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매일신춘문예] 희곡 '32일의 식탁'

당선인 정승애

▶등장인물

해진(54, 여, 윤지의 모)

윤지(20대 후반, 여)

▶때

10월 31일 밤 11시 30분

▶곳

해진의 집, 부엌.

▶무대

무대 중앙의 4인용 식탁과 그 옆에 놓인 의자 2개. 식탁의 왼쪽에는 요리한 흔적이 가득한 싱크대와 조리대가 놓여있다. 식탁 뒤편에는 일자가 크게 적힌 달력과 윤지와 해진의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달력의 일자는 31일로, 오래된 듯 누렇고 얼룩진 모습이다. 가족사진 속 해진은 무대 위의 해진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액자의 오른편에 세워진 현관문.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열려있다. 그 위에 커다랗게 띄워진 흰색 전자시계. 극의 진행에 따라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식탁의 오른편 구석에는 하얗고 커다란 냉장고가 있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파스텔 톤으로 구성되어있지만, 벽지나 가구 곳곳의 색이 바래있다.

막이 오른다. 싱크대 앞에 서 있는 해진. 그 주변에는 음식 재료와 접시들이 널브러져 있다. 해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서로 다른 두 개의 접시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어딘가 들뜬 기색이다.

희곡 '32일의식탁' 희곡 '32일의식탁'

해진=이참에 그릇을 바꾸든가 해야지. 쓸만한 게 없네.

한참을 고민하던 해진은 둘 다 내려놓고는 찬장에 손을 뻗는다. 이때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해진=여보세요? 누구세요? (사이) 잘 안 들려요. 여보세요?

말을 할수록 구겨지는 해진의 표정. 해진의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해진=(고함치듯) 여보세요? (전화를 끊으며) 뭐야, 왜 말을 안 해.

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은 해진은 찬장으로 다시 손을 뻗는다. 손이 닿지 않자 그는 발뒤꿈치까지 들어가며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손은 찬장 맨 꼭대기의 접 시까지 닿지 않는다.

해진=(귀찮다는 듯이) 아유, 얜 또 맨 꼭대기에 올라가 있어.

해진은 식탁 의자를 끌고 온다. 의자에 올라가서 겨우 접시를 꺼낸다. 이때 다시 한 번 휴대폰이 울린다.

해진=여보세요? 여보세요? (짜증스럽게) 장난 전화 걸지 마세요.

전화를 뚝 끊어버린 해진은 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해진=아니 바빠죽겠는데. 오늘따라 왜 이래, 진짜.

해진은 싱크대와 조리대 앞, 냉장고 주위를 바쁜 걸음으로 돌아다닌다. 그러다 문득 식탁을 쳐다보고는 깜짝 놀란다.

해진=아이고, 내 정신. 빵 꺼낸다는 걸 까먹었네.

해진은 오븐에서 빵을 꺼내 접시에 담는다. 식탁으로 가지고 가지만, 이미 가득 차 있다. 다른 접시들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빵 접시를 식탁 위로 꾸역꾸역 올려놓는 해진.

해진=(두리번거리며) 샐러드를 좀 만들어야겠네.

종종걸음으로 냉장고로 향하는 해진. 냉장고 속에 거의 몸을 들이밀고는 야채칸을 뒤적거린다. 이때 윤지가 문을 열고 무대 위로 등장한다. 검은 투피스 정장 차림이 다. 조금 열려있던 문은 이내 바깥쪽으로 활짝 열리게 된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해진에게 다가가는 윤지.

윤지=엄마.

해진=어머.

해진은 놀란 듯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윤지를 와락 껴안는다. 윤지는 순간 움찔하지만, 이내 천천히 해진의 등을 감싸 안는다. 해진은 윤지를 더욱 세게 끌어안 는다.

