왕님 서해바다 용왕님 남해바다 용왕님을 청하시고는 소지에 불을 붙여 하늘 높이 손바닥으로 연달아 받쳐 들며 아들이 일찍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집에 온 첫날 아침 동생이 "오빠가 군에 가고 난 뒤부터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밥 한 그릇을 따로 담아 상을 차리시고 오빠의 무사귀환을 위해 빌었다"고 했다. 내 나이 20세가 넘어가자 어느 날 내가 있는 앞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장가들면 논 몇 마지기라도 주면 먹고사는 것은 걱정을 안 해도 되겠제?" 하셨다. 순간 그 말을 받은 어머니는 "논 열 마지기가 골병 열 마지기다. 나는 그렇게 못하느마. 그래 키울 생각 손톱만치도 없구마. 꼴란 그거 가지고 야가 천 날 만 날 땅이나 파다가 말겠다. 골병드는 농사는 안 시킨다. 사내는 눈을 밝혀야지."하시고는 "여자로 태어나서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더마. 내 친정아버지가 내가 여자아이라도 나를 일본에 공부하러 보냈다면 지금 나는 이렇게 안 산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사내아이를 무척 좋아하셨다. 어머니 자신도 다음 세상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 하셨다. 내가 장가들고 첫딸과 아들 둘을 두었을 때 일이었다. 아내가 넷째 아이를 혼자 병원에 가서 출산하고 바로 집으로 왔길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처가 해산하고 집에 와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며느리 회복 구완 좀 해달라고 청을 했다. "뭐 낳았노?" 어머니는 사내아이인지 딸아이인지 몹시 궁금했다. 어머니에게 바른말을 하면 안 오실까 봐 이렇게 말씀드렸다. "와 보소 보시면 알깁니다" 어머니는 전화기를 놓자마자 택시를 타고 오셨다. 집안으로 들어 오시자마자 아이의 아랫도리에 덮인 기저귀를 확 당겨보시고는 "꼴난 가시나 낳았다고 와 날 부리노? 니 사주에는 아들이 셋인데 와 딸 놓노? 힘은 똑같이 드는데."하시고 어머니는 그날 저녁 미역국 한번 끓여주시고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셨다. 훗날 처가 "어머니도 같은 여자인데 너무 하십니다"하자 "나는 나도 싫고 가시나도 싫다 나는 사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하시면서 "남자가 없는 집은 남이 만만히 보고 기가 죽은 집이야 남들이 우리를 업신 여긴다"라고 하셨다. 그 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원대동 어머니의 생가는 어머니에게는 낙원이었다. 어머니 혼자 계시는 집이 동네 할머니들에게는 마음 편한 좋은 놀이터였다. 십 원짜리 민화투를 치시다가 눈과 감각이 어두운 할머니가 두 장을 한 장이라고 생각하시고 가지고 가면 "이 할마시가 와 속이노?"하시면서 한참 시끄러웠다. 또 화투를 치시다가 앉아있기가 버거운 할머니들에게는 그때 아무 데나 눕기 편하시라고 어머니가 스티로폼으로 만든 십여 개의 베개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어떻게 누워있어도 흉보는 이가 없어 아침만 되면 허리가 구부정하신 안노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어머니 집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일요일이 돌아오면 치아가 성치 않는 할머니들이 잡숫기 쉽게 늘 콜라와 과자 빵이나 뻥튀기를 들고 어머니 집으로 갔었다. 그때 나를 보신 할머니들은 참 좋아하셨다. 그렇게 일상이 변함없이 여러 해가 흘러갈 쯤 어느 날 어머니 친구 한 분이 나를 부르셨다. "낮에는 자네 엄마가 우리하고 그럭저럭 잘 지내는데 눈이 문제다. 삼시 세끼 잡수시기가 걱정된다."고 하셨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내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그냥 혼자 계시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어머니에게는 눈을 수술해 드리겠다고 약속하고는 내 집으로 어렵게 모셔왔다. 화장실에 자주 가시는 어머니를 위해 우리 내외가 자는 방에 같이 주무시게 했다. 방안에 화장실이 있어서 어머니에게는 참 편했다. 어두운 밤에 멀리 모퉁이를 돌아 화장실을 가던 수고도 덜고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넘어지실까 염려할 일이 없었다. 그럭저럭 보름쯤 지났다. 어머니는 새벽 4시만 되면 꼭 일어나시고는 혼잣말로 "밤이 지겹다. 해는 와 빨리 안 뜨노?. 답답해서 죽겠다."큰소리로 말씀하시고는 담배를 피우셨다. 그럴 때마다 우리 내외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이불을 당겨 덮고 눈과 귀를 막았다. 내가 퇴근해서 집에 오니 아내가 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내게 전했다. 어머니가 자기 집으로 가시려고 하시고는 "그놈 자식 담배도 몬 푸게 하고 나는 그기 심심초인데 우얄라고 그 말하노? 바람 잘 통하고 시원한 내 집에 갈란다. 문이라 카는 문은 다 닫고 답답해서 못 살겠다. 이 집은 절간같다. 이런 집에서 내가 혼자 우째 사노 감옥소가 따로없다. 여가 감옥소지 여기에 친구가 있나 길이라도 알면 내 혼자 갈낀데."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그 무렵 어머니의 눈에 백내장이 더 심해져서 손자가 근무하는 병원에 가자고 말씀 하시길래 그리로 같이 모시고 가서 수술도 해드렸다. 우리 집으로 오신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세상이 훤하다며 빨리 내 집으로 보내달라고 이번에는 나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어찌해야 좋을까 그냥 우리 집에 계시다가 우리가 없는 사이 집을 나가시면 행방불명이라도 되지 않을까 또 교통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그 후 어느 일요일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달성공원으로 갔다. 답을 찾고 싶었다. 그 시간에 사육사가 동물들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가봤다. 구루마에 실려 있는 것을 보니 보통 사람보다 더 잘 먹여주는 걸 보았다. 내장을 제거하고 털도 말끔히 뽑고 동물들의 입이 찔릴까 봐 주둥이와 발톱까지 제거하고 깨끗이 씻은 통닭과 그때 바나나 한쪽에 2~3천원 하던 때에 바나나와 사과, 수박, 배추, 얼음 그밖에 다른 과일들도 수북했다.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 생각했다. 과연 저 짐승들이 저렇게 매일 먹는 먹이를 정량씩 가만히 앉아서 얻어먹고 외부의 적도 없이 편안하게 잠이나 자고 사는 것이 행복할까 아니면 며칠씩 굶더라도 넓은 대자연 속에서 눈비를 맞더라도 자유롭게 뛰어다니다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골라잡아 먹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잠을 자며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 아닐까. 어머니의 말씀마따나 자기가 아는 길로 가고 싶은 곳에 가시기도 하시고 잡수고 싶은 것 잡수시고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낯익은 친구들과 같이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자 다시 어머니를 빈집으로 보내드렸다. 우리 집으로 오실 때에는 느릿느릿 오시더니 빈집으로 돌아가실 때에는 걸음이 더 빨랐다. 빈집에 들어서자 내게 한 말씀하셨다. "니가 없었으면 누가 이래 해주겠노. 또 느그 집에 가자고 하지는 마래이"하시면서 무척 좋아하셨다.4. 전쟁월요일이었다. 그날은 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모여 아침조회를 하는 날이었다. 웬일인지 아침종도 치기 전에 운동장에는 선생님들이 우리보다 먼저 나와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죄지은 학생처럼 고개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우리 반 줄을 찾아 맨 뒤에 붙어 섰다. 잠시 후 종소리를 듣고 학생들이 모여들자 체육담당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줄을 맞추고 마주보고선 선생님과 허리 굽혀 인사했다. 바로 다음 교장선생님이 빠른 걸음으로 교단에 올라오셨다. 목이 잠기시는지 그날따라 안 하시던 잔기침을 두 번이나 하시더니 "어제 새벽 4시에 북한 괴뢰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쳐들어왔다"라고 하시면서 용감한 우리 국군들이 그들을 격퇴하고 있으니 학생 제군들은 아무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어제 일어난 전쟁을 그때까지 까맣게 몰랐던 나는 처음 듣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몰라서 놀라거나 무섭지도 않았다. 더구나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기에 그 말씀대로 며칠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날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무엇 때문인지 그전같이 도중에서 놀지 않고 똑바로 왔다. 그때 우리 동네 60여 호 중 라디오가 있었던 집은 두서너 집뿐이었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일요일 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부산으로 피난 가고 없었다. 참으로 캄캄한 시절이었다. 집으로 와서 아버지에게 학교에서 들은 대로 말씀드렸더니 아 그래 하시고는 별다른 말씀도 없이 늘 하시는 대로 수금포를 어깨에 메고 멀리 떨어져 묘지가 있는 말가오지기(한마지기 반) 논으로 가셨다. 만약 지금처럼 매스미디어가 시시각각으로 세세하게 전쟁의 참상을 TV나 휴대전화 화면에 담아 보냈다면 전후방 없이 전국에서 생난리 북새통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그때 그 시절이 오히려 혼란을 크게 잠재우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전쟁이 일어나고 며칠이 지나도 동네 어른들은 늘 하시던 대로 일상생활을 하셨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새 소식을 들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선생님들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들어와 있던 걱정이 희미하게 우리 앞에 하루가 다르게 다가왔다. 전쟁의 파문이 거리에서부터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다. 평시에 보지 못한 외국 군인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을 태운 국방색 지프와 트럭들이 바쁘게 오갔다. 말씨가 다른 윗녘 사람들이 섞이더니 차츰 그들이 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우리 마을에도 동네 청년들에게 징집 통지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우리 마을에도 술렁거리는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징집 통지서를 받은 청년들은 그들의 부모와 형제자매, 친척들과 함께 마을 밖 오래된 당산나무 밑에 가서 전장에서 무사히 귀환하기를 빌면서 절을 하고는 그 나무 주위를 돌았다. 많이 돌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다고 많이 돌고 일선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암만 많이 돌아도 죽은 청년의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가자 전쟁에 겁이 나거나 꾀가 많거나 귀한 아들들은 통지서를 버리고 자기 집 어디에 땅을 파고 숨어 지내다가 더러는 전선에 나가지 않았다. 전쟁이 치열해지고 징집 자원이 줄어들자 경찰관은 아예 처음부터 징집 명단에서 빠졌거나 징집 통지서를 받고도 나가지 않은 집을 불시에 다시 가서는 미구 같이 찾아내어 잡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철없던 우리들은 학교에서 집으로 일찍 보내주는 게 정말 좋았다. 한참 자라나던 나이에 우리는 먹어도 먹어도 자꾸 먹고 싶었다. 집에 일찍 가도 어머니는 밭에 나가셔서 집에는 안계셨고 우리 동네에는 점방 하나도 없던 시절이라 보리밭으로 갔다. 익은 것은 제쳐두고 아직 덜 익은 파란 보리 싹에 먼저 깜부기가 된 이삭을 뽑아 파란 보리 싹에 문질러 놓으면 대략 일주일 후면 모두 깜부기가 되어 먹을 수 있다. 까맣게 깜부기가 된 이삭을 뽑아 그대로 먹기도 하고 구워 먹기도 했다. 구워 먹는 맛이 좀 나았다. 그후에도 장난삼아 여기저기 멀쩡한 보리 싹에 깜부기를 문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변하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금호강에 나가 빗자루로 숫잠자리를 잡아 호박꽃으로 암놈같이 보이게 분장하고는 실에 매어 날리며 숫놈들을 유혹했다. 손가락 사이에 세 마리씩이나 끼워도 모자랄 정도로 많이 잡았다. 빨리 집에 와서 구워 먹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세상을 조금씩 익히며 살아가는 길을 스스로 배워나갔다. 나무 위로 빨리 올라 가기도 했고, 일찍이 헤엄치는 것도 배웠고, 물밑으로 잠행하여 친구들의 다리를 붙잡고 놀래 키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훗날 내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어 내 앞에 닥친 죽음을 여러 번 비켜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달서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열두 살이었다. 부근에 있던 달성국민학교에는 학생들이 불어나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공부했다. 그로 인해 새로 생겨난 학교가 우리 학교였다. 대구 달서국민학교다. 나는 해방 후에 들어간(1946년) 순 한글세대이다. 젊은 선생님들이 잇달아 전장으로 나가시고 담임선생님이 없어진 반은 여선생님 반으로 합쳐 공부했다. 자꾸 남자 선생님들이 전장으로 나가시자 세반을 한 반으로 만들어 공부하기도 했다. 우리는 야외로 나가 공부했다. 키 큰 학생이 흑판을 둘러매고 반장은 분필과 지우개 담당이었다. 지금도 거기에 서있는 날뫼(비산동)성당 부근이었다. 그 부근에는 그때 건물은 하나도 없었고 그저 평평한 산이었다. 수업은 늘 오전 수업만 하였다. 전쟁의 불길이 자꾸 커지자 우리 학교에는 군인들이 들어왔고 우리는 학교에서 약간 떨어진 철로가에 급조한 가교사로 이사했다. 가교사 지붕은 종이에 콜타르를 칠한 것으로 여름에는 몹시 덥고 겨울에는 추웠다. 얼마 안 가 우리 학교에 들어온 군인들의 부주의로 우리 학교는 모두 불에 타고 뼈대만 남았다. 우리는 불타는 학교를 애처롭게 보았고 여학생들과 여선생님들은 불타는 교사를 보며 울기도 했었다. 선생님들의 미련 때문이었는지 우리들의 졸업사진도 불타고 뼈대만 남은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찍었다.(보관) 그 후에도 후배들은 이 학교에 영영 들어가 보지 못했고 그 자리에는 지금의 경일중학교가 차지했다. 피난민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전선이 대구 부근까지 내려오자 그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조병옥 박사는 대구는 어떤 경우에도 사수할 터이니 안심하고 피난 가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 동네에는 갈 사람은 다 피난 갔고 우리들은 피난 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밤낮없이 내려오는 흰옷을 입은 피난민들은 안동치도로 걸어 내려와 그때 폭이 좁은 나무다리였던 팔달교를 건너 소구루마에 짐을 싣고 다니던 좁은 방천둑(지금의 신천대로)으로 밤낮없이 내려왔다. 그래도 우리는 마음이 타거나 조바심도 없었다. 도리어 엉뚱하게도 우리도 저렇게 소풍 가듯 피난 한번 가봤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피난민들은 걷다가 가족중에 힘겨운 사람이나 몸이 불편한 가족이 생겨나면 인근 마을 아무 집이나 같이 가서 봇짐을 풀었다. 우리 집에도 많을 때는 네 가족이 처마 밑으로 들어오기도 했었다. 그들은 비만 피할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들어왔다. 피난 가다가 식량이 떨어진 가족은 동네 빈집을 찾아갔다. 먼저 피난 간 집에는 다소나마 먹을 것이 남아있었다. 쌀, 보리, 소금, 된장, 간장 같은 먹을 것을 가져다가 돌 몇 개로 쌓은 바깥 부엌에서 냄비 하나로 조석을 해결했다. 철없던 나는 그게 그렇게 좋게 보였던지 우리도 피난 가자고 어머니에게 졸랐다. 피난민들이 등에 메고 온 보따리에서 먹을 것을 꺼내는 걸 보고 옷도 바꾸어 입는 것을 보니 우리도 빨리 그렇게 하고 싶어 어머니를 자꾸 졸랐다. "에이참, 이 자식 골천번도 더 졸라쌌네."하셨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는 큰장(서문시장)에 가서 광목 몇 자를 끊어 다섯 개의 걸망을 만드셨다. 그 안에는 생쌀 약간 마른 백찜떡(백설기) 두덩이, 양말 두 켤레, 여름옷 두벌, 미숫가루 한 그릇, 돈 약간, 성냥 한 통, 숟가락 한 개가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굶어 죽고 얼어 죽을 짓이다. 그해 7월 말이나 8월 초 무렵이었다. 대구 주변의 전세가 위중한지 부대 이동이 잦은지 키가 큰 이태리포플러에는 미군 병사들이 까만 비닐 피복이 덮인 통신선을 어지럽게 걸고, 끊고, 잇고 했었다. 다부동까지 내려온 북한군은 해가지고 사방이 어두워지면 매일 밤 대구역을 향해 벌건 불덩이를 날렸다. 나는 그 불덩어리로 무얼 맞히려고 그리로 날려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때맞추어 날아가던 그 불빛에 익숙해지자 지금의 불꽃축제를 보는 듯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다 그랬다. 어른들은 대구역 물탱크로 쏘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쏜 대 포탄은 하나도 거기에 적중되지 못했다. 다행이다. 만약 물탱크가 북한 대포에 맞아 터졌더라면 증기기관차에는 물이 없어 경부선은 마비되었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는 대포가 날아갈 시간인데도 불꽃이 날아오지 않아 오늘은 왜 안 쏘노, 빨리 쏘지 하면서 철없게 구시렁거리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철없는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시며 어서 방에 가서 자라고 하셨다. 그때 비슷한 시기에 우리만 당할 수는 없다는 듯이 지원군이 화력을 유학산 쪽으로 쏘기도 했다. 대구의 서쪽 와룡산 정상에는 언제 올라왔는지 밤마다 미군 탱크 여러 대가 일렬종대로 서서 북쪽을 향해 대포를 수없이 연달아 쏘았다. 멀리서 그 관경을 볼 때마다 마음이 든든했다.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던 다부동 유학산 전쟁은 날이 갈수록 더 치열해졌다. 그곳이 무너지면 대구가 적의 수중에 들어갈 위중한 시점에서 내가 살던 동네와 접해있던 일제가 만든 경마장에도 밤새 소리 없이 미군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L-19(잠자리비행기) 여러 대가 들어와 기수를 북쪽을 향해 서있었다. 가끔 비행기 몇 대씩 짝을 지어 뜨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어느 날 오후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비행기 한 대가 날아오르다가 튀어 나온 바퀴가 전깃줄에 걸려 다이빙하듯 공중에서 한 바퀴 돌다가 논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걸 보고 미국 비행기가 대단한 줄 알았는데 저렇게 가느다란 전깃줄에 걸려 넘어지는 걸 보고 힘이 없구나 참 안타까워했다. 이튿날 학교에 가다 보니 경마장 트랙에는 새로운 활주로가 생겨났다. 어제 떨어진 비행기가 울퉁불퉁하던 풀밭 활주로 때문이라고 판단했는지 밤새 그 자리에 구멍 뚫린 철판으로 쫙 깔았다. 비행기가 늘어나고 탄약고가 들어오자 미군들은 밤새 조립식 활주로를 건설했다. 어릴 때 내가 본 그 철판은 지금 예천 회룡포를 드나드는 뿅뿅 다리에 상판으로 쓰는 구멍 뚫린 그런 철판이었다. 어느 신문사 기자가 그걸 보고 신기한 듯 사진까지 찍어서 신문에 실었기에 나는 일부러 회룡포에 갔다. 그걸 보고 6.25 전사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다리를 밟아 보고 돌아왔다. 전쟁이 휴전되고 뿅뿅 철판은 건축현장에서 오랫동안 인부들의 안전한 발판 구실을 했다. 미군들의 수도 불어났다. 우리는 늘 철조망조차 없는 미군부대 옆길로 학교에 갔었고 마을 어른들도 그 길을 따라 시내 장으로 오고 갔다. 모를 심은 지 조금 지난 때이지 싶다. 모포기들은 모두 살아나서 꼿꼿하게 서있었다. 논에는 알맞게 물이 찰랑거렸다. 나는 집으로 오다가 무엇을 보고 검정 고무신을 논두렁에 벗어놓고 그리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우리가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 숱하게 버려져있었다. 나는 눈에 띄는 것은 모조리 주웠다. 어느 작은 봉지를 뜯어보니 맛이 아주 쓴 검은 가루도 있었다. 설탕 봉지도 있었다. 또 통조림도 있었다. 그 후에도 맨발로 또 그 논에 들어가니 거기에는 아주 예쁜 빈 유리병이 여러 개가 눈에 보이길래 얼른 주웠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가 즐겨 찾는 작은 코카콜라병이었다. 가까이 보니 허리는 가늘어 잘록하고 긴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 같았다. 처음 만져봐도 갖고 싶은 병이었다. 나는 그 병을 모조리 주워 집으로 가져왔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주운 빈 콜라병을 보여드렸다. 보시더니 참 참하다 어디서 주웠노 하시면서 다음에도 이 병이 눈에 띄거든 주워오라고 하셨다. 내가 무엇에 쓸려고 하는지 물어보니 참기름 병이나 들기름 병하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남은 것은 이집 저집 갈라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하셨다. 그 후도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콜라병을 많이 주워왔다. 그 병들은 우리 집에서 하나도 깨지 않고 오래오래 아끼며 썼다. 전쟁 중에도 미군들에게는 개인 생활시간을 주는지 해가 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빨가벗고 일광욕을 즐겨 했고 젊은 병사들은 우리가 보고 있는데도 거기를 잡고 자위도 했었다. 무더운 날 저녁이 되면 우리 동네 공동샘에 와서 빨가벗고 두레박으로 떠올린 찬물로 샤워도 했다. 그것도 모른 채 저녁에 샘터에 나온 부녀자들은 깜짝 놀라 기겁해서 도망가고 그 다음날부터는 그 샘으로 다시는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걸 언제 보셨는지 들었는지 "그놈들 사람들이 나댕기는데서 그 짓을 하다니 참 뻔치도 좋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수륙만리 떨어진 이국땅에서 이글거리는 죽음의 포탄이 시도 때도 없이 머리 위로 날아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앞에 그들은 한순간이나마 죽음의 공포를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끔씩 저녁이면 그들은 떼를 지어 우리 동네로 들어와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느릿느릿 돌아다녔다. 마당 한편에 모깃불을 피우며 온 가족이 살평상에 앉아 부채질을 하는 모습이 신기한 듯 카메라에 담고 또 담았다. 