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매일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소감 심사평

희곡 당선작= 제목: 밀항

 

◇ 등장인물

 

소녀 (10대 후반)

할아버지 (80대 후반)

남자 (40대 중반)

목소리1 (30대 초반) (화물칸 밀항자 남)

목소리2 (30대 초반) (화물칸 밀항자 여)

목소리3 (40대 초반) (미래항공 기장)

여승무원 1 (20대 후반)

여승무원 2 (20대 초반)

 

 

◇ 시간

방사능으로 오염된 미래

이른 겨울, 정오부터 밤까지.

 

 

◇ 공간

미래항공 비행기 밑바닥

바퀴집

 

◇ 무대

바퀴가 들어가 있는 바퀴 집의 내부

 

 

상수 중앙에는 비행기 바퀴가 올라가 있다. 바퀴는 거대한 지구본 모양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소녀는 바큇살에 밧줄을 연결해 그네를 타듯 매달려 있다. 상수 왼편에는 기내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하수에는 여행용 가방들과 짐들이 수북하다. 바퀴 집 바닥에는 창문이 하나 있다. 소녀는 그 창문을 여닫으며 지상을 내려다본다. 소녀의 손엔 금색 망원경과 크레파스가 들려 있다. 지상을 내려다보고 올라올 때마다 지구본에 현재 위치를 표시해 나간다. 소녀와 할아버지의 몸은 스카프로 서로 묶여 있다.

*

 

1

할아버지 닫아.

소녀 조금만요.

할아버지 찬바람 들어.

소녀 바다예요.

할아버지 떨어질라.

소녀 저길 봐요!

바누아투, 투발루, 사모아, 탕가!

할아버지 (소녀의 망원경을 빼앗아 들고) 어디

소녀 방향을 바꿨어요!

할아버지 어디, 보자.

소녀 (지구본 모양의 바퀴를 굴리며) 보세요 똑같아요!

할아버지 죽은 고래 떼구나

소녀 (망원경을 건네받으며) 그럴 리가.

할아버지 지난번에는 표류하는 군함들을 가지고 섬이라더니

빌어먹을, 이번에도 방향이 틀린 것 같구나

 

소녀, 바퀴 집 바닥 밑으로 더욱 기어 들어가고 할아버지는 소녀의 발을 잡아당긴다. 소녀의 몸이 꼭 끼인 듯 움직이지 않자 기둥에 자신의 발을 얹고 지렛대의 원리로 소녀의 몸을 뽑아 올린다.

 

할아버지 (하품하며) 몇 번을 확인해도 마찬가지야.

소녀 다음 경유지에서, 바뀔 거예요.

할아버지 우린, 이번 오클랜드에서 내려야 한다.

소녀 거긴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할아버지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잖아.

소녀 (하품하며) 지난번에도 막판에 기수를 돌렸어요.

할아버지 그 덕에, 우린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갔었지 다시

그 끔찍한 경험을 원하는 거니?

소녀 도착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라도요!

 

할아버지, 움츠리고 있는 소녀의 몸에 밧줄을 기둥과 단단하게 묶는다. 소녀 바퀴 집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할아버지 착륙하기 전까진 잠들지 마라.

소녀 (몸을 떨며) 그렇지만 여긴 늘 산소가 희박해요.

둘 다 숨을 쉬려면 한쪽은 잠을 자 두는 게 좋겠어요.

할아버지 이스탄불행 비행기에서 떨어진 밀항자 기억하지?

소녀 할아버지한테 십 오 불을 꿔가고 갚지 않았잖아요.

할아버지 비행기가 착륙하려, 바퀴를 빼는 순간.

졸고 있다가 바퀴 집에서 튕겨 나간 게야.

소녀 (바퀴를 꼭 붙들며) 저는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

할아버지 때를 놓친 밀항자에겐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단다.

소녀 여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예요.

할아버지 안전할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어.

소녀 미얀마에만 도착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할아버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배고프지?

 

할아버지, 소녀가 끌어안고 있는 바퀴를 만진다.

 

할아버지 꼭, 까맣게 타버린 새 같구나.

이 밑바닥에서 제일 질긴 게 있다면 이놈일 게다.

소녀 할아버지처럼요?

할아버지 (혼잣말로) 너무 오래 붙어있게 하진 않으마.

소녀 아빠는 이 바퀴를 밀항자들의 알이라 부르곤 했어요.