해진=(급히 몸을 떼곤 매우 반가운 투로) 오는데 안 추웠어? 쌀쌀하던데 따뜻하게 입지, 옷이 이게 뭐야. 배고프지? 빨리한다고 했는데 오늘따라 미용실에 손님이 많더라고. (윤지를 의자에 앉히며) 일단 앉아. 앉아있어. 금방 끝나.

윤지=(다정하게) 나 점심 늦게 먹었어. 천천히 해도 돼.

해진=알겠어. 알겠어.

해진은 대답과는 달리 더욱 분주하게 부엌을 가로질러 다닌다. 윤지는 그런 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벗는다.

해진=(다급하게) 앉아, 앉아. 앉아있어. 금방 해.

윤지=뭐 도와줄 거 없어?

해진=아냐, 그냥 있어.

윤지=(머뭇거리며) 그래도.

해진=괜찮아. 할 것도 없어.

다시 싱크대 앞으로 가는 해진. 손을 헹구며 양상추를 집어 든다. 양상추를 손질하며 윤지에게 말을 건다.

해진=(뿌듯하게) 내가 너 온다고 너 좋아하는 거 가득 차려놨어.

윤지=잡채에 등갈비 찜, 오징어 볶음, 새우전, 탕수육. 이게 다 뭐야. 뭘 이렇게 많이 준 비했어. 다 먹을 사람도 없는데.

해진=왜 없어. 네가 다 먹고 가면 되지.

윤지=(옅게 웃으며) 하여튼 엄마는 손 진짜 커.

해진=좀 이따 스테이크 해줄게. 너 고기 없으면 밥 못 먹잖아.

윤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주방을 돌아다닌다. 해진은 손을 움직이면서도 힐끔힐끔 윤지를 바라보며 말을 건다.

해진=요즘 부쩍 미용실 손님이 늘었어.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파마하는 사람이 많아졌 어. (우습다는 듯이) 확실히 부풀리면 따뜻하긴 하지.

윤지=다행이네. 장사 잘 되면 좋지, 뭐.

해진=예약 전화 받는 것도 일이라니까? 더 바빠지면 사람이라도 하나 구해야겠어. 손이 모자라 죽겠어.

윤지=진작 구할 걸 그랬다. 엄마 혼자 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지.

해진=그래도 옛날엔 할 만했어.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그렇지.

윤지는 가족사진과 달력이 걸린 벽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해진은 그런 윤지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윤지=집에 되게 오랜만에 왔는데 변한 게 없네. 다 그대로야.

윤지의 말에 갑자기 멈추는 해진의 손. 해진은 굳은 표정으로 급히 냉장고로 향한다. 문을 열고는 몸을 숨기듯 반쯤 집어넣고는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해진=(머뭇거리다가) 변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윤지=그래도.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서.

해진=다 그대로야. 달라진 건 없어. (중얼거리듯) 달라진 건 없어.

한참을 더 뒤적거리다 냉장고 문을 닫은 해진의 손에는 고기 팩이 들려있다. 해진은 인덕션 앞으로 향한다.

해진=그냥 스테이크 지금 굽자. 생각해보니까 너 좋아하는 드레싱 사는 걸 까먹었어.

윤지=나 그냥 있는 거 먹어도 괜찮아. 고기 안 구워도 돼.

해진=(단호하게) 아냐, 아냐. 금방 구워. 앉아있어. 너 배고프잖아.

해진의 기분은 전과 달리 가라앉아있다. 윤지는 그런 해진에게 다가온다. 해진은 찬장을 뒤져 꺼낸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윤지에게 건넨다. 그것들을 식탁 위로 가 져가는 윤지. 해진은 고기를 굽기 시작한다.

윤지=(장난스러운 투로) 근데 엄마, 누구 만나?

해진=내가? 누굴?

윤지=아니, 뭐, 남자?

해진=얘는. 무슨 남자야.

윤지=만나는 사람 진짜 없어?

해진=(웃으며) 아무도 없어요. 근데 왜?

윤지=그냥. 가만 보니 엄마 머리가 조금 바뀐 거 같아서.