봄이 오면 하중도에는 유채꽃 축제가 열린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열리지 않았다. 6.25전쟁 때는 이곳이 포로수용소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950년 한여름이었다. 유학산 전투가 치열해짐에 따라 적 포로들이 갑자기 불어나기 시작했다. 군은 이 포로들을 수용할 마땅할 장소가 없자 임시로 노곡동 앞섬 같은 하중도에 전쟁 포로들을 수용할 군용 천막을 치고 잡은 포로들을 이곳에 수용했다. 집총한 헌병들은 둘러친 철조망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감시했다. 포로들은 수시로 군용트럭에 실려 들어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어디로 가는지 포로들이 많이 실려가기도 했다. 이때 포로들의 등에는 흰 페인트로 POW(전쟁 포로)라는 큰 글씨가 쓰여있었다. 그때 하중도는 완전한 섬의 형태가 아니었고 한쪽이 노곡동과 붙어있었다. 그 후 건축붐을 타고 모래의 수요가 급증하여 하중도의 한 모서리가 모래 파내기가 쉬워 파다보니 산과 떨어져 섬이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학생들은 일선 장병 위문편지를 자주 썼다. 나도 여러 번 썼다. 6학년 때이지 싶다. 어느 날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께서 저 혼자만 교단으로 부르셨다. 저는 영문도 모른 채 선생님 앞으로 나갔다. 편지 겉봉의 한쪽이 불에 타고 남은 누런 봉투 하나를 저에게 주셨다. 그 봉투는 봉하지도 않았고 봉해질 수도 없는 상태였다. 교장선생님은 봉투의 상태며 벌어진 내용까지도 설명하셨다. 조회를 마치고 우리 반으로 돌아온 나는 담임 선생님에게 드렸다. 선생님은 우리가 5·6학년이었을 때 2년간 우리 반 담임을 맡으셨다. 선생님은 우리 반 학생들이 다 듣도록 그 편지를 큰소리로 읽으셨다. 사실 나는 그 편지를 언제 써 보낸 편지의 답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하도 많이 쓰고 보내서 답을 써 보낸 장병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화랑 담뱃갑을 뒤집어쓴 간결한 답장에서 그는 탱크 운전병이고 서울의 어느 신문사 사장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 한번 만나 자라는 말이 맨 끝에 쓰여 있었다. 겉봉은 내가 써 보낸 편지봉투를 뒤집어 내가 적은 대로 학교 주소를 다시 써서 우리 학교 주소로 보내왔다. 그 후 그가 어느 산골짝에서 죽었는지 그의 편지는 영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전쟁은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게 우리에게 가까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정든 달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때 국가시험을 거쳐 대구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보니 5학년이 남아 있었다. 몇 달 지나 그 학생들은 어디로 가고 그해 6년제는 없어지고 중3년 고3년제가 되었다. 지금 대봉 파출소 동편 편창공장에서 가마니로 바닥을 깐 교실에서 공부했다. 중학교 다닐 때는 걸어 다녔다. 한 시간 반 걸렸던 원대동에서 대봉동까지는 어린 내게는 멀었다. 버스는 있기는 해도 출발지가 대구역이라서 거기까지 둘러 가느니 친구들과 나는 그냥 걸어 다녔다. 집에서 달성 국민학교를 지나 원대 건널목에는 수시로 딸랑딸랑하며 차단기가 내리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서 기차 탄 사람들에게 무심코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자갈마당을 지나 달성 공원 앞 네거리에서 지금의 오토바이 골목을 보면 개울이었다. 대구 시내 여러 집에서 쓰고 버린 시커먼 물이 작은 개울이 되어 흘렀다. 나는 그 개울 동편 인도로 가고 오고 했고 건너편에는 일본인들이 살았던 크고 넓고 정원수가 있는 좋은 집들이 있었다. 큰 비가 내리는 여름에는 인도와 그 서쪽 일본 집들 사이를 걸친 다리는 여름철마다 몇 개씩 늘 떠내려갔다. 그뒤 다리는 트럭의 프레임 두 개를 연결하여 견고한 다리가 되어 오래 사용했다. 지금 그 길은 대구시가 복개하여 오토바이 골목이 됐다. 동산 파출소를 지나 약전골목에 가다 보면 집집마다 멍석위에 생약재를 널어 말리는 약 냄새가 많이 났었다. 또 약전골목 중간에는 유명한 대남약방에서 임신부들에게 진맥을 잘해 뱃속의 아이를 남녀인지 구별을 했다. 훗날 어머니는 거기 가니 너를 정확히 진맥했다고 하셨다. 중앙 파출소를 지나 삼덕 우체국까지 가서 우측으로 건너면 사대부고, 대구상고, 가다쿠라 잠사 공장까지 가는 길이다. 뒤에 대구중학교는 지금의 학교로 이사하여 거기서도 마루판을 놓고 가마니를 깔고 공부했다. 아침마다 삼덕 우체국에서 우리 학교까지 가는 길에는 수많은 미 공군 장병들과 미팔군 장병들이 늘 우리와 마주쳤다. 아침마다 아무리 마주쳐도 얼굴을 분간할 수 없었다. 후에 내가 카투사에 있을 때 미군들이 도로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교 시에 원대 건널목을 지날 그때 희한한 광경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도로와 철로를 겸용하는 미군 특수 트럭이 건널목까지 와서는 철도 위로 올라가 양쪽 바퀴를 철로 위에 정착시키더니 작은 바퀴를 내려 서울 방향이나 부산 방향으로 달려갔다. 정식 정거장에서는 철로와 승객이 타고 내리는 높낮이 때문에 철로 위에 올라가기가 불가능했었다. 그 트럭은 정거장이 아닌 건널목만 있으면 어느 쪽이든 운행이 가능했다. 그래서 급박한 전쟁 중에는 시간이 절약되어 편리하겠다고 생각했다. 대구가 위태위태한지 어느 날 새벽에 경찰관이 우리 마을에 와서 구장도 찾고 소임도 찾았다. 그리고는 이 동네 집집마다 키우고 있는 가축들을 모조리 잡아죽이라고 하면서 소임을 시켜 동네를 돌며 크게 외치라고 하고는 급히 다른 마을로 갔다. 구장은 적군이 들어오면 가축들은 적군의 영양식이 될 것이고 개는 총소리에 놀라 미쳐서 사람들을 문다고 했다. 그 당시 농촌지역에서는 집집마다 개를 비롯하여 한 가지 이상 가축들을 길렀다. 개는 집도 지키고 돈도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싸움에서 정든 가축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주인들의 손에 무참히 죽었다. 사람의 피 냄새가 나기 전에 가축들의 피가 온 마을을 적셨다. 그중 소와 말은 덩치가 커서 너른 장소와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우리 집 사랑채와 담 사이에 알맞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밤낮을 구별 없이 그 짓이 벌어졌다. 소머리를 오함마로 치는 큰 일은 동네 소임이 늘 맡았다. 다른 일은 여러 어른들이 손을 보탰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동네 사람들에게 칼이 가는 대로 한 뭉텅이씩 나누어 주었다. 사람을 죽여야 계급이 오르고 더 많이 죽이면 훈장도 타던 그 시절 가축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는 몇 달 전에 태어나 풀밭에서 우리들과 폴짝폴짝 뛰던 귀여운 송아지도 우리 집으로 왔다. 어린 송아지는 며칠 전 죽은 어미의 피 냄새를 맡았는지 우리 집 대문간 문턱에 두 다리를 앞으로 뻗치며 음메 음메 제 엄마를 부르다가 성난 소임이 내려치는 오함마에 맞아 눈도 감지 못하고 짧은 순간에 생을 마감했다. 구경 오신 동네 어른들은 가져갈 생각은 없는지 먹고 싶어 그랬는지 한쪽에서 이미 불을 피우며 새끼 고기가 보드랍다고 연신 입속에 넣었다. 이때 누가 나를 보고 "니는 왜 안 묵노? 빤히 보고만 있노?" 하셨다. 어른들의 성화에 멋모르고 처음으로 구운 송아지 고기를 먹었다. 맛이 없었다. 익지 않은 과일이 제 고유의 맛을 채우기 전에 맛이 없듯 송아지도 다 자라야 맛이 나는구나 하며 혼자 속으로 짐작했었다.5. 징집청년들이 징집되어 정든 가족과 이별하고 간 마을에는 개 짖는 소리마저 사라지자 마을은 대낮인데도 조용했고 간간이 전쟁의 두려움이 마음속으로 기어들었다. 그래서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불안했다.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긴 이야기는 않고 간단한 수인사만 하고 지나갔다. 전쟁이 난 그 해 여름이었다. 구장의 음모가 그날 오후 우리 집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 일찍 논에 가셨다. 심어 놓은 벼논에 두벌 논매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따로 떨어져 있던 두마지기 되는 논을 혼자 손으로 다 매시고 점심때가 지난 오후에 집으로 오셨다. 늦은 점심을 잡수시고 사랑채 툇마루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그때 구장이 밖에서 놀고 있는 나에게 "느그 아부지 집에 있나?"하고 물었다. 철이 없고 꾀도 없이 순진하기만 했던 나는 "지금 주무시고 계시는데요."했다. "어디서?", "사랑채 툇마루에서예."하는 순간 옆에 서 있던 경찰관이 구장을 부르며 아버지가 도망갈까 봐 자기가 섰던 그 자리에서 지키게 하고는 나를 앞세우고 사랑채 쪽문으로 들어섰다. 마루에서 목침을 베고 주무시던 아버지를 보고는 "이 사람이 느그 아부지가?"했다. "예" 경찰관이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다. 잠결에 일어나신 아버지는 전란통에 경찰관이 왜 찾아왔는지 짐작이 가는지 그를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 옷을 입으시오." 아버지는 일어나 흰 무명바지와 저고리를 입으시고 흰 고무신을 신었다. 어서 갑시다라는 경찰관은 어디서 나온 누구이며 아버지의 인적사항은 기록하지 않고 어디로 무엇 때문에 잡아가는지조차 설명을 하지 않았다. 경찰관은 아버지를 앞세우고 우리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골목길을 돌아가실 때 고개를 한번 돌려 저를 보시고는 그 길로 어디론가 경찰관과 가셨다. 그때 아버지 연세는 42세였다. 서문시장에서 장을 보시고 해거름에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선 채로 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까물어쳤다. 좌우로 뺨을 몇 대 맞고 깨어나신 어머니는 애가 타서 본 정신이 아니었다. 이튿날부터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쫓아 다니셨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신의 힘에 의지하고 싶었다. 용하다는 점받치를 다 찾아 다녔지만 전쟁중이라서 그런지 그들도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으면 간조증이 나서 참소리나 헛소리도 다 듣고 싶었다. 그때 대구에서 제일 용하시다는 점받치는 장참봉과 이참봉이었다. 어머니는 거기 갈 때 마다 "총 들고 전쟁터에는 안갔으니 안죽느마. 곧 올끼구마."하는 들으나마나한 그 한마디 소리도 붙잡고 싶어 늘 거기에 갔었다. 그곳에는 전쟁 통에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손님들이 방마다 늘 바글바글하다면서 그 사람들로부터 무슨 소식이라도 듣고 싶어 거기에 있다가 해거름에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었다. 어머니는 그날부터 우리 집 대문을 열어 두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구장과 골목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안하시고 받지도 않았다. 그날 경찰관과 구장은 아버지와 같은 또래 친구들을 보고서도 그대로 지나치고 우리 집으로만 곧장 온 것은 누군가가 처음부터 콕 집어 아버지 혼자만 데리고 간 사실에 골이 나서 어머니는 "그 놈이 우리하고 무슨 원수가 져서 그랬노 얼마나 대접을 잘 받았으면 그랬노 잘 묵고 잘 살아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이 야시 같은 놈아!" 라고 고함쳤다. 그날 이후 경찰관은 우리 마을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는지 어느 날 군용차량과 내려오는 피난민 사이를 비집고 혼자 다부동 고개로 아버지를 만나러 걸어 가셨다. 그러나 동명에도 못가 군인들의 제지로 돌아오고 말았다. 전쟁터에서 여자의 적은 남자라는 말을 듣지 못했을까 그때 만약 적군에 붙잡혀 갔더라면 온갖 못된 짓을 다 당하고 끌려 다니다가 그들이 이용 할대로 다하고 나면 자기네 정보를 결국에는 전한다는 이유로 총살까지 당해야만 끝이 났다. 어머니는 식구들의 일이라면 어디라도 가서 자기 눈으로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일정시대에는 아버지가 동촌비행장 활주로 공사로 여러 달 동안 보국대로 거기 있을 때였다. 동촌 비행장으로 가는 길을 몰라 내 손목을 잡고 물어물어 철길을 따라 동촌 비행장까지 걸어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나는 게다를 신고 가다가 철길에 깔린 자갈에 여러 번 걸려 넘어진 기억이 지금도 난다. 또 내가 군에 있을 때는 근무하던 부대까지 찾아 부산까지 오시기도 했다. 그때 동료들은 오랜만에 포식했다고 어머니가 철조망 밖으로 나가실 때까지 서서 어머니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손을 흔들었다. 친구들을 보낸 나는 어머니가 가보고 싶어 했던 범어사에 갔었다. 어머니는 흰 치마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으셨고 나는 군복에 모자를 썼다. 대웅전 앞에서 찍은 사진도 이제 늙었는지 누렇게 변했다. 어머니마저 저 세상으로 가신 지 벌써 26년이 됐다.6. 귀가아버지는 그해 끄트머리쯤 되던 어느 날 밤 집으로 돌아오셨다. 밤이 이슥한 시간 우리 대문 앞을 지나던 동네 아주머니가 누워 있는 사람을 발견하시고 열린 대문으로 어머니를 찾아 들어와 "나와 보소"하면서 선잠 자던 어머니를 깨웠다. 어머니 곁에서 자던 나는 그 소리에 덩달아 일어났다. "뭐 때문에 이카노?" "대문밖에 이 집 양반이지 싶은 사람이 누워 있구마. 퍼뜩 나와 보소." 이 집 양반이라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급해진 어머니는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나왔다. 캄캄한 대문 밖에서 내가 쥔 기억자형 녹색 군용 전등으로 모로 누운 사람의 얼굴을 비추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바짝 다가앉고는 아버지의 얼굴을 덮은 헝클어진 긴 머리와 긴 수염을 이리저리 뒤로 젖히고 드러난 귀를 요리조리 만져 보시고 얼굴을 빤히 보시더니 벌벌 떨며 큰 소리로 울었다. 그동안 손바닥이 닳도록 빌며 소망했던 일이 갑자기 눈앞에서 현실로 나타나자 꿈인지 생시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손수 만든 목침 하나만 베고 모로 누워 주무셨다. 오랫동안 그렇게 주무셔서 아버지의 양쪽 귀는 레슬링 운동선수처럼 찌그러지고 울퉁불퉁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귀 모습을 예사로 보시지 않고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모양이다. 혹시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터지는 포탄에 맞아 육신이 산지사방 흩어져도 그 귀 하나만 쥐고도 아버지를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빈속으로 하루 종일 자갈길을 걸어 우리 집까지 찾아오시고는 마음의 긴장이 순간적으로 풀리듯 대문 앞에서 술 취한 사람처럼 넘어지고 말았다. 기운이 고갈된 아버지는 이제 일어나실 기운도 없었다. 모든 면에서 늘 병사들의 후순위로 밀리는 지게부대원을 집으로 보내는 날이면 이른 아침 아무것도 주지 않고 빈손에 빈 입으로 보냈다. 아침 주먹밥도 얻어먹지 못하고 미친 듯이 달리는 군 트럭의 먼지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눈에 밟혀 하루 종일 많이 걷고 짧게 쉬기를 반복했었다고 하셨다. 우리 집 마당에는 동네 사람들이 한분 두분 모여들자 어머니는 배급받은 왜지름(석유)을 호야등에 가득 채워서 불을 붙여 심지를 홰가 나도록 돋우고는 처마 끝 높은 곳에 내다 걸었다. 그때서야 아버지의 고생한 몰골이 전부 드러났다. 산송장이었다. 남이 보면 누구인지 모를 정도였다. 몸은 마를대로 말라 뼈만 남은 얼굴에는 살 한 점 없고 광대뼈만 유난히 튀어 나왔다. 거미 다리같이 마른 다리와 손가락을 보시던 동네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축이 많이 났네. 축이 많이 났다. 저렇게 말라서 한 오십 근(30킬로그램)이나 나가겠나"하시면서 혀를 끌끌 차시며 몹시 안타까워 하셨다. 목마름과 허기를 참고 한 여름 더위까지 지고 산을 오르내리기를 얼마나 했으면 몸이 저리되었을까 하시면서 불쌍 하시다고 여기저기서 눈물도 흘리셨다. 이때 어머니는 손바닥으로 땅을 치시며 "원통하다. 그 놈 잘 되는가 보자"하시면서 여러 번 고함을 질렀다. 그날 밤 또래 친구들은 모두 우리 집에 모였으나 그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후에도 그놈이 우리 집 앞을 지날 때에는 눈길을 다른데 두고 지나갔다. 아버지는 거지 중에 상거지였다. 집을 떠난 후 한번도 빨지 못한 옷에는 온갖 냄새가 진동했다. 걸친 옷만 봐도 얼마나 죽을 고생을 하셨는지 단번에 표가 났다. 지게 진 양쪽 어깨 피부는 다 해어져 진물이 나고 있었다. 떠나실 때 입은 흰 바지저고리는 바위 모서리나 나무가시에 스쳐 성한 데가 한곳도 없이 해졌고 땀과 피와 전쟁의 온갖 때가 범벅이 되어 누렇고 어두운 자연 위장복이 되었다. 비가 오면 그때 선채로 얼굴을 씻고 입은 채로 구정물로 빨래를 하시고 해가 나면 서 있는 그대로 걸어가는 옷걸이가 되어 젖은 옷을 말렸다.7. 지게부대아버지가 유학산으로 들어 가실 때는 50년 7월 말이었다. 그때는 지게부대라는 용어가 없었다. 경찰관이 길이 없는 산에서는 모든 전쟁물자의 운반은 지게가 편리한 도구라고 판단하고 농사를 짓고 지게를 져본 나이가 어중간한 민간인들을 수시로 잡아다가 군에 인계했다. 지게부대원의 임무는 전투에 꼭 필요한 물자인 탄약과 유류, 주먹밥을 운반하고 부상자 후송, 죽은 병사의 사채매장, 교량복구, 진지구축, 도로보수였다. 산에서 지게는 최상의 운반도구였다. 그때 참전했던 미군들도 그것을 보고 세계에서 유일한 도구라고 칭찬했고 덜 무거운 것은 그들도 지게에 얹어 지기도 했었다. 세워 놓은 지게가 알파벳 A를 닮았다고 해서 한국 노무자를 지게부대(A Frame Army)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 노무자라는 명칭은 아버지가 귀가 하신 후 이듬해인 51년 5월 대구 노무단 양성소에서 전쟁에서 필요한 기초훈련을 받고 각 군에 배치된 노무자를 일러 말하는 것이다. 유엔군은 전투 병력의 급격한 감소를 절감하고 탄약과 유류를 전장에 신속히 운반하기 위해 민간인 노무자로 이루어진 한국 노무단(KSC.Korea Service Corps)을 창설했다. 아버지가 잡혀 갈 때에는 군과 경찰 어느 쪽에서도 잡힌 자의 인적사항을 기록 보관하지 않아서 전쟁터에서 그들이 죽으면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사망 통지서가 오기는 난망이었다. 더 내려갈 곳도 더 올라갈 곳도 없는 지게부대원은 같은 장소에서 군인들과 같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가해도 대우는 비참했다. 계급이 없다. 진급도 없다. 따라서 봉급도 없다. 훈장도 없다. 어깨 골이 다 파여도 휴가도 병가도 면회도 없다. 쓸모없는 몸이 되면 그때서야 풀어주는 것 뿐이었다. 하산시에는 지게에 시체나 부상 당한 군인을 한명씩 지고 내려 왔다. 늘어지는 시체는 피아의 구분없이 작은 골짜기를 메워 나갔다. 부상자는 산 아래 붉은 적십자 마크가 그려진 천막 안으로 이동 시켰다. 밤이 왔는데도 거기엔 밤을 도로 쫓아내고 있었다. 조명탄을 훤하게 대낮같이 밝히면 새로운 전투가 시작된다. 낮에 숨죽였던 살기가 되살아나 한강 이남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 되었다. 눈을 감으면 내가 죽고 남을 죽여야 내가 살았다. 바람 한 점 없이도 끊임없이 따라 오는 화약 냄새, 간고등어 썩는 것 같은 송장냄새, 죽은 군마의 지독한 냄새. 이곳은 어제와는 딴 세상이었다. 밤도 밤이 아니었고 낮도 낮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죽임의 탄환이 비명을 지르며 꼬리를 물고 이쪽저쪽으로 날아들고 날아갔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부상자는 이곳저곳에서 엄마를 부르며 살려 달라고 천막 밖으로 기어 나왔다. 시체를 보고 누가 북한군인지 쉽게 구별하는 방법은 죽은 병사의 옷을 보고, 여의치 않으면 양쪽 팔을 걷어 올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죽은 북한군의 대부분은 시계를 좌우 양팔에 차고 있었다. 그 시계 전부는 미제나 일제였다. 태엽이 다 풀렸는지 시계바늘이 정지된 것도 있고 아직도 돌아가는 것도 있었다. 바늘이 정지된 시계는 오래전에 죽은 미군병사의 것이고 아직도 돌아가는 시계는 어제 오늘 죽은 미군의 시계이다. 미군들도 죽고 자신들도 죽어 시계는 북한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북한군이 고향을 떠날 때 이 시계를 끼고 전장에 온 것은 아니다. 전투하다 죽은 미군의 손목에서 빼어 내어 자기 팔에 줄줄이 꿰어 찬 것이다. 얼마나 탐이 나서 그랬을까. 이 전쟁이 자기들의 계획대로 그해 8월 15일 부산까지 점령하는 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형제들에게 증표로 나누어 줄 것이라고 기대해 부풀었을 것이다.8. 에필로그전장에는 총을 든 군인들만 전쟁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이는 군인들 뒤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그들의 뒤를 받쳐주는 군인 아닌 비무장 군인이 있었다. 약실에 장전된 탄약이 다 소진되고 나면 병사가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탄약은 늘 공급되어 있어야 중단 없이 전투를 할 수 있어서 그 결과 병사는 살고 그 전투가 승리할 수 있다. 탄약이 소진되면 높은 고지에서는 더욱 더 절실하다. 병사가 손쉽게 사살할 수 있는 적을 그냥 보고만 있다가 도로 병사가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발생했었다. 이 비극적이고 억울한 사건을 사전에 막을 부대가 필요했다. 이 부대가 지게부대이다. 말이 부대이지 이 부대원들은 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난 후 대구 지역에서도 그해 50년 7월부터 소집 통지서 없이 동네에 나온 경찰관이 구장의 말만 듣고 나이 어중간한 민간인들을 마구 잡아 전장에서 필요한 기초 훈련도 없이 그날 저녁 바로 전장에 투입시켰다. 아버지는 그해 7월 말경에 혼자 강제로 입영되었다. 그때 잡혀간 지게부대원의 신상명세서가 군과 경찰 어느 곳에도 작성되지 않아 없었다. 그 결과 군인이 사망하면 기록에 따라 집으로 통지하고 지게부대원이 사망하면 신상명세서가 없어 그 가족에게 통지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됐다. 이런 상황은 이듬해 1951년 5월 대구노무단양성소가 생기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 이런 상황이 여기에서 끝날 비극이 아니었다. 휴전 후 적어도 20년 이전에 신문광고라도 해서 그때까지 살아 계시는 지게부대원을 찾아 직접 그 현장으로 달려가서 유해를 발굴했더라면 죽은 자의 유해와 군복, 인식표가 그대로 발굴되어 쉽고 빠르게 여러 나라의 많은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통탄해서 무릎을 치고 또 쳐도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아버지 가신 지 36년이 지났다. 살아 계시면 112세 기유생이다. 아마 다른 분들도 저 세상으로 가신 나이다. 1972년 아버지와 그 당시 내가 근무했던 안동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다부동재를 넘어설 때였다. 아버지는 손가락로 유리창을 푹푹 찌르듯이 이 봉우리 저 골짜기를 가리키며 "그때 내가 숱하게 져다가 묻었지"하셨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하고 군은 근 50년이 지난 2000년이 되어서야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기록물 없이 넓은 산야를 뒤진들 결과는 늘 뼈 몇 조각. 그것도 자랑이라고 하는가. 지금도 이곳 유학산 )을 지날 때는 무심코 내 시선은 골짜기를 찾아 헤맨다. (127매)