할아버지 여기에선 늘 기분 나쁜 냄새가 나.

소녀 (끌어안으며) 이렇게 품고 있으면 금세 몸이 따뜻해져요 할아버지도 해 봐요.

할아버지 이 바퀴를 놓쳐 많은 밀항자가 죽었지,

소녀 밀항자들이 서로 이 바퀴에 지도를 그려 두어서

우리처럼 길을 잃지 않기도 하구요.

할아버지 이 놈이 니 아비도 삼킨 게다.

소녀 아빠는 안전해요! 나는 알 수 있어요.

할아버지 네 아버지는,

죽었어!

 

소녀, 밑바닥을 열어 고개를 뺀다, 바람 소리,

 

소녀 갈 거예요. 우리 미얀마에서 만나기로 했잖아요

할아버지 (하품하며) 바람난 니 엄마를 찾아가겠다는 걸 붙잡았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다 내 잘못이다.

 

바퀴 집 밖으로 몸을 빼느라 밑바닥엔 소녀의 하반신만 걸쳐져 있다. 할아버지, 소녀의 몸과 스카프를 기둥과 꽉 묶어주며

 

할아버지 이번 타이밍을 놓쳤다간 우리도 끝장이야.

소녀 할아버지 말처럼 추락한다면 그곳에서 아빠를 만날 수 있겠네요.

할아버지 이틀간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더니 그보다 먼저 굶어 죽게 생겼어

소녀 들키면, 추방당할 거예요.

할아버지 버틸 힘이 부족해 추락하는 것보다야 추방이 건강엔 좋지 않겠니?

 

소녀, 밑바닥에서 올라와 바큇살에 동선을 끼적인다.

 

왼쪽 기내를 향해 뚫린 천장에서 안내 음성 먹먹하게 들린다.

목소리3 <아, 아, 잠시 후 저희 미래항공

경유지인 오클랜드에 정차하였다가 태즈먼해를 지나 산호해를 향해

나아갈 예정입니다. 난기류가 예상되오니 안전벨트 확인해 주십시오. .>

 

소녀 (몸을 떨며) 바꿨어요! 산호로 간다고 했어요!

할아버지 난기류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할아버지 몸에 묶인 밧줄을 푼다,

 

소녀, 돌아서면 둘이 눈 마주친다.

 

소녀,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밧줄을 못 풀게 하면 할아버지 신경질을 내며

밧줄을 다시 풀기 위해 몸부림친다 둘의 몸이 밧줄에 뒤엉킨다

바퀴가 빙글빙글 돌면서 지구본의 모습을 갖는다.

 

소녀 (하품하며) 할아버지 제발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소녀와 할아버지 주저앉는다.

 

 

목소리 등장

 

목소리2 저기, 사람이 있나요.

소녀 쉿!

목소리1 거기 누구 계십니까? 분명 소리가 들렸어 그치?

할아버지 여기 둘 있소

소녀 (속삭이며) 할아버지 조용히 하세요! 우릴 잡아가려는 건지도 몰라요.

목소리1 (웃으며) 저희 둘 뿐인 줄 알았는데 다행입니다.

할아버지 우리도 바퀴 집에 꼼짝없이 달라붙어 있지요.

소녀 할아버지!

목소리2 저희는 짐칸에 있습니다. 통돌이 세탁기 안이죠.

목소리1 처음 사과박스에 숨었다가.

한 시간 만에 질식해 죽을 뻔했지 뭐예요.

이제 견딜 만 해요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렇지.

이 사람이 아이를 가져서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중이에요.

혹시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

미얀마를 지나친 것 같아서요.

 

소녀, 바닥에 납죽 엎드려 바퀴 집 뚜껑을 살짝 연다. 지상을 내려다본다. 바람 소리.

 

소녀 이제 곧 오클랜드예요, 미얀마까지는 아직 남았어요.

목소리1 혹시 도착하면 알려 줄 수 있니?

소녀 우리도 그곳으로 가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목소리2 꼭 좀 부탁합니다!

 

목소리 퇴장

 

소녀 바퀴 집 틈으로 보이는 지상을 타이어에 그리고 있다.

아까보다 더 심하게 몸을 떠는 소녀. 비행기의 착륙 안내 음과 동시에 할아버지는

소녀의 몸을 꼭 끌어안는다. 바퀴 집이 열리며 지구본이 바닥을 향해 밀려간다.

 

자욱한 연기, 사이 바닥에서 실내를 향해 빛이 반사돼 들어오고 있다.