다시 싱크대 근처로 돌아오던 윤지는 갑자기 해진의 등을 껴안는다. 등에 코를 박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는 윤지.

윤지=냄새도 조금 바뀐 거 같고.

해진=무슨 냄새?

윤지=있어, 엄마 냄새. 엄마 생각나는 냄새.

해진=좋은 거지?

해진과 윤지, 마주 보고는 웃음을 터뜨린다.

윤지=가끔 괜찮은 사람 있으면 만나기도 하고 그래.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

해진=뭐가 외로워. 너 있는데.

윤지=그래도. 난 맨날 함께 있어 줄 수 없잖아.

해진=됐네요. 그렇게 엄마가 걱정되면 연락 좀 자주 해. 자주 찾아오고.

윤지=(미안한 듯 웃으며) 힘든 거 알잖아.

해진=(조금 원망스러운 투로)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전화 한 통을 안 하고, 집 한 번을 안 찾아와. (애써 분위기를 바꾸며) 너 엄마한테 좀 너무한 거 아냐?

윤지=미안. 미안해, 엄마.

어딘가 미안한 표정의 윤지는 해진을 놓아주고 해진은 다시 고기를 굽는 일에 집중한다. 불을 조절하고, 팬을 만지작거린다. 이를 지켜보던 윤지는 손목시계를 확인한 다. 윤지가 시계를 확인할 때마다 현관문 위에 시간이 띄워진다. 11시 33분이다.

해진=내가 오늘 저녁 차린다고 얼마나 골치를 썩였는지 알아? 간만에 집에 오는 건데, 왔을 때 잘 먹이고 싶어서. 오죽하면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요리학원에 다녔어야 했나 생각했다니까.

윤지=에이. 엄마 요리 잘하는 거 동네 사람들도 다 아는데, 뭘.

해진=매번 하는 것밖에 못 하니까.

윤지=아랫집 아주머니도 맨날 엄마 김치 맛있다고 그랬잖아. 반찬도 다 맛있다고 그러고.

해진=(못마땅한 투로) 그 양반 단골 자리 던진 지 꽤 됐어. 컬도 별로고 파마 값이 길 건 너보다 비싸다나 뭐라나.

윤지=(눈에 띄게 놀라며) 진짜? 그래서?

해진=(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과장되게) 내가 그랬지. 거기 가서 하세요, 그럼. 나는 부끄 럽게 장사한 적 없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몸집을 부풀리듯 어깨를 세우며 장난스럽게 말을 하는 해진에 윤지는 허리까지 굽히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 모습이 작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그들은 매우 즐거워한 다.

윤지=엄마는 진짜. 변한 게 없어.

해진=내가 변했으면 좋겠어?

윤지=(잠시 고민하다) 아니. 그냥. 엄마는 엄마였으면 좋겠어.

해진=싱겁다, 싱거워.

그사이 다 구워진 고기. 해진이 손짓하자 윤지가 접시를 건넨다. 각자의 접시를 들고 그들은 식탁으로 간다. 식탁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차례로 앉는다. 힐끔 시계를 보는 윤지. 해진은 이를 보지 못한다.

해진=많이 먹어. 이거 다 먹고 가.

윤지=(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럼 집에 못 가는데?

해진=안 가면 되지? 오랜만에 온 김에 자고 가.

윤지=(잔잔하게 미소지으며) 안돼. 가봐야 해.

윤지는 코르크를 빼서 해진의 잔에 와인을 따른다. 포크로 접시를 툭툭 건드리던 해진은 작게 칼질을 해 고기 맛을 본다.

해진=(눌린 목소리로) 읍.

윤지=왜 그래?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손에 고기를 뱉는 해진. 윤지가 의아한 얼굴로 걱정스럽게 바라보지만, 해진은 싱크대로 뛰어가 물로 입을 헹궈내는 데 집중한다.