2020-07-20 18:33:34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노매실 짝골마을/ 사공 철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노매실 짝골마을/ 사공 철

< 1 >허름한 셔츠를 걸쳐 입은 김 노인은 호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다.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고는 불붙일 생각을 않고 마을 쪽을 내려다본다. 가득히 연민을 담은 눈이다."자넨 잘 모를 거야. 어째서 우리 조상들이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와 마을을 이루셨는지. 그분들이 어떻게 살다가 돌아가셨는지."김 노인은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하기야 나도 어렴풋이 짐작만 해왔었던 일이었지. 그런 것들을 알기엔 너무 어렸었고. 또 알기도 전에 난 고향을 등지고 도회지에서 살았거든."- 노매실(老梅實)의 유래는 멀리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삼한시대 '조문국'(召文國)이라는 아주 작은 부족국가가 있었던 자리였는데 서기 85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지형은 마을 북쪽에 산이 있었는데 봉우리 모양이 마치 매화(梅花)같다고 해서 노매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매화꽃이 떨어져 이룬 터라는 아름다운 인상의 마을로 불린다. 1737년 옥선달(玉仙達)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정착하였다고 하는 선비 마을이기도 하다. 행주 은 씨, 성주 도 씨, 효령 사공 씨, 안동 권 씨가 모여 살았으며 사공 씨가 토박이다. -아득한 그 옛날의 골짜기를 품은 고향의 고갯마루에 되돌아 와 앉은 노인의 눈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 . . 우리는 고향을 몰라도 너무 몰랐어.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도 좋을 고향을 그동안 멀리하고 살았으니까."김 노인은 목이 잠겨 몇 번이나 침을 삼키면서 말을 잇는다. 그의 가슴 속에 일고 있는 회환의 물결을 조심스럽게 재우는 낮은 음성이다." . . . 참으로 오랜 방황이었지. 따지고 보면 난 그토록 긴 세월을 도회지 생활에 시달리며 살아 왔던 것 같아. 우린 이제까지 우리 자신을 너무도 몰랐었거든.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만 사로잡혀 헛된 신기루를 쫓고 있었던 게야.""나이 육십이 넘도록 무엇을 했었단 말인가. 지금까지의 내 삶은 거의가 허깨비에 불과한 것이었어. 삼십여 년 선생 노릇을 해왔지만 글쎄,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철저한 지식의 전달자, 아니 지식의 장사치였던 것 같아. 교육자 행세를 하면서 말일 세."나는 노인을 쳐다보다 말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마치 그의 벌거벗은 몸을 보는 것 같은 민망스러움에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비록 가난하였을지라도 이 마을에 선비 정신으로 바른 길을 사셨던 우리 조상 어르신의 삶에 비하면 나의 그것은 형편없이 초라한 것이었다네. 오늘이라도 내가 죽는다고 하면, 나의 묘비엔 무슨 말이 쓰일까! - 태어났다. 먹고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 -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그 이상의 것이 아닌 것을 . . . 나의 생애는 이 세 마디 말로 충분하지 않겠나." 김 노인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팔뚝으로 쓱 문질러 대고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쥔다. 주름이 깊게 잡힌 구릿빛 얼굴하며 햇살에 번들거리는 마디 굵은 손가락, 가죽처럼 두터운 살갗 속에서 곡괭이로 밭을 일구려는 근육이 꿈틀거린다. 노인은 이제 누가 보아도 이곳 노매실 짝골마을의 농부이다."젊은이, 난 어려서 이 마을을 떠나 거의 반세기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네. 웃어른처럼 부끄럽거나 후회되지 않을 죽음 - 그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 . ."그렇다! 나의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부끄럽거나 후회하지 않을 떳떳한 죽음, 그런 삶을 위해서. 나도 고향을 떠난 지 만 이십 년 만에 귀향을 한 것이다. 이 노매실 짝골마을에 한 줌 거름이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하여.< 2 >노매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내가 태어난 자그마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지만 짝골마을의 좁은 길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긴 파충류처럼 꼬불꼬불한 길이 한낮의 호젓한 고요함 속에 산허리를 감고 있었다. 엊그제 내린 비에 패인 것일까. 골짜기로 굽어드는 비탈길은 헐벗은 망아지 잔등처럼 군데군데 쨍쨍한 햇살 아래 그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내가 떠나던 그때에도 짝골마을 길은 한바탕의 소나기에 토막 난 지네처럼 끊겨 있었다. 물살에 떠밀려 내려온 돌멩이들이 아무렇게나 길바닥에 나뒹굴었고, 황량한 들녘에는 뙤약볕에 사위어가는 풀잎이 빌빌 꼬이고 있었다. 가난한 부모와 가난한 이웃이 살았던 고향, 그러면서도 그 가난을 숙명처럼 불평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가던 고향. 온갖 자연의 재난과 밑도 끝도 없는 가난은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마음은 고향 길 어귀에서부터 왠지 어둡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갯마루를 넘어 마을 안에 들어섰다. 골이 드러난 초가지붕, 수숫대로 엮어 둘러친 금방 넘어질 듯 위태위태한 울타리. 마을 구석 꼬불꼬불 누비고 있는 고샅길, 역시 옛 모습 그대로였다. 잠시 나는 발걸음을 멈춰 섰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눈이 머물자 그 순간 가슴이 섬뜩해졌다. 어릴 적 그때의 아픔이 늦가을 호수 위에 번지는 잔물결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십 년 전, 나를 졸지에 고아로 만들어 버린 건 마을 저 계곡 중턱에 자리 잡은 마치 호랑이 같이 생긴 바위 형상이었다. 지금 그 바위는 없어졌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그대로 남아있다. 소작농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던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찌들었던 삶에 대하여 어떤 아픔 같은 것을 감내하면서 커왔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아버지의 한숨 소리와 빈 수저를 달각거리던 어머니의 모습을 어렴풋하나마 제일 먼저 떠올린다. 허구한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끼니를 거르고 나서 혼자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 있노라면 허기에 차 눈만 말똥말똥 해지곤 했다. 가만히 이불을 젖히면 희미한 등잔불 아래 등을 보이고 있는 아버지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토해 내고 있었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니는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고는 구멍 난 양말을 깁고 있었다. 어쩌다 죽이라도 끓이게 되는 날이면 어머니는 멀건 밀기울 죽 두 그릇을 방 안에 들여 넣고는 혼자서 부뚜막에 앉아 숟가락을 빈 밥그릇에 달각거리고 있었다. 그 지겹도록 가난했던 긴 긴 보릿고개의 날들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시려오는 아픔 그것이었다."임자, 같이 묵게 들어 온 나 말이여." 아버지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지르면,"난, 시방 군불 땜서 묵고 있잖우. 애하고 당신이나 어이 자시란 말요.""어허, 참!"마침내 아버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나 부엌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것이었고, 엉거주춤 일어선 어머니는 민망한 얼굴이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 슬그머니 숟가락을 떨구고 말았었다. 어머니는 어제 밤부터 복통을 일으켜 밤새도록 신음을 하며 부대끼었었는데 아침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이 너무나 창백했다. 어머니는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뱃살을 거머쥐고 아파하였는데 어린 내가 보아도 예사로운 복통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어무이, 나 학교 안가고 재 너머 의원 데꼴까 . . . . ."내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묻자, "어야, 내 새끼야!" "걱정 말그라, 엄만 게안타."어머니는 땀투성이의 얼굴을 겨우 치켜들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오히려 나를 챙기신다."밥 묵었으면 어여 학교나 가래이. 이번에도 백점 못 무마 패쥑일끼다."나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책보를 허리에 동여매고 집을 나섰다. 그날이 바로 청소 당번이었던 나는 해가 기운 저녁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었다.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의 복통은 아침보다 훨씬 더해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하얗게 눈을 뒤집은 채 방바닥을 벌벌 기어 다니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는 피가 바짝바짝 졸아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재 너머 한의원이 와서 침을 몇 대 놓고 단방 약 몇 가지를 달여 입가에 흘려 넣었지만 금세 와락와락 토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아버지도, 한의원도 어머니의 고통을 보고만 있을 뿐 속수무책이었다."아부지예, 빨리 어무이 업고 병원에 가. 병원에요."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는 아버지를 보채고 있었다. "머라꼬?" 아버지는 금방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나를 돌아다보았다."퍼뜩 데꼬 갈끼다."아버지는 그 때까지 병원 생각은 미처 못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병원이 있는 읍내까지는 재를 몇 개씩 넘어야 하고 산길로만 삼십 여리나 되는 먼 거리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사람이 금방 죽어 나가도 병원에 가는 것은 아예 상상도 못했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조급해져서 낚아채듯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아범, 어딜 가시려우. 난 이제 . . . " 어머니는 땀으로 멱을 감은 듯한 얼굴로 아무 힘없이 고개만 내저었다."안 돼! 임자, 임자가 먼저 가마 절대로 안 된다카이!"아버지는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마구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은 일제히 빳빳하게 곤두서서 무언가 와락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등에 업자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는 어둠 속을 뚫고 돌진하는 밤 열차처럼 무섭게 내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등에 업힌 어머니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모진 것이어서 몸부림 끝에 몇 차례나 길바닥에 굴러 떨어졌고 병원에 닿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버린 밤 한 시였다. 결국 어머니는 닫힌 의원 문 앞에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의사가 급성맹장염이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상여가 떠나는 날, 아버지는 실성한 사람처럼 몸부림치고 울부짖었다.「에헤-야 넘자 넘어, 이제가면 언제 오나, 에헤-야 넘자 넘어, 인생일생 춘몽이드냐, 에헤-야 넘자 넘어, 이제가면 언제나 오나, 에헤-야 넘자 넘어, 에헤-야 넘자 넘어, 에헤-야 넘자 넘어,」구슬픈 상여 소리를 따라 상여가 서서히 움직여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뒤에 엎드려 있던 아버지가 별안간 튕기듯 일어나 이승의 마지막 상여 끈을 붙들고 안간힘을 다해 놓지 않으려 했다."임자, 절대 못 간 데이. 절대 못 간 데이! 이날, 이때까지 평생을 묵고 싶은 것 한 번을 허리띠 끌러 넣고 묵어 봤냐. 입고 싶은 옷 한 벌을 맘대로 입어 봤냐. 못 묵고, 못 입고 살다가 가다니 원통해서 우째 눈을 감았다냐아. 임자아!" 아버지는 입에 허옇게 거품까지 물면서 상여를 붙들고 몸부림을 쳤다. 결단코 상여를 보낼 수 없다는 듯이. 상여를 흔들며 밀어내던 아버지는 마침내 기진하여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를 안짝골 양지바른 골짜기에 묻어 두고 온 그날 밤, 우리 부자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연거푸 줄담배를 태우고 계셨고 나는 한쪽 얼굴이 이지러진 열 여드렛날의 달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이놈의 마을에 리야까만 들어올 수 있어도 느그 엄니는 살았을 꺼 아이가."아버지는 갑자기 태우고 있던 담배를 마치 이(虱)잡듯이 재떨이 위에 비벼 끄더니 불쑥 혼잣말을 내뱉었다."우째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을 거나. 쬐끔만 일찍 병원에 갔어도 살렸을 낀데. 우째서 사람이 다 죽어가는디도 멍청허게 이러고만 있었다냐 . . . " "두고 보래이. 내 언제고. 저 노무 호랑이 바윗길을 허물어서 마실 앞에까지 차가 들어오는 신작로를 만들고 말 끼다."아버지는 모질게 주먹을 오그려 쥐었다. 어찌나 단단하게 쥐었던지 팔이 떨리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뭐 있노. 이깐 놈의 마실 떠나 버리면 그만 아이가." 나는 아버지의 말에 심드렁하니 대꾸했다."니, 시방 머라캤노?"내 쪽을 돌아보는 아버지의 눈길은 불처럼 확 타오르듯 번득거렸다."그만 자거래이. 쬐깐헌 것이 멀 안다구 . . . "아버지는 돌아앉더니 다시 담배를 태워 물었다. 내내 무슨 생각을 한 것이었을까. 잠을 못 이루던 아버지는 새벽녘에 내가 잠든 사이에 기어이 밖으로 나가셨다. 맷돌에 우둘우둘한 요철을 낼 때 쓰는 정과 쇠로 된 지렛대를 어깨에 메고 호랑이 바위 고개를 오른 것이었다. 나는 오줌을 지리면서도 괴상망측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꿈을 꾸었었다. 하늘 가득히 까마귀 떼가 날아다니는 그런 소슬한 꿈이었다. 나는 비몽사몽 마당으로 나가 산으로 잇대어진 잡목 숲에 오줌을 내갈겼다. 그런데 갑자기 코앞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놀래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까마귀였다. 한두 마리가 아닌 까마귀 떼가 마당가 잡목 숲에 무슨 열매처럼 새까맣게 붙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돌멩이를 집어 들어 숲 속에 내던지자 까마귀 떼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바람을 가르고 날아올랐다. 새벽하늘에 퍼지는 그 불길한 울음소리와 푸드득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날개깃 소리는 나를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아부지예, 아부지이예."나는 겁에 질려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변소에도 헛간에도 뒷마당에도 아버지는 없었다. 한참 뒤에야 나는 새벽 계곡을 울리는 망치 소리를 들었다. 다시 한 번 불길한 예감과 가슴을 후들후들 떨리게 하는 공포가 나를 휩쌌다. 나는 기를 쓰고 호랑이 바위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갯길 가운데 봉우리를 넘어서자 바위 꼭대기에 서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거기서 힘차게 정을 박아 넣고 있었는데, 막 동이 트려는 새벽하늘에 드러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무어라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별안간 호랑이 바위의 한쪽 모서리가 와그르르 무너지면서 아버지가 돌멩이처럼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다."으 – 아 – 악 - . . ."아버지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계곡의 밑바닥으로 꺼져 내리고 곧 이어 엄청나게 큰 바위 떨어지는 소리가 산울림처럼 길게 계곡을 울렸다. 나는 부리나케 구르듯이 계곡을 타고 내려갔다. 아버지는 절벽 아래에 피를 쏟으면서 거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를 보자 아버지는 무슨 말인가 하시려는 듯 안타깝게 손을 저으면서 입을 힘없이 움직이시더니 갑자기 눈을 부릅뜬 채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이내 손이 맥없이 땅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다부지게 내민 턱과 두 야무진 두 눈의 모습은 죽어서라도 마을 신작로를 결단코 내고야 말겠다는 완강한 의지로 굳어 있어 보였다. 나는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살며시 두 눈을 감겨드렸다. 그러나 감겨도, 감겨도 아버지의 눈은 감겨지지 않았다. 웃 이빨을 아드득 깨어 물고 있는 턱은 구리로 빗은 조각처럼 땅에 묻혀서도 영원히 견고하게 굳어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마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마 새벽에 아버지를 부르며 산길을 타올라 간 내 뒤를 쫓아 온 것 같았다.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며 혀를 차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게 아니라 울다 지쳐 마을 사람들의 우는 모습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물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버지와 같은 자신들의 운명을 탄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안짝골에 묻힌 어머니와 영겁을 마주보고 계시라고 바깥짝골 양지바른 곳에 뉘었다. 그리고 이튿날 한밤중에 나는 어미 잃은 망아지 새끼가 몸 둘 데 없어 도망치듯 천애 고아로 노매실 고향마을을 떠난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사흘만이었고 내 나이 열세 살 때였다.< 3 >이대로 고향에 몸담아 있다가는 어쩔 수 없이 가난을 대물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과 삶은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부딪혀가며 쟁취해야 한다는 나만의 어떤 신념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서 이를 악물고 굳은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자 했다. 다행히 나는 어느 광고 회사에 점원으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끼니를 해결하며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를 모두 마치고 또래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 일과 연관된 미술학 전공을 공부하게 되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대학을 졸업한 나는 시내 변두리에 조그만 광고 대행사를 하나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에 온 정열을 쏟았었다. 마치 그것이 내 삶의 의미이며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일에 몰두했었고 제법 큰 업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학벌이나 경제적 능력 같은 것을 우선시 하는 사람들 눈에는 젊은 나이에 일찍 입신한 내가 전도가 유망한 청년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죽어라고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고향도 잊고 살았다. 그러나 광고 대행업이 어느 정도 안정된 궤도에 올라서고부터 갑자기 모든 일이 성에 안차고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과장된 광고 그림이나 무책임한 홍보 그림을 그리는 일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십여 년 동안의 서울 생활에서 이러한 그림을 그리며 살면서 이루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순에 차고 생명이 없는 모방의 생활이었다. 나는 삶의 의미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도둑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면 캔버스를 메고 야외로 나갔었지만 팔레트에 물감을 이겨 넣기도 전에 짐을 싸들고 돌아와 버렸다. 미술 그것에 헌신하는 마음가짐이 아닌 나의 작업은 도리어 순수한 미술을 모독하고 훼손하는 것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테면 동물적 욕구로 순결한 한 여자를 억지로 겁탈하는 행위나 진배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나의 생활은 무절제 해지고 삶의 궤도를 점차 잃어가게 되었다. 자신에게 백번을 물어 보아도 모를 일이었다."자넨 생계를 위한 그림을 그리든가 아니면 미술을 위한 그림을 그리든가,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를 택하게. 그러다 죽도 밥도 안 된 다니까!"나의 방탕한 생활을 보다 못해 대학 미술과 선배 한분이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하지만 나는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내던 어느 날, 어차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아예 두 가지 것을 다 팽개쳐 버리기로 작정을 해버렸다. 그것은 우연하게도 엉뚱한 일이 계기가 되었었다. 남들이 들으면 허허 웃어 버릴 황당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이었다. 나는 대낮부터 술에 취해 서울 변두리 거리를 비틀거리며 다니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리어카를 끌고 언덕길을 지그재그 올라가는 짐꾼에게 까닭 없이 시비를 걸고 리어카를 걷어찼던 것이다. "야, 야! 좀 곱게 다녀. 리어카가 내 길을 막으면 어떡해""이런, 지이미! 지금 누가 누구에게 하는 소리냐!" 짐꾼은 참다못해 한두 마디 내뱉으며 목에 둘렀던 땀수건을 팽개치는 것이었다."내 살다 보이, 무슨 이런 지슥을 다 보것네. 내가 할 소리를 사둔 네가 해 줘서 핀키는 핀혀다마는 야, 니가 뭣이 간디. 방귀 뀐 놈이 성낸다냐, 이 문디 자슥아!""뭐, 문디?"나는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짜릿한 야성마저 뒤섞인 말씨. 그것은 시골 흙냄새 물씬 풍기는 고향의 말씨였다. 그 사투리가 흥분한 짐꾼의 입에서 마구잡이로 튀어 나오면서 나를 짜릿짜릿하게 자극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어라 말 못할 정겨움에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 모른다. 여느 때에는 차라리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던 그 늘어지면서도 투박한 고향 사투리가 왜 그렇게 눈물이 왈칵 솟구치도록 반가웠을까. 그날 나는 그 짐꾼과 함께 밤늦게 술을 마셨다."한 밑천 잡으면 고향으로 내려 갈라우, 일을 해 묵고 살아도 울 조상 밑에서 밥 해묵어야 복 받고 살 거 아니겠습니껴."짐꾼의 그 소박한 철학에 마음이 움직였다고나 할 까. 술에 취해 돌아와서도 나는 늦도록 잠을 뒤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입고, 자는 데 걱정이 없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는지 모른다. 일을 하기 싫으면 부리는 사람을 몇 명 더 써서 편하게 지내면 되겠고, 가고 싶은 데 있으면 가고,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얼마나 자유로우냐 . . . '배부르고 등허리 따뜻'하니까 '호강에 겨워'하는 생각이었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어디 사는 것인가. 그냥 살아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생활이 한 인간의 삶이어야 하는가. 나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거대한 자연에 비하면 나약하기 그지없는 아버지. 그 산 꼭대기에 올라 망치를 휘두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새벽하늘에 선하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평생을 시골 농사꾼으로 주어진 삶을 묵묵히 성실하게 살았던 것이다. 비록 가난이 고통과 죽음을 가져왔을지라도 아버지는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탓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나의 삶은 텅 빈 강정처럼 형편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비로소 나는 지금까지의 이곳 생활이 하나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헛된 열정에 영혼을 내맡기면서 어두운 방황을 계속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나는 서울 도회지 생활에 한시도 더 몸을 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나는 이튿날 나의 광고 일을 접고 짐을 챙겼다.< 4 >"어르신, 이제 그만 시작하시죠.""그러세!"김 노인과 나는 쉬고 있던 정자나무 그늘에서 하던 일을 마저 하려 일어섰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하우스 작업이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주민들의 소득 증대를 위해 이곳 짝골마을의 후미진 빈터를 일구어서 수막 하우스 단지를 조성하기로 했다. 음나무와 가죽나무 등을 심어 산림자원을 활용한 녹색관광 활성화 사업도 해보기로 했다. 우리가 삽을 들고 나서자 강 선생이 자진해서 우리들의 뜻에 참여했다. 억새풀이며 자잘한 잡목들이 무성하게 자라 내버려진 산골 땅이지만 우리는 먼저 진입로와 배수로를 열어 산촌마을의 생활환경 개선 작업도 함께 벌이기로 했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농촌지도소에 들렀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초등학교 소꿉 친구 용구와 영호를 만났다."야아! 이게 누구야. 오래 간만이다. 뺑코!" "그래, 범생이, 너 웬 일이냐. 서울에서 잘 나간다고 들었는데!""넌, 촉새 아니냐. 잘 있었냐?""잘 있고, 말고. 범생이 본지 얼마만이냐, 야!" 그 친구들은 "뺑코", "촉새" 나는 "범생"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내력은 이렇다. 우리가 주로 놀았던 곳은 마을 가운데 정자나무 아래였다. 수령이 600년이나 된 나무였다. 이곳에는 안짝골, 바깥짝골 아이들이 항상 다 모였다. 아무래도 농한기인 겨울방학 때가 최고로 신이 났다. 저학년 때에는 두어 명씩 편을 짜서 납작한 돌을 멀리 세워 넣고 갖가지 방법으로 상대편 돌을 넘어뜨리는 '개치기'를 하는데 이 놀이를 하다보면 온 얼굴에 흙이 하얗게 묻어 얼굴에 꼭 분을 바른 듯했다. 