 

할아버지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

소녀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어요.

할아버지 시신도 못 찾았어.

소녀 아빠는 엄마를 이 바퀴 집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했어요.

할아버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를 꼭 껴안아야 했겠지.

소녀 아빠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밑바닥에서 제가 만들어졌다고 했어요.

할아버지 방사능이란 놈이 사람들 정신을 여기저기 휩쓸고 다닌 게야.

소녀 엄마를 찾아서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 봐라, 여긴 언제 밑바닥이 열려 목숨 줄이 끊어질지 모를 형장이다.

저 바퀴, 꼭 새까맣게 타버린 네 아빠의 얼굴을 닮았어.

비행기가 날아오를 때마다 댕강댕강 네 아버지의 몸이

흔들리는 것 같아서, 이제 숨쉬기도 힘들다

나는 니 아빠한테 너를 꼭 지켜 주기로 약속했어.

소녀 (울먹이며) 아버지는 죽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네 아버지가 타고 떠난 비행기가 돌아왔을 땐

그 자리에 끊어진 밧줄 몇 가닥만 남아 있었지.

 

소녀, 발을 움켜쥐며 끙끙 앓는다 할아버지 제 양말을 벗어 소녀가 신은 양말 위에 덧씌운다. 소녀, 발을 움켜쥐며 몸을 굽힌다. 밧줄이 풀어진다.

 

소녀 비행기가 공중으로 날아오를 때마다 발가락이 아파요.

할아버지 그때 내가 조금만 너를 빨리 끌어당겼더라면.

소녀 발가락이 열두 개였을 때나, 바퀴 집에 잘려서

하나도 남지 않은 지금이나 병신은 매한가지죠.

할아버지 네 아버지도 네 발가락을 참 예뻐했단다.

소녀 할아버지 나, 괜찮아요.

 

소녀,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할아버지와 마주 보며 웃는다. 그러나 한 걸음 떼기도 전에 주저앉는 소녀. 몸을 떨기 시작한다.

 

소녀 (하품하며) 너무 추워.

 

할아버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소녀에게 입혀준다.

 

할아버지 자 이렇게 서로 몸을 꼭 끌어안자.

소녀 얼어 죽을 것 같아요 바다에 빠진 것 같아.

할아버지 (소녀의 몸을 문지른다) 괜찮을 게다.

소녀 잘려나간 발가락들이 불타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 (손가락을 깨물며) 입에 물고 피를 삼켜 보거라.

소녀 (뱉으며) 할아버지 자꾸, 졸려요.

할아버지 안 되겠다 내려야겠어!

소녀 할아버지, 혼자 가지 마세요!

할아버지 곧 돌아오마.

 

할아버지, 밧줄을 소녀에게 마저 묶어 주고 일어선다. 소녀 엎어져서 멀어지는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할아버지 한 걸음 떼면 소녀 오들오들 떨면서 바퀴를 끌어안는다.

 

할아버지 계단을 타고 사각의 빛을 향해 올라간다. 교차 되며 불빛 하나가 계단을 따라 내려온다. 소녀 추위 탓에 입고 벗었던 옷을 끌어당긴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던 불빛이 소녀를 향해 다가온다. 소녀를 비춘다. 소녀 앞에서 머뭇거리는 불빛. 소녀 어느새 몸의 떨림이 멈춰 있다.

 

소녀 누구세요?

남자 나를 알아보겠니?

 

남자, 소녀 앞에 앉는다. 눌러쓴 모자를 벗자 이마에 눈이 두 개 더 있다.

 

남자 데리러 왔다,

소녀 죄송해요, 딱 한 번만 눈감아 주면 안 될까요?

미얀마 까지라도요, 제발!

남자 따라오렴.

소녀 나, 걸을 수 없어요.

 

남자, 소녀의 발을 내려다본다. 소녀의 몸을 뒤진다.

 

소녀 아무것도 없어요.

 

남자 다가가 소녀를 끌어안듯, 몸에 스카프를 푼다. 소녀 불안스레 떨며 손에 쥔 망원경을 남자에게 휘두른다. 남자 얼굴을 맞고 바닥으로 쓰러진다. 소녀, 남자의 팔을 깨물고 놔 주지 않는다.

 

남자 (비명과 함께 몸을 구른다) 젠장!

소녀 없어요, 아무것도 없다구요, 우릴 그냥 내버려 둬요!