윤지=왜 그래? 뭐 잘못 씹은 거야?

해진=(한참 물로 입을 헹구다가) 고기 먹지 마. 딴 거부터 먹고 있어. 이거 조금 더 해야 겠다.

윤지=왜? 맛없어?

해진=(당황하며) 너무 덜 익었나 봐. 고기 날 내가 되게 심하다. 먹지 마, 먹지 마. 다시 해줄게.

윤지=냄새 많이 나? 아예 못 먹을 정도야?

해진=아냐, 아냐. 내가 버터를 덜 썼나 봐. 버터 좀 더 넣으면 될 거야.

식탁으로 돌아온 해진은 윤지의 접시까지 집어 들고는 조리대로 향한다. 뻣뻣하게 굳은 해진의 표정. 팬을 다시 불 위에 올려놓는 해진. 묘하게 날이 서 있다.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바라보는 윤지. 해진은 '버터'를 중얼거리며 냉장고로 향한다. 윤지=는 냉장고 속에 반쯤 파묻힌 해진의 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본다.

해진=(갑자기 몸을 윤지=쪽으로 획 돌리며) 아니, 비싼 거로 달라고. 내가 오랜만에 딸 오니까 고기 좋은 거로 줘야 한다고 계속 말했다고. (돈을 내듯 손에 쥔 버터를 허 공에서 흔들며) 근데 한두 푼 받은 것도 아니고, 이런 그지 같은 고기를 주면 어떡 해.

윤지=(달래듯이) 그냥 끝에만 조금 그런 거 아니야? 냄새나는 거 같다가도 먹다 보면 괜 찮을 때도 있잖아.

해진=(터무니없다는 듯) 그 정도 수준이 아니야. 꽤 오래 구석에서 썩었다 나온 냄새라니 까? 오래 사 먹었다고 믿었는데 진짜 너무하네, 그 양반. 어떻게 이런 걸 판다고 내 놔?

윤지=(고깃덩이들을 가리키며) 그럼 이건 어떡해? 버려?

윤지의 말에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듯 해진의 흥분은 천천히 사그라진다. 부산스럽던 그의 행동과 씩씩거리던 말투는 사라지고, 무대 위에는 점점 차분해지는 해진의 숨소리만 남는다.

해진=(차분하게) 아냐, 살릴 수 있어. 요리 한두 해 하니.

윤지=(무미건조하게) 진짜?

해진=(결연하게) 그럼. 할 수 있어. 버터 많이 넣은 음식 중에 맛없는 거 못 봤어.

해진은 조리대로 향한다. 버터를 듬뿍 덜어 넣고는 고기를 다시 데운다. 윤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액자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윤지=(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 잘 나왔다. 이거 찍었을 때가 3년 전이지, 아마.

해진=그렇지.

윤지=벌써 그렇게 됐네. 엄마 이때 진짜 예뻤는데.

해진=뭘 예뻐. 네 립스틱 발라봤다가 입술만 동동 뜨고.

윤지=(웃음을 터뜨리며) 아, 맞아. 엄마는 레드는 진짜 아니야. 나는 핑크가 안 어울리는 데, 엄마한테는 그게 찰떡이지. 그러고 보니 사진 속이랑 같은 옷이네?

가족사진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해진. 해진은 알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옷과 사진을 번갈아 본다.

윤지=한동안 못 본 옷이라 버렸나 했는데.

해진=(한참 말을 고르다) 그러게. 몰랐네.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같은 옷이네.

윤지=난 이 옷 좋아. 엄마한테 잘 어울려.

해진=이 옷이?

윤지=응.

해진은 말없이 팬만 만지작거린다. 어딘가 불편한 표정이다.

해진=다 됐어.

윤지=(접시를 집으며) 접시?

해진=응. 가서 앉아있어.

윤지=아냐. 내가 들고 갈게.

해진=됐어.