그런데 뺑코는 얼굴은 하얗고 코만 딸기코처럼 빨개서 우리는 그를 늘 "뺑코"라고 불렀다. 사실은 우리 집은 논도 없고 밭도 변변한 게 없어 아무 농사일도 할 수 없는 처지라, 난 책만 봤던 것인데 그걸 모르던 친구들은 그게 모범생으로 보였던지 "모"를 빼고 나를 "범생"이라고 불렀다. 영호네는 이 마을에서는 논이 많은 부자였다. 영호네 논바닥에 괭이로 금을 그어놓고 온 겨울 내내 '가이생' 놀이를 했다. 놀이가 좀 과격해서 여자애들은 '사다리 가이생'을 하고 남자애들은 '오징어 가이생'을 많이 했다. 그 친구는 지네 논바닥이라고 안 끼어드는 데가 없어서 "촉새"라고 놀려댔는데 지금도 그 별명 여전한 모양이다. 고학년이 되면 볏 집 속에 들어가 숨기도 하는 숨바꼭질과 발로 깡통 차기 놀이를 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병뚜껑을 이용하여 '땅따먹기'도 하고 '묵찌빠' 놀이도 했는데 재미가 그만이었다. 이렇게 우리 셋은 이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서로의 별명을 부르면서 껴안으며 무척 반가워했다. 우리들은 농촌지도소의 은행나무 그늘에 앉아 내가 그동안 서울에서 살아왔던 얘기며, 그리고 고향에 내려와 살기로 작정한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더니 친구들은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오후에는 마을의 초등학교 강 선생이 아이들 이부제 수업에 나가야 되기 때문에 혼자 작업장을 향해 집을 나서려는 참이었는데 촉새가 읍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아니나 다를까 예전의 촉새처럼 또 한마디 톡톡 쏘며 나타난 것이다."야아, 범생아! 너 네 집 앞길은 샌님만 다니는 길이냐. 구절양장으로 꼬부라진 길 때문에 원, 다닐 수가 있어야지."그는 마을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큰 소리로 투덜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게 우리 짝골마을이 자랑하는 유일한 길 아닌가, 촉새!" "야야, 그건 달 쳐다보고 시나 읇조리던 느그 고조 할배 때 얘기고 이젠 딴 걸 좀 써먹어라. 근데, 너 어딜 가는 참이냐.""밭에 풀뿌리 털어내려 가는 참이야.""아니, 벌써 갈아엎었냐?""응, 갈면서 엎기도 하지.""어얼래, 범생이가 웬 일이고. 책밖에 모르는 아아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일도 척척 이네.""너도 가볼 테냐?""아암, 여부 있나.""빌어먹을! 이렇게 좋은 땅을 썩혀 두고 있었다니. 가랑잎으로 똥이나 싸먹고 살아도 싸다, 싸!." 녀석은 밭에 오자마자 또 거침없이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저어기 묵혀 둔 야산에는 뽕나무를 심으면 누에고치를 따도 한 열 트럭은 따겠구먼." "머리를 쪼끔만 쓰면 되 것 마는.""머리만 쓴다고 어디 다 되는 일인가?" 나도 친구의 뜻을 알아차리고 어수룩한 대꾸를 했다."그럼 가을 중 싸대듯 설치기만 하면 되는 줄 아나? 우리 조상님이 이 바닥에 감자나 갈고 강냉이나 심어 먹고 살았다고 해서 그거나 갈아 부친다면 쌔가 빠지게 일해 봐도 고조 할뱃적 가난이 그대로야.""뭐 이 척박한 땅에 달리 갈아 먹을 것이 있어야지.""이 친구야. 사나운 말도 부리기 나름이야. 그런 것만 한탄하고 있다가는 날 샌다고," "여기 사람들은 아마 가난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위대한 전통이나 되는 줄 아는 갑네.""야아! 촉새, 이젠 고만 딱딱거려라.""짜아식! 듣긴 싫은 게구나." 그는 마을 사람들을 힐끗 돌아보고 나서 나를 향해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하고 싶은 말을 시원스럽게 다 끝냈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부지런히 쇠스랑질을 해나갔다. 저녁때가 되어 읍내로 나가려는 그를 나는 굳이 말려서 붙잡았다."아무리 여기가 오지라지만 굶기지는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자고 가지 그래!."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밤을 재촉한다.< 5 >노매실 짝골마을이 오랫동안 낙후된 것은 안짝골과 바깥짝골을 이어서 읍내로 빠지는 큰 길 하나 없기 때문이었다. 신작로 내는 일이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야 할 시급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군청에 들러 그 문제를 여러 차례 상의해 보았지만 불과 서넛의 자연 부락을 위해 전장 6킬로가 넘는 방대한 공사를 지방 건설 계획에 넣을 수 없다는 실무진의 말만 들어오던 터였다. 결국 짝골마을의 길은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이 마을 사람들 전체가 총동원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가는 어느 날 우리는 마을 주민들을 소집하기로 했다. 그날 밤 군데군데 초롱불이 켜진 마을 앞 공터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들었다."자네가 얘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네."나는 김 노인의 말대로 마을 사람들 앞에 나섰다. 먼저 내가 고향 마을에 온 동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다."마을 주민 여러분! 내 말 좀 들어 보세요! 흔히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엄청난 책임 회피입니다. 내 자신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합시다. 그러나 내 자식, 내 후손까지도 그 가난을 물려주는 것이 왜 죄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밝고 건강하게 커나가야 할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못 먹이고, 못 입히고, 못 가르치는 것은 분명 우리의 잘못입니다. 비록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갈지언정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풍요한 앞날을 열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짝골마을의 이 좁은 길을 보십시오. 돌아가셔서 여러분들의 집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오랜 전에 생겨진 꾸부러진 이 길을 사람들은 그대로 다닙니다. 장마에 길바닥이 지네처럼 토막이 나버려도 괭이질 한번, 삽질 한번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벽이 허물어져 앙상한 횃대가 덩그러니 드러나도 그대로 방치해 둔 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마을, 내 집, 내 자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잘 사는 남의 마을을 보고 부러워만 하면 뭐합니까? 우리는 그동안 나약한 좌절감과 비굴한 열등감에 휩싸이기만 했습니다. 나도 저렇게 잘 살아야겠다. 우리 마을도 저렇게 잘 사는 마을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린 잘 살게 됩니다. 두드리지 않는데 문이 저절로 열리진 않습니다. . . . " 나는 일단 하던 말을 잠시 끊고 마을 사람들을 들러보았다. 모두들 하나같이 이제까지 나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모를 그런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서로 귓속말을 하는 가하면 부쩍 의심쩍어 하는 얼굴로 쑤군댔다. 이내 조용했던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고집 세기로 유명한 최 노인이 손을 번쩍 치켜들고 내게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물어 왔다."나는 무식해가 도시 먼 말이 먼 말인지 당최 못 알아 먹겠구만은. 자네 이 야그를 가만히 들어 보이 아매도 울 마을에 길을 고쳐야 쓰것다 이 말을 허는 갑인디. 거야 좋은 말이긴 하제. 구라몬 공사도 보통 공사가 아닌디. 이런 큰 공사를 마실 사람들이 비싼 내 밥 퍼묵고 그냥 공짜로 일을 헌다 말이 제이. 아니면 민사무소에서 노임 양곡이라도 몇 되씩 나눠 준다냐. 나는 먼접 그것을 알어사 쓰것다.""아 - 아니 . . . "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할 말을 잃고 아연했다. 곁에 앉아 있던 강 선생이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아시다시피 저는 이곳이 고향이 아니어서 대단히 외람된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지금 현재 여러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주민의 한사람으로서 몇 말씀 드릴까 합니다. 저는 5년 동안 여러분 자제들의 교육을 맡아 오느라 이곳에 살면서 보고 느낀 것입니다만 . . ."강 선생은 마을 사람들이 짝골의 특수한 지리적 여건을 효과적으로 활용만 한다면 잘 사는 앞날을 기약할 수 있을 거라고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 마을이 오랜 세월을 두고 낙후된 채로 피폐한 생활을 해 왔던 것은 그 근본적 원인이 마을의 좁고 꼬불꼬불한 길에 있었음을 최근의 사례를 들어 잘 얘기하고 있었다." . . . 따라서 이 일은 면이나 군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하고 나의 후손을 위한 일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 일에는 노임으로 양곡 같은 것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말기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어메, 베도 묵어사 짜는 것인디 그런 뱁이 어디 있는 겨." 최 노인은 계속 따져 물었다."저, 멍청허니 귀묵은 소리 허는 것 좀 보소! 여태까지 했던 얘긴 뭘로 알아듣고 어메가 뭐꼬?" 옆에 있던 최 노인의 친구, 권 노인은 그나마 알아듣는 듯 내 말을 거들었다."누가 그딴 걸 몰라서 그러는 겨?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민사무소에서 밀가루 포대라도 얻어 묵음서 하면 어쩌것냐 이것이제." "민사무소에서 자네 칙간까지 쫓아와서 똥구녁이랑 닦아주락 허소, 그랴.""아따, 언제는 외할미 콩죽으로 살았던가. 허기 싫으면 좋게 싫다고 나자빠질 일이제. 잔소리는 젠장."장내는 삽시간에 옥신각신 수라장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왜들 이러십니까? 좀 조용히들 합시다." 보다 못해 김 노인이 일어나 한 마디 했다.이내 장내는 웅성거리던 목소리들이 사그라지면서 흥분을 감추던 눈들이 시치미를 뚝 떼고 어색하게 눈 둘 바를 모르다가 땅바닥을 향했다."하는 수 없이 우리끼리라도 내일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습니까. 말보다는 행동으로 마을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하니까요.""아암, 그럼 그렇고말고." 김 노인이 내 손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꼭 쥐며 말을 이었다."무엇보다도 자네가 용기를 잃지 않아서 다행이야."이튿날 새벽 나는 지게를 짊어지고 마을을 나섰다. 나는 읍내 건재사에 둘러 시멘트 두 포를 샀다. 서투른 지게질이라 지게가 등짝에서 멋대로 놀았으나 이를 악물고 재를 넘었다. 소꿉친구 뺑코, 촉새도 삽이며 망태기를 들고 나를 따라 나섰다. 김 노인도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우리와 합세했다. 밤늦게까지 우리는 마흔두 포의 시멘트를 져 날랐다. 비만 왔다하면 개천 바닥에 놓인 징검다리는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는 통에 마을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강이 되어 버린 개천을 건너다녀야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곳에 다리를 놓기로 했다. 나는 모래를 퍼 다가 시멘트를 버무리고 뺑코와 촉새는 근처에 있는 바윗덩이를 끌어다 버무린 시멘트로 다리 기둥을 만들었다. 빈 집의 문짝을 뜯어다 다리 틀까지 짰다. 조금 있으려니 이장 양반도 마을 청년 대여섯 명을 데리고 나왔다. 뜻밖에도 그렇게 따져 묻던 최 노인도 나 왔다. 그는 가만히 뒷짐 지고 우리들 일하는 걸 한참을 보더니만 느닷없이 바짓가랑이 걷어 올리더니 내 손에서 삽을 빼앗아 들었다."가서 모래나 퍼 날르소, 이건 내가 할 낀 게네." "일허는 것이 귀역질 나서 못 봐 주겠구먼."다리 공사는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니 오전 수업을 마친 강 선생은 작업장에 나와 버무린 시멘트를 틀에 붓고 작대기로 다지는 일을 도왔다. 마을의 젊은이들과 아낙네들도 나와 일을 거들었다. 학교를 파한 아이들까지 나왔다."마을 사람들이 잠깐씩만 꼼지락거리니 요렇게 다리가 되아뿌리네." "마실이 참 꽉 째이는 것 같아 보기도 참 좋구만."단단히 굳으려면 며칠은 더 걸려야 하는 다리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신기한 듯 다리를 디뎌본다. 이렇게 다 만들어진 다리를 바라보고 서 있는 마을 어르신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대견스럽다는 듯이 뿌듯해 하는 것 같았다.< 6 >이리하여 노매실 짝골마을에 일찍이 없었던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젊은이, 노인 그리고 남자와 여자와 상관없이 마을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힘센 젊은이들은 짝골 골짜기에 지천으로 흩어져 있는 바윗돌이며 자갈을 짊어 나르고 아낙네들은 소쿠리에 흙을 파서 날라주었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망태기에 잔모래를 담아 날랐다. 노인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모래와 시멘트를 버무렸다. 한쪽에는 새끼줄 자로 줄을 긋는가하면 그 줄을 따라 바윗돌로 견고하게 축을 쌓기 시작했다. 바위 축 틈새에는 버무린 시멘트를 붓고 자갈을 넣어가며 꽁꽁 다져나갔다. 작업은 겨울철에도 눈이 많이 내리거나 아주 추운 며칠을 빼고는 이듬해 봄까지 거의 쉬는 날 없이 강행했다. 삼월 하순 쯤, 신작로 공사는 상당히 진척되어 어느 정도 큰 길의 모양을 갖추어나갔다. 그러나 남은 길이 문제였다. 호랑이 고개를 비롯한 몇 군데의 바윗길과 용암봉에서 노인봉까지의 거친 산길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난공사 지역이었다. 우선 바윗길은 다이너마이트에 의한 발파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고 산봉우리 사이의 길은 불도저 같은 현대식 장비가 아니고는 십 년이 걸려도 완공이 될까 말까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그 길을 그대로 놔 둘 수는 없는 일이어서 우리는 읍내 토건 회사의 실무진에게 소요 공사비가 얼마나 되겠는가를 알아보았더니 절벽 주위로 철책을 두르기까지 한다면 어림 계산으로도 일천만 원에 가까운 공사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짝골마을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액수였다.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마을 사람들의 뜻은 이제 와서 공사를 중단해 버릴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라면서 마을 기금이라도 모아서 공사는 계속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그 첫 번째 일감으로 수동식 가마니 스무 포대를 샀다. 마침 정부에서 양곡 수매용 가마니를 무제한으로 사들인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다음으로 송아지를 열두 마리를 사서 학교에 맡겼다. 강 선생이 책임을 지고 학생들과 함께 키워내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에 필요한 자금은 군청의 알선으로 농협에서 융자를 받았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세 개 조로 나누어 한 개 조씩 교대하가며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짰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소를 키우는데 열심이었다. 농번기 때에는 모든 작업과 심지어 취사까지 공동으로 하여 시간과 인력을 잘 활용하여 작업을 짜임새 있게 꾸려나갔다. 모자라는 짚단을 사 나르고 가마니를 짜고 짜놓은 가마니를 공판장까지 져 나르는 몇 가지 일이 더 늘어나게 됨에 따라 우리들의 입술은 터져 아물 틈이 없었다. 어언 2년 동안의 씨름 끝에 우리는 예상 공사비의 절반이 넘는 금액을 확보했다. 그것으로 우선 다니기조차 위험한 바윗길부터 내기로 하고 토건 회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찾아간 토건 회사의 실무자는 그간 자재대의 상승으로 공사비는 2년 전보다 배가 넘게 소요된다는 것이었다."다른 데 한번 알아보시죠. 우리로서는 도저히 적자를 보면서 공사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실무자는 우리들과는 더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듯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가슴 속에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일손을 놓아버릴 정도로 실의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날 오후 노인봉에서 낙반사고가 일어났다. 다친 사람은 뜻밖에도 김 노인이었다. 노인은 읍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다가 마을 사람들이 길 제방에 축을 쌓는 것을 보고 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제방 한 쪽이 무너지면서 바윗덩이 하나가 여지없이 그를 깔아버린 것이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읍내 의원으로 옮겨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바위에 으깨진 한 쪽 다리는 아무래도 절단해야 된다는 의사의 말이었다. 그날 밤 나는 고향으로 돌아 온 후, 처음으로 폭음을 했다. 그리고는 강 선생을 붙들고 울었다."이를 어째야 합니까. 어째야 . . . "" . . . ." 강 선생도 한숨만 내 쉴 뿐 말이 없었다.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마을 사람들도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후 세 시 때가 조금 지나서였는데 웬 헬리콥터 한 대가 우리 마을 상공을 서너 바퀴 빙빙 돌더니 마을 앞 빈터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굉장히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귀를 막아야 할 정도였지만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헬리콥터를 구경하려고 우르르 몰려 나갔다. 나도 웬 일인가 싶어 사립문을 나서는데 마을 이장을 앞세우고 재건복 차림의 웬 중년 남자 서넛이 이쪽으로 다가왔다."이 사람입니다요." 하고 이장이 그 중 가장 젊고 소탈해 보이는 남자에게 나를 소개했다. "저기 도지사 녕감님이 이리로 오셔." 이장은 약간 겁먹은 소리로 내게 귀띔을 했다."도 재철입니다." 나는 얼떨떨해서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수고가 많습니다. 도 선생." 지사는 내 손을 덥석 쥐면서 말했다."도 선생과 이 마을에 대해서는 한 달 전부터 소상한 보고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아주 장한 일을 하였더군요."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도지사 말대로 내가 장한 일을 했다면 불러서 치하해도 좋을 것을 굳이 헬리콥터로 여기 오지까지 찾아 온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우린 자신들을 위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우리 스스로가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분한 칭찬을 받을 일이 못됩니다만.""그게 장한 일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우리 사회에는 자기 힘으로 능히 해낼 수 있는 일도 행정기관에서 해 주겠지 하는 의타심에 젖어 방치해 두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번에 서로 도와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려는 협동정신이 강한 마을을 선정하여 중점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방침을 세웠습니다. 노매실 짝골이 나무랄 데 없는 모범 마을로 선정된 것입니다. 마침 이번에 정부에서 친환경 유지작물(油脂作物) 재배단지를 조성하여 농가소득을 올리는 농림 정책을 펴기로 하였는데 이곳이 적지일 것 같다는 의견이 있어 농수산부의 전문가와 함께 현지답사를 겸해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요!" "세세한 것은 좀 더 검토한 후에 결정할 일입니다만 내가 보아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유지작물 단지를 만들어도 되겠다고 생각하오! 그렇게 되면 이곳에 유지공장을 함께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겠소."그리고 지사는 힘껏 도와주겠으니 구상하고 있는 일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예전에 그려 두었던 우리 마을의 신작로 그림을 들고 나왔다. "참, 도 선생은 미술을 전공 하였다던가 . . . " 지사는 그림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 . . 화폭 위에 붓과 물감으로 그리던 그림을 이제는 고향 땅 위에 팔다리와 땀으로 그림을 그려 보시오. 미완성된 부분에 대해서는 마저 그릴 수 있도록 우리가 지원을 해주겠소."나는 열려진 입이 닫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버지 때부터 내게 이어진 내 가슴 속에 뭉쳐있던 소망이 마침내 세차게 폭발하여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지사가 돌아간 며칠 후 군청에서 현지 조사반이 마을에 출장을 나왔다. 그들은 하룻밤을 묵어가면서 유지작물 재배단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갖가지 토양 조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실의에 빠졌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갑자기 생기가 넘쳤다. 그간 중단 되었던 신작로 공사도 다시 시작되었다. 군에서 모자라는 공사비를 충당해 주고 불도저 한 대와 착암기, 시멘트 등을 보내 주었다. 불도저는 엄청난 힘으로 흙을 깎아 밀어 붙이고 착암기는 요란하게 몸을 흔들며 바위틈에 구멍을 냈다. 마을 사람들의 구릿빛 얼굴에는 밝고 건강한 미소가 샘물처럼 넘쳐나고 있었다. 공사의 진척은 의외로 빨라 두 달 만에 호랑이 고개 주위만 남겨놓고 거의 완공이 되었다. 호랑이 고개의 발파 작업을 하는 날 아침 나는 읍내 병원으로 김 노인을 찾아갔다. 잘려진 다리만 아니라면 그는 건강한 사람으로 완쾌되어 있었다. 내가 오늘 마지막으로 호랑이 고개의 발파 작업을 한다고 하자 김 노인은 갑자기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꼭 가봐야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여서 의사에게 물었더니 택시로 조심히 갔다 오라면서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주었다. 택시가 오자 김 노인은 목발을 집어 들었다. 나는 말없이 그를 부축하며 택시에 태웠다. 면사무소 앞에 이르자 기사가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노매실 안짝골까지 갑니다.""근데 저긴 말입니다요." 택시 기사는 우리를 외지에서 온 손님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저긴 리어카도 못 들어갑니다요.""이 양반 소식이 깡통이야.""아! 소문만 들었는데 벌써 길이 뚫렸나요?"택시가 삼거리에 이르자 짝골가는 좁은 길은 실뱀처럼 꾸불꾸불한 옛날의 샛길이 아니었다. 제법 확 트인 큰 길이 되었다. 택시가 막 짝골 입구에 접어든 때였다. 갑자기 달리고 있던 택시까지 덜컹거리게 하는 폭음이 울렸다. 기사가 엉겁결에 브레이크를 밝는 순간 나는 택시 문을 열고 호랑이 바위 쪽을 쳐다보았다. 고개 너머로 뽀얀 연기 같은 것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꽝 꽈르르르 . . . "땅바닥을 흔들어대는 굉장한 폭음이었다."꽈르르르 -" "꽈르르르 -"한 번 터진 폭음은 거대한 동물이 마지막 숨을 거두며 토하는 비명처럼 처절한 여음으로 인근 산골짜기에 오래도록 메아리를 부르고 있었다."어르신. 저 소리 들으셨죠?""아암 듣고말고." 김 노인은 눈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서리 내린 눈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어서 가세.""네."택시는 다시 출발했다. 나는 우쭐대고 싶도록 들뜬 마음으로 훤하게 탁 트인 짝골 길을 택시 창틈으로 바라보았다. 이 길을 먼지 날리며 휭하니 달리는 트럭하며, 푸르게 우거진 유지작물 재배 농공 단지 . . .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일 듯 선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니라 내일부터라도 당장 하나, 하나 현실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들이었다. 이목구비가 마치 호랑이 형상처럼 툭 튀어 나온 호랑이 바위는 이제 더 이상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바위는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져서 길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너도 나도 몰려들어 바윗돌을 치우고 있었다. 우리는 고갯마루에 택시를 세웠다. 김 노인은 서투르게 목발을 짚으며 차에서 내려서서, 한참 동안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이 보게 젊은이! 다리 하나를 잃고 나니까 확실히 불편하긴 하네만 . . ." "그 대신 난 자랑거리 하나를 얻은 셈이네. 죽어서 내 조상님을 뵙게 되면 난 훈장처럼 이 다리를 자랑할 걸세."나는 콧마루가 찡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면서 노인을 부축하고 언덕길을 내려갔다. 마을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마을 이장이 이 뜻 깊은 날에 만세 삼창을 부르자고 제의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목청이 터지라고 만세를 불렀다. "우리 마을을 위하여,""만세!" "만세!" "만세!"짝골마을을 온통 뒤흔드는 만세 소리가 인근 산봉우리에 부딪치면서 메아리 되어 멀리 퍼져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우르르 언덕길 아래로 몰려왔다. 김 노인은 그들을 모두 껴안기라도 할 것처럼 두 팔을 치켜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밝고 건강한 웃음이 함박꽃처럼 활짝 피어올랐다. 나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고 있었다. 김 노인도 감격에 겨워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애써 감추며 곁에 서있는 나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자, 저기 뻥 뚫린 길을 보게나, 젊은이!" "이젠 잘 사는 것만 남았네. 우리 고향도 잘 사는 마을이 될 것이네.""어르신, 그럼요!"짝골마을의 양지바른 곳에 누워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이제야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나를 감싸 안고 있는 것 같았다.■"노매실"마을은 필자의 고향마을로서「경북 군위군 효령면」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 다. 너무나 가난한 산골 오지마을로 새마을 사업조차 불가능할 정도여서 1976년 낙후 마을로 지정되었으나, 마을주민이 단합하여 "친환경 청정 유지작물 재배"사업을 성 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전국에서 드물게 살기 좋은 농촌 모범 마을을 이룩하였다. 현재는 4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산촌마을이지만 필자는 이들 고향마을 주민의 아 름답고 소박한 마음과 애향의 노고를 깊이 기리기 위해 필자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약간의 상상을 덧대어 이 논픽션을 썼다.