 

남자 타이어에 몸이 부딪힌다, 지구본이 굴러간다. 이가 딱 맞은 서로 다른 색의 지도가 섞여 있다. 반대편의 지도와 소녀의 지도가 맞물려 굴러간다. 남자 지도를 천천히 굴리며 바라본다.

 

남자 (굴러가는 지구본을 보며) 제대로 돌아왔구나.

소녀 얼마 안 남았어요.

남자 함께 있던 할아버지는 어디 있지?

소녀 여기 있게 해주세요!

남자 (지구본을 손으로 멈춘다) 미안하구나

 

소녀, 기어가 타이어를 붙잡는다

 

소녀 . 아덴만, 아라비아, 래카다이브, 벵골만, 타이만

남자 너희를 찾는 데만 십 년이 걸어.

소녀 제 발가락들은 아직 태평양 어딘가를 날고 있을 거예요

남자 이제 찾을 수는 없을 거야, 그만 올라가자

 

떨어지지 않으려는 소녀와 타이어에서 떼어 내려는 남자의 실랑이 끝에 남자가 소녀를 놓는다

 

남자 이제 비행기가 이륙한다 대부분의 밀항자가

이때 의식을 잃거나 동사한 제 몸을 비행기 밖으로 놓쳐 죽는단다.

 

남자 할아버지는 어디에 있니?

소녀 그런 식으로 저희 아버지도 데려갔군요!

 

사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낸다. 소녀에게 그것을 손에 쥐여준다.

 

소녀 이게 뭐죠?

남자 지니고 있거라.

소녀 필요 없어요.

남자 아무도 널 의심하지 않을 거야.

소녀 여기에 있어야 해요!

 

소녀, 남자가 건네준 티켓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민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인다.

머리를 도리질 하고는 남자의 손에 도로 쥐어준다.

 

소녀 당신들한테 다시는 속지 않을 거야!

 

비행기 흔들린다. 바람소리, 이륙을 하는 충격으로 소녀와 남자가 뒹군다.

목소리3 <우리 미래항공은 이륙 후 앞으로 세 시간 후

필리핀을 통과해 버마(미얀마)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손님 여러분들께선

가벼운 기내식이 제공될 예정이오니, 필요한 사항이… >

 

남자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다.

 

남자 무사 하렴

 

남자, 바퀴 집이 닫히기 직전 지상으로 뛰어내린다. (암전)

 

일러스트 전숙경 일러스트 전숙경

 

 

2.

 

기내 퍼스트 클래스.

 

할아버지 로열 석에 앉아 레드 와인과 함께 영화 아비정전을 보고 있다.

소녀 눈치를 보며 두리번거리다 기내식 카트를 발견하고 달려가 허겁지겁

음식물을 먹기 시작한다

 

소녀 처음 엄마 손을 놓쳤을 땐 아무렇지 않았지. (우물거리며) 그냥 놓친 거니까. 그런데

놓은 거였어. 다른 남자랑, 엄마는, 우리가 잠든 사이에,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렸어

방사능은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퍼져버렸고, 지하철도, 자동차도, 집도 그 오염된

물에 닿는 건 녹이 슬거나 쓸모없어졌어. (우물거리며) 그리고 나도, 할아버지도

그렇게 버려진 거야. 매일 나는 울기만 했지, 그럴 때마다 내게 할아버지는 아버지 이야기를 해줬어, 아버지는 죽은 게 아니라고 아직 날고 있는 거라고.

누구도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할 수 없을 거라고 했어, 우린 여행을 시작했어.

원래 있던 곳도 방사능 때문에 더는 머물 수 없기도 해서 그랬어.

(먹고 있던 음식을 바닥에 던진다)

 

인기척이 들린다. 소녀 비틀거리며 걷다 주저앉아 바닥을 기어 구멍 속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암전)

 

3.

 

심야의 비행,

바퀴 집 안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소녀. 할아버지 바퀴 집 기둥 옆에 쓰러져 있다. 와인 병 하나가 뒹군다

 

소녀 할아버지 정신 차려요 잠들면 안 돼

할아버지 너무 졸립구나

 

할아버지의 몸이 기울어지며 바퀴 집 바닥을 누른다. 바퀴 집이 벌어지면서 거친 바람이 밀려들어 온다. 바람 소리, 문이 열리다 닫히는 사이의 금속음이 울린다. 할아버지 천천히 그 사이로 미끄러진다. 소녀, 할아버지를 꼭 붙들고 있다.