접시를 두 개 다 들고 식탁으로 가는 해진. 윤지는 그 뒤를 따라 자리에 앉는다. 해진은 윤지=앞에 접시를 내려놓는다.

윤지=(숨을 들이마시며) 버터 향 진짜 좋다. 진짜 다르긴 다르네.

해진=이젠 냄새 안 날 거야. 먹어 봐.

윤지=꼭 사 먹는 거 같아.

해진=(전보단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럼. 파는 것보다 훨씬 나을걸?

윤지는 웃으며 다시 와인 잔을 쥔다. 윤지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해진은 고깃덩어리를 입안에 넣는다.

해진=(입을 막으며) 욱.

윤지=(놀라며) 왜 그래? 또 냄새나?

해진=(고개를 숙이곤) 휴지, 휴지.

식탁 위엔 휴지가 없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해진은 싱크대로 뛰어가 헛구역질을 한다.

윤지=(해진에게 달려가며) 엄마. 괜찮아? 왜 그래?

계속 헛구역질을 하던 해진. 물을 마시며 두어 번 입을 헹구고 나서는 곧장 식탁으로 돌아간다.

해진=(양손에 접시를 쥐고선) 먹지 마. 냄새가 그대로야.

윤지=아니, 어떻길래 그래? 그렇게 심해?

해진=(사이) 뭔가 잘못됐어. 이게 아니야. 이렇게 구우면 안 됐어.

윤지=(답답한 듯) 엄마?

해진=(팬 위로 고기를 다시 쏟으며) 아냐, 아냐. 별거 아냐. 양념 때문인가 봐.

윤지=그렇게 심하면 그냥 딴 거 먹자. 나 고기 안 먹어도 돼.

해진=아냐, 아냐. 아냐. 다시 하면 돼.

윤지=벌써 두 번째야.

해진=로즈마리. 로즈마리면 돼. 그거면 다 돼.

윤지=(단호하게) 엄마.

해진=(중얼거리듯이) 로즈마리. 로즈마리. 로즈마리.

갑자기 찬장을 열고선 마구 뒤지기 시작하는 해진.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주로 레토르트 식품들이다. 하나하나 주워 품에 담을수록 굳어지는 윤지의 표정.

윤지=(식품들을 주우며) 죄다 레토르트잖아. 이런 거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

해진=(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이, 로즈마리. 어디에 뒀지? 그것만 찾으면 되는데.

윤지=엄마.

해진=(반갑게) 어, 찾았다. 여기 있었네.

윤지의 부름은 들은 체도 안 하며 로즈마리를 팬 위에 쏟아붓는다. 윤지는 다시 물건들을 주워 찬장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는 윤지. 시간 은 어느새 11시 45분으로 바뀌어 있다. 시간을 확인하던 윤지와 갑자기 눈이 마주 친 해진.

해진=(윤지의 품 안에서 음식들을 뺏어가며) 자리로 돌아가.

윤지=아냐, 도와줄게.

해진=(단호하게) 됐어. 앉아있어.

결국, 식탁에 앉는 윤지. 해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손목을 들어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그런 윤지를 본 해진은 다급하게 말을 시작한다.

해진=이번 크리스마스 땐 집에 올 거지?

윤지=(사이) 힘들 것 같아. 연말이잖아.

해진=그럼 설날엔?

윤지=(머뭇거리다가) 아마, 그때도.

해진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팬 쪽으로 몸을 돌린다. 한참 팬을 만지작거리던 해진은 다시 몸을 돌려 윤지를 바라본다. 이때 윤지는 다시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고 있다. 갑자기 고함치듯 말을 뱉는 해진.

해진=(빠르게) 넌 늘 그런 식이야. 난 언제나 뒷전이지. 너한테 난 중요하지도 않아.

윤지=그게 무슨 말이야.

해진=(단호하게) 아니, 넌 그랬어. 무슨 약속이, 일이 그렇게 많은지 허구한 날 밖에 있고 밤늦게 들어오고. 요즘도 그래. 찾아오지도 않으면서 연락 한 번을 안 하잖아. 이 집에 혼자 남겨진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잖아!