2020-07-20 18:33:19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1960년대의 학교 이야기/ 김상문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1960년대의 학교 이야기/ 김상문

임오(壬午)생, 78 세, 현대의 나이 계산법으로 치면 아직도 기대수명인 84세에는 한참 멀었다. 교단에서 퇴역한 지 18년째이니 교단의 어르신으로 받을 만 한데 현실은 구세대로 밀려나 있어 아쉽다. 나와 같은 또래의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6.25 전쟁 4.19 의거 5.16 군사혁명의 사회적 격동의 변화를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이다.지난날의 추억- 남기고 싶다.60년대 교단에 첫 교사 발령을 받은 당시의 학교 모습은 글자 그대로 "콩나물교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콩나물교실" 이라는 용어로 교실을 비하하지는 않았다. 훗날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국민소득이 늘어가자 선진국의 20~30명에 비해 학급당 인원수가 많다는 것을 "콩나물"에 빗대어 콩나물교실이라는 용어를 고안해서 사용한 결과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콩나물 교실에서 교사들이 제대로 교육 하였을까? 아이들은 어떻게 공부 하였을까 ? 궁금하지만 더듬어 보기 민망하여 기억조차 하기 싫다. 그렇지만 기억하기 싫다고 과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하룻길을 가도 소도 보고 중도 본다."는 말이 있다. 살다보면 좋은 일, 슬픈 일, 힘든 일도 있어서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고 붙잡고 싶은 추억이 누구에게나 있다. "오늘의 사회현상은 어제의 역사가 되고 어제의 역사는 오늘의 사회현상을 반영해 준다." 는 말처럼 쓰라린 과거가 있기에 오늘의 영광스런 현대화된 학교와 교실에서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국민들 아니 교단의 후배들에게 꽁꽁 묶어둔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도시락의 변천은 국민생활 수준을 대변한다. .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은 드물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대부분 결식아동 이었다. 면소재지에 초등학교가 하나밖에 없어서 십리 정도나 되는 먼 곳에서 사는 아이들은 아침도 거르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아침을 먹지 않고 오기 때문에 아침 겸 점심으로 고구마나 감자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와 같이 앉은 친구가 찐 고구마를 가져왔다. 이를 안 다른 친구들이 몰래 다 훔쳐 먹었다. 그는 형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렸다. 그의 형이 와서 몰래먹은 아이를 두들겨 팼다. 맞은 아이도 그의 형에게 말해서 그 아이를 때렸다. 형들의 싸움이 그들이 사는 동네 싸움이 되고 결국은 부모들까지 싸움에 말려들었다.이런 싸움이 가끔 일어나기에 학교에서도 골치를 앓았다. 겨우 대책을 세운 것이 마을 별로 복도를 지정하여 점심을 먹게 하는 방안을 내놓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이 예상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60년이 흐른 초등학교 동창생들의 모임에서 도시락싸움 얘기가 나왔지만 화제의 대상이 껄끄러운지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결식은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아니다. 고통일 뿐이다.나는 남의 것 이라도 훔쳐 먹는 배짱이 없어 15분 정도 걸리는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온다. 점심밥은 쌀 한 톨을 찾아볼 수 없는 꽁보리밥에 쑥이 1/3쯤 섞었다. 어머니는 어떻든 하루하루의 끼니를 잇기 위해서는 밥의 양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온갖 대용식- 고구마, 감자, 말린 쑥, 토란 대-을 개발해서 한 끼의 식량을 절약할 수만 있다면 다 했다. 요즘 밥으로 치면 웰빙식, 건강식이라고 해서 인기가 있겠지만 당시는 식량이 부족해서 나온 대용식일 뿐이다. 어머니는 밭에 나가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맞춰 돌아오셔서 따뜻한 밥을 차려놓고 기다리셨다. 찬 보리밥은 돌을 씹는 것처럼 딱딱하다. 그래서 물에 말아먹어야 한다. 찬 보리밥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마른 장작개비처럼 마르다. 이를 어머니는 아셨기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보리밥을 차려주셨다. 지금은 보리밥을 구경할 수 없다. 그렇지만 따뜻한 쌀밥을 먹을 때면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짜릿하다. 밥은 바로 어머니의 땀방울이었기 때문이다. 그 땀방울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농민은 우리 국민의 품성이다.1961년 3월 31일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교사 발령은 받지를 못해 조금이라도 어려운 가정생활에 보탬이 될까 싶어 농촌지역을 다니면서 생활용품을 팔기로 하였다. 그땐 행상을 하며 고등학교를 다닌 고학생들도 많았다. 나도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행상차림으로 나섰다. 지금은 농촌일지라도 군소재지에 농협마트나 편의점이 있고, 전통적인 오일장이 있어서 생필품을 조달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당시의 농촌은 교통편이 발달하지 않아서 주로 수 십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농촌생활은 단순하기 때문에 이에 필요한 생활용품도 간단했다. 예를 들면 소금을 갈아 이빨을 닦았기에 치약이나 칫솔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니까 농촌에는 치약이나 칫솔은 인기가 없다.다만 농민들이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사고 싶어 하는 게 비누 정도였다. 손을 씻을 때 향내 나는 비누에 관심이 높았다. 또한 농촌에서는 채소밭에 거름으로 인분을 뿌렸다. 비료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반찬이 없으니까 끼니마다 밭에 나가 배추나 무를 솎아서 반찬으로 만들어 먹었다. 그런 이유로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나 채소를 사먹는 사람들은 회충으로 인해 횟배를 앓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을 위한 구충제가 필요했다.농촌아이들은 양말대신 버선을 신고, 신발은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맨발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면 발뒤축이 상처를 입기 때문에 양발을 선호했지만 당시의 양말은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얼마 후 나일론 양발이 나와서 값이 싸지니까 수요가 많았다. 농촌에는 가게가 없었다. 특히 문구점이 없어서 학용품이 필요하지만 구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구는 잘 팔리지만 무겁고 이윤도 많지 않다.농촌에는 버스나 다른 화물용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모두 등짐을 지고 다녔다. 여러 가지 형태의 행상이 마을을 이리저리 찾아다녔다. 농촌에는 식당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느 농가라도 들르면 바로 그 자리에서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농촌에는 여관이나 모텔도 없다. 하루해가 늦어 잠을 자려면 그 마을의 기와집을 찾아가면 행랑채에서 잘 수 있다. 행랑채는 나그네들이 와서 잠을 잘 수 있도록 여유 있는 방이 마련되어 있다.당시의 농촌은 가난하지만 인심은 후했다. 우리 국민들의 순수함이 살아 있어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흉년에도 농촌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농촌마을은 나눔의 고장이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나의 이런 농촌경험은 훗날 나의 교직생활에 농촌아동을 지도하는데 지침이 되었음은 물론,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체득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도농교류로 도시에서만 살다 농촌학교에 전근한 교사의 말은 이렇다 "왜 지각 했어.?" "어째서 과제를 하지 않았어.?" 하고 결과만 가지고 아이에게 책임을 묻는다. 농촌을 이해하는 교사는 지각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유를 묻지 않는다. 아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르다. 당시의 도농 교류는 실패한 것이다. 허버드 대학교에서 삶의 방식 가운데 가장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관계" 라고 했다. 인간생활 자체가 관계가 아닌가 ? 농촌생활은 바로 이웃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용광로와 같다. 농촌생활을 이해하는 것이 농촌아이를 지도하는 첩경이다. 70 대 1의 의미61년 3월 31일 졸업하고 농촌으로 두 달 동안 돌아다니면서 행상 아닌 행상을 하면서 지내는 가운데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3.15 부정선거 이후 밤 낮 없이 데모가 일어나고 사회기강은 혼란스러웠다. 전쟁을 거친 후라 소위 돈이나 권력으로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기피하려는 사회풍조가 만연했다. 군 입대를 합법적으로 기피하는 방법이 공무원이나 교원이 되는 것이었다.5.16 군사정부는 새로운 국민의식을 고취하고자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숨은 병역 미필자를 색출하여 군에 입대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합법적이라고 하지만 법의 허점을 노려 기피한 교원들이기에 다수의 교원들이 징집되었다. 그 결과 교원 부족사태를 맞았다. 나의 교사 임용은 이렇게 뜻하지 않게 이루어 졌다. 첫 발령은 1962년 7월1일 전남 00군 00 국민 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 학교는 6년 전 졸업한 모교였다. 24학급에 학급당 평균 학생 수는 60~70명 수준이었고, 전체 학생 수는 1600 여명에 가까웠다. 군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소재지 학교이었다. 초임교사는 지도하기가 가장 수월한 3~4 학년에 배치하는데 나는 3학년 4반을 담임 하였다. 교실에 들어서자 깜짝 놀랐다. 아이들이 너무 많아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교감 선생님이 간단히 나를 소개하고 나가신 후 한참동안 무슨 말부터 꺼내야할까 망설이다가 출석부에 눈이 갔다. 70번이 끝이었다.70:1 요즘 서울의 강남에서 실시하는 주택청약 당첨률 일까? 어느 유명회사에서 채용하는 입사 경쟁률일까? 아니면 9급 국가공무원 채용 경쟁률일까? 아니다. 이 경쟁률은 모두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치열한 삶의 숫자일 뿐이다. 이러한 경쟁률이 60년대에도 초등학교 교실에서 볼 수 있었다. 다만 그 경쟁률에 차이가 있다면 지금의 숫자는 상대를 떨어뜨려 얻어지는 요행의 숫자이지만 그 당시의 경쟁률은 학급당 학생들의 숫자일 뿐이다.학교종이 땡땡 친다.학교 건물은 3동으로 나란히 지어졌고 운동장 쪽으로 강당이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운동장을 중심으로 기역자 모양이었다. 학년 당 4개 학급이니까 24 개 교실이 필요하지만 3개동에 각각 7개 교실이어서 21개다. 이중 전관에 교장실과 교무실 자료실 현관을 제외하면 18개 교실만이 사용 가능했다. 오직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실만이 덩그러니 지어졌다. 6개 학급이 교실 부족이었다. 근무하는 교원 수는 교장 교감을 포함하여 26명이고, 학교 고용원은 1명으로 27명이 근무했다. 단 한사람의 교사도 여유가 없어서 교무실은 교감선생님과 종을 치는 급사만이 달랑 두 명 밖에 없어 을씨년스런 장소였다.학교 교무실에는 유일하게 괘종시계 하나가 벽에 걸려 있다. 학교의 모든 움직임은 괘종시계의 움직임에 따라 학교시간이 좌우되고 매 시간마다 시작과 끝을 정확히 알리는 급사라는 직책이 있었다. 급사는 오직 종만을 치기위해 채용한 사람이다. 급사는 국가에서 채용한 사람이 아닌 비정규직이기에 급사의 인건비는 해당학교의 교사들이 추렴하여 채용하였다."학교종이 땡땡 친다 어서 모여라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는 노래는 지금은 들을 수 없지만 학교 종과 급사는 학교를 움직이는 심장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교무를 보조하는 사람, 과학실을 운영하는 사람, 도서실을 운영하는 사람, 청소를 전담하는 사람, 학교경비를 담당하는 사람, 오후 방과 후에 특별지도 하는 사람들로 차고 넘친다. 세월이 흘러 학교종이 없어지니 급사라는 직책도 없어졌다. 이는 당시의 국가재정이 얼마나 열악한 지를 알려주는 상징적인 연가이었다. 이젠 시계가 필요 없는 전자시대를 맞았다. "학교종이 땡땡 친다."는 동요도 시대 변화에 밀려 저만큼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오후반 아이들은 고통이고 학부모는 애환이다.학교 얘기를 하다 보면 생소한 용어들이 자꾸 나와서 필자도 혼란스럽다. 흔히 요즘 공장 노동자들이 하는 근무형태가 "전일제냐 2부제냐" 하고 논란거리가 되는 용어이기도 하고, 대학부설 평생교육원에서 실시하는 시간차 교육 형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니다. 70년대는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증가하여 교실 부족 사태를 가져왔다. 이들을 수용코자 부득이 오전과 오후로 나눠 등교하는 하도록 했다. 전일제는 학교에서 교실 하나를 한 학급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2부제는 교실을 두 개의 학급이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2부제는 두 개의 학급이 하루 4시간씩 공부를 하게 되므로 오전반은 8시에 시작하여 12시경에 끝나고, 오후반은 1시에 시작하여 오후 5시에 끝나게 된다. 이를 오전반 오후반이라고도 부른다.2부제의 문제점은 너무나 많아 일일이 그 문제점을 들춰낼 수 없다. 그 가운데 아이들의 등하교에 따른 안전문제가 가장 우려되는 대목이다. 오후 1시에 등교하는 오후반이 되면 부모는 걱정이다. 2부제를 적용하는 대상 학년이 연간 수업시수가 적은 1학년 ~ 3학년의 저학년이기 때문이다. 요즘 일학년을 입학하는 부모님의 심정을 상상해보라, 이들은 십 여리를 혼자서 걸어 학교를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두려움 그 자체다. 불안하다. 그래서 부모들은 어린 아이들을 혼자서 학교에 보내는 것보다 고학년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 안심이다. 일찍 형들과 함께 등교한 아이들은 어디서 마땅히 놀 수 있는 곳이 없다. 이들은 삼삼오오 운동장에 모여 오전시간을 보낸다. 점심도 굶고 하루를 보내는 셈이다. 맑은 날은 그래도 좋지만 비가 오는 날은 교실복도가 피난처가 되어 장바닥이나 다름없이 시끌벅적했다.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은 조금은 안심이다. 각 가정에는 시계가 없기 때문에는 해 뜨는 지점을 표시해 놓았다가 학교에 온다. 이래저래 농사를 짓는 부모들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많다. 논이나 밭에서 일하다가도 12시에 맞춰 집으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혼자서 점심을 먹게 차려놓아야 한다.오전반보다 오후반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한 달에 첫째 주와 셋째 주에는 오전반은 오후반으로 바꿔주어야 공평하다. 교실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편법 운영을 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지금은 "오전반 오후반" 이라는 생소한 용어는 이미 교육 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지만 그 용어 속에는 고스란히 부모 교사 학교의 애환과 고통이 스며있다. 오전반 오후반 교체시간이 되면 교실은 오일장이나 다름없이 북적거린다. 교실 입구에는 신발장이 설치되어 있다. 오전반 아이들이 끝나고 보면 신발분실문제가 생긴다. "선생님 내 신발이 없어졌어요." " 더 찾아봐" 이리저리 찾아봐도 없다. "울먹이고 있다. 신을 사서 신은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찾기가 힘들다. 다 떨어진 신발과 바꿔 신고 가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맨발로 보낼 수 없고 헌신발이라도 신고 갈 수 있게 조치를 해야 한다. 그리고 간단한 메모를 해서 학부님께 죄송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보내야한다. 해결책은 요즘은 신발주머니가 왜 필요 한가 의심스럽지만 그 당시엔 필수품이나 다름없다. 개인별로 신발주머니를 소지하여 자기 신발을 가지고 교실 내로 가져온다. 신발주머니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 때문에 교실 안은 언제나 메슥거린다. 여름철에는 창문을 열어 환기라도 시키지만 겨울철에는 그럴 수 없어 교실 안은 숨조차 쉬기가 버겁다. 여름은 찜통더위 속에서, 겨울은 얼음 창고 속이나 다름없는 교실에서 보낸 아이들이 어쩐지 자랑스럽게 생각된다.오전반 오후반을 운영하는데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다. 과제물이나 일기장 검사도 할 수 없다. 아이들은 마트에 들러 사고 싶은 것만 사고 가는 손님들이나 다름없다. 그냥 책보자기만 들고 왔다가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동 개개인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지도를 할 시간을 마련할 길이 없다. 더구나 문자 미해득 아동을 위해 개인별 지도시간을 마련할 수 없어 애틋한 감정에 휩싸인다. 각 교과별 교수 학습자료 제작하거나 수집하는 일은 거의 구상 할 수도 없다. 비교육적인 환경을 이겨 낸 그 당시의 교사들을 생각해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25 × 3 〓 75정규교실도 부족해서 강당교실을 임시로 3칸으로 막아 2, 3학년이 사용했다. 나는 초임교사라 3학년 4반을 담임했는데 남녀 혼합 반으로 70명쯤 된 것 같았다. 강당을 막은 교실은 일반 교실에 비해 면적이 좁다. 좁은 교실에 책걸상 35개 들어놓으면 교실 안이 너무 비좁기 때문에 강당교실에는 학급당 25개만 배정해 주었다. 이유는 25×3 〓 75 라는 수학공식에 대입하였기 때문이다. 즉 2인용 의자에 3인씩 앉히면 학급전체 아이들이 앉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식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표본이라고 본다."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고 나 태주 시인이 읊었다. 시구처럼 교육현장의 문제는 자세히 보아야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있다. 70명의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몸집이 작은 아이들과 몸집이 큰 아이들도 있고 얌전한 아이도 그리고 장난꾸러기도 있다. 2인용 의자에 3인씩 앉히게 되면 몸집이 큰 아이들은 겨우 엉덩이만 걸치는 꼴이 된다. 아이들의 신체적 특성을 무시하고 3인씩 배정하는 것은 탁상행정의 결과이다.다른 행정행위도 그렇지만 문교행정은 탁상에서 수학공식에 대입하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이 보게 된다. 문교행정은 학생 전체를 위한 행정행위지만 학생 개개인의 행복도 고려해야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학교 구성원 전체를 바라보고 행정을 하게 되면 부적응 학생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마찬가지다. 교실안의 70명을 전체로 보고 "나를 따르라 "식의 지도는 학습 부진아나 문제아를 만들고 마는 것이다.. 70명을 개인별로 볼 수 있어야 참교육자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교사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수 는 없다" 는 말은 진실이다.3학년 쯤 되면 장난이 아주 심할 때다. "미운 7살이라고 하지 않던가?" 교사에게 주목을 하라고 해도 그때뿐이다. 뒤로 돌아 칠판에 글씨를 쓰는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교실바닥에 떨어졌다. 의자에 앉은 아이들은 웃고 있고 떨어진 아이는 울상을 짓고 있다. " 교실바닥에 왜 떨어져? " ' 나를 밀 쳤어요" " 너는 왜 밀어? " 안 밀어도 조금만 움직이면 떨어져요"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투다. 이제까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그냥 흘러 보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몸집이 큰 아이들이 셋이 앉게 되면 둘이는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 있다. 