 

소녀 스카프가 풀렸어요, 어서 이걸 잡아요

할아버지 놓아주렴, 이제 너는 안전해

소녀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같이 가요!

할아버지 이제 내 도리를 다한 것 같구나.

네 아버지와 약속,

너를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어서, 이러다 같이 가겠구나.

소녀 그럴 수 없어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덜컹,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의 하체가 비행기 외부로 빠져나간다. 바퀴 집에서 끼긱 소리가 난다. 바퀴가 헛돌고 엔진과 기계음이 울린다. 연기가 흘러나온다.

 

할아버지 이대로는 바퀴집이 고장 나겠구나 그럼 여기 모든 사람이 죽는단다

소녀 우린 함께 돌아갈 거예요. 이제 곧 도착이에요.

할아버지 (소녀 뒤편을 바라보며) 네 아버지가 왔구나, 역시 여기 있었어.

소녀 너무 취했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네 개의 눈이 여전히 예쁘구나! 저 이마를 한 번 더 만져보고 싶은데.

소녀 (두리번거리며) 여긴, 우리 둘 뿐 이예요.

할아버지 저에게 티켓이 있어요 할아버지 그곳으로 데리고 갈게요 안전할 거예요.

소녀 네 자리야.

 

소녀 오른 손으로 품속을 뒤진다. 항공권이 떨어진다. 왼손에서 할아버지가 조금씩 미끄러진다.

 

할아버지 네 잃어버린 발가락들을 찾아 놓으마.

소녀 할아버지!

 

할아버지 소녀의 손을 놓고 미끄러진다. 덜컹,

바퀴 집의 문이 닫히면서 헛돌던 바퀴가 멈추고

연기도 잦아든다. 소녀 바닥에 고꾸라진다. (암전)

 

목소리3 우리 비행기는 앞으로 10분 후 버마공항에 도착합니다.

 

여승무원1,2 등장 계단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랜턴으로 빛을 비춘다.

 

여승무원1 무슨 일이래?

여승무원2 이상하지.

여승무원1 연기야 고개를 숙여.

여승무원2 항상 착륙할 때가 되면 들려와.

여승무원1 잘 비춰봐 이번엔 놓쳐선 안 돼.

여승무원2 분명 아무도 없어 봐봐.

 

여승무원1 여승무원2 뒤에 바싹 붙어 있다.

둘은 천천히 바퀴 집까지 다가온다. 자욱한 연기, 아무도 없다.

 

여승무원1 저게 뭐지?

 

여승무원1이 가리키는 곳에 여승무원2가 랜턴을 비춘다.

바닥에 소녀가 쓰러져 있다.

 

여승무원2 (흔들며) 꼬마야, 밀항자인가?

여승무원1 아니야 손에 티켓이 있어

그런데 이건, (사이) 십 년 전에 티켓인데?

 

비행기 안내음이 울린다. <우리 비행기 곧 착륙합니다. 안전벨트를 매주십시오.>

여승무원1 소녀를 끌어안고 서둘러 사다리를 올라간다. 화물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여승무원2 수상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 뒤따라 올라간다.

 

여승무원1,2 퇴장

 

바퀴집이 완전히 벌어지면서 바퀴가 기체 밖으로 회전한다 지구본의 모형으로 돌고 있다

기둥에 걸려 있던 스카프가 공중으로 한 마리 새처럼 날아간다

 

비행기, 흔들리며 착륙한다.

 

일러스트 전숙경 일러스트 전숙경

목소리3 <아, 아, 지금 우리 미래항공은 최종 목적지인 버마(미얀마), 버마 역에 도착 했습니다. 잊으신 물건이 없도록 자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소리1 (속삭이듯) 저기요,

목소리2 사람 있나요?

 

바닥에서 머리가 둘 달린 한 사람(샴쌍둥이)의 그림자가 일어선다.

조명 어두워진다.

불빛 하나가 소녀와 할아버지가 있던 자리를 향해 툭, 떨어진다.

끊어진 밧줄 조각들이 바람에 날린다. (암전.)