윤지=(안절부절못하며) 엄마, 일단 진정해. 지금 너무 흥분했어.

해진=너 나한테 너무 소홀해.

윤지=그러려던 거 아니었고, 지금껏 그런 적도 없었어. 엄마도 알잖아.

해진=알지, 알지! 내가 널 번거롭게 만들고 방해하고 있으니까. 사실 내 잘못인 거야. 내 문제인 거라고.

윤지=(시계를 곁눈질로 확인하며) 미안해.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미안해.

해진=(더 큰 목소리로) 그게 날 더 미치게 만들어! 내가 너한테 목을 매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내가 결국 네게 짐이 된다는 게 견딜 수가 없다고!

악에 받친 해진의 목소리는 무대를 가득 메운다. 이때 갑자기 인덕션의 온도 조절 경보음이 울린다. 해진과 윤지의 관심은 꺼진 인덕션으로 모인다. 팬 속의 고기는 이미 다 타버렸다. 해진과 윤지=사이에는 힘이 빠진 호흡만이 오고 간다.

윤지=(사이) 다 타버렸네.

해진=(힘없이) 그러네.

윤지=버려야겠지?

해진은 말없이 고기를 응시한다. 윤지가 시간을 확인한다. 시간은 어느새 11시 49분이다.

해진=(고기의 냄새를 맡으며) 아냐. 탄 부분만 조금 잘라내면 돼. 나머진 먹을 수 있을 거야.

윤지=그럼 반 이상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해진=(사이) 생각보다 맛있을 수도 있지.

윤지=(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말?

가위를 찾는 해진의 손을 잡는 윤지. 해진은 순간 굳은 얼굴로 윤지가 잡은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제법 큰 소리로 숨을 고르는 해진. 고기를 단숨에 쓰레기통에 버린 다.

윤지=엄마.

해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기 시작한다. 윤지는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진의 호흡이 고르게 변하고, 그의 힘으로 다 시 일어날 때까지 그저 곁을 지킨다.

해진=(억지로 지은 웃음을 지으며) 냉장고에 고기는 많아. 다시 하면 되지. 다시.

윤지=괜찮아. 있는 거 먹어도 돼.

해진=아냐. 이번엔 맛있게 할 수 있어. 아까랑 다른 부위고, 얘가 더 맛있는 거야.

씩씩한 걸음으로 냉장고로 간 해진은 냉장고를 뒤져 고기를 찾아낸다. 큰 덩이의 붉은 고기를 한 손에 가득 쥐지만, 금세 해진을 따라온 윤지의 손에 고기를 빼 앗긴다.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해진과 윤지. 그러나 해진은 윤지에게서 고기를 빼앗 지 못한다. 해진은 허망한 얼굴로 윤지를 바라본다.

해진=(다시 인덕션 쪽으로 향하며) 그럼 파스타 해 먹자. 너 토마토 소스에 해산물 잔뜩 들어간 거 좋아하잖아.

윤지=집에 해산물 없잖아. 소스도 없고.

해진=(찬장을 열며) 아냐. 냉동실 뒤져보면 나올 거야. 소스는 찬장에 있어.

윤지=(시계를 확인하며) 오래됐잖아. 못 먹어, 이젠.

해진은 꿋꿋하게 찬장을 뒤진다. 찬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건들이 다시 우수수 떨어진다. 바닥에 흩뿌려지는 레토르트 식품들. 윤지는 해진의 두 팔을 끌어안아 행동을 저지한다.

윤지=엄마. 나 파스타 안 먹어도 괜찮아. 별로 안 먹고 싶어.

해진=아냐. 놔봐. 찾을 수 있어. 금방 한다니까?

해진은 윤지의 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하게 저항한다. 겨우 빠져나온 해진. 다시 찬장 속을 헤집기 시작한다.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르고 거친 몸짓이다.