가운데 아이가 조금 움직이면 양쪽 가에 앉은 아이들은 밀려나기 마련이다. 장난꾸러기 아이가 엉덩이를 좌 쪽으로, 그리고 우 쪽으로 움직이면 나가떨어진다. 엉덩이로 서로 밀치고 장난하느라고 교사에게 집중하지 않아 항상 소란스러웠던 것이다."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고 한다. "몸집이 큰 아이들은 두 명씩 앉게 하고 키가 작은 아이들은 세 명씩 앉게 하면 좋지 않을까?" 언 듯 머리에 떠오른다. 그 생각을 시연해보기 위해 실제로 키가 작은 아이들을 세워놓고 의자에 앉혀 보았다. 다행히 2인용이라도 3인씩 앉히면 무리 없는 아이들이 18명은 가능했다. 나머지 책상 19개는 몸집이 큰 아이들을 뽑아 2명씩 앉히고 남은 중간 아이들은 교실 전면인 바닥에 앉혔다.작은아이들은 충분히 셋이서 앉을 수 있었고, 몸집이 큰 아이들은 널찍해서 만족했다. 모두가 만족했다. 좌석도 고정한게 아니고 교실바닥에 앉고 싶은 아이들과 수시로 바꾸게도 했다. 아이들은 지루하면 교실바닥으로 옮기고 책상으로도 바꿨다. 오히려 교실바닥에 앉는 아이들이 많아 책상을 비워두기도 했다. 지금 되돌아보니 오늘날 교실 풍경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아이들의 인권 문제로, 교사들의 교육권 문제로 아마 사회적인 문제가 될 터인데 그 당시 학부형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당연히 교사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교사의 권위를 존중 한다거나 교권을 보호한다는 거나 그런 거창한 구호보다는 그냥 스승을 무조건 존경하는 풍토는 절대적이었다. 가르치는 환경은 빈약하고 열악했으나 지도 교사로서의 권위나 명성은 그대로 존중해주는 사회적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편했고 두려움은 없었다.병아리교사의 아이디어가 채택되다.교감선생님이 가끔 교실을 순방한다. 오전반 아이들이 일찍 와서 교실주위에 서성거린다든지, 지각해서 교실에 들어가지 않는 아이들이 있는지를 살피러 교내를 순회한다. 돌아다니다보면 강당교실을 사용하는 학급이 "소란스럽다" 는 것을 알고 계셨다. 유난히 우리 반이 조용해서 교실 순시 차 오신 교감선생님이 슬쩍 들여다보고 교실바닥에 앉아있는 아이들에 관해 이유를 물어 본다. "책상에 앉히지 않는 이유는?"" 덩치가 큰 아이들 셋이 앉으면 장난이 심해 도저히 수업 진행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교실 뒤편에 앉은 몸집이 큰 아이들이 셋이 앉으면 한 아이는 엉덩이만 걸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신체적 특성을 무시하고 똑같이 평등하게 앉히는 것은 학습지도의 효과를 경감시키게 된다는 것을 교감선생님은 깨닫게 되었다. 또한 아이들은 교사의 말에 주의를 집중하는 게 아니라 서로 밀고 당기면서 자리싸움에 연연 하게 되니 교실은 항상 시끄럽고 소란스럽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교육이론에 해박한 교감선생님의 소신은 교육 문제의 답은 항상 교육 현장에서 찾아야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교감선생님은 한참동안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 교감선생님도 교실의 소란문제에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 반 교실이 다른 반에 비해 조용하고 차분하게 수업진행을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이유를 물었던 것이다. 듣고 보니 타당한 것 같아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맺었다. 전 직원회의에서 강당교실을 사용하는 3학년 이하는 키가 작은 아이들은 3인씩 앉게 하고 키 큰 아이들은 2명씩 앉게 하며 나머지 아이들은 교실전면 바닥에 앉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이후로 교실의 소란행위가 많이 줄어들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이들을 교실바닥에 앉혔다고 꾸중들을 것인데 오히려 모범사례가 되었으니...3학년인데도 읽을 줄 몰라60년대는 만 6세가 되는 4월 1일에 입학식을 거행한다. 그런데 농촌에서 사는 아이들 가운데 같은 또래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면 그때서야 학기 중에도 찾아와 입학시키려는 학부모들이 있다. 농사일을 도우는 게 우선이었다가 같은 또래가 학교에 다니면 아무 때나 와서 입학을 시켜달라고 우긴다.1학년 2학기 9월이 넘었는데 할아버지 한분이 아이 손을 잡고 무조건 교장실로 들어선다. 오래 동안 고장에서 사신분이라 교장선생님과 안면이 있는 것 같다. "교장선생, 우리 아이 입학시켜 주소"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입학시켜줘요" 교장은 어이가 없다. "지 또래가 학교 다니는데 저 혼자 놀면 심심해서...." 교장은 교감을 불러서 교육청에 물어보란다.교육청에서도 뚜렷한 답변을 하지 않고 의무교육이니 학교에서 알아서 하란다는 것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라면 의무교육이니 학기 안에만 입학원서를 내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6개월이 지난 아이가 1학년에 입학했다. 이렇게 학기 중간에 입학한 아들 때문에 재적 학생수가 20명이 불어 70명이 되었다. 늦게 입학한 아이들은 까막눈이다. 이들은 문자 미 해득 아이로 남는다.농촌이라 누가 따로 가르칠 아이도 없다. 농사를 짓는 학부모들이 아이들 교육은 학교에서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2학년에 올라와서도 그들을 위한 별도의 개인지도 할 시간과 장소가 마련되지 않아 방관하기 마련이다. 애만 태운다. 3학년에 올라와서도 여전히 까막눈이다. 문맹자를 없애려고 만든 학교에서 오히려 문맹자를 만들고 있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늦게 입학을 시킨 학부모의 일차적인 책임이지만 학교는 이들을 없애기 위해 조금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까막눈이의 아이들은 제도, 교사 등 복합적인 문제가 만들어낸 결과다. 이는 허약한 국가재정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누구 탓으로 돌릴 수 없다. 결국 졸업할 때까지 방관한 까막눈들이 군대에 가서야 눈을 뜨게 된다. 한글 해득반이 설치되어 성인 문맹자를 교육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교실부족이 낳은 희생자였다. 국어시간에 국어책을 읽도록 했다. 지명을 했는데도 눈만 말똥말똥 거리고 반응도 없다. 옆에 앉은 아이가 "글자를 몰라요" 하고 대신 말해준다.. 알고 보니 20 여명에 이른다. 학교에서도 문자를 미 해득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다음 학급 배치할 적에 별도로 "문자 미 해득아" 명단을 따로 작성하여 인계인수 한다.이들은 과제를 해 오는 법이 없다. 글자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문자를 모르는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과제를 내주었고, 다음날 과제 검사를 해서 해오지 않은 아이들을 상대로 벌을 주었다. 초임교사는 아이들을 개별로 보지 못하고 전체로 본다. 개별지도란 개개인의 특성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전체아동을 보기 때문에 문자 미 해득아 에게도 똑 같은 과제를 주는 것이다. 숙련된 교사는 70명의 아이들을 개별로 볼 줄 안다. 그게 숙련교사와 미숙련교사의 차이다."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문자 미 해득 아이들을 위한 특단의 지도를 해야 하는 데 그럴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문자 미 해득 아이들만을 따로 가르치기 위해 교실 바닥에 앉혔다. 그들에게는 교과수업 보다는 문자해득이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학습활동도 달랐다. 공부를 못한다는 아이들의 특성은 주의집중을 하지 않고 장난이 심하다. 어려움을 해결하기보다는 쉽게 넘어가려고 한다. 좀 진득한 맛이 없다. 그렇지만 재미를 느끼게 되면 오히려 그것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교사의 설명보다 자기들끼리의 장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이들은 교과수업에도 참여치 않게 하고 오직 그들만의 문자공부에 전념토록 교과학습에 보완조치로 내주는 과제물도 이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 소위 능력별 수업을 적용했다. 일반아이들은 교육과정 내용대로 진행하고 문자 미 해득아이들은 해득을 위한 문자학습만 과제로 내 주었다. 조금 나은 아이를 조장으로 임명해서 공동과제를 수행하도록 했다.능력이 비슷한 아이들끼리라 서로 협조를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개인별로 과제수행이 아닌 집단별로 완성 여부를 확인했다. 이들은 8개 교과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학습능력에 맞는, 오직 읽고 쓰는 것이어서 학습 부담이 적었다. 그들의 학습목표가 단출하기 때문에 학습활동도 딱딱한 교실 수업보다 교실 밖에서 자유스럽게 보내는 시간을 즐겨했다. 이들의 교실 밖 활동으로 인해 실재 수업분위기는 소란하지 않고 조용해서 학습효과도 높아졌다.우선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 그대로 대입하여 익히는 카드놀이였다. ① 철수는 (학교)에 갑니다. ② 순자는 철수와 (함께) 갑니다.. ③ 우리는 (철수)와 (순자)도 학교에 (갑니다.). 우리 생활주변의 말을 모아서 ( )에 놓을 말을 찾아 카드를 읽고 괄호 안에 대입하는 놀이였다. 흔히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 고 하듯이 자주 말로는 친숙하게 하면서 읽고 쓰기가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그 예로 자기 친구 이름은 물론 시장, 장터, 강, 산, 동네이름, 학용품이름, 농사용 기구, 등 생활주변의 말은 자유스럽게 한다. 이 말들을 글자와 연결시키면 바로 문자공부가 되는 것이다.놀이가 학습이고 학습이 놀이 속에서 이루어지면 억지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 문자 미 해득 아이라도 말은 아주 잘한다. 말과 글자를 놀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면 글자 공부가 된다. 말을 글자로 연결시키지 못 할 때는 교사에게 달려와 지도를 받았다. 이러한 놀이학습은 일종의 자기 주도적 학습이고, 능력별 학습이고, 개별 선택 학습체제이다. 특별한 아이들을 제외하고 공부가 재미있다는 아이들은 없다. 그러나 알게 되면 흥미를 갖게 되고, 그 흥미를 느끼면 관심을 갖게 되어 비로소 공부에 열중하게 된다.교육심리학에 "낙인효과" 라는 용어가 있다. "공부를 못 한다" 고 이미 낙인을 받은 아이들은 모든 것을 "나 못해요" 하고 입에 달고 있다. 이들에게는 할 수 있는 쉬운 과제를 내 주면 "나도 할 수 있어요" 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소극적인 태도에서 적극적인 태도가 형성된다. 그때부터 "자성예언"의 효과가 나타난다. 긍정적인 자성예언은 성공의 뿌리다. 춤추는 아이들이 문맹에서 벗어났다. 12월 2학기가 끝날 무렵 1학년 국어교재를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읽게 되었다. 문자 미 해득아 에게는 오직 문자 해득만을 위한 학습방법을 적용한 결과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 같다. 요즘 말로 하면 능력별 학습방법이다. 동일한 학습지도로서는 부진된 아이들을 구제할 수 없다. 이는 교단에 선 교사들은 누구라도 아는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좀처럼 3학년인데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구제를 못하는 것은 차별화된 교수활동에 많은 시간적인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꾸중하고 질책하는 것은 최하의 지도법이다.그런데도 학습지도 과정에서 잘하는 아이들은 칭찬을, 못하는 아이들은 꾸중을 하는 것은 웬일일까? 이유는 교사들의 자기 만족에서 찾을 수 있다. 교사들은 자기의 가르침에서 곧 효과를 찾으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성과를 얻으려고 한다. "알았어" 하고 질문하면 아이들은 "예" 하고 대답을 한다. 과제물도 똑같이 내준다. 능력이 다른데도 불고하고... 이렇게 성급한 성과, 동일한 지도가 낳은 학습부진아는 모두 안일한 교사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과제를 해결한 아이들을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그들의 사기는 올라갔다. 내 품에 안긴 아이들은 마치 가뭄에 시들어진 밭에 소낙비가 지나간 뒤처럼 싱싱한 얼굴로 생기가 돋았다. 개선장군처럼 의기앙양하다 지금까지 공부 못한다고 꾸중만 듣던 아이들이 칭찬을 듣는 순간 배움의 눈동자는 더 크게 떠졌다.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6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1학년 교재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무슨 특별한 지도법도 아니다. 다만 그들의 흥미에 맞도록 과제를 해주고 서로 협동하는 방법을 고안해서 던져준 것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글을 깨우칠 수 있다니... 나 스스로 놀랬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는 말이 책의 제목으로 2000년대에 발간되었다. 이들은 40년 전에 이미 고래처럼 춤추고 문자를 배우고 익혔다.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자란다. 물을 주면 자라고 물을 주지 않으면 마른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으면 성장하고, 없으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란다. 그게 자연의 이치다. 어느 직업이나 같다. 콩나물 교실에서라도 교사의 사랑과 정성을 기울여 지도한다면 콩나물은 시들지 않고 자랄 것이다.요즘 교사들은 참교육의 저해요인을 자꾸 외부 환경에서 찾으려한다. 30여명의 아이들도 많다고 아우성치고, 교사의 잡무가 많다고 외친다. 교육문제를 부적절한 조건과 환경을 탓한다. 그러나 참교육은 외침이 아니라 자신의 교육애를 되돌아보는데서 출발한다. 참교육은 완성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 불리한 조건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참교사인가?"를 되돌아보는 보며 교사로서 부족한 교육애를 탓해야 할 것이다. 코미디 같은 신체검사60년대의 아이들의 놀이는 다양하지 않아 주로 요즘말로 전통놀이였다. 그만큼 아이들의 여가선용이나 놀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이들의 복지라는 개념조차 없었기에 어쩌면 당연하다고 본다. 바로 농사일을 도와야한다는 게 주된 관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놀이는 주로 땅따먹기, 술래잡기, 콩 주워먹기 , 구슬치기 같은 것이었다. 흙 놀이를 하면 손이 더러워진다. 자연히 더러워진 손을 어디 씻을 곳이 마땅한 데가 없어 옷에다 손으로 쓱 문지른다. 새 옷도 며칠 지나면 더러워진다. 씻지 않은 손으로 먹을 것을 집어 먹는다. 비위생적인 놀이가 생활습관이 되었다.손 등은 시커멓다. 때가 끼면 살갗이 튼다. 피가 흐른 경우도 생긴다. 손이 이러한데 발은 더 시커멓다. 개인생활이 이러한데 학교에서 지도하는데도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지도 해야만 한다. 매 주 수요일이면 학교 보건주회를 갖는다. 검사항목을 사전에 예고하므로 학급에서 사전 지도하고 전체 조회에서 이를 다시 확인하는 절차를 갖는다. 신체검사는 복장 검사와 몸 검사로 나뉘다. 복장 검사의 중점은 "단정하고 깨끗하게" 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하위영역으로 5개 항목을 설정했다.. ① 이름표를 붙였나? ② 옷이 헤어져 너덜너덜 하지 않나? ③ 옷에 흙이 묻었나? ④ 옷에서 땀 냄새가 나지 않는 가? ⑤ 단추가 제대로 달렸나?.당시의 아이들은 목욕탕이 없으므로 좀처럼 몸을 씻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손, 발, 목 에는 때가 꺼멓게 끼었다.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고 물로도 감지 않는다. 콧물이 흘러도 그대로 놔둔다. 좀처럼 깨끗한 몸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상상하면 된다. 위생적인 생활보다 더 시급한 게 자기 몸 관리하는 습관을 갖게 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보건교육의 목표였다. 몸 검사의 중점도 "깨끗하고 아름답게"였다 . 그러기 위해서 하위영역으로 5개 항목을 잡았다.⑥ 손이 깨끗한가? ⑦ 발이 깨끗한가? ⑧ 머리는 감고 빗질을 하였는가? ⑨ 목욕을 하였는가? ⑩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가?이런 검사항목을 보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이러한 검사항목을 가지고 조사한다면 너털웃음거리의 소재가 될 게 틀림없다. 당시의 국민생활이 얼마나 비참하고 빈곤 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지표다. 반대로 지금의 아이들은 그만큼 가정환경이나 개인위생이 선진국에 도달되었음을 말하는 증거다. 그렇지만 1960년대의 국민소득은 아프리카 생활수준의 아이들이나 다름없다. 현재의 잣대로 그 당시의 아이들을 판단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아이들 수준은 바로 국민소득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나는 학급편성이 끝나고 아동 가정생활과 습관을 조사한 후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조사했다. 아무리 아이들이 하고 싶어도 단정한 옷차림을 갖추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은 단정한 아이들만 골라서 앞에 세워두고 좋은 점을 칭찬하였다. 칭찬을 받은 아이들에게 빨간 리본을 가슴에 달아주어 스스로 자기 몸을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빨간 리본을 두개 찬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아무리 지도해도 가정에서 뒷받침할 수 없는 빈곤한 아이들과 자연스레 구별이 되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 읍내에 사는 형제간이 많은 집에서 헌옷을 수집했다. 거의 1/3 아동이 입을 수 있는 여분의 옷이 수집되었다, 세탁하고 헤어진 곳은 바느질로 수선하고, 이름표와 함께 손수건도 달아 놓았다. 아이들이 콧물을 흘리거나 손을 닦을 때도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교실 뒤 칸에 정열 해 놓았다. 비 오는 날에도 입고, 보건주회 때도 입고 참석시킬 심산이었다.농번기가 끝나고 첫 번째 보건주회이다. 물론 이미 준비한 옷을 입혔다.. 몸 검사와 신체검사 결과를 실시했다. 우리 반을 검사한 교사가 한 사람도 지적 받은 아이들이 없다고 보고했다. 교감선생님도 우리 반의 아이들을 일일이 살펴보고 단정한 몸차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처음으로 전제 직원 앞에서 새내기 교사가 발표 할 영광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장학 지도시에는 반드시 우리 반을 찾았다. 용의 단정한 학급이라고 해서."문제아" 라고 부르는 아이들의 문제는 바로 보호자의 문제다 보호자의 역할이 필요한 아이들을 방치함으로써 나타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제아" 라고 흔히 부르게 되면 지도가 불가능한 쪽으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소위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다. 문제아들은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하는데 거꾸로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면 더 문제를 일으킨다. 그 당시의 문제들은 이렇게 사소한 옷 입기와 신체적 더러움을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았기에 일어난 것이다. 문화생활을 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같은 것이다. 화장실 청소는 싫어공공이용시설을 이용 하는 것도 사회적 학습이다. 공중위생 시설이 더럽다고 국민 교양수준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교양이 부족하고 공중도덕이 없다고 논란을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설을 이용하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의 화장실은 어디나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었다. 대소변은 어디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공공화장실을 별도로 둘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 때문에 어디서나 볼 일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낳아 공공시설이용에 관해 지켜야 할 기본예절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학교 화장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떻든 학교 화장실은 교육적 측면에서 깨끗해야하고, 이용하는 아이들도 예절을 지켜 깨끗이 이용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렇게 지도해야 한다. 