 

◇ 당선 소감/ 이주호

 

이주호 희곡 부문 당선인 이주호 희곡 부문 당선인

코트를 한 벌 선물 받았습니다. 이 옷을 걸친다 해서 제가 다른 누군가로 변하는 마법이 일어나진 않겠지요. 긴 겨울, 바퀴 집 안에 웅크려 있던 저의 이야기를 바깥으로 끄집어내 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당선 소식을 전해주신 매일신문 조두진 기자님 감사합니다. 글쓰기를 가르쳐주신 김경주 시인, 극작가님과 안웅선 시인님, 이강백 극작가님, 장성희 극작가님, 故윤조병 극작가님, 김창래 감독님, 황선미 작가님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고맙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 등에 업혀 창신동 골목길을 오르던 날들이, 힘들 때마다 저를 견디게 합니다. 아버지의 넓고 따뜻한 등이 있어서 저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저를 길러주신 어머니 고맙습니다.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병중에 계신 나의 할머니, 지금은 말을 나눌 수 없지만 의식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불러준 제 이름과 귀한 마음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 순간에도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는 삼촌, 고맙고 사랑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모두 고맙습니다.

함께 시를 쓰는 나의 가장 소중한 지우들, 교오, 사이, 윤효정, 전수오, 김신혜, 강소연, 채두리, 에게 감사드립니다. 부족함을 아는 미덕으로 끝까지 배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저를 가르치고 일깨워주려는 선의들을 따라 끝까지 갈등하며 걷겠습니다.

한결같이 나의 곁을 지켜주는 경세형, 제가 무엇을 하든 따뜻하게 대꾸해주는 오지의 마법사 한규 형과 경희 누나, 맛있는 거 먹자며 불쑥 안부 물어주는 리안 형님, 나보다 망원동을 더 잘 아는 속 깊은 친구 선덕, 이제야 1호점 미선씨, 늘 좋은 극으로 저를 초대해주는 배우 이훈희 (누나), 스무 살에 방 하나를 빌려 함께 시를 썼던 인연들 민국, 용각, 연휘형님, 가슴 답답할 때마다 환기구가 되어주는 친구들 김명진, 안선욱, 이인엽, 이종민, 윤동규, 하승엽, 잘 지내냐며 먼저 안부 물어주는 탁이 형, 진철이 형. 먼 곳에서, 가장 가깝게 손 흔들어주는 친구 안서연 모두 고맙습니다.

 

▶ 약력/ 이주호

1987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 희곡 심사평

 

최현묵 극작가 최현묵 극작가

매일신춘문예에 신설된 '희곡, 시나리오 부문'에 응모된 작품은 첫 공모임에도 128편이나 됐다. 다문화, 청년실업, 코피노, 난민, 재건축과 빈부격차 등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현실에 대한 응모자들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극적 감각과 글쓰기 훈련이 보이는 작품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한 작품을 중심으로 선별하여 심사를 진행했다.

 

 

김윤미 극작가 김윤미 극작가

'밀항'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 바퀴 집 내부를 무대로 삼은 독특한 작품이다. 시적인 대사와 몽롱한 사건 처리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무대 위 거대한 바퀴살 내부의 어둠과 대비를 이루며 방사능으로 오염된 미래 밀항자들을 보여준다. 기형이 된 사람들과 아버지를 찾아가는 등장인물들의 여정 등 애매모호한 상징은 혼돈을 줄 수 있으나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신선한 무대를 관객에게 경험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 심사의 의견이 일치했다. '매미허물'은 임대아파트 앞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음식으로 가난을 견디는 가정을 보여준다. 매미울음이 가득한 여름날 직장을 잃은 가장, 이중알바로 생활비를 벌며 묵묵히 가난을 견디는 아내, 과거와 현재의 장면이 별다른 계기 없이 구성된 작품으로 매미울음에 대한 남편과 아내의 상반된 해석이 묘한 여운을 준다. '가족입니까?'는 남자 상사의 성희롱에 다르게 대응하는 여직원의 세대 차이와 연대를 그린 작품이다. 인물의 전형성으로 인한 남자상사와 여직원의 단순한 대결구도는 아쉬움을 주지만 자연스러운 경상도 사투리와 긴장된 극적 상황을 끌고 가는 힘은 장점이다. '고물성'은 아버지가 주워온 고물로 발 디딜 틈 없는 단칸방에 고립된 딸을 보여준다. 간결한 대사와 단순한 살인, 인물의 변화 없이 극이 끝나는 아쉬움이 있다. 실제 인물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가 눈에 띄게 많았는데, 대상과의 거리두기가 필요해 보인다. 다큐멘터리적 소재와 익숙한 상업영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 많은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심사위원=최현묵(극작가), 김윤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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