해진=(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냥 하면 되는데 너는 왜 호들갑을 떠니.

윤지=엄마, 인제 그만해도 돼.

해진=(매우 흥분한 투로) 왜? 나는 이 식사를 완벽하게 만들 거야. 오늘 저녁은 최고의 만찬이 되어야 한다고!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라고!

찬장을 뒤집어 놓는 해진의 손길에 봉지 입구가 열려있던 파스타 면이 바닥에 잔뜩 흩뿌려진다. 순간 윤지와 해진의 시선이 모두 모인다.

해진=다른 거 먹자.

윤지=엄마.

해진=(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럼 해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윤지=엄마.

해진=집에 새우가 있었나. 냉동실 뒤져 보면 나올 거 같은데.

윤지=엄마.

해진=근데 마늘이 간마늘 밖에 없는데. 편마늘이 필요하잖아. 네가 좋아하는 그, 뭐지, 그 거 하려면.

윤지=(힘주어 꾹꾹 눌러 말하며) 엄마.

해진=그거 말고 다른 거 할까? (냉장고 쪽으로 향하며)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를 알아야 지.

윤지=(한숨 쉬듯) 엄마.

해진=(우뚝 멈추어 서며) 엄마. 엄마. 엄마! 제발, 엄마 소리 좀 그만해!

해진은 윤지에게 다가가 손목시계를 풀어 던진다. 현관 위엔 11시 56분이라고 띄워 져 있다.

해진=너는 나와 함께 있는 게 즐겁지 않니? 행복하지 않아?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울 음을 터뜨리며) 지금까지도 넌 떠날 궁리만 하고 있어.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만 한 다고!

윤지=곧 가봐야 하니까. (건조한 투로) 시간이 다 됐어.

해진=(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윤지에게 매달리며) 얘는, 어딜 간다고 그래. 해놓은 거 한 입도 안 먹었잖아. 이따가 보내줄게. 응? 밥 한 끼만 먹고 가. 오늘 저녁 한 끼만 먹고 가, 엄마랑. 응?

윤지=(조금 동요하다가) 시간이 없어. 미안해.

해진=(윤지를 억지로 식탁으로 잡아끌며) 앉아, 앉아. 우리 밥 먹자. 응? 윤지야, 제발.

말을 다 마치지 못한 해진은 윤지의 손을 잡고 통곡하기 시작한다. 해진의 옆에 서서 이를 바라보는 윤지.

윤지=(감정을 애써 누르며) 엄마가 그토록 기다리는 32일은 오지 않을 거야. 엄마가 얼마 를 기다리든 그날은 오지 않아. 애초에 (사이) 그런 날은 없으니까.

해진=(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왜 그런 말을 해. 네가! 그런 말을 나한테 어떻게 해! 너는 내 딸이잖아. 내 뱃속에 나왔잖아! 그런데 날 떠난다는 말을,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그렇게 태연하게 해!

윤지=(느리지만 또렷하게) 적어도 나는 꼭 해야 하는 말이니까. 엄마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해진=(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리며) 어떻게, 그래도. 어떻게.

윤지의 손을 놓친 해진은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엎드린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윤지는 와인 병과 잔 두 개를 가져온다.

윤지=(다정하게) 고기 오래된 거니까 먹지 말고 그냥 버려. 파스타 면도 뜯어놓은 상태 그 대로잖아. 개봉한 상태로 오래 두면 못 먹는 거 알면서. (해진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달력도 바꿔야겠다. 이제 11월이니까.

 

희곡 '32일의식탁' 희곡 '32일의식탁'

해진의 울음소리는 잦아들었지만, 몸은 미동도 없다. 윤지는 해진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등 위에 엎드린다. 해진이 못다 한 말을 들어주듯 윤지의 오른쪽 귀는 등과 맞닿아 있다.

윤지=(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미안해.