학교에서 화장실을 바르게 사용하는 습관이 바로 가정이나 사회에 파급된다. 개발도상 국가에서는 그만큼 학교의 역할이 필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는 사회의 거울이다" 고 하지 않는가? 국가의 재정이 워낙 가난하기 때문에 교육부의 재정도 취약하기 짝이 없다. 학생 수에 비해 교실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한데 화장실을 학생 수에 비례해 지어준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배려다. 전교 학생수가 1600명이 넘는데도 화장실은 전관 과 후관 건물 사이에 각각 남녀별로 한 동씩 지어져 있을 뿐이다.남자 화장실은 앞면에 소변보는 곳은 오륙십 여명이 올라서 일렬로 서서 볼 수 있는 일자형이고, 후면에는 삼십 여개의 문짝이 있는 대변용 칸을 만들어 놓았다. 문제는 너무 많은 아이들을 수용하는 까닭에 쉬는 시간에 한꺼번에 몰려들면 소변 칸이 좁아 어린 아이들은 소변 틀에 올라가지 못하고 화장실 주변에 보기 마련이다. 하는 수 없이 시간을 조정해서 3, 4 학년은 1교시와 3교시 5, 6학년은 2교시와 4교시 로 정했다. 1, 2학년은 여자화장실 건너편에 여자용 소변보는 곳에 임시로 가리개로 쳐서 이용토록 했다.문제는 여자용 대소변 보는 곳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대변보는 곳은 대변이 꽈 차 오른 곳이 많아 들어가서 보지 않고 부근 언덕 빼기에서 보는 아이들도 많았다. 학교 부근에 사는 주민들은 항상 냄새 때문에 민원을 제기한다. 수차 화장실 증축에 건의를 하지만 예산이 없다는 답변만을 듣고 온다.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학교 고용원과 주번교사, 그리고 남교사들이 일주일동안 매달려야만 대변을 다 치울 수 있다. 그만큼 화장실 관리는 학교장에게도 두통거리의 하나이었다.학교 화장실은 공중도덕의 훈련장4학년 2학기 때 교직원 전출로 인해 화장실 청소업무가 나에게 맡겨졌다. 그토록 맡기 싫은 업무인데 관리담당을 누구에게 맡길 수 없어 내가 직접 담당했다. 화장실 입구 쪽이나 바닥에는 항상 소변이 고여 있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지 않고 주변에서 볼 일을 본다. 나는 화장실입구부터 개천 쪽으로 오물이 괴어 있는 곳을 깊이 파서 흘러가도록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구덩이에는 굵은 자갈을 넣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았다. 다시 모래위에 굵고 넓은 디딤돌을 듬성듬성 놓아서 그 위로 밟고 다니도록 했다. 화장실 바닥도 물이 고이지 않도록 파서 밖과 연결시켰다. 물이 고여 있지 않으니 냄새도 나지 않고 주변이 깨끗해서 화장실 밖에서 소변보는 일이 없어졌다.화장실 주변의 잡초들도 깨끗이 뽑고 화단을 만들었다. 대변보는 화장실에서 벌레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석유를 뿌리고 대변실 내부의 벽에는 온갖 낙서로 가득했다. 교장선생님께 건의하여 그 당시 귀한 페인트를 구입해 주도록 간청해서 학교 고용원과 몇 사람의 교사들을 동원해서 건물내외를 칠했다. 건물 밖은 울긋불긋하게 칠했고, 내부는 어두우니까 흰색으로 밝게 했다. 대변실에는 신문지를 잘라서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토록 걸어놓았다. 화장실이 어둡고 냄새나는 곳이고 더러운 곳이라는 선입견을 확 바꿔놓았다."깨진 유리창 법칙"이 있다 깨진 유리창으로 더러운 것을 던지는 심리인데 화장실도 마찬 가지다. 화장실이 깨끗하면 인간의 심리도 깨끗하게 사용한다. 본래 화장실은 더러운 곳이 아니다. 더럽게 쓰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후 달라진 화장실을 자랑하러 교장선생님은 외부 손님이 올 때면 화장실부터 안내하였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환경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는다. 사람이 깨끗한 환경을 만드는 게 아니라 깨끗한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진리를 정치가들이 알고 초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면 좋겠다. 현대화된 요즘의 화장실은 당시의 주택보다 더 화려하다. 그만큼 높은 국민소득의 산물이 아닐까? 지금 우리나라의 화장실은 만세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세계만방에 외치고 싶다.숙직은 너무나 싫어교사의 주 업무를 교수활동이라고 한다면 그 외의 일을 잡무라 한다. 교사의 잡무가운데 교수활동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일숙직 근무다. 지금은 그 용어조차 찾을 수 없지만 학교근무가 끝난 시각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아침출근시간까지 근무하는 것을 숙직이라 하고, 아침 출근시간부터 퇴근 시 까지 근무 시간을 일직이라 부른다. 숙직은 매일하나, 일직은 휴일 하루를 근무한다. 교무는 한 달 단위로 일숙직 근무자를 기계적으로 배당한다. 부득이 근무 날짜를 바꿔야 할 때는 교사들 끼리 사전 조정한다. "어찌 젖은 날이 없으랴!" 상호조절이 안된 날은 서로 얼굴을 붉히고 소란스럽다. 그런 날은 교무가 괴롭다. 할 수 없이 그날은 교무가 고역을 대신한다.숙직 담당하는 날은 근무시간이 6시이므로 7시에 교체되는 시간이 짧아서 대개 낮밥과 저녁밥을 함께 싸오는 경우가 많다. 아침밥은 교사가 사는 집 주변에 사는 아이들이 교사 집에 가서 가져오거나 집이 먼 교사들은 아침밥을 학교 고용원의 집에 부탁하여 아침을 해결하기도 한다. 두 명이 1조로 근무하는데 24학급이면 숫자상으로 12일 만에 돌아온다.그렇지만 여교사들의 근무 숫자에 따라 달라진다. 당시 읍 소재지 학교라 여교사들이 발령 받아 오는 경우가 많다보니, 남교사들은 5일에 한번정도는 숙직 근무에 임한다. 남교사들의 근무 부담은 역시 숙직근무다. 규정엔 오전근무는 면제토록 하였지만 내 학급아이들을 자습 시키거나 다른 교사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어 바로 출근하여 학습지도에 임한다. 그러니까 24시간 근무하는 셈이다. 요즘엔 일숙직 근무라는 용어를 아는 교사들이 있을까 싶다.책걸상 관리도 너무 힘들어학교에 교사를 지원하는 근무요원이 없기 때문에 책걸상을 수선하는 일도 교사들의 몫이다. 2인조 나무책상이고 의자라 일년 사용하게 되면 삐꺽거리는 고장난 책걸상이 수두룩하다 또한 매년 고학년과 저학년 교실이 바꿔지면 학생들의 체위에 맞도록 높이를 조정하여 학급에 배정하는 일도 한다. 고장난 책상과 의자는 못질을 하고 책상표면을 말끔하게 대패질도해서 교실에 돌려보낸다. 깨진 유리창도 보수해서 갈아 끼워야한다. 가장 힘든 일은 전학생이 오면 책걸상도 배정해야 하는데, 어느 교실에 남고 부족한지를 알아야 하고 또 이를 옮겨줘야 하는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 모든 교과의 교수 학습 자료도 손수 제작하여야 하고 학교내외의 교육환경도 깨끗이 관리해야 한다. 또 학교 내의 수목관리, 실습지관리는 물론 교내외의 청소업무와 환경정리도 교사들의 담당이다.이렇듯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교사보다 잡무에 능력 있는 교사들이 우대를 받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선 교사들이 턱없이 부족한 터에 일인다역의 교사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학교장으로서도 학교경영상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가난한 국가가 가난한 학교를 만들었고 그에 따라 교사의 근무환경도 악화시키는 원인이었음은 어찌 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오늘날 학교의 근무환경은 너무나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만큼 국가의 경제적 부가 창출되었음을 말한다. 교사가 올바른 국가관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결수업 분반수업 합동수업-- 그런 수업도 있나?무슨 교육 전문 교육 용어인 줄 알게다. 실제 교육학 대사전에도 없는 용어다. 1960년대에 학교에서 쓰이던 용어다. 한 사람의 교원도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는 바로 교사의 결근대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24명의 교사가운데 개인사로 인해 공가, 병가 또는 출장이 매일 발생 한다.는 점이다. "오늘의 보결수업을 누가 담당해야 할 것인가" 를 매일 아침 결정해야 하는 교무는 난감하기 짝이 없다. 지금처럼 교사들에게 핸드폰이 있다면 사전에 조치할 수 있을 것인데, 당시엔 그런 통신기기가 없어 9시까지 출근부에 날인이 없으면 그때서야 부랴부랴 수업담당자를 지명하게 된다.해당 학년의 담임이 결근하게 되면 우선 수업형태를 결정해야 한다. 4학년이상 고학년 같으면 한 시간씩 이웃 반 교사가 지도하게 되는데, 이를 보결수업이라 한다. 보결수업이 어려울 경우 해당학급 아이들을 나뉘어 각반에 보낸다. 이를 임시 분반수업이라 한다. 주로 고학년에서 보결수업이나 임시분반 수업이 진행되지만 두 개 학급이 동시에 비게 되면 옆 학급교사가 자습활동을 도와준다.저학년 담임이 결근하게 되면 가장 골치를 앓는다. 저학년 아이들의 특수성 때문이다. 저학년은 자기 통제력이 없기 때문에 자기선생님만 찾는 아이들은 다른 선생님의 지시를 잘 따르려 하지 않고, 다른 학급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도 않으려 한다. 그래서 분반 수업이 불가능하다. 오전반이 비게 되면 할 수 없이 오후반 선생님이 담당하게 된다. 그날은 녹초가 된다. 이 방법 저 방법을 동원해도 안 될 경우 전 학년을 운동장에 모여 합동수업을 하게 된다. 교과는 주로 음악이나 미술 체육을 하게 된다. 합동수업은 자기반이나 보결반이나 제대로 가르치기보다는 아이들의 안전사고나 질서유지에 주안점을 두고 가르친다.하루 이틀 정도의 보결수업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기병가나 출산교사일 경우 합동수업으로 끝낼 수 없다. 해당 학급아이들을 똑같이 나뉘어 각반으로 보낸다. 이를 분반수업이라 한다. 분반을 하게 되면 교실 안은 시장이나 다름없다. 싸우고 장난치는 통에 교사의 목소리는 목청을 올려도 교실 뒤쪽에 앉은 아이들은 꿈쩍을 않는다. 더구나 교과진도가 달라 지도하기가 난망하다. 그러기에 배운 내용을 다시 복습하는 정도로 마친다.분반수업을 하게 되면 모두 다 피해를 보게 된다. 학급 담임제의 문제점이 바로 나타난다. 교과진도를 나가더라도 담임교사의 지도력이 다르고 인성이 달라 아이들이 적응하기엔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반수업을 하는 아이들은 배운 것도 없고, 가르친 것도 없다. 그러기에 학년 초만 되면 학부모들은 병가교사, 분만교사인가를 알아보고 공공연히 배척한다. 학부모가 자녀를 위한 최소한의 학습권 주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필자도 학부모의 정당한 권리에 동조하는 편이다. 현장에서 그것을 보고 느끼고 있으니까...교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교직사회도 인간사회인데 이렇게 분반수업, 합동수업, 보결수업이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그 당시의 교사들은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 가장 비인간적인 대우는 임신 여교사에 대한 문제다. 학교장이나 교사들이 학년 초만 되면 여교사나 분만 여교사의 전입을 찬성하지 않는다. 여교사는 숙직근무 부담 때문이고, 분만 여교사는 분반수업이라는 부담에 혐오의 대상이 된다. 언젠가 임신 여교사가 발령을 받고 왔다. 분만여교사를 앞에 두고 전화로 인사발령자와 싸왔다고 한다. 얼마나 그 여교사는 난처했는지 짐작 하고도 남는다. 분만 여교사는 법정 휴업 일을 쉬지 못하고 출근하는 교사도 있고, 임신 중에 과부담으로 인해 유산이라는 아픔도 겪은 교사들도 틈틈이 발생한다. 학부모나 교장의 눈치가 어려워 출산 후 몸이 아파 더 쉬고 싶을 때는 자기 돈으로 임시교사를 쓰는 경우도 많다.뿐만 아니다 장기 동안 아픈 교사는 자기 돈으로 임시교사를 써야하고 학부형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학교로 전출을 희망하기도 했다. 교사는 건강해야 한다. 자기를 위해서도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건강한 교사가 잘 아이들을 잘 가르친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학급당 아동수를 줄여 달라" "교사근무부담을 줄여 달라" 교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고 주장하고 싶지만 그러하지 않고 현실적응을 해가면서 개선해 가려는 그 당시의 교사들은 양순한 양인가? 바보들의 집단인가? 의심스럽다. 그 당시의 교사들은 체제에 순응한다기보다 국가의 어려운 형편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줄 알았다고 본다. 그게 교사관이고 국가관이라고 본다. 가르치는 일보다 잡무가 더 많은 현실 교사는 가르치는 일이 주 업무 라고 하지만 실제는 잡무가 더 많다. 학교는지역사회의 일부라고 보기 때문에 60년대 중반에는 국가적인 과제 해결을 위해 학교에 의뢰하는 하는 일이 잦았다. 국가 사회의 문제는 곧 국민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문제는 식량자급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런데 부족한 식량을 축내는 쥐가 국민들의 숫자보다 많다는 것이었다.각 가정에 쥐약을 보급해주고 쥐를 잡도록 하였다. 모든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쥐약을 배정해주고, 그 증거로 쥐꼬리를 상자 곽에 10개 이상씩 수집해서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담임교사는 아침 일찍 출근하여 쥐꼬리를 세어 보고 완료여부를 확인하기도 했다. 또 어느 핸가는 가정에 파리가 들끓었다. 아이들이 파리채를 들고 다니면서 파리를 잡아 큰 병에 넣어 가져오도록 하는 촌극도 벌어졌다.당시의 아이들은 회충에 걸린 아이들이 많았다. 밭에서 나는 채소를 그대로 반찬으로 해서 먹기 때문이다. 부유한 가정에서는 봄가을이면 구충제를 복용시키나, 농촌의 아이들은 구충제를 구입해서 복용시킬 여유가 없었다. 아침을 굶고 오라고 해서 일제히 복용시키고 다음 날에 구제된 회충을 병에 담아오도록 해서 확인하기도 했다. 또 국가적으로 쌀의 수요를 줄인다는 의도에서 혼 분식 장려를 하고자 개인별로 도시락 검사로 이어졌다.가장 힘든 점은 한 달 동안의 검사결과를 보고해야 하는데 혼식에 협조하는 가정엔 0표, 하지 않는 가정에 x표를 해서 군청에 보고 하는 것이었다. 00의 도시락을 펴놓고 검사하는데 순 쌀밥이었다. "너 혼식을 하지 않고 또 쌀밥을 해왔구나" 하니까 "할머니가 보리밥을 싫어해요" 이럴 경우 "0표냐 X표냐" 나는 한참동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잉크로 하게 되면 고칠 수 없어서 아이들이 보는 데 앞에서는 연필로 하고 보고 할 때는 잉크로 다시 고쳤다.교사도 쉬고 싶다.각 가정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국가의 간섭은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당연히 참여해야한다. 그러나 한도가 있다. 사랑스런 제자들의 가정을 들여다보고 간섭하거나 지도 명목으로 점검하는 것은 아무리 국가적인 과제라 해도 옳은 일이 아니다. 전체주의국가에서나 할 일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존중해 주어야 하니까....가장 힘든 일이 70년대 초반인가 싶다. 비료를 많이 주어 농사를 짓게 되면 농토는 산성화가 되어 소출이 줄어든다. 비옥한 땅을 만들자는 의도로 퇴비증산 운동을 국가적으로 전개하였다. 마을은 마을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실시하였는데 실적이 우수한 학교에는 상금을 주어 학교 끼리 경쟁을 유도했다. 학교에서도 학년별 학급별 목표를 정해서 목표를 달성한 학급 아이들에게는 공책과 연필을 상금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눈물겨운 것은 꼬마 1학년이었다. 형들이나 누나들이 자기 목표를 채우는 것보다 1학년 동생들의 목표를 채우는 게 더 중요했다. 그 결과로 1학년 6개 반의 실적이 가장 높았음은 물론이다. 형과 동생의 끈끈한 우애가 돋보이는 퇴비증산 운동이었다.여름 방학이 다가오면 교사들은 오히려 더 바쁘다. 쉬는 게 아니라 더 무거운 책무가 앞을 가리고 있다. 여름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란다. 아이들에게 과제물로 풀을 개인당 20kg 씩 베어서 가져오게 했다. 교사들은 매일 출근하여 가져오는 풀을 저울로 달아 날마다 기록한다. 목표량을 채운 아이들에게는 공책이나 연필을 준다. 또 마을 과제도 수행해야 한다. 각 마을별로 아침 6시에 일어나 체조를 하고 마을청소도 한다. 책임구역을 마을별로 담당한 교사들은 아침마다 찾아가서 참석여부를 확인하고 개인별 참석카드에 날인해 주었다. 교사들은 쉬는 게 아니라 오전에 출근하는 바람에 여름철 한시도 쉬지 못하였던 기억이 아릿하다.산에 나무 심는 것이 가장 자랑스러워학교가 국가사회의 요구에 동원되는 일은 사실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식목일에 나무 심는 일도 추억의 한 뿌리로 기억되지만 학교를 지정하여 "민둥산을 푸르게" 라는 나무심기 운동은 가장 성공한 대 지역사회 활동의 하나라고 본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산은 거의 민둥산이 대부분이었다. 매년 겪는 홍수로 농사는 물론 재산상의 손실은 얼마나 보았는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국가에서는 수해, 한해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시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학교에는 담당지역의 산을 지정해서 나무심기를 시작했다.헐벗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토사를 막기 위해 잔디를 심기도 하고 군에서 배정한 은사시나무, 포프라, 아카시아 등 속성수를 심었다. 가뭄이 들면 세수 대야로 부근의 물을 날려다가 주었다. 학교에서 만든 퇴비로 묘목에 뿌려주었고 잡초도 뽑아 주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심어놓은 산이 이제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우거지는 학교림이 되었다. 우거진 산으로 변모된 것을 보면 그것만은 잘 한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다.1960년대의 학교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벌써 내 나이가 80줄에 들어섰다. 지금 내 나이는 돌아가신 할아버지 나이보다 더 많다. 그만큼 "오래살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나는 덤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역사책에서 배운 시대의 변화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가 수 천 년에 걸쳐 진화해 왔다. 그런데 수천 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변화를 불과 80년의 세월 속에서 다 맛보았다. 그만큼 격동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80년의 세월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고 싶다. 한 세대에 이렇게 변화가 빠른 국가는 지구상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60년대의 보릿고개는 지금은 들을 수 없는 용어가 되었지만, 초근목피로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우리 조상들의 슬픈 배고픔의 역사를 대변하는 용어 그 자체이었다. 70년대는 통일벼라는 다수확 품종을 개발하여 배고픔을 어느 정도 면하게 되자 혼 분식을 장려하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80년대는 쌀밥은 부자들만이 먹을 수 있다는 관념을 깨뜨려 누구라도 어느 가정에서라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90년대는 비로소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안정감이 국민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2000년 대 부터는 식단을 짜는데 "건강식을 어떻게 짜느냐" 로 국민들의 관심이 바뀌어 쌀보다는 영양식을 중시하는 시대로 건너뛰었으며 2010년대에는 세계의 유명한 식품회사들의 음식 맛을 평가하는 선진 국민이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를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살폈다. 과거가 현실 같고 현실이 과거를 닮은 것 같아서 우리 세대를 가리켜 "낀 세대"라고 한단다.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자꾸 즐겁고 유쾌한 일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서럽고 불쾌하고 가슴 아픈 일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가슴앓이다. 과거를 붙들고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시간만 축내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지만 나의 초임 병아리 교사시절의 경험만은 오늘의 현대화된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언젠가 초등학교 교사의 한 말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우리 반의 학생수가 31명입니다. 선진국의 학생 수에 비해 많습니다." 말하면서 "학생의 학습권과 교사의 교수권을 제대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5명 정도가 되어야한다." 고 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면서 들려주고 싶을 말을 꾹 참았다. "나는 70명을 가르친 적도 있는데...."

2020-07-20 18:33:05

대구예술발전소, 무더위 잊을 다양한 장르 공연 펼쳐

대구예술발전소, 무더위 잊을 다양한 장르 공연 펼쳐

대구예술발전소는 낮 시간에 즐기는 마티네 콘서트 등 풍성한 공연을 펼친다.마티네 콘서트의 첫 무대는 국악밴드 나릿의 '대구를 노래하다-령바람 쐬러가자'란 제목으로 22일(수) 오전 11시에 수창홀에서 열린다. '령바람 쐬러가자'는 대구 근대골목의 숨은 이야기를 국악으로 재해석한 공연이다. 350여년 전통의 약재시장 약령시, 민족저항시인 이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을 차용한 '봄의 염원', 대구 최고의 번화가 동성로, 중구 종로에 위치한 희움일본군위안부 역사관 등 대구의 오랜 이야기와 음악을 들으며 대구근대골목을 생각해보는 공연이다.두번째 마티네 콘서트는 29일(수) 오전 11시 홍기쁨 앙상블의 '아코디언과 함께하는 탱고 음악여행'이란 제목으로 열린다. 탱고의 황제 카를로스 가르델과 최고의 반도네온 연주자 아스토르 피아졸라 곡을 아코디언 특유의 애잔한 선율로 감상할 수 있다.이번 공연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생활방역지침에 따라 30석으로 제한하며, 티켓링크(https://url.kr/P3WMzk)를 통해 예매할 수 있다. 관람료는 5천원. 공모를 통해 선정된 댄스공연 '북성로의 하루'는 대구시 중구 북성로의 기술 장인들의 모습을 연구하고, 그들의 움직임과 아트지협동조합만의 독특한 생각을 접목해 제작한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공연이다.공연은 25일(토)과 26일(일) 양일간 오후 4시 수창홀에서 진행되며 관람료는 무료다. 053)430-1228.

2020-07-20 15:00:46

이승익 신임 대구문화재단 대표 "재단 재산 늘리고 심사 공정성 강화할 것"

이승익 신임 대구문화재단 대표 "재단 재산 늘리고 심사 공정성 강화할 것"

"직원들에게 제 임기동안 조직 문화, 콘텐츠, 정책 기능 등 어느 분야에서든 재단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를 남기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재단을 정의할 수 있는 하나의 정체성, 대표 수식어가 하나 생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제6대 이승익 대구문화재단 대표는 '언론인 출신 네번째 대표'이다. 그는 시대정신을 읽는 능력, 변화 관리 능력, 객관화 능력 등 언론인의 세 가지 장점을 들며 "문화예술 거버넌스 확립의 적임자"라고 말했다.이 대표는 재단의 현 주소에 대해 "외부의 평가에 비춰 봤을 때 재단은 대표직을 완주하지 못하고 떠난 전임 대표들로 인한 CEO 리스크, 조직 안의 줄 세우기 문화와 전문성 부족 등의 이유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해왔다"고 진단했다.그는 "재단 출범 목표를 다시 되돌아봐야 한다"며 "재단은 문화예술 플랫폼 기능을 표방하고 출범했으며, 앞으로 예술인과 문화기관들이 더 자유롭게 놀 수 있게끔 운동장(저변)을 넓히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이 대표는 재단 재산(기금) 확대가 필수라고 보고 있다. 현재 재단 재산은 예금 자산 217억원으로 출범 초와 큰 변화가 없다. 이 대표는 재산을 임기 3년 이내 300억원, 2029년까지 500억원으로 불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재산이 확보돼야 목적성 사업 외에 자체 사업을 꾸리는 등 자립 기반을 넓힐 수 있다"며 "시로부터의 출연금 확보 노력과 동시에 대구FC 사례를 참고해 문화 메세나 운동을 활발히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그는 지원 사업 수행 기관으로서 심사의 투명성, 공정성 확보가 기본 과제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예술인들이 지원 사업 심사에 대한 의구심이 많이 표출한다"며 "특히 심사인력풀을 늘려달라는 요구가 많고 심사위원의 측근 지원 등 셀프심사 우려도 불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선택적으로 심사 결과를 오픈하고, 탈락자를 대상으로 한 멘토링을 진행하며, 중앙 정부 사업을 끌어와 추가적인 재원을 확보하겠다고 했다.코로나19로 예술인 복지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문화 예술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시대 요구에도 발 맞출 계획이다. 신성일 영화제, 골목 오페라 등 이벤트성 일자리를 확대함과 동시에 실력과 아이디어만 가진 예술인에 대한 인큐베이팅 시스템도 마련할 방침이다.

2020-07-20 14:49:25

[오늘의 역사] 1798년 7월 21일, 나폴레옹 피라미드 전투 승리

[오늘의 역사] 1798년 7월 21일, 나폴레옹 피라미드 전투 승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루크군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했다. 잘 훈련된 프랑스군 5개 사단은 각각 방진을 구성하고 포병과 머스킷 소총의 직사화력으로 무모한 돌격을 감행한 맘루크 기병들을 물리쳤다. 이 전투로 700년 동안 폭력으로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루크들은 종말을 고했으나 영국의 넬슨 제독이 나일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게 승리를 거두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중동 정복을 포기해야 했다.박상철 일러스트레이터 estlight@naver.com

2020-07-20 14:31:22

갑을구미병원, 코로나19 재확산 속 헌혈로 ‘숭고한 10분의 휴식’

갑을구미병원, 코로나19 재확산 속 헌혈로 ‘숭고한 10분의 휴식’

KBI그룹(부회장 박효상) 갑을구미병원은 20일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혈액수급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헌혈 행사를 진행했다.갑을구미병원 임직원들은 이날 각자의 휴식시간에 자발적으로 헌혈에 참여해, 생명 존중과 나눔을 실천했다.헌혈에 참가한 갑을구미병원 관계자는 "코로나19 감염 환자는 치료받을 수 있는 시간이 있지만, 의료현장에서는 당장 수혈을 받지 못하면 생명이 위독한 중증환자들도 많다"며 "10분간의 헌혈 동참이지만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한편, 갑을구미병원은 구미시 3공단 국가산업단지 내에 위치한 중추신경계재활치료 및 종합검진 특화병원으로 MRI·CT·초음파 등 최신 기종의 의료 장비를 갖추고, 2층에 독립된 건강검진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2020-07-20 14:24:27

농협구미교육원, 농협직원 및 지역민 대상 온라인(비대면) 교육 시작

농협구미교육원, 농협직원 및 지역민 대상 온라인(비대면) 교육 시작

농협구미교육원이 코로나19 재확산 예방과 지역민의 사이버교육 요구에 대한 해소를 위해 지역 최초로 온라인(비대면) 교육을 시작했다고 20일 밝혔다.김병순 농협구미교육원 원장은 "농협 임직원뿐 아니라 지역민과 농업인을 대상으로 비대면 교육을 점차 확대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DT(Digital Transformation) 리더 농협교육원으로 거듭나 '함께하는 100년 농협'을 구현하겠다"고 했다.

2020-07-20 14: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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