윤지가 몸을 일으키자 해진은 천천히 일어나 윤지와 눈을 맞춘다. 잔에 와인을 따르는 윤지. 해진은 자신에게 건네진 잔을 조심스레 받아든다.

윤지=(미소를 지으며) 고마워. (잔을 내밀며) 올해도.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두 개의 잔. 자리에서 일어나는 윤지를 따라 일어나는 해진. 윤지는 바닥에 던져진 시계를 주워 시간을 본다. 11시 58분. 해진은 무대 끝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 나온다. 해진에게 비치는 조명.

해진=(객석의 먼 곳을 응시하며) 생일에도 야근을 시키는 회사가 어디에 있냐고 했어요. 너무하다고 정도 없다고 그랬어요, 제가. 그랬는데 (사이) 6시 반쯤 연락이 왔어요. 일이 일찍 끝났다고. 생일이란 걸 알았는지 그냥 기분이 좋았는지 과장이 일찍 가 라고 했대요. 어찌나 기쁜 목소리로 얘기하던지 덩달아 나도 들떠서 장사를 일찍 접었어요. (황홀한 꿈을 꾸는 것처럼) 맛있는 거 먹고 오랜만에 얘기나 나누려고 했죠.

윤지=(시계를 두 손으로 꼭 쥐며) 꼭 전해주고 싶었어.

해진=(갑자기 꿈에서 깬 사람처럼)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양손 무겁게 집으로 돌 아가는데 전화가 울리는 거예요. 나중에 받으려고 계속 걸어가는데 쉼 없이 울리더라고요. 울고 있었어요. 제발 받으라고, 받아야 한다고, 벨이 소리 내서 울고 있었어요. 근데 나는 그걸 몰랐어.

윤지=(해진에게 다가가며) 말해주고 싶었어.

해진=가끔 생각해요. 제가 전화를 일찍 받았다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허탈하게) 꼬박 반년 만에 겨우 얼굴 보는 거였어요.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게 나였다면, 차라리 나였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했어요.

윤지=엄마의 시간은

해진=나의 시간을 주고 싶다고요.

윤지=계속 흘러가야 한다고.

해진=(감정을 터뜨리며) 겨우 28살이었어요. 그토록 바라던 곳에 입사해서 이제 막 꿈을 펼칠 때였다고요. 한창 아름답고 눈이 부실 때였단 말이에요! 어떻게 처음 세상의 빛을 보았던 날, 그 빛을 다시 앗아가 버릴 수가 있어요? 왜 하필 우리 애였

윤지=(해진의 말을 끊으며) 엄마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어.

윤지는 해진의 손에 반쯤 깨진 시계를 쥐여준다. 쫙 핀 손바닥 위에 놓인 시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해진. 윤지는 그런 해진을 바라보다 현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윤지=엄마.

해진은 시계에서 눈을 떼 윤지를 바라본다. 웃고 있는 윤지와는 달리 해진의 표정에는 원망과 슬픔, 애원이 뒤섞여있다.

윤지=(해진과 눈을 맞추며) 갈게.

해진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여준 윤지는 망설임 없이 문밖으로 퇴장한다. 문은 윤지가 등장하기 전처럼 조금 열려있다. 그 위에 12시를 알리는 시계. 해진은 문을 응시하다 허리를 굽혀 숨을 몰아쉰다. 해진의 호흡엔 이상한 쇳소리가 섞여 나온다. 한참 숨을 고르던 해진은 갑자기 무엇에 쫓기듯이 부엌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식탁을 비우고 엉망이 된 바닥을 치운다. 이때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 리. 해진은 현관문 밖으로 퇴장한다.

피자 박스를 들고 부엌으로 다시 들어온 해진. 이제 현관문은 완전히 닫혔다. 뚜껑을 열고 물끄러미 피자를 바라보던 해진. 이내 한 조각을 집어 입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한다. 해진은 우적우적 피자를 씹는다.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